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새 언약의 일꾼(문현화)
고후3:6절에서는 새 언약의 일꾼이라는 말이 나온다. 개역성경에서는 의문으로 하지 않고 영의 새로운 것이라고 표현하는데 의문은 율법조문으로 번역했다. 새 언약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약의 일꾼이 아니고 신약의 일꾼이라고 이해하면 좋다. 신약시대가 무엇인가? 메시야가 나타나신 이 시대가 신약시대이다. 구약에서는 모세를 통해서 법을 주셨고,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와 진리를 주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새 역사를 우리에게 이루어주신다는 것이다. 신약의 일꾼들이란 대체로 어떤 사람들인가? 고린도후서에서 새 언약의 일꾼들에게 나타나는 첫째 특징은 낙심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고난을 당할지라도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자살률이 높은 나라들이 미국, 한국, 일본들이다. 잘 사는 나라들인 것이다. 그러나 둘째는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라고 말한다. 사람마다 숨은 부끄러운 일들이 있다는 것이다. 곧 남들이 아는 죄가 있고 모르는 죄가 있다는 것이다. 내 양심에 찔림을 받는 일이다. 양심에 찔리는 일들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여 당당하고 밝게 살수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숨은 양심의 부끄러운 일들을 버리는 것이다.
셋째로는 게으름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고 속이는 것을 하지 않고.. 라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지 않게 한다고 말한다. 복잡하다는 말과 혼잡하다는 말을 가려서 쓸 수 있어야 하는데, 교통이 정체대고 밀리고 하는 것은 혼잡한 것이다. 즉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만 있어야 하는데 다른 것도 뒤섞어 놓은 것을 말한다. 사람의 말도 집어놓고 마귀의 말도 집어넣어 뒤죽박죽을 집어넣는 것이다. 다섯째로는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라고 말한다. 우리가 정말 사모해야 할 것이 진리이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기는 하지만 나의 양심을 찔러주는 소리 바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새 언약이라는 말이 무엇인가? 예레미야 32장과 에스겔에서도 나온다. 이것을 잘 설명하는 것이 히브리서에 나온다.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것이 두 개의 기둥으로 되어있다. 한 기둥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고, 하나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성령을 보내주시어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두 기둥으로 세워나가야 한다. 설교를 할 때도 이 두 기둥이 세워져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것을 세운 사람이 좋은 설교자이다. 십자가와 성령충만이 제자의 기본적이 자격에 나타난다. 구원의 두 개의 요소가 있다. 성령의 나타남과 십자가의 도가 나타나는 사람은 택하신 사람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여러 곳에 두 기둥이 세워져있다. 새 언약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깊이 생각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살아야 한다.
느낀점: 주 안에서 구원의 은혜와 성령의 충만함이 있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한번 더 느끼는 시간이다. 뿐만 아니라 설교를 할 때 빠지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두 기둥에 관한 것은 신학을 하고 교회를 섬기는 나에게 중요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산 위와 산 아래
마가복음9: 20~29
산 위와 산 아래에 대한 이야기는 신약성경에는 변화산이야기와 갈보리동산이야기에 나온다. 그런가 하면 구약성경에는 산 위와 아래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온다. 노아의 방주와 모세의 때도 여러번 나온다. 십계명과 법을 받을 때 산 아래에서는 모세가 사십일이 되도록 내려오지 않자 우리가 섬길 신을 만들자 하며 금송아지를 만들어 제사를 드린다. 모세는 두 돌판을 던진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계약이 깨졌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이 자녀가 될 자격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는 사건이다. 엘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산 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예수님은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 변형되셨다. 또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나님의 음성이 하늘에서 들리는 일도 일어났다. 산 위에는 신비가 있다. 산 아래에는 신비가 없다. 우리가 신앙생화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신비를 체험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어도 신비체험이 없이 믿는 것은 가짜일수 있다.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이러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변화산에서는 첫째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가? 우리가 알던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참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신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말이 헬라 말로 미스터리 씨크릿이라고 번역한다. 우리말에도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신비라고 표현한다. 이 신비가 변화산에서 나타난다. 둘째로는 어떤 신비인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다. 모세를 통해서는 율법을 주신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왔다라고 하신다. 모세는 율법,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이다. 산 위에서는 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이 것을 핵심이며 진리이다. 즉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은 산 위에 올라가야 한다. 산 위에 올라가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성경이 없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성경말씀에 집중해야 한다. 육신적으로는 편해지지만 영적으로는 어두워지는 시대를 산다. 산 아래 이 땅에는 진리가 없다. 십자가와 부활 진리가 없는 것이다. 세상이 가는 방향과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다.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면 부활이 없다. 한마디로 줄이면 하나님의 신비가 없다.
느낀점: 어느 때보다도 말씀에 집중해야 한다는 목사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한다. 시대와 상황은 우리가 말씀 앞에 머무는 시간들을 더 줄일 수밖에 없도록 되어져 가고 있다. 그러나 내 영혼이 때로는 말씀의 갈급함을 느끼고, 그것으로만 영적인 양분을 공급받아 살아갈 수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할 일이 정말 많지만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 안에서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채움 받아야만 학업과 교회사역 가정을 돌보는 일들을 잘 감당할 수 있음을 마음에 새긴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
사40:9
선지자란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다. 이 세상의 많은 소식들이 있지만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이 많다. 성경에서 말하는 아름다운소식은 천국을 알리는 소식이고 구원과 죄를 이겨나는 소식을 알려주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복된 소식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말한다. 이 세상의 아름다우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또한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이다. 그 분으로 인해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사람이다. 내가 아름답지 못하면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할 수 없다. 신약에 와서는 이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말을 복된 소식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천사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말한다. 그 복음은 아름다우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것이다. 임마누엘!
