거듭 남
2022. 6. 5. 이현래 목사
오늘 성경 말씀을 요한복음 3장에서 읽었다.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밤에 찾아와서 무슨 선한 일에 대해서 의논하러 왔다고 되어 있다. 좋은 일에 대해서라고 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이라고 했는데, 비록 나라가 로마제국에 속국이지만 아마 그 안에 내정은 종교지도자들, 그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원래 신정정치다. 70인 공회원이라고 말하는데 이 사람들이 전 국민의 영적, 육적 지도자들이다. 그런 사람이다.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밤에 찾아왔다는 것은 낮에 찾아오기가 좀 곤란하기 때문에 밤에 찾아온 것 같다. 아주 점잖은 사람이다. 좋은 일을 의논하려고 한 것을 보면 좀 더 의논해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해보자는 얘기 아니겠는가? 힘을 합해서 잘해보자는 얘기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러자고 하지 않고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연거푸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고 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가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주교로 말하면 추기경 같은 어른이다. 전 세계의 카톨릭을 지도하는 어른인데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 말이 들리겠는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3:4)하고 대번에 말을 했다. 그러니까 사람이 참 좋은 사람이다. 욕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그 설명이 우리가 지금 들어도 모르는 말이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고 했다. 그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하고 점점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한다.
그리고 니고데모가 갔는지 있는지 모르겠는데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고 했다. 민수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골짜기를 가다가 독사의 굴에서 뱀을 만나서 물려서 죽게 되었다. 모세가 기도를 했더니 이리저리 해라고 해서 만든 것이 구리 뱀이다. 놋 뱀이다. 그것을 공중에 매달아 놓아라. 이것을 본 사람들이 다 살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가 모르는 말을 했다. 어떻게 그것을 보고 살아나겠는가? 여러분들이 보는 군의관 병과 마크가 바로 그 뱀이다. 민수기를 봐서는 절대로 모른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자기로 대입을 했다. ‘나를 봐라.’ 이 말이다. 그러고 나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고 말씀했다.
“이처럼 사랑하사”가 구리 뱀을 주었다는 말이다. 구리 뱀은 누구인가? 예수님 자신이다. 예수님 자신을 준 것이 “이처럼 사랑하사”이다. 우리 집 사정을 알아준다는 말이 아니고, “이처럼 사랑하사” 구리 뱀을 주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쳐다보면 다 살아났으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쳐다보면 산다. 처음에는 다 도망가버렸다. 알고 보면 정말로 어려운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예수를 알기가 쉽지 않고 어렵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나도 평생을 그 길만 걸어왔다. 그런데 나는 그분의 좋은 것 좋은 점만 내가 취해다가 내가 좋으니까 그것을 교회에 공급했다. 그래서 받아먹은 사람은 다 좋았다.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세상에 없는 교회다. 제일 편한 교회, 자유로운 교회, 10년간 있다가 와도 똑같은 교회다. 10년 동안 밖에 나갔던 사람이, 삐져 나갔던 사람이 돌아오면 똑같은 간증을 한다. 여기 있던 사람과 똑같은 간증을 한다. 이런 교회는 세상에 없다. 나도 감히 그렇게 말하고 세상에 이런 교회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내가 모른다는 것이다. 왜 모르는가? 점점 교회가 좋아지기 때문이다. 예수님 없어도 되겠다. 목사님만 있으면 되지 않은가? 이런 생각이 돌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좋은 것이 아니고 큰 짐이었다. 나는 중매쟁이에 불과한 사람인데, 나를 보고 예수님이 없어도 되겠다고 하니까 큰일이 나지 않았는가? 그래서 내가 예수를 알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수님의 좋은 것은 다 봤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아는 바가 없다. 개인적으로 아는 바가 없다는 말은 그와 내가 통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는 완벽한 예수이다. 결점이 전혀 없는 그래서 사람들이 신이라고 생각할만한 그런 사람이다.
지금 신학자들 속에서 당연히 이것은 신화적으로 꾸며낸 사람이지 진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성서학자가 생겼다. 유명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 껍데기를 벗겨야된다, 신화적인 요소를 다 빼야한다고 낱낱이 빼고 나니까 뭐가 남는가? 그렇다고 실체가 나오는가? 안 나온다. 그러니까 참 딱하다. 껍데기를 다 벗겼는데 아무것도 안 나온다. 양파 속에 뭐가 있는가 하고 다 깠더니 아무것도 없다. 양파 그 자체가 양파이지 양파 속에 뭐가 다른 것이 들어있는가? 그것과 마찬가지다.
또 다르게 예수를 각색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신화적으로 각색하나 이성적으로 각색하나 뭐가 다르겠는가? 나는 기왕이면 그래도 가까울 때 본 사람들이 신화적으로 했더라도 그것이 더 낫지, 이성적으로 각색한 예수가 되겠는가? 그래서 나는 그것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 더 아름다운 예수를 만들어 놓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신뢰하려면 이것을 신뢰하겠다.
그런데 나는 이것도 저것도 모른다. 다 모른다. 그래서 내가 예수를 알고 싶었던것이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부활했다. 이것이 가장 큰 증거이다. 기독교를 말하면 핵심이 ‘십자가’와 ‘부활’이다. 누구한테 물어봐도 틀린 말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모르니까 부활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부활을 모르겠다. 본 일도 없고 부활이 어떤 것인지 느껴질 수 없다.
두 번째로 바울 시대가 돌아오면 우리가 함께 죽었기 때문에 함께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함께 죽은 일이 없다. 그래서 내가 로마서 6장을 강의할 때, 사람은 모두 죄인이다. 하나님 앞에 모두 다 죽은 자인데 예수님은 100점짜리이다. 우리는 50점도 안 된다. 100점짜리가 죽었는데 우리가 살았겠는가? 우리도 다 죽은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때는 그렇게 되는 것 같은데 생각해볼수록 지금 생각하면 전혀 아니었다. 바울이 헛소리한 것이 아니다. 자기는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한 말인데 우리는 그것이 뭔지 몰랐다.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아주 쉬운 일도 나는 모른다. 성령이 충만하다, 성령이 인도하신다는 것도 나는 모르겠다. 그 사람들은 진실하다. 그 사람들이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에 그런 일이 많다. 성령이 이끌어갔다는 일이 많은데, 나는 그런 일이 없다. 그래서 나는 모른다. 그러니 어디 가서 예수를 만나야 되겠는가? 만날 데가 없다.
