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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4일 오늘의 역사
2021년 도쿄 올림픽에 참가했던 벨라루스의 여성 육상선수 크리스치나 치마노우스카야가 폴란드로 망명
2020년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대 폭발 사고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4일 대형 폭발로 최소 160여명이 숨지고 5000여명이 다치고 도시 절반이 폐허가 되고 수십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대형 참사가 벌어졌다. 폭발은 4일 오후 6시 무렵 베이루트항 선착장에 있는 한 창고에서 . 두 차례 큰 폭발음과 함께 높이 치솟은 불길로 베이루트항 일대가 검은 연기로 휩싸였다. 폭발은 수천톤(2750톤)의 폭발물을 보관 중이던 부두 창고에서 발생했다.
폭발음은 베이루트항에서 240㎞ 떨어진 지중해 동부 키프로스의 니코시아 섬까지 퍼져나갔고, 사고 현장 인근 주민들은 "원자폭탄이 터진 줄 알았다"고 말했다.
폭발 사고 인근 모든 상점의 유리창이 산산조각나고 차량이 장난감처럼 뒤집히는 등 완전히 폐허로 변했다 또한 폭발 이후 독성 가스가 방출돼 인근 주민들에게는 외출 자제령이 내려졌고, 규모 3.3의 인공지진도 발생했다.
2015년 북한이 설치한 목함지뢰로 부사관 2명 중상
2015년 8월4일 7시 28분: 1사단 수색대대 수색작전 병력 8명이 DMG수색작전을 위해 통문에 도착하여 선두대원(김정원 하사)이 통문 통과 후 왼쪽 5미터 지점서 전방경계를 하고 2번째 대원(하재헌 하사)이 통문 통과 중 북한이 설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목함지뢰를 밟아 폭발, 하 하사 우측 무릎 위, 좌측무릎 아래가 절단되었다
이에 팀장(정모 중사)이 통문 넘어가 전방경계하고, 김 하사 등 3명이 하 하사를 통문 넘어 남측으로 후송하던 중 2차 폭발로 김 하사 우측 발목 절단된 사건
2015년 박상천 전(前) 민주당 대표 별세
박상천(76) 민주당 전 대표가 4일 오전 지병으로 별세했다. 1938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그는 광주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재학 중이던 1961년 사시에 합격, 이후 2년을 판사, 20년을 검사로 활동했다. 198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민당 소속으로 고향에서 처음 당선됐고, 이후 5선(13·14·15·16·18대) 의원을 지냈다.
당 대변인, 원내총무에 이어 1998년 김대중 정부 초대 법무장관에 기용했다. 김 전 대통령 앞에서도 담배 피우며 토론하던 몇 안 되는 정치인이었다. 논쟁 사안에 대해선 상대에게 “첫째, 둘째…”로 시작하는 어법으로 설득했다. 주요 법안 통과를 주도해 '법안 제조기'라는 별명도 얻었다.
박 전 대표는 2003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 후 야권이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으로 갈라설 때 민주당을 지켰다. 여당에서 하루아침에 소수파로 전락한 민주당을 이끌던 그는 2004년 총선에서 ‘탄핵 역풍’에 무너졌다. 2008년 총선을 앞두고 야권이 통합민주당으로 재편된 후에는 손학규 전 대표와 공동대표로 민주당을 이끌었다.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겠다”며 정계를 은퇴했다.
1996년, 1999년, 2000년 세 차례 원내총무(현 원내대표)를 지낸 그는 야당 시절에 폭력과 거리 투쟁보다는 대화와 의회를 강조한 합리적 의회주의자였다.
2009년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심장마비로 타계
조씨는 4일 오전 11시30분쯤 전남 해남군 계곡면 법곡리 자택 현관 앞에 쓰러진 채 부인 이성란(44)씨에게 발견됐다. 심장마비 증세를 보인 조씨는 119구조대에 의해 해남종합병원으로 옮겨져 심폐소생술을 받았으나 낮 12시45분쯤 숨졌다.
