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악기,낚시대,운전대.
인간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그래서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그러나 세상에 사는동안은 그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잡아야한다. 생계를 위한것들을 제외하면, 손에 쥐고 잡는것들은 그 인생의 내용이며 삶의 질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손에 쥐고 잡는것들은 그래서 한인간의 삶을 설명해주는 도구이기도 하다. 다른하나는, 우리모두는 서로다른 것을 쥐고 잡는다. 선택지가 다르고 지향하는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개성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서로다른 취향을 가지고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두가지에 집중하는 손도 있지만, 더 다양한것들을 쥐고있는 손도있다. 아주 드물지만, 아무것도 쥐거나 잡지않는손도 있다. 내손은 책, 악기, 낚시대, 운전대를 잡았다.
책.
내가 세상에서 가장좋아하는 것이 책이고 지금도 가장 많이 가지고있는 것이 책이다. 그래서 가장 많이 구입하는것도 책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책을 좋아할까. 먼저는, 내가 생각해도 호기심이 많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책을 읽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의 기쁨이 크기 때문이다.
백을알고 세상을 사는사람과 천을알고 세상을 사는 사람, 그리고 만을 알고 세상을 사는사람의 ‘삶의 수준과 질’은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세상은 아는만큼만 볼수있기 때문이다. 모르면 손에 쥐어줘도 모른다.
책은 시야를 넓혀주고, 생각을 깊이할수 있도록 인도하며, 판단력의 수준을 높여준다. 때문에 사람은 책을읽고 공부함으로서 비로서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책은 정신의 양식이기도 하다. 책을 안 읽으면 정신이 빈약해 지는게 그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책읽기에 힘쓰고 있다. 지금도 나는, 어디를 가든 반드시 손에 책을들고 다닌다. 심장내과 심혈관전문의인 내 아들은, ‘아버지처럼 책많이 읽으시는분이 또 있겠어요’ 라고한다. 내가 책을좋아하는 것은 작고하신 엄친의 영향도 크다.
악기.
나는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다.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입학식에서 연주하는 브라스밴드를 보는순간 완전히 매료되어 밴드부에 들어갔다. 그후 6년동안 밴드부에 있었으며 나중에는 악장까지했다. 처음에 배운악기가 슬라이트럼본이었다. 이후 바리톤, 유포니움, 튜바, 스자폰을 연주했으며 트럼펫과 코넷도 배웠다.
알토, 테너 색소폰, 후렌치혼, 클라리넷, 그리고 사이드드럼과 베이스드럼도 배웠다. 88세인 지금도 목관 클라리넷과 첼로를 가지고 있다.
악기를 연주하면, 악보를 정확히 읽어야하는 시각, 음정을 정확히 판단해야하는 청각, 소리구멍과 피스톤의 제자리를 눌러야하는 촉각이 예민해진다.
듣는음악에서 연주하는 음악으로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러나 그것은 놀라운 다른세계다. 악기를 다루는 것은 뇌 활성화의 지름길이다. 노년이되어 악기하나쯤 하는 것은 최고의 치매예방이기도 하다. 그리고 악기는 우리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낚시대.
나는 반평생 바다낚시를 했다. 동해에서의 던질낚시, 남해에서의 찌낚시. 서해에서의 배낚시. 그리고 전국의 유명낚시터는 거의다 가 봤다. 사실 물고기를 잡는다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있는 수렵본능의 DNA때문일 것이다. 한번만 제대로 된 ‘손맛’을 보면 웬만해서는 그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낚시를 준비하는과정과 낚시자체가 가지는 ‘집중도’ 는 최고수준 이라고 할 수 있다. 날씨, 기압, 바람, 파도, 수온, 물때에 민감해야하고, 대상어에 따라 채비와 미끼도 달라진다. 망상어에서 돌돔까지 쉬운게 없다.
엉킨줄을 풀면서 인내를 배우고, 입질이 없을 때 기다림도 알게된다. 지금은 체력이 달려 바다낚시를 못 하지만, 그래도 낚시생각을 하면 가슴이 뛴다. 내가 바다낚시를 통해 잡았던 가장 큰 고기는 3키로의 우럭이었다. 그렇게 큰 고기가 3호목줄에 엄지손톱크기만한 찌누바늘에 걸렸으니 수십년간의 낚시경력과 기술이 없었다면 못 올렸을 것이다. 3키로짜리가 물속에서 당기는 힘은 무서울정도다.
