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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에서 산티아고로
[연재] 임영태의 남미 여행기 (7)
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남미 해방의 두 영웅 산마르틴과 시몬 볼리바르
아르마스 광장에서 산마르틴까지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아서 천천히 걸어도 20분이면 갈 수 있다. 직선으로 다섯 블록을 지나면 산마르틴 광장이 나온다. 산마르틴 광장은 대단할 것 없는 평범한 광장이지만 이곳에는 볼리바르와 더불어 남미 해방의 선구자 산마르틴의 기마동상이 우뚝 서 있다.
여름임을 말해주는 광장의 초록색 나무와 잔디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다. 공원에 핀 보라색 꽃나무와 산마르틴의 기마동상이 잘 어울린다. 보라색 꽃나무 자카란다는 이미 꽃을 대부분 떨구고 일부만 남긴 채 잎이 무성하게 자란 상태다. 산마르틴 동상에는 머리 위, 말 잔등 위 등 곳곳에 철가시를 만들어 놓아서 비둘기가 앉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그런지 공원에 비둘기가 많았는데도 동상에 앉은 비둘기를 볼 수 없었고 동상도 깨끗했다. 나중에 콜롬비아에서 만난 또 다른 남미의 해방자 볼리바르 동상 머리 꼭대기에 비둘기가 앉아 있고, 동상 곳곳에 똥을 갈겨서 지저분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산마르틴 광장의 산 마르틴 기마동상. [사진-임영태]
리마 아르마스광장-중앙로-산마르틴광장 주변 지도. [구글지도 캡쳐]
산마르틴 광장 모습. [사진-임영태]
산마르틴 광장에 도착하자 박우물 선생이 남미 해방의 선구자 볼리바르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한다. 산마르틴은 남미의 해방과 독립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산마르틴은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의 해방에 막대한 공을 세웠지만 또 다른 해방 영웅 시몬 볼리바르와의 과야킬 회담 후 모든 활동에서 손을 떼고 떠나 조용히 말년을 보낸 미스테리한 인물이기도 하다.
1778년 아르헨티나 야페유란 지역에서 태어난 산마르틴은 7살에 스페인으로 건너가 공부를 했다. 그는 스페인에서 나중에 칠레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는 오이긴스를 만났다. 10대에 스페인군에 입대한 산마르틴은 북아프리카 모로코, 알제리 전투에서 영국군의 포로가 돼 1년 넘게 수감생활을 했으며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하며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이 과정에서 산마르틴은 계몽주의와 자유주의 정치사상의 세례를 받았으며 남미 독립운동가들과도 교류하며 남미 해방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던 것으로 보인다. 1811년 소령을 끝으로 스페인 군인에서 전역한 산마르틴은 아르헨티나로 돌아갔다. 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해 리오데 라플라타 부왕령(1776년 스페인이 아르헨티나의 리오데 라플라타 유역을 중심으로 마지막에 건설한 부왕령으로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수도였다)의 독립운동에 적극 나서게 된다.
1813년 산 로렌소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남미 해방군 지도자가 된 산마르틴은 안데스를 넘어서 칠레 리마를 해방시킬 계획을 세웠다. 1920년 전후 스페인 본국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집권하면서 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운동을 억압하던 왕당파들은 충성할 곳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군웅할거하며 자신이 있는 지역의 군벌 노릇을 했고 전체적으로 분산되면서 그 힘이 약화되었다. 페루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왕당파들은 남쪽의 산마르틴과 북쪽의 볼리바르로부터 협공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1817년 산마르틴은 안데스 산맥을 넘어 왕당파를 공격했고, 1818년 4월 마이푸 전투에서 승리하며 칠레의 독립을 성공시켰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시민들은 산마르틴을 해방자로 환영하며 칠레의 최고 지도자로 추대했으나 산마르틴은 그 자리를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에게 양보했다. 산마르틴은 영국의 지원 아래 육해군 합동작전을 실행하며 페루 해방 작전에 나서 1821년 7월 28일 리마에 입성했다.
