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 절정기
교황권 대 황제권
이 시대는 로마교회의 황금기라고 불리워지는데,1073년 힐데브란드(Hildebrand)가 그레고리 7세 교황으로 취임한 때부터 1303년 보니파시우스(Bonifacius) 8세가 죽을 때까지이다.
그레고리 7세
그의 원명은 힐데브란드로서 그는 타스카니(Taskani)의 소도시 소아나(Soana)에서 태어났다(1015-1085). 그는 레오 9세가 교황의 위에 있을 때,교황청의 부집사로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1073년에 레오가 죽자,그는 몇 대의 교황을 모두 그가 선정하다가,1073년에는 마침내 58세의 나이로서 자신이 스스로 교황의 위에 올라 그레고리 7세라 칭하였다. 그의 교황 즉위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되었다.
즉,1059년의 종교회의에서 니콜라스(Nicholas) 2세가 제정한 법,즉 교황 선출은 추기경회에서 선택하고 후에 로마 성직자와 백성들의 승인을 얻는 방법을 간과하였다. 그는 알렉산더(Alexander) 2세의 장례식 예배를 집행하는 중,갑자기 군중들의 환호에 의해서 백성들에 의해 성 베드로 성당으로 옮기워졌다. 그래서 그는 교황이 되었고,나중에 추기경들은 다시 그를 선출하여 합법화하였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이 있다면,당시에 땅에 떨어져 있던 교황의 권위를 다시 회복시켜 준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교황권을 회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일을 집행하였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은 모든 토지와 소유를 장악할 수 있으며,또 하사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모든 교직자들은 독신생활을 해야만 한다는 조문을 엄중히 실시했다. 독신을 실시한 이유는 교직자들이 주장하던 세속적 권위를 제거시키고 교역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당시에 빈번하던 성직매매를 금지시켰다.
●더 나아가서 그는 교황이 국왕을 지배할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평신도 서임권 문제와 결부되는데,이 평신도 서임권이란 봉건제도 하에서의 봉신이 영주로 부터 토지를 소유하는 댓가로 충성을 다짐하는 어떤 식을 치루듯이,고위 성직자도 땅을 소유하게 될 때는 영주 앞에 서임식을 치뤄야 했다. 간단히 말해서 평신도 서임권의 논쟁은 평신도의 사제직(당시의 사제직은 또한 세속적 권한도 포함한 것) 서임권을 세속적 영주가 취할 수 있는냐 없느냐에 대한 논쟁이다. 즉 교황권과 세속 왕권과의 줄다리기였다.그러나 교황은 서임권을 영주에게서 취하여 내기 위해서 평신도 서임을 금지했다.
그레고리 7세는 즉위 2년만인 1075년, 자기 자신과 막료 앞으로 보낸 각서 ‘교황 칙령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중세 유럽을 밑바닥부터 뒤흔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레고리우스의 말에는 일점의 애매한 점도 없었다. 그는 선언했다. 교회는 지금까지도 불가류했고 또 항상 그러하며 그리고 이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캐톨릭 적 기독교도라고 볼 수는 없다. 법왕은 지고(至高)하며 “모든 군주로 하여금 그 발에 입맞추게 하는 유일한 인간”이다. 교황은 절대작인 영적 권위를 갖는다. 따라서 지상의 누구도 여기에 이의를 말해서는 안된다. 모든 세속 권력은 법왕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으며, 법왕은 국왕이나 황제까지도 파면할 수가 있었다.
카놋사의 굴욕
개혁된 법왕권과 제국 사이의 충돌은 더 이상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교회와 국가 사이에는 권력 투쟁의 회오리 바람이 몰아쳤는데 이윽고 법왕과 황제 사이에 최초이 정면 충돌이 벌어졌다. 그레고리우스가 당시 제위에 올라 있던 신경질적인 청년, 독일 왕 헨리 4세를 억지로 자기 진영에 가담시키려 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그레고리우스가 예의 선언을 발했을 때 헨리는 교황의 명령 같은 것은 그것이 설사 어떤 종류의 것이든 귀담아 들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성직 매매적인 선출방법은 그의 기질에 꼭 맞았고 자기의 사교로 간주하고 있던 지위에 앉은 인간을 결정하는 일에 법왕이 간섭하는 것을 싫어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독일 왕 헨리 4세는 그레고리 7세의 정책을 반대했다.
그의 행위에 대해 로마로부터 3인의 사자가 파견되어 법왕의 견책을 직접, 그리고 강경한 어조로 전했으나 헨리는 거기에 대항하여 교황 반대파와 결탁하여 1076년 웜스(Worms) 회의에서 교황의 폐위를 결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교황은 즉시 회의를 소집하여 헨리를 파문하고,동시에 폐위시킬 것을 선언하였다.
당시의 정세는 황제에 대한 불신감이 크게 조성돼 있었으므로,황제는 지지자들을 잃고 말았다.헨리를 좋게 생각하지 않던 제국에 항상 시끄러운 일을 들이대던 반역적인 색슨인은 법어을 독일의 아우구스불그에 초청하여 새 왕의 선출에 대해 의논하려 했다. 법왕은 이 제의를 승낙하여 아우구스불그로 향해 출발, 그 도중 부유하고 유력한 동맹자 투스카나 백작 부인 마틸다의 성이 있는 카놋사에 머물렀다.
싸움에 패한 것을 안 헨리 측근의 제후들은 그에게 교황 앞에 가서 사죄할 것을 권고하였고,마침내 헨리는 아내와 어린 아이를 데리고 법왕을 만나기 위해 알프스를 넘어 남으로 향했다.그때 교황이 잠시 머무르던 카놋사(Canossa)로 찾아갔다. 거기서 그는 사흘 밤낮을 모진 추위 속에 맨발로 참회순례자가 입는 허술한 양털옷을 입고 눈덮인 성문 밖에서 서 있어야 했다. 나흘 째 되던 날,백작 브ㅜ인 마틸다의 조정으로 교황은 그를 받아주었고,황제는 교황의 발 앞에 엎드려 사면을 받았다. 이것이 이른바 ‘카놋사의 굴욕’이다.