조씨는 복싱 챔피언 홍수환과 함께 1970년대의 국민적 영웅이었다. 1970년 방콕,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남자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아시아 신기록으로 2관왕에 올랐다. 1978년 방콕에서 다시 열린 아시안게임에선 접영 200m에서 동메달을 걸었다.
한국신기록만 50번 갈아치웠던 조씨는 현역 무대를 떠나고 나서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1980년 8월 11일 부산 다대포에서 대마도 서쪽까지 55㎞ 바닷길을 13시간16분10초 만에 헤엄쳐 건넜고, 2년 뒤엔 도버 해협을 9시간35분 만에 건넜다.
그는 빈농 집안의 5남5녀 중 막내였다. 남자 자식 다섯을 이었다고 다섯 오(五)에 이을 련(連)자가 이름이 됐다. 어려서부터 수영에 자신이 있던 그는 1968년 해남고를 자퇴하고 상경했다. 낮에는 종로의 간판집 점원으로 일했고 저녁에는 YMCA 수영장에서 물살을 갈랐다. 돈이 없어 회원증 유효기간을 위조해 다니다 적발돼 쫓겨날 뻔한 적도 있다. 조씨의 데뷔 무대는 1969년 6월 전국체육대회 서울시 예선전이었다. 학교에 적(籍)이 없어 무소속으로 대학·일반부 자유형 400·1500m에 출전했다. 수영복이 없어 사각팬티 바람으로 나갔는데 우승을 차지했다.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았다. 대한수영연맹 이사를 지냈고 ‘조오련 수영교실’을 열기도 했다. 2005년엔 두 아들 성웅(29)·성모씨와 울릉도부터 독도까지의 93㎞를 18시간 만에 횡단했다. 수영부분 한국신기록을 50차례 수립했던 조오련씨는 1970년 대한민국 체육상, 1980년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았다.
2009년 빌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 방북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2009년 8월 4일 전격적으로 평양을 방문,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동했다.
북한에 억류돼 있는 여기자 2명의 석방을 위해 방북한 클린턴 전 대통령을 김 위원장이 신속하게 면담함에 따라 여기자들의 석방이 조기에 성사됐으며 다음 날인 5일, 클린턴 전 대통령과 여기자 일행이 북한을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특히 이날 클린턴 전 대통령과 김 국방위원장의 회동에서는 여기자 석방 문제 외에도 북핵 문제를 비롯한 북미 양자 현안이 포괄적으로 다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이번 방북과 김정일 위원장과의 회동은 1990년대 제1차 핵위기 당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전격 방북과 김일성 당시 북한 주석과의 회동과 비견되는 것으로, 카터 방북 당시 북.미간 대결국면이 협상국면으로 전환된 것과 유사한 결과가 나올 것이란 예상이 나오고 있다.
북한의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은 이날 김정일-클린턴 회동을 비중있게 보도했으며, 클린턴 전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에게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구두메시지를 정중히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는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은 물론 대남 담당인 김양건 통일전선부장도 배석했으며 북한 국방위원회는 클린턴 전 대통령을 위해 이날 저녁 백화원 영빈관에서 만찬을 베풀었다.
미국 정부는 특히 정치 현안과 여기자 문제를 분리한다는 원칙에 따라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 일행에 정부 당국자들을 포함시키지 않았으며 백악관은 이날 클린턴 전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의 ’구두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북한 매체의 주장도 즉각 부인했다.
하지만 북한의 김 위원장이 클린턴 전 대통령이 갖는 상징성을 고려해 북핵 문제를 포함한 주요 핵심 정치현안에 대해 미국측에 ’중대한 제안’을 했을 가능성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3년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투신자살
대북송금 및 비자금 150억원 조성 의혹과 관련해 검찰의 조사를 받아오던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2003년 8월 4일 새벽 서울 상계동 현대사옥 12층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투신 자살했다.
