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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단종 유배길 답사
1452년 문종이 죽자 단종은 왕위에 올랐으나 1453년 숙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으로 모든 권력을 장악하자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었으며 1455년에는 왕위마저 빼앗기고 상왕으로 밀려나 사실상 감금생활을 하게 된다.
다음해인 1456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됨으로써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 되었다가 이듬해인 1457년에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가게 된다.
단종이 17살이던 1457년 음력 6월 22일 한여름 따가운 햇살을 받으면서 첨지중추부사(僉智中樞府事) 어득해(魚得海)와 군자정 (軍資正) 김자행,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홍득경 등이 군졸 50명과 함께 유배행렬을 호위하여 창덕궁 돈화문을 출발한지 7일 만인 6월 28일에 청령포에 도착하였다.
유배를 떠나던 첫날밤은 부인 송씨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들어가있는 '정업원'에서 묵었다고 하는 말은 정사인지, 야사인지 모르지만 귀양가는 죄인(?)의 입장에서 가능했겠는가 생각해보면 아마도 안타까움에서 만들어낸 야사인듯 하다.
아무튼 지금으로부터 553년전 삼복더위가 한참인 여름날 단종의 유배행열은 창덕궁 돈화문을 출발하였다.
대략의 코스를 살펴보면 창덕궁 - (야사에서는 정업원에 들려 부인과 하루 묵어 감) - 청계천 영도교에서 영영 이별하고 - 살곶이 다리로 한강의 지류를 건너 화양정에서 잠시 쉬었다가 광나루에 도착, 배를 타고 이포나루까지 내려갔다.
한강을 따라 배를 타고 이포까지 간 후에는 다시 육로를 따라 여주 - 신림 - 주천 - 영월까지 산길을 따라 이동하였다.
수십, 수백년이 흘러 산천도 간곳 없을테지만 왕릉답사에 충실한다는 의미에서 귀양길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 한양내에서의 유배코스.... A는 창덕궁, B는 정업원, C는 영도교, D는 살곶이다리, E는 화양정, F는 광나루....>
<대동여지도에서 그려보면 아래와 같지 않을까? 당시엔 살곶이 다리 이후는 한양이 아니라 경기도 땅이었을듯~>
<창덕궁 돈화문.... 정궁의 대문이다.>
<창덕궁을 나와 동대문으로 도성을 빠져 나갔을듯~>
<단종이 한살 연상의 부인과 이승에서의 마지막 작별을 하고 건너간 다리... 영도교(永度僑)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라는 이름으로 흥인지문(동대문)을 거쳐 왕십리·뚝섬·광나루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하는 다리였다고 한다. 지금의 청계천에서 동대문 지나 청계 7가와 8가 사이에 다리가 복구 되어 있다.
원래 돌다리였으나 대원군이 경복궁 중수때 헐어다 썼다하며 그후 나무다리를 놓았으나 큰물이 나면 떠내려갔다
하나 그뒤 시멘트 다리를 놓았다가 청계천 복개때 없어진후 지금은 전혀다른 모습의 다리로 다시 세워져 있다.>
<정순왕후 송씨와 생이별하고 갔다하여 영이별 다리, 또는 영영 건너가 버린 다리라는 뜻으로 전해 오다가
성종이 친히 영도교라 명명하였다고 전해온다.>
<영도교에서 단종과 정순왕후의 생이별을 재현하는 행사가 벌어지곤 한다.>
행렬이 광나루로 가기 위해서는 한강 지류를 건너야한다. 지금의 한양대학교 앞 살곶이다리.
태종이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맞이할 때 화살이 기둥에 박혔다해서 이름 지어진 다리... 전곶교(箭串橋)라고도 한다.
<살곶이 다리.... 조선시대 가장 긴 돌다리였다.>
그렇게 한양을 벗어난 행렬은 저녁노을이 물들 무렵... 지금의 화양동 화양정(華陽亭)에 도착하였다.
화양정은 할아버지인 세종께서 지으시고 편액까지 내려주신 정자... 당신이 가장 아끼던 세손이 임금에서 쫓겨나 귀양가면서 이곳에서 잠시 쉬면서 한숨으로 눈물을 지을줄이야???
귀양보낸 세조는 내시 안로를 시켜 이곳에서 간소한 잔치를 베풀어 송별하려 했으나 어린 단종은 눈물로 상을 물리친다.
하기야 음식이 넘어 가겠는가? 어린조카를 쫓아보내는데 대한 백성들의 이목(耳目)이 두려워 준비했다고도 한다.
<지금은 화양정은 남아 있지 않다. 화양동 느티나무만이 말없이 지키고 서 있다. 근처에 종마목장도 있었다고 한다.>
걸음을 재촉한 귀양행렬은 마침내 지금의 광나루에 도착한다.
광나루는 마포나루, 이포나루, 여주조포나루와 더불어 한강의 4대 나루터로 손꼽힌다.
