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8작전 北이 수행한
결정적 증거 42개 ▣
상고 이유 보충서
[대법원 사건 2022도 3281]
ㅡ저자: 피고인 지만원
◈ 국가와 전라도 '10일 전쟁'이 5.18의 전부가 아니다 ◈
5.18은 1980년 5월 18일 오전 9시, 학생으로 위장한 300명의 북한 전투부대가 전남대학에 진주한 7공수여단 병력 300여 명을 찾아가 돌멩이 공격을 가해 7명의 대원들에게 부상을 입힌 순간에 시작됐고, 1980년 5월 27일 새벽 05시 23분 주영복 국방장관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광주시가 수복되었음을 보고한 순간에 종결된 [10일 전쟁으로 정리돼 있다. 하지만 이는 나무 줄기만 본 것일 뿐 뿌리와 가지는 생략한 관찰이다.
◈ 5.18 발원지는 10.26 ◈
5.18의 발원지(Fountainhead)는 1979년 돌출된 10.26 사건이다. 1960~70년대 김일성의 소원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1968년 1월 23일, 김신조 부대를 청와대로 침투시켰다. 1970년 6월 25일, 북괴공작원 3명이 현충원 행사에 참석하는 박정희 대통령을 노려 지붕에 폭발물을 설치하다가 조작 실수로 폭발하여 공작원 1명이 사망하고, 나머지 2명이 도주했다. 1974년에는 8.15 행사가 열리는 장충동 국립극장에 한민통 소속의 저격범 문세광을 보내 대통령을 저격하려다 육 여사를 살해했다. 결국 1979년, 대통령 최측근인 김재규가 김일성 주도의 암살공작에 종지부를 찍었다. 10.26은 곧 김일성의 소원을 김재규가 성취시켜준 사건이었다.
10.26 밤, 범인 김재규는 정승화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정승화는 김재규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 절차를 밟기 위해 김재규가 원하는 대로 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전두환은 순발력을 발휘해 정승화의 명령을 어기고 김재규를 서빙고 조사실로 연행했다. 연행되자마자 김재규는 자기가 박정희 각하를 시해했다는 사실과 정승화가 시해현장에 함께 있었으며, 지금은 자기 명령에 따라 군을 계엄 체제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실토했다.
10.26 이후 계엄사령관이 된 정승화는 김재규의 범행을 비호하고, 현실 정치에 깊이 관여하면서 10.26에 대한 합수부(합동수사본부)의 수사를 방해했다. 당시 계엄사 합수부장인 전두환은 정승화의 월권 행위, 수사 방해 행위, 현실정치 참여 행위, 김재규 구명 행위 등 수상한 불법행위들을 조사해야만 할 최고 직책에 있었다. 정승화에 대한 수사를 하기 위해서는 보안사 수사관들이 정승화를 합수부 조사실로 연행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정승화가 수사관들에게 저항과 난동을 벌이는 바람에 우군과 우군 사이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것이 1979년 12월 12일에 발생한 이른바 12.12사건이었다. 이로써 16일 동안의 정승화 천하는 종결되었다.
◈ 12.12는 정승화와 김재규의 혁명 행진 때려잡은 사건 ◈
군에 대해서는 계급 서열밖에 모르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2성 장군에 불과한 전두환이 감히 4성 장군인 정승화를 체포했다는 사실 하나만을 놓고 하극상이니 "쿠데타니 말들을 한다. 하지만 수사 앞에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 “성역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별 두 개짜리 수사관이 별 4개짜리 일반 장군을 수사하는 것을 왜 하극상이라 말하는 것인가? 당시 정승화 대장도 전두환 소장에게 최규하 대통령을 감히(?) 수사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있었다. 최규하가 시해 사건의 범인이 김재규라는 사실을 10월 26일 오후 8시 40분에 김계원으로부터 보고받고도 이를 끝까지 숨긴 사실에 대해 조사하라 지시한 것이다. 이처럼 수사는 수사였고, 계급은 계급이었다. 12.12가 쿠데타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12.12가 쿠데타였으면 전두환은 1979년 12월 12일 곧바로 대통령이 돼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전두환은 어디까지나 계엄 정국하에서 계엄사령관-국방장관-국무총리-대통령으로 하여금 그들의 비상 임무인 '시국을 수습하는 일을 돕는 보좌 임무에 충실했고, 9개월이 지난 1980년 8월 27일에야 당시 인물들에 의해 제11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이것이 어떻게 '12.12쿠데타'라는 말인가?