정 회장의 사무실에서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과 부인·자녀 앞으로 남긴 ‘대북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기를 바랍니다’ ‘나의 유분을 금강산에 뿌려주기 바랍니다. 명예회장님께서 원했던 대로 모든 대북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A4용지 4장짜리 유서가 발견됐다.
정 회장은 현대그룹 창업주인 故정주영 회장의 5남으로 연세대 국문과를 수석으로 입학한 후 1975년 11월 현대중공업 차장으로 현대그룹에 입사했다. 정 회장은 지난 1982년 현대전자를 만들었고, 같은 해 현대상선 비자금 사건으로 수감됐을 때는 사식을 거부해 아버지로부터 “역시 내 아들”이라는 칭찬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정 회장은 아버지의 신임을 바탕으로 1998년 형인 정몽구 회장과 함께 현대그룹 공동회장이 됐고, 금강산 관광을 주도하면서 유력한 후계자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1999년엔 반도체 빅딜로 LG반도체를 인수하면서, 정몽헌 회장의 전성기가 활짝 열리는 듯 했다.
그러나 현대계열사간의 세력다툼이었던 소위 ‘왕자의 난’을 치른 정 회장은 2000년 6월 현대아산 회장에 취임하면서 대북사업에만 전념했다. 당시 현대 비자금 150억원 의혹을 수사해 오던 대검 중수부가 그의 죽음 이틀 전인 8월 2일 정 회장을 검찰에 소환해 12시간 가량 조사를 한 것으로 밝혀지자 정 회장이 선친인 정주영 전 명예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대북사업과 관련, 국민적 평가가 엇갈리는 것에 대해 고민하다 이날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붉어졌다.
이 사건은 김대중 전 정권의 대북비밀송금 사건과 관련해 정경유착의 폐단에 대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002년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 볼리비아 대통령 당선
볼리비아 신임 대통령에 국민혁명운동(MNR) 후보인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Lozada·72) 전(前) 대통령이 선출됐다.
지난 6월 30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나오지 않음에 따라 4일 볼리비아 의회는 로사다 후보와 사회주의운동(MAS)의 에보 모랄레스(Morales·42) 후보 등 2명의 상위 득표자를 대상으로 결선투표를 실시했다. 그 결과 재적의원 157명 가운데 84표를 얻은 로사다가 43표에 그친 원주민 후보 모랄레스를 누르고 당선됐다. 1993~1997년 대통령직을 지낸 로사다는 6일 5년 임기의 대통령직에 다시 취임했다.
볼리비아 내 최대 광업그룹을 소유한 볼리비아의 최고 재벌인 로사다는 수도 라파스에서 태어난 후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부터 미국에서 유학했다. 시카고 대학에서 영문학과 철학을 전공했으며, 졸업 후 귀국한 1953년 영화제작·무역회사인 텔레시네를 차려 기업인으로 나섰다. 1957년엔 볼리비아 최대 광산업체 코메수르를 창업, 1993년까지 운영하며 큰 부(富)를 축적했다. 1979년 하원의원으로 정치에 입문, 상원의원과 기획부 장관을 지낸 후 1989년 집권 민족혁명운동(MNR) 총재에 올라 1993년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됐었다.
1999년 치사율 80% 에볼라 바이러스 독일서 첫 출현
독일에서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으로 보이는 환자가 발생, 비상이 걸렸다.
‘올라프 우’라고만 알려진 이 독일인은 지난 3일 아프리카 여행을 마치고 스위스에어편으로 베를린에 도착했으며, 눈과 귀에 피를 흘리는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증세를 보여 방역당국에 의해 격리 수용됐다고 영국 더타임스가 4일 보도했다.
에볼라는 치사율이 80%에 이르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그동안 주로 아프리카에서 감염 환자가 발생했을 뿐, 유럽에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올라프(40)는 지난 주말 가족과 함께 아이보리 코스트에 출장갔으며, 이날 스위스에어 편으로 스위스 쮜리히를 경유해 베를린으로 귀국, 헬기로 병원에 후송됐다. 독일 방역당국은 올라프와 가족들을 격리 수용한 데 이어, 그와 접촉한 승객들에 대한 추적에 나섰다. 스위스에어에는 188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다.
