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9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이사 48,17-19
복 음 : 마태 11,16-19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18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19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면 인생 망친다.”
자기 욕망을 줄이고 자기에게 도움이 될 것을 하면서 살아야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기 욕망을 완전히 없앤다고 잘 사는 결과를 가져올까요?
어렸을 때, 저는 전자오락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용돈이 생기면 전자오락실로 향했고,
돈이 없을 때는 오락실에서 남이 하는 것을 구경했습니다.
그래도 재미있었고 즐거웠습니다.
어느 날, 학교 담임 선생님에게 오락실 간 것이 들통났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 커서 뭐가 되려고 오락실을 다니는 거야?”
지금 커서 신부가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오락이나 게임을 전혀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어렸을 때 전자오락실 간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디 한 군데에 빠지게 되면 스스로 헤어 나오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순간의 만족이 영원한 만족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생산성 있는 일에 집중하려고 노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면 인생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욕망을 모두 버리고 하기 싫은 것만 하면,
재미없는 인생으로 더 망치게 되지 않을까요?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욕망 안에서도 미래의 나를 만들어줄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분명 기쁨과 함께 더 나은 나로의 변화를 이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욕망은 무조건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원하고, 가장 적절하고,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욕망을
신중하게 선택해서 이를 삶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합니다.
장터에서 노는 아이에 대한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한패는 피리를 불며 잔치 놀이를 하는데 춤추지 않으면 장단을 맞추지 않습니다.
다른 한패는 곡을 하며 장례 놀이를 하는데, 아무도 가슴을 치며 울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놀이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장례 놀이는 세례자 요한이 외쳤던 회개의 외침이고,
잔치 놀이는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의미합니다.
즉, 슬퍼할 때 슬퍼하고, 기뻐할 때 기뻐해야 하는데,
자기 일에만 집중해서 해야 할 모습에서 정반대의 모습을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삶 전체는 모두 중요합니다.
그 안에 하느님의 뜻을 찾으면서 생활한다면,
욕망으로 보이는 나의 즐거움 안에서도 큰 의미를 얻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군에 입대하면 똑같은 훈련을 받지만
능력이나 재능에 따라서 ‘주특기’가 주어집니다.
운전면허가 있거나, 재능이 있으면 수송주특기를 받습니다.
체격 조건이 좋고, 강인하면 헌병 주특기를 받습니다.
사무능력이 있거나 컴퓨터를 잘 다루면 행정 주특기를 받습니다.
신학교에 다니거나,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군종 주특기를 받습니다.
그 밖에도 의무, 정보, 시설 등의 주특기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필요한 인력이 있는 곳으로 가기도 합니다. 2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배치를 받기도 하고,
부대의 필요에 의해서 배치를 받기도 합니다.
저는 신학교에 다녔기에 군종병이 되었지만, 능력이 부족해서 행정병으로 옮겼습니다.
3년 동안 주로 예비군 담당 행정병으로 지냈습니다.
전방 부대에서 철책 근무를 하는 것도, 후방 부대에서 행정 업무를 하는 것도
제대하는 것과는 큰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군에서 주어지는 주특기도 중요하지만,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지내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같은 날 사제서품을 받았지만, 교구의 필요에 의해서 주어지는 사목의 분야가 다양하게 정해집니다.
인재양성 위원회의 선발에 의해서 유학을 가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교구청에서 사목하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사회사목, 경찰사목, 병원사목, 청소년 사목, 복지기관, 선교사목, 교포사목, 빈민사목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부님들은 본당사목을 하게 됩니다.
사제는 순명서약을 하기에 교구의 인사이동에 따라서 당연하게 새로운 임지로 가게 됩니다.
저는 보좌신부로 8년, 본당신부로 8년 있었습니다.
교구청에서 11년 있었습니다.
3년은 캐나다에서 연수를 하였습니다. 1년은 안식년으로 지냈습니다.
어디에서 근무하는가도 중요합니다. 생각해보면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했던 것처럼, 사막에 샘이 흘러넘치게 하는 사목도 있고,
사목에 꽃이 피어 향기가 나게 하는 사목도 있습니다.
