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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일 오늘의 역사
2021년 북한의 지령을 받아 미국산 스텔스 전투기 도입 반대 활동한 간첩단 검거
북한 지령을 받고 F-35A 도입 반대 활동을 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국정원과 검·경의 수사를 받고 있는 청주 지역 노동단체 출신 4명 사건 관련, 수사기관은 이들이 해외에서 북한 공작원을 만나 지령을 전달받고 활동비 2만달러를 수령한 혐의 등으로 수사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국정원과 경찰은 지난 5월 이들 자택 압수수색을 통해 북한 문화교류국 공작원과 접촉한 정황이 담겨있는 ‘보고문’, ‘지령문’ 파일 등이 저장된 USB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USB에는 북한 체제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는 취지의 서약문과 김정일에 충성맹세 혈서 등 저장돼 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국정원 등은 구속된 A씨가 2018년 중국 선양의 한 대형마트에서 북한 측이 지원한 공작 활동비 2만달러를 받아 국내로 들여온 것으로 보고 있다. 마찬가지로 구속된 B씨는 다른 시기 중국에서 북한 공작원을 만나 택시 안에서 ‘귀국 후 남쪽에 지하조직을 결성하라’는 지령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2019년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대상에서 제외하는 안을 일본정부 각의 통과
한국을 수출관리대상의 일반포괄허가 대상인 이른바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내용의 수출관리령 안이 9월2일 통과 되고 9월7일 개정안을 공포하고 9월28일부터 3년간 유효한 일반포괄허가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비규제(일반)품목의 경우 무기개발 등에 전용될 우려가 있다고 일본정부가 판단하는 경우는 별도의 수출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 조치는 위안부 사건의 한일협약을 파기한 문재인정부에 대한 보복성 법안이다
이에 한국에서는 일본제품 불매운동 등이 일어 났다
2016년 브라질 리우 올림픽 열림, 올림픽 사상 최초로 난민팀 출전
2011년 '문화선교' 큰 발자취 남긴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 별세
온누리교회 하용조(65) 목사는 건국대 3학년 때 폐결핵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긴 뒤 당뇨, 고혈압, 간염, 간경화, 간암, 신부전증을 앓았다. 암 수술도 7차례 받았다. 아산병원 이승규 교수는 "의사들은 그분을 '오뚝이 목사님'이라 불렀다"고 했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별명도 그래서 생겼다.
장로회신학대학을 마치고 1976년 목사 안수를 받은 하 목사는 평생 쉼없이 달렸다. 온누리교회를 전국 9개 성전에 교인 7만5000여명 규모로 키웠고, 세계 각국에 122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선교를 위해 여행한 거리만 150만㎞, 지구 37바퀴다.
그는 별세 하루 전인 1일에도 예배 설교를 했다. 하 목사는 작년 9월 소천한 고(故) 옥한흠 사랑의교회 원로목사, 지구촌교회 이동원 원로목사,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 목사 등과 함께 '복음주의 4인방'으로 불렸다.
평안도 출신 피난민으로 목포에 살았던 하 목사 부친은 버려진 아기들을 거두는 것으로 유명했고, 나중엔 영아원을 운영했다. 고아들과 형제처럼 자란 하 목사가 평생 낮은 곳으로 임하는 사역에 집중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하 목사는 1985년 온누리교회 설립 때부터 재정의 3분의 1 이상을 제 사업 등에 사용했다.
'문화선교'도 빼놓을 수 없는 업적. 1980년 그가 세운 출판사 두란노는 문서 선교의 신기원을 이룩했고, 청년 찬양집회 '경배와 찬양'은 국내 여러 교회로 확산됐다. 2007년부터는 한류 스타와 함께 일본 내 13개 주요 도시에서 전도집회 '러브 소나타'를 열었다. 총 7만여명이 참석해 일본인 5000여명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됐다.
2004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 수성탐사선 ‘메신저호’ 발사
2일 미 항공우주국(NASA)의 수성 탐사선 ‘메신저(Messenger)호’가 플로리다주 케이프커내버럴 기지에서 델타로켓에 실려 발사됐다.
1973년 11월 발사돼 수성을 스쳐지나며 탐사작업을 한 ‘매리너 10’호 이후 30년 만에 처음. 6년 반에 걸쳐 약 79억㎞를 항해해 오는 2011년 3월쯤 수성 궤도에 진입할 예정이다.
