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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쇼크, 미래목회 쇼크
이성희(연동교회 담임목사, 장로회신학대학교 겸임교수)
들어가는 말(한국 교회 개혁의 당위성)
미래쇼크(Future shock)란 앨빈 토플러가 사용한 미래 용어이다. 그는 엄청난 추세로 밀려올 미래 추세에 적응하지 못하는 미래 사회의 병리를 미래쇼크라고 하였다. 그는 그의 동명의 저서에서 “문화충격(Culture shock)에 걸린 사람은 돌아갈 고향이 있지만 미래충격에 걸린 사람은 돌아갈 고향이 없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은 과거로의 시간적 회귀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미래쇼크의 가장 적절한 대응책은 미래쇼크에 걸리지 않게 미래적 사회변동을 이해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미래학자들이 말하는 ‘메가트렌드’는 미래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미래학자들은 미래를 단정하지 않으므로 대형 추세라는 뜻의 메가트렌드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미래 메가트렌드를 이해하게 되면 미래 목회의 패러다임의 전환이 가능하다. 교회는 사회적 존재로서 사회의 변동에 따라서 목회의 틀도 변해야 하며 더 적극적이며 긍정적으로 교회는 사회의 변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니버(R. Niebuhr)의 말대로 그리스도는 문화의 변혁자(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가 되어야 한다.
어쨌든 이러한 사회변동과 교회의 환경변화로 말미암아 목회 충격은 현실화되었고 많은 목회자들은 이전과 전혀 다름없이 최선을 다하지만 효율성이 떨어지고 있다고 아우성이다. 이런 목회 충격은 패러다임의 변혁(Paradigm shift)을 필연적으로 요청하고 있다. 사회의 급격한 변화로 인하여 기존의 목회 패러다임들은 사회의 변화에 적응력을 상실하고 그 결과로 사회인은 교인이 되지 못하고 교회는 장기적 침체 기 내지는 쇠퇴기로 접어든 것이다. 실제로 한국교회를 통계적으로 보면 1987년에 교회 성장이 최고도에 달했고 1987년부터 1992년까지는 거의 성장하지 못하여 수평성장을 보였고 1992년 이후에는 약간의 쇠퇴현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마이너스 성장 분위기는 새로운 천년을 눈앞에 두고 연구하고 신속하게 대처하고 극복해 나가야 할 21세기 목회자들의 필수 과제인 것이다.
최근의 기업이나 모든 조직들이 변화를 추구한다.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한다는 필연적 요청 때문에 모든 것이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변화한 기업이나 조직은 어려운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화적 변화에 적응했지만 그렇지 못한 기업이나 조직은 자동 도태된 것을 경험적으로 볼 수 있다. 변화는 곧 생존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경우 1960년대의 100대 기업가운데 현재까지 생존하고 있는 기업은 29개라고 한다. 생존하고 있는 기업들은 과감하게 시대에 따라 변화를 하였고 변화 그 자체를 두려워하여 변화하지 못한 기업은 도태되었다는 것이다. 변화를 요청하는 긴박한 시대를 맞이하여 교회도 변화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회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변화하여야 한다.
근래의 사회를 정보사회라 부른다. 정보사회란 정보가 사회를 규정하는 중심개념이며 정보가 재산이며 정보가 힘인 사회란 의미이다. 성경은 그 배경이 고대 유대 농경사회이다. 농경사회의 배경에서 기록된 성경을 정보사회에서 어떻게 맥락화(contextualization)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다. 또한 한국교회의 경험에서 나온 목회 패러다임은 급격한 사회의 변동과 함께 그 적응력을 상실하고 동질의 목회가 교회에 적용되지 않는 것을 최근의 목회자는 경험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목회 충격 완화를 위한 패러다임의 변혁을 강요받게 된다. 흔히 한국교회의 목회는 새벽기도, 심방, 설교 등으로 인식되었으나 이러한 목회 패러다임은 제3의 천년에 이르러서는 그 적응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목회 충격을 위하여 패러다임을 변혁해야 할 이유는 대개 다음과 같다.
(1) 미래현상인 가속적 사회변동에 교회가 적응해야 한다.
(2) 이미 한국교회가 성장이 둔화되어 기존의 패러다임이 변혁을 요구한다.
(3) 미래 사회는 유토피아의 반대개념인 디스토피아(dystopia)로 가까워질 것이기 때문 에 여기에 대한 교회의 사명과 존재이유가 있다.
(4) 세계화와 지방화 시대를 맞이하여 다양성 속에서의 통일성(unity in diversity)을 추 구해야 한다.
(5) 신세대의 문화와 사고구조는 전통문화와 기성세대의 사고구조와 다르다.
(6) 컴퓨터 등의 발달로 기술발달과 정보교환이 교회에 요청된다.
(7) 임시성과 대여개념의 발달로 교회의 소유개념 보다 대여개념이 발달한다.
(8) 과학의 발달로 생명에 대한 심각한 과제가 교회에 요청될 것이다.
(9) 이동성의 발달로 기존의 목회 패러다임을 무력화하게 될 것이다.
(10) 교회의 구조가 성직 패러다임에서 평신도 패러다임으로 전환될 것이다.
(11) 여성 성직자가 증가되고 여성의 기능이 증대될 것이다.
(12) 정보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영성을 추구하고 영성이 발달한다.
(13) 교회의 관심이 교회 자체의 성장 보다 사회에 대한 교회의 사명이 높아질 것이다.
(14) 교회도 마케팅이론이 발달할 것이다.
(15) 민족 통일시대 세계 중심국가 시대를 대비한 한국교회의 관심이 고조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한국교회 목회의 패러다임이 성장 중심이었고 80년대 중반까지의 급속 성장은 한국교회에 반드시 필요했던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새로운 세기를 목전에 두고 새로운 사회 패러다임이 정립되어 가는 이 때에 구시대의 패러다임으로 교회가 사회에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 21세기 목회를 요청하는 당위성인 것이다. 새로운 구조란 새로운 시대 정신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새로운 틀을 의미한다. 이런 원칙은 목회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전의 목회 구조는 이전 시대에 적합한 것이었으나 시대의 변화는 목회 구조의 개혁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상대적으로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현상적 분석에 의하면 국민 소득이 향상되고 개인 소득이 10,000달라 이상 되면 기능적 대행물(Functional alternatives)의 발달로 놀이문화가 많아지게 되고 교회는 상대적 침체를 피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를 급속하게 침체하게 하는 것은 외부적 기능적 대행물의 발달 보다 내부적 연구와 투자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우선 미래 목회 충격을 완화하며 극복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하며 나아가서 더 적극적으로 사회를 이끌 수 있는 새로운 구조로 개혁되어야 한다.
1. 미래 쇼크의 요인
(1) 다양성과 통일성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쇼크
세계화란 이미 우리 귀에 익숙한 미래어이다. 세계화 혹은 지구화란 지구 전체를 하나의 체계로 만들어 가는 과정과 현상을 의미한다. 이른바 미래현상으로 불리는 3T 즉 교통, 장거리 통신, 관광은 전 세계 인류의 생활양식과 문화이해를 공유하게 하는 세계화의 촉진제가 될 것이다. 구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시작된 세계의 지방화 혹은 지역화 작업도 급속도로 확신되고 있으며 현재 185개국인 유엔의 가입국이 21세기에는 300내지 1,000개국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예측도 가능하게 되었다. 세계화의 세계와 지방화의 세계는 같은 세계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하나이면서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인종, 문화 종교, 언어 등의 요인으로 세계는 작아지고 있다. 세계화와 지방화의 동시적 출현을 미래학자들은 지구지방화(glocalization)이라고 한다. 이러한 세계화와 지방화는 세계의 이중구조가 아니라 하나이다.
세계화와 지방화를 이해하는 것은 미래 준비의 기본이다. 미래 사회는 지구 공동체의 운명을 수시로 논하게 될 것이다. 환경, 문화, 평화 등의 주제는 세계적 관심사이며 동시에 개체의 문화, 다민족의 공존, 다종교의 평화 등이 존중될 것이다. 하나인 세계에서 빗장을 걸어놓는 대원군식의 쇄국정책은 더 이상 세계인의 할 일이 아니다. 동시에 개체의 문화와 종교 등을 존종하고 인정하는 의식이 세계화 시대에 절실한 것이다. 이런 전환된 의식의 공유는 산업사회의 경쟁 의식과 분리 정책의 잔재에서 크나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2) 미래가 생산한 별종 인간이 주는 충격
우리 주변의 상황변화는 상당한 미래형 증후군을 포함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은 신세대의 출현이다. 신세대는 우선 탈 근대주의와 탈구조주의에 산다. 흔히 X세대라고 불리는 신세대는 새로운 소비형태와 문화형태를 창조한 이들이다. 이제는 그들도 Y세대, N세대 등으로 구분하여 기성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문화의 소유자이며 스스로 차별화를 부르짖는 별종 인간이다.
흔히 신세대의 특징을 PANTS 신드롬이라고 한다. 신세대는 개인적이어서(personal) 자기밖에 모르는 세대들이다. 그들에게는 자기 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관계의 중요성보다 컴퓨터와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들에게는 튀는 개성이 삶의 의미이며 빨강, 노랑, 파랑 머리나 피어싱도 연예인의 모방이 아니라 자신만의 개성이라고 부르짖는다. 그들은 흥미본위로 살며(amusement) 가장 존경하는 인물도 연예인이며 가장 선호하는 직업도 연예인이다. 돌아온 서태지를 열호하는 그들은 기성세대들에게 충격이다. 그들은 자연스러움을 좋아하고(natural) 제도의 틀 속에 제한되기를 싫어한다. 이미 일본에서는 경제적 성장과 가치관의 변화로 말미암아 제도권 속에 살지 않고 아무 때나 일하고 아무 때나 잠자는 소위 “후리터”가 사회의 문제로 부상하였다. 이들은 프리랜서 인간 유형이다.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같은 유의 충격적 세대가 출현하게 될 것이 뻔한 일이다. 그들은 성별구분이 모호하며(trans-border), 남녀공성의(unisex)의 용품이 발달하게 된다. 옷에도 구분이 없으며, 취미에도 남녀가 없으며, 직업에도 남녀의 담이 사라진다. 이런 특징은 침체되었던 여성의 역할의 증대를 가져오며 적응하지 못한 커플 사이의 갈등과 이혼의 요인이 될 것이다. 그들의 또 다른 특징은 극단적 자기사랑으로 살기를 원하는(self-loving)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기 이상의 존재가 없으며 사회성 보다 개별성과 개인의 자유가 강조된다. 이런 자유인의 삶은 아이는 없이 둘 만인 TONK족(two only no kid), 수입은 배로 아이는 없는 DINK족(double income no kid)을 양산하게 될 것이다.
(3) 가속적 속도감이 주는 충격
미래 사회의 가장 뚜렷한 사회변동의 현상은 속도감의 변화이다. 이러한 역사변화의 가속적 발전은 미래쇼크의 가장 큰 요인이다. 교통수단의 발달과 생산라인의 발달은 역사발전의 가속화를 촉진하였고 인간의 사고발전도 가속화하였다. 교통수단과 생산방식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나 학문의 발달도 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대중가요의 가사가 빨라지는 것도 이러한 미래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유행도 빨리 진행하여 옷의 유행도 계절단위로 바뀌고 청소년들이 선호하는 가요도 8주가 멀다 하고 신곡으로 바뀐다. 성경은 미래적 현상을 교통수단의 발달과 지식의 발달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단 12:4).
미래학자들은 농경사회인 제1의 물결 시대를 3000년이라 하고, 산업사회인 제2의 물결 시대를 300년이라 하고, 정보사회인 제3의 물결 시대를 30년일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러나 제3의 물결 시대는 30년 동안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농경사회 3,000년 동안 사회는 다소간 변화하였지만 사회의 기초는 변하지 않았다. 농경사회 전체를 돌이켜 보면 농경사회가 시작하던 때와 농경사회가 끝날 때는 무려 3,000년의 차이가 나지만 같은 문화를 가진 동일 패러다임의 사회였다. 산업사회의 시작과 더불어 사회는 변화하였고 농사의 기계화가 시작되었다. 산업사회 300년은 엄청난 변화를 가지고 왔지만 그러나 300년 동안 그 기조와 문화는 동일하였다. 그러나 정보사회는 산업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문화와 기조를 그 기초로 하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산업사회의 패러다임은 맞지 않는 것이다. 갈수록 빨라지는 변화의 속도는 분명 미래의 가장 큰 쇼크일 것이다.
