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관한 시모음 60)
여름바람의 손잡이 /정세일
여름 바람은 손잡이를 가지고 있어서
다리가 있는 밑에 가면 언제든 바람을
부치고 있습니다
다리아래에는 물을 웅덩이처럼 가두어 논
곳이 있어서
여름이 되면 동네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여름을 보내는 천렵을 합니다.
넓적한 돌을 모아서 방석을 만들고
다리아래 웅덩이에 풍덩 수박과 참외를
시원하도록 담그어놓고
형들은 그물을 가지고 강가로 투망을 하려갑니다
우리는 나무로 만든 메를 가지고
얕은 물가에서 큰돌을 내리치면은 그 안에 숨어있던
고기들이 정신을 잃은 채 물위로 올라올 때
우리는 활대로 고기를 건져냅니다.
다리기둥 옆에는 커다란 가마솥에
물이 펄펄 끊고있습니다
오늘은 매운탕을 끊이면서
온 동네가 여름을 식히는
축제가 있습니다
그곳에는 한잔의 막걸리에 흥이난 덩더꿍 춤을 추는
아저씨의 흥얼리는 춤도 있고
여름 밭을 매느라 지친 팔과 허리를 흔들어주는
아주머니들의 춤도 있습니다
여름 천렵을 하는 날 그날은 바로 우리동네가
다 모이어 기나긴 여름을 보내는 날입니다
그 해 여름의 그녀 /이채
그 해 여름의 그녀는
쪽빛 하늘을 닮았네
하얀 구름같은 미소에
구슬 목걸이가 썩 잘 어울리던
첫눈에 반한 건 아니지만
초여름 산들바람에
흩날리던 그녀의 긴머리가
내 가슴까지 불었네
그 해 여름의 그녀에게
조금씩 마음이 흔들렸네
그녀와의 사랑은
나 혼자만의 사유지만
그녀도 모르는 사랑을
여름내내 뜨겁도록 했었네
그 후로
7월의 하늘엔 늘 그녀가 서 있네
추억 속의 여름 /하영순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보는
두메 골
집에서 논길 지나 한참을 가가 보면
대밭이 있고
대밭을 지나 강가에 우리 밭이 있었다.
보리밭 사이에 참외수박을 심어
보리를 베어 내고
수박밭 가장자리에 원두막을 지어 여름 방학이면
밭에서 부모님을 도와 일하면서
구리 빛으로 여름을 태웠지
지리산에서 흘러오는 맑은 물
더우면 강물에 뛰어들어
소라를 잡으며
송사리 모래무지와 같이 놀기도 하였지
감자 캐는 날
한 포기 뽑아 올리면 주렁주렁 매달린 크고 작은 감자
땀범벅이 되어 환호성을 지르며
마냥 즐거웠는데
지금은 왜 그 감자가 자꾸만 생각날까
감자알을 키우기 위해 뜨거운 여름을 보내야 했던 감자 대에
부모님 모습이 아롱거린다.
진주 남강 땜 상류 물바다가 되어있을 밭을
산에 누어 지켜보실 부모님
부모님 산소에 고작 벌초 한번 하는 것이
자식 노릇 다하는 것일까
찌는 듯 무더운 날이면
고생하시며 키워주신 부모님 생각에
가슴이 메인다.