‘메신저호’는 1년간 수성 주위를 돌면서 수성의 생성 과정과 양극점의 분화구에 얼음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확인하게 된다. 2013년 3월 마지막 정보를 보낸 뒤 궤도를 이탈, 수성 표면으로 추락하게 된다
2001년 사회원로-시민단체 인사 32명 ‘언론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 성명서 발표
강원룡 목사, 송월주 전 조계종 총무원장, 서경석 목사, 이석연 경제정의실천연합(경실련) 사무총장 등 사회원로 및 시민단체 인사 32명은 2일 ‘최근 언론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언론에 대해선 반성과 스스로의 개혁을 촉구했다.
이들은 이날 오전 서울 종로 YMCA 빌딩에서 발표한 성명서에서 언론사 세무조사와 관련,“한 언론사에 50~60명의 조사인력이 4개월간 투입되고 언론사 전 임원과 전 간부에 대해 계좌추적을 하는 등 건국 이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조사가 감행됐다”면서 ”23개 언론사가 전부 탈세를 했음에도 6개 언론사만 고발한 것은 공정성이 크게 훼손된 처사로 언론 길들이기와 언론탄압이라는 의혹을 해소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언론에 대해서도 “언론 개혁이 우리 사회 오랜 숙원이자 시대적 과제였음에도 그런 노력을 소홀히 해온 점을 크게 반성하고 스스로 개혁에 나서야 한다”면서 “사주측은 시장경제 원리에 의한 경영원칙을 무시하고 왜곡된 광고 가격 메커니즘과 불공정 거래, 탈세 등 전횡적 경영을 해 온 것을 반성하고 즉각 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어 “MBC, KBS, YTN 등 방송사와 연합통신, 대한매일신문 등 정부 지배하의 매체들이 정부 입김으로부터 자유롭도록 소유 구조 등의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우리나라는 일찍이 지금처럼 공론의 장이 파괴된 적은 없으며, 현재 지식인들은 어느 한편에 서도록 강요당하고, 더구나 특정신문에 기고를 하면 전화 폭력이 쇄도, 자기 의사 표현조차 꺼리고 있다”며 “이런 반(反)지성 풍토를 청산하고 언론개혁을 위한 공론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서 지식인들은 침묵을 깨고 사회적 발언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1999년 라이언킹 이승엽, 43호 홈런으로 시즌 최다홈런 신기록
`라이언 킹` 이승엽이 한 시즌 최다홈런을 기록했다. 이승엽은 1999년 8월 2일 대구시민야구장에서 열린 롯데와의 경기 5회말 공격에서 롯데 선발 문동환이 던진 142㎞ 직구를 경쾌한 타구음과 함께 쳐내면서 마침내 시즌 최다홈런을 기록했다. 43호 홈런이었다.
1998년 외국인선수 슬러거 타이론 우즈(두산)에게 내줬던 홈런신기록을 1년도 안돼 갈아치우며 18년째인 한국프로야구에 또하나의 새로운 신화를 기록했다. 1999년 7월 25일 대구 해태전에서 42호 홈런을 때린 이후 팬들의 기대와는 달리 21타석 13타수1안타로 부진을 보였던 이승엽은 이날 쳐낸 홈런으로 왕중왕의 자리에 오르게 됐다.
`야구의 꽃` 홈런포로 한국 야구사를 다시 쓴 이승엽은 어려서부터 야구천재였다. 경상중을 거쳐 야구명문 경북고에 진학한 이승엽은 3학년때인 1994년 캐나다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홈런상을 받아 타격자질을 세계에 떨친 바 있다. 이승엽은 고교때까지만해도 타자보다 투수로서 더 뛰어났다.
1997년 라이베리아 군벌지도자 찰스 테일러, 대통령에 취임
1997년 `비트제너레이션`의 대부 소설가 윌리엄 에스 버로즈 사망
1996년 프랑스 5공화국 초대총리 미셀 드브레 사망
1995년 서석재 총무처장관, 전직대통령중 한사람이 4,000억원 이상의 가명계좌를 갖고 있다고 해 파문
1993년 한국일보 회장 장강재씨 별세
한국일보사 장강재 회장(49)이 1993년 8월 2일 간암으로 별세했다. 장 회장은 1963년 한국일보사에 입사, 기획관리 실장, 부사장, 사장 등을 거쳐 대표이사 사장 겸 발행인,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한국일보 매체그룹을 이끌어왔다.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냈던 한국일보 장기영 창간 발행인의 5남1녀 중 장남으로 1977년 부친이 타계한 후 한국일보 매체그룹을 이어받아 33세의 젊은 나이에 언론총수가 된 그는 부친이 이룬 신문사업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회장이 된 직후인 1980년 군사정권의 언론통폐합으로 한국일보 자매지인 서울경제신문이 폐간되기도 했다. 그는 1988년 서울경제신문을 복간, 맺힌 한을 풀었다.