법왕의 사면은 받았으나 헨리는 독일에 있는 적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그들은 다른 국왕을 택한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는 헨리에 작대하는 세력들을 묶어 그를 파문의 사슬에 묶여 있다고 말하고서 왕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박탈했다고 선언, 기독교도는 그의 칙령에 복종해서는 안된다고 명령했다.
헨리의 역승
그러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사면 받은 후 헨리는 그의 정적들을 패배시키고,그를 반대했던 제후들에게 보복을 가했다. 또 교황 주재로 열릴 예정이었던 아우스불그(Ausburg) 회의도 못하게 막아서 교황의 의도를 좌절시켰다.
그러자 교황은 로마 회의에서 헨리 4세를 또 파문선언하였다(1080).그러나 독일 국민의 지지는 이번에는 황제에게로 쏠렸다. 결국 교황과 황제와의 싸움은 백성들이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최초에 ‘카놋사의 굴욕’을 낳게 한 이유는 헨리가 독일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에 무력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그의 강압적인 정치를 싫어했고,봉건 영주들은 이 기회가 헨리 황제에게 더 이상 순종치 않아도 될 호기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교황의 제 2 파문에 독일 국민들은 요동치 않았다. 그 이유는 헨리를 대적하는 루돌프(Rudolf) 세력과의 싸움에서 헨리가 이기고,국민들은 헨리를 지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그레고리 7세 교황을 폐하고 자기가 선택한 크레멘트 3세를 그 위에 임명하였다.
이어서 황제는 로마를 점령하고,폐위된 그레고리는 남부 이태리의 살레르노(Salerno)의 산성에 피난했다가 건강을 해쳐 곧 사망했다. 법왕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부정을 미워했다. 따라서 나는 유배 속에서 죽는다” .
그러나 헨리의 승리도 잠깐이었다. 그는 후반생을 반란 속에서 지새웠다. 1106년에 그가 죽었을 때 왕좌는 독일 귀족들에게 빼앗기고, 그의 아들이며 아버지를 감금하고 있던 헨리 5세에게 주어졌다.
계속되는 쟁투
감독 서임권 문제
감독의 서임권 문제는 계속적으로 미해결 상태로 끌어가다가,교황과 황제 두 편이 모두 싸움에 지쳐서 1122년 웜스 협약을 하게 되었다. 그 협약의 내용은; 감독이 임명될 때에는 황제가 홀(笏)을 주고 교황이 지환을 준다. 즉 교황은 영적 권위를 가지고 감독을 선출하기때문에 하나의 상징물로서 반지를 주눈 것이고,황제는 그에게 세속적 봉건 재산권을 주었기 때문에 지팡이를 주는 것이다.
교황이 감독을 선출할 때에는 언제나 황제 또는 그 대리자가 임석해야만 하며,임직식을 거행할 때에는 황제가 앞서고 교황이 그 뒤를 따르는 순서로 거행하기로 했다.
걸출한 교황 알렉산더 3세(1159-1181)와 독일 황제 프레드릭 1세와의 20년에 걸친 교전사건도 유명하다. 프레드릭은 당시의 운용되고 있던 왕권보다,원래 로마 제국의 왕권은 훨씬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옛날 로마법을 들고 자신의 권한을 회복하려 하였다. 그러자 교회는 교회법(Canon Law)을 방패로 하여 황제에게 대들었다.
황제는 로마를 다섯번이나 공격했으나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1177년 베네치아의 성 마가 회당에서 황제는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발에 입맞추니,교황은 그를 붙들어 일으켜 평화의 키스를 해주었다. 이 사건은 약 100년 전에 프레드릭 황제의 증조부 헨리 4세가 힐데브란드 앞에서 무릎 꿇은 것을 상기해 준다.
인노센트(Innocent) 3세(1198-1216)의 시대에 이르러 교황의 권위는 가장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는 주장하기를,교황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왕의 왕이기 때문에,세상의 왕을 심판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인노센트 3세는 또한 제 4회 십자군 운동(1202-1204)을 알비(Albi) 파 종식을 위해 일으켰고,종교재판과 고해성사(告解聖事) 제도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국민국가의 탄생
이 밖에도 법왕과 황제 간에는 갖가지 충돌이나 권력 교체가 있었다. 어떤 때는 법왕이 이기고 어떤 때는 황제가 이겼다. 교회 측이 이겨서 그것이 마치 기독교의 황금시대의 여명처럼 생각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법왕직이 싸움에 져서 위협받고 추방되고 분열하는 시대가 왔다. 제국과 법왕권과의 싸움은 끝없이 계속되어 이어졌고 이윽고 유럽 사람들은 이미 어느 쪽도 원하지 않게 되고 또 법왕이나 황제가 없어도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 새 형태의 권력이 등장한다. 국민국가이다.
유럽은 폐쇄적이고 농업의존적인 생활양식 속에서 발생한 봉건체제에서 탈피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봉건체제로서는 도시의 발달, 무역의 신장, 화폐의 사용, 공업기술의 탄생등에서 야기된 사회적 경제적 제문제에 아무런 해답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관계도 예전과는 달라지기 시작했으며 이미 봉건제의 낡은 조직으로는 사회질서를 충분히 유지 할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인사를 처리하기 위해 새 방법을 영구할 필요가 생꼈다. 사회생활의 이러한 사실을 간파하고 권력을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가를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이 12세기 및 13세기에 근대적인 국민국가의 기초를 쌓은 것이다.
국가는 군주제에 의해 건설된 것이었는데, 군주제는 원래가 봉건제도가 진화된 형태였다. 선두를 달린 국가는 프랑스와 잉글랜드였다. 이 두 나라는 각기 다른 방법으로 행정과 사법체계를 이룩했고 결국 최후에는 전유럽의 나라들이 이 체계를 본받았다.