여름소묘 /임영준
하늘엔 눈부신 미소
바다 가득
일렁이는 맥박
철없는 갈매기들은
마냥 너울거리고
모래알마다 새겨진
수많은 사연은
투명한 회상에
깊숙이 빠져
다시 한번 싱그러운
폭발을 꿈꾼다
여름의 고통 /매향 도현영
햇빛 쨍쨍한 무더운 여름
온몸이 나른하여 삶의 의욕
떨어지는 무기력증
아름다운 꽃과 지저귀는 새소리
푸르름 가득한 행복한 이 세상을
구경할 계절인데
한여름 같은 달 셋이나
생일 축하 파티 축복받은
행사인데도 머리는 지끈거린다
정신은 휑하고 사물들은 흐릿하며
아스팔트는 춤을 추는지
취기 어린 마음 같고
할 일은 산더미로 쌓이고
시간은 부족하다면서도
하루 절반은 방콕하며 뒹굴뒹굴
밤 낮 없이 꿈속을
헤매인 듯한 무료한 삶
당신은 아마 모를거야
걱정없이 웃고 살고 싶은데
가정주부 인생이
어디 편안함 뿐이겠는가
무탈한 하루가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지
어떤 여름날 /안영준
장대비 두들겨 맞은
해바라기
고개 수그리고
수심에 잠겼다가
볕 보고 허벌라게 웃는다
불치병이 생길 만큼
여러 날
마음고생 심했건만
무정하게
그 앞에서 유유자적
노래나 부르고 있는 매미
석양은 잔뜩 찌푸리고
서산 넘어
바다로 풍덩 빠질 때
미리네 별
한땀 한땀 고운 수 놓는다
여름 /김희선
할머니가 먼 길 떠나시고
어미 잃은 물고기 마냥
입술이 새파랗게 질리도록
냇가에서 멱을 감았다
해거름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가는 또래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두려움을
기이며 꾸역꾸역 삼키는데
사각거리는 대숲 소리에도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시커먼 아라 위로
달빛이 하얗게 내려앉은 밤이면
너럭바위에 모여든 사람들은
다붓다붓 살갑게 노닥거리고
덤불 사이로 흘러내리는
별똥별도 하얗게 웃었다
깊어가는 여름밤
할머니의 얼굴이 보름달처럼
오롯한 그리움으로 떠오른다
*해거름 : 해가 서쪽으로 넘어갈 때
*기이며 : 드러나지 않도록 숨기며
*아라 : 바다
*다붓다붓 : 여럿이 다 가깝게 붙어있는 모양
*노닥거리고 : 잔재미 있고 수다스럽게 말을 늘어놓고
*살갑다 : 닿는 느낌이 가볍고 부드럽다
*오롯한 : 모자람 없이 완전한
여름날이 좋다 /신성호
무더위가 떠오르고
늙은 느티나무 위의 매미소리를 듣는 듯 하다
땡볕 아래 잘 익어가는 청포도
주렁주렁 그 모습이 아기소의 마음같이
먹지 않았어도 맛있게 느껴지고
싱싱함이 목젖에 새콤달콤함으로 와닿는 것 같다
토실토실 잘 여문 하지감자며
쑥쑥 자라는 옥수수와 단수수가 즐겁게하고
시원한 바람이 징그럽게 좋은 모정(정자)도
시끌벅쩍 말도 않되는 이야기지만 즐겁기만 하다
잠시 잠깐 졸음 속에 낮잠은 꿀맛이고
그 속에 떠나는 꿈 여행은 세상에는 없는 멋진 여행이다
어느 계절인들 좋고 나쁜 계절이 있으랴만
여름날은 왠지 부담없는 풍성함에 무척 기쁘다
아직 이른 때지만 문득 떠오른 여름날이
기다림속에 그리워하는 것 조차 너무나 좋다
여름의 한낮-오동나무 아래 /이윤학
오동나무 밑에는 평상이 놓여 있다
평상 옆에는 지팡이가
여럿 기대져 있다, 노인들이
입을 벌리고 자고 있다
털 난 벌레가
꿈틀꿈틀 기어가고 있다
평상 위에는 부채가 놓여 있다
부채는 시들지 않는다, 쩍
갈라진 수박 반 쪼가리
저 수백 장의 오동나무 이파리
부채는 시들지 않는다
푸른 부채, 너무 큰 부채들 위에
꽃이 피어 있다
노인들, 가끔 입맛을 다신다
얼마나 많은 순간들이 겹쳐
지나간 것인가, 그리고
꽃이 시든다는 것을 얼마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가
더 높은 곳으로
저 꽃들은 바쳐진다!