정직한 신문과 서민편에서 만드는 신문을 신조로 내세워온 장 회장은 6ㆍ29선언 이후 치열해진 신문환경에서 1989년 월요판을, 1991년 조-석간발행을 부활하고 전국 동시인쇄를 실현하는 등 공격적 경영전략을 펴왔다.
1992년 공군 CN-235 수송기 도입 확정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걸프전 발발
1990년 8월 2일 새벽 이라크가 정예부대인 공화국 수비대를 근간으로 한 5개 사단 10만명을 동원, 쿠웨이트를 일제히 침공했다. 총병력 2만명, 탱크 275대밖에 갖지 못한 쿠웨이트는 수도를 6시간 만에 내주어야 했고, 쿠웨이트 전역도 조직적인 저항 한번 못하고 이틀 만에 이라크에 넘어갔다.
아랍 민족주의자이며 반제국주의자를 자처한 이라크의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전격 침공하면서 쿠웨이트가 역사적으로 자기들 영토이며, 쿠웨이트 왕가는 제국주의 미국 등과 결탁한 아랍 민족주의 배신자라고 주장했다. 더구나 이라크가 이란과의 8년 전쟁을 치르는 동안 쿠웨이트인들의 호화로운 생활이 불만스러웠고, 이제는 쿠웨이트가 이에 대한 보답을 할 때라고 여겼다.
이라크의 불법적인 침략에 대해 유엔 안보리는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과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안을 결의했으나, 이라크는 철수는 커녕 8월 28일 쿠웨이트를 이라크의 19번째 주로 통합한다고 발표했다.
유엔 안보리가 11월 29일 “이라크가 1991년 1월 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을 경우 무력사용을 승인한다”는 두번째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이라크가 응하지 않자, 다국적군은 마침내 1991년 1월 17일 이라크에 대한 공습을 개시했다. 다국적군은 주로 공습을 통해 이라크군을 공격했다.
다국적군의 계속된 폭격에 전국토가 초토화된 이라크는 2월 28일 유엔안보리의 결의안을 수용한다는 사실상의 항복을 선언했다. 전쟁중 다국적군은 225명의 사망자를 냈으나 이라크는 군사망자 10만에서 12만, 민간인 사망자 5만~7만6천명의 인명피해를 보았다.
1989년 김대중 평민당 총재, 서경원 밀입북 사건 등과 관련해 국가안전기획부에 구인돼 철야조사
1988년 소련과 영사업무 공식문서 교환
1985년 미국 델타항공 L1012 댈러스 포트워드 공항 착륙도중 추락 132명 사망
1984년 김원기, LA올림픽 레슬링종목에서 금메달 획득
1982년 중국, 홍콩과 마카오의 영유권 재확인, 평화적 재통일 선언
1981년 볼리비아 군사쿠데타, 가르시아 대통령 실각
1980년 컬러TV 국내 시판 개시
국내 처음으로 1980년 8월 2일 부터 컬러TV가 판매되기 시작했다. 컬러방송은 여러차례의 시험방송 끝에 12월 1일부터 본방송이 시작됐다.
1972년 9월 상공부가 컬러텔레비전 생산계획을 발표한 후 8년동안 준비해 오다 1980년 6월 체신부가 컬러 텔레비전 방송의 표준방식을 미국식의 NTSC 방식으로 결정함으로 국내 컬러방송이 본격화됐다.
흑백 텔레비전용 브라운관이 최초로 발명된 것은 1897년이며 1932년에는 상품화되어 관측용으로 쓰였다. 1933년 키네스코프가 발명되면서 컬러 텔레비전의 기초가 마련됐다. 컬러텔레비전은 1940년 미국의 베아드가 그 원리를 개발하고, 1953년 미국의 RCA사가 컬러 브라운관을 개발한 후 실용화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1960년 7월에 처음 도입돼 9월부터 컬러방송이 시작됐다. 1964년 도쿄올림픽은 일본의 컬러방송 기술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시킨 계기가 됐다.