국가는 뚜렷한 지리상의 경계를 가지며 안으로는 질서를 유지하고 밖으로부터의 침입을 격퇴하는, 지금까지는 없던 새로운 존재였다. 국가는 봉건제도 하에서는 다양하고 불규칙했던 제기능을 중앙으로 집중시켰다. 점차로 확대되는 인간의 이해문제 즉 정의의 집행이라든가 권리의 확보, 곳에 따라서는 산업의 규제나 보건과 의약의 규제등을 국가가 감독하게 된 것이다. 국가는 성문법에 그 기초를 두고 사회 구성원을 점점 많이 참여시켰다.
보니파시우스 8세
교황권의 쇠퇴는 보니파시우스(Bonifacius) 8세( -1303)의 시대에 이르러 찾아오게 되었다. 교황권 쇠퇴의 원인을 간추리면, 우선은 교황의 교만과 권력 쟁취욕이 빚은 반대세력의 성장 때문이고, 그 다음으로는 각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족주의 사상은 한결 같이 제국주의와 유사한 교황권에 대하여 적대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1296년, 보니파시우스 8세는 교서 “재속성직자”를 발포하여 성직자에 과세하는 속인 지배자와 법왕의 승인없이 그것을 납부하는 성직자는 파문한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도 필립도 새로운 형의 세속군주였으므로 로마의 맹렬한 비난에 동요하지 않았다.프랑스 왕 필립(Philip) 4세는 교황이 1296년에 발한 법령,즉 국왕과 제후는 교황의 허가 아래서만 교직자에게 과세를 부과할 수 있다는 것에 반대하였다.
에드워드는 그 회답으로서 성직자가 세금을 불지 않으면 모든 법적 보호를 박탈하고 그 세속 재산을 국왕의 대관을 통해 차압하겠다고 포고했다. 필립은 자기영내에서 금, 은, 보석의 반출을 전면금지하고 법왕의 주요 재원이든 프랑스 교회로부터의 세수입을 법왕에게 뺏으려했다.
결국 보니파시우스가 양보했다. 성직자가 긴급을 요할때 방위를 위해 거부하는 것을 금지시킬 생각은 없다고 그는 해명했다.
보니파시우스의 실패
그러나 그것으로 일이 수습된 것은 아니었다. 성년의 대성공에 도취했던 보니파시우스는 방바곡곡의 기독교국이 그에게 보여준 정신적인 복종표시가 세속적인 영역에까지 미치고 있다고 오판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법왕은 필립에게 집중포화를 퍼부어 그의 지위가 어떤 것이가를 보여 주리라 마음먹었다.
1301년, 국왕 필립은 예전의 교황 특사였던 프랑스의 어떤 성직자를 반역죄 혐의로 투옥했다. 보니파시우스는 이 고위성직자의 석방을 명하고 성직자 과세에 대한 양보도 철회했다.
1302년 필립은 프랑스의 귀족, 성직자, 브르즈와를 소집하여(이것은 그의 국민회의인 3부허ㅣ의 시초이다), 법왕과의 분쟁에 대해 만장일치된 그들의 지지로서 대답했다. 필립의 대신중 한 사람은 왕을 지지하는 이유를 대담하게도 이렇게 말했다. “왕의 검은 강철로 만든 것이지마 법ㅇ의 것은 입으로 만든 것이다.”
몇 달 후 보니파시우스는 교서 “유일하게 거룩한”을 발포하였는데 이것은 법왕의 세속적 수위권을 전 교회시상 가장 극렬하게 주장한 것이었다. 이때 보니피티우스는 자기의 생각을 오해가 없도록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했다. “로마 밥왕에게 복종하는 것은 어떠한 인간에게나 필요불가결한 것이다”라고 그는 선언했다.
그러나 헨리의 보니파시우스에 대한 대항책은 누구못지 않게 과격한 것이었다. 그는 보니파시우스의 선거가 위법이라는 이유로 파면준비에 착수했다.
교황은 프랑스 국왕을 파문시키려 아나그니(Anagni)에 있었는데, 프랑스 왕이 파견한 마병에게 보니피티우스는 며칠동안 사로 잡힌 몸이되었다. 결국 아나니의 서민이 궐기하여 그를 구출했으나 망신을 당하여 얼이 빠진 사람처럼 되어버린 법왕은 수주일이 지니기도 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로마에 있던 보니파시우스의 후계자 역시 짧은 치세 동안 아무런 효과도 올리지 못하고 죽었다.
십자군 운동
십자군 운동의 원인
최소한 몇가지 복합적인 원인을 들 수 있겠다. 십자군의 배후에는 복잡한 동기가 있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기독교의 성지를 마호멧 교를 믿는 이교도의 지배로보터 탈환한다는 것이 십자군의 대의명분이었으나, 매우 복합적인 동기들이 작용되었던 것 만은 사실이다.
신앙적 원인
우선 신앙적인 원인을 들자면 다음과 같다. 주후 638년에 예루살렘이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점령되고,또 1071년에 터어키 군이 다시 정복한 후부터는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들은 신앙적 갈등을 갖게 되어,성지 탈환에 대한 신앙적 정열이 한데 모아졌다.
그들은 십자군에 가담하면 과거의 죄를 보상하는 회개의 사면이나 채무 연기 등을 교회가 약속하고 있는 데에 희망을 걸었다.
군사적 원인
십자군 운동의 정치적 원인으로서는,애당초 이슬람교도들에게 동방에서 패했던 그리스도인들은 이 당시에 이르러 이슬람교도들에게 싸워 이기는 경험을 계속 맛보게 되어,그리스도인이 이슬람교도를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퍼지게 되었다.
경제적 원인
경제적 원인으로서는,10,11세기에 걸쳐 계속적인 빈곤으로 인하여 종교적 감정이 더욱 깊게 자극되었다. 그래서 현세와 내세의 비교,수도원적 금욕생활 등이 고조되어갔다.