(4) 눈을 뜨면 달라지는 기술산업이 주는 쇼크
종전의 산업성장의 원동력은 토지와 자본과 천연자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미래의 신 산업은 이러한 종전의 원동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술혁신의 사이클이 빨라질 미래 사회는 기술을 제3의 물결의 원동력이라고 한다. 기술경제 패러다임의 역사적 전개를 토대로 보면 미래산업의 추세는 컴퓨터, 전자 자본재, 소프트웨어, 장거리 통신, 광섬유, 로봇, 세라믹스, 데이터 베이스, 정보 서비스, 유전공학들이 발달하게 되며 정보산업이 전 산업을 주도하는 새로운 산업형태가 발달하고 대기업과 소기업 사이의 네트워크 그리고 컴퓨터의 네트워크가 고도로 발달하게 될 것이다. 미래학자들은 미래의 신산업을 주도할 중요한 두 가지 요소는 컴퓨터와 로봇이라고 한다. 가술 산업의 발달은 인간의 삶에 또 다른 역기능도 제공하는데 사이버 스페이스(cyber space)가 그 하나이고 노동의 종말이 또 다른 하나이다.
‘사이버(cyber)’란 우리 시대에 가장 흔히 사용되는 새로운 문화 현상의 용어이다. 여러 가지 다른 말 앞에 접두어로 사용되는 ‘사이버’는 현대의 전위적 경향을 대표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사이버’란 접두어를 사용하는 경우를 총칭하여 그 유행을 사이버리즘(cyberism)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제는 ‘사이버’는 가상의 공간이라고 하지 않고 현실의 한 부분이라고 한다.
‘사이버’란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의 준말로 제어학문 혹은 인공두뇌학을 의미하는 과학 기술의 용어로 통신과 제어 기술을 하나로 만드는 신학문을 의미한다. 사이버네틱스를 사이버로 처음 사용한 것은 1984년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이 그의 소설 “뉴로맨서(Newromancer)"에서 ‘사이버 스페이스(cyber space)'라는 용어에서부터이다. 사이버 스페이스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구축하는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의미하는데 이제는 가상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또 다른 세계가 되었다. 가상현실을 구성하는 기법인 시뮬레이션(simulation)은 닮은꼴을 만드는 것이다. 현실과 닮은꼴을 만드는 사이버 스페이스는 이제 현실 그 자체로 인지되는 것이다.
사이버는 이제 우리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고 거의 매일 접해야 하는 삶의 실제적 현상이다. 지식의 바벨탑이라고 불리는 사이버의 세계는 인간 사고의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양식이다. 사이버 도서관, 사이버 교회, 사이버 은행 등은 기본이고 사이버 가수 아담, 사이버 교수, 청와대의 사이버 대변인까지 다양한 사이버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 인간의 거의 모든 분야에 사이버가 등장하여 더 이상 가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이버 시대의 특징은 컴퓨터가 생활의 중심이 될 것이며, 컴퓨터를 활용한 정보 산업이 호황을 누릴 것이며, 정보가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며, 인간의 기능이 단순화하며 극단화할 것이며, 로봇 등의 발달로 인간의 유휴 노동력이 증가할 것이다. 실제로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했지만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할지 모르나 엄청나게 달라진 사회에 살고 있다. 최근의 사회변동과 경제변이의 추세는 완전한 정보사회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정보 통신 관련주가가 천장부지로 치솟고 있고 우리 사회의 관심이 온통 인터넷에 솔려 있다. 이러한 변화는 사이버시대의 특징인 것이다.
컴퓨터의 소프트웨어의 발달과 함께 변화하는 기술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컴퓨터는 타자기가 아니며, 인터넷은 편리한 생활 도구의 하나가 아니라 필수 도구로 자리매김하였다. 인터넷의 발달과 보편화로 말미암아 과학기술은 무한대로 발달하고 있으며 그 기술의 발달 속도는 가공할 정도로 가속도가 붙어있다. 이런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가상의 세계에 있는 상상력들을 현실화하기에 이르렀다. 컴퓨터가 주도하는 미래 기술에 대한 전이해가 없는 사람들은 갈수록 미래 세계에서 소외 계층이 될 것이며 수년 내로 인터넷을 모르면 생존이 불가능한 세계가 될지 모르는 급박한 미래쇼크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5) 디지털 정보사회의 상상을 초월하는 신세계가 주는 쇼크
현대사회를 후기 산업사회 혹은 탈 근대 사회라고 불린다. 그러나 정보화 사회라는 명칭은 가장 현실적이며 타당한 현대사회의 표현이다. 미래학자들은 정보를 '숨은 설득자(hidden persuader)'라고 부른다. 점차적으로 텔레비전과 컴퓨터와 전화는 개별적인 기술이나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기술로 혼합되고 있으며 이러한 복합 시스템은 가속적으로 개발될 것이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지구상의 모든 개인에게 시차 없는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네트워크와 네트워크가 연결되는 정보 초고속도로의 개발로 더욱 가속적으로 발달할 것이다. 21세기를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정보 사회라는 것이다. 미래학자들은 1989년에 이미 21세기는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1989년은 동구권이 붕괴되던 해인데 동구권의 붕괴란 정보 사회의 구도로 세계가 재편되었다는 의미이다.
산업 사회와 정보 사회의 차이를 개미 사회와 거미 사회란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개미란 부지런히 일하여 모든 먹이를 독점하는 시대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산업 사회에서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소유하게 되었으며 소유를 독점하던 시대이다. 그러나 거미는 개미가 아니다. 거미는 공중에 거미줄을 치고 사는 생물로 부지런히 일하는 타입이 아니라 좋은 길목에 거미줄을 치고 기다리다가 먹이가 걸리면 잡아먹는다. 정보 사회는 부지런함 보다 정보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승리한다. 정보 사회는 개미 사회와 같이 독점이 아니라 공유하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정보 사회를 살아야 하는 우리는 정보 네트워크를 가져야 하며 모든 지식과 소유의 공유로 전환해야 한다.
산업사회를 지나면서 우리가 흔히 듣던 3D 현상이 있다. 더럽고(dirty), 어렵고(difficult), 위험한(dangerous) 것은 회피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최근 정보사회의 3D 현상은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추구해야 하는 새로운 현상이다. 디지털(digital), 디엔에이(DNA) 그리고 디자인(design)이 신 3D 현상이다. 이 셋은 정보사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습득해야 할 것들이다.
‘디지털’이란 말은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의미하는 ‘디지투스(digitus)'에서 온 말이다. 컴퓨터의 모든 자료는 ’비트(bit)' 단위로 기억되는데 하나의 글자를 기억하는데 필요한 8개의 비트를 묶어 놓은 것을 ‘바이트(bite)'라고 한다. 컴퓨터 데이터의 가장 작은 단위는 0과 1로 이루어져 있는 ’비트‘와 '네트(net)'의 결합으로 컴퓨터를 통한 정보산업 즉 ’디지털 혁명‘은 가능하게 되었다. ’비트‘는 자유자제로 변형이 가능하고, ’네트‘는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전달이 가능하다. 이러한 특성이 컴퓨터와 통신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제는 컴퓨터와 통신은 각각 다른 기술이 아니라 통합 기술로 발전하고 있다.
이제 곧 텔레비전도 디지털의 시대가 되었고 디지털의 힘은 사회를 지배하게 하게 인간의 정신의 세계를 강타하게 될 것이다. 디지털의 발달로 나노기술의 혁명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상상력을 영상화하여 인간의 흥미를 극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인간 기술의 끝은 어디인가 라는 새로운 질문은 인간 정신의 쇼크를 감하지 못하고 있다.
(6) 가치관의 붕괴가 주는 쇼크
미래 사회는 전통적 가치관과 신념들이 붕괴되고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가치관과 사회현상들이 출현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전통적 가치관은 근면, 절약, 정직 등이었다. 그러나 미래 사회의 가치관은 근면이 아니라 여가이다. 인간의 여가와 휴식을 향한 욕구는 끊임없이 발달하여 노동의 가치 보다 여가의 가치를 우월하게 생각하며 많은 여가를 사회적 지위의 기준이 되었다. 이런 의식의 변화는 많은 여가, 짧은 노동을 선으로 여기며 노동의 절대가치가 상대가치로 전락하였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프라스티에는 “미래인은 전 인생의 88만 시간 가운데 44만 시간이 잠자는 시간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고 미래학자들은 한결같이 미래 사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는 여성의 여가 선용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도 주5일 근무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활기를 띄고 있으며 빠르면 내년부터 주5일 근무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우주관의 변화와 더불어 형성되는 가장 뚜렷한 또 다른 미래형 가치관은 임시성과 일회성의 발달이다. 이러한 미래형 가치관은 소유의 개념보다는 임대의 개념이 발달하게 되며 이러한 가치관은 새로운 생활관과 윤리관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임시성(disposability)의 발달은 일회성 문화(throw-away culture)에 익숙해져 가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가 일회용으로 전환되며 영속적인 정신에서 단기적인 사고로 전환된다. 절약이 미덕이던 사회가 소비가 미덕으로 전환되면서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쇼크가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
(7) 나와 똑같은 인간의 출현이 주는 쇼크
미래 사회는 과학이 팽배하는 과학사회가 될 것이다. 나이스비트는 산업 사회를 물리학의 시대라고 한다면 미래 사회를 생물학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생물학의 시대는 모든 과학적 표현이 생물학적으로 변하며 생물학의 모든 과학의 중심이 된다. 특히 유전공학 혹은 생명공학이라 불리는 과학의 첨단 분야는 엄청난 세계사적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이미 동물의 복제, 인간 배아(embryo)의 복제가 과학적으로 가능하게 되었으며 이런 과학적 기술을 산업화하는 생명산업도 실현되었다.
최근에는 인간 배아의 복제를 불치병 혹은 난치병의 해소로 사용하겠다는 국가적 허용이 증가되고 있는 추세이며 이런 추세는 이미 인간의 제도적 장치로 방어하기엔 늦은 감이 있다. 아무리 제도적으로 막는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불치병에 대한 도전은 계속될 것이며 이러한 도전은 궁극적으로 생명에 대한 도전 즉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도전이 될 것이다. 생명공학의 발달은 불임해소와 식량문제를 해소하는 획기적 공헌을 하는 긍정적 결과도 낳았다. 그러나 그 역기능 또한 인간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과학의 발달은 인간에게 편리한 삶을 제공하겠지만 생명에 대한 신학적 철학적 과제를 제공할 것이다. 나를 복제한 나와 똑 같은 인간의 출현은 큰 쇼크가 될 것이다.
2. 미래 목회 충격의 요인
최근의 한국 교회의 충격의 구조적 문제는 묘하게도 한국 경제에 기인하며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와 일치한다. 한국의 교회와 경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음과 같은 유사점이 있다.
(1) 한국의 교회성장은 경제성장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한국교회는 지속적 성장을 보였으나 특히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 중반까지는 매 10년마다 배가가 될 만큼 급속성장 하였다. 이 기간 동안 한국의 경제도 급속 성장하였다.
(2) 한국의 교회침체와 경제침체도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최근에 와서 한국교회가 침체 되 는 경향이 확연해졌다. 한국교회의 침체는 한국경제의 침체와 시기적으로 일치하는데 이는 필자의 견해로는 한국교회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교회가 성장해야 경제도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3) 한국의 경제성장이 거품이듯이 교회성장도 거품이다. 흔히 한국의 경제를 거품경제라 고 한다. 거품은 사실이 아니며 거품이 사라지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는데 거품이 사실로 착각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로 거품이 많다. 이중 삼중 교적을 가진 교인이 많으며 교계에서는 한국 개신 교인이 1,200만이라고 하지만 이다. 통계청 의 자료는 890만이다. 통계청의 자료도 실제보다 많으면 많지 적지는 않을 것이다.
(4) 한국의 경제성장이 외형중심이듯이 교회도 외형중심이다. 한국 경제는 내실 보다 외형이 화려하여 문자 그대로 외화내빈(外華內貧)이다. 현재도 한국의 외화 사정은 보유고만큼 외채도 많다. 한국교회도 교인의 수나 교회당의 크기가 교회의 조직이나 외형에는 손색이 없지만 내적인 영적인 힘은 충분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
(5) 한국의 경제가 재벌기업에 편중되듯이 한국의 교회도 대 교회에 편중되어 있다. 한국 의 경제는 30대 재벌이 국민총생산의 14.7%를 차지하고 있다(1996년 기준). 중소기업의 도산률이 급증하여 최근에는 하루에도 수백 개의 중소기업이 도산하였다. 재벌 의 내부 자금은 평균 22.4%밖에 되지 않지만 재벌은 수많은 특혜를 받고 있다. 한국 교회도 이와 유사하여 대형 교회를 선호하는 국민성에 의하여 유지되지만 소형 교회 는 존속의 위기에 처한 경우가 적지 않다. 교회성장이란 개교회의 대형화로 인식하고 있는데 실제적인 교회성장이란 작은 교회가 많아지는 것도 포함되어야 한다.