산마르틴은 ‘페루의 보호자’라는 칭호를 얻으며 페루 국가원수에 추대되었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볼리비아로 도망친 왕당파 잔당을 진압해야 했고 남미 북부의 해방자 볼리바르와 만나 향후 정치도 논의해야 했다. 1822년 7월 에콰도르 키토 근처 과야킬에서 남미 해방의 두 영웅 볼리바르와 산마르틴이 마침내 만났다. 7월 26일과 27일 이틀 동안 두 사람만의 비밀 회동이 있은 뒤, 산마르틴은 모든 정치 활동에서 손을 떼고 떠났다. 그는 회담 후 볼리바르에게 “내 과업은 이미 완수했네. 뒤에 오는 영광은 당신 것이라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산마르틴은 그 자리에서 ‘페루의 보호자’ 지위도 사임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갔다. 산마르틴은 아르헨티나 정부와 갈등 끝에 딸과 함께 유럽으로 망명했고, 유럽에서 은거 생활을 하다가 1850년 72세의 나이로 프랑스 볼로뉴에서 사망했다.
독립 후 근대 국가 발전에서 시행착오 겪은 남미
산마르틴과 볼리바르의 비밀회동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는지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회담과 관련한 기록도 남아 있는 게 없어서 많은 이들은 추정을 할 뿐이다. 볼리바르는 공화파였고 정치적 야심이 분명했으며, 산마르틴은 왕정파(입헌군주주의자)였고 정치 권력에 대한 야심이 없었다. 후세 사가들은 해방 후 남미의 정치체제를 두고 의견이 엇갈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볼리바르는 공화정을 주장한 반면, 산마르틴은 유럽에서 적절한 왕족을 찾아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해방 페루의 지도자가 누가 되는가 하는 문제도 있었던 듯하다. 후에 산마르틴은 자신이 볼리바르의 지휘를 받겠다고 제안했으나 볼리바르가 이를 거절했다고 밝혔다. 정치가이기보다는 군인, 군사 전략가였던 산마르틴은 페루를 해방한 것으로 자신의 임무는 끝났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본다면, 정치지도자로 남아서 말년까지 정치일선에서 싸우며 영욕을 경험한 볼리바르나 오이긴스보다 산마르틴이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혁명가, 해방자, 정치가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점도 무시할 수가 없다. 당시 남미 상황은 가까스로 스페인 군은 몰아냈으나 왕당파 잔당이 준동하고 있었고 정치적 야심가들이 활개를 치는 복잡한 정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을 놓고 볼 때 산마르틴은 끝까지 남아서 볼리바르와 함께 정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었다. 볼리바르에 버금가는 무게를 갖고 있던 산마르틴의 활약은 정치적 갈등 요인이 될 수도 있지만 큰 힘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는 산마르틴의 퇴장이 안타까운 면이 있다.
남미 해방의 영웅, 호세 데 산마르틴.
남미 해방의 선구자, 시몬 볼리바르.
볼리바르와 산마르틴의 만남.
칠레 독립 영웅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페루 연방청사 앞에 위치한 볼리바르 공원. [사진-임영태]
산마르틴과 볼리바르는 지금도 남미 해방의 선구자, 독립 영웅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북부지역인 볼리비아, 콜롬비아, 에콰도르에서는 볼리바르를,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등 남부지역에서는 산마르틴을 더 중요하게 보지만 남미 곳곳에 두 사람의 이름을 딴 지명, 거리 등이 있다. 사실 리마에도 아르마스 광장에서 동쪽으로 네 블록 떨어진 멀지 않은 곳에 볼리바르 광장이 있다. 볼리바르 광장 바로 옆에는 페루 연방정부 청사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이런 저런 사정으로 그곳에는 들르지 못했다.
산마르틴과의 회동 후 산마르틴이 모든 활동에서 손을 뗐기 때문에 남은 과제는 모두 볼리바르의 몫이 되었다. 볼리바르는 페루에서 알토페루(지금의 볼리비아)로 도망친 왕당파 잔당들을 소탕하는 데 힘을 쏟았고, 1824년 왕당파의 근거지를 공격해 평정하고 볼리비아 공화국을 세웠다. 볼리비아의 초대 대통령에는 수크레가 앉았다. 1826년 1월 23일 볼리바르가 지휘하는 해방군이 스페인이 마지막까지 점령하고 있던 카야오(리마의 항구 지역)를 장악, 스페인 국기를 끌어내렸다. 볼리바르가 페루의 리마를 마지막으로 해방시켰지만 페루 사람들에게 페루의 해방자는 산마르틴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북쪽 콜롬비아에서부터 남쪽 아르헨티나까지 남미 전 지역의 독립이 성취되었다.