병원측은 올라프가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됐는지, 아니면 그보다 덜 위험한 라사 열병에 걸렸는지 판명하려면 이틀 이상이 걸린다고 밝혔으나,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 가능성에 대비한 예방 조치에 나섰다고 더타임스는 전했다.
1998년 박찬호, 미프로야구 내셔널리그 7월 투수부문 최우수투수로 선정
`코리안 특급` 박찬호가 7월의 최우수투수로 뽑혔다. 미국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1998년 8월 4일 박찬호가 `이달의 투수(Pitcher of the month)`로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박찬호는 1996년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된 지 2년 만에 메리저리그 특급투수로 공인받게 됐다.
박찬호는 7월중 6게임에 등판, 42와 2/3이닝을 던져 4승 무패, 방어율 1.05를 기록했으며 삼진 34개를 잡고 25개의 안타를 내줬다. 특히 최근 2경기는 각각 8이닝동안 2안타 1실점의 빼어난 호투를 했다. 박찬호는 지금껏 단 한번도 `이달의 선수`는 물론 `이주일의 선수`같은 개인상을 받지 못했다.
`이달의 선수`는 메이저리그를 연중 취재하는 전국의 신문-방송 기자들이 투표로 결정한다. 한편 `7월의 최우수타자`엔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블라디미르 게레고가 뽑혔다
1997년 대북 경수로 관련 남북간 통신 개통
1997년 세계 최고령자 프랑스의 잔 칼망 할머니 122세로 사망
태어난지 1백22년 1백64일만인 4일 낮(현지시각) 프랑스의 세계 최고령 잔 칼망 할머니가 사망했다.
그동안 기네스북에 매년 세계 최고령으로 기록되던 칼망 할머니가 숨지면서 자연히 세계 최고령의 ‘영광’은 8월 16일 1백15세가 되는 화란계 미국인 크리스천 모르첸센 할아버지가 차지하게 됐다. 칼망 할머니 이전엔 일본의 이즈미 할머니가 지난 86년 사망때까지 1백20년 2백37일을 산 것으로 돼있다.
칼망 할머니는 지난 42년 남편을 사별한 이후 외동딸(1934년), 의사였던 외동손자(1963년) 등이 오래전에 모두 사망해 직계손이 아무도 없다. 한때 생계수단으로 물감 장수를 했으며, 빈센트 반 고호도 그녀의 고객이었다.
칼망 할머니의 장수는 주로 유전적 요인이 컸던 것으로 프랑스의학계는 보고있다. 본인은 “아마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는 것을 잊으신 모양”이라고 말하곤 했다.
1996년 남산 안기부청사 철거
안기부 옛 청사. 서울 중구 예장동 남산 옛 안기부 청사 제1별관이 4일 오전 7시25분 “꽈꽝”하는 굉음과 함께 발파해체됐다. 지상 5층, 연면적 7백81평 규모의 안기부 제1별관 건물은 3백15곳에 설치된 27㎏의 화약이 18단계의폭발을 거치며, 왼쪽부터 차례로 가라앉기 시작, 불과 5.5초만에 3m높이의 건물 잔해 더미로 변했다.
이날 폭파현장을 지켜본 시민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상당수는 “구시대 청산 차원에서 안기부 건물을 철거하고 남산을 시민들에게 돌려주기로 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반겼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아직도 오래 쓸 수 있는 건물을 많은 예산을 들여 없앨 필요가 있느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특히 일부 시민단체들과 사무실 부족에 시달리는 직원들은 “아직도 내구 연한이 남아있는 멀쩡한 건물을 활용하지 않고 이벤트성 행사를 위해 때려부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며 비난했다. 안기부의 한 직원은 “현재 시청사는 좁고 낡아서 현대식 시설을 들여올 수 없을 정도로 생산성이 떨어지고 있다”며 “신청사 완공 때까지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이었는데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현장에 참석한 건축가 김모씨(53)는 “남산 환원이라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오늘 폭파한 건물은 울창한 나무에 가려 평지에서는 시민들이 찾기도 어렵고 남산 경관도 크게 해치지 않는데 서둘러 철거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1996년 일본 국민배우 `남자는 괴로워`의 아쓰미 기요시 사망
일본 영화계를 대표해온 아쓰미 기요시(68)가 1996년 8월 4일 폐암으로 숨을 거뒀다. 그는 지난 30년 간 `남자는 괴로워`라는 시리즈 영화 48편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국민 배우`이다.