◈ 최규하를 중심으로 하는 시국수습의 계절 ◈
1979년 12.12 이후의 정국은 최규하를 중심으로 하는 시국 수습 기간이 이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자 전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폭력과 강도 등 파렴치한 범죄가 기승을 부렸다. 부정과 부패에 대한 국민적 불만도 고조돼 있었다. 전두환은 전국에서 머리 좋은 사람들을 모집해[국보위]를 만들어 국민들 요구를 속도감 있게 처리해 주면서, 내무부장관의 건의를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해 삼청교육대를 설치했다. 이는 당시의 국민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었다.
◈ 김대중의 반국가 선전포고 ◈
최규하는 자기의 잔여 임기를 다 채우지 않더라도 헌법만 개정되면 그 순간으로부터 하야하겠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공언했다. 그런데 김대중은 개헌이고 뭐고 필요 없으니 즉각 내각을 해체하고, 계엄령을 철폐하고 모든 시국사범들을 당장 석방하라며 4월 초부터 장기표, 심재권 등 복학생 조직을 통해 전국 학생시위를 배후 조종했다. 4월과 5월에는 서울 북악파크 호텔에서 그의 추종자들과 3차례 회동하여 24명으로 구성된 [김대중 혁명내각 명단]까지 작성했다. 5월 15일, 서울역 10만 시위가 국가를 금방이라도 삼킬 만큼의 위력을 과시했다.
국민들은 무법천지가 불러올 대혼란을 걱정했지만 김대중-김영삼-김종필 등 정치모리배들은 혼란을 즐겼다. 서울역 집회의 위력에 고무된 김대중은 5월 16일, '민주화 촉진선언문'이라는 이름으로 최규하 정부에 대고 선전포고를 했다. 5월 19일까지 김대중의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주지 않으면 5월 22일 정오를 기해 전국 폭력 시위를 감행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북괴의 남침은 우려되고, 정치 모리배들과 파렴치범들은 물 만난 고기떼처럼 날뛰고, 김대중은 전국 폭력시위를 하겠다며 국가전복 작전을 노골화하고, [김대중의 혁명내각 명단]은 입수돼 있고. 이 마당에 김대중이 감히 국가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것은 믿는 구석이 없이는 불가능한 호기였다.
중동에 석유를 구하러 나갔던 최규하가 긴급 귀국하여, 5월 17일 비상내각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그날 밤 12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확대 선포했다. 10.26 밤에 선포한 비상계엄은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 계엄'이었지만 이날 선포한 것은 제주도까지 포함하는 '전국 계엄'이었다. '지역 계엄'과 '전국 계엄'의 차이는 제주도를 포함시키느냐 아니냐에 국한되는 차이가 아니다. '전국 계엄'이 선포되면 통제 항목의 범위가 확대되고, 계엄사령관이 그 누구도 거치지 않고 직접 대통령에 보고하는 지휘체제로 전환된다. 5월 18일 새벽 2시를 기해 전국 136개 국가시설을 보호하고 31개 주요 대학을 점령하기 위해 25,000명의 계엄군이 일제히 배치됐다. 김대중 혁명 내각을 구성했던 김대중, 김상현 등 24명의 내란음모자들이 심야에 체포되었고, 학생시위를 주도했던 전국의 대학 학생회장들이 이대에 모였다가 구사일생으로 도망을 쳤다. 젊은이들에게 지옥으로 인식된 [예비검속]이 쓰나미처럼 전국을 엄습했다.