1980년 이탈리아 볼로냐역 폭탄테러로 84명 사망
바캉스족으로 혼잡한 이탈리아 북부 볼로냐 중앙역에서 1980년 8월 2일 오전 10시25분 대규모의 폭발사건이 발생, 84명이 사망하고 188명이 부상했다. 폭발은 TNT화약 80Kg에 상당하는 규모였고 대합실과 레스토랑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붕괴된 지붕 밑에 매몰되었다.
볼로냐역에 정차중인 스위스 바젤행 국제열차의 일부도 매몰되어 열차내의 많은 승객들이 사망 또는 부상했다. 폭발현장의 2층 대합실에서 폭탄의 일부로 보이는 금속파편이 발견되었고 폭발 10분전에 의심스러운 젊은이들이 현장에 있었다는 증언이 나와 폭탄테러의 가능성을 높게 해주었다.
사건발생후 이탈리아 극우조직인 NAR이 자신들의 범행임을 발표해 이 사건이 테러사건임을 입증해주었다.
1977년 미국, 북한의 군사수역 불인정 선언
1976년 대한항공 화물기 이란 테헤란공항 불시착 폭발(5명 사망)
1974년 한국-그레나다, 국교 수립키로 발표
1974년 아시아개발은행(ADB) 발족
1969년 닉슨 미대통령 공산권 나라 처음으로 루마니아 방문
1964년 미군, 통킹만 폭격
막대한 원조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 정부의 부패와 무능으로 전황이 날로 악화되자 존슨 미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 개입을 서두른다. 자칫하면 베트남을 잃었다는 비난을 혼자 뒤집어 쓸지 몰라 초조하기까지 했다. 직접적인 군사개입이 필요했으나 구실이 없었다.
1964년 8월2일, 미 정부가 중대발표를 했다. 통킹만 공해상에서 미 구축함 매덕스호가 북베트남 초계정 3척으로부터 어뢰공격을 받았으나 곧 반격에 나서 1척은 침몰시키고 다른 2척은 전투기가 격퇴시켰다는 발표였다. 4일에도 또 공격을 받았지만 역시 북베트남 함정 수척을 침몰시켰다는 발표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 발표는 몇년이 지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1968년의 미 상원 조사에 의하면 미군은 1964년 2월부터 북베트남을 도발하는 비밀작전 `34 A`를 수행해 왔고, 매덕스호는 북베트남 영해 내에서 스파이 활동을 해 왔다는 것이다. 더구나 4일의 발표는 허구이기까지 했다. 1971년 미 국방부 연구보고서 `펜타곤 페이지`에 따르면 미 함선이 먼저 공격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미 함선이 실제로 공격받았는가도 의문시됐다.
어쨌거나 존슨은 통킹만 사건 후 즉각 보복을 명령했다. 5일에는 미군 폭격기들이 북베트남 초계정 기지 4곳과 유류저장시설들을 폭격했고, 7일에는 동남아에서의 자유로운 군사행동을 보장한 `통킹만 결의안`을 상ㆍ하 양원에 상정, 의회로부터 거의 만장일치의 승인을 얻어냈다. 이로써 존슨은 전쟁을 확대할 수 있는 백지위임장을 손에 넣은 셈이 됐고 바야흐로 선전포고없는 전쟁이 시작됐다.
1964년 국회. 언론윤리위원회법안 통과
국회가 1964년 8월 2일 밤10시15분경 야당측이 거의 퇴장한 뒤에 재석 1백49명중 가 96표, 기권 53표로 `언론윤리위원회법안`을 가결했다. 이에 언론인들은 법철폐투쟁위원회를 구성, 8월 10일 전국언론인대회를 열고 17일에는 일간신문 등 19개 언론사 기자들이 모여 한국기자협회를 설립했다.
이 와중에 정부가 서둘러 언론윤리위원회를 소집하자, 한국일보사와 서울경제신문, 코리아타임즈, 서울신문사, 대한공론사가 투쟁위원회 탈퇴 통고를 해온 데 이어 윤리위원회 마지막날인 28일에는 동아, 경향, 조선, 대구매일 등 4개 신문사를 제외한 21개 신문사가 탈퇴했으며 대한일보는 결정을 미루었다.