아쓰미 기요시가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비결은 `보통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대륙 침략에 열을 올리던 1928년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종전 후 배우가 되려고 여러 극단을 전전하다 연기력을 인정받아갈 무렵 폐결핵으로 쓰러졌으나 3년의 투병 끝에 재기하는 등 그의 인생이 바로 한편의 드라마였다. 1968년 후지TV에 방영된 `남자는 괴로워`에서 순진한 떠돌이 건달(도라) 역으로 등장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임종 순간까지도 `배우정신`을 지키려 했기에 일본인들이 그의 죽음을 더욱 안타까워했다. 사망 직전 장례식은 가족들만으로 조용히 치러줄 것을 요청했다. "배우는 자신의 사생활을 보여선 안된다"는 평소 소신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사망 사실은 장례식이 끝난 후 비로소 외부에 공개됐다. 일본 정부는 그에게 `국민영예상`을 수여했다.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 폐막, 한국 종합10위
1996년 이봉주 선수, 애틀랜타 올림픽 마라톤서 은메달 획득
1995년 정보화촉진기본법 공포
1993년 고노 일본관방장관 위안부모집이 강제였다는 담화 발표
1992년 영화 ‘하얀 전쟁’(감독 정지영) 도쿄국제영화제 최우수작품상 최우수감독상 받음
1991년 북한 유도선수 이창수(스페인 바르셀로나 제17회 세계유도선수권대회 북한 팀 주장으로 참가했다가 망명) 입국
1988년 MBC 뉴스데스크 방송 중 ‘내 귀에 도청장치’ 방송사고
강성구 앵커가 지하철 요금을 전면 인상한다는 뉴스를 소개하고 있었다. "서울시는 새로운 지하철 건설에 필요한 재원을..."이라고 말하는 순간 뒤에서 나타난 남자가 방송실에 난입해서는
소창영: 귓속에 도청장치가 들어있읍니다! 여러분! 귓속에 도청장치가 들어있읍니다! (끌려가면서) 저는 가리봉1동 136의 35번지에 사는 소창영이라고 하옵니다!
라고 외친 뒤에 끌려나간 사건이다. 강성구 앵커는 이때 소창영의 난입에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가 끌려나간 뒤 바로 "아, 뉴스 도중에 웬 낯선 사람이 들어와 행패를 부렸읍니다만은..."이라며 침착하게 대처했는데, 바로 소창영의 "도청장치..."라고 하는 괴성이 추가로 들렸으며, 이에 스태프들이 바로 뉴스를 내보냈다.
한편 소창영을 순식간에 세트 바닥으로 패대기쳐서 제압한 스태프들이 인상적이다. '퉁! 쾅!' 소리로 당시 패대기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1986년 독립기념관 화재
준공을 불과 11일 앞둔 1986년 8월 4일 밤 10시경 독립기념관 본관건물인 기념당 천장에서 불이나 천장부분을 태우고 5일 새벽1시30분쯤 불길이 잡혔다. 이 불로 독립기념관은 8월15일 개관이 무기한 연기됐다. 불이 번지는 순간을 본 목격자는 5차례의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기념당 중앙의 북서쪽 지붕에서 솟았다고 말했다.