(6) 한국의 경제가 독자적이듯이 한국의 교회는 개교회주의가 강하다. 세계 초일류 기업 인 미국의 GM은 자동차 외에 생산하지 않으면 IBM은 컴퓨터 외에 관심이 없는데 우리나라의 재벌은 자동차, 컴퓨터뿐만 아니라 소모성 제품까지 생산한다. 그래서 전문성이 떨어진다. 한국 교회도 독자적이고 개교회주의가 강하다. 선교사를 파송할 때도 다른 교단의 선교사가 있든 말든 보내고 싶으면 보내고, 한 빌딩 내에 다른 교회가 이미 있어도 아래 위층에 교회를 세우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7) 한국 경제의 위기는 개방성에 기인한다. 국내 기업끼리의 경쟁시대가 지나고 국제 경 쟁시대가 되어 세계화에 따른 개방성은 한국 경제로 하여금 어려움을 겪게 하였다. 고임금과 고부가 생산의 결여가 그 주원인일 것이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로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따른 위기가 발생하였다. 사회의 변동과 사회에 대한 개방성은 교회로 하여금 어려움을 겪게 하고 있다.
위의 비교에서 한국교회의 구조적 문제점은 성장 중심적 구조, 양(量)중심의 구조, 과시 행정적 구조, 결과론적 구조 등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존의 교회구조는 산업사회의 전형적 구조로 이미 정보사회로 진입한 세계적 변화에 적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총체적으로 볼 때에 분리와 경쟁을 기조로 하는 산업 사회의 마인드에서 통합과 공동창조를 기조로 하는 정보사회의 마인드로 조속히 바뀌어야 교회도 목회 쇼크를 탈피하고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다.
(1) 개교회주의의 퇴조와 연합운동의 발달이 주는 쇼크
미래의 성격 특히 일회성의 발달과 제3의 물결 이후의 증후군은 개교회주의를 퇴조시키고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게 할 것이다. 소유의 개념보다 대여의 개념이 발달할 미래 사회에서는 제3의 물결의 증후군과 일치되어 개교회주의를 퇴조하고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게 될 것이다. 일회성이란 사회현상을 넘어서 미래형 인간의 사고형태가 될 것이며 이러한 사고형태는 교회에 대한 소유개념보다 편의개념이 발달하게 될 것이다.
개교회주의를 퇴조시킬 또 하나의 미래현상은 이동성이다. 이동성의 발달은 지역교회를 퇴조하게 하고 거리개념을 희박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제3의 물결 사조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발달하고 연합을 기조로 하는 교회운동을 활성화하게 될 것이다. 이미 한국 교회의 특징은 지역 교회를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교단의 프리미엄보다 개별성을 가지고 목회 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개교회주의를 벗어버리지 못한 교회들은 연합운동의 발달은 쇼크로 다가올 것이다.
(2) 심방목회가 통하지 않는 쇼크
미래 사회는 인류공동체가 보편화되는 우주적 사회이다. 세계화의 동인 가운데 하나인 여행은 세계로 하여금 더욱 좁아지게 하고 있다. 일반적 통계에 의하면 현재 세계적으로 여행업 종사자의 수는 2억1천2백만 명이나 2015년이 되면 전세계 인구의 10%가 여행업에 종사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세계의 모든 도시와 인구가 오늘날만큼 이동률이 심하고 이직률이 심한 때는 없었다. 미래형 인간들에게는 일정한 고향이나 주거가 없다. 미래형 인간들에게는 자기가 사는 곳이 곧 집이다. 잦은 이사와 여행은 사회를 기존의 사회현상을 파괴하고 새로운 유목민적 사고의 사회로 탈바꿈하고 동공화를 촉진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이동성(mobility)의 발달은 교회로 하여금 기존의 목회구조를 무력화하게 하고 새로운 목회구조를 요청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이전 사회에서는 심방은 목회의 중요한 요소였으며 부지런히 심방한 목회자는 일단 성공적 목회를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사회의 변동으로 말미암아 심방만으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모세는 하루 종일 백성들의 문제로 분주하였으나 이드로는 모세에게 선하지 못한 일을 한다고 충고하였다. 종일 성도들을 위하여 심방하는 것만으로는 좋은 목회가 될 수 없다. 심방 패러다임에 익숙한 목회자에게는 목회 쇼크가 될 것이다.
(3) 성직자 중심에서 평신도 중심으로의 이동이 주는 쇼크
전세대의 카리스마적 목회자의 출현 보다 평신도 사역이 극대화되고 평신도 사역을 통한 교회성장을 미래교회는 도모하게 될 것이다. 메타교회는 소그룹을 통한 교회활동을 강조하고 목회자는 평신도 훈련을 위한 일에 많은 시간과 힘을 투자해야 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목회는 소그룹의 평신도 지도자들에 의하여 이끌어지기 때문에 소수의 목회자가 필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미래교회는 목회자의 역할 보다 평신도의 역할이 중심이 된 교회이며 평신도 훈련을 강조한다. 특별히 평신도는 미래교회에서 성직자의 동역자로서의 관계와 개념으로 발전할 것이다.
전 세대의 목회자들은 목회에 관한 한 만능 선수(all round player)였다. 그러나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은 목회자가 전면에 서고 평신도가 후면에 서던 이전의 패러다임과는 달리 평신도가 전면에 서고 목회자가 후면에서는 목회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의 평신도 훈련은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에서 절대적 의미를 가진다. 목회자에게 절대 의존되어 있던 목회에 익숙한 목회자는 또 한번 목회 쇼크에 시달리게 된다.
(4) 조직교회에 대한 반대가 주는 쇼크
미래교회의 교인은 영성에 대한 관심은 증대되나 조직교회의 구조에 대한 싫증을 느끼고 조직에 얽매이기 싫어할 것이다. 종교적 조직이란 대체로 목표지향(goal orientation)으로 시작하여 업무지향(task orientation)으로 전락하고 마침내 밑바닥에서 통제지향(control orientation)으로 타락한다. 미래사회는 인간을 조직보다는 개인의 일에 묶어둔다. 재택산업과 화상회의가 발달하고 출근 보다 근무라는 의식이, 통근 보다 통신이라는 의식이 발달할 미래인에게는 교회라고 하는 통제지향의 조직은 더 이상 매력을 주지 못할 것이다.
조직 교회에 대한 미래인의 거부감은 열린 예배에서 잘 나타난다. 열린 예배는 예배의 절대적 대안은 아니나 조직 교회와 예전적 예배에 대한 하나의 대안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조직적이며 예전적인 것들에 대한 미래인의 식상은 파괴적이며 돌출적인 형식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포스트모던 지향의 의식을 교회는 건전한 신 정통으로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대안에 익숙하지 못한 목회자는 열린 예배, 열린 교회에 대한 쇼크가 크고 “열린”이란 용어에 대한 알레르기도 만만치 않다.
(5) 디아코니아에 대한 요청이 주는 쇼크
미래교회는 자기 중심적 교회관에서 타자에 대한 관심으로 그 중심이 이동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미 부분적으로 이러한 중심이동의 현상이 교회 내에서 일어나고 있다. 산업사회에서의 교회의 관심은 교회성장이었고 선교는 개인영혼이라는 제한적 의미를 가졌지만 정보사회에서의 교회의 관심은 사회적 책임이라는 본질적 전환으로 모색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미 선교의 개념도 개인구원이라는 제한적 개념에서 사회참여라는 진보적 개념까지를 포함한 통전적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변형의 시도 가운데 가장 뚜렷하게 부각될 관심사는 디아코니아가 될 것이다. 한국교회가 사회를 위하여 남은 일이 있다면 디아코니아일 것이고 미래 사회의 변동은 교회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제공할 것이다. 미래의 한국교회는 "교회가 사회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개혁주의의 물음에 충실해야 하며 그렇게 될 것이다.
교회가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세 가지를 지향하는데 상향(upreach)과 내향(inreach)과 외향(outreach)이다. 상향은 교회의 첫째 목표이며 교회의 존재이유이다. 이것은 예배와 전달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내향은 보이는 교회의 모습이며 힘의 집결을 의미한다. 이것은 훈계이며 축하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외향은 실제적 교회이며 동시에 교회의 사명이다. 이것은 전도이며 돌봄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지금까지의 한국교회는 상향을 강조하여 교회의 본질에는 충실하였으나 외향에는 상대적 소홀함이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와는 별개의 기관이 되었고 교회가 상향을 강조하는 동안 사회를 외면하였고 그 결과로 교회는 성장하였으나 이제는 사회가 교회를 외면하게 되었다. 앤더슨(Leith Anderson)은 베이비붐 이전세대(Pre-Boomers), 베이비붐 세대(Baby Boomers) 그리고 베이비 거부세대(Baby Busters)의 특징을 비교하면서 베이비붐 이전에는 선교와 기도, 성경공부에 관심을 가지던 교인들이 베이비 붐 세대에는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베이비 거부세대에는 복지와 관련된 프로그램이나 봉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사회를 외면한 성장 일변도의 교회였다. 이러한 목회의 지향을 전환하는 것은 목회의 철학을 전환해야 하므로 이에 따르는 쇼크는 시너지 효과를 동반할 것이다.
3. 미래 목회 충격완화 작업
(1) 충격완화 작업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
정보 사회는 기술시대이다. 과학기술이 최고의 가치로 각광받는 시대를 의미한다. 기술이 보편화되어 있고 기술이 가치를 동반하는 시대에 사는 목회자들에게는 목회 기술을 요청하고 기술 목회에 익숙해져 간다. 현실적으로 우리 주변의 목회 상황을 바라보면 수많은 목회 프로그램과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자료들이 매일 쏟아져 나온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많은 성경공부 자료들, 설교집과 예화집들,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한 무한한 목회자료들과 CD Rom에 저장된 목회 기술들이 목회에 도움도 되겠지만 목회자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목회의 기능공이 되게 하고 있다. 이전 세대의 목회자들은 이런 유의 목회 자료가 없었고 목회 자료 없이도 훌륭하게 목회하였지만 거의 모든 목회를 자료에 의존하고 있다.
르네상스(Renaissance)와 종교개혁(Reformation)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 정신이 재생정신이었다는 것이다. 16세기의 르네상스는 중세에 대한 단절로서 재생을 알리는 인간의 본질로 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 그래서 르네상스를 근원으로 돌아가는(ad fontes) 운동이라고 표현한다. 종교개혁 역시 중세에 대한 단절로서 성경의 본질로 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 르네상스가 인문주의적 시도였다면 종교개혁은 영적 시도였다. 르네상스란 중세인이 입혀준 외식의 옷을 벗는 운동이며 형식의 거품을 빼는 운동이었다. 결국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중세의 세상과 단절된 방주 안의 구원에 만족하고 울타리 안에서 고행과 도덕률을 강조하여 내용보다 교리에 치중하였던 당시의 중세 풍의 경건의 탈을 벗어버리고 교리로부터 탈출하고 생명력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는 훈련을 하는 새로운 경건으로 전환되게 하였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중세의 탈을 벗고 형식의 탈을 벗는 운동이며 교회의 본래적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영성운동이었다.
요한복음 4장은 예수님과 수가 우물가의 여인의 만남을 전한다. 예수님은 여인과의 생수에 대한 대화에서 “내가 그로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생수의 공급자이심을 계시하신다. 예수님이 생수이신 것은 물의 특성 때문이다. 물은 일정한 형태를 가지지 않는다. 물의 형태는 물그릇의 형태에 따라서 가변적이다. 물이 일정한 형태를 가지지 않는 것처럼 예수님은 내용이지 형식이 아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문화적 배경과 형식을 완전히 깨셨다. 이러한 형식 타파를 바리새인들은 종교의 파괴 내지는 하나님 모독으로 보았고 고소의 핵심적 내용으로 삼았다. 예수님은 이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당시의 흔한 문화적 형식을 완전히 파괴하신 것이다. 당시에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상종하지 않았던 문화를 예수님은 파괴하시고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인을 만나셨고, 당시에는 남자와 여자가 문밖에서는 부부라도 서로 얘기하지 않던 당시의 문화적 벽을 예수님은 초월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문화의 틀 속에 갇히지 않으신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 물동이를 버리고 동네로 들어갔다. 요한은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물동이를 버려 두고”라는 말을 명기한다. 이 말을 확실하게 기록한 것은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물동이를 상당히 귀중하게 여기던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제 생수를 가지게 되었을 때에 물동이는 귀하지 않고 버릴 수도 있었다. 참 생수를 발견했을 때에는 물동이는 버릴 수 있고 버려야 한다. 물동이는 물을 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여인이 물동이를 귀하게 여겼을 때에는 자신의 체면이 중요하였고 사람을 만나기 싫어하여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한가한 시간에 우물가에 나왔다. 그러나 물동이를 버렸을 때에는 체면이 문제가 아니었고 자신이 만나기 싫어하던 사람들이 있는 동네로 자기 발로 들어가서 메시아를 증거하게 된다. 물동이는 체면이란 형식을 중시하게 하고 물동이를 버릴 때에 형식이 아니라 메시아란 내용을 중시하게 되고 비로소 사람들에게 접근하게 한다.