◈ 5월 18일 전남대에서 시작한 300명 북괴부대의 게릴라 작전◈
대부분의 공수부대들은 서울의 주요 대학들에 진주했고, 광주는 위험지역이 아닌 곳으로 분류돼 전북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제7공수여단 소속의 2개 대대(600명)만 뽑아 전남대와 조선대에 각각 1개 대대(300명)씩 주둔시켰다. 광주는 계엄군 배치 우선 순위에서 꼴찌였던 것이다. 공수부대원들에게 실탄은 일절 지급되지 않았다. 전북 금마에서 생활하던 공수대원들은 소풍 가는 심정으로 장기판, 바둑판, 배구공을 가지고 광주로 갔다. 7공수의 장교와 병사의 40%는 전라도 출신이었다. 7공수대원들이 이렇게 안이하게 생각한 것은 광주가 동향인데다, 당시까지의 모든 소요사건들, 부마폭동과 사북탄광 폭동 등에서 폭도들은 공수부대가 출동하는 모습만 보고도 혼비백산 줄행랑을 쳤기 때문이었다.
5월 18일 아침, 모든 젊은이들이 경찰과 군의 눈에 뜨이지 않으려고 집안에 꼭꼭 숨어있었다. 그런데 매우 기이하게도 광주에서만 달랐다. 5월 18일(일) 오전 9시경, 북한 특수부대 250~300명이 학생으로 위장해 전남대에 주둔 중인 7공수 제33대대(대대장 권승만 중령, 전라도 출신)를 찾아가 감히 돌맹이 공격을 감행했다. 7명의 공수대원들의 얼굴에서 피가 흘렀다. 이들의 이 과감한 행동은 대한민국 대학생으로부터는 나올 수 없는 상상 밖의 이변이었다.
이들은 공수부대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달아나 금남로와 충장로의 파출소를 불태우고 차량을 태워 연기를 내서 많은 시민들을 몰려오게 한 후 준비된 유언비어를 뿌렸다. “환각제를 먹은 공수부대가 무고한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때린다",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 주민 70%를 죽여도 좋다"는 전두환 명령을 받고 남자고 여자고 마구 살해하고 있다”, “여성을 발가벗기고 유방을 도려내고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는 등의 해괴한 유언비어들이었다. 일반 국민들이 잘 모르는 전두환이 일찌감치 광주인들의 주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에 격노한 광주 시민들이 광주의 번화가로 몰려들어 위장한 대학생들 즉 북한 특수군에 합세했다. 이렇게 5월 18일의 개전 상황은 그 과감성과 정밀성으로 보아 세계에서 오로지 북괴만이 기획-실행할 수 있는 게릴라전의 전형이었다.
◈ 첫날부터 모략전 ◈
광주로 파견된 공수부대는 광주지역 향토사단인 31사단의 사단장 정웅의 지휘를 받도록 명령돼 있었다. 사단장 정웅은 김대중의 특별한 졸개였다. 5월 18일 오후 3시, 사단장 정웅은 지도에 36개의 점을 찍어서 2명의 공수부대 대대장에게 작전명령을 내렸다. "모든 골목을 통제할 수 있는 36개 지점에 공수대원을 배치시켜 골목에 있는 놈들을 한 놈도 빠짐없이 모두 체포해 31사단 헌병대로 넘겨라”. 매우 무리하고 무모한 지시를 했다. 젊은이들의 수는 많고 이들을 모두 붙잡아야 하는 계엄군 숫자는 턱없이 적었다. 따라서 정웅의 이 명령은 계엄군 병사들에게 곤봉을 사용하라는 명령이었다.