한자로는 나루 진(津)을 주로 썼고, 강폭이 좁으면 도(渡)를 붙였다. 초소가 설치됐으면 진(鎭)을 썼다.
이곳에서부터는 뱃길을 이용하여 광주와 양평을 지나 여주군 금사면 이포나루까지 갈것이다.
지금 광나루터는 흔적도 없다.
너븐나루라 하여 광나루인데 1936년 광진교가 생기므로써 없어지고 말았다.
<광진교 앞에 서 있는 광나루 표석....>
<실제 나루터는 흔적도 없다... 한강호텔을 지나 광진정보도서관쪽으로 가면 표지석만이 있을뿐이다....>
<여기서 배를 타고 멀리 보이는 구리, 팔당, 양평 방향으로 노저어 갔을것이다.....>
이곳부터는 뱃길을 이용하여 광주(廣州)와 양평(陽平)을 지나 여주 이포나루까지 가야한다.
이렇게 단종이 귀양 가는 길에는 소문을 듣고 몰려 나온 백성들로 넘쳐났다.
양주(楊州) 고을에 머물렀을 때는 양성(陽城)에 사는 차성복이란 백성이 백설기 한 시루를 쪄서 임금께 바치며 안위(安危)를 걱정 했다. 유배 행렬이 광주 땅을 지날 때는 백성들이 어린 왕을 배알하고자 모여들었으나 군졸들의 제지로 유배행렬이 지나간 후에야 뒷모습을 바라보고 눈물로 배알(拜謁) 했으므로 이곳을 '배알미리(拜謁尾里)'라 부르고 있다.
<광나루에서 팔당 - 양수리 - 양평 - 이포나루까지 한강을 따라 내려갔을것이다.>
<배알미리... 지금은 하남시 배알미동이다. 팔당댐 옆에 있으며 도로가 이어진 곳은 배알미교라 부른다.>
이포나루에서 배를 내린 귀양행렬은 대신면 상구리(어수정)-북내면-강천면-부론면 단강리(단정지)-귀래면-백운면-신림-싸리치-주천면을 지나 군등치를 넘으니 드디어 영월땅, 배일치와 소나기재를 지나 청령포에 도착하게 된다.
<이포나루에서 영월까지의 경로중 신림까지...
여주군 대신면에서 물을 마시니 어수정(御水井)이다. 고달사를 지나 부론면 흥원창, 법천사, 거돈사를 지나
단강초등학교 자리의 느티나무 아래에서 쉬어가니 단정지이다. 계속 산길을 넘어 신림으로 나아갔다.>
<이포나루.... 단종은 이곳에서 배를 내려 다시 가마로 갈아타고 가면서 한양이 그리워 통곡을 했다고 표석에 적혀있다.
또한 고종비 명성왕후가 임오군란때 몸을 피하여 이곳에서 3일간 머물기도 했다 한다.>
<이포나루 자리에는 이포대교가 놓여 있다. 건너마을이 유명한 천서리 막국수이며 정면의 산 정상은 파사산성이다....>
<이포나루에서 멀지 않은곳에 단종이 마셨다는 우물, 어수정(御水井)이 있다.
지금은 블루헤런 골프장 영내 서측6코스 바로 옆에 있어서 임의로 들어가볼수가 없다.
골프장에 부탁해서 들어가볼수는 있으나 한두명이면 모를까 우르르 몰려가기는 어렵다.>
< 어수정 조금 지난 곳에 고달사지가 있다. 그 당시는 매우 대규모의 절집이었으리라~>
<고달사지(高達寺址)에는 석불좌와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으나 엄청난 규모의 대작임을 알수 있다.
원종대사혜진탑과 부도 역시 각각 국보와 보물이며 쌍사자 석등은 경복궁으로 옮겼다가 국립박물관에 보관중이다.
아래 사진은 보물 8호 석불좌, 보물 6호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와 이수이다.>
단종의 귀양행렬은 여주 남한강변을 따라 내려가다가 원주 문막에서 내려오는 섬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을 통과한다.
이곳은 '흥원창(興元倉)'이 있던 곳으로 흥원창은 고려 이래 강원도의 세곡을 한양으로 수송하는데 중요한 조창이었다.
나는 왜 한양 광나루부터 이곳까지, 또는 보다 더 멀리 배편으로 이동하지 않고 이포나루까지만 왔었는지 궁금했다.
<흥원청 자리 ... 양수리처럼 2개의 강이 합쳐져 한양으로 흘러가는 그 옛날 水路교통의 요충지였다.>
<남한강쪽에서 바라보니 오른쪽이 원주 문막에서 내려오는 섬강줄기, 오른쪽이 한양으로 흘러가는 남한강 줄기이다.>
이곳은 현재 원주시 부론면으로 당시 흥원창이 있어 각지에서 사람들과 물류가 집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복잡한 동네였으며 그에따라 각지의 소식(言論)이 모여들고 넘친다해서 富論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바로 옆에는 법천사지(法泉寺址)가 있고 조금 아래에 거돈사지(居頓寺址)가 있는것으로 보아 당시는 이곳이 매우 발달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흥원창옆 법천사지 당간지주.... 법천사는 아직 발굴정리가 안된 곳이다.>
<거돈사지 삼층석탑.... 보물 750호이다. 정림사지 석탑이나 불국사 석가탑과 비견될만큼 아름답다.>
부론면에는 단강초등학교가 있다.