누구에게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느냐라는 전도의 대상을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한다. 시온, 예루살렘, 유다의 성읍들에게 전하는 자라고 말한다. 같은 말인데 세 가지로 표현한다. 시온과 예루살렘이 어떻게 다른가? 시온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를 말하고 예루살렘은 결혼한 여자를 말한다.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지나가실 때 야곱의 우물가에 가셔서 잠깐 쉬신다. 그 때 물을 길으러 왔던 여자에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은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근본적인 자세를 배워야 한다. 시온 예루살렘 유다의 공통점은 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나의 목자라고 하면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이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것을 세 가지로 가르친다. 너는 높은 산에 올라가며 힘써 소리를 높이며, 셋째로 유다의 성읍들에 전하는데 너희 하나님의 보아라라고 전하라는 것이다. 높은 산에 올라가라는 말씀은 이것은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첫째, 지식의 높은 산에 올라가야 한다. 또한 자기자신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격의 높은 산에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도덕적으로도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여기에 머물면 안된다. 기도와 깊은 말씀의 이해는 물론 하나님과의 교제가운데 우리를 새롭게 만드는 은혜를 체험해야 한다. 마지막때 기도가 다 줄어든다.
또한 소리를 높여서 외쳐라라고 말한다. 소리는 확신이 있을 때 소리를 높일 수 있다. 둘째로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신다. 도덕적인 증인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성령의 계시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없는 것이다. 유다의 성읍들에 전하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아라고 전하라고 한다. 예수님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사람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면 그 사람은 죽는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기적을 통해서 우리의 성결한 삶을 통해서 의로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그러할 때 가능하다. 이 마지막때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일꾼들이 되자!
나귀의 비밀
마21:1~7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하나가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이 나귀를 타고 들어가신 것은 어떤 비밀이 있을까? 왜 하필 나귀일까? 성경에 나타나는 나귀에 대한 이야기를 세 가지만 고르라면 민수기22장에 나오는 발람과 발락의 이야기다. 발람이 모압왕 을 만나러 갈 때 나귀를 타고 가다가 그를 다치게 한다. 그때 나귀는 말을 한다. 신약성경에서 이것을 말 못하는 짐승이 발람을 책망했다고 말한다. 오늘 날 목사들도 헛된 세상의 이익을 위해 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또 나귀에 대한 이야기가 사울이 아직 왕이 되기 전에 사울을 불러 사무엘선지자를 만나게 하신다. 사울의 암나귀..사울의 아버지가 사울에게 나귀를 찾아오라고 하자 그는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흘길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사무엘의 종을 통해 사무엘을 만난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사울을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울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나귀를 사용하신 것이다.
셋째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실 때 나귀를 타고 가신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겸손에 대해 말씀하지만 그 외의 것은 말하지 않는다. 나귀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나귀는 귀가 크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라는 것이다. 우리인간들은 눈은 감기고 목이곧고 귀는 닫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큰 귀를 가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큰 귀를 가지고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 나귀는 또한 고집이 세다. 사람이 다 고집이 세다. 출애굽기12:13절 말씀에는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양으로 대속하라고 하신다. 그러시면서 너희도 첫 아들은 어린양으로 대속하라고 하신다. 그렇게 대속하지 않으려면 나귀를 죽여 버리라고 하신다. 광야의 백성들이 다 고집 때문에 멸망당했다. 나귀는 고집뿐만 아니라 정욕도 세다. 에스겔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욕을 나귀와 말과 같다고 표현한다. 나귀는 또한 적응을 잘한다. 당나라에서 나귀가 우리나라에 와서도 잘 적응하면서 생존해나갔다. 예수님이 겸손하시기 때문에 나귀를 탔다고 하지만 우리 위에 예수님을 태우고 가야 함을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예수님이 내 위에 계시지 않으시면 짐을 실고 다니고 채찍에 맞는 것이 나귀의 운명이다. 나는 한 마리의 나귀에 불과함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잘 난 것이 하나도 없다. 예수님이 많은 짐승들을 두고 나귀를 타신 것은 내가 너를 대속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심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는 내가 태운 이 예수님이 나를 위한 제물로 나의 죄를 대속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임에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한다. 사도바울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산다고 설명한다. 예수님의 나귀타고 들어가심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예수님을 잘 모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느낀점: 지금까지 나귀를 타고 가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겸손의 왕으로만 생각해 왔다. 그런데 나귀의 특징들을 설명하실 때 고집이 센 나귀를 말씀하실 때 나귀와 같은 나 자신의 모습들이 있음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어리석은 고집들을 다스려 주실 것을 간구하는 시간들을 가졌기도 하고, 지금도 다스려주실 것을 구하는 현재형이다. 특별히 주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 고집은 얼마나 큰 독인지를 깨닫게 하셨는데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한번 고집스러운 나 자신을 발견하며, 그 고집을 내려놓고 온전히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도록 주께서 도와주시를 간구하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