오후 5시, 한 골목당 4~5명씩 배치된 계엄군은 수많은 청년들의 공격을 당할 수 없어 곤봉을 사용했다. 이런 장면이 연출될 줄 알았던 북괴 촬영자들이 미리 건물 옥상에서 촬영 준비를 마치고 기다렸다. 곤봉이 찍힌 모든 사진들은 거의가 다 건물 위에서 내려다보고 찍은 것들이다. 정웅과 촬영자들 사이에 교감이 있었다는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이 사진들이 지금까지 공수부대를 비방하는 증거로 위력을 발휘해 온 것이다. 5.18이 모략전으로 정밀하게 기획된 것이다.
일반 국민들은 왜 북괴가 대한민국을 살인 국가로 모략하기 위해 애를
쓰는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 당시 김일성은 박정희 대통령이 사라진 이후의 권력 진공 상태를, 남침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로 판단했다. 남침을 하려면 이른바 3대 혁명 역량이 구축돼 있어야 했다. 북한 역량, 남한역량, 해외역량이었다. 5.18 당시, 3개 역량 중 북한 역량, 남한 역량은 튼튼하게 구축돼 있었다. 그런데 부족한 것이 해외역량이었다. 한국은 소멸시켜도 되는 나라라는 국제여론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북괴는 국제사회에 남한을, '발포 명령에 의해 국민을 학살한 집단'인 것으로 모략해야 했다. 그래서 저들의 [집단 발포]가 그토록 중요한 것이었고, 그 [집단 발포 명령자]가 반드시 쿠데타의 주범 전두환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 시나리오에 따라 1980년 5월 23일 북괴에서 내려온 남녀노소들이 총동원되어 [시체장사]를 벌였고, 그 사진들이 대거 국제사회에 쏟아져 나갔던 것이다.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사실 하나를 상기하고자 한다. 광주에서 촬영된 시체장사 사진들이 매우 많다. 여기에 동원된 남녀노소들은 100% 북괴인들이다. 만일 그 군중 속에 어쩌다 한국인이 멋모르고 들어가면 그는 영락없이 잡혀가 처형된다. 그 군중 속 사람들은 북한말을 자유롭게 하고 있는데, 한국 사람이 끼어 있으면, 군중 속 남녀노소들이 북한말을 쓰더라는 소문이 퍼지게 된다. 따라서 사진들 속 '남녀노소 군중’은 오로지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로만 구성돼 있었어야 했다. 한편 광주 시민들은 모두 대문을 걸어 잠그고 꼭꼭 숨어 있었기에 '남녀노소 군중'이 시내 한복판에 형성될 수가 없었다.
◈ 5월 19~21일은 공수부대가 매타작 당하고 전멸될 위기에 처해 ◈
5월 19~20일 양일간은 공수부대가 중과부적으로 매타작을 당하고 농락당하는 날들이었다. 4~5명 단위로 골목골목에 흩어져 있다가 매타작만 당하자 공수부대는 대대 단위로 집결해 행동했다. 그러자 북괴군은 대형 버스와 트럭을 지그재그 궤적으로 몰아 빽빽하게 집합해 있는 공수부대를 향해 돌진케 했다. 여기에 동원된 소모품들은 광주 사람들이었다. 5월 20일에는 함평경찰 4명이 돌진하는 폭도의 버스에 깔려 즉사했다. 공수부대와 경찰은 지그재그 돌진 차량에 대한 노이로제에 걸려 있었다. 이들에게 가장 소름 돋는 말은 "차 온다"는 외마디 외침이었다.
이 이틀 동안 MBC 및 KBS 방송국이 불에 타고 세무서가 불탔다. 저들이 방송국을 불태운 것은 현장을 촬영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광주에는 오로지 북한 방송만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남한 방송이 폭도들의 행동을 촬영했다면 바로 그때에 국민들은 광주에 북괴군이 왔다는 사실을 인식했을 것이다. 그래서 광주의 촬영 주권은 오로지 북괴가 독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경상도 번호판을 단 수많은 차량이 소각되고 탑승했던 경상도 주민들이 몰매를 맞아 즉사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5월 20일 밤에는 광주역 앞 넓은 공간에 집결한 제3공수여단 5개 대대 모두가 포위되어 몰살당할 뻔했다. 이런 장면들을 만일 한국 언론들이 촬영했다면 광주에서 공수부대가 일방적으로 만행을 저질렀다는 저들의 모략이 지금처럼 먹혀들 수 없었을 것이다.