로마 교회는 동방에 있는 최대의 경쟁자인 그리이스 교회의 영역에까지 그 지배를 넓히는 데 있어서 십자군이야 말로 절호의 챤스라고 생각했다. 서유럽의 왕과 봉건 영주들은 새 땅과 재원을 획득할 수 있을 까 하고 은근히 기대했다.
직접적 원인
십자군의 직접적 원인은 기독교국의 동방의 요새, 즉 기독교가 된 최초의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건설한 자랑스러운 도시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군사적인 위협이였다. 비잔티움의 왕좌를 이은 콘스탄티누스의 후계자들은 아시아에서 밀려오는 온갖 침입자들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신념이 깊은 마호켓 교도들을 포함한 이들 침입자들 중에서 가장 사나왔던 것은 마지막에 쳐들어 온 셀주크 터어키였다. 1071년 셀주크 터어키는 수천의 비잔틴군을 패주시키고 소아시아 깊숙이 진격, 비잔티움으로부터 국토의 반 이상을 빼았았다.
1073년, 비잔틴 황제 미카엘 7세는 서구의 기독교국에 원조를 요청했다. 교의에 관한 분쟁이 고조되어 교회가 서방과 동방으로 분열된 것이 불과 19년전의 일임을 생각하면 그의 이 행동이 얼마나 절박한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교상태(離敎狀態)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카엘은 법왕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사절을 보냈다. 그레고리우스는 따뜻이 맞이하기는 했지만 그는 교회 개혁의 적과 싸우기에도 힘겨운 상태였다.
계속되는 4반세기 동안, 셀주크 터어키는 잠식을 계속하여 다른 지점과 아울러 니케아 고성을 점령했다. 이곳에서 콘스탄티노플까지는 보스포러스 해협만 건너면 된다.
이번에는 비잔틴 황제 알렉시오스 콤네소스(Alexios Commnesos)로부터 새 간청이 당시의 법왕 우르반 2세에게 왔다. 알렉시오스는 미카엘보다도 빈틈이 없었다. 그는 자기 왕위에 대한 위협은 별로 비치지 않고 전통적으로 기독교적이었던 영토에서 마호멧 교 무법자들을 축출하는 것은 서방과 동방의 신자들에게 필요한 일이라고 강조한 친서를 로마에 보낸 것이다.
십자군 운동의 진행
우르반 2세
동방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터어키 군의 위협을 받아 도움을 요청했을 때, 우르반(Urvan) 2세는 교황권 확장의 호기로 보고 이를 원조하기로 했다.
우르반 2세는 1095년 11월, 남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교회 회의를 열였다. 회의는 추기경,사교,귀족들이 모였다. 교회 바깥의 광장에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잔뜩 모였다. 교회 행사에 참석한 후 우르반은 바깥으로 나갔다. 자기가 이제부터 하는 말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우리들이 오늘 여기에 모인 것은 모든 신자에게 급박한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국경으로부터, 그리고 콘스탄티노플로부터 무서운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 신으로부터 저주받고 버림받은 민족이 기독교도들의 땅에 침입하여 칼과 약탈로서 주민들을 말살했다”. 이어서 우르반은 터어키인은 성당을 약탈하고, 그곳을 마호멧교의 의식용으로 전용하여 제단을 더럽혔으며, 기독교도의 여자를 능욕하는 가 하면 그 남편들을 고문 살해하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이러한 악당들에게 복수를 하고 영토를 탈환하는 것이 당신들의 책임이 아니면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성묘에의 길로 나가서 그 땅을 불법 민족으로부터 빼앗고 그들을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감정에 호소하는 그의 말은 박진감을 가지고 청중의 마음에 박혔다. 우르반은 청중들에게 그들이 가려는 땅은 환희의 낙원이며 젖과 꿀이 흐르고 있다. 글에 비해 지금 떠나려는 땅은 당신들 전 주민을 지탱하기에는 너무 좁기 때문에 식량 공급도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해 프랑스는 대기근이 만연했기 때문에 이 말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결정타가 되었다. 교황은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침으로써 소위 ‘성전(聖戰)으로서의 십자군 운동의 동기를 부추겼다.
우르반의 말이 끝났을 때 우렁찬 목소리가 청중들 속에서 일어났다. 하나님이 원하신다(Deus Vult!)는 외침이었다.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어 참여키로 했고, 이 폭풍과 같은 반응은 예상 외의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법왕은 그에 알맞는 행동을 취했다. 당장 그 자리에서 교황은 십자군에 자원하는 자에게는 면죄(免罪)의 특권을 준다고 선포하였다.그리고 이 함성은 적을 향한 함성이며, 이 신성한 모험에 따르는 모든 사람은 외투나 사제복 또는 저고리에 십자가 표지를 달라고 선언한 것이다.
산회하기 저에 청중으ㅢ 대부분이 자기의 외투를 찢ㅇㄴ은 길쭉한 천으로 몸에 십자를 달았다. 얼마 안가서 서구의 도처에서 수천며으의 사람들이 이 의사표시를 되풀이했다. 선전은 교묘하고 치밀하게 전개되어 사람들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다. 성직자나 설교자가 열심히 권ㅇ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거기에 더하여 마호멧 교도의 가증스러운 소행을 자세히 적은 여러가지 문서도 만들어졌다.
십자군 원정
군주들이 지휘하는 제 1차 십자군은 승리로 끝났다. 1097년 초에 4대의 원정군이 해륙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했다.
십자군은 1097년 말까지에 알렉시우스를 위해 소아시아를 탈환하고 남으로 진격하여 아르메니아의 트리폴리 등 주요 도시를 함락시켰다. 1099년 7월 15일, 5주간에 걸친 포위 끝에 예루살렘 마저 함락되어 최후의 승리가 닥쳐왔다. 거리는 이교도의 피로 붉게 물들었고 이 잔혹한 클라이막스와 함께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터어키로부터 빼았았다.
