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장 죽음의 대한지룡(大汗之龍)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던 시신은 대한지릉의 입구에 이르자 수십구에 이르렀다.
정규는 왕승고의 우려가 사실로서 나타나자 꼬리에 불이 붙은 황소의 심정이 되었다.
설마했더니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더구나 눈에 익은 회의인들의 시신은 정규를 곤혹스럽게 했다.
그들이 노야가 보낸 사람들이라면…
그렇다면 왕승고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렇게 격렬한 싸움이 대한지릉의 입구에 이르는 길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대한지릉에 이르는 길을 장악하려는 싸움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왕승고와 소진.
정규가 그렇게 알고 있는 두 사람만 들어간 대한지릉을 적이 장악했다면…
정규는 침이 말랐다.
적을 유인한다는 계책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예정은 정규가 그들을 끌고 돌아다니는 가운데, 왕승고는 대한지릉의 탐사를 끝내고 그 장보를 운반해내는 것이었는데 불과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이럴 바에야 목숨이 다하더라도 왕승고가 들어간 대한지릉의 입구를 사수(死守)했어야 했다.
『주군…』
그의 입에서 부지중에 남의 이목 때문에 부르는 공자 대신 주군이란 부름이 흘러나왔다.
언젠가부터 왕승고는 그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로서 자리하고 있었다.
그라면 언제인가는 반드시 나라를 되찾을 것으로 정규는 믿고 있었다.
그러한 그에게 위험이 닥쳤다면…
「절대 그럴 순 없어!」
정규는 이를 악물었다.
『으악!』
바로 그 순간, 느닷없이 뒤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흠칫 놀라 정규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를 향해서 음산한 빛을 머금은 칼날이 소리도 없이 새벽안개를 가르며 날아들었다.
***왕승고와 야숙진은 굳은 얼굴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대한지릉에 들어온지 반나절은 지난 듯했다.
나가도 나가도 끝이 없는 미로로 연결된 오행미로는 아무런 상식 없이는 아예 통과가 불가능한 곳이었다.
하지만 원세조밀기에는 통과 가능한 길이 명시되어 있었고, 야숙진은 그러한 기관매복에 관하여 분명히 탁월한 지식이 있어 그들은 그렇게 오래 헤매지 않고 오행미로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한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그 옛날 진시황릉을 본뜬 듯 자리하고 있는 거대한 광장이다.
거기에는 놀랍게도 수백명의 청동으로 만들어진 듯한 병사가 입구를 향해서 창을 겨누고 있었다.
그들은 침입자를 향해 눈을 부릅뜬 채였다.
가히 창검의 숲이 버티고 서 있는 것 같았다.
천리화통을 들어 그것을 살펴본 야숙진이 감탄을 해댔다.
『정말 대단하군요. 여기가 아마 병총(兵塚)인 모양인데요?』
마치 살아있는 듯 갖가지 형태를 취한 채로 창검을 겨눈 청동병사들을 유심히 살펴본 야숙진은 감탄을 금치못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얼마전에 만들어진 듯 그렇게 자리한 청동병사의 손에 쥐어진 창칼은 모양으로 자리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섬뜩하게 날이 서 있었다.
『잘못해서 기관을 건드리면 이 병사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서 달려들게 될 거예요』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기관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겠소?』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이 병사들도 제대로 움직이겠지요. 어서 통과하지요』
야숙진이 서둘러 앞으로 가면서 말했다.
『내가 밟는 곳만 밟도록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이 기관이 발동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말을 하던 야숙진은 놀라 입을 벌렸다.
왕승고가 그녀의 눈앞에서 붕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누가 위에서 잡아 당기고 있는 것 같은 형상.
『뭘 하려는 거예요?』
그가 절정의 경공신법으로 떠오르는 것을 본 야숙진이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음성으로 소리쳤다.
왕승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몸을 날려 눈앞에 있는 청동병사의 머리 위에 발을 딪고 섰다.
그리고 그는 야숙진을 바라보았다.
『나를 따라오시오.』
말과 함께 그가 훌쩍 다시 몸을 날림을 본 야숙진이 놀라 소리쳤다.