결국 충격완화 패러다임이란 물동이 버리기이다. 물동이를 버릴 때에 사람들의 영혼을 향해 접근할 수 있게 되며 물 보다 물동이가 더 귀중할 때는 문화와 형식을 중시하며 그 형식 때문에 사람에게 접근할 수 없게 된다. 한국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형식이 불신자에게 접근 양식을 혼란케 한 경우가 허다하였다. 내용인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하여 형식인 물동이를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또 한가지 중요한 과제는 물동이를 버리다 물까지 버리는 잘못을 범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옛말에 “목욕물 버리다 아이까지 버린다”는 말이 있다. 한국 교회는 그 동안 물동이 싸움을 많이 하였다. 이것은 산업사회의 한 과정이기도 하였지만 물동이 싸움을 하다가 물을 다 엎질러지고 물동이를 서로 가지려고 싸우다 물동이까지 깨진 아픔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생수를 확실하게 소유하였으면 물동이를 버려야 하고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물동이를 쉽게 버릴 수 있어야 사람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동이 버리기는 중요한 세상으로의 접근 양식이다.
바울은 생수이신 예수님을 확고하게 믿고 전하였으므로 물동이를 버린 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 9:20-23). 바울은 자신의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고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양식은 모든 사람에게 다르게 하였다. 이것이 바울의 복음적 갱신 패러다임이다.
(2) 충격완화 작업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최근의 기업경영의 최대의 관심은 구조조정이란 새로운 과제이다. 무한경쟁시대라는 기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하고 세계무역기구(WTO)라는 세계상권의 적응을 위하여 어느 나라할 것 없이 새로운 구조조정으로 경쟁력을 키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구조조정과 함께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리엔지니어링(Re-engineering)이다. 리엔지니어링이란 기업의 완전한 새로운 경영혁신을 통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것을 의미한다. 구조조정이 '무엇을 하느냐(what to do)'를 해결하는 것이라면 리엔지니어링이란 '어떻게 하느냐(how to do)'를 해결하는 것이다.
구조조정을 통한 새로운 경영방식은 적은 인원으로도 같은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경영방식은 기업에 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효율적 인력관리와 재정관리 그리고 나아가서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다. 최근에 관심을 가지는 교회의 구조조정은 그 인력과 재정과 기구가 교회의 안을 살찌우는 내수적인 구조에서부터 교회 밖을 섬기는 외향적인 구조로 조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의 인력과 재정은 교회를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한 부분이 지나치게 과다하게 지출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효율적인 목회와 급변하는 시대변화에 복음전파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목회 구조의 개혁이 필수적인 것이다.
위와 같은 구조조정의 원리만으로 교회의 구조를 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구조조정은 성경적 원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조조정의 원리를 예수께서 성전을 숙정하신 사건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사건은 공관복음서에는 무화과를 저주하신 사건과 병행한다. 성전을 깨끗케 하신 이유는 성전 안에 없어야 할 것이 너무 많이 있었기 때문이며 무화과를 저주하신 이유는 있어야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전을 깨끗케 하신 사건은 성전의 개혁을 의미하며 오늘날의 교회 개혁을 당시의 성전의 개혁에서 유추하려고 한다.
첫째, 상업주의를 배격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성전을 숙정하신 것은 성전의 상업주의를 배격하신 것이다. 레위법전에 의하면 제사용의 물건을 팔고 성전세로 바칠 돈을 바꾸게 하였는데 성전 안에서 상업행위가 행해진 것이 문제이다. 처음에는 성전 밖에서 하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성전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생활을 혐오하면서도 배운 것은 애굽의 우상숭배였다.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간 사이에 아론과 백성들은 "우리를 이끌 신을 만들자"라고 한다. 그들을 이끈 신은 하나님이 아닌 모세였다. 이것은 인본주의적 발상이다. 그리고 그들은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들을 이끌 신은 가장 비싼 금이어야 한다는 금본주의적 발상이다. 이러한 인본주의와 금본주의는 오늘날 우리 교회에 자리하고 있는 개혁의 대상이며 상업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둘째, 혼합주의를 배격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보신 성전은 정교 혼합주의의 산물이었고 이것을 배격하신 것이다. 헤롯 성전은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다음에 세워진 것으로 헤롯이 유대를 다스리기 위하여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성전을 완공하기 위하여 대제사장들은 헤롯에게 온갖 아양을 떨었고 헤롯의 물질과 정치가 종교와 혼합된 성전이었다. 세상의 물질과 정치가 교회와 야합될 때에 교회는 급속히 타락하게 되는 것이다. 혼합주의는 또다른 세속주의를 낳는다.
셋째, 교권주의를 배격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성전을 숙정하신 것은 유대교의 교권주의에 대항하신 것이다. 당시의 대제사장들은 종교의 최고 지도자로서 세습적이었기 때문에 안일하고 권력만을 행사하고 권리 이상의 비리를 자행하였다.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성전 안에서 장사하도록 허락하였으며 제사법전에 의하여 상한 제물은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게 하였지만 성전 안에서 파는 상한 제물은 제물로 드리게 허락하였다. 하나님의 집을 자기 집처럼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하나님의 법을 자신의 이권으로 해석하는 교권이 남용되는 시대였다. 어느 시대든지 교권의 중요성은 인정되어야 하지만 교권주의가 되면 교회는 타락하였다.
넷째, 형식주의를 배격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성전을 숙정하신 또 다른 요인은 성전의 형식주의였다. 성전 주위에서 제물을 팔고 성전 세를 바꾸게 한 것은 나그네들이나 부득이 준비하지 못한 자들을 위한 배려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부득이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준비 없이 성전에 와서 적당히 제물을 사서 바치게 되었다. 이런 형식주의는 제사장들과 장사꾼들이 제도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내용과 정성보다는 제물을 드리고 성전에 왔다는 형식으로 만족하는 제사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이런 내용 없는 형식주의는 지금도 교회 안에 잔재한 개혁의 대상 중의 하나이다.
4. 미래 목회 충격완화 장치(shock absorber)
이제 이전의 것, 낡은 것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유지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가 넣어야 둘 다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 새 부대의 의미는 새 포도주의 보존이다. 우리의 복음, 전통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면 새 부대로 바꿔야 한다. 이전의 부대로는 포도주까지 못쓰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 부르심을 받을 때에 전도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받았다(마 10:1-2, 막 3:14-15). 그리고 배운 대로 나가서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쳤다(막 6:12-13). 그러나 변화산 아래서 제자들은 아홉 제자가 남아서 한 아이를 고치려고 하였지만 고치지 못하였다. 이미 권능도 받았고 병 고친 경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안되었다. 그들은 예수님께 물어보았다.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그 때 예수님께서는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이전의 경험으로 현재의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일은 새로운 일이며 모든 경험은 단회적이다.
한국 교회의 목회 패러다임은 산업사회를 통하여 얻은 경험적 소산이다. 지금까지 전도도 하였고 병도 고쳤다. 그러나 이제는 옛 경험으로만은 안 된다. 지금까지는 얼마든지 가능하였지만 이제는 먹혀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사회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경험만 가지고 덤벼든 아홉 제자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 것처럼 이전의 경험만 가지고 덤비는 교회는 세상 앞에 창피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장치를 제시한다. 충격완화 장치는 새로운 목회의 패러다임을 의미한다.
(1) 정보목회
현대사회를 후기 산업사회 혹은 탈 근대 사회라고 부른다. 그러나 정보 사회라는 명칭은 가장 현실적이며 타당한 현대사회의 표현이다. 그래서 현대사회를 지식사회(Machlup), 전자기술사회(Brezezinski), 후기산업사회(Bell), 새로운 산업사회(Galbraith), 초산업사회(Toffler), 혹은 고도기술사회(Naisbitt)라고 불리기도 한다. 미래학자들은 정보를 ‘숨은 설득자(hidden persuader)'라고 부른다. 현대 사회에 가장 영향력 있는 힘의 근원이 정보이다.
디지털의 세계는 아날로그의 세계와는 다르다. 어떤 이는 이전의 시대를 진공관의 시대, 아날로그 시대라고 하고, 현대를 디지털의 시대라고 정의한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정신의 변화도 엄청나게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로 표현되는 정보사회는 이제 인간의 상상력이 미치는 것은 무엇이든 가능한 시대가 된 것이다.
정보사회는 이전의 산업사회와는 달리 효율성이나 효과성보다 유연성이나 창의성이 더 중요한 사회이다. 정보사회는 조직의 혁신 방안도 구조조정이나 리엔지니어링 그리고 모듈레이션 등으로 발달하게 되므로 정보 마인드로 변화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 정보사회는 인간의 위상도 상당히 달라진다. 인류의 1차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농업혁명 시대는 자연을 모델로 한 지식이 지배하였고 2차 혁명인 산업혁명 시대는 기계를 모델로 한 지식이 지배하였지만 3차 혁명인 정보혁명 시대는 사람을 모델로 한 지식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목회의 패러다임에도 상당히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다.
정보사회는 모든 사람이 중심인 사회이다. 그래서 정보사회를 거미사회라고 한다. 거미는 거미줄의 중심을 지배한다. 이런 정보사회로의 이동은 사회의 전통적 규범이나 가치에 대 전환을 가지고 오므로 혼란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미 우리 사회도 전통 규범이나 가치가 혼돈 되는 정보사회의 현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정보목회란 정보를 이해하고 활용하고 관심을 가지는 목회이다. 목회자가 정보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정보사회는 정보가 사회의 중심 개념이므로 정보는 사회를 이해하는 도구이다. 정보의 발전과 흐름을 알지 못하면 사회의 변동을 인지할 수 없다. 급속도로 진보하는 사회를 읽지 못하면 사회를 구원하기는 더욱 어렵게 된다. 교회는 사회를 이해하는 도구로서 정보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정보는 결코 사회를 구원하는 도구는 아니다.
(2) 가정 중심 목회
21세기를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정보 사회라는 것이다. 미래학자들은 1989년에 이미 21세기는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1989년은 동구권이 붕괴되던 해인데 동구권의 붕괴란 정보 사회의 구도로 세계가 재편되었다는 의미이다. 정보 사회의 기조는 산업 사회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정보가 사회의 중심이 되는 사회이다.
산업 사회와 정보 사회의 차이를 개미 사회와 거미 사회란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고 위에서 서술하였다. 거미는 개미와는 달리 부지런히 일하는 타입이 아니라 거미줄에서 기다리다가 먹이가 걸리면 잡아먹는다. 21세기는 정보사회이기 때문에 산업사회와 같이 부지런하게 돌아다니는 사회가 아니라 가정에서 업무를 하며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이다. 실제로 갈수록 재택산업(在宅産業)이 발달하며 컴퓨터만 들여다보며 일하는 직업들이 점점 많아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출퇴근이 없어질 미래 사회에는 부부사이가 좋은 가정은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그렇지 못한 가정은 지옥같이 변할 것이다.
미래 사회는 가정중심주의로 변한다고 한다. 피자를 비롯한 음식물이 가정으로 배달되고, 세탁물이나 생활용품들이 가정으로 배달되며, 선물도 택배회사에서 배달한다. 뿐만 아니라 모든 상거래가 가정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은행업무도 집에서 홈뱅킹으로, 쇼핑도 가정에서 홈쇼핑으로, 심지어는 공부도 학교에 가지 않고 홈 스쿨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홈 스쿨 제도를 도입하여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제법 많이 있다. 21세기에 가장 우려하는 것은 가정 주부들의 여가선용이다. 가사의 80프로 이상을 돌보게 될 로봇을 비롯한 첨단 과학 기술이 가정주부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므로 가정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가정중심주의 시대인 21세기를 앞두고 그리스도인은 가정을 잘 추스려 모범적인 가정이 되게 노력해야 할 것이다. 미래 교회는 어떤 형태의 교회이든지 가정 중심의 교회, 가족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미래 교회가 가정중심으로 전환해야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미래 사회는 가정 중심으로 변화하며 사회의 진보가 가정 중심으로 되기 때문이다(cacooning). 둘째는 미래의 가정이 전통적인 가정의 모습을 유지하지 않게 되고 가정이 해체되며 파괴되는 과정이 가속화되기 때문이다. 신세대가 개인주의적이듯이 미래 가정은 다세대의 가정 보다 핵가족이 극대화될 것이고 가족이 분열되고 이산되는 경우가 흔할 것이다. 이런 다양한 미래 교회에 대한 예측은 가정이 사회생활의 중심이 되며 결과적으로 여성이 사회의 중심이 될 것을 예측 가능케 하는 것이다.