◈ 북괴군 600명이 노골적으로 펼친 5월 21 일의 특공작전 ◈
10개 공수대대(4,000명)를 압박하던 북괴군은 5월 21일이 되자, 세기의 걸작이라 할 만한 특공작전을 벌였다. 광주에 파견된 북괴특수군 병력이 600명이라는 사실도 이날의 작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스라엘의 엔테베 작전보다 더 정교하고 과감했다. 제20사단 지휘부 차량부대가 광주 톨게이트를 5월 21일 새벽 08시에 통과한다는 정보는 간첩과 결부돼 있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극비정보였다. 이런 정보를 10세 전후의 아이들, 20세 전후의 양아치들이 획득할 수는 없다.
600명 중 300명은 극비정보 내용에 따라 광주 톨게이트 근방에 매복해 있다가 정확히 08시가 되자 이동하는 정규부대를 기습 공격하여 사단장 지프차를 위시해 14대의 지프차 및 30여 대의 트럭과 장비들을 탈취하여 이를 몰고 이웃에 있는 '아시아 자동차공장'에 진입했다. 사단장이 자기가 타는 지휘용 차량을 피탈 당했다는 사실은 당시 20사단장 박준병에게는 일생일대의 수치가 될 만한 사건이었다. 이 비밀정보는 20사단과 전교사(전투 교육 사령부)만 공유하고 있었다. 이 두 개 부대에 간첩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김영삼은 오로지 20사단장 박준병 한 사람만 처벌하지 않았다.
◈ 300명 단위로 구성된 2개의 북괴군 부대 ◈
이 매복조 300명은 09시, 군용차량을 몰고 이웃에 있는 군납업체 '아시아 자동차공장'으로 행군했다. 거기에서 다른 300명과 합류하여 총 600명이 됐다. 이 600명은 370여 대의 군용트럭과 4대의 장갑차를 탈취해 그것들을 몰고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위장돼 있는 44개 무기고를 향해 예행연습을 한 것처럼 곧장 달렸다. 그리고 불과 4시간 만에 5,403 정의 총기를 탈취하고 그것으로 무장하여 시민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그 덤터기를 공수부대에 씌우는 매우 정교한 모략작전을 수행했다.
◈ 5월 21일 집단 학살은 계엄군이 없던 금남로에서 북괴군에 의해 발생 ◈
이날 오후 1시는 유명한 시간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를 사실로 믿는 사람들은 바로 이 시각에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이 '애국가를 부르고 난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하여 수천 명을 학살했다고 모략해 왔다. 하지만 바로 그 시각에 광주 시민은 도청 앞에서 많이 죽은 것이 아니라 계엄군이 없는 금남로 빌딩 숲에서 북괴군에 의해 가두리 사격을 당했다. 40명이 거기에서 죽었고 또 다른 4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금남로의 한 옥상을 점령한 어깨들 중에는 대량살상용 특수무기 'M16 유탄발사기'를 가볍게 들고 있었고, 가슴에는 총류탄을 가득 담은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 앞 집단발포는 팩트 없는 모략 ◈
이 군사 프로집단은 5월 21일 오후 1시경, 도청 정문에 도열해 있는 계엄군을 향해 장갑차를 돌진시켜 계엄군으로 하여금 장갑차를 향해 총을 쏘도록 유도해 놓고, 바로 그 순간 이웃 금남로 건물 숲 옥상을 사전 점령한 무장괴한들로 하여금 M16 유탄발사기 등으로 가두리 장에 갇힌 광주 시민을 순식간에 대량으로 사살케 했다. 금남로 학살쇼를 벌인 것이다. 그리고 이를 계엄군에게 덤터기 씌웠다. 총소리가 도청에서 나는 것인지, 이웃 금남로에서 나는 것인지 시민들은 분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섭도록 정교하게 기획된 모략전이 아닐 수 없다.