『무슨 짓이에요? 청동병사의 몸에도 기관이 장치되어 있어요! 잘못 건드리면 이 병총 전체의 병사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할거에요. 그런데…!』
문득 야숙진의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왕승고의 신형이 훌훌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이상현상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거지?』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발 끝에 힘을 주었다.
허공으로 둥실 떠오른 그녀는 지상으로부터 일장 가량의 높이에 있는 청동병사의 머리 위에 묘한 것이 있음을 보게 되었다.
유의해서 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그 흔적은 왕승고가 딪고 간 흔적인데 그 머리에 원형의 붉은 점 하나가 찍혀 있었던 것이다.
시선을 돌려 옆에 있는 병사의 머리를 보았지만 거기에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망설인 야숙진은 진기가 탁해져서 추락할 순간이 되자 소매를 저어 그 힘으로 일 장 가량을 이동하여 그 병사의 머리 위에 섰다.
혹시나 했지만 아무런 이상도 발생하지 않았다.
야숙진은 안력을 집중하여 앞쪽을 바라보았다. 천리화통을 앞으로 비추자 희미하게 삼 장 가량의 앞에 있는 병사의 머리에 예의 붉은 점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몸이 그곳을 향해서 날았다.
그렇게 몇번의 도약을 거쳐 그녀는 병총을 통과해 그 건너에 내려설 수 있었다.
눈앞으로 통로가 보였다.
그 통로의 입구에 왕승고가 서서 그녀가 병총을 건너옴을 보고 있다가 그녀가 무사히 내려섬을 보자 안으로 들어갔다.
야숙진은 말없이 그를 따라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왕승고는 앞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전진하고 있어서 신법을 전개하자 순식간에 그를 따라 붙을 수 있었다.
『어떻게 된겁니까? 어떻게 그걸 발견할 수 있었는지? 도면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던걸로 압니다만…』
그녀는 왕승고의 옆을 따르며 따지듯이 물었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소. 도면 위에 있던 그 붉은 줄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그래서 살펴본 결과, 그 줄이 병사들의 머리를 통과하는 지름길임을 알아낼 수 있었소. 그 뿐이오』
대답하던 왕승고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의 앞에 너비가 삼 장 가량에 이르는 석실이 하나 나타났던 것이다.
『그런…』
야숙진은 말을 삼켰다.
왕승고의 말에는 어김이 없었다.
그녀가 받은 도면에는 분명히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는데, 그 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기관건축이란 면에서 볼 때에 그 줄이 있으므로 해서 어떤 묘리(妙理)가 숨겨져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런 것이었다니!
『…』
그녀는 왕승고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바위같은 얼굴이 어둠 속에서 천리화통의 빛을 받아 조용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괴이한 사람이다.
『기관건축에 대해서 공부한 적이 있습니까?』
참다 못한 그녀가 물었다.
『그저 조금 들여다 본 정도.』
왕승고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잘 모르니까, 그 줄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본 것일 뿐이오. 잘 안다면 기관이나 건축과 무슨 연계가 된 것인가 계산하느라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오.』
할 말이 없었다.
과연 그녀는 건축이나 기관매복에 관한 배치만을 생각하고 거기에다가 그 붉은 줄을 대입해봤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혀 상규(常規)에 어긋나는 배치.
그녀의 능력으로서는 도저히 그런 형태로 기관을 배설(排設)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미 백년 전에 이 능묘를 만든 사람의 능력이 그녀보다 월등했다는 의미.
결국, 그녀는 그 의미를 알아냄을 포기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병총을 통과하고자 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병사의 머리 위를 잇는 선이었다니…
기가 막혀서 그녀는 그들이 도달한 석실이 어디인지 확인하는 것도 잠시 잊어버렸다.
『가묘(假墓)에 도달한 것 같소』
왕승고의 말에 그녀는 정신을 번뜩 차렸다.
그들이 선 석실의 앞에는 거대한 네 글자가 뚜렷이 양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글자의 좌우에는 경고(警告)의 글이 새겨져 있음이 보였다.
『그렇군요』
『문을 열 수 있겠소?』
『당연히』
야숙진은 성큼 앞으로 나섰다.
자존심이 상했던 만큼 이번에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참이었다.
