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서거 1주년
오늘.
그러니까 2010년 5월 23일은
대한민국의 제 16대 대통령
노무현의 서거 1주기이다.
작년 이 맘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를 추모했었다.
2002월드컵 이후 가장 많은 시민이 모였었다.
지방선거운동이 한창인 지금
천암함과 함께 주요 변수로
여겨지는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1주기.
그에 대한 필자의 진솔한 평을 달아보고
그의 일생을 돌아보도록 하겠다.
1. 노무현 서거 1주기를 맞이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벌써 1년이 흘렀다.
그 1년 동안 우리에겐 많은 일이 일어났다.
세계 속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으로 거듭났지만,
부끄러운 일도 많이 일어났고,
천안함 사태와 같이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
그러던 중 우리는 노무현의 이름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미리 말하지만 필자는 노무현에 대하여
그다지 숭배적이거나, 혐오스러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내가 그에 대해 칭찬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청렴하였고,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가장 인간적이고 정직한 대통령이었다는 점이다.
그가 진정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음을 충분히 그의 인생 동안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분명 그는
몇 가지 과오를 저질렀고,
이 실수 혹은 고의의 행동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계속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필자 역시 이 오점들에 대해서는 방어할 생각이 없다.
그런데, 오늘 네이버 1주기 추모 게시판을 보고
필자는 슬픔에 빠지게 되었다.
왜
노무현을 뇌물현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극우와
왜
노무현이 이명박이 죽였다고 해묵은 주장을 하는 극좌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인가
간혹 그를 잊지 않겠다는 댓글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댓글은 눈살을 찌푸리게 할 내용들이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여,
이 점을 기억해 주시기 바란다.
분명 그에겐 중대한 과오가 있었다.
또, 분명 그는 가장 청렴하고 가장 인간적인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그가 밝힌 정치 이념, 그의 이상은
분명 우리 사회의 목표가 되야할 것이었다.
또, 필자는 이명박 대통령보고
살인자라고 욕하지도,
퇴진하라고 비난하지도 않겠다.
그 역시 우리의 대통령이다.
오늘은 고인의 기일이다.
그를 비난하거나 찬양하기보다는,
그를 둘러싼 첨예한 좌우 대립을 보이기 보다는
6.2. 지방선거는 잠시 잊고
그의 이상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우리 곁을 떠난 우리의 대통령을
추억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그리고 우리가 그가 꿈꾸던 이상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지를 생각해보자.
우리 곁을 떠난 이를 기억해 주자.
좋든 싫든 그는 우리의 대통령이었으니까.
세상을 떠난 이를 위해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것이 아닐까 싶다.
p.s.
노무현 대통령님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잊지 못하듯이
당신도 하늘에서 우리를 잊지 못할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당신이 꿈꾸었던 대한민국의 이상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당신이 꿈꾸었던 사회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 노무현의 어록
"제가 생각하는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이런 걱정 좀 안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 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진 그런 세상입니다."
- 1988.7. 국회 대정부질문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합니다."
- 2003.2.25. 대통령 취임사
"이제 대통령의 초법적인 권력행사는 더이상 없을 것입니다.
국정원, 검찰, 경찰, 국세청, 이른바 권력기관을
더이상 정치권력의 도구로 이용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들 권력기관을 국민 여러분께 돌려드리겠습니다."
- 2003.4. 국회 국정연설
"자랑스런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역사는 있는 그대로 밝히고 정리해야 합니다.
특히 국가 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은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습니다."
- 2006. 제주4.3사건 희생자 위령제
"제가 다녀오면 또 더 많은 사람이 다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도 점차 지워질 것입니다."
- 2007.10. 남북정상회담 위해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으며
"패배를 받아들여야 민주주의가 이뤄진다.
강은 반드시 똑바로 흐르지는 않으며
굽이치고 좌우 물길이 바꿔가는 게 세상 이치지만
그러나 어떤 강도 바다로 가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 2008.2. 대통령 퇴임 고별 만찬
3. 노무현의 일생
1946년 8월 6일(양력 9월 1일) 경남 진해시 진영읍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대창초교와 진영중을 다니는 동안 학업 성적이 우수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일반고로의 진학을 포기하고
부산 상고에 진학, 1966년 졸업하였다.
부산상고를 졸업한 뒤 어망 제조업체에 잠시 다니다 그만두고
막노동판에서 일하면서 사법시험을 준비하다 1968년 육군에 입대하였다.
1971년 만기 제대한 뒤 다시 사법시험을 준비하였으며,
1973년 1월 동향인 권양숙(權良淑) 여사와 결혼하였다.
