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게바라 번역.
라카인 주에는 1429년부터 1785년까지 아라칸 왕국이 있었으며, 당시에는 동서 교역의 요충지로 번성하였는데, 불교 왕국이었으나 지배 지역에는 무어인, 페르시아인, 아랍인 등 무슬림도 많아서 왕은 무슬림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문화의 다양성을 반영하여 페르시아어, 벵골어, 아라칸어 3개 국어가 새겨진 동전도 발행되고 있었다. 외국에서 온 무슬림과 현지인의 혼혈도 진행되었다. 1785년 아라칸 왕국은 버마의 코인바운 왕조에 멸망당했지만 그 지배는 오래가지 못하고 1826년 1차 영미 전쟁 종결 때 라카인은 영국에 할양되어 영국령 벵골 주의 일부가 되었다.
1886년 영국이 미얀마를 완전히 식민지화 1897년에는 미얀마를 영국령 인도의 버마주가 되고 중국과 인도에서 대량의 이민자가 미얀마로 흘러들어왔다.
1931년의 인구조사에서는 인도계는 총인구 1465만 명 중 100만 명을 넘었고, 양곤의 인구 20만 명의 약 절반이 인도계 이민자였다.
라카인 북부도 벵골 지방으로부터 이민이 유입되면서 농촌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미얀마 전체 무슬림의 절반이 라카인에 살고 있었다.
다만 미얀마의 다른 지역과 달리 라카인의 인도계 이민은 무슬림이 많은 것이 특징이었다. 영국 식민지가 된 미얀마에서는 1930년과 1938년에 대규모 반인도계 이민 폭동이 일어났는데, 이상하게도 라카인에서는 거의 폭력사태가 없었다 이는 라카인에 사는 무슬림 대부분이 금융업이 아닌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라카인족 사람들의 원한을 사는 일이 적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1937년 버마 통치법 아래 버마가 영국령 인도로부터 분리되어 영국령 버마가 되자 벵갈지방에서 온 이슬람 이민자는 외국인들의 존재가 되었다.
무자히드당(Mujahid Party)
1942년 일본군이 미얀마를 점령하자, 먼저 라카인에 입성한 버마족 중심의 버마 독립의용군이 무슬림들의 마을을 공격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무슬림들도 불교도들의 마을을 습격하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쌍방에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라카인족과 무슬림들은 잘하고 있었는데, 버마족은 무슬림에 대한 편견이 강하여 이러한 결과가 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영국이 라카인 탈환에 나서자 라카인족이 BIAK에서 개편된 버마국민군 BNA 산하 아라칸 방위군에 붙은 반면 무슬림들은 영국군이 결성한 V포스에 붙어 첩보·파괴 활동에 종사하면서 양자의 균열은 더욱 깊어졌다. 참고로 이 시기 10만 명 가까운 무슬림들이 벵골주로 피신했다고 하며, 대부분 라카인으로 돌아왔는데, 그중에는 현재의 파키스탄이나 아랍에미리트에 도피해 그대로 자리를 잡은 사람들도 많았다.
후에 로힝야족으로 불리는 사람들의 해외 디아스포라(biaspora)의 시작이었다.
1946년 1월에 열린 제1차 판롱회의에 라카인 주에서는 라카인족 아웅 잔 와이가 AFPFL의 일원으로 참여했을 뿐 무슬림 대표는 초청받지 못했으며, 같은 해 4월 아웅산은 라카인을 방문하여 다가올 제헌의회 선거에서 무슬림들의 선거권을 약속에 불만을 품은 라카인 주의 무슬림들 중 일부는 같은 해 5월 독립 직전의 파키스탄 카라치로 갔다가 나중에 파키스탄 초대 대통령이 되는 진나-에게 라카인 주 북부를 파키스탄으로 통합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진나-는 이를 미얀마의 내정 문제라고 일축하며 제안을 거부했다.