그들의 정면에는 높이 일장 반 가량의 커다란 석문이 자리했다. 의 넉자는 바로 거기에 새겨져 있었고 경고의 글은 그 좌우로 새겨져 있는데 야숙진은 왼쪽으로 가서 한쪽 벽을 몇번 쳤다.
그러자, 끽끽 소리와 함께 벽이 갈라지면서 그곳에서 황동(黃銅)으로 만들어진 둥근 고리 세개가 나타났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그 고리중 왼쪽에 있는 고리를 힘껏 잡아당겼다.
끄르르르…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길게 들리는 듯 하더니 이내 그그긍 하는 돌이 마찰되는 소리가 일면서 그들의 앞을 막고 있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문은 칼로 쪼갠 듯 둘로 갈라졌다.
『들어가도 됩니다』
야숙진이 보란 듯 앞장서면서 말했다.
그들의 눈앞에는 통로가 나타났다.
장정 서너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을 수 있는 통로였다. 하지만 그 통로는 그리 길지 않았다.
그들의 앞을 다시금 무엇인가가 막아섰다.
푸른 이리의 석상이었다.
크기는 비슷했지만 앞서의 석상과는 달리 땅에 앞부분을 반쯤 엎드리고 뒤쪽을 세워 금방이라도 덮쳐들 듯한 자세를 취한 점이 달랐다.
『왔군요!』
야숙진이 말했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엎드린 푸른 이리의 등을 쳤다.
그러자, 끅끅 소리와 함께 푸른 이리의 입이 조금 더 벌어졌다.
야숙진은 망설임 없이 이리의 입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이리의 혀를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처음에는 잘 안되는 듯했지만 공력을 사용하자 이리의 혀는 안으로 쑥 들어가고 말았다.
우르르릉!
커다란 진동이 일었다.
그리고 그들의 눈앞으로 돌연 빛줄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앞쪽 벽이, 문이 좌우로 갈라지고 있었다.
빛줄기는 바로 그 갈라지는 문틈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예상보다 빨리 도달했군요. 여기까지』
야숙진이 말했다.
『그런 것 같소』
그처럼 침착한 왕승고의 눈에도 흔들림이 일었다.
마침내 그들의 눈앞이 환하게 갈라졌다. 문이 활짝 열린 것이다.
반구형의 석조광장이다.
너비는 십 장 가량이나 된다.
저 멀리, 거창하게 쌓아올려진 칠층 석단이 보이고 계단이 길게 자리한다. 그리고 그 계단에는 무장을 한 병사들이 침입자를 경계하듯이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석단의 위에는 호화로운 석관의 모습이 보였다.
그 석단은 석조광장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고 석조병사들은 네 줄로 길게 늘어서서 혹시 있을지도 모를 침입자들을 사방으로 경계하고 있었다.
높이가 육 장 가량 되는 천장은 천상(天象)을 본떠서 몽고에서 보는 밤하늘이 거기 존재했다. 반짝이는 별과 맑은 밤하늘이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어서 얼핏 볼때는 마치 야외에 나와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석실 여기저기의 벽에서 불빛이 살아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벽에 걸린 등잔에서 저절로 불이 점화(點火)되고 있는 까닭이다.
문이 열림과 함께 불이 밝혀지고 있었고 그 불빛에 사방을 치장한 보석들이 빛을 반사하여 온통 보광(寶光)이 찬란했다.
통로는 네곳을 나 있었고 그들이 들어온 것은 그중 하나로서 서쪽 방면이었다.
『대단하군…』
왕승고가 나직히 중얼거렸다.
『정말 그렇군요! 저 밤하늘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천장에 박힌 것이 전부 보석이니…… 여기에 있는 것의 가치만 해도 정말 대단하겠어요.』
야숙진도 찬란한 보광이 반사광으로서 사방을 덮자 홀린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여기가 이층이오?』
『그래요. 어차피 이곳은 눈속임을 위한 가묘이니, 지하 삼층에 있는 진짜 능묘는 얼마나 대단할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아요……』
그들의 말은 정말 놀라운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토록 엄청난 곳이 진짜가 아니라,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가짜묘라는 것이다.
『그럼 정말 쿠빌라이칸이 잠든 곳은 얼마나 대단한지 보러 가보지요.』
『그래도 괜찮겠소?』
왕승고의 물음에 야숙진은 의아한 빛이 되었다.