제 2차 십자군 에 두 군주,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드 3세가 참가하고 있었다. 두사람은 당시의 고명한 성직자 클레보의 수도원장 버나드에 설득되어 응한 것이다. 버나드와 제 2차 십자군의 관계는 꼭 우르반과 제 1차 십자군의 관계와 같아서 말하자면 그가 도화선 역할을 한 것이다. 버나드는 교회개혁을 지향하여 창립된 극히 엄격한 수도회의 하나인 시토파 수도사였다. 그는 속세를 버리고는 있었으나 뛰어난 지성과 가차없는 정통신앙의 옹호의 태도 때문에 교황이나 국왕의 고문이 되어 있었다.
법왕직은 동방의 새 기독교국에 사절을 파견하는 등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교회는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다. 면죄부란 죄 많은 영혼이 연옥에서 죄를 소멸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을 부분적 또는 완전히 구제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십자군에 가담한 자가 고인이 된 가족이나 친구를 위해 면죄부를 사들였으나 이윽고 돈만 지불하면 십자군에 참가할 의무마져 면제받게 되었다. 십자군에 가담하는 데 다른 사람에게 돈을 주어 대신 보내도 좋고 또 교회에 일정한 돈을 바치면 교회가 대신할 사람을 사주기도 했다.
이런 관례가 번진 것은 사람들의 십자군에 대한 태도가 급속히 달라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람들은 십자군을 평온한 생활을 어지럽히는 성가신 방해물, 혹은 자청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시도라고 간주하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십자군에 점점 재앙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1149년, 제 2차 십자군이 와해된 후에도 대규모적인 십자군이 6회 있었고, 조그만 원정은 수없이 거듭되었다. 그러나 제 1차 십자군 때의 성공과 정신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제 3차 십자군은 민중의 열광을 불러 일으킨 점에서 제 1차에 가까왔다. 1187년, 뛰어난 용기와 성격을 지닌 새 사라센 지휘관 살라딘이 거느린 군대는 지하드(Jihad)를 외치며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이 반십자군 행위는 유럽인에게 큰 충격을 주어 3이의 유력한 지배자가 궐기했다. 독일의 프레드릭 바르바로사, 프랑스의 필립 아우구스투스, 잉글랜드의 리처드 사자왕, 세사람은 동방으로 향했으나 결국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제 3차 이후의 십자군은 점점 더 십자군 답지 않아졌다. 중세 전체를 통해 법왕 권력을 가장 강력히 떨친 인노센트 3세는 제 4차 십자군을 스스로 권설했으나 이 십자군은 성지로는 향하지 않았다. 교활한 베네치아의 총독이 그 목적을 상업적인 것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베네치아인과 십자군은 주민 모두가 기독교도인 달마티아의 항구를 상업상의 라이벌이라는 이유로 점령하기로 하고 손을 잡았다. 이어서 그들은 덤으로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여 1204년에 이곳을 함락, 약탈을 자행했다. 이리하여 동방과 서방의 기독교국 사이에 남아있던 유대는 끊겼다. 이 탐욕적인 원정을 제지하지 못한 법왕직은 면목을 잃었다.
8년후인 1212년에는 상상을 할 수 조차도 없는 가련한 두개의 어린이 십자군이 출현했다. 프랑스의 크로외에 살고 있던 에티엔느라는 12세의 목동은 그가 양을 돌보고 있을 때 그리스도가 나타나 예루살렘으로의 어린이 십자군을 조직하도록 일렀다고 말했다. 어른들이 웃고 있는 사이에 약 3만의 프랑스 소년이 에티엔느의 부름에 호응하여 그와 함께 프로방스를 지나 마르세이유까지 진출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모세를 위해서 했듯이 바닷물을 열어 발을 적시지 않고 지중해를 건너게 해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노예 상인들이 그들을 속여 배에 태우고 북아프리카나 이집트의 사라센인에게 팔아넘겼다. 같은 해에 일어난 2만명으로 된 독일의 어린이 십자군은 이탈리아까지 밖에 전진하지 못했다.
제 6회 십자군 원정인 1229년에는 가장 기묘한 십자군이 나타났다. 법왕에 의해 파문당한 군주가 지휘한 무혈의 외교적 십자군이다. 그 군주란 바르바로사의 손자인 독일 황제 프레드릭 2세인데 그는 모든 면에서 그 당시 기준으로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프레드릭은 대화로 일을 해결하는 것을 신념으로 삼고 있었다. 군대를 거느리고 동방에 도착한 그는 이집트의 술탄을 방문하여 의기투합, 한번도 공격하는 일이 없이 협정에 의해 10년 간의 휴전을 약속 받고 예루살렘, 나사렛, 베들레헴을 협상을 통해 다시 얻었다.
그러나 프레드릭이 기독교국을 얻기 위해 얻은 승리는 오래 가지 않았다. 사라센인에게 1244년에 예루살렘을 다시 Islam교도에게 빼앗겼다.
그 때문에 이루어진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가 거느린 7,8차에 걸친 2회의 십자군 원정은 왕이 이질에 걸려 죽자 끝나고 기독교는 끝내 성지를 회복하지 못하고 말았다.
1291년에 이슬람 군대는 성지에 있는 기독교 최후의 보루 아콘을 점령, 마침내 갖가지 의도와 목적으로 행해진 십자군은 종말을 맞이하고 예루살렘은 완전히 이슬람 교도의 소유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십자군운동의 결과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에 걸친 약 200년간 중세 사람들의 마음은 십자군에 빼앗겼다. 종교적 열정의 분류가 십자군의 발단이었다. 그러나 끝난 뒤에 남은 것은 다만 환멸과 혼란뿐이었다.
그후 세계 제 1차 세계대전에 와서야 영국은 터어키로 부터 팔레스틴(Palestine)을 다시 빼앗았다. 그러자 흩어졌던 이스라엘인은 고국으로 돌아오고, 이어서 1948년 5월 14일에는 이스라엘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고,1967년 6월에는 예루살렘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1990년에 발발한 걸프(Gulf) 전쟁은 900여년 전의 십자군 전쟁을 다시 재현한 듯한 것이다.