(3) 네트워크 목회
미래 사회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독자적 행보를 용납하지 않는다. 미래 교회는 철저하게 연합이 되어야 하고 팀을 이루어야 효율적이고 발전적인 목회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우선 미래 사회는 다양화 사회이기 때문에 목회도 다양화 목회가 되어야 하고 다양화 목회는 나홀로 목회가 아니라 네트워크를 통하여 가능한 것이다. 미래의 팽창하는 지식과 정보는 개인의 능력으로 소유하기란 불가능한 사회이다. 그러므로 지식의 발달에 순응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능력만이 아니라 타인의 능력까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상호 의존과 상호 활용의 지식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다.
목회에서의 네트워크는 목회자 개인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것을 느끼게 하고 또 가능하게 한다. 첫째, 자신이 실제의 자신 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게 한다. 네트워크란 결국 내 자신의 증대이다. 네트워크란 나를 증대시키며 나를 풍요하게 한다. 둘째, 나홀로 목회가 성취할 수 없는 목표를 성취 가능하게 한다. 나홀로 목회가 가지는 약점이란 내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는 것과 개인의 능력으로는 현대 사회의 다양화를 좇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를 팀의 시대(Time to Team)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마 네트워크의 시대(Time to Network)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세계화의 한 특징은 블록(block)의 발달이다. 지금 지구는 수많은 자국의 이익을 앞세운 블록들로 가득 차 있다. 거대한 유럽연합(EU)을 위시하여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APEC),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아세안자유무역지대(AFTA) 등 많은 블록들이 세계를 분할하고 있다. 국가간의 연합인 블록을 대처하기 위하여 또 다른 기구와 경영기법이 개발되고 있다. 최근에는 전략적 제휴(strategic alliance)가 발달하여 동류의 기업들이 전략적으로 블록이나 다른 기업에 대처하기 위하여 상호보완적 제휴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략적 제휴는 미래 목회의 중요한 개념이다. 교회는 세계의 변화와 거대한 세상에 대항하기 위하여 전략적 제휴가 필요한 것이다. 교회의 전략적 제휴인 네트워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크게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자신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정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모든 일을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을 모두가 함께 하는 연대와 협력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기업의 전략적 제휴가 그러하듯이 교회의 전략적 제휴인 네트워크나 목회의 전략적 제휴인 팀 목회도 상호 신뢰가 우선되어야 한다. 셋째는 상호 제공할 수 있는 목회적 기술이 있어야 네트워크가 가능하다.
지금까지의 한국교회의 목회는 개인주의적인 목회이었고 개교회주의가 성하였으며 교단주의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제3의 물결의 증후군인 에큐메니즘의 발달은 나홀로 목회에서 네트워크 목회로 우리의 목회를 전환하게 할 것이며 이러한 전환은 교회로 하여금 하나가 되게 하는 새로운 기능을 하게 될 것이다. 특별히 정보통신의 발달로 전자 네트워크를 통하여 정보의 교환과 사업이 활성화될 미래를 위하여 목회현장에도 네트워크 형성을 요청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목회 현장의 변화는 인터넷을 통하여 상호 목회 정보의 공유가 가능하게 되었으며 이 메일을 통한 정보의 교신 및 네트워크도 활발하게 되었다.
미래 교회에 가능한 네트워크는 대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목회자와 목회자의 네트워크이다. 둘째, 목회자와 노회나 총회 등 상회기관과의 네트워크이다. 셋째, 목회자와 정보 제공 기관과의 네트워크이다. 넷째, 기관과 기관의 네트워크이다.
네트워크는 유익한 점이 많이 있지만 장애요소들도 없는 것이 아니다. 네트워크의 장애요소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있을 것이다. 첫째, 일반적 차이이다. 둘째, 신학적 불일치 혹은 성경해석의 불일치이다. 셋째, 잘못된 전달이다. 넷째, 관계의 단절이다.
목회에 있어서의 네트워크의 성과는 첫째, 목회자의 사기가 올라간다. 둘째, 업무의 생산성의 향상이다. 셋째, 네트워크는 개인적 훈련의 효과도 얻을 수 있다. 넷째,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함이다. 전자 네트워크를 통하여 정보의 교환과 사업이 활성화될 미래를 위하여 목회현장에도 네트워크 형성을 요청하게 될 것이다. 네트워크 목회는 하나의 교회를 추구한다.
(4) 감동 목회
사이버 시대의 특징은 3F 즉 패션(fashion), 감각(feeling), 팬시(fancy)이다. 감동 시대에는 목회도 감동이 되어야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객만족’이라고 하던 것이 이제는 ‘고객감동’이라고 한다. 이제는 만족 정도로는 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느낌을 주어야 하고 감동이 흐르게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고객인 교인들에게 만족을 주는 차원이 아니라 감동을 주는 차원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사회는 신상품 등으로 감동과 자극을 줄 만한 것들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보다 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목회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기존의 목회구조를 전환할 수 있는 대체 목회상품을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목회자의 노력이 교인들로 하여금 만족의 차원에서 감동의 차원으로 영적 수준이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경쟁력이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대안이 필요할 것이다. 첫째, 성직자에서 교인으로 교회의 중심이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교회의 목표를 세계 최고, 세계에 영향을 주는 교회로 바꾸어야 한다. 셋째, 교회의 목표나 경쟁의 수단이 양(quantity)에서 질(quality)로, 크기(size)에서 가치(value)로 바꾸어야 한다. 넷째, 기업에서 일회성 고객을 평생 고객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하듯이 교인을 일회성 교인에서 평생 교인으로 바꾸는 노력을 해야 한다.
교회도 이제는 교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제공해 주느냐라고 하는 생존의 방식에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이전의 교회와 같이 문만 열면 교인들이 몰려들고 한마디만 하면 새 신자들이 등록하는 시대가 아니라 기존의 교인들도 새로운 고품질의 설교를 원하고 신선한 교회의 프로그램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는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는 설교와 프로그램을 개발하여야 한다. 이러한 개발은 결국 최고의 경영자인 목회자에게 그 책임이 있고 목회자의 의식전환이 가장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사이버 시대의 교회는 목회자가 교인에게 만족을 줄 수 있도록 의지가 있어야 하며 전 교인이 이에 함께 참여하게 될 때에 만족에서 감동으로 전환될 것이다. 우선 내부 고객인 기성교인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불편을 느끼지 않게 만들어 주어야 하며 이러한 내부 고객의 만족은 결국 외부 고객인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자연히 만족을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교인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감동이 없어지고 감동하지 않는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세상으로 변하였다. 예수님도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시대를 비판하셨고(마 11:17), 바울은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무정하여진다고 하였는데(딤후 3:3) 이런 세상에 감동을 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동시에 중요한 일이다. 감동이 없는 시대이기 때문에 감동이 필요하며 감동이 없는 사람들이 감동을 원하게 된다.
좀처럼 감동하지 않는 현대인은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 감동한다. 기독교의 진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장 감동하지 않을 것 같은 교인이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 감동을 하고 이런 감동의 원천은 모든 교인들에게 동일하다. 감동이 있는 교인이 생동하고 생동하는 교인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다. 목회자는 순간순간 교인을 감동시키는 감동사가 되어야 한다.
(5) 영성목회
21세기는 영성의 시대이다. 교회가 영성적이지 못할 때에 사회는 사이비, 이단이 많아진다. 영성이란 말은 우리 시대의 유행어가 되었다. 영성이란 말은 기독교에서 독점하는 용어가 아니라 다른 종교와 학문의 분야에서도 사용되는 용어이다. 영이란 원래 하나님의 숨을 의미하듯이 영성이란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나님의 숨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의미한다. 고대 교부의 위대한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영성이란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삶을 의미하였다. 실제로 영성이란 ‘그리스도와 일체된 삶’을 의미하며 기독교의 영적, 종교적 차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성은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게 한다.
기독교의 기능을 두 가지로 크게 대별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영성적 기능(spiritual function)이며 다른 하나는 예언자적 기능(prophetic function)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영성적 기능을 가진 영성적 종교이며 동시에 예언자적 기능을 가진 예언자적 종교라고 한다. 교회 역사학자들은 유럽 교회가 급속도로 쇠퇴의 원인은 예언자적 기능에 지나친 무게를 두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교회의 무게 중심의 이동은 교회로 하여금 쇠퇴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의미이다.
흔히 수십 년이 지나면 한국 교회도 유럽의 교회와 같이 변질되고 쇠퇴하게 될 것이라고 단정하는 종교학자들과 기독교인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언제쯤 교회가 쇠퇴할 것인가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교회가 쇠퇴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미 교회의 쇠퇴는 한국 교회 미래에 상당한 역사적 교훈적 가치를 제시한다. 예언자적 기능에 지나친 무게를 둔 것이 교회 쇠퇴의 원인이 되었다면 교회가 쇠퇴하지 않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기능의 균형을 유지하여야 할 것이며 특히 영성적 기능의 쇠퇴가 현저한 현 시점에서 교회의 기능적 균형은 중요한 관심사이다.
교회는 이러한 미래인이 추구하는 영성의 제공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사회에 건전한 영성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성을 상실하지 말아야 하며 사회에 영성을 제공할 능력을 항상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독교 외에도 영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는 비 기독교적 영성과 다른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영성을 가져야 하며 사회에 제공하여야 한다.
양극화(polarization)는 사이버 시대 시대적 특징이다. 경제적으로도 부익부빈익빈의 양극화가 두르러지고 있으며 이런 양극화 현상은 지식 정보와 신앙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영성적 양과 질도 시간이 갈수록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서 영성적으로 충만한 사람과 영성적으로 빈곤한 사람의 간격이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달란트 비유는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말기에 주신 말세에 관한 가르침의 한 부분이다.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와 누가 복음의 므나의 비유는 같은 내용의 비유인데 이 비유의 결론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는 것이다. 21세기에는 영성이 있는 자들은 더욱 간절히 준비하며 풍성하게 될 것이며 없는 자는 있던 것마저 빼앗기고 영적 빈곤 상태가 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최근에 와서 교회의 영성적 기능을 서서히 상실해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한국 교회가 영적으로 침체하기 시작한 연도는 1996년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1996년은 이상하리만큼 많은 사회가 거짓 영에 사로잡히게 된 해이었다. 우선 1996년은 환생과 전생 신드롬이 사회를 어지럽게 한 해이다. 1996년은 환생과 전생에 대한 신드롬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들 사이에 한해 내내 유행한 시리즈가 귀신 이야기인 "만득이 시리즈"라는 것이다. 동시에 1996년은 무당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무당의 예언에 온 나라가 신경을 곤두세우던 해이다. 이와 같은 환생 신드롬과 만득이 시리즈와 같은 귀신 이야기와 무당 이야기가 사회를 풍미했다는 것은 교회가 건강한 영성을 가지기 못하고 사회에 건강한 영을 제공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교회가 외형적 성장을 추구하면서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얻게 된 중세 풍의 형식과 거품과 깨기 힘든 두터운 껍질을 가지게 되었는데 교회는 과감하게 이러한 거품을 걷어내고 껍질을 깨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중세에서 교회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은 교회의 영성의 회복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새롭게 거듭나고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영성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요청이다. 인간의 삶이 기술화되고 조직화될수록 인간은 기술에서 초연해지고 조직에서 해방되려고 하는 심리를 동시에 가지게 되며 이러한 해방의 돌파구로 영성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 동안 한국 교회는 기복적이라는 자타의 비판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왔다. 그러나 실제로 한국 기독교사에 나타난 한국 교회의 모습은 기복적이 아니다. 1960년대에 제3공화국이 출발하면서 국가의 기조는 가난에서의 탈피였고,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로 바뀌었다. 경제성장이 국가의 시책이 되므로서 교회도 “잘 살 수 있다, 부자가 되어야 한다”로 바뀌었다. 이전까지 한국 교회의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예수 믿고 천당”이 전도요, 설교의 핵심 주제였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다시 교회의 본질적 영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6) 평신도 목회
지난 시대의 성직 패러다임(clerical paradigm)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평신도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어 가고 있다. 이전의 목회에서 평신도는 목회자와의 종속적 관계에서의 협력자이었으나 미래 목회에서 평신도는 목회자와의 동등한 관계에서의 동역자가 될 것이다. 칼 조지(Carl George)는 미래 교회를 메타교회(Meta-church)라고 하였는데 메타교회의 목회자는 소그룹을 통한 교회활동을 강조하고 평신도 훈련을 위한 일에 많은 시간과 힘을 투자해야 한다고 하였다.