스페인은 쿠바와 카리브해 일부 섬만 식민지로 계속 가진 채 이 지역에서 손을 뗐다. 볼리바르가 1811년 7월 5일 처음으로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남미 해방의 깃발을 올린 지 15년만의 일이었다. 남미 전역은 스페인으로부터는 해방됐지만 근대 국가로의 발전에는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스페인이 지배했던 남미 지역은 남미 연방을 꿈꾸었던 볼리바르의 희망과는 달리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콜롬비아, 볼리비아, 에콰도르 등으로 분열되었고, 내부는 또 다른 식민 상태가 조성됐다. 형식적으로는 미국과 프랑스의 헌법을 모방해 근대적인 헌법을 가진 국가체제를 갖추었지만 내부적으로는 근대적인 국가로 작동하지 못했다.
민주주의는 형식뿐이고 실제로는 카우딜요라고 불리는 군인 실력자들이 지배자로 군림했다. 원주민들의 토지는 대농장주들이 장악했고 대다수 민중들은 중세시대의 봉건 농노나 마찬가지 신세였다. 시민혁명이 필요했으나 혁명 과정을 거친 나라는 멕시코 밖에 없었다. 멕시코 혁명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일어난 혁명이지만, 프랑스 대혁명, 러시아 혁명과 함께 세계 3대 혁명으로 불릴 만큼 엄청난 역사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대단한 혁명을 거친 멕시코의 오늘에는 그 혁명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프랑스 대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흔적 역시 제대로 남아 있기나 한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라틴아메리카 지역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에는 성공했으나 근대 국민국가로 발전하는 데는 많은 진통을 겪어야 했고, 그러한 진통은 20세기 내내 계속되었다.
파타고니아 여행 계획을 두고 혼선이 생기다
아르마스 광장과 중앙로 거리, 산마르틴 광장 등을 돌아보니 어느 듯 저녁 먹을 때가 되었다. 저녁식사는 중앙거리에서는 좀 떨어져 있지만 리마 시내에 있는 한국식당 아리랑에서 했다. 육계장과 순두부를 시켜 먹었는데, 한국에서 먹는 맛과 큰 차이가 없었다.
나는 어제 저녁부터 목이 잠기더니 오늘은 기침에다 미열까지 났다. 감기 몸살인 모양. 해열제에 소염제까지 처방을 받았다. 감기는 초장에 잡아야 긴 여행이 조금은 편안할 듯하다. 일찍 자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다음 일정을 논의해야 했다.
리마의 한식집 아리랑의 저녁 식사. [사진-임영태]
리마 시내 거리 모습. [사진-임영태]
다음 일정을 두고 박우물(박종호) 선생과 이야기를 나눴으나 이야기가 겉돌았다. 우리는 한국에서 남미 여행을 두고 고민이 많았고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누군가의 조언과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런 차에 리마에 살고 있고 중남미 지역 여행 경험이 많은 박 선생을 알게 됐다. 박 선생은 중남미 곳곳을 여행했고 EBS 여행 프로그램 ‘테마기행-노래가 흐르는 남미’(4부작: 1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2부 아르헨티나 멘도사-칠레 산티아고, 3부 칠레 바닷길, 4부 파타고니아-우수아이아)에도 출연했을 정도로 남미 사정을 잘 아는 여행작가 겸 공연예술가다. 하지만 자신이 여행을 떠나는 것과 그 지역 여행이 처음인 사람에게 가이드 역할을 하는 것은 다르다. 가이드 노릇을 하려면 숙소와 투어 코스 등에 대한 세밀하고 구체적인 플랜이 필요하다.
그런데 남미 지역 사정에 밝고 여행 경험이 풍부한 박 선생은 쿠스코든 파타고니아든 그곳에 가서 누구를 만나면 된다는 식으로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현지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우리로서는 숙소의 경우, 위치, 가격, 주요 투어 예정지와의 거리, 교통 사정 등 구체적인 내용을 알 필요가 있고, 투어 코스도 입장권 예매, 코스, 시간 등도 알아야 했다. 이런 모든 준비를 인터넷으로 할 수 있고 대부분의 배낭여행객들은 실제로 그렇게 한다. 배낭여행객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는 시간 여유를 갖고 여행을 하게 된다. 우리처럼 주마간산으로 하루 단위의 촉박한 일정으로 돌지 않는다. 이럴 경우에는 모든 것을 미리 예매할 필요는 없다. 주요 일정에 맞춰 비행기 티켓과 숙소를 예매하면 나머지는 현지에서 사정을 봐가면서 조정하면 된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일정이 하루 단위로 짜여 있는 상태여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일정과 코스에 맞춰 숙소와 여행지에서 관람할 곳의 입장권과 여행코스 예약도 해두어야 했다.