십자군 운동의 실패요인
이해가 상반된 각 나라의 군사를 한 손에 지휘할 군사통수권이 교황에게는 없었다. 그리고 헌신적인 정신으로 성지 회복을 주장했던 초기의 열심은 사라지고,세속적인 불순한 동기와 내부 분열이 점차 짙어지게 되었다. 더군다나 십자군 병력은 오합지졸인데 반해서,이슬람 군대는 잘 훈련된 기병과 지리적 환경에 익숙한 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십자군 운동의 유산
유럽의 각 국이 기독교회의 일치된 목적 아래 단합되었으며,이슬람교가 함부로 서방침입을 못하도록 저지하였다. 이 전쟁을 통하여 귀족들이 재산을 잃어 봉건제도가 무너지고,그 대신 중산사회가 일어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해운과 상업이 발달하고 이태리 지중해 연안 도시의 번영을 가져다 주었다. 또 동방문화가 접촉되어서 서방세계의 정신적 세계가 확장되어 갔다. 그런 중에도 면죄부 판매와 부자 상인들의 기증 등으로 교황청의 수입은 날로 증가되어 갔다.
선교와의 관계
십자군운동이 교회에 준 가장 명백한 결과는 비잔틴과 모슬렘교도들을 희생시키고 동방에 라틴 교회 의식을 보급시킨 것이었다.십자군운동이 전체 문명에 끼친 종교적,지식적,그리고 사회생활적인 영향은 너무나 크고 광범위하다. 도처에서 지적 계몽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 중세기 신학 발전의 최고봉인 스콜라신학이 나왔다.
어떤 십자군 원정을 ‘교회의 선교전쟁’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러나 선교학적인 면에서 볼 때는 엄밀히 말해서 이 굉장한 원정은 선교운동이었다고 볼 수 없다.
“하나님이 이를 원하신다!”(Deus Vult!)라는 교황의 강력한 선동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지루한 전쟁 속에서 처음에 나타났던 종교적 열정은 사라지고, 그 대신 온갖 세속적인 동기들이 머리를 쳐들게 되었다. 정치적, 종교적 세력 다툼이 지도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게 되고, 처음에 추구하던 목적을 인식하지 못하게 됨으로서, 결국 이 운동은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십자군운동이 비록 그 직접적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운동이 기독교 선교에 미친 영향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운동으로 인해 서방사람들과 동방사람들 사이에 보다 깊은 이해와 접촉을 가져오게 되었다. 특히 서방사람들이 품고 있었던 낡은 편견과 증오심이 변하여 대국적 정신의 길을 열어 주었다.
또 이 운동으로 말미암아 아직 기독교를 잘 알지 못했던 지역에 복음이 전파하게 된 결과도 있었다. 모슬렘교도들을 그 지역에서 쫒아 내는 것이 주목표였지만, 어떤 이들은 모슬렘교도들의 영혼에 크게 관심을 가져, 그들을 위한 선교운동을 시작한 이들도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레이몬드 룰(Raymond Lull)이다. 그는 말하기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산 자가 아니요, 생명으로 사는 자는 죽을 수 없다”고 외쳤다. 그는 마치 십자군이 육신의 무기 대신에 정신의 무기를 갖고 임했었더라면 얼마나 큰 성과가 있었을까를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주신 자와 같이 행동하였다.
그는 스스로 아라비아말을 익히고, 다른 사람에게 여러가지 나라말을 가르쳐 그들을 선교사로 적합하게 하는데 전 재산을 투자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돕지 않자,그는 단신으로 모슬렘교도들 속에 뛰어 들어가 독립전도로서의 일생을 마쳤다. 브리스(E. M. Bliss)는 말하기를, “선교사업에 있어서 그는 북쪽 유럽의 신도들과 종교개혁 이후 급속히 늘어가는 세계 각곳에 복음을 전파한 지도자들 사이를 연결해주는 존재였다”(E.M. Bliss, The Missionary Enterprise, 33)고 하였다.
수도원운동
수도회의 발전
베네딕트파의 규율은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을 훌륭하게 키웠다. 이 수도회원 중에서는 수천명의 사교와 대사교, 24명의 법왕이 배출되었을 정도다. 중세 후반기에는 수도운동이 광범위한 발전을 보여 각기 독자적인 성격을 지닌 새 수도회가 몇개 설립되었다, 크루뉘파 수도사는 증대하는 교회의 부패와 해이에 대항하여 싸웠다, 카말돌리파,샤르트르스파,시토파에 석한 수도사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외진 성채에 들어 앉아 초기 기독교도의 엄격한 생활방식을 부활시켰다.
아씨시의 프랜시스코에 의해 설립된 프랜시스코파와 도미니코파 수도사는 독방에 파묻히지 않고 탁발 수도사가 되어 민중 속에 파고 들어가 설교하며 다녔다. 10세기에는 대륙에 사는 사람들의 태반이 기독교도가 되어 있었다.
기사 수도회(11세기)
십자군 운동기에 유럽세계, 특히 교계에는 새로운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시대의 가장 강력한 욕구인 투쟁욕과 성화에로의 욕망을 십자가의 깃발아래 결속시키려 생각했던 것이다.
기사단은 수도자의 세가지 맹세위에 무기를 들어 그리스도께 봉사한다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회는 성전 가사단과 성요한 가시단, 독일 기사회등을 3대 기사수도회라 부른다. 그러나 성전 기사단은 재산에 대해 청빈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고, 독일 기사회는 가난이 완덕의 대변자처럼 되었고, 독신과 순명은 특수한 위치를 차지 수도사 생활의 결핍과 부도덕,무식,비열성이 비난받는 대상이 되었다.
시토 수도회(12세기)
초기 베네딕트의 규칙을 그 엄격함이나 순수함을 계속 유지키 위한 수도승들에 의해서 불군디의 시토에서 창설되었다. 그들은 솔직하고 단순한 생활을 목표로 했으며 평신도적이고 서민적이었다.