전남도청에 2,100발의 TNT 폭탄을 조립하여 광주시를 히로시마의 잿더미로 날려버리겠다고 협박하였고, 밤에는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170명의 간첩 수와 2,700명의 수용자를 해방시켜 폭동의 동력으로 삼으라는 김일성 지시에 따라 광주교도소를 5회 이상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600명 중 475명의 희생자를 내 부득이 5월 24일 정오, 북으로 도망치듯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5월 21일 오후 5시, 공수부대 10개 대대는 전남도청과 광주시를 포기하고 시 외곽으로 도망을 쳤다. 도망하는 도중 북한군으로부터 많은 사격을 받았다. 제11공수여단장 최웅 준장은 북괴군 스나이퍼로부터 조준사격을 당했다. 그를 태운 지프차가 철로와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전복됐다. 그는 운전병과 호위병을 데리고 무등산 정상에 배치된 미 방공포 포대에 피신해 있었다. 이토록 한국 최강의 군대를 압박하고 포위하여 전멸위기로 몰아간 전투프로들이 5.18 작전의 주역들이었던 것이다.
◈ 계엄군이 비워준 전남도청은 북괴군의 작전사령부 ◈
계엄군이 퇴각한 광주시는 한국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북한의 해방구가 되었다. 도청은 북괴의 작전본부가 되었다. 북한 집단은 도청 지역에 모아 놓은 시체의 관을 독점하고, 광주 시민들처럼 보이도록 위장한 남녀노소 집단을 데려다 한국 정부를 모략하기 위한 사진들을 찍었다. 5월 23일에는 갖가지 종류의 무대를 만들어 놓고 이를 촬영한 후, 독일기자 힌츠페터를 통해 세계에 방영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교도소 공격에서 전투부대의 주력을 잃은 북한 지휘부는 5월 24일 정오경, 서둘러 도청을 버리고 안개처럼 사라졌다. 그 마지막 철수를 끝까지 엄호한 광수가 제1광수였다.
ㅂ
◈ 북한군이 비워준 전남도청은 양아치 집합소 ◈
5월 24일 오후, 북한군이 떠난 전남도청에 이때부터 들어온 광주시민들은 개념 없는 10대의 어린 학생들과 20대 막노동자들이었다. 이들 역시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져 이틀 동안 내내 그들의 표현 그대로 "갑론을박" 말싸움만 했다. 그리고 25일 밤중, 복학생인 김종배와 26세의 트럭 운전사 박남선, 19세의 구두공 윤석루 등이 이끄는 20대 강경파가 온건파를 총으로 위협하여 내쫓고 계엄군을 향해 "결사항전”을 선포했다. 이들이 지금 5.18 최고의 영웅으로 행세하고 있지만, 사실은 총소리가 날 때마다 도망 다니다가 5월 25일부터 도청에 하나둘씩 모여 들었던 '피라미'들인 것이다.
◈ 20만을 동원한 10일 작전에 지휘자가 없다 ◈
5.18에는 운동권이 단 한 사람도 개입하지 못했다. 김대중으로부터 300만 원을 받았다는 정동년은 5월 17일 밤중에 자택에서 체포되어 시위에 참여할 수 없었다. 김대중으로부터 200만 원을 받았다는 윤한봉은 5월 초부터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 1981년 4월에 미국행 화물선을 타고 35일에 걸쳐 미국으로 밀항했다. 그리고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시위 기간 내내 도망가 있다가 1982년에야⁸ 체포됐다.
지금 현재 5.18 최고의 유공자 대접을 받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