저녁 식사 후 집으로 가서 자기 전 파타고니아 여행 일정과 관련해 박 선생과 이야기를 나눴지만 서로 간에 의사소통이 잘 안 됐다. 박 선생은 파타고니아 지역(아르헨티나 엘 칼라파테)에서 숙박업을 하고 있는 권수산나 선생을 소개해 주면서 그가 다 알아서 해줄 것이라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숙소, 일정, 코스, 칠레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과 아르헨티나 모레노 빙하 투어, 피츠로이 트레킹 등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 필요한 것은 미리 예약을 해야 했다. 권수산나 선생이 칠레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투어(입장권 포함)와 아르헨티나 엘 칼라파테로 넘어가는 버스표를 예약해 주었고, 칠레 쪽 숙소는 우리가 직접 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숙소를 예약했다가 박 선생과 연결되어서 취소했는데 다시 예약하려니 가격이 올라 있었다. 아르헨티나 엘 칼라파테의 숙소는 권 선생의 오빠가 경영하는 린다 비스타로 정했다.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지역의 모레노 빙하, 엘 찰텐의 피츠로이 산 트레킹 등은 현지에 도착해 알아보고 처리하기로 했다. 김 원장은 쿠스코도 그냥 갔다가 낭패를 봤는데 파타고니아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닌가 걱정이 태산이었다. 막연한 불안감과 기대감을 안고 리마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리마에서 산티아고로
1월 3일 오후 4시 30분 리마 국제공항에서 칠레 산티아고 행 비행기를 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면 오전 시간에 리마 시내의 박물관 한두 곳은 돌아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러자면 아침 일찍 나서야 하는데 일반 숙소처럼 그렇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난 밤 파타고니아 숙소, 투어 예약 등을 두고 설왕설래 이야기가 많았는데, 박 선생은 이 문제를 두고 밤 동안 권 선생과 연락을 주고받은 모양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움직이는 것이 습관이 된 여행객들과 달리 느긋하게 아침을 맞는 페루 사람들의 생활 습관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겠다고 했는데 그걸 뿌리치고 떠날 수도 없었다. 아침 식사도 우리 생각과는 달리 늦었다. 아침식사를 하고도 느긋하게 식탁에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박 선생 노래도 한곡 듣고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났다. 박물관에 들르기에는 시간이 애매했다. 황금박물관을 관람할 생각이었지만 포기해야 했다. 오후 4시 반 비행기니 2시 반까지는 공항에 가야 했다. 그렇게 보면 서너 시간밖에 여유가 없었다. 결국 우리는 첫날 리마에 도착해 해질녘에 갔던 라푼타 해변에서 바람을 쐬고 점심이나 먹은 뒤 비행기를 타기로 결정했다.
대낮에 보는 라푼타 해변의 경치는 저녁에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태평양 바닷바람을 쏘이고 바다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캐리어를 끌고 다녀야 해서 약간 불편했지만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고 여유로워서 큰 부담은 되지 않았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식당에서 세비체와 볶음밥, 검은색 과일 음료(우리의 복분자즙이나 오디즙을 연상케 했다) 등으로 점심을 마쳤다.
낮에 본 라푼타 해변의 태평양. [사진-임영태]
라푼타 해변에서. [사진-임영태]
점심 식사, 세비체와 볶음밥. [사진-임영태]
라푼타 해변에서 식사를 끝내고 공항으로 이동해 출국 심사를 받았다. 시간 여유가 충분했다. 리마 호르헤 차베스 국제공항에서 JetSMART 항공(JA7733편)으로 오후 4시40분 이륙해 저녁 10시를 약간 넘겨 칠레 산티아고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리마에서 산티아고로 가는 과정에서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다.