평신도는 목회자와는 달리 적절한 훈련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목회에 기여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는 교회의 잠재적 자원이다. 목회자는 교회에 영향을 많이 주지만 언제나 유동적이며 안정적이지 못하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교회의 조직을 장악하는 것은 목회자의 이동시 교회를 불안정하게 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평신도는 교회의 안정된 구성요소로서 잘 훈련된 평신도는 안정된 교회의 중요한 요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크래머(Hendrick Krammer)는 평신도를 ‘동결된 자산’이라고 하였다.
교회의 어원과 정의에서 보는 대로 교회란 특정한 목적에 의하여 모인 하나님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주체가 항상 하나님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교회도 그 주체가 하나님이란 사실을 전제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교회의 평등의 원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개혁주의의 개혁의 목표는 탈 성직주의와 탈 제도주의이다. 루터는 평신도의 사제성과 보편적 사제성을 강조하였고 만인제사장설을 주창하였다. 복음은 모든 신자들의 소유물이며 이제는 더 이상 구약의 제사장직을 사제들의 독점물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의 공유물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기독교의 불후의 명작의 하나로 꼽히는 ‘기독교강요’는 평신도인 칼뱅에 의하여 저술되었다. 그는 방대한 신학적 주제를 성직자나 신학자의 입장이 아닌 평신도의 입장에서 저술하였고 개인의 성경연구에 바탕을 두고 기독교의 진리를 해석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후에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레(John Wesley)는 교회 안에서의 평신도의 위치를 성경적, 신학적, 교리적으로 깊이 있게 연구하여 평신도 운동의 합리성을 그의 신학으로 선포하였고 나아가서 평신도 설교자(lay preacher)의 필요성까지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그의 영향으로 평신도 설교자가 있었다.
오랜 로마교회의 전통 가운데서 평신도는 성직자와 대칭적인 의미를 가진 일반 교인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평신도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개신교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를 계급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기능적으로 구분하여 평신도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평신도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한 하나님의 도구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평신도는 모두가 하나님의 일꾼이며 교회의 봉사자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미래 교회는 평신도 중심이어야 하는 당위성이 있다. 그것은 국가나 기업이나 조직에서 그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는 미래 현상 때문이다. 산업사회의 중심구조가 정보사회에서는 하부로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그래서 국가에서도 행정수반 보다 국민이 중심이며, 기업도 사장이 아니라 사원이며, 회사가 아니라 고객이며, 조직도 조직의 장이 아니라 조직원이다. 이러한 변화는 교회에도 예외가 아니다. 그간의 성직자 중심의 편중된 교회 구조를 평신도 중심의 분산된 교회 구조로 조정이 되어야 한다. 성직자에게 편중된 교회 구조를 평신도와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교회와 성직자 개인에게 유익이 될 것이고 또 미래 교회는 자연히 성직자 중심의 구조에서 평신도 중심의 구조로 전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7) 교육 목회
사이버시대는 인류공동체가 보편화되는 우주적 사회로서 이동성(mobility)이 극대화되는 사회이다. 세계의 모든 도시와 인구가 오늘날처럼 이동률이 심하고 이직률이 심한 때는 일찍 없었다. 잦은 이사와 여행은 사회를 기존의 사회현상을 파괴하고 새로운 유목민적 사고의 사회로 탈바꿈하고 동공화를 촉진하게 할 것이다. 도시의 변화는 이동성을 가속화하며 이러한 이동성의 발달은 교회로 하여금 기존의 목회구조를 무력화할 것이다. 실제로 대도시에서는 심방 중심의 목회가 점차로 어려워질 것이고 심방목회의 대행물이 속히 제공되어야 할 시점에 왔다. 미래사회의 이동성의 발달과 미래인의 일회성의 발달은 교회의 소유개념 보다 대여개념이 발달할 것이고 이러한 변화는 심방목회에서 탈피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그 대안은 평신도의 영성적 양육 즉 교육목회가 될 전망이다.
그간의 산업사회의 증후로 발전하던 도시화는 새로운 양태로 변모하고 있다. 최근의 동향에 의하면 도시에서 농촌으로 돌아오는 귀농 인구가 크게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1996년부터 급속하게 증가하였으며 산업사회의 특징적 현상인 도시화가 그 한계에 달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도시의 변화는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을 요청하고 있다. 이에 비해 도시 신자인구는 감소하고 있다. 감소 요인은 첫째는 자연인구의 감소, 둘째는 귀농 인구의 증가, 셋째는 주말 레저인구의 급증, 넷째는 개심(conversion) 교인의 감소 등으로 분석된다. 이러한 현상은 도시 교회의 쇠퇴를 예측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등장하였고 이미 이러한 현상은 우리 주위에 산재해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회의 변동 요인은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을 요청하게 된다. 이전의 목회란 새벽기도, 심방, 설교 등으로 함축할 수 있었고 심방에 가장 많은 시간을 소모하였지만 사회의 변동은 목회에 있어서 심방의 효율성을 감소하며 비중을 저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동은 목회의 대안을 요청하게 되고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교육목회가 심방목회의 대안이라고 제안하는 것은 다양한 이유가 있다. 교육목회를 통하여 비로소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할 수 있으며, 교인 양육의 결과 보다 과정에 관심을 두는 목회이므로 가장 진솔한 목회이며, 유동적인 미래 교인들에게 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하는 목회이며, 미래 사회의 변동과 목회자의 목회관을 가장 쉽게 교인들에게 전달할 수 있으므로 목회자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심방 중심의 목회는 교육 중심의 목회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8) 소그룹 목회
산업 사회와 정보 사회의 근본적 차이 가운데 하나는 규모에 대한 이해이다. 산업 사회의 경제를 규모경제라 하며, 기업을 규모기업이라 하는 반면 정보 사회의 기업은 중소기업이라고 하다. 그래서 정보 사회를 중소기업의 시대라고 한다. 산업사회는 규모가 큰 기업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정보사회는 규모가 큰 기업이 아니라 작고 전문성을 가진 기업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란 말은 정보사회에 적합한 시대적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고 실제로 작은 것이 아름답게 보일 때가 오고 있다.
대형 기업과 대형 교회가 가능했던 산업 사회와는 달리 정보 사회는 기업도 교회도 작아져야 한다. 산업 사회를 거쳐오면서 교회도 대형 교회 중심의 교회가 되었고 여의도에서의 대형 전도집회가 가능했었지만 이제는 소형으로 변화되는 추세에 있다. 대형 교회도 소그룹을 통한 대형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대중 목회와 소그룹 목회를 겸하였지만 예수님의 기본 목회는 소그룹이었음을 성경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다. 제자의 명단은 예수님께서 제자를 세우신 의도와 제자의 구성을 명확하게 표현한다. 우선 예수님은 제자를 세우실 때에 네 사람씩 세 그룹으로 나누어 소그룹을 운영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의도는 소그룹은 가장 좋은 제자훈련 구조이며, 소그룹은 재능에 따른 분류일 뿐만 아니라 효율적 훈련 방법이기 때문이다.
토플러는 ‘제3의 물결’에서 산업 사회는 소비자가 생산자를 위해 존재하던 시대였지만 앞으로의 시대는 생산자(producer)와 소비자(consumer)가 하나로 되는 프로수머(prosumer)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시장 경제를 소비자 시장(buyers' market)이라고 부른다. 정보 시대의 새로운 정보 체계의 방향은 이전의 발신자 중심에서 수신자 중심으로 그 중심이 이동된다. 지금까지의 정보는 발신자 중심이어서 수신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관심의 내용보다는 발신자의 관심을 수신자가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정보 사회의 정보의 체계는 수신자 중심으로 이동하여 수신자가 원하는 웹사이트에 수신자 스스로가 들어가게 되어 있다. 이제 예배도 보는 예배에서 함께 하는 예배로 변할 것이고 예배의 단순 참여자가 아니라 예배 순서의 동참자가 되기를 원할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는 대중을 중심으로 한 목회에서 소그룹을 중심으로 한 목회로의 전환을 요청하게 될 것이다.
교회 네트워크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등장할 미래 교회는 거대한 몸을 가진 교회가 아니라 네트워크에 유연한 소그룹적인 교회가 강할 것이다. 미래교회는 소그룹을 가진 교회가 아니라 소그룹의 교회 혹은 소그룹적인 교회로 바뀌어야 한다. 비록 대형교회라 하더라도 소그룹 교회는 공룡처럼 비대하거나 항공모함처럼 둔한 사역이 아니라 세포가 제대로 활동하여 교회의 모든 사역의 신경조직까지 스며들 수 있다. 소그룹의 교회란 교회의 사이즈가 대형이냐 소형이냐가 아니라 훈련을 통한 소그룹을 가진 교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소그룹이란 미래 교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교회의 경쟁력과 세계화를 가능하게 할 중요한 요인이다.
소그룹은 훈련 대상과 훈련 내용에 따라서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는데 윌로우 크릭 교회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1) 제자양성 그룹: 잘 짜여진 제자훈련과정을 찾는 신자들로 구성되며, 영성훈련, 성경외 우기, 다른 사람들을 제자 삼기 강조.
(2) 공동체 그룹: 신자와 비신자로 구성되며, 공동체 형성, 새 그룹원 초청을 강조.
(3) 봉사 그룹: 신자와 비신자로 구성되며, 사역의 완수, 새 그룹원의 초청을 강조.
(4) 구도자 그룹: 신자와 비신자로 구성되며, 전도, 새 신자 훈련을 강조.
(5) 후원 그룹: 신자와 비신자로 구성되며, 그룹원들이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도움을 주는 것을 강조.
위와 같은 소그룹에 대한 이해와 실제적 예를 통하여 소그룹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성도의 교제가 결여되어 있는 현대 교회, 특히 대형교회에서 소그룹은 친밀한 교제가 가능하다. 둘째, 설교는 질문이나 토의 등이 불가능하지만 소그룹을 통한 훈련은 이 모든 것이 가능하여 말씀이 실현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셋째, 일반 목회에서는 목회적 관심에서 소외되는 교인들이 많이 있을 수 있는데 소그룹 목회는 개인에게 목회적 관심을 기울일수 있고 양질의 목회를 제공할 수 있는 효과적 방법이다. 넷째, 소그룹은 상호 격려와 후원을 통하여 교인 상호간의 신앙 성장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다섯째, 소그룹은 목회자 자신이 개인의 신앙성장을 관찰할 수 있으므로 소그룹 훈련뿐만 아니라 설교나 심방 등 목회 전반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여섯째, 소그룹은 인간관계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전도를 가능하게 하고 피전도자도 소그룹을 통하여 빠른 시간에 친숙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일곱째, 임상적으로 볼 때에 소그룹에 참석한 교인들이 소그룹에 참석하지 않고 예배에만 참석하는 교인들보다 성장이 훨씬 빠르다. 여덟째, 소그룹은 모든 교인들을 목회자의 목회지침대로 양육할 수 있다.
깁스(Eddie Gibbs)는 소그룹의 존재 그 자체가 교회성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미래 사회의 급진적 변화는 교회로 하여금 소그룹을 통한 교인의 훈련을 통하여 극복하고 제자 만들기를 가능하게 할 것이며 교회의 지속적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9) 리더십 목회
전환기의 목회는 목회자의 리더십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강력한 목회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대이다. 지금까지의 목회자는 일반적으로 권위적인 인상이 리더십의 인상 보다 강하였다. 또 소위 카리스마적인 목회자가 교회성장을 이루었던 것도 사실이다. 카리스마적이라는 표현 자체가 리더십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리더십 보다 권위적인 표현이 강한 것이다. 물론 권위적인 것이 리더십이 없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의 리더십이란 권위적이고 통제적인 것보다는 화합적이고 협동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행정학에서는 교회행정을 세 가지 용어를 가지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용어는 교회행정의 세 가지 형태이다. 첫째는 리더십(leadership)이다. 리더십이란 지배하고 통제하는 능력이 아니라 환상을 제시하는 업무(envisioning task)와 모델을 만드는 업무(modeling task)이다. 둘째는 관리(management)이다. 관리란 기획하는 업무(planning task)와 감독하는 업무(monitoring task)이다. 셋째는 경영(administration)이다. 경영이란 보조하는 업무(supporting task)와 향상시키는 업무(enhancing task)이다. 이와 같은 정의에서 보면 리더십이란 목회자의 행정업무이며, 관리란 장로의 행정업무이며, 경영이란 집사의 행정업무이다. 교회행정이란 어느 한 직제가 가지는 독점적 업무가 아니라 모든 직제가 고유한 업무를 가진 교회의 업무이다.