그래서 다시 또 십자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물증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십자가밖에 없다. 그래서 십자가밖에 볼 것이 없는데 아까 신화라고 얘기한 사람도 이것만은 사실이라고 한다. 십자가에 죽은 이것만은 신화가 아니고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십자가를 볼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십자가를 봐도 내가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나는 십자가를 질 수가 없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겠는가? 나는 이미 충주 있을 때, 그렇게 기도한 적이 있다. ‘하나님, 나는 내 힘으로 십자가를 못 집니다. 나는 나약해서 십자가를 질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혹시 필요하다면 억지로라도 나를 이끌어라도 십자가에 매달면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기도했다. 십자가를 질 자신이 없으니까 그랬다.
십자가를 지고 가자고 하는데, 나는 그 말을 한마디도 못 했다. 내가 못하는데 여러분에게 가자고 하겠는가?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짊어질 힘도 없고 그렇게 나갈 용기가 없다. 그래서 나는 순교자들을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은 어떻든지 간에 주님을 위해서 죽기로 작정했다는 것은 너무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 나라가 올 때, 그분들은 큰 상급을 받을 사람들이다. 나는 못 할 일이다.
6.25 때도 순교한 사람들이 많다. 죽기를 각오하는 사람들이 많다. 천주교에서도 잡혀가면 죽을 줄 알고, 그래도 천주교 믿은 사람이 많다. 서울 한강에 가면 절두산이라고 있는데, 절두라는 말은 목을 자르는 곳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100년 동안 천주교 신자들이 수없이 죽었다. 그래도 계속했다. 우리 대구에도 그런 유적지가 있다. 팔공산에 가도 있고 여기 가창에 가도 있다. 천주교인들이 숨어 살던 곳이다. 100년을 핍박받고 겨우 조금 풀렸는데 어떻게 풀렸는가? 조선시대가 용서해준 것이 아니고, 천주교회에서 할 수 없이 제사를 지내도 좋다가 된 것이다. 천주교인들은 제사를 지내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서야 지내게 되었다.
조상제사는 우리 조상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종교이다. 천주교가 조상제사는 우상이라고 해서 못 지냈다. 100년 동안 핍박을 받은 것이 가장 중요한 그것 하나 때문이었다. 천주교가 교황청에 상신을 했다. 우리 대한민국 조선에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했더니 교황께서도 그러면 한국에서는 제사를 지내도 좋다고 허락이 난 것이다. 그러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순교를 했는가? 나는 감당 못 할 것이다. 그랬으면 나는 도망쳐 나와서 바깥에 살 사람이지 산속에 들어가서 죽기를 각오하고 있을 사람이 못 된다.
누구를 봐도 십자가, 십자가 하는데 나는 자신이 없다. 십자가를 질 자신이 없다. 지금도 그렇다. 내가 십자가를 질 자신이 없다. 십자가를 봐도 아무 감동이 안 된다. 서울에 가면 마가의 다락방에 큰 기도원이 있다. 거기서 부흥회를 많이 여는데 앞에 벽화를 그려 놓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린 것을 생생하게 그려 놓았다. 첫째 날은 회개하는 날이다. 강사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렸다고 보라고 한다. 옆에 사람이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엉엉 운다. 나는 거기도 감동이 안 된다.
나는 정말로 안되는 사람이다. 방언을 하려고 애를 써도 안되는 사람이다. 그 신비를 경험해 보려고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사람이다. 종교에서는 우등생이 아니고 열등생이다. 우등생들은 다 하는데 나는 안되니까 나는 열등생이다. C.C.C.에 들어가면 그런 것이 없을 줄 알았는데, 거기도 그 출신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어디를 가도 열심히 한다. 보통 사람들이 가진 열심과 다르다. 아주 열심히 한다. 그래서 나는 또 그것이 부러웠다. 나도 저런 은사를 받았더라면 열심히 했을 텐데 안되는 것을 어쩌겠는가.
그러다가 워치만니를 만나고 나서 아주 중요한 것을 알았다. 놀라운 은혜를 깨닫는 것이 그런 은사가 아니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람의 차이 때문에 성경을 보는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 나는 그 신비에 대한 모든 것이 싹 사라졌다. 사람이 되어야 된다. 그때부터 나의 목표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 그 길로 쭉 걸어왔다.
사람이 못 할 일은 나는 안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라고 하면 나는 못 진다.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이것이 쉬운 말인 줄 아는가? 이것은 아무나 못 한다.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못 된다.
그러니까 내가 볼 데가 없다. 생각해봐라. 어디 가서 내가 예수를 만나겠는가? 그러다가 만난 것이 지금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못 내려오고 죽은 것이다. 상식적이다. 십자가에 못 박아 놓으면 못내려오는 것이 당연하다. 뭐가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데 나에게는 너무 놀라운 일이다. 이 사람이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이 사람이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구나. 이것이 그냥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어디를 봐도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이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구나. 그런데 거기서 내가 딱 친화감이 생겼다. 야, 여기 만날 자리가 있구나. 그래서 내가 거기를 갔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서 이것을 선포했던 것이다.
나 혼자 먹을 수 있다. 다른 것은 선전하지 않아도 음식을 먹으면 누구한테 입으로 선전하는 법이다. 그래서 그 식당은 사람이 와글와글 한 법이다. 선전을 해서 그런가? 아니다. 먹은 사람이 가서 계속 입을 벌려 말을 하기 때문이다. 어디 가든지 어느 식당이 잘하는지 모르겠다 싶으면 사람이 많은 데로 가라. 그러면 잘하는 집이다. 음식은 먹고 자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예수 만나고 나서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가? 내 비천한 인간이 발견되었다. 이런 인간이 설 자리가 있구나. 이런 데 자랑 안 하겠는가? 그래서 서슴없이 내놓았다. 말로는 내가 늘 하던 말인데, 이렇게 확실하게 못 봤다. 그래서 나는 거기서 내가 만났다. 예수를 만났다. 비로소 만날 자리를 발견했다. 그렇게 얘기를 한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면 다 죽는데 무슨 새삼스럽게 죽은 얘기를 하는가? 그게 아니고 나는 동기가 다르다. 아무리 찾아도 십자가에서 예수를 못 찾겠더라. 십자가를 질 사람이 못 된다. 십자가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이니 희생이니 봉사니 이런 얘기를 끄집고 나와서 다 써먹었다. 그런데 나는 안된다. 왜? 십자가를 모르니까, 내가 못 지니까 안 된다.