조사결과 직접적인 화인은 전기배선공사의 부실로 인한 과전류였지만 준공을 1년이나 앞당기는 등의 졸속이 빚은 `인재`였다. 온 국민의 성금으로 지어졌던만큼 기념관의 화재는 국민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화재사건으로 사무처장 등 관계자가 사퇴하고 화재에 직접 책임이 있는 6명이 구속 기소됐다. 독립기념관은 그 후 1987년 8월 15일 개관했다.
1984년 정부, 여성차별철폐 유엔협약 비준키로
1984년 우루과이 민정이양 합의 발표
1983년 이탈리아 첫 사회당 정부 수립
1982년 내무부, 1983년부터 의무경찰제 실시 발표
1978년 경북도 교사자격증 부정사건. 8명 구속
1977년 세계최대 단일공장 남해화학 여수공장(7비) 완공
1975년 이태영변호사, 막사이사이상 수상
1970년 키엠 월남수상 내한
1967년 박춘우 유괴살인사건 범인 검거
1964년 미군기, 월맹기지 폭격
1960년 민주당 신구파 결렬
1957년 전국에 수해(사망 247명, 이재민 6만여명)
1953년 델레스 미국 국무장관 내한
1950년 낙동강 방어선 구축
1950년 다부동 전투(~24일)
1950년 8월 5일 한국전쟁 중 최대 격전중 하나였던 다부동 전투가 시작됐다. 경북 칠곡군 가산면 일대에서 벌어진 다부동전투는 아군 8천여명이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기 위해 인민군 1만8천여명을 밀고 밀리는 격전끝에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미군 전사에서도 이를 `한국전 최악의 전투`로 기록할 정도로 치열했다.
백선엽 사단장 등 장교들은 사병들 앞에서 `생일은 달라도 죽는 날은 함께 하자`고 맹세했고 `내가 물러서면 나를 사살하라`며 사병들을 격려했다. 밤낮으로 계속된 전투로 적군과 아군을 구별할 수 조차 없어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병력을 점검해보니 북한군 여러명이 섞여있을 정도의 혼전이었다.
정부는 1981년 다부동에 전적비를 세워 주력부대였던 국군 제1사단 전몰장병의 넋을 기렸다.
1949년 그리스, 대한민국 정식 승인
1948년 신익희 국회의장 피선, 김약수 부의장 피선
1947년 중앙방송국 프락치 사건
1947년 8월 4일 남로당계 방송국 직원 14명이 수도관구 경찰청에 의해 검거됐다. 이들은 중앙방송국을 적화선전도구로 삼으려다 발각된 것이다. 사건이 발표되자 시청자들도 그동안 중앙방송국의 방송내용이 이상했던 이유를 알게 됐다. 우익인사의 방송이 중간에 자주 끊겼던 점, 소련 스티코프의 방송내용이 원문과 달랐던 점에 대해 시청자들은 그때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경찰조사결과 배후에는 남로당 서울시 당부 김원복과 문학가 동맹원 박설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44년 `안네의 일기` 저자 안네 프랑크 가족 독일군에 체포, 안네의 일기 발견
1944년 8월 4일 이른 아침 네덜란드 암스텔담시 프리센가 263번지,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차가 멈춰섰다. 밀고자의 정보에 따라 책장의 숨겨진 문 뒤에 방이 있는 것이 발각돼 오토 프랑크 등 유태인 두 가족 8명과 은신 생할을 도와줬던 네덜란드인 두명이 연행됐다.
프랑크 일가 4명은 9월 6일 다른 유태인 1015명과 함께 화물차에 실려 독일 점령하의 폴란드, 아우슈비츠에 도착했다. 즉각 선별 작업이 벌어져 15세 미만 어린이와 노인 등 549명이 당일 가스실에서 학살됐고, 나머지는 남녀별로 수용됐다. 아버지 오토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남았고, 안네와 언니 마고 등은 인근 인종절멸수용소를 거쳐 독일의 베르겐 벨젠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 베르겐 벨젠은 극히 불결한 상태여서 티푸스가 만연해 있었다. 언니 마고가 영양부족에다 티푸스까지 겹쳐 1945년 3월 먼저 죽었고, 몇일 후 안네도 뒤따랐다. 혹독한 추위였지만 티프스에 따른 전신 발진과 고열로 옷을 모두 벗은 채 죽었다고 한다.