위에서 본대로 리더십이란 통제와 지배의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지향적인 비전을 제공하는 지혜이다. 그리고 리더십이란 조직 운영에 있어서 구심적인 힘을 형성시키는 것이며 조직의 공동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하나로 나아가게 하는 역량이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는 사람을 이해해야 하며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는 강력하고 창조적인 리더십을 갈망하고 있다.
리더십이란 조직이 하나의 유기체로서 유지되기 위하여 필요한 업무를 수행해 나가는 기능이며 넓은 의미에서는 조직의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하나로 나아가게 하는 역량을 의미한다. 지도자가 가지는 역할을 일반적으로 리더십이라 하는데 어떤 상황에서 수행되고 의사소통을 통하여 특별한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영향력을 리더십이라 한다. 결국 리더십이란 조직의 목표 성취를 위한 힘의 동원 능력을 의미한다.
교회는 좋은 지도자를 원하고 지도자는 강력한 리더십을 원한다. 교회의 리더십은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하게 만들며, 의미 있는 예배를 드리게 하며, 그리고 지역 사회에 대하여 활기 찬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줄 책임이 있다. 결과적으로 목회자의 리더십은 성도들에게 영향을 주며 교회의 모양을 만들어간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리더십을 상실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현대에 있어서 가장 보편적인 갈망은 강력하고 창조적인 리더십이다. 미래 사회는 그 변화의 다변성과 급속성에 비추어 앞을 내다볼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이 요청되며 이러한 요청은 미래 교회에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의 교회가 겪고 있는 어려움 가운데 가장 큰 요인은 목회의 창의력 보다 기존의 패러다임에 의존하여 모방에 의존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목회의 초기는 모방으로 시작하지만 이 모방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자신의 창조적 목회 보다 모방에 의존하는 경우가 흔히 있는 것이다. 지속적 창의력 개발을 위해서는 축적된 핵심 역량(core competence)이 요구된다. 하나의 핵심 역량은 또 다른 기술의 개발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핵심 역량이 있는 목회자는 경쟁력이 생기고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도 굴하지 않는 독창적 목회를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교회의 가시경영(可視經營)에는 몇 가지 중요한 접근방법이 있다. 첫째는 교회가 그 목표를 지향하는 방향이 분명하게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목표와 상황과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경영의 흐름이나 목표의 전개가 모든 교인들에게 보이게 해야 한다. 이러한 가시경영은 경영자의 리더십을 가늠하는 중요한 점이며 목회자의 리더십은 가시경영을 통하여 목회의 효율성을 증대하게 된다. 목회자의 리더십은 교회의 방향성을 좌우하며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요인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권위적 목회의 틀을 벗어나서 리더십 있는 목회로 전환하여야 할 것이다.
(10) 전문화 목회
미래 사회는 극도로 발전하는 전문화시대가 될 것이다. 현장의 필요성에 따라서 교회의 전문 지도자의 양성이 요구되는 이 때에 교회는 전문적인 목회 구조와 사역을 만들어야 한다. 최근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함축한 고비용저효율(高費用低效率)을 해결하는 방안도 전문화이다. 적은 투자로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미래 목회에 있어서도 요긴한 일이다.
저비용고효율의 목회는 결국 전문화목회일 것이다. 목회자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만능 탈랜트가 아니라 하나를 잘 할 수 있는 전문 탈랜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힐트너(Seward Hiltner)도 목회의 세 가지 면을 말하면서 전달, 목양, 조직이라고 하였고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잘 할 수 있는 목회자는 없으면 어떤 목회자이든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만 잘해도 성공적 목회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목회 신학이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현대는 목회자에게도 전문성을 요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미래 교회의 목회를 전문화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첫째, 현장중심이다. 둘째, 목적을 상실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보상체계가 확립되어야 한다. 넷째, 평가방법의 전환이다. 다섯째, 의사전달방법의 전환이다. 여섯째, 조직 내 변화과정을 제도화하고 정착하는 것 등이다.
철저하게 전문화의 시대로 모든 분야에서 전문성을 요청하는 현대에 교회도 전문화되어야 한다. 전문성의 기술이 사회를 이끌어가게 될 것이고 전문성을 가진 자가 생존하게 되는 시대에 전문성의 요청은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미래 사회는 교회로 하여금 구멍가게가 아니라 전문점이 되기를 요청하고 있다. 모든 교회가 복음전파라고 하는 일치된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목표는 교회마다 차이가 있다. 목적을 성취하는 목표가 곧 개교회의 전문성일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전문화는 목회자의 전문화로 비로소 가능해진다. 교역자라 함은 교문권, 성례권, 축복권, 치리권을 가지는 목회의 전문가이다. 이러한 목회자의 권리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고 누구에게도 뒤질 수 없는 전문적 영역인 것이다. 목회자는 교회와 목회에 대하여 그 기능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항상 전문인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행정학에서는 목회자가 어떤 업무를 수행하든 항상 영적 권위를 상실하지 말아야 하며 영적 권위가 전문성을 공급하는 전문 관리인(professional manager)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목회에 있어서 전문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전문 운동가, 전문 음악가란 말은 있지만 전문 의사, 전문 변호사란 말이 없듯이 목회자도 전문 목회자란 말이 있을 수 없다. 모든 목회자는 전문가이며 전문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세계화 시대에 우리가 살길은 스스로 프로의 정신을 가지는 것이다. 기업은 기업대로, 학교는 학교대로 프로의 정신이 필요하고 초일류가 되려는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의지에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도 이제는 프로의 정신이 필요하고 우리 교회가 가진 전문성을 따라 복음전파 방법을 시대와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변화시켜 주어야 하며 이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초일류를 향한 교회의 생존방식이다.
같은 맥락에서 목회자와 신학교육도 전문화되어야 하다. 왜냐하면 미래사회는 극도로 발전하는 전문화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현실은 신학을 전공한 목회자가 수업연한에 비하여 가장 전문인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의 전문화 교육은 전문직으로서의 목회를 인정받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래 목회를 위하여 신앙과 영성을 겸비한 ‘인간형성’이 어떤 차원에서든 보완되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전문직 양성’이 지금까지보다는 강조될 수밖에 없다.
현장의 필요성에 따라서 교회의 전문 지도자의 양성이 요구되는 이때에 한국의 신학교육은 아직도 모든 신학생들의 최종 목표는 담임목사이고 목회자 양성은 당회장 양성이라는 등식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래서 한국의 신학대학교에는 ‘당회장과’ 밖에 없다는 말이 공공연하다. 이런 근시안적 전세대적 사고를 미래를 위한 사고로 전환하는 것이 필수적 과제이다. 목회자의 최종 목표가 담임목사가 아니라 전문화 목회를 지향하고 자신의 전문성을 통하여 목회에 보람을 가질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목회의 전문화, 전문성 있는 교회로 전환할 수 있도록 신학 교육을 위시한 모든 면의 전문화 교육이 필요하다.
(11) 디아코니아 목회
그간의 한국교회의 성장세가 주춤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하겠다. 한국 교회의 성장 신드롬은 사회를 외면하고 위만 바라보는 것이었다. 교회가 사회를 외면한 결과로 교회가 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는 성장 신드롬은 기세가 꺾이고 있으며 이제 다시 한국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교회성장 신드롬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그 동안의 교회성장기는 그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했던 은총의 기회이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성장이라는 상향 중심의 목회관에서 벗어나 성숙이라는 외향 중심의 목회관으로 전환해야 할 때이다.
미래 교회는 자기 중심적 교회관에서 타자에 대한 관심으로 그 중심이 이동할 것이며 이미 부분적으로 이러한 중심이동의 현상이 한국교회 내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 동안의 교회의 관심은 교회성장이었고 선교는 개인영혼구원 혹은 교회성장이라는 제한적 의미를 가졌지만 정보 사회에서의 교회의 관심은 사회적 책임이라는 본질적 물음으로 전환될 것이다. 그래서 선교의 개념도 개인구원이라는 제한적 개념에서 개인구원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통전적(holistic) 개념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러한 새로운 변형의 시도는 사회봉사로 교회의 관심이 전환될 것이다.
디아코니아는 케리그마와 코이노니아와 더불어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기능과 교제하는 기능과 봉사하는 기능은 교회가 교회 되게 하는 중요한 기능들이다. 케리그마의 내적 기운이 코이노니아라면 케리그마의 외적 작용이 디아코니아이다. 그런 의미에서 초대교회는 교회를 봉사자의 집단(Group of ministers)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교회가 디아코니아를 상실하면 교회가 아니다.
사회 봉사를 뜻하는 디아코니아는 우리에게 익숙한 성경의 용어이다. 디아코니아(diakonia)라는 말은 디아코네인(diakonein)이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며 디아코니아를 수행하는 사람을 디아코노스(diakonos)라고 한다. 신약성경에서 디아코니아란 음식을 제공하는 일이었으나 순수한 사랑을 가지고 남을 섬기는 것 전체를 의미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디아코니아란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인 덕목이요 피할 수 없는 과제이며 사명이다.
교회가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세 가지를 지향하는데 상향(upreach)과 내향(inreach)과 외향(outreach)이다. 상향은 교회의 첫째 목표이며 교회의 존재이유이다. 이것은 예배와 전달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내향은 보이는 교회의 모습이며 힘의 집결을 의미한다. 이것은 훈계이며 축하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외향은 실제적 교회이며 동시에 교회의 사명이다. 이것은 전도이며 돌봄(caring)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지금까지의 한국교회는 상향을 강조하여 교회의 본질에는 충실하였으나 외향에는 상대적 소홀함이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와는 별개의 기관이 되었고 교회가 상향을 강조하는 동안 사회를 외면하였고 그 결과로 교회는 성장하였으나 이제는 사회가 교회를 외면하게 되었다. 사이버시대의 목회는 실제적 사명을 새롭게 조명하는 것이어야 하며 이러한 교육이 미래 사회에 적응력을 회복하게 할 것이다.
앤더슨(Leith Anderson)은 베이비붐 이전세대(Pre-Boomers), 베이비붐 세대(Baby Boomers) 그리고 베이비 거부세대(Baby Busters)의 특징을 비교하면서 베이비붐 이전에는 선교와 기도, 성경공부에 관심을 가지던 교인들이 베이비 붐 세대에는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베이비 거부세대에는 복지와 관련된 프로그램이나 봉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이버시대의 교회는 교회 성장이라는 제한적 선교의 의미가 아닌 디아코니아를 포함한 통전적 의미의 선교를 지향하고 교회 성숙을 이루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이버시대에 교회에 남아있는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디아코니아와 관련된 것들일 것이며 교회는 사회를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12) 문화 목회
흔히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한다. 문화는 이제 취미나 여가 활동이 아니라 인류의 가치이며 나아가 생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이버 시대는 문화 시대이다. 문화가 발달하며 타문화가 존중되는 시대에 교회는 사회의 문화를 이해하고 사회의 문화를 기독교 문화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문화적 차원에서 볼 때 가장 시급한 것은 기독교의 문화를 사회에 뿌리내리는 일이다.
문화란 사회 구성원의 행동과 사회 체계를 형성하고 이들을 조합 연결하여 동일한 이념 가치관을 형성하는 영향력의 본체라고 한다. 기독교는 사회 구성원의 행동을 규정하고 사회 체계를 형성하는 힘을 가져야 하며 사회의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는 사회에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회에 영향을 주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리스도인 한사람 한사람을 보면 훌륭한 인물도 많이 있지만 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집단으로서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 한국교회의 가장 큰 흠이다. 교회는 교회의 내용인 문화를 소유하여야 하며 그 문화는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영향력으로 변화될 것이다.