언제나 감사하고, 늘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는 사제에게는
어디에서 있느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돌아보면 감사할 일이 많았습니다. 부족한 제게 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있다면, 시기와 질투가 있다면 어디에 있어도 늘 ‘가시방석’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일만 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외면하려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듯이
공동체를 갈등과 분란으로 몰고 가곤 합니다.
하느님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흙 속에서도 꽃이 피듯이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언제, 어디에서나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물을 탓하지 말고 내 마음의 바가지를 잘 가꾸어야 합니다.
새는 곳이 있다면 새지 않도록 고쳐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그리고 화답송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 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위선과 가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참 스승이자 인도자, 구원자이신 주님
-신뢰와 경청-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어제는 근래 보기 드문 참 평화롭고 포근한 즐겁고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참 오랜만에 원장수사 부친의 문상차 대구를 방문했던 날이었습니다.
함께 간 도반도 시종일관 시중을 들며 함께 해줬습니다.
방문했던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밝고 평화롭기가 흡사 축제의 분위기였습니다.
어둡고 무거운 슬픈 분위기는 전혀 감지할 수 없었습니다.
“아, 참 잘 사셨구나! 선종의 복된 죽음을 맞이하셨구나!”
저절로 나온 고백이었습니다.
영정 사진도 흡사 오늘 날씨처럼 평화롭고 고요해 보였습니다.
떠나면서 함께 연도를 바쳤고 원장수사에게도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파스카의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축제 분위기 같았습니다.
영정 사진에서 본 생전 야고보 아버지의 분위기였습니다.
새삼 선종의 복된 죽음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축복이 늘 함께 하길 빕니다!”
30년 동안 함께 했던 수도도반과도 나눈 메시지입니다.
백요셉 수사는 1992년 입회했으니 올해로 함께하기 만 30년입니다.
“극진한 배려와 친절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잘 지내다 오세요!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프란치스코 수사님! 감사드립니다.
조심해서 잘 올라가시고 남은 하루도 주님 안에서 기쁘고 생동감이 넘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마침 잠시 대구에 거주하는 예수성심자매회 회장 자매의 메시지도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15년 이상 한결같이 예수성심자매회를 섬겨온 참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슬기로운 자매입니다.
“신부님, 제가 장례식장에 가니 신부님께서 막 왔다 가셨다 하던데
어제 말씀해 주시면 점심이라도 같이 하실 걸 그랬어요.
대구까지 오셨는데 뵙지도 못했네요. 고생하셨어요. 조심해서 올라가셔요!”
상경 도중 열차 안에서 책을 보려다 포기했습니다.
참 오랜만에 차창 풍경이 ‘살아 있는 책’처럼 눈에 와닿았기에
차창 밖 풍경의 자연성경책을 내내 관상했습니다.
날씨처럼 평화롭고 고요한 창밖 풍경이었습니다.
서울역에서도 참 좋은 분의 환대로 잠시 저녁식사를 나눴습니다.
참 오랜만의 깨끗하고 정갈한 담백한 식사였습니다. 하여 두루두루 행복했던 하루였습니다.
스승이자 인도자이신 주님께서 시종일관 어제 하루 함께 해 주셨음을
한밤중 강론을 쓰면서 늦게야 깨닫습니다.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인 어제 만난 형제자매들이었습니다.
어제 하루 삶의 중심에 참 좋은 스승이자 인도자이신
살아 계신 주님이 늘 함께 해 주셨던 것입니다.
지금서야 저절로 나오는 시편 고백입니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참으로 늘 신뢰와 경청을 다해야 할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자 인도자이신 주님이심을
오늘 말씀 묵상을 통해 새삼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 두 말씀에서 주님의 깊은 아쉬움과 좌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수준이 너무나 미달되기 때문입니다. 두 경우 다 우리의 참된 회개를 촉구합니다.
스승이자 인도자이신, 구원자이신 주님께 대한
신뢰와 경청이 턱없이 부족하고 순수와 사랑도 없습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은 그대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의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새삼 주의를 기울여 주님의 말씀을 경청함이 영성생활에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 경청할 때 그 놀라운 결과가 참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주님의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우리들에 대한 주님의 깊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복음도 대동소이합니다.