십자가 진 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사랑인지 모르겠다. 내 죄를 다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졌다는데 나는 감이 안 잡힌다. 남의 죄를 지기 위해서 십자가를 졌다는 것이 나는 감이 안 잡힌다. 지금 그런 것이 아니고 옛날부터 그랬다. 남의 죄를 위해 죽었다? 남의 죄를 위해 죽었는데 어떻게 그 사람에게 혜택이 가는지 모르겠다. 돈 같으면 갚아주면 되는데 이것이 돈 문제인가? 인간 자체의 문제다. 우리가 죄를 진 것이 그런 바깥에 있는 문제 같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데 내 존재 자체가 죄가 됐다면 누가 그것을 갚아주겠는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존재적인 문제가 생겼다.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정녕) 죽으리라.”(창2:17)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은 것이다. 그랬으니까 동산 밖으로 쫓겨 난 아담은 죽은 사람이다. 아담은 누구든지 죽은 사람이다. 그 사람이 추기경이든지 70인의 공회원이든지 누구든지 다 죽은 것이다. 안 죽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왜? 하나님이 죽으리라 했다.
그러면 아담은 왜 안 죽었는가? 가인과 아벨은 왜 안 죽었는가? 성경 창세기 4장에서 800년 900년을 살았다고 했다. 자식을 낳고 죽었다, 자식을 낳고 죽었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런데 왜 정령 죽으리라고 했는가? 그렇게 죽는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은 사람이다. 죽는다는 말이 끊어진다는 말이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정녕) 죽으리라.”(창2:17) 너는 내 생명에서 끊어진다. 나와의 관계에서 끊어질 것이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아담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 버렸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래서 거듭나야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멀쩡한 사람에게 왜 거듭나라고 하겠는가? 죽은 사람이니까. 훌륭한 사람이기는 한데 죽은 사람이다.
세상에 나가면 우리 교회 형제들보다 우수한 사람이 너무 많다. 생활로도 그렇고 뭐로 봐도 그렇다. 저 사람은 우리 교회에 오면 사람들이 봐도 좋고 우리 교회 누구누구 보는 것보다 그 사람만 들어오면 빛이 확 나지 않겠는가 하는 사람이 많다. 많은데 창세기 말씀에서 보면 다 죽은 사람이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세상에 나가서 ‘당신 죽은 자요.’ 할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은 것은 목숨이 끊어진 것을 보고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는 정령 죽으리라 한 말은 그 말이 아니고, 나와 너와의 관계인 나는 사람이고 너는 하나님이라는 이 관계가 끊어진 것이다. 천년을 살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그때부터 죽은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살고있는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아담과 함께 죽었는데 이제는 예수와 함께 죽어야 한다는 그 말이다. 아담과 죽었으니까 이제는 예수와 함께 죽어야 한다는 그 말이다. 산 사람과 함께 살 것이 아니겠는가? 죽든지 살든지 산 사람하고 관계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죽은 시체에 산 사람을 묶어놓은 그런 형이 있다고 한다. 죽은 시체에 산 사람을 붙여놓으면 어찌 되겠는가? 섞어서 같이 죽는다. 얼마나 극악한 형인지 모른다. 어쩌면 이것은 십자가보다 더 극악한 형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형벌도 있다고 한다. 산 사람과 묶어놓으면 안 죽는다. 산 사람을 묶어놓으면 안 죽는다. 추울 때 묶어놓으면 따뜻하고, 산 사람과 묶어놓으면 좋다.
죽어도 예수와 함께 죽어야 되고, 살아도 예수와 함께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볼 때 산 사람은 예수뿐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연결해 줄 사람은 이 사람뿐이다.
공자님은 훌륭한 분이다. 서양 사람들은 기독교밖에 모르니까 예수님의 어록을 가지고 다닌다. 그것은 공자님 말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어렸을 때 명심보감을 읽었다. 거기 보면 여러 가지 경에서 좋은 말씀만 뽑아 놓은 책이 명심보감이다. 나는 지금은 기억 못 하지만 좋은 말씀이 너무 많다. 책 한 권이 다 좋은 말씀이다. 그것뿐이겠는가?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시전, 서전, 예전, 이것이 전부 다 주옥같은 말이다. 문제는 그렇게 못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렇게 실천이 안 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한문을 많이 공부한 사람들은 예수 믿는다고 하면 아주 얕게 본다. 옛날 제당 한약방 영감님도 야소라고 한다. 한자로 야소인데 예수를 야소라고 한다. 이것은 아주 하급이라는 것이다. 너희는 하수다. 그런 공자님도 나를 포함할 수 없다. 나를 포함해 줄 수 없다. 자기는 그런데 나를 자기와 같게 만들어 줄 수가 없다.
석가모니 대단한 사람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할 때, 그 말이 보통 말이 아니다. 유아독존이라는 말은 나만 존재한다는 교만한 말이 아니고, 내가 의식하는 것만 존재한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엄청난 말이다. 인식론이다. 이런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선생님 나를 좀 살려달라고 하면 뭐라 하겠는가? 너 이러이러한 것을 해봐. 수양하라고 하지 않겠는가? 공자님에게 가서 나 좀 사람 되게 해달라고 하면, 공부하라고 할 것이다. 학이시습이라고 배우고 익히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에게 가면 뭐라 하겠는가? 오, 그래 성경 좀 읽으라거나 기도 좀 열심히 하라고 하겠는가? 아니다. 그 점이 예수와 다른 사람이 다른 점이다. “내게로 오라.”(마11:28) 나와 함께 살면 된다고 한 것이다. “내게로 오라.” 우리는 예수 안에 가면 다 공짜다. 판이 다르니까 모든 문제가 다 해결이다. 판이 다르다.
같은 노름판인데 민화투 판 다르고, 섰다 판 다르고, 판이 다른 것이다. 같은 노름인데 판이 다르다. 그래서 민화투에서 잃은 사람은 거기서 비빌 것이 아니고 섰다 판에 오면 된다. 그래도 안 되면 포커를 치면 된다. 막걸리 먹고 안 취하면 소주 먹으면 된다. 왜 굳이 안 되는 데 가서 비비고 있을 필요가 뭐가 있는가? 어디든지 될 데로 가라. 그러면 될 데가 있다.
나 같은 사람은 될 데가 있어서 간 것이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다 안된다. 그런데 딱 한자리 될 데가 있다. 그러니까 나는 이것이 내 복음이다. 다 안 되는데 이것은 되기 때문이다. 다 안되는 데 이것만 된다.
거듭난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많다. 나 한번 거듭났는데, 그러면 거듭나라고 하는 것은 남에게 하라는 말인가보다. 그게 아니다. 거듭나고 또 거듭나고 거듭나고 또 거듭나야 한다. 아기를 낳았다고 다 된 게 아니다. 먹고 자라야 된다. 자란다는 말은 성숙이라는 말로 바꾸면 된다. 성숙해져야 한다. 아기는 낳으면 사람이지만 성숙해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거듭난 사람은 또 거듭나고 또 거듭나고 계속 거듭나는 것이다. 거듭났다고 생각하는 분은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더 더 더 거듭나야 한다. 왜 그런가? 이것이 예수를 알 때까지다. 어디까지인가? 그 사람을 알 때까지 거듭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요한복음 3장 15절을 보면 장대에 달린 놋 뱀을 보라 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면 평생 예수 만난 자리가 자기 자리이다. 누구라고 말씀드리기 좀 그렇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사님이 있는데 50만 성도에 전 세계에 팬을 생각하면 엄청나다. 그리고 우리 한국교회들, 감리교, 장로교 다 해도 밑바탕은 전부 그것이 깔려있다. 권사들은 금요일이면 어디를 가는가? 기도원에 간다. 이제는 교파 없이 천하통일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유명한 사람이다.