정부가 신문구독을 방해하고, 언론사의 각종 이득을 박탈하는 보복 조치를 취하자 이를 규탄하는 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 10월 8일 투쟁위원회 위원들은 언론 자율규제 강화, 법 시행의 보류, 윤리위원회 소집중지 등을 건의, 박정희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언론파동은 막을 내렸다
1962년 동아일보 필화사건, `국민투표는 만능이 아니다` 라는 사설로 고재욱 주필-황산덕 논설위원 피검
1961년 89개 업체에 부정축재액 82억1천만환 통고
1960년 니제르 공화국 독립
1953년 주한미군사령부 서울대 건물 반환하고 용산으로 옮겨감
1945년 이탈리아 작곡가 피에트로 마스카니 사망
1943년 제2차세계대전 존F케네디 탑승 어뢰정(P109) 침몰
1942년 반공 지하조직 백의사 조직
1923년 미국의 제29대 대통령 하딩 사망
1922년 전화발명가 그레이엄 벨 사망
‘전화의 아버지’ 그레이엄 벨이 1922년 8월 2일 사망했다. 75세였다. 그가 사망하자 미국의 전화시스템은 1분간 침묵을 지켰다. 그의 서거를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전화라는 문명의 이기로 새로운 통신문화의 역사를 만들어 낸 그의 일생에 미국인들이 전화시스템을 잠시 정지시키면서 존경을 표한 것이다.
벨의 전화 발명에 대한 열정은 농아자 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처음 농아자의 의사소통을 돕기 위한 기기개발에서부터 시작됐다. 1847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난 그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1870년이었다. 26세에 보스턴 대학 발성생리학과 발성학 교수가 된 그는 농아자에게 ‘소리를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얇은 막을 이용, 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기기개발에 전념했다.
마침내 1876년 3월 10일 인류최초로 전화실험에 성공했고 그해 12월 22일 전화기를 세상에 처음 내놓았다. 이후 2백km 이상 떨어진 곳과의 장거리통화에 성공한 벨은 1877년 벨전화회사를 설립, 일반인에게 전화서비스를 시작했다.
1921년 성악가 엔리코 카루소 사망
전설적인 성악가 엔리코 카루소가 48세로 1921년 8월 2일 그의 고향 나폴리에서 사망했다.
화려한 음색과 풍부한 성량,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세계에 이름을 떨친 카루소는 1873년 나폴리의 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어려워 이렇다 할 음악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어려서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보인 카루소가 그나마 노래를 체계적으로 교육받을 수 있었던 곳은 나폴리 성당의 소년 성가대였다. 여기서 그의 소질을 발견하고 체계적인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준 이가 굴리엘모 베르기네였다. 그의 도움으로 카루소는 1894년 11월 모렐리의 오페라 ‘라미코 프란체스코’로 데뷔할 수 있었고 1900년 마침내 스칼라 무대를 밟았다.
그는 무대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명성은 유럽전역을 열광시켰다. 결국 카루소 붐은 대서양을 건너 뉴욕 메트로폴리탄으로 전해져 메트는 카루소와 1902년부터 1920년까지 계속해서 계약을 경신했다. 이 기간동안 무려 607차례의 공연에 출연함으로써 ‘카루소 신화’를 더욱 공고히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무대에 선 것은 1920년 12월 24일. 늑막염이 심해 더이상 노래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카루소는 1902년 3월 세계 최초로 음반을 녹음, 본격적인 오디오 시대를 열었다.
1920년 국제사법재판소 설치
1920년 서울지역 354.7㎜ 최다일일강수량 기록
1919년 산둥반도, 중국에 반환
1918년 일본, 시베리아 파병 선언
1916년 영왕 이은의 비로 일본왕족 이방자 여사 결정
1907년 대한제국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침
1902년 군부와 경무청 관리에 단발령 내림
1882년 미국 워너브러더스 영화사를 설립한 워너 출생
1802년 나폴레옹, 종신 통령 선포
1799년 프랑스 기구 제작자 J.E 몽골리에 사망
1788년 18세기 영국의 가장 뛰어난 초상화가, 풍경화가 게인즈버러 사망
1754년 미국 수도인 워싱턴 D.C.의 기초도면을 설계한 건축가 랑팡 출생
216년 칸나에 전투,
한니발의 카르타고군(2만6천명)이 로마군(5만명) 전멸시킴, 참전한 원로원 의원 80명 전원 전사, 로마 장군들은 ‘카르타고가 무서운 게 아니라 한니발이 무섭다’고 함, 외눈 장군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공격하였는데 알프스를 넘는 15일 사이에 10만 군사가 2만6천 명으로 줄어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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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