『무슨 뜻이에요? 설마…… 여기까지 와서 거길 가지 않겠다고 하는 말은?』
문득 희미한 웃음이 왕승고의 얼굴에 스쳐갔다.
『갑자기 문에 있던 글귀가 생각나서 한 말이오. 몽고대한의 후예가 아니라면 저주가 있으리라는……』
『난또……』
야숙진이 쓴 웃음을 지었다.
『그 일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
왕승고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자 아차한 야숙진은 얼른 말끝을 얼버무리려 했다.
『어차피 그 말은 겁을 주려한 것이고, 우린 이미 이곳의 상세한 기관도면을……!』
갑자기 그녀의 안색이 돌변했다.
쿠쿠쿠쿠---!
발밑이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왕승고의 안색이 굳어졌다.
찰나, 텅텅! 요란한 음향과 함께 그들이 들어왔던 문과 열려 있던 다른 세곳의 통로가 한꺼번에 닫혀버렸다.
누군가가 닫아버린 듯.
그리고 벽에서 타오르던 불빛이 일제히 죽어들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었다.
그그그긍……
칠층석단 위에 있던 석관이 아래로 가라앉는 것이 아닌가. 그와 함께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석단(石壇)이 잇달아 바닥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누군가가 들어와 기관을 건드렸어요! 빨리 저 석단으로 가야해요!』
야숙진이 소리치면서 신형을 날렸다.
찰나.
『위험하오!』
왕승고의 외침과 더불어 능묘를 밝히며 타올랐던 불꽃이 일제히 꺼져버렸다.
암흑이 찰나간에 찾아왔다.
동시에 야숙진은 매서운 음향이 바람을 가르며 자신을 향해서 날아듬을 느꼈다.
그녀의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불이 꺼지는 것과 동시에 석단에 서 있던 병사들이 들고 있던 창을 던지는 것을 보았던 까닭이다.
석계(石階)에 서 있는 병사들의 숫자는 모두 팔십명에 이르렀다. 칠층 석단의 사방으로 난 계단에는 좌우로 병사들이 한줄에 열명씩 해서 한쪽 계단에 모두 스무명이 있었다.
그 칠층 석단에 자리한 돌계단 위에 서 있던 병사들은 분명히 석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불이 꺼짐과 동시에 다가오는 야숙진을 향해서 들고 있던 창을 던진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뜻밖의 상황인지라 야숙진으로서는 어떻게 해볼 재간이 없었다. 그나마 바닥에 있을 때라면 몰라도 이미 몸을 공중에 띄운 상태에서 그런 공격을 받았으니 그야말로 기습을 당한 꼴이었다.
제아무리 경공의 대가(大家)라 할지라도 특정한 신법을 수련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허공에서 마음대로 신형을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더더구나 전력을 다해 몸을 날린 상황에서 돌연 앞에서 창이 날아오니 그야말로 불을 향해 날아드는 불나비가 된 꼴이다.
그나마 밝았던 주위가 찰나간에 어두워지면서 거의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된 순간에 벌어진 일이니 그것을 피하거나 막기조차 불가능했다.
가히 절체절명의 순간.
쨍! 째앵…
그녀의 앞에서 불꽃이 일었다.
섬광이 번뜩이는 가운데 야숙진은 한사람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휘두름을 얼핏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들리는 고함소리.
『피하시오!』
왕승고의 목소리였다.
위기의 순간에 그가 그녀를 구해낸 것이다.
망설일 상태가 아니었다.
말이 들림과 동시에 그녀는 다급하게 바닥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악!』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지독한 고통이 왼쪽 옆구리를 쳤다.
간신히 바닥에 내려선 순간, 갑자기 발밑이 허전해졌다.
『함정?!』
그녀의 입에서 부지중에 탄성이 터졌다.
동시에 그녀의 몸이 누가 잡아당긴 듯이 그대로 아래로 쑥 가라앉았다.
본능적으로 손을 옆으로 내밀자 함정의 턱이 손에 잡혔다. 하지만 몸의 무게가 손에 털커덕 걸리는 순간,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던 참혹한 고통이 옆구리에서부터 전신으로 무섭게 치밀어 올라왔다.
『아악!』
부지중에 다시 비명이 터졌다.