버나드는 1115년에 거칠고 깊은 계곡에 유명한 클레르보 수도원을 창설했다. 그의 영향력은 지대했고,그의 유변의 힘에 관련돼 있는 이야기는 저설이 되었다. 시토 수도회는 700채의 수도원 건물들을 소유하는 데까지 성장했다. 교회는“구주를 생각만해도”같은 버나드의 몇몇 찬송가를 아주 소중히 했다. 그들은 교단에 서서 시대사조를 지배하고 설교와 공민교육 및 종교적 지도를 통하여 민중의 지도자가 되었다.
탁발 수도회(12-13세기)
지금까지 구라파의 수도원을 지배하던 베네딕트계는 봉건사회에서 귀족을 상대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개혁적 사상으로 활동하는 탁발교단(托鉢敎團)이 성행하게 되었다. 탁발교단이란 청빈생활을 서약하고 구걸(求乞)로 생계릏 이어가는 수도단이란 뜻이다.
탁발교단이 생기게 된 주요원인으로서는,우선 성직자와 수도사들의 신앙을 개혁시켜야 하겠다는 동기와,당시 수도사들의 현실도피주의,혹은 타계주의적 경건생활을 배격하고,친히 민중의 반려자가 되며 전도와 구제사업에 열중하는 예수의 제자가 되기 원해서였다.
이들은 기존 수도원 운동에 전혀 새로운 원칙을 소개했다. 과거 수도사들의 자기부정은 자기 구원을 위해 수단화되었다. 수도사들은 계속 안에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으므로 세상을 등진 것이었다. 즉, 이들은 육체의 정욕과 세상의 욕망을 그 안에서는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탁발 수도사들의 이상은 그 차원을 달리 한 것이었다. 이들은 수도원 운동의 정신과 규율을 세상 한가운데로 다시 이끌어내었다. 이들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용기 있게 그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탁발교단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도미닉 파(Dominican)와 프란시스코 파(Franciscan)이다.이들 수도회들의 회원들은 겸손한 생활을 하는 자들을 신입회원으로 모집하였고, 그들의 민주정치적 정신은 폭넓은 호소를 했다. 그들은 곧 중대한 시기를 가져왔던 하나의 사실 때문에 오래된 수도원을 완전히 무색케 했다.
도미니칸과 프란체스코 수도회원들이야말로 13세기 혹은 아마도 중세 전체에 걸쳐 가장 고상하였던 사회운동을 전개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설립자가 죽은 후, 처음 열정은 부유와 세력의 성장으로 쇠퇴해졌었고, 통상 영적인 타락으로 떨어져 그들의 처음 이상으로 부터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도미닉 수도회와 프란시스코 수도회
도미닉 수도회
스페인 귀족인 도미닉(Dominic,1170-1221)은 스페인 출신으로 1216년에 호노리우스(Honorius) 3세에게 새 교단 설립의 허가를 받았다. 도미니크는 그가 계승한 한 목표, 평민을 감동시키기 위해 간소하고 엄격한 생활을 강조했다.그래서 그는 탁발주의와 설교를 그 교단의 두가지 원칙으로 결정하고,빈민층에 들어가 구걸하면서 전도하였다. 이 교단은 묵상보다는 활동을,의식보다는 설교를 더욱 중히 여기며 봉사생활을 하였다.
알버트 마그누스,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대신학자,그리고 에카르트, 타울러와 같은 신비주의자,그리고 사보나로라(Savonarola) 같은 혁명가가 다 이 교단의 소속이었다.
교황은 종교재판을 심문하는 도구를 도미니크회에게 위탁했는데 그것은 너ㅜ나 많은 땅을 피로 물들이게 하였다. 그것은 1229년에 처음 설정되었으며 감독들에 의하여 운영되어졌다.
도미닉크 수도단은 로만 캐토릭교회의 다스림을 싫어하는 이들, 그리고 교황제도를 비난하는 이들을 멸절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피비린내 나는 운동을 전개한 단체였다. 물론 이들이 내세운 것은 선교활동을 통해 이교도들을 개종시킨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로만 캐토릭 교회의 정치적 세력의 확장을 위해서 더욱 주력했던 것이다.
프란시스코 수도회
프란체스코회의 창설자인 프란시스(Francis,1181-1226)는 프랑스의 아시시(ssisi)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중병에 걸려 앓게 되었을 때 내적 변화를 얻게 되고,마태복음 10장 7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과 같이 문자 그대로 그 말씀을 복종키로 하고 전도자로서의 삶에 들어갔다. 이 구절들에서 7절은 복음전파,8절은 신유(神癒),9절과 10절은 청빈,그리고 11절부터 14절까지는 전도유랑의 사명을 주는 것이라고 프란시스는 확신하였던 것이다.
프랜시스코 수도단은 세가지 서약, 즉 독신생활, 빈곤, 그리고 복종을 바탕으로 그들은 둘씩둘씩 짝지어 여러나라로 전도하러 나갔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명령을 실제적으로 따라서, 여행을 위한 신이나 주머니나 지팡이를 가지지 않았다.형제들이 사는 집이라도 만일 원하는 자가 있으면 기꺼이 내주라고 가르쳤다. 그들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모방하여 빈곤의 생활을 사는데 있었다.
그들은 그 당시 침체된 기독교 세계에 단순성과 기쁨을 회복시키고, 극빈자를 위한 봉사를 위해 새로운 세력의 조성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교회에 대한 그의 철저한 순명정신 그것이 또한 탁발 수도회의 정신이었던 것이다.역사상 위대한 영국의 학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 교단에 속한 자들이었다.
신비주의자들
스콜라 철학과 함께 일어난 것이 신비주의 사상이다. 전자는 추리를 중히 여기고,후자는 직관을 중히 여겼다.이 두가지는 중세시대의 커다란 두개의 사상적 조류이다.