이분은 왜 유명해졌는가? 병 고치는 데서 예수를 만났다. 무슨 말을 하다가 들어가는 데는 병 고치는 데로 들어간다. 무슨 말을 하다가 중간에 가서 병 고치는 일로 들어간다. 그러면 그때부터 아멘이 나온다. 전에 말할 때는 아멘이 안 나온다. 그런데 병 고치는 문제가 나오면 그때부터 아멘이 나오고, 이분도 신이 나서 한다. 사람들의 요구가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
이 사람도 그것 밖에 안 된다. 나와 나이가 같은지 한 살 더 많은지 모르겠는데 돌아가실 때 보니까 파킨슨병에 걸렸기 때문에 사람이 아무 힘이 없어졌다. 설교하러 나왔는데 젊었을 때처럼 힘도 없고 뜨거운 것도 없고 그냥 말만 한다. 병 고치는 것도 그대로 하고 똑같다. 한치도 변하지 않았다. 병 고치는 자리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만일 그 자리에서 만났더라면 나도 그럴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에게로서 우리가 성숙해야 한다. 예수로, 예수까지이다. 그 말은 거듭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거듭났는데 어른만큼 자라야 한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생명이 왕성해서 하루종일 뛰어도 피곤하지 않다. 그런데 어른은 아이들을 보려면 하루종일 뛰는 놈을 보려니까 너무 힘들다. 그런데 아이들은 생명력은 왕성한데 섬세하지 못하다. 손도 섬세하지 못하고 다 섬세하지 못하다. 그러면 성숙해 갈수록 세밀해지고 완전해져 간다. 그래서 글씨도 쓰고 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현미경도 보고 하는 것이다.
왜? 늘 거듭나니까 생명이 성숙해 가니까 늘 더 새로워져 가니까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한자리에 있게 하지 않고 늘 더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한번 거듭난 경험이 있으신 분은 그걸로 끝내지 말고 더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거듭나야 되겠다는 말은 당신은 훌륭하지만 나로 한번 더 나야되겠다는 이 말이다.
우리는 예수로 거듭나야 된다. 그런데 내가 예수를 안 것만큼이다. 더 이상 갈 수 없다. 내가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가? 예수 앞길로 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만,큼 예수 아는 것만큼 나는 그렇게 성장해가는 것이다. 병 고치는 분으로 알면 거기까지이다. 귀신 쫓아내는 것으로 알면 귀신 쫓아내는 것까지이다.
이것이 사람이 많이 통한다. 인도에 가서 집회를 하는데 힌두교인들이 수만 명이 모였다. 왜 그렇게 모였는가? 병 고치려고 모였다. 통하기는 정말 잘 통하는 것이다. 거기서 끝나면 안 된다. 우리가 병을 고쳐서 육신이 건강하다고 끝나는가? 아니다. 그러니까 이것만으로 종교고 뭐고 다 초월하더라. 집회하는데 보니까 힌두교인들이 수만 명이 모였다. 나는 그것을 보고 부러워서 나도 좀 해봐야지 하고 삼각산으로 쫓아다녔는데, 내 팔자에는 없는지 나는 그것이 안 되었다. 진짜로 긍정적으로 생각을 했는데도 안되었다. 그래서 안 한 것이 아니고 못 한 것이다.
그런데 딱 한자리, 사람을 찾는다는 이 한마디에 다 날아갔다. 그리고 예수 십자가에도 아무 데도 내가 손잡을 데가 없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그래도 힘이 좋아서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예수께서 넘어지니까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갔다. 이 사람은 예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다. 그 사람은 힘이 있으니 대신 짊어지고 갔지 나한테 짊어지라고 하면 내가 먼저 죽지 짊어지고 가겠는가? 나는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안될 사람이다. 아무것도 안 되는 사람이다. 내가 생각해봐도 그렇다.
내가 장사를 해봤는데, 우리 아버님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남에게 친절하게 하고 정직하게 하면 다 잘될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해보니 안된다. 친절, 정직, 이것만 가지고 안된다. 장사하는 데는 더 다른 재주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보면서 아 나는 장사가 안 되겠구나. 그것을 알았다. 그리고 사람에게 능력이 다 다르구나. 그것도 그때 알았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하던 것을 유업으로 받아서 했는데 안된다.
내가 천만원을 가지고 물건을 사러 가면 2천만원어치 이상을 가지고 와야 한다. 왜? 물건을 팔고 나면 재고가 남는다. 보통 팔고 다시 물건 사러 나갈 때 나는 30%도 못 팔고 물건을 사러 나가야 한다. 그러면 30%의 돈이 어디 있는가? 천만원어치 사 가지고 와서 거기서 이익이 20% 이상 못 남는데 거기서 30%가지고 가면 500만원도 안된다. 이렇게 자본이 줄어든다. 그런데 앞에 있는 사람은 발이 하나 잘려진 사람인데 물건이 가득가득 찬다. 어떻게 그렇게 되겠는가? 자기 돈으로 그렇게 하겠는가? 자기 돈으로 그렇게 못한다. 외상을 많이 받아오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남은 돈으로 돈놀이를 했다. 나는 그것을 보고 놀랬다. 알고 보면 남의 돈이다. 그런데 남으니까 돈놀이를 한다. 그때 돈 빌려주면 이자가 최하 3부이다. 연 36%이다. 그 이자를 받는 것이다. 그것이 장사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것을 보고 아 능력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돈 버는 사람이 공연히 버는 것이 아니다. 다 벌 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버는 것이지 재수 좋아 버는 것이 아니다. 복권 당첨되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 하는 것은 재수 좋아서 돈 버는 것은 없다. 능력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능력이 없다.