유연한 낚시대의 탄력이 그 힘을 흡수해서 목줄이 안 터진 것이다. 나는 고기를 올린후 배 갑판에 누워버렸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다.
운전대.
지금은 모두가 면허를 가지고 자기차를 운전하는 시대지만, 내가 첫 면허를 발급받았던 1968년에는 면허가진 사람이 많지않았다. 면허도 대형과 소형 두가지뿐이었다. 대형면허를따면 바로 트럭과 버스를 몰았고, 소형을 따면 택시를 몰았다. 아직 자가용이 없던때 였으며 56년전 얘기다.
나는 1976년 과장이었을 때 일제의 흰색브리사를 구입했었다. 아내는 그 차를 ‘나의백조’ 라고 부르면서 타고다녔다. 그러니 아내의 운전경력도 48년이나 된다. 지금도 면허증은 가지고있지만 운전은 하지않고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다닌다. 딱한번 눈길에서 가벼운 인명사고나 경찰서 유치장신세를 진 일도있다. 크고작은 접촉사고도 많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모두가 추억이다. 처음 운전대를 잡았을때의 긴장감과 기대는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다.
앞으로 자율주행차가 나오면 운전하는 즐거움은 사라지지 않을까. 섭섭한 일이다. 그러나 끝까지 자기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차를 운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운전자체가 얼마나 큰 즐거움인가.
지금은 거의모든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다. 버스나 전철은물론,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그걸 드려다본다. 어린애들도 마찬가지다. 심한 경우 운전을 하면서도, 횡단보도를 거넌면서도 드려다본다. 그래서 목숨을 잃는일도 있다. 일종의 중독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AI기능을 탑재한 휴대폰이 시판되면 이런 현상은 더 심화될 것이다. 우려스러운 것은 사람이 휴대폰에 종속되는 지경이 되는일이다.
심한 경우, 인간의몸에 인간이 만든 첨단의 센서등, 기기를 삽입하는 경우 그 정도가 많아지면 그걸 온전한 인간존재라고 할수있을까.
호모사피엔스의 멸종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이건 절대로 망상이 아니다. 충분히 가능한일이고 이미 시작되지 않았는가. AI는 글자그대로 인공(人工)기능이다. 사람이 만든것이며 사람이 자료를 계속 업데이트 해 줘야 기능한다. 결국 사람이 주인인 것이다. 사람의 손이 필요에의해 그것을 손에 쥐고있음을 잊으면 안된다.
책은 약과같다. 잘 읽으면 어리석음을 치료할 수 있다.ㅡ중국격언.
[출처] 책,악기,낚시대,운전대.|작성자 요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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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개의 안락의자
바닷가에 어둑어둑 밤이 내리고 있었다. 어제 내린 눈이 바다로 흘러내리는 산자락들을 하얗게 덮었다. 검푸른 바다 쪽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물결이 차갑다.
나는 늦은 시각 바닷가 언덕위의 단골 중국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식당은 파장 분위기였다. 손님이 없었다. 나는 구석 자리에 앉아 잡채밥을 시켰다. 잠시 후 식당 주인 남자가 군만두 네 개를 서비스라며 가져다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주인 남자는 의외로 지적인 타입이었다. 호리호리한 몸에 하얀 얼굴이었다. 세련된 가는 테의 안경을 썼다. 그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슬쩍 내 눈치를 보면서 그가 입을 열었다.
“저는 은행에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외환위기무렵 퇴직을 하고 동해로 내려왔습니다. 선배가 한번 중국음식점을 해보라고 해서 하고 있습니다. 이제 계약기간도 끝이 나가고 나이도 내년에는 환갑입니다. 뭔가 인생의 후반부를 맞이하면서 의미 있는 새로운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 역시 인생의 굴곡이 만만치 않았구나 하는 짐작이었다.
“외환위기 때 어떤 고생을 하셨습니까?”
내가 물었다. “제가 근무하던 은행이 외국의 질이 나쁜 펀드에 인수됐습니다. 고용을 보장하겠다고 하고 은행을 인수하더니 나 같은 직원들을 육 개월마다 여기저기로 인사 명령을 내는 겁니다. 나가라는 소리죠. 그들은 그렇게 구조조정을 지능적으로 괴롭히는 방법으로 하더라구요. 은행의 수익성이나 경영은 관심도 없는 것 같았어요.”