그리고 독립 직후인 1948년 8월 (Abdul Kasim)이라는 지역의 인기 가수였던 인물이 무자히드당(Mujahid Party:MP)이라는 무장조직을 결성하고 무슬림의 자치구 설치를 호소하며 반정부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당시 국군은 버마공산당(CPB)과 카렌민족해방군(KNLA)의 전신인 카렌민족방위기구(Karen National Defence). Organisation: KNDO)의 반란을 진압중이어서 라카인까지 손을 쓰지 못한 사정도 있어 MP는 또다시 라카인 주 북부를 제압. 그들은 불교도 마을들을 불태웠고,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으로 대량의 난민이 갔다.
그러나 Abdul Kasim의 (Mujahid Party:MP)
미얀마 국내의 다른 무슬림들의 협조와 이해를 얻지 못하고 또 인도로부터 막대한 군사 원조를 얻어 CPB와 KNDO의 반란 진압의 목적을 이루던 1949년경부터 국군 반격을 당하게 된다.
1950년, 압둘 카심(Abdul Kasim)은 암살되었고 1954년 몬순 작전이라는 군사 작전 이후에는 반란은 진정되었으며 1960년에는 MP의 당원 290명이 정부에 투항하여 반란은 거의 진압되었다.
이후에도 신무자히드당이라고도 불리는 무슬림 로힝야족해방당이 활동했으나 큰 세력이 되지 못했다. 이 MP의 반란에 정부는 라카인 북부를 직할지로 만들었다.
로힝야족
그리고 이때부터 라카인의 무슬림을 가리켜 로힝야족이라는 말이 쓰이게 된다.
처음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양곤 대학의 학생이 1959년에 결성한 ‘양곤 대학 로힝야족 학생협회’라는 조직과 그 팜플렛 "로힝야족 (小史)略史소사"에 로힝야족이라는 개념은 라카인 북부에 오래전부터 살고 있는 무슬림과 영국 식민지 시대로 이주해 살고 있던 무슬림을 포섭(包摂)하는 개념이었다. 파키스탄인이 되는 것을 단념한 벵골 이민 무슬림이 미얀마에서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낸 정체성이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있다.
덧붙여서 当時의 政府文章(정부문서) 발언에도 로힌갸라는 워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터부시 했던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1962년 네윈의 군사독재정권이 되자 외국인 배척이 강해지면서 로힝야족은 확연히 배제의 대상이 되었다.
버마사회주의계획당(BBSP)의 당원 자격은 불교도에 한정되었고, 로힝야족에게는 공직취임금지, 이동제한, 신분증 발급정지 등의 제한이 부과되었다. 1964년 외국기업이 국유화되자 당연히 로힝야족 소유의 기업도 국유화되었으며, 나아가 유나이티드 로힝야족기구(Unired Rohingya Organisation), 로힝야족학생협회(Rohingya Students Association), 양곤대학교 로힝야족학생협회(Yangon University Rohingya Students Association) 등의 조직이 해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양곤대학교에 다니는 라카인주 출신의 로힝야족 학생 자파르 하비브(Jafar Habib)가 1964년 4월 26일 로힝야족 독립전선(Rohingya Independence Front: RIF)이라는 조직을 결성했다(1973년 로힝야족 애국전선(Rohingya Patriotic Front: RPF) 개명). 로힝야족 이름을 딴 최초의 무장조직이었으나 이들은 무장투쟁은 하지 않았고 무슬림의 국제사회에 대해 로힝야족 "궁상(窮状)궁핍한 상황"을 호소하는 활동을 벌였지만 거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국경지대에 소규모 캠프를 마련하고, 나아가 치타곤에 거점을 두고 로힝야족에 관한 소식지를 발행하는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71년 제3차 (인파전쟁?) 인도/ 파키스탄전쟁 발발 결과적으로 방글라데시가 탄생한 이 전쟁에서 방글라데시에서 라카인으로 약 50만 명의 난민이 유입되었다고 한다.
[이 건은 일반 미얀마인들 사이에 라카인 북부에 사는 무슬림들은 불법체류자라고 깊은 인상을 주었다]
1974년에는 새 헌법으로 라카인 주가 정식으로 설치되었고, 로힝야족은 영국 식민지 시대의 이민자로 규정되었다.