손이 풀어지고 신형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함정은 다행히 깊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함정의 아래에는 대개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사람을 노리는 제이의 매복이 있게 마련이다. 세워진 창날이나 다른 무엇이던.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침과 동시에 야숙진은 죽을 힘을 다해서 옆으로 몸을 비틀어 날렸다. 그녀의 경공능력은 약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심을 잃은 상태에서 그러한 시도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게다가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상황.
그녀의 예측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이 지독한 고통이 허벅지를 쑤시고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전신으로 느껴지는 세찬 충격.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아흐흐흑…』
겨우 몸을 일으키니 자신도 모르게 괴이한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몸을 움직임에 따라 느껴졌던 것이다.
죽을 것만 같았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그녀는 이를 악물고서 품을 더듬었다.
천리화통을 찾는 것이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화통은 세개를 준비해왔다. 하나에 여섯 시진 정도를 버틸 수 있으니 연달아 켠다고 해도 하루 반나절은 유지할 수 있는 양이었고 왕승고도 그녀와 같은 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품속에 있는 천리화통 하나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상황이 전혀 생각하지 않은 방향으로 움직인 까닭이다.
품속을 더듬던 그녀의 손길이 멎었다.
없었다.
거기 있어야 할 천리화통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야숙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보나마나 잇단 변고를 겪으면서 어디선가 잃어버린 것일 터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떻게 된 것인지 다리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조금만 힘을 쓰면 다리 전체가 뜯겨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기절한 것만 같은 고통!
한점 불빛도 없다.
그러니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음이 또한 당연했다. 손을 내밀어도 손가락을 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안력을 집중해도….
그가 있다면…
문득 왕승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살아있지도 못할 터이다. 하지만 자신이 함정에 빠졌는데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빨리 오지 못하고!
야숙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이 얼마나 엉뚱한 투정인지 그녀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목적만 달성하면 그는 자신의 손에서 죽임을 당해야 할 자였다. 이미 대한지릉을 발견한 이상, 그의 쓸모는 사실상 없어졌다고 해도 좋았다.
『나는 오래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아…』
들릴듯 말듯한 소리와 함께 그녀는 정신을 놓았다.
그리 쉽게 무너질 그녀가 아니었다.
하지만 함정에 떨어지면서 다친 상처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고통조차도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위험신호라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무엇인가가 자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자신의 정신을.
아득히 멀어지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서 그녀는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둠이 그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아득히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는 얼굴. 조금씩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녀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는 다른 신분임을 알게 되었다.
대한의 후예.
정통 대한의 후예가 단절된 상황하에서 유일하게 찾아낸 그녀가 아들이 아님을 장로들은 정말 애석하게 생각했었다.
아들?
내가 아들과 다른 것이 뭐지?
또래의 남아들을 누르고 자라면서 그녀는 내심 코웃음을 쳤었다.
말을 달려도 그들보다 빨랐고 무공을 연습해도 그들보다 빨리 습득했다.
위대했다는, 막강했다는 그 영광의 전사(戰士)들이 끊임없이 신흥 명에 쫓기는 것을 보고 자랐다. 그런 와중에 감히 고개도 못들고 아버지의 발에 입맞춤을 하였다던 자들이 반역을 일삼으며 칼부림을 하면서 강자로 부상했다.
그 대표적인 자가 바로 귀력적(鬼力赤)이다.
그는 감히 스스로를 달단의 가한(可汗)이라 칭하며 이미 몽고의 주인을 자처하고 있었다. 몽고대한의 계통이 단절되었으니 자신이 그 역할을 대신하겠다는 것이었고,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인 명과도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려는 간악한 자였다.
내가, 내가 할거야.
몽고의 위대함을 내가 보일거야!
그녀는 스스로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홀가적에게 의지하면서 그를 돕는 것으로, 그의 아낙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였으리라. 그는 분명히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는 가능했을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지기가 싫었다.
남에게 의지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부족회의에서 그를 자신의 남편으로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차일피일 시간을 미루고 오히려 자신의 세력을 모으기에 열중했다. 하지만 몽고에서 남자들의 세상인 그곳에서 그녀가 움직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찾은 것은 라마.
극도마마는 활불이라 존칭되는 존재였다.