오오, 입을 다물어
씨를 만들어내는
지독한 순간들, 만난다
햇빛이 잠까 입 속을 스쳐간다
입 속의 금이 번쩍 빛난다, 저
평상 위의 그늘은 끝없이 물결친다
여름 /이정선
흥에 겨워 여름이 오면 가슴을 활짝 열어요
덩쿨장미 그늘속에도 젊음이 넘쳐 흐르네
산도 좋고 물도 좋아라
떠나는 여행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사랑이 오고가네요
여름은 사랑의 계절
여름은 사랑의 계절
갈숲사이 바람이 불어
한낮의 더위를 씻고
밤이오면 모닥불가에
우리의 꿈이 익어요
여름은 사랑의 계절
여름은 사랑의 계절
여름이 내게 주고 간 것은 /김정숙
여름이 알려주고 간 것은
단 하나
폭염 아래서
그림자와 밀회하는 법이었다
정오의 태양
납작 엎드린 정적을 깨며
매미소리 휘젓고 다닐 때
이카루스의 날개가 홀로 녹아
뚝뚝 추락하는 것을 보았지.
급상승하던 혈관의 피
막다른 골목에서 쩔쩔매다가
누전차단기 미처 내리지 못한
전선들처럼
폭염아래서 활활 타버리고 말았고
다 타고난 후
새까만 잿더미 속에서
여름이 혀 쏘옥 내밀며 하는 말
눈 앞 캄캄해지는 한낮의 어둠을 밝히려면
오직 너
그림자와 대화하는 법을 배워라
여름이 내게 주고 간 것은
결국
그림자 찾기 게임이었는지 몰라
여름 백무동 계곡 /강현옥
수정처럼
반짝이는 계곡은
한여름 추억을
빚어내며 끝없이
중얼거리며 흘렀지.
피라미를 잡으려고
미래의 시간을 뒤척인다
잡힐듯 잡힐듯
잡히지 않는
피라미가 아이들의
미래를 끌고
요리조리 숨는다.
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미래란
숨어있는 것이어서
스스로 찾아가 손 내밀어
그 피라미를 잡으려는 순간
훌쩍 달아나 버리는 미래를
몇번이나
거슬러 올라야 하는지
아이들처럼 불확실한
계곡에서 풍덩거리고
있지 않을까.
아픈 여름 /이옥순
흔들리는 걸음 마음 아파
파고드는 음악도 가슴 시리고
날마다 바라보던 그림자
희미하게 바래져 가는 서러움에
돌아설 수 없는 미련인가
놓을 수 없는 끈을 부여잡고
시간 따라 굽이굽이 계곡을 흐른다
뜨거운 여름은 고통으로 휘감고
살아있는 가슴 까맣게 멍이 든다
아련해진 꿈처럼 허전한 빈자리
홀로 가야 하는 사막의 초원
안식을 허락한 시간 속 복잡한 도시
한복판에 몸살을 안고 서 있다
흔적도 없이 떠나려는 텅 빈 여름 뒤
바람 타고 다가오는 가을 향기
새록새록 빈 가슴 채우는 기쁜 소식은
감사의 눈물 속에 축복과 행복의 열매다.
너무 많은 여름 /강재남
좀 더 행복하거나 덜 불행한 삶으로 가요 좋은 여름과 여름이 키우는 대로 크는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요 어정쩡한 날씨는 버려두고요
비는 죄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대요 누군가 말한 것 같은데 생각을 굴려도 굴러가기만 하네요 빗물 고인 자리에 여름이 우거져요
여름이 슬퍼요
생각을 버리기로 해요
딴청 부리기로 해요
나는 걷고 있어요
발자국 있는 곳마다 대추야자나무를 심어요 대추야자나무 열매를 거꾸로 키워요 배경으로 걸어두기 좋은 구도로요
여름의 직관을 믿어보기로 합니다
말라가는 여름은 생략하면 그만이고요
스물여섯은 견디기 힘든 숫자였어요
그래서 발자국은 말을 잘 듣질 않았나 봅니다
대추야자나무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요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표정,
난해하고 불가해한 얼굴이 대책 없이 흩어져요
여름이 내게 준 건 깊은 잠과 자장가 먼 곳에서 들려오는 노래와 폭우와 빗줄기와 악수하는 사람 빗줄기를 타고 환상동화가 된 스물여섯의 사람
여름을 가두어요 죽은 여름과 죽어갈 여름, 여름 귀퉁이를 오려 모으는 게 취향이라거나 아니라거나 아무 상관없이요 그냥 다 거두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