1978년 2월 라카인 주 북부에서 국적 심사를 명목으로 한 드래곤 킹https://en.m.wikipedia.org/wiki/Operation_Dragon_King작전이 실시되면서 치안당국과 로힝야족이 충돌. 국군이 출동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약 20만 명의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로 유출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사우디아라비아의 부유한 자선단체들이 대규모 원조를 아끼지 않고 콕스바자르에 난민을 위한 병원, 모스크, 신학교를 건설해 주었다.
그리고 1982년 새로운 국적법이 제정되었다.
=1982년 국적법=
국민: 제1차 영/버마전쟁이 시작되기 1884년 이전부터 미얀마에서 살았던 토착 민족.
준국민: 1948년 국적법에 따라 국적 취득을 신청했지만 본법 개정 때까지 결정을 받지 않은 자.
귀화 국민: 1948년 1월 4일까지 미얀마에 살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었고, 1948년 국적법에 따라 국적 취득 신청을 하지 않은 자.
이 ‘토착민족’에는 135개 민족의 카테고리가 있는데, 그 중에 로힝야족은 없었고, 또 ‘1948년 국적법에 따라 국적 취득을 신청한다’는 것도 ‘1948년 1월 4일까지 미얀마에 살고 있음을 증명한다’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로힝야족은 이 ‘국민’ ‘준국민’ ‘귀화국민’에도 해당되지 않고 무국적 상태에 빠져 불법 이민자로 간주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 라카인 출신의 의사 무함마드 유누스(Mohammed Yunus)가 RPF 과격파를 이끌고 로힝야 연대기구(Rohingya Solidarity Organisation: RSO)를 결성했다.
이들은 보다 엄격한 무슬림 노선을 취하여 방글라데시의 자말테 이슬라미(Jamaat-e-Islami), 아프가니스탄의 히즈베 이슬라미 헤크마티알파(Hizb-e-Islami), 인도 카슈미르 지방의 히즈부르 무자히딘(Hizbe-ul Mujahideen), 말레이시아의 이슬람 청년운동(Angkatan Belia Islami), 아프가니스탄의 히즈베 이슬라미 헤크마티알파(Hizb-e-Islami), 인도 카슈미르 지방의 히즈부르 무자히딘(Hizbe-ul Mujahideen), 말레이시아의 이슬람 청년운동 등과 연대하였다.
RSO는 치타곤의 우키아(Ukhia)에 캠프를 마련하였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자선단체가 콕스바자르에 건설한 난민 캠프를 유지하였다.
또한 태국의 무기상으로부터 구입한 RPG, 기관총, 라이플 등의 무기를 방글라데시의 무장투쟁에 공급하고, 무장조직 구성원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으나 무장투쟁에 반대하는 회원들이 많아 미얀마 내에서는 무장투쟁을 전혀 하지 않았다.
한편 RPF 잔당과 RSO 탈퇴자들이 결집하여 1986년 변호사 누럴 이슬람(Nurul Isram)이 보다 온건한 아라칸 로힝야 이슬람전선(Arakan Rohingya Islamic Front: ARIF)을 결성하였는데, 이곳도 수십 명의 병사를 거느릴 뿐 무장투쟁은 하지 않았다.