역시 무감각하고 공감할 줄, 반응할 줄 모르는 완고한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탄식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시공을 초월하여 예나 이제나 늘 상존하는,
참으로 무딜 대로 무뎌진 공감 능력을 상실한 세대임을 깨닫습니다.
이들의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 대한 곡해가 그 증거입니다.
두 분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 색안경을 쓰고 심히 왜곡해서 봅니다.
이 또한 우리의 부정적 모습입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모두가 영원한 스승이자 인도자, 구원자이신 주님의 말씀을 주의를 기울여 듣지 못한 때문입니다.
새삼 주님을 신뢰하고 겸손히 귀 기울여 듣는 경청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분도규칙도 “들어라!”로 시작되며,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외친 말씀도 “들어라!” 였습니다.
하늘에서 끊임없이 내리는 비가 딱딱하게 굳은 대지를 부드럽게 하듯
끊임없이 주님의 말씀을 경청할 때 마음은 열리고 부드러워집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경청함은 은총의 하늘비와 같습니다.
초겨울에 어울리지 않지만, 문득 “봄비”란 제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아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2005.4
시 쓴 지 17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여전합니다.
정말 봄비 같은 딸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화두처럼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바로 하느님의 지혜인 예수님을 뜻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자 인도자,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왜곡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를 통해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이 환히 드러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을 삶의 중심에 스승이자 인도자로, 구원자로 모신
우리 제자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마음 깊이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 시간입니다. 아멘.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6-17)
이 비유의 뜻은 명료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놀이는
요한의 '회개의 세례의 선포'(마르 1,4; 루카 3,3)에도 회개의 가슴을 치지 않고,
예수님의 '하늘나라의 복음의 선포'(마태 4,23; 9,35)에도
기뻐 춤추지 않는 세대를 말해줍니다.
혹 우리도 뉘우침의 눈물도 복음의 기쁨도 없지 않은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폐쇄와 계시에 대한 배척의 뿌리에는
무관심과 영적 무지와 완고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완고함’이란 마치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보고
입이 없다고 투덜거리거나 바닥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바로 세워놓고 보면 입도 있고 바닥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 뿌리에는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진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완고함’이란 사실을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진 마음 때문에 ‘목이 뻣뻣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외침을 듣고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귀신 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도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먹보요,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조롱합니다.
사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사랑은 안타까움과 비탄을 넘어 아픔입니다.
결국 당신의 사랑은 춤추지도 곡하지도 않는 냉대와 완고함이라는 가시에 찔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됩니다.
사랑이 거부당한 아픔입니다.
내가 당신의 말씀을 귀 담아 듣지 않고 냉대할 때, 바로 그러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의 사랑을 거부하고 완고할 때, 그렇게 당신의 눈에는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은 그렇게 가시에 찔릴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하신 일은 십자가에 달리시어
자신을 ‘깨뜨려’ 찢고 나누어 건네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면,
예수님의 그 피와 살을 먹고 자신도 ‘부서져’ 쪼개고 나누어져
다른 이에게 건네주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실 때 벌이시는 일은
우리를 ‘깨뜨리는’ 일이요, 진정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가 ‘부서지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살아 있으며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 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의 영께서 오시어 벌이시는 일은
우리와의 교제와 친교로 진리를 깨닫게 하고 새롭게 하여,
변화와 성화로 주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성령께 응답한다면,
다윗이 주님의 계약 궤 앞에서 춤추었던 것처럼 우리도 춤추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과 영을 제 마음에 들게 맞추기보다 제가 꺾이고 부서져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마태 11,17)
주님!
제 마음이 무디어져 있습니다.
아니, 빛보다 어둠에 치우쳐 있습니다.
불의를 보고도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진리를 보고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제가 당신의 말씀을 냉대할 때, 당신의 가슴은 가시에 찔리셨을 것입니다.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의 눈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이제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울고, 함께 웃게 하소서!
완고함의 벽을 헐고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 비유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자 요한도 배척하였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리며 식사하시는 예수님도 배척하였다.
그 모습이 마치 장터에서 편을 갈라 노는 아이들과 같다고 하시는 것이다.