안네의 아버지 오토는 소련군이 아우슈비츠를 해방시키자,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와 사업을 재개했다. 오토는 끈질긴 조사 끝에 베르겐 벨젠에 있었다는 간호사에게서 아내와 딸 자매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미프 히스 부인은 살아돌아온 오토에게 안네의 일기를 전해주었다. 안네의 일기는 50여개국에서 번역돼 5천만부 이상이 팔렸다.
1931년 미국의 의사 다니엘 윌리엄스 사망
1930년 임시정부, 국무원 개편, 국무령 김구 취임
1930년 세계 첫 슈퍼마켓 뉴욕 변두리에 등장
뉴욕시 변두리 퀸즈의 자메이카 거리. 번잡한 쇼핑가에서 몇블 럭 떨어진 한적한 이곳, 어제까지 헌 차고였던 낡은 건물엔 ‘킹 컬렌’이란 빨강 글씨 간판이 드높이 매달렸다. 2백평이 넘는 매장은 골목 골목 선반이 줄을 이뤘고 그 위엔 통조림과 빵, 과일 등 식품이 넘쳐났다. 손님들은 점원의 안내 없이 스스로 필요한 물건을 찾아 바구니에 담았다. 장보기 역사를 새로 쓰게 된 순간 이었다. 미국 최초이자 세계 최초의 ‘슈퍼마켓’은 대혁신이란 말이 아깝지 않은 큰 변화였다.
창업자 마이클 컬렌은 상점에서 잔뼈가 굵은 사업가였다.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18살부터 상점 점원으로 일해온 그는 대공황과 대도시화, 자동차의 대량 보급이란 시대 변화에서 소매 상점의 일대 혁신 중심어를 찾아냈다. 값싸게, 빠르게, 대량 구매를! 손님과 물건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을 철폐하라! 컬렌의 아이디어는 명확했다. ‘가격 파괴’란 말은 이때 이미 등장했다. 켈런은 스스로를 ‘가격파괴자(price wrecker)’라고 불렀다. 가게 넓이를 당시 식품점 평균보다 3배 이상 확대하고 셀프 서비스로 점원수를 대폭 줄여 상품가격을 확 낮췄다. 판매 이윤도 낮췄다. 자동차를 타고 와서 한번에 많이씩 사가라고 매장보다 더 넓은 주차장 (parking lot)을 만들었다.
창업 2년 만에 킹 켈런은 미국 최대 슈퍼마켓으로 성장했다. 종업원 서비스가 없는 ‘노 프릴(장식없는)’ 상점으로 빅 베어가 뒤이어 등장했고, 식품 뿐 아니라 자동차용품, 문구류, 그릇, 생활용품, 라디오까지 파는 대형상점들이 1930년대 중반까지 미국 전역에 생겨났다.
1926년 극작가 김우진 사망
1926년 윤심덕ㆍ김우진, 현해탄에 동반 투신자살
윤심덕(尹心悳)은 풍부한 성량과 당당한 용모까지 갖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소프라노였다. 일본에서 정통으로 성악을 공부했지만 순수 성악만으로 생계와 품위를 유지하기에는 우리의 문화적 토양이 너무 척박했다. 돈 많은 남성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들고 백만장자 아들과의 염문설이 신문에 보도되자 연인 김우진으로부터 절연장이 날아들었다.