거듭난다는 말을 단 일회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오늘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날마다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한번 거듭났으면 물론 우리는 부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라함이 부름 받았다. 그러면 이제 노선을 탄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지만 부름받은 사람의 조상이다. 부름받은 사람은 다 그와 같은 모양으로 부름 받는다. “너는 너의 고향(본토)과 친척과 아버지(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지시 할) 땅으로 가라.”(창12:1) 이때 우리는 부름받은 사람이다. 이때 뭘 짊어지고 온 사람은 따라가지 못한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이 등에 있으면 주님을 따라가지 못한다. 벗어야 따라갈 수 있다. 다 버리고 가야 강을 건널 수가 있다. 그 큰 강을 건너야 이스라엘 땅으로 간다.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강을 건넌 사람이라는 뜻이다. 강 건너온 사람이다. 강을 건너려면 내가 짊어지고 강을 건널 수 없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짊어지고 그 강을 건너지 못한다. 바닷물에 들어가면 모든 것을 다 벗어야 한다. 신발 신고 물에 들어가면 죽는다. 구두 신고 물에 들어가면 죽는다. 물에 빠지면 다 벗어야 한다. 신발도 벗고 다 벗어야 한다. 가능하면 팬티도 다 벗어야 한다. 그래야 수영을 한다.
부르신 하나님이다. 불러야 한다. 일단은 불러내야 한다. 그때 우리는 거듭났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부름받은 것이다. 이것도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른다. 일단은 노선을 탔다. 경부선 열차를 탔다. 경부선을 타면 자도 가고 놀아도 간. 그러니까 노선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인생에 노선을 잡아준 사람, 노선의 대표자가 아브라함이다. 이스라엘의 참 조상은 이삭이다. 이스라엘과 아랍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이삭 때문이다. 그때 우리 교회에 왔던 캄비즈에게 이삭을 아느냐고 물어봤더니 모른다고 했다. 아브라함은 아느냐고 하니까 안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갈라진 것을 알았다. 그 사람들은 에서는 아는데 야곱은 모른다. 이스마엘은 아는데 이삭은 모른다.
노선이 굉장히 중요하다. 에서의 노선이냐 야곱의 노선이냐 이것이 너무 중요하다. 우리가 일단 부름받아 나온 것은 너무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그 안에 와서 계속 과정을 겪는다. 세겜을 지나고 베들레헴을 지나고 그 다음에 헤브론으로 간다. 이것이 다 거듭나 가는 과정이다. 성숙해 가는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헤브론으로 갈 때까지이다.
헤브론은 교통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과의 교통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자리가 어디인가? 내가 예수 안에 포함되는 자리뿐이다. 포함되는 것이다. 죽을 때는 비참하게 죽었다.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자리이다. 예수의 실체가 그렇다. 사람들이 부끄러워서 버려버린 것이다. 희랍세계에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을 푯말로 세우고 복음전파를 하겠는가? 희랍에 얼마나 유명한 사람들이 많은 데 못한다. 그래서 예수의 신격화 운동이 있게 된 것이다. 안 하면 안 되겠으니까.
십자가의 복음은 정말 안 되는 사람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잘 되는 사람은 안 해도 된다. 나는 그렇게 말한다. 다 됐으면 하지 마라. 안 되는 사람만 해라.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는 사람만 해라. 나는 안 됐으니까 찾은 게 아닌가? 됐으면 찾겠는가? 나도 잘 나갔으면 거기로 갔다.
내가 만일 방언을 했으면 다른 길에 있을 것이다. 나도 오라는 데가 있었다. 그런데 방언을 못 해서 못 갔다. 거기는 방언이 필수 조건이었다.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성령을 못 받았다고 안 된다. 지금 생각하니까 방언을 못 한 것이 얼마나 잘 됐는지 모른다. 병을 고쳤더라면 나는 다른 길로 갔을 것이다. 안 그랬겠는가? 예수를 알 필요가 없다. 병만 고치면 된다. ‘주여 믿습니다.’ 해 버리면 그만이다. 나는 그런 은사를 헛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도할 때 너무 중요한 게 은사다.
그런데 나는 안 되었다. 이런 것 저런 것이 안 되거든 비록 부끄럽지만 못 내려와서 죽은 예수를 보라는 것이다. 거기서 뿌리를 박아 다시 나면 그게 진짜가 될 게 아닌가? 모래 위에 세운 집은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면 무너지지만 반석 위에 세운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나무도 뿌리를 어디에 박느냐에 따라서 그 나무의 수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산은 1미터 이상을 파면 다 돌이다. 그러니까 오래된 나무가 없다. 가다가 뿌리가 말라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 산에 40~50미터가 되는 나무가 있다. 몇 년 전부터 하얗게 말라 죽었다. 다른 것은 다 살아 있는데 왜 죽었겠는가? 갈 데가 없으니까 뿌리가 막혀서 죽은 것이다.
그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미국에 가니까 태평양 연안에 주목 단지가 관광지가 되어 있었다. 나무 하나의 수령이 3000년이 된다. 어떻게 3천 년을 살겠는가? 토양 때문이다. 토양과 기후 때문이다. 나무는 뿌리만 뻗으면 뻗을 때까지 산다.
열대 지방에 가면 나무들이 뻗다가 안 되면 땅에 들어가려고 가지에서 뿌리가 나온다. 인도에는 반경이 1킬로미터인가 4킬로미터인가 되는 그런 나무가 있다고 한다. 계속 뿌리를 내려서 뿌리를 박아서다. 뿌리만 있으면 사는 게 나무다.
우리도 뿌리가 깊어야 된다. 뿌리 깊은 나무를 아까 박*규 형제가 말했다. 태극기를 들고 동네를 하도 다녔기 때문에 박*규 형제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뿌리가 깊은 것이다. 얼른 나와서 출마한 게 아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뿌리를 내려야 한다. 어디다 뿌리를 내려야 되는가? 내가 못할 자리에는 뿌리를 내릴 수가 없고, 남이 한다고 거기다 뿌리를 내릴 수가 없고, 여기는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여기에 뿌리를 내리면 이것은 만세 반석이다.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다.
예수는 왜 유명한가? 그것 때문에 유명한 것이다. 공자님처럼 유명한 것도 아니고, 석가모니처럼 유명한 것도 아니다. 예수는 죽음 때문에 기초, 기본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가? 집을 짓기는 쉽다. 기초 공사를 잘해야 한다. 우리나라 집들은 밑에 지하실을 콘크리트 해서 바로 짓는다. 그래서 다 고장 난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을 보면 집을 짓는데 기초 공사를 해 놓고 3년씩인가 그냥 놓아둔다고 한다. 비를 맞히고 바람이 불게 하고 갈라질 때까지 다 갈라지게 한다고 한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 위에 다 집을 짓는다고 한다. 그래서 지하실에 물난리 나는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건물들은 금방 지어 놓으니까 건물을 지을 때마다 물이 나오고 또 나온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왜 예수를 믿는 것이 어려운가? 왜 갈수록 어려운가? 이유가 있다. 뿌리가 깊지 않아서 그렇다. 깊은 데 뿌리를 박아야 한다. 베드로를 보고 깊은 데 그물을 던지라고 하였다. 고기를 잡으려면 깊은 데 그물을 던져라. 얕은 데서 고기를 잡으면 피라미 밖에 안 걸린다. 굵은 고기를 잡으려면 깊은 데 던져야 한다.