“맞아요. 신문에서 그걸 너무 헐값에 외국펀드에 매각했다고 해서 담당 관료나 은행관계자를 수사하고 기소했다는 걸 봤습니다. 제 고교동기인 재무부의 국장도 뇌물죄의 의심을 받고 감옥에 일년 있다가 무죄로 풀려나왔죠.”
“그게 수사가 될 때 저 같은 말단에 있는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겠어요? 배경이 있다면 권력의 비자금이겠죠. 그걸로 재판을 받는데 증인으로 끌려갔는데 몇년동안 질질 끄는 겁니다. 스트레스를 받아 정말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딘가 몰두해서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이곳 동해로 내려오고 목공을 배웠죠.”
시대적 상황이 한 은행원을 바닷가의 목공으로 변화시킨 것 같았다. 나는 잡채밥을 먹으면서 그의 다음 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목공 기술을 배우면서 저는 작은 요트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걸 타고 먼 바다 저쪽으로 가고 싶었어요. 그런 꿈을 가지고 요트 만들기에 몰두하니까 괴로움을 잊을 수 있었어요. 요트를 타고 처음에는 가까운 양양을 가보고 다음에는 울릉도와 독도를 갔다 왔습니다. 그리고 오끼나와까지 갔다 왔어요.
저는 그래도 은행에 근무하면서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서울의 아파트와 퇴직금이 있고 지방인 이곳에서 중국음식점을 하게 됐으니까요.”
그의 음식점에서 만드는 ‘어항 동고’는 인터넷상으로 꽤나 유명한 것 같았다. 나는 잡채밥을 거의 다 먹어가고 있었다. 그가 덧붙였다.
“저도 어느새 나이가 환갑입니다. 요즈음은 새로운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인도네시아의 나무가 많은 섬으로 갈 겁니다. 거기서 제가 배운 목공 기술로 안락의자 백개를 만들 겁니다. 그리고 그 의자를 내가 평생 정을 주고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씩 선물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그 말이 갑자기 내 마음기슭에 잔잔한 물결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이 세상을 떠나면서 남은 사람들에게 선물을 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더구나 그가 직접 만든 안락의자는 감사와 함께 그에 대한 영원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그는 죽어도 그가 만든 안락의자로 그 존재가 남는 것이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기억 의 갈피 속에 들어있던 사실이 떠올라 그에게 말했다. “제 법무장교 동기 중에 암으로 죽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죽기 몇 달 전에 동기생들에게 사과 한박스씩 선물로 돌리더라구요. 그걸 받으면서 가슴이 애잔했습니다. 멋있는 작별이었습니다.”
잡채밥을 다 먹고 적막한 검은 거리를 운전해 돌아오는 데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가 마음속으로 쳐들어왔다. 임종을 앞 둔 어머니는 죽은 후 선물할 사람들을 말하고 나보고 그걸 대신 실행하라고 유언을 했다. 어머니는 자신이 죽은 후 정확히 보름후 교회에서 친했던 사람들을 초청해 삼계탕을 대접하라고 했다.
어머니는 삼계탕을 잘하는 음식점까지 지정해 주었다. 어머니는 정들었던 사람들 몇명을 지정하면서 죽은 어머니의 마지막 선물이라면서 돈을 주라고했다.
사람마다 구체적인 액수를 지정해 주었다. 어머니의 유언대로 나는 성실하게 집행했다. 어머니의 선물을 받는 사람들이 하얀 눈물을 흘리는 걸 봤다.
함경도 출신인 어머니한테서 평생 싸우는 모습만 본 아들이었다. 어머니의 선물은 살아서 매듭지었던 모든 걸 단번에 풀어버리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내게 화해와 용서의 현명한 방법을 알려준 것 같다. 나도 저세상으로 건너갈 때 무엇을 선물하고 갈지 다시 생각하게 된 저녁이었다. 주는 것은 받는 것 보다 기쁘다고 그분이 말하지 않았던가.
[출처] 백개의 안락의자|작성자 소소헌
Don't Forget To Remember 💜Bee Gees,
https://youtu.be/9chb4ydKg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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