김우진은 호남 대지주의 아들로 이미 결혼까지 한 몸이었지만 도쿄 유학시절 윤심덕과 사랑을 맹세했던 와세다대 출신의 엘리트였다. 윤심덕은 충격을 잊기 위해 1년여 동안 만주를 유랑한 뒤 도쿄로 건너갔고, 김우진도 소리 없이 목포의 집을 나와 도쿄로 향했다. 두 사람 간의 상처가 거의 아물 때쯤, 윤심덕은 오사카에서 24곡의 노래를 취입한다. 이바노비치 곡 `도나우강의 잔물결`에 자신이 가사를 붙인 `사(死)의 찬미`도 그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보름 뒤인 1926년 8월 5일자 조선일보에는 `미성(美聲)의 주인 윤심덕양 청년 문사와 투신정사(投身情死)`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다. 전날 밤 시모노세키를 출발한 부관연락선이 4일 새벽 4시쯤 대마도 앞바다를 지날 즈음, 윤심덕과 김우진이 함께 현해탄에 뛰어들었다는 자살소식이었다.
1919년 불가리아 공산당 결성
1916년 미국,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 매수조약 성립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영국, 독일에 선전포고
사라예보 사건(6월 28일)은 문명세계 유럽을 죽음과 파멸로 몰아넣었다. 1914년 8월 4일,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영국도 같은 날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연쇄폭발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러시아에 선전포고(6일)를 하자 영국과 프랑스도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12일)로 맞섰다. 가장 평화스러운 한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유럽이 전화(戰禍) 속으로 휘말려든 것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큰 형님 독일을 과신하고 세르비아를 침공(7월 28일)했지만 세르비아 뒤에는 동방의 거인 러시아가 버티고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 역시 러시아와의 `3국협상`으로 전쟁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1차대전은 19세기까지의 낭만적인 전쟁 모습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기동전이 참호전으로 바뀌면서 4개월이면 족할 줄 알았던 전쟁은 4년으로 늘어났고, 신무기와 독가스는 9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1914년 미국, 1차대전에 중립선언
1914년 영국, 프랑스 대독(對獨)선전포고. 1차 세계대전 시작
1909년 보부상의 모임 대한상무부 발족
1906년 영국 정치가 러틀랜드 사망
1897년 일본 정치가 고토 쇼지로 사망 -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
1896년 전국을 13도로 지방행정제도 개혁
1875년 안데르센 사망
1875년 8월 4일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까지도 감동시키는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이 생을 마감했다. 안데르센은 코펜하겐근처 오덴세에서 가난한 구둣가게 아들로 태어났다. 안데르센은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하는 아버지밑에서 문학작품을 자주 접하며 그의 재능을 자연스럽게 키워갔다. 그는 배우가 되기를 원해 15세때 코펜하겐으로 떠났으나 꿈을 이룰 수는 없었다. 몇 번의 좌절 끝에 안데르센은 코펜하겐 왕립극장 단장인 요나스 콜린을 만나 슬라겔세와 헬싱고르의 라틴어 학교에서 공부했고 코펜하겐대학도 졸업할 수 있었다.
1835년에는 이탈리아 여행을 소재로 한 `즉흥시인`이란 작품이 독일에서 좋은 평을 받으면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835년 `어린이들을 위한 옛날 이야기`란 동화집을 발표하면서 동화작가로써 데뷔하게 됐다. 그 후 안데르센은 130여편 이상의 동화를 남겼다. 1846년 자서전 `나의 생애 이야기`를 발표했다.
안데르센 동화는 휴머니즘과 자연스러운 이야기 전개, 뛰어난 상상력을 특징으로 한다. 안데르센은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면서 해외여행을 즐기며 그의 생애를 보냈다. 안데르센은 그의 고향에서 명예시민으로 추대되기도 했으며 그의 장례식에는 덴마크 전 국민이 상복을 입을 정도로 덴마크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대표적 저서로 `인어 공주` `미운 오리새끼` `벌거숭이 임금님` 등이 있다.
1859년 노르웨이 소설가 크누트 함순 출생
1805년 아일랜드의 수학자 겸 물리학자 윌리엄 로언 해밀턴 출생
1792년 영국 낭만파 시인 셸리 출생
1789년 프랑스, 국민의회가 봉건제 폐지를 선언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반군 토벌
1265년 선량의회(Good Parliament) 소집해 영국의회의 산파로 불린 시몽 드 몽포르 전투 중 세상 떠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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