우선, 나는 리마 공항 출국 심사 때 짐 검사를 하면서 어깨에 맨 기방과 윗도리 등만 X레이 검색대에 올려놓고 캐리어는 바닥에 둔 채 검색대를 통과했다. 검색대를 지나고 나서 아무리 기다려도 캐리어가 안 나와서 보니 건너 바닥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어깨에 멘 가방과 몸만 빠져 나오고 캐리어는 그냥 두었던 것이다. 해프닝 끝에 무사히 통과했지만, 아마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가방을 열어서 다 보여줘야 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수하물 무게 문제. 남미의 저가 항공은 짐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대체로 8kg, 경우에 따라서는 10kg 킬로가 제한선이다. 그 이상을 넘으면 수하물 가격을 따로 받는다고 돼 있어서 우리는 늘 고심해야 했다. 출국 심사 전 시간 여유가 있어서 저울에 달아보니 내 것은 9.6kg이 나왔다. 캐리어의 무거운 짐 일부를 빼서 매고 있는 가방에 넣어서 들어갔다. 보딩 때 보니 캐리어를 가진 승객이 거의 없어서 비행기 탑승 전까지 수하물 가격을 따로 지불해야 할까봐 전전긍긍했지만 아무 일 없이 무사히 통과했다.
하늘에 바라본 리마 항구 주변 모습. [사진-임영태]
그런데 항공기에 탑승해 비행기가 이륙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공항 직원이 와서 여권을 보자고 한다. 직원은 나와 이 대표 여권에 찍힌 중국 비자를 갖고 문제 삼았다. 사진 찍고 전화하고 그러더니 중국여권 갖고 미국 비자 신청했냐고 묻는다. 미국비자 ESTA 신청했다니까 스페인어로 뭐라 하는데 알아먹을 수가 없다. 한참을 그러다가 ‘우리는 한국인이다(We are Korean)’라고 했더니, ‘아임 쏘리’ 하고 갔다. 잘 이해가 안 됐지만 어쨌든 그렇게 해결됐다.
아마도 중국 비자를 가진 중국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중국인이면 뭐가 문제지? 중남미 지역에서 중국인에 대한 경계심이 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유럽도 중국에 대해 인식이 별로라고 한다. 미국이 이른바 서방세계를 동원해 중국에 압박을 강화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중국에 대해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동안 중국 덕분에 미국도 싼 물건 실컷 잘 썼으면서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미국은 패권 유지를 위해 그동안 그렇게도 외치던 ‘세계화’를 거꾸로 되돌리려 하고 있다. 서방세계, 즉 미국과 유럽 국가들, 일본, 한국 등이 중국을 포위, 압박하고 있는 형국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미국의 똘마니인 한국은 자신의 국익까지 해치면서 미국 요구대로 꼼짝도 못하고 쫓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칠레 산티아고에서의 첫 느낌
비행기는 16:30 출발, 22:11 도착 예정이었는데 비슷하게 시간을 지켰다. 예정보다 약간 빨리 공항에 도착한 뒤 우리는 바빠졌다. 일단 호텔 셔틀 버스를 타야 안전하게 숙소에 갈 수 있다. 그 전에 얼마간의 환전이 필요했다. 산티아고는 그냥 하룻저녁 잠만 자고 바로 떠날 계획이어서 크게 돈 쓸 일은 없지만 그래도 얼마라도 바꿔야 할 것이다.