두 조직은 국제연대뿐만 아니라 국내 소수민족 무장세력과의 연대도 시도하여 소수민족 무장세력의 연대조직·민족민주전선(National Democratic Front)이나 후에는 소수민족 무장세력과 1988년 민주화운동 학생조직의 연대조직·버마민주동맹(Democratic Alliance of Burma) 참여를 모색하고 두 조직의 본부가 있는 KNU의 본거지 마네프로우(마네 플로?)를 방문하여 회담을 갖기도 하였으나 두 조직의 멤버였던 아라칸해방군(ALA)의 반대에 부딪혀 성사되지 못하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전반에 걸쳐 RSO는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당시 라카인 주에서는 로힝야족 RSO, ARIF 이외에도 ALA도 참여하고 있었던 아라칸 민족통일전선과 라카인족 아라칸군 등 무장조직이 난립하고 있었으며, 이들 조직은 미얀마 내에서 거의 무장투쟁을 하지 않았으나 RSO와 ARIF가 새로운 자금원을 얻어 군사훈련을 시작했다는 보고가 있어 1991년 국군은 이들 무장조직 소탕을 목적으로 한 "깨끗하고 아름다운 나라 작전"(Operation Pyi Thaya)를 발동했다 작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약 25만 명의 난민이 또다시 방글라데시로 유출. 1988년 민주화운동 직후의 일이었으므로 이 사건은 국제적 주목을 받았고 로힝야족 존재가 전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結局、国連難民高等弁務官事務소 정부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UNHCR)의 지원을 받아 19만 명의 난민을 미얀마로 귀환시켰다.
1992년 4월 정부는 국경지대입국관리기구(나사카)를 설치해 로힝야족 생활관리를 강화하고 나아가 라카인 북부에 불교도 이식을 추진했다.
90년대에는 이슬람 부흥운동의 영향이 미얀마에도 미치면서 미얀마 국내의 무슬림들이 무슬림다운 모습을 하게 되거나 모스크에서의 예배에 줄을 잇게 되거나 786이라고 적힌 무슬림 상점들이 거리에 늘어나면서 무슬림 무장집단뿐만 아니라 무슬림의 존재 자체를 위협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강해져 2001년 9.11 테러로 그것은 결정적이 되었다.
또한 9.11 테러를 실행한 알카에다에는 방글라데시의 난민캠프에서 리크루트된 로힝야족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지뢰처리나 포터 등 전장에서 가장 위험한 임무를 충당받고 있었다고 한다. 2001년에는 시트웨, 타운, 타운지, 피, 바고, 힌다 등 각지에서의 충돌이 빈번했다.
1991년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나라 작전" 이후 RSO는 산발적인 게릴라 투쟁을 벌였지만, 모두 국군에 의해 격퇴되어 30명의 병사를 잃었다. 성과가 없자 무장투쟁을 단념하고 정치활동에 집중하기로 한 RSO는 1998년 ARIF와 합병하여 아라칸 로힝야 민족기구(Arakan Rohingya National Organisation: ARNO)를 결성. 2000년에는 라카인족 무장조직의 연대조직 아라칸 민족통일당(The National United Party of Arakan: NUPA)과 연대하여 아라칸 독립동맹(Arakan Independence)을 결성. Alliance:AIA)를 결성했다. 이는 오랜 세월 대립해온 로힝야족과 라카인족이 손을 잡는 획기적인 시도였지만 오히려 이 조직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라카인족 무장세력끼리, 나아가 로힝야족과 라카인족의 대립이 깊어지는 아이러니한 결과가 되었다.
2001년 1월 방글라데시 당국에 치타곤과 콕스바자르에 있는 사무소를 수색당하고 수백 명의 멤버가 총기 밀매·마약 밀매 혐의로 일제 검거되어 괴멸적 타격을 입는다.
같은 해 4월에 ARNO의 무장 조직·
로힝야 민족군(Rohingya National Army: RNA)이 (Maungdaw)의 나사카의 사무소를 두 번 공격해 최소 4명의 경찰관을 살해하는 사건이후 무장 투쟁은 간간히 지속되었고 2003년, ARNO의 간부는 무장 투쟁으로부터의 은퇴를 표명했다.
그 후 ARNO는 거의 유명무실화했고, 3개의 파벌이 모두 RSO를 자칭해 미미한 활동을 계속했다.
아라칸 로힝기 구세군(ARSA)
은 2011년 미얀마는 민정 이관되며 표현의 자유가 인정되고 언론의 자유가 확산되면서 인터넷이 자유화됨에 따라 페이스북(미얀마에서는 인터넷 =페이스북)에 무슬림 헤이트가 넘쳐나게 되었다.