학생수 감소로 얼마전 폐교되어 지금은 대안학교로 운영중인 곳인데 당시 단종이 귀양길에 쉬어갔던 곳이라해서 단강정이라 불리우는 느티나무 쉼터가 있어 찾아보았다. 마침 단강마을 운동회가 한참이었다.
<단강초등학교 校木으로 지정된 느티나무.... 이곳에서 단종임금이 쉬어 갔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
수령 약 600년으로 강원도내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라 하여 강원나무 2호로 지정되었다.>
<마침 단강마을 운동회가 한참이다. 그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티나무 아래에 차일을 쳤다.>
단강을 지나면 귀래를 지나 배째고개를 넘어 신남에 이른다. 신남부터 영월까지를 정리해본다.
<신남에서 싸리치 고개를 넘고 솔치재를 지나면 주천... 이내 군등치와 배일치를 넘으면 영월땅이다.
선돌이 있는 소나기재를 내려서면 바로 장릉... 읍내의 관풍헌을 지나 외곽으로 내달으니 청령포에 닫는다.>
<싸리치 고개.... 옛길을 따라 넘어보았다. 지금은 신림터널로 통과한다.>
<고개를 내려서면 황둔찐빵으로 유명한 황둔리가 나타난다.>
솔치재를 넘어 주천면을 지나고... 단종임금이 넘었다는 군등치를 넘으면 서면인데, 한반도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반도 지형이 있어 이를 관광자원화하려고 그러는듯한데 그래도 한반도를 面이름으로 하는것은 어쩐지 부자연스럽다.
<한반도 지형... 국내에 비슷한 지형이 제법 여럿이나 영월군에서는 面이름을 바꾸면서까지 정책적으로 밀고 있다.>
이렇게 서면(現 한반도면)을 지나면 영월땅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고개가 배일치(拜日峙)고개이다.
귀양지는 가까워 오고 불안한 마음은 커져가니 이 고개에서 서산에 지는 해를 보고 절을 하며 장차의 운명을 기원하였다하여 배일치고개가 되었다.
군등치나 배일치는 고개를 말하는데 우리말로는 고개, 재로 부르지만 한자어로는 령(嶺),현(峴),치(峙)등으로 부른다.
<배일치재에 절하는 단종으로 기념조형물을 만들어놓았다.>
<옛고개길.... 옛길을 고스란히 걸어보고 싶다.>
<배일치에서 내려다본 영월 방향... 첩첩산중을 바라볼때 마음이 어땠을까?>
<배일치 고개를 넘어서면 영월땅... 영월 초입이 소나기재이다.
삼복 더위에 일주일을 시달린 귀양길이 얼마나 힘들고 지쳤을까? 여기 이르러 시원하게 소나기가 내리니 소나기재...
선돌이 있어 고갯마루에서 잠시 차를 세우고 들러본다. 선돌 아래로 무심한 서강이 흐른다.>
<소나기재를 내려서자 커다란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장릉이나 청령포 앞에 세운 국지적인 홍살문이 아니다.
영월읍 전체가 신성시되고 단종임금을 섬기는 마음이라는 표시인듯~>
한양을 떠난지 일주일만에 귀양지 청령포에 단종이 도착하자 몰려온 백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군졸들이 막으면 막을수록 더욱 더 몰려들어 눈물로 통곡하면서 더러는 맛난 음식을 만들어 바치기도 하였다고 한다.
<청령포 전경....>
그러나 날이 저물자 백성들도 이내 사라지고 어둠과 적막만이 감싸는 청령포...
동, 남, 북 삼면이 서강물이 감싸 흐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 암벽이 험준하여 마치 절해고도와 같은 곳이다.
이 적막한곳에서 열일곱 어린 단종은 유배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얼마나 무서웠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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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정보 잘보고 갑니다..
온국민이 아직도 마음절여 하고 있는 단종이네요 ,,잘보고 감니다..
아름다운 영월입니다
좋은자료 정보 올려 주셔서 갑사합니다
좋은 관광자료 잘 보고갑니다.
멀고먼 길을 돌아서도 청령포라.. 태조 이성계의 왕자의 난을 알기에... 충신들에 그리 부탁 했건만... 수양대군의 칼날을.. 역사에 남기고... 그옜날 오지중의 오지 단종의 애사가 서리 서리 잠든곳.. 역사는 기록으로 남을뿐~ 오늘도~ 영월엔 꽂이 피고~ 바람이 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