우리 인생도 거듭나고 거듭나야 한다. 예수를 만날 때까지, 그 안에 포함될 때까지 계속 거듭나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피곤하지 않다. 갈수록 깊어지니까. 갈수록 더 좋아지니까. 갈수록 힘이 생기니까.
여러분이 한 번 경험하면 다시는 못 돌아온다. 하나의 예를 들겠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린 여자가 왔다. 자기 발로 걸어온 게 아니다. 율법학자들이 끌고 왔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8:5)하고 하며 왔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데려온 것이다. 이 여자는 죽을 여자다.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한다. 안 죽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살려면, 이 민족이 살려면 이런 여자는 없어야 되는 것이다. 이것을 허락하면 개판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당연한 말이다.
예수님은 꼼짝 못하게 될 줄 알았다. 이때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고 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다 가 버렸다는 것이다. 이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요8:10)고 하니까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8:11)고 하였다.
‘야, 그거 쉽네.’ 이렇게만 생각한다. ‘야, 그거 쉽네. 예수에게 가니까 금방 해결되어 버리네.’ 이렇게 되었다. ‘예수는 참 용서를 잘 하시는 분이네.’ 이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해 보려면 안 된다. 예수는 저렇게 쉽게 하는 데, 왜 안 될까? 그렇다고 아무 때나 가서 ‘나는 죄가 없어, 죄 없어.’ 하면서 돌아다닐 수 있는가? 그렇게 하면 미친놈이 되어 버린다. 왜 예수는 그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이 계신 곳이 달라서 그렇다. 판이 달라서다.
영어권에 들어가서 영어를 못하면 대단히 답답하다. 거기서는 아무리 영어를 하려고 해도 안 된다. 내가 한 번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따뜻한 물이 먹고 싶어서 스튜디어스를 보고 물 좀 달라고 하였다. 뭐라고 했겠는가? ‘웜. 웜 워터’ 달라고 했더니 ‘왓 웜?’ 또 ‘웜~’이라 했다.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핫 앤 쿨’하고 손으로 가운데를 가리키니까 ‘오~’하고 갖다 주었다. 답답하다. 왜 돈을 많이 주고 대한항공을 타는지 아는가? 말이 안 통하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을 타면 돈이 좀 비싸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한항공을 많이 탄다. 왜냐하면 다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튜어디스에게 물 좀 달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국에서 답답하던 사람이 미국에서 해결하려고 하면 언제 해결하겠는가? 비행기를 바꿔 타면 간단하게 해결이 된다. 비행기만 바꿔 타면 간단하다.
판을 바꾸면 아주 쉬운 것이다.
물속의 사정과 육지의 사정이 다르다. 사정이 다르다. 그것도 훌륭한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니고 사정이 다르다. 그래서 이 판에서 못 하는 것을 저 판에서는 하는 것이다. 율법이라는 판 속에서 못하는 일이 다른 판에서는 쉽게 된다. 그러니까 이것은 판을 바꾸면서 우리가 변화되어 나가는 것이다.
아브라함 시대의 판, 출애굽 시대의 판, 판이 다 다르다. 판이 다른 데마다 새로운 계시가 나왔다. 원리는 똑같다. 근본은 같은 데 방법이 달라진다. 그러니까 이 판에서 안 되고 저 판에서 안 되거든 되는 판으로 들어오면 된다. 판이 많은 데 왜 안 되는 데 가서 버티고 있는가? 그러면 쉽지 않겠는가? 판을 몰라서 그렇다.
그런데 이 판에 왜 안 들어오는가? 창피하니까. 자기가 그 안에 산다는 것이 창피하니까. 동네도 강남에 산다고 하면 세를 들어 아파트에 살아도 강남에 산다고 하면 좀 잘 사나 보다 하지만 강북에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그런 동네에 산다고 하면 부끄럽다. 어디에 사느냐고 물으면 달동네 산다는 말을 하겠는가? 집이 쪽방이라는 소리를 하겠는가? 못한다. 적어도 아파트 전세를 산다고 해야 한다. 대구 수성구에 가면 다른 곳에서 집값이 전세 값이다. 그래서 수성구 사는 사람은 어디 가서 수성구에 산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런데 어느 골짜기에 산다면 명함을 내기가 어렵다.
그런데 지금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가 내 뿌리다. 이 말을 하면 집이 쪽방이라는 말이다. 나는 쪽 방에 사는 사람이라는 말을 어떻게 당당하게 말하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당당하게 말해야 예수의 증인이다. 같이 사는 사람이라야 그 말을 하지 같이 안 사는 사람이 그 말을 하겠는가?
예수 안에 있어 보면 너무나 감사한 자리다. 진실한 자리다. 예수와 함께 한 자리인데 진정 예수를 사랑한다면 내가 지옥이라도 같이 가야 되지 않겠는가? 만일 예수를 정말 좋아한다면 옥에 있는 영들에게까지 가야 되지 않겠는가? 그가 계신 곳에 가야 한다.
옛날에 호산나 산부인과 4층에 교회가 있을 때다. 그 앞에 있는 어떤 분이 오더니 나는 모르는데 나를 아는지 ‘목사님은 내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 묻길래 ‘나는 지금 예수와 함께 사는데요. 나는 내세는 잘 모르는데 예수와 함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알아듣고서는 ‘그러면 됐습니다.’ 누가 내가 천당을 부인한다고 말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물었는데 ‘나는 모르겠지만 예수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그러면 됐네요.’ 하고는 갔다. 나는 누군지 모른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천당이 없다고 해서 우리 교회를 안 나온 사람이 있다. 천당보다 더 좋은 데가 있지 않은가? 예수 안이 천당이다. 어디 더 좋은 데가 있는가? 예수를 만나야 모든 문제가 해답이 된다. 왜냐하면 판이 달라져야 해답이 된다. 판이 달라지지 않고서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많다. 거기서는 해결이 안 되는 문제다. 영어는 거기에 머물러서 공부하면 한두 마디는 하겠지만 전혀 안 될 것이 있다.
토끼가 용궁에서 무슨 수로 살아남겠는가? 거짓말을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되지 않겠는가? 기생 라합이 무슨 수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겠는가? 거기서는 평생 있어봐야 기생 밖에 안 된다. 룻이 무슨 수로 여호와의 총애에 참여하겠는가? 10대까지 여호와의 총회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저주받은 후손이다. 그러니까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고, 이러고 따라왔다. 그래서 다윗 왕의 할머니가 되었다. 판을 바꿔야 다윗 왕의 할머니가 되지, 여리고 성에서 다윗 왕의 할머니가 되겠는가? 불가능한 이야기다.