칠레는 남미에서 소득 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다. 남미 유일의 선진국 클럽이라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이다. 멕시코도 OECD 가입국이지만 위치상 남미는 아니다. 2024년 칠레의 1인당 GDP는 1만6천 달러로 우리나라의 반 정도이지만, 남미에서는 가장 높은 소득수준에다가 물가도 높다. 남미 국가로서는 치안도 비교적 좋고, 정치적으로 안정돼 있다. 선거로 아옌데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으나 미국이 지원하는 피노체트 군부가 쿠데타로 정부를 전복한 뒤 독재와 지독한 인권유린이 자행됐지만, 민주화와 경제발전에도 일정하게 성공했다. 이 문제는 뒤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공항에서 약간의 돈만 환전했다. 그런데 환율이 너무 엉터리다. 1달러에 882.23페소가 공식 환율로 뜨는데 공황 환전소에서는 1달러에 700.5페소라고 한다. 180페소나 차이가 나는 것이다. 도대체 몇 퍼센트인가. 20%가 넘는 차이다. 하지만 10시가 넘은 이 밤 어디 가서 돈을 바꿀 것인가. 당장 택시도 타야할지 모르고고. 울며 겨자 먹기로 급한 대로 100달러만 바꿨다. 그 자리서 돈을 세며 보여주었는데 대충대충 응, 응 하며 받았다. 난 처음 1달러당 765페소라고 하는 줄 알았는데 주머니에 돈이 7만 페소밖에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6천 페소를 덜 받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기분이 나빴다. 칠레가 뺀질이라고 하더니 이거 내가 ‘네다바이’ 당한 것인가? 이런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나중에 영수증을 확인해보니 70,500페소가 맞다. 내가 착각한 것이다. 속으로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
칠레 산티아고 공항. [사진-임영태]
칠레 산티아고 대통령 궁 뒤 편 시민공원. [사진-임영태]
사족이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2024년 4월 27일 현재 1달러=953.97 칠레 페소로 나오고 있다. 그 사이 칠레 돈 가치가 많이 떨어진 것이다. 한국 원화도 최근 1달=1400원까지 찍어서 난리였는데 칠레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지금 유례없는 강달러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우리는 미국 손아귀에서 꼼짝도 못한 채 중국‧러시아와 멀어지면서 경제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고 있다. 수출로 먹고 사는 대한민국이 중국과 사이가 틀어져 최대의 무역흑자국에서 최대의 무역적자국으로 바뀌었다. 중국과의 기술격차는 좁혀지고 있고, 반도체, 이차전지 등 한국이 그나마 세계적인 경쟁력이 있는 첨단기술 분야에 대한 미국의 규제로 한국 경제가 어려움에 처하고 있다. 지금의 강달러 현상은 미국 경제의 생산성 향상과 같은 경쟁력 제고의 영향도 있지만, 미국의 정치, 군사적 압박이라는 경제외적 강제 탓도 크다.
그런데 나는 산티아고 공항에 도착해 환전하는 과정에서 돋보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공항 환전소에서 여직원이 뭐라면서 보여주는 숫자를 읽느라고 주머니에서 돋보기를 꺼냈다가 돈만 챙기고 안경은 두고 떠난 것이었다. 안경을 잃어버린 사실을 알고 조금 있다가 그곳에 가봤더니 문이 닫혀 있었다. 다음 날 나탈레스행 비행기를 타러가면서 들렀지만 없었다. 돋보기가 없으면 가까운 글자는 읽을 수가 없으니 큰일이다.
우리는 공항에 도착한 뒤 호텔셔틀버스가 서는 곳을 정확히 알지 못해서 우왕좌왕 이리저리 찾아 헤매다가 결국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중간에 공항 안내소를 찾아서 물었다. 호텔셔틀 버스를 어디서 탈 수 있느냐고? 직원은 친절하게도 공항 뒤쪽 주차장 근거에 가면 있다고 설명해준다. 우리는 그곳으로 가서 한참을 기다렸으나 셔틀버스는 구경도 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공항 앞쪽으로 나와 알아보았으나 늦은 밤 이미 방향감각을 상실한 상태에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끝내 셔틀버스 서는 장소는 찾지 못했다. 다시 안내소로 찾아갔다. 아까 그 직원은 자기는 책임이 없다고만 답한다. 책임 회피, 무사 안일. 어디나 있는 현상이다. 그래, 당신 책임은 아니야, 하지만 정확히 알지 못하면 모르겠다고 하든지... 그리고 정확히 알려주지 않아서 우리가 헤맸다면 ‘미안하다’ 한마디라도 하든지. 이래저래 칠레에 대한 첫 인상은 별로다.
왔다갔다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났다. 호텔버스의 경우 밤 11시가 넘으면 끊어진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기로 했다. 칠레 치안이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라고 하지만, 아무 택시나 탈 수는 없었다. 우버택시를 불렀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 무소식이다. 그때 헐리웃 배우 조지 클루니를 닮은 잘 생긴 친구가 우리에게 접근해 3만5천페소를 주면 호텔까지 잘 모시겠다고 제안한다. 3킬로밖에 안 되는 거리를 한화로 5만원 가까이 내라는 것이다. 이런 뭐 같은... 우리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랬더니 좀 있다가 다시 와서 1만 페소만 내란다. 한화 1만5천원이다. 그 정도야 주지. 오케이. 칠레 공항에 내리자마자 불법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개인택시라니! 기분이 별로다.