중세 신비주의의 발전은 특히 후기 스콜라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된 것으로, 후기 스콜라주의에서는 이성과 계시, 철학과 신학을 분리함으로서 신에 대한 합리적 추구를 포기하고 그 반면에 깊은 사색을 통해 신에 대한 인식을 얻으려 했다. 이같은 중세 후기 신비주의 대표자들로는 에카르트, 존 타울러, 토마스 아켐피스 등이다. 그 중에서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 Kempis)는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라는 명상서적으로 우리와 친숙하다.이같은 신비주의 경향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 신의 개인적인 생생한 체험을 강조했다. 타울러는 ‘우리안에 탄생하는 신’을 주장하고 에카르트는 ‘인간 영혼속의 신의 불꽃’을 강조했다.
● 교회 생활의 영적 활력화를 강조했다. 중세 로만 캐톨릭 교회는 교황권의 지배하에서 그 생동감을 잃고 있었으며, 교회 생활은 하나의 의무화된 것이었다. 신비주의자들은 이같은 교회의 경직 상태를 갱신시키기 원했다.
이와 비슷하게, 17세기 유럽 개신교의 정통주의가 맛을 잃어가고 있을 때,18세기의 사상적 기운도 역시 비슷한 두가지 방향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이성적인 합리주의(rationalism)이고, 또 하나는 직관적인 경건주의(Pietism)이다.
에카르트(1260-1327)
그는 독일 최대의 신비주의자로 손꼽힌다. 그는 스콜라적 신념을 지닌 도미닉파의 수도사로서,범신론적 신비주의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모든 만물에 깃들어 있는 참 실재는 신이요,사람의 영혼 속에는 ‘신의 불꽃’(spark of God)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속의 신과 완전히 사귈 것이요,이러한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이는 예수였다고 보았다.
도미닉파 신비주의자들의 목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실제 종교생활에 반영하는 것이 큰 임무였다. 그래서 마이스터 에카르트(Meister Eckhart)는 삼위일체 신의 원리를 성부는 하나의 존재(存在)로서,성부는 자기 대상화의 과정으로서의 로고스로, 그리고 성령은 자기 창출(創出)의 개념으로서 표현하였다.
피조물은 신에게서 나왔으므로,그 존재의 실재성을 신과의 결합을 통해서만 가져올 수 있다. 피조물이 신에게로 결합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이것은 혼의 가장 깊은 곳의 불꽃,창조되지 않은 이 빛에 의해 영원한 말씀인 성자가 인간의 혼 속에 탄생하게 된다. 이같은 신에게로의 결합에 있어서 예수는 우리의 따를 본이 되신다.
존재하는 모든 것,즉 죄나 악까지도 신의 현존을 나타내 준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우리를 자각하게끔 충동을 주기 때문이다.
에카르트는 아퀴나스적 신학조류인 것 만은 사실이었으나,그 강조점이 달랐고,신비적 경험은 신프라토주의적인 술어를 썼기에 범신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렇게 볼 때 16세기 종교개혁을 위한 사상적 준비로서,세속적 영역에서는 유명론의 영향을 들 수 있다고 한다면,종교적 영역에서는 독일 신비주의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독일 신비주의는 거룩한 영역과 속된 영역을 구별하지 않고 혼합시킴으로서 유명론의 고립화로부터 균형있게 잡아주는 힘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신비주의를 거룩한 영역과 속된 영역을 구별하지 않고 혼합시킨 것은 개혁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에카르트는 종교의 내적 생명력을 중시한 까닭에 중세 후기 고도로 제도화된 교회에 대해 비판했다.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속에서 개인적인 신의 탐구를 가르침으로 교황의 교회 그리고 교직 계급적인 제도로서의 교회를 신앙의 대상으로 많이 의존하던 중세신앙적 경향을 많이 약화시키는 영향을 끼쳤다. 이런 점에서 에카르트를 중심으로 한 중세 후기 신비주의자들은 종교개혁 신앙에 적지 않은 기반을 마련해 준 것이라고 본다.
존 타울러(1300-1360)
에카르트의 제자로서,그는 종교인들이 외적 의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비난하고,내적 생명력을 중시하였다. 그의 설교에는 ‘하나님의 내재(內在)’,‘내적 빛’(Inner Light)과 같은 표현이 많이 있었다. 그의 사상은 죄의 관념이 강하고,하나님의 은총과 회개를 가르쳤으므로 복음적인 요소가 강했다.
버나드(1091-1153)
프랑스 출신으로서,그는 크래보(Clairvaux)에 수도원을 세우고 원장이 되었다. 극단의 고행생활과 그리스도께 대한 명상생활에 힘썻다. 신학적으로 그는 아베라드(Aberard)의 자유주의를 배격하고 보수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범신론적인 에카르트와는 달리,그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비주의를 취했다.
중세 신비주의자들에 있어서 ‘예수를 따른다’ 함은 율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예수를 통해서 신적인 것에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프란시스나 아켐피스 그리고 버나드가 예수를 따른다 함은, 에카르트와는 구별되는 하나의 기독교적인 신비주의이다.
버나드는 신자의 영적 성숙의 단계를 신비적 여정의 단계로 동일시했는데,그 묘사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예수의 발에 입 맞추는 단계로서,이는 통회와 개심(改心)의 단계를 말한다.둘째,예수의 손에 입맞추는 단계로서,이는 예수의 사랑과 겸손을 본받아 행하는 복종단계이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예수의 입술에 입맞추는 단계로서,이는 신비적 무아경 속에서 완전한 영적 체험을 하는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상승단계를 말했다.
그는 범신론적 신비주의로 전락하게 될 위험 속에서 인간 예수에 대한 신앙에 초점을 맞추고,하나님께 대한 명상보다는 복종을 더 낫게 여김으로서,그 위험성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신비적 무아경의 체험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바뀌고,명상적 생활보다는 적극적인 활동의 생활을 중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구원에 있어서 공적의 유효성을 거부하고,사죄와 영생은 오직 은총에 의해서 주어진다고 하는 성서적인 원리에 근접하여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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