우리는 하나님이 정한 곳, 그 판으로 자꾸 옮겨야 한다.
모판도 모판에서 이식을 해야 된다. 그래야 벼가 불어나면서 큰다. 그냥 놓아두면 꼬라지가 말이 아니다. 모내기를 하고 남은 것은 노랗게 되어서 정말 꼴이 아니다. 벼가 아니다. 이식을 해야 된다. 이식을 하면 점점 뿌리가 좋아진다. 그래서 불어나는 것이다. 옛날에 황사이식이라는 벼가 있었다. 뿌리기는 밭에 뿌려서 이종하기는 다른 데 한다. 그러면 굉장히 번식력이 좋다고 한다. 밭에다 뿌려서 뿌리가 나는 것은 논에 키우면 엄청나게 좋다고 한다. 왜냐하면 벼 자체가 수도작이라 물이 있는 데서 자라는 종이다.
제주에 가면 쌀이 너무 귀하니까 밭에 벼를 심어 놓은 데가 있다. 벼가 맛이 있겠는가? 맛이 없다. 어쩌다 그런 밭을 봤다. 그래도 제주에서 벼를 심을 수 있는 땅이 조금 있다. 그것은 누가 먹었겠는가? 원님이 먹었다. 쌀밥을 먹고 싶으면 육지로 옮겨야 한다. 처녀가 평생 시집갈 때까지 쌀 한 되를 못 먹는다는 말이 있다. 쌀이 없으니까. 요즘에야 돈이 있으면 팔아다 먹으면 되지만 옛날에는 그랬다. 그러니까 쌀밥을 먹고 싶으면 육지로 와야지 제주에서 여간 돈을 벌어서는 쌀밥을 먹기 어렵다.
예수 판으로 옮기자! 예수 판으로, 아담 판에서 예수 판으로 옮기자. 우리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쭉 옮겨 왔는데 이것이 아담 판에서 그리스도 판으로 옮기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생령(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15:45) 판이 다르다. 하나는 산 혼일뿐이고 하나는 생명주는, 살려주는 영이다. 판이 옮겨져야지 아담 판에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면 되겠는가? 천로역정이 되는 것이다. 아담 판에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본다는 것은 천로역정과 같은 고난이다.
천로역정을 유명한 책이다. 천성에 가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 중세의 유명한 문학으로 아주 유명한 문학이다. 굽이굽이 문제가 있다. 굽이굽이 해결하고 올라가야 한다. 엄청나게 어렵다. 마지막에 천성 문에 가니까 사자가 딱 있는데 도저히 못 들어가겠다. 마지막에 믿음으로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딱 들어갔더니 이게 종이 호랑이었다. 이게 천로역정의 일이다. 어려서 읽은 책이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이다.
예수 안에 들어가는데 죽기를 각오하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 인간이 별 것인가? 예수의 실체가 딱 밝혀졌다. 그 놀라운 분,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분, 이분을 우리가 알 길이 없다.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분을 만나니까 너무 가깝고 친근하다. 그렇다고 해서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던 것이 없어지는가? 그게 아니다. 그러니까 안심하고 대들어라. 창피하게 생각 말고 대들어라. 지금은 예수를 믿는 것이 창피하지 않다. 옛날에는 예수 믿는 것도 창피했다. 시골에 가면 성경책 들고 다니는 것도 부끄러워했다. 요즘에는 일부러 들고 다닌다. 기독교인들은 부끄러움이 하나도 없다.
그때는 예수를 믿으려면 그만큼 어려웠다. 핍박도 많았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도 교회 다니는 사람을 안 알아주었다. 그런데 나만 알아주었다. 나는 죽었다가 살았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예수 믿고 살았다고 동네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교회 가는 것을 아무도 비아냥거리지 않았다. 죽을 사람이 살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못했는데, 동네 사람이 다 저 사람은 어려서부터 교회를 열심히 다니더니 하나님이 살려주셨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만 몰랐다.
“거듭나지 아니하면”(요3:3),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 말을 깊이 명심할 필요가 있다. 부름 받았어도 또 거듭나고, 또 거듭나야 한다.
부름받은 것도 큰 은혜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 아브라함에게 이 말씀이 들려 왔다. 얼마나 큰 은혜인가! 모든 것을 버리고 강을 건너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인가! 거기에 확실히 모르지만 강이 두 개인데,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이 양쪽에 있다. 이것을 다 건너온 사람이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이라고 한다. 강을 건넌 사람들이다. 강을 건너야 된다. 안 건너면 못 간다. 안 건너면 갈 수가 없는 곳이다.
예수께로 가려면 강을 하나 건너야 한다. 부르심에 응해야 되고 강을 건너야 한다. 강이 다른 게 아니다. 가서 보고 비참하게 된 예수를 보고 ‘야, 저게 내 운명이구나.’ 그러면 된다. ‘나도 저런 사람이네.’ 그러면 가까워진다. 오라 가라 할 필요도 없다. 부끄러움은 그만두고 어떻게 하겠는가? 부끄러울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
예수님 시대에도 가난한 사람들만 왔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만 왔다. 그런데 실제로 인간은 뭐가 가난한가? 하나님 없는 것이 가난이다. 우리는 형상이니까 껍데기다. 속이 없으니까 가난하다. 흙은 가난한 것이다. 그 안에 씨가 없으니까. 씨가 들어와 있지 않다. 항상 씨가 들어와야 된다. 씨가 들어오면 자기는 밭이 된다. 그렇지만 씨가 없어지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다.
거기서 나는 씨를 가지고 열매를 만들어서 큰 옥수수밭을 만든다. 가을이 되면 주인이 다 가져가 버린다. 다 거둬가 버린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허망하다. 내 것도 안 되고 주인이 다 가져가 버리네, 이렇게 생각하면 인생은 허무하다. 나 같은 흙이 주인을 위해서 이 열매를 드리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영광스러운 것이다. 행복이라는 게 간단하다.