이 반이슬람 운동은 969운동으로 불리며 그 중심인물인 승려 아신 윌라투는 미국 타임지 표지에 '불교도 테러리스트의 얼굴'로 소개되기도 했다.
2012년 5월에는 라카인족 소녀가 로힝야족 남성에게 강간당한 끝에 살해당한 사건을 계기로 양자 사이에 충돌이 발생. 10월까지 150명 이상이 사망하고 10만명 이상의 피난민이 나오는 참사가 되었다.
(* 이 사건은 내가 몇 번 글을 올렸죠?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카망 족이 범인이라고)
이 사건 이후 라카인 주에서는 무슬림과 불교도의 충돌이 빈발하였고, 또한 라카인 주 이외에도 메이크틸라, 양곤 근교, 라쇼에서 반무슬림의 폭동이 발생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종교갈등은 해외로도 불똥이 튀었다. 2013년 4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서는 다수파인 로힝야족 난민이 소수파의 불교도를 난민 8명 살해,
말레이시아에서는 불교도 미얀마인을 겨냥한 습격사건이 빈발하였다.
2015년에는 무슬림에 대해 차별적인 민족보호법 4법(개종법, 여성불교도의 특별혼인법, 인구억제보건법, 일부일부법)이 성립되었다.
(* 이 악법도 내가 몇 번 글을 올린 것)
[미얀마에서 반이슬람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2016년 10월 19일 라카인 주의 여러 경찰서를 누군가 습격하여 경찰관 9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무장세력은 ‘하르카 알 야킨’(신앙의 운동)이라고 자칭하고 있었으며,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무슬림들이 리더로 풍부한 자금을 가지고 외국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는 것밖에 알지 못했다.
민정 이관 후 미얀마에서의 무슬림 배척운동의 고조로 해외 무슬림 커뮤니티에서는 ‘미얀마을 지하드화’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모습을 드러낸 형태였다.
무장세력의 정체는 아라칸 로힝야 구세군(Arakan Rohingya Salvation Army)이라는 그룹으로 리더는 (Ataullah abu Ammar Jununi). 그는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태어난 로힝야족 이민자로, 가족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로 이주. 부유층 자제 가정교사로 일하는 등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하던 중 2012년부터 2013년까지 미얀마 무슬림과 불교도의 충돌을 알게 된 것을 계기로 로힝야족 민족주의에 눈을 떴다고 한다.
파키스탄으로 귀국한 아타울러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부유층과 사우디아라비아에 거주하는 로힝야족의 기부로 이루어진 풍부한 자금을 배경으로 이슬람 극단주의 협력을 받아내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 이후 동료들과 함께 방글라데시에 밀입국해 2013년 콕스바자르 난민캠프에서 ARSA를 결성했다.
2016년 습격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아타울라는 그 후에도 유튜브 등에서 자주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코피 아난 라카인 자문위원회가 최종 보고서를 제출한 다음날인 2017년 8월 25일, 약 5000명의 병사와 농기구와 죽창으로 무장화한 주민을 데리고 다시 여러 경찰서를 습격.며칠간의 전투에서 치안부대에 14명, 공무원에 1명, 무장세력에 371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에 대해 국군은 로힝야족 주민의 살해와 마을들의 방화를 수반하는 격렬한 소탕작전을 했다,
약 70만명의 로힝야족 난민이 방글라데시로 유출되는 사태를 야기했다.
(* 우리가 아는 로힌갸사태)
ARSA는 과연 이렇게 대규모 난민이 발생할 것은 예측하지 못했는지, 그 1개월 후에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했으나
국군의 반격에 당해 아타울라는 중상을 입고, ARSA는 괴멸적 타격을 입었고, 이후에는 자취를 감추고 있다.
현재 ARSA 방글라데시에 있는 로힝야족 난민캠프에 널리 침투하고 있다고 하며, 2021년 9월 콕스바자르의 난민캠프에서 로힝야족 온건파 지도자 모히브 울러가 살해되었을 때,
난민캠프에서 자주 발생하는 화재에도 관여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