1975년 네 번의 도전 끝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이듬해 5월 사직하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그 뒤 한동안 안정되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다가
1981년 제5공화국 신군부 정권의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사건(釜林事件)의 변론을 맡은 것을 계기로
학생·노동자 등의 인권사건을 변호하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우리 민주화 역사에서 중요한 한 획인 6월항쟁에 앞장섰다.
같은 해 대우조선에 다니던 이석규가 거리 시위 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자
사인 규명에 나섰다가 노동법의 '제3자 개입금지'를 위반한 혐의로 구속되어
변호사 업무 정치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1988년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제의로 정치에 입문,
부산 동구에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제5공화국비리조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정연한 논리와 날카로운 질문으로 증인들을 추궁하여 일약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1990년 통일민주당·민주정의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에 대하여
'부도덕한 야합'이라 비난하며 정치적 후원자였던 김영삼과 결별하고
민주당 창당에 동참하였다.
이듬해 통합민주당 대변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92년 제 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한 뒤
제 14대 대통령선거 민주당 청년특위 위원장,
물결유세단 단장을 거쳐 1993년 통합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이 되었고,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열었다.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및 수도권 특별유세단 단장을 역임하고,
이듬해 서울특별시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0년 당선 가능성이 높은 종로 지역구를 포기하고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우며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당시 활성화되던 인터넷을 중심으로
네티즌들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지 않는 그의 선택을 두고
'바보 노무현' '노짱'이라는 별칭으로 부르며,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약칭 노사모)'이라는
한국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을 결성하였으며,
이는 향후 그의 정치적 행보에 큰 디딤돌이 되었다.
낙선 후 새천년민주당 부산 북강서(을) 지구당 위원장을 거쳐
2000년 8월부터 2001년 4월까지 김대중정부에서 해양수산부장관을 지냈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과 최고위원을 거쳐
2002년 초 국민경선을 통하여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2002년 11월 18일에는 국민통합21의 대통령 후보인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뒤,
국민 여론조사를 거쳐 단일 후보가 되었다.
이후 '낡은 정치 청산,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 등을
기치로 내걸고 선거운동을 펼쳤으며,
같은 해 12월 19일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유효투표 총수 2476만 141표 가운데 1201만 4277표(48.91%)를 얻어
1144만 3297표(46.59%)를 얻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된 뒤 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참여정부'를 표방하며 취임한 지 1년이 지난
2004년 초,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 위반과 측근 비리 등에 대한
야당의 사과 요구를 거절하자 야당인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같은 해 3월 12일 국회의장은 경호권을 발동하여
소수 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반대를 저지한 채
국회 본회의에 탄핵소추안을 기습상정하였고,
다수를 점한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투표하여
찬성 193, 반대 2로 탄핵소추안을 가결시킴으로써 국모총리 고건이 일시적으로 직무를 대행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자
이를 반대하는 국민들의 비난이 빗발치고
전국 각지에서 탄핵반대 촛불시위가 잇따랐으며,
같은 해 4월 15일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이 넘는 152석을 차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 같은 해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에 대하여 기각 결정을 내림으로써 두 달 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하였다.
임기중 대통령 선거에서 공약으로 내세웠던
'신행정수도 이전'에 대하여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내림으로써 타격을 입었고,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를 추진하여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았으며,
유력 일간신문(조중동)을 비롯한 언론과 대립하여
임기 내내 언론으로부터 호의적 반응을 얻지 못하는 등
보수 진영으로부터는 친북좌파라는 비난을,
진보 진영으로부터는 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한편, 정치인생을 일관하여 고질적인 지역주의를 청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사회 전반에 만연한 권위주의를 타파하는 데도 공헌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미(對美) 외교에서는 '대등한 관계'를 추구하였으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하여 북한과 긴장관계를 해소하는 데 힘썼다.
대통령 임기 말인 2007년 10월 4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분단 후 처음으로 '걸어서' 판문점을 통과하여
평양을 방문,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 정상회담을 열고
'남북관계 발전 및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선언)'을 발표하였다.
2008년 2월 24일 대통령 임기를 마친 뒤
고향인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의 봉하마을로 귀향하여
오리농사, 마을청소에 참여하는 등 평범한 전원생활을 하는 한편,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사람들과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였고,
건전한 토론문화를 조성한다는 취지로
인터넷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을 개설하여 세상과 소통하였다.
그러나 퇴임할 때 대통령 재임시의 기록물 복사본을 가지고 귀향한 것과 관련하여
'국가기록물 무단유출'에 대한 수사를 시작으로
검찰에 의하여 측근과 친형, 부인·아들·딸 등이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연이어 불거지면서
그의 최대의 장점인 '도덕성'에 상처를 입게 되었다.
2009년 4월 30일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기에 이르렀으며,
같은 해 5월 23일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는 내용의 유서를 컴퓨터에 남기고
사저 뒷산의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하여 서거하였다.
SJH시사
노무현 추모 특집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