여자에게는 생명의 씨가 없다. 남자를 만나야 씨를 받는다. 씨를 받는 게 행복이다. 그래야 아기를 낳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아기는 좋지만 씨는 싫다. 요즘에 그런 여자들이 있다고 한다. 결혼은 하지 않고 아기를 키우는 방법, 지난번에 신문에 한 번 났었다. 정자은행에 가서 정자를 사다가 자기가 받아서 아기를 낳는다. 그러면 그 아기는 아버지가 없는 아기가 된다. 그렇게 아기를 키운다고 하는 여자들이 생겨난다. 시집가서 남편을 잘못 만나면 고생 실컷 하고 내가 종처럼 살 필요가 뭐가 있는가? 나 혼자 살아도 잘 사는데, 직장이 있고 퇴직하면 연금 나오고 걱정할 게 뭐가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리고 미국 사람들 이야기인데 결혼을 하고 아기는 안 낳으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아기를 안 낳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이혼했다. 그 사람은 여자다. 이혼한 것은 잘못된 것 같지만 여자다. 애기 낳는 것은 여자의 본분인데 남편이 아기를 안 낳으려 한다. 그래서 좋은 사이가 깨져 버렸다. 그러니까 여자는 항상 빈궁이다. 비어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교회는 여성이다. 남성이 아니고 여성이다.
교회가 여성이라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교회는 희랍어로 여성형이다. 남성형이 아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 앞에 가면 여성이다. 신부로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신부를 이야기한다. 신랑은 이미 있다. 신부만 필요하다. 우리는 신랑을 열심히 찾고 있는 게 아니고, 신부를 찾고 있다. 신부될 사람이 필요하다. 신랑을 찾고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신랑이 되려고 한다.
그래서 남자들은 좀 불행하다. 여자들이 교회에 많은 이유가 있다. 잘 받아들이는 이유가 있다. 빈 그릇이니까. 체질적으로 가난하다. 자기에게는 아기가 없으니까. 그런데 남자들은 남자라 해서 좋기는 좋은데, 하나님 알기 어렵다. 남자는 하나님 형상과 영광이라 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남자가 되려고 한다. 여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남자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 가면 여자다. 모두가 다 여자다. 하나님 앞에 가면 우리 모두가 다 여자다. 사람이다. 그래서 교회에 여자가 많다. 여성 동지 여러분! 감사해야 할 일이다. 자매 여러분 감사할 일이다. 교회에서는 여자로 태어난 것이 억울하지 않다. 여자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고 감사할 일이다. 남편이 좀 잘못하더라도 감사하고 살기를 바란다. 딱 내 마음에 맞는 남편이 어디 있겠는가? 좀 마음에 안 맞더라도 영원히 만족할 남편을 우리가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참 남편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판이 중요하다. 거듭나면 판이 중요하다. 어느 판에서 거듭나느냐와 어느 판으로 가느냐가 중요하다. 아브라함의 씨가 다 한 판으로 가지 못했다. 한 편은 다른 판으로 갔다. 다른 판으로 가 버리면 헛일이다. 서울에서 출발하기는 다 같이 남쪽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대전에 오면 갈라져 버린다. 호남선과 경부선이 딱 갈라져 버린다. 대전까지 올 때는 기차가 조용하다. 그런데 딱 갈라지면 호남선에서는 전라도 사투리가 터져 나오고, 경부선에서는 경상도 사투리가 막 터져 나온다. 막 터져 나와서 시끄럽다. 전라도 사람들이 시끄럽지만 경상도 사람도 자기들끼리 모이면 시끄럽다.
판이 달라지면 태도가 달라진다. 여러분 기차를 타 보라. 너무 분위기가 다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말고 자리를 잘 잡아야 한다. 논이 좋으면 벼가 많이 난다. 같은 벼지만 흙이 좋으면 열매가 더 좋다.
청도 감은 씨가 없다. 왜 그런가? 청도라는 땅 때문이다. 감이나 호박, 가지, 고추는 날 때부터 아예 암수가 따로 나온다. 따로 나오니까 교접을 해야 한다. 그런데 청도에서는 묘하게 기후가 달라서 둘이 따로 꽃이 핀다고 한다. 암꽃 필 때 다르고, 수꽃이 필 때가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결혼이 안 된다. 그래서 씨가 없다고 한다. 사람이 먹기에는 좋지만 그런 씨를 심을 수가 없기에 다시 날 수가 없다. 다 접붙인 것이다. 그런데 청도의 씨 없는 감을 가져다가 다른 데 심으면 도로 씨가 생겨 버린다. 그러니까 땅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같은 씨라도 청도 판에 가면 씨 없는 감이 되어 버리고, 똑같은 씨인데 대구에 오면 씨가 있는 감이 된다.
판이 중요하다. 세상 판, 세상 조직, 이런 것을 교회에 끌어들이면 안 된다. 그게 망하는 길이다. 이것은 그 판에 못 사는 생명이다. 벼를 밭에 심으면 안 되는 판이다. 세상이 이러니까 우리도 이러해야 한다면 그 교회는 끝나는 것이다. 망하는 것이다.
내가 옛날에 그렇게 예언했다. 사람들이 밖에서 말하기를 이 교회는 사람이 적으니까 저렇게 아기자기하고 서로 좋지 사람이 많아지면 다 똑같아진다고 말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다 나를 보고 왔으니까 안 그럴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형제들에게 부탁했다. ‘만일 그런 것이 필요하게 된다면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라.’ 그때 들은 형제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만일 이런 조직이 필요하다. 이런 것이 필요한데, 필요하니까 할 게 아닌가? 그런 게 필요하면 벌써 다른 길로 간 것이다.
가정 안에서 오해가 된다고 해서 조직이 필요한가? 똑같다. 그때 그랬다. 지금 작으니까 그런 게 아니고 우리 생명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사람이 많아도 똑같다고ㅗ 했는데 교회처럼 만들어 버리면 끝이다. 그 판에서는 그것 밖에 안 나온다.
아무리 좋은 나무라도 그 지역에 심으면 그것 밖에 안 된다. 감을 청도에 심으면 그렇게 된다. 우리 먹기에는 좋지만 감으로서는 좋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정한 판에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장래를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그 판에 있어야 된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이 말이 성경에서 아주 유명한 말이다. 아주 유명한 말 중에 하나다. 어쩌면 예수님의 어록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말이다.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는 말 후에 나온 말이다.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는 말 후에 거듭나야 된다.
더군다나 니고데모에게 한 말이다. 니고데모는 참 좋은 사람이다. 죽은 후에도 예수를 위해서 향 100근을 가지고 온 그런 사람이다. 예수를 참 존경하는 사람이다. 유대인의 관원으로서 이런 사람은 정말 드문 사람이다. 그런데 그 뒤로 니고데모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른다. 판이 다르니까 모른다. 예수 판이 아니고 다른 판에 가니까 역시 유대인의 관원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예수님을 존경했지만 판이 다른 판인데 거기서 거듭나겠는가?
거듭난다는 말을 구체적으로 하면 ‘당신이 나로 거듭나야 된다.’는 이 말이다. 하겠는가? 못한다. 판이 다르니까 못 한다. 우리 안에는 정말 이렇게 빛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빛을 이렇게 비춰줘서 환히 보이도록 그렇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