아이들은 장터, 곧 광장에 앉아 있었다.
장터에는 팔려고 내놓은 물건이 많이 있으며 시끄러운 곳이다.
또 아이들이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은 소리를 질러야 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17절),
즉 우리는 너희가 선행하도록 노래를 불러 주었지만, 너희는 그렇게 하기를 싫어했다.
너희가 회개하라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17절), 너희는 회개하지 않았다.
이렇게 너희는 두 가지 선포, 즉 지은 죄를 회개하라는 것과
선행에 힘쓰라는 권고를 다 거부했다.
이는 바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요한을 마귀 들렸다 하고 예수께는 먹보요 술꾼이라고 했다.
그들이 둘 가운데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의 비유는 바로 세례자 요한의 엄격함도,
그리스도의 자유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
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마르 1,4)할 때,
자신을 회개해야 할 사람의 본보기로 제시했고,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마태 4,23; 9,35)하실 때,
당신 안의 빛나는 자유를 보여주셨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그려 보여주셨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19절)
지혜는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서 자신이 전에 주었던 선물을 빼앗아,
순종하며 믿음 깊은 백성에게 선물로 준다.
지혜의 선물은 사용하지 않으면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으로 잃어버리고도 알지를 못한다.
요한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삶이 달라졌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을 위해 그 지혜를 사용했다.
유다인들은 요한의 단식과 금욕적인 삶을 보고서도,
주 그리스도의 순종하는 삶의 모습과 하늘나라에 대한 약속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지혜롭게 완성하신 분을 단죄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그분을 살아계신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분은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는 고약한 대접을 받으셨지만,
그들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라고 부르신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는 하느님의 안타까움이 읽힙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7).
예수님께서 상대방에게 전혀 호응을 해주지 않는
당시 이스라엘 세대의 태도를 장터 아이들 놀이에 비유하십니다.
기쁨에 기쁨으로 슬픔에 슬픔으로 감응하지 않고,
어떤 판이 벌어져도 거부할 태세를 갖춘 모습이지요.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기는 했지만
가급적 자기들 구미에 맞는 존재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을 벗어나는 듯하면
거짓 예언자나 선동가, 죄인으로 몰아 생명까지 앗아갔습니다.
게다가 이런 일들은 제도의 힘을 빌어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지요.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마태 11,18).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은 친구다"(마태 11,19).
세례자 요한이 행한 절제와 극기는 거룩한 덕입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포용력과 친화력 역시 아름다운 덕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덕들도 자기 프레임에 갇힌 굳은 마음으로 보면
마귀짓일 뿐이고 방종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일찌감치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 선고를 내린 셈입니다.
제1독서에서도 하느님의 탄식이 들립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이사 48,18).
이스라엘에 축복을 준비하고 계셨던 하느님께 이스라엘의 배반은 뼈 아픈 슬픔입니다.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강물같은 평화,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릴 의로움,
모래알처럼 많은 후손, 길이 기억될 이름"(이사 48,18-19 참조)을 마련하고 기다리셨지만,
이스라엘은 그 기대를 벗어났고 하느님의 축복은 유예 상태로 묶입니다.
사람 마음이 그렇지요. 마음만 먹으면 온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반대로 그 무엇도 발붙이지 못하게 밀쳐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보다 엄밀히 말해 민중을 움직일 수 있는 정치 종교 기득권층은
어쩌면 자기들 이익에 도움이 될 메시아가 나타날 때까지
이 거부권을 행사하며 하느님을 밀쳐낸 것이지요.
무수한 예언자의 죽음에 이어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까지 제거한 고질적 병폐였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 11,19).
예수님의 안타까움은, 그러나 탄식으로 끝나지 않고 명쾌한 자기 확신으로 마무리됩니다.
지혜는 말씀이신 성자 예수님이시고, 진리 자체시기에 그르침이 없으시지요.
그분이 세상에서 이루신 사랑의 기적들로 지혜의 옳음이 드러납니다.
이는 거부하기로 작정한 이들에게만 가리워져 있는 선입니다.
예수님은 세대의 약함과 악함에도 흔들리지 않고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이사 48,17).