산티아고 공항에서 짐이 걸리다
12시가 넘어서야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 했다. 씻고 짐정리하고 간단히 하루일 메모 정리하고 2시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그런데 3시부터 계속해서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내가 사는 아파트 같은 라인에서 이사를 하는데 내 차를 빼달라는 것이다. 혹시 이런 일이 생길까봐 여행오기 전 집에 있는 식구들에게 차키 두는 곳을 알려주고 부탁을 했었는데, 다섯 명 중에 한 사람도 집에 없어서 벌어진 일이다. 관리사무소, 이사하는 사람, 이삿짐 센타에서 연달아 전화를 해댄다. 처음에는 무시하고 전화를 끊고 받지 않았는데 문자, 전화를 계속한다. 결국 받아서 짧게 말했다. “해외에 나와 있어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알아서 해라.” 그런데도 계속 전화가 온다. 할 수 없이 출근한 아내에게 문자로 연락해 차 좀 빼주라고 부탁했다. 아내는 부랴부랴 직장에서 집으로 달려갔으나 이삿짐 올리는 사람이 괜찮다며 차 옆에다 사다리를 놓고 이삿짐을 올리다 결국 차량 앞 유리창를 박살냈다고 알려준다. 부글부글 끓었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 일로 새벽 4시 반까지 전화 대응하느라 시달렸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7시경 아침 식사 후, 준비해서 바로 체크아웃하고 9시경 호텔을 떠났다. 비행기는 12시 30분 출발 예정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산티아고 시내 구경을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어서 미리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산티아고 공항(국제공항 풀 네임은 ‘코모도로 아르투로 메리노 베니테스’)은 규모가 엄청 컸다. 인천공항보다 더 큰 느낌이 들었는데, 아마도 국제선과 국내선이 함께 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시 외곽에 인천공항처럼 새로 지은 지 오래되지 않은 최신식 건물로 깨끗이 단장을 했다. 우리는 이런 사정을 생각하지 못하고 국제선 쪽으로 갔다. 하지만 산티아고-푸에르토 나탈레스 비행기는 국내선이어서 국제선으로 잘못 간 우리는 캐리어를 끌고 열심히 질주극을 벌여야 했다. 일찍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 있어서 다행히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칠레 산티아고 시내 모습. [사진-임영태]
우리가 탈 비행기는 스카이항공(Sky Airline) H2425편이다. 12:30 산티아고 공항 출발, 16:51분 트니언드-갈라 공항 도착 예정이다. 비행기 티켓은 인터넷으로 다운받아서 체크인 했다. 그런데 짐 검사를 하면서 매고 있던 가방에 들어 있던 스프레이 모기약이 문제가 되었다. 100밀리 미만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데 걸렸다. 이후에도 모기약은 여러 차례 공항 검색 과정에서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또 비행기에 탑승하는 과정에서 내 짐이 걸렸다. 캐리어를 들고 타더라도 미리 짐 가격을 지불하고 꼬리표를 달고 타야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8킬로 이내의 짐은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뚤레뚤레 보딩장 입구로 가서 비행기표를 내밀었다. 그러자 직원이 내 티켓을 확인하고 체크하더니 짐값을 따로 내란다. 8킬로 이하는 상관없지 않느냐고 항의했으나 아무 소용없었다. 메는 가방 외에는 돈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은 안 걸렸는데 나만 걸렸다. 억울했다. 하지만 어쩌랴. 3만 페소(한화 4만5천원 가량)를 벌금으로 물었다. 나중에 인터넷을 보니 어떤 남미 여행객도 이런 일을 당해서 강하게 항의했더니 그냥 보내줬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도 좀 더 세게 항의할 걸 그랬나?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최근 항공기 안에서 소란을 피워 문제가 된 한국 여행객 이야기를 보면서 적당히 하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일이든 과하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래저래 칠레 산티아고에 대한 느낌은 별로였다. 산티아고는 원래 우리 여행 계획에서는 그냥 하룻저녁 자고 지나가는 걸로 끝이었다. 그랬다면 여전히 산티아고에 대한 내 기억은 첫 인상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나중에 다시 산티아고에 들르게 된다. 그때는 첫 인상과는 다른 좋은 느낌을 받았다. 단면만 보고 전체처럼 생각하는 편견을 갖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임영태 필자 약력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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