인간의 이념과 동기를 지배하는 원동력인 문화를 교회는 사회에 심음으로 사회 문화를 기독교화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 기독교는 사회의 바른 문화를 창출해나가는 원동력이 되어야 하며 전통 문화의 보존자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 세계민족사를 보아도 역사 속에서 소멸한 민족은 전통가치와 문화를 소홀히 여긴 민족들이다. 원나라, 청나라가 이런 나라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통 가치와 문화를 보존하고 동시에 건강하고 새로운 사회 문화를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의 발달은 문화의 발달에 연유한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발달하기 위해서는 문화가 발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의 발달을 추구한다면 한국사회의 문화의 발달을 교회가 담당해야 할 것이다. 미래학자들은 21세기를 지배하는 민족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단일민족이다. 새로운 세기에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민족은 단일민족이다. 지방화 시대를 맞이하여 다민족은 점점 작은 국가로 분리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단일민족이 미래 세계를 지배할 힘이 있다. 둘째, 역사와 문화를 가진 민족이다. 21세기는 문화 시대라는 단적인 표현까지 있을 정도로 문화는 21세기에 중요한 자원이 될 것이다. 셋째, 교육과 기술에 투자한 민족이다. 교육과 기술은 미래 사회와 산업의 발달에 중요한 기간(基幹)이 되므로 교육과 기술에 대한 투자는 미래를 위하여 중요한 준비이다. 위의 설명을 통하여 문화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에 우리 나라는 21세기를 위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또 교회가 사회를 위하여 문화를 창조하느냐라고 하는 기본 물음을 통하여 교회는 사회를 위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의 자신을 위한 성장 위주의 교회에서 타인을 위한 성숙 위주의 교회로 탈바꿈해야 하며 이러한 사회를 위한 노력은 사회를 위한 노력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한 자구적(自救的) 노력이 될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의 거의 모든 구조가 교회가 성장하게 위한 성장구조이며 교회의 예산도 교회의 성장을 위한 재정구조를 가지고 있다. 많은 교회들이 사회봉사나 선교 등 대외적 사업을 위한 재정 보다 교회의 관리비와 인건비 등이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이러한 예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사회를 위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구조조정이 조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자구적 노력은 결국 기독교 문화를 사회에 심는 일이 되는 것이다.
얼마 전 어느 아파트에 심방을 갔다가 아파트 입구에 걸린 현수막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일이 있었다. “XX상가 교회 입점 결사반대”라는 것이었다. 그 아파트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을 것이 분명한데 이런 현수막이 버젓이 걸릴 정도라면 교회의 이미지가 완전히 실추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것도 ‘절대반대’가 아니라 ‘결사반대’라는 말은 교회가 사회의 문화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정도가 아니라 문화의 저해요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고 문화의 길라잡이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폴 케네디는 21세기에 한국이 세계 중심국가가 되는 이유 다섯 가지 이유 가운에 하나를 한국의 독창적 문화라고 하였다. 그가 말하는 한국 문화는 한이 중심이다. 한국의 창과 춤에 서려 있는 한은 외국인들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고유한 것이다. 사이버시대를 맞이하는 한국 교회는 한국의 문화를 세계화하는 매체로서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의 기독교화 혹은 기독교 문화의 사회화를 위한 노력을 극대화하여야 할 것이다.
(13) 갱신 목회
교회 갱신의 시작은 목회자 자신의 갱신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갱신은 교회 갱신의 절대적 요인이 된다. 최근의 신 경영 기법에 의하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품질 경쟁이다. 품질개선의 최대의 요인은 최고경영자의 의지라고 한다. 제품을 만드는 생산 일선이 아니라 최고 경영자의 의지에 따라서 품질의 향상 개선이 가능하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영적 수준을 향상 개선하기 위해서는 교인이 아니라 목회자의 의지가 최대 요인인 것이다.
미래 사회는 영성 사회이며 철저하게 영성을 요청하므로 먼저 목회자가 영성적이어야 한다. 목회자 자신의 경건성, 도덕성, 사회성, 유연성, 균형 있는 성숙성 등 목회자의 총체적 인격은 미래 목회에 절대적 영향을 주는 요소이다. 목회자의 인격 미달로 미치는 사회에 대한 파급 효과는 어떤 것보다 신속하고 확대되기 쉽다는 것은 사회의 교회에 대한 기대감의 상실 때문일 것이다.
최근의 어느 신간에 나타난 평신도의 목회자에 대한 흉보기는 목회자가 부인하지 못할 내용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 내용들을 몇 가지만 소개한다. “오늘 설교는 재탕이구만, 목사도 공부 좀 해야지”, “설교할 때 텔레비전 드라마 얘기 좀 안 할 수 없나?”, “설교 때는 그렇게 외쳐놓고 강단만 내려오면 자기부터 안 지키니...”, “요즘 경제 사정이 안 좋으신가봐 틈만 나면 다른 교회에 설교하러 가시네”, “목사님들은 함께 식사를 하고 나면 아예 돈 낼 생각을 안 하더라고”, “목사가 왜 남의 아내 혼자 집에 있는 집엘 심방 가는 거야?”, “목사들은 무례해 나이 많은 사람에게도 툭하면 말을 놓거든”, “헌금 낸 사람들 봉투 들고 이름 좀 안 부를 수 없나?”, “목사가 먼저 변해야 교회가 달라지지. 교인이 아무리 변해봐야 소용없다니까. 갈등만 생기지.”
세계화 시대에 한국인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투명성의 결여이다.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는 각국 정부의 부정과 부패 그리고 오염도를 평가하여 투명성을 측정하는 비 정부 기관(NGO)이다. 이 기구에서는 각국의 기업인, 위험도 분석 전문가들이 체감하는 부패에 대한 정도에 많은 비중을 둔다. 이런 여러 가지 간접적 결과를 통합하여 '부패인식지수'를 작성하여 국가의 투명성을 발표하게 된다. 투명성이 10점이면 가장 부패되지 않은 깨끗한 나라로 평가되며 점수가 낮을수록 투명성 정도도 상대적으로 낮아 부패한 나라로 평가되며 5점이면 평균이고 3점 이하는 투명성이 낮은 낙제 국가에 해당된다. 우리나라는 이 기구로부터 1996년에는 5.02점, 1997년에는 4.29점 그리고 1998년에는 4.2점을 받았다고 한다. 얼마 전 1999년 10월 이 기구의 발표에 의하면 세계에서 수출을 많이 하는 국가 가운데 우리나라는 중국에 이은 세계 2위의 뇌물공여 국가로 지적되었다. 이 때 발표된 각국의 부패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세계 조사대상 국가 99개국 가운데 자메이카, 리투아니아와 공동으로 3.8점을 얻어 50위를 기록했으며 작년의 4.2점 보다 낮아져서 지난 해 보다 갈수록 투명성이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투명성의 위기는 외국 자본의 국내 유입의 방해거리가 되며 결과적으로 경제발전의 저하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투명성의 중요성은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목회자의 투명한 목회는 목회자의 갱신에 있어서 필수적 요건일 것이다. 목회자는 일상의 모든 업무나 활동이 투명해야 한다. 목회자의 투명성은 교인들로 하여금 안정감을 얻게 하며 나아가서 신뢰감을 구축한다. 목회자가 가장 실패하기 쉬운 점들이 가장 투명하게 조명된다면 성공적 목회자로 인정될 것이다.
이런 목회자의 갱신은 자연히 교회의 구조의 갱신, 예배의 갱신, 직제의 갱신 등 총체적인 교회 갱신을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교회의 본질에서 어긋난 요소들을 과감하게 갱신하여야 미래 쇼크로부터, 미래 목회의 쇼크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될 것이다. 미래의 쇼크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미래 목회의 쇼크는 목회 환경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변화에 대한 목회자의 안일한 태도 자체가 쇼크인 것이다.
나가는 말
새 천년은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에 조금도 불리하지 않다. 오히려 미래를 바르게 이해하고 미래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면 유리한 점이 많다. 신 경영학에서는 틈새공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아무리 거대한 자본의 기업이나 국가라도 틈새가 있게 마련인데 그 틈새를 공략하는 공격적 경영이 경쟁력이라는 의미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사회가 다변화함에 따라 거대한 신기술과 신문화의 물결이 밀려오지만 물결이 클수록 틈새도 크게 마련이다. 한국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충격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틈새공략을 통한 무한 경쟁력 시대를 공격적으로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새 천년은 한국에 무한한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시간이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으로 세계는 실제적인 지구화의 시대가 되었고 지구화의 세계는 냉정한 경쟁 체제에 돌입하였다. 국경 없는 시대에 총성 없는 처절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더 이상 걸어 잠글 빗장도 없는 하나의 지구는 냉엄한 정글로 변한 것이다. 당시에 많은 우리 농민들은 좌절하고 자살까지 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신토불이라는 생소한 말도 귀에 익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지구화를 알고 보면 우리에게 유리한 점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토플러(Alvin Tofler)는 21세기는 동북아시아의 쌀을 먹는 민족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동북아시아의 쌀을 먹는 민족은 한국과 중국과 일본인데 이 세 나라는 전통적으로 젓가락을 사용하는 문화를 가진 나라이다. 젓가락을 사용하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전망은 젓가락을 사용하는 나라가 손이 발달한 민족이며 손이 발달한 민족이 미래 기술인 나노기술(Nanotechnology)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나노란 헬라어의 ‘난쟁이’란 뜻으로 물리학에서는 10억 분의 1을 의미하며 나노기술이란 작게 만드는 기술이다. 사이즈만 작은 것이 아니라 사이즈는 작아지며 다양한 기능을 가진(small size, multi function) 신기술이 미래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여 젓가락의 길이가 길며 나무 젓가락이 아닌 쇠 젓가락이 전통 젓가락이라고 한다. 동북아시아의 세 나라 가운데 가장 손이 발달한 민족이 우리 민족이다.
또한 그는 21세기는 제3의 맛의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제1의 맛은 가공하지 않은 소금의 맛이며, 제2의 맛은 가공한 양념의 맛인 반면, 제3의 맛은 발효음식의 맛이라고 하였다. 제2의 맛은 산업사회를 풍미하였으나 제3의 맛은 새로운 시대를 풍미하게 될 것이고, 제3의 맛에 길들여진 입맛은 좀처럼 바꾸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발효음식이 가장 발달한 민족이다. 김치를 비롯하여, 된장, 간장, 고추장, 모든 젓갈류, 전통 음료인 식혜, 전통 술인 막걸리 등이 다 발효음식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새로운 세기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다.
뿐만 아니라 태평양 시대가 될 것이라는 21세기 전망도 우리나라의 미래 전망을 밝게 한다. 실제로 이미 세계는 태평양 시대로 진입하였다. 세계 역사는 바다를 중심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고대 역사는 지중해를 중심한 역사였고, 중세 이후 근대까지의 역사는 대서양을 중심한 역사였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대서양 중심의 역사가 아니라 태평양 중심의 역사이다. 지난 1995년 5월 미국의 최대 무역항이 대서양의 뉴욕에서 태평양의 로스 엔젤레스로 이동하였다. 이런 태평양 시대는 우리나라에 건국 이래의 최대의 호기로 일컬어지고 있다. 현재 영종도 신인천 공항도 이런 기대감에서 건설 중에 있다.
하바드 대학교의 케네디(Paul Kennedy)교수는 21세기에 한국이 세계 중심국가가 되지 않을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첫째, 한국의 고유 문화이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한다. 한국인의 고유 문화는 한(恨)에 기초하는 것으로 세계 어느 문화도 경쟁이 되지 않는 고유한 것이다. 둘째, 한국의 가정 중심주의이다. 한국인은 가정 중심주의를 고수한 민족이다. 명절이면 귀성객으로 길을 메우고 가족을 만나는 문화는 세계인을 놀라게 한다. 한국의 가정 중심주의의 핵은 어머니이다. 셋째, 한국인의 교육열이다.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교육열을 가진 민족이다. 이런 교육열은 기술과 문화 등 신 세기에 필요한 의식을 뒷받침한다. 넷째, 젊은이들의 엘리트 정신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의 엘리트 정신은 뛰어나 세계 방방곡곡에서 한국의 젊은이의 기백을 볼 수 있다. 다섯째, 한국인의 창업 정신이다. 최근의 보고에 의하면 한 달에 부도로 폐업되는 기업은 200여 개이지만 새롭게 창업되는 기업은 2,000여 개나 된다. 이러한 창업 정신은 세계를 이끌어갈 수 있는 정신으로 높이 사는 것이다. 드러커(Peter F. Drucker)는 한국은 단군 이래로 가장 좋은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고 하였다. 다시는 맞이할 수 없는 호기는 준비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미래는 준비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고 토인비가 말하였다. 준비하면 미래 목회 쇼크를 떨쳐 버리고 세계의 일류 국가, 세계의 제사장의 나라로 거듭나는 한국교회가 될 것이다.
심장의 박동이 멈추고 가사상태에 있는 환자의 마지막 치료법 가운데 하나는 전기쇼크(electric shock)이다. 전기 충격으로도 회생하지 못하면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미 사회적 전기쇼크를 경험하였다. 그리고 교회 주변의 환경적 요인들의 변화는 전기 쇼크 이상의 충격적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이 쇼크로 새로운 도약을 위해 회생해야 한다. 이 쇼크에 회생하지 못하면 영영 힘을 잃어버린 교회로 전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