하느님께서 마음을 다해 피력하신 이 자기소개는
듣는 이의 마음에 따라 따사로운 위로와 격려가 되기도 하지만,
현세적 성공과 자기 본위적 이득을 보장해 줄 메시아가 나타날 때까지
믿음을 보류하고 사랑마저 묶어둔 굳은 마음에게는 스며들지 않겠지요.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묻습니다.
당신을 고대하는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준비하신 축복은
그분과 함께 춤추고 그분과 함께 가슴 치며 울 수 있는
촉촉하고 말랑말랑하게 열린 마음 안으로 쏟아질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이 공감능력입니다.
하느님 나라 놀이
박상대 마르코 신부
세례자 요한의 선구자적역할과 메시아의 실제적 도래로 말미암아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
세례자 요한을 끝으로 더 이상의 메시아에 관한 예언은 있을 수 없다.(13절)
이미 세상에 메시아가 도래했고,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자기 안에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의적으로 이를 배척하고 거부하고 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고의적인 배척과 거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이미 역사 안에 사실로 드러났다.
이사야 예언자는 외친다.
“주님인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네가 잘 되도록 가르치는 너의 스승이요, 네가 걸어야 할 길로 인도하는 너의 길잡이다.
네가 만일 나의 명령을 마음에 두었더라면,
너의 평화는 강물처럼 넘쳐흐르고, 너의 정의는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으리라.”(이사 48,17b-18)
결국 이스라엘은 주님이신 스승을 외면하고 엉뚱한 길을 걸어갔고,
이스라엘의 바빌론 유배가 그 결과였던 것이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도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태도를
‘잔치 놀이’와 ‘장례놀이’에 함께 하지 않는 아이들에 비유하신다.
예수께서는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과 메시아이신 당신을 받아들여
이 땅 위에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깨닫고 이를 향하여
자신의 삶을 질서 지우는 태도를 ‘하느님 나라 놀이’에 함께 노는 것으로 비유하신다.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의 비유에서 ‘피리와 춤’은 잔치 놀이를,
‘곡과 울음’은 장례놀이를 의미한다.(15절)
그런데 편을 갈라 앉은 아이들이 서로 다른 편의 놀이에 같이 놀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놀이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다.
잔치놀이에 술과 음식, 춤과 여흥이 필요하고,
장례 놀이에는 금욕과 절제, 울음과 긴장이 필요하다.
따라서 장례 놀이는 회개와 참회의 세례를 선포했던 금욕주의자 요한에 비유되고,
잔치 놀이는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기뻐하고 食飮하시는 예수님에 비유되고 있다.
‘하느님 나라 놀이’에 함께 놀아주지 않는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장터에서 편 갈라 앉은 아이들보다 더 나쁘다.
그들은 놀이를 함께 하지 않고 구경만 할 뿐 아니라 놀이를 주관하는 주체를 야유하고 비난하여,
세례자 요한더러는 ‘미쳤다’(18절)하고, 예수를 두고는 ‘세리와 죄인들하고만 어울린다.’(19절)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하느님의 지혜가 있다.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도래한 하느님 나라에 의해 밝혀지겠지만
당장은 이 세대의 눈에 가려져 있음이 안타까운 것이다.
하느님의 지혜는 스스로 자신을 찬미하고, 군중 속에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낸다.
하느님의 지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입으로부터 나왔으며, 안개와 같이 온 땅을 뒤덮었다.
하느님의 지혜는 지극히 높은 하늘을 두루 다니고,
심연의 밑바닥을 거닐면서 온 땅과 모든 민족과 나라를 지배하였다.
하느님의 지혜는 이 모든 것들 틈에서 안식처를 구했으며,
어떤 곳에 정착할까 하고 찾아다녔다.(집회 24,1-7 참조)
하느님의 지혜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의 마음 안에 안식처를 구하여 정착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내 안에 먼저 하느님의 지혜가 잉태되어야 한다.
이 지혜가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준다.
어느 때에 잔치 놀이를 하여야 하고, 또 어느 때에 장례 놀이를 하여야 하는지를 말이다.
그래서 주님의 성탄은 매년 오는 것이다.
내 안에 하느님의 지혜가 탄생할 때까지 말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