그가 자신을 편들어 준다면 크나큰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는 극도마마의 후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아낌없이 그녀를 후원했고 이따금 그녀를 불러 무공까지 전수해주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이었다.
어느날 그녀를 부른 극도마마는 그녀가 밀교의식(密敎儀式)인 오마사회(五摩事會)의 여신(女神)으로 선택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여신……
그 의미를 야숙진은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오마사회라는 것이 밀교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중 하나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 의식의 여신이 되었음은 그녀가 밀교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는 뜻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기에 그녀는 뛸 듯이 기뻐했었다.
오마사회는 불의 힘(酒), 물의 힘(魚), 바람의 힘(肉), 흙의 힘(穀)을 법도에 따라 섭취하면서 명상(冥想)을 행하는 비밀결인법(秘密結印法)이다.
그 행위의 여신으로 선택되기 위해서는 대단히 까다로운 육체적인 조건을 구비해야 했다.
첫째, 건강해야 하며
둘째, 결함이 없는 육체라야 하였다.
셋째, 연꽃 같은 눈(目)을 가져야 한다.
넷째, 풍만한 가슴을 가져야 하고
다섯째, 부드러운 살결을 가져야 했다.
여섯째, 버들 같은 허리를 가져야 했으며
일곱째, 아름다운 목을 가져야 한다.
여덟째, 훌륭한 연꽃(蓮花)을 가져야 하며
아홉번째로 윤택한 머리결을 가져야 하였다.
그렇듯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한다는 것은 말을 달리는 몽고족의 여자로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활불 극도마마가 직접 집전(執典)하는 오마사회에 선택될 여자라면 더욱 그러했다.
극도마마는 말했었다.
오마사회의 수행(修行)을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다면 크나큰 공덕(功德)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무공 또한 일취월장(日就月將)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야숙진은 목욕재계하면서 그 날을 기다렸다.
오마사회는 보름 이후 5일째, 혹은 8일째등이 가장 적합한 날이다.
그러나 극도마마는 괴이하게도 그녀의 경도(經度)일을 묻고는 그 날을 택해 오마사회일을 결정했다. 그날이야말로 여자에게 있어서 가장 음기(陰氣)가 왕성하여 신체적으로 적합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활발하고 거리낌이 없는 그녀였지만 그러한 질문에 있어서는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감히 더 이상 물을 수도 없었다.
그는 위대하고도 거대한 존재인 활불인 까닭이다.
마침내 그 날이 왔다.
옴 마니 반메 훔(唵 摩尼 叭迷 )……
옴 마니 반메 후움……
길게 울려 퍼지는 밀교진언이 장엄하던 그 날.
술과 고기등의 선택된 음식을 먹은 그녀는 오마사회의 절정(絶頂)이며 핵심인 마지막 명상을 위하여 제단에 섰다.
그때부터 천국도 수행도 지옥도 다 사라졌다.
쉬바(濕縛)는 우레의 신이 되어 비밀의 주문을 외우면서 샤크티( 乞底)와의 깊은 교섭을 갖는다. 이때 비밀행자인 쉬바는 깊은 공경의 마음으로 샤크티의 궁전(연꽃)으로 들어가야 한다. 궁전 속에서는 우레소리와 신음 소리, 칼과 창이 불꽃을 튀긴다. 마침내 이 명상의 의식 속에서 유가(瑜伽)의 신비경(神秘境)으로 들어가게 되니, 이는 욕망(煩惱) 그 자체가 그대로 깨달음(菩提)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노라……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그처럼 위대하던 활불이 벌거숭이가 되어 자신의 다리를 벌리고 그 위에 몸을 싣는 순간에, 처음 느껴보는 고통이 하복부를 꿰뚫는 그 순간부터 그녀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명상이 이런 것이라니……
그 비밀한 수행이 이런 것이라니……
자신의 몸 위에서 한껏 경건한 얼굴로서 진언을 외우는 일방, 쉬지 않고 자신의 몸을 유린하는 활불의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이 인면수심의 악마로 보일 뿐이었다.
그러하였다.
여신이 되기 위해서 까다로운 조건을 구비해야 함은 오로지 상대의 성욕(性慾)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날이후, 그녀는 달라졌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미 끝난 상황에서 거대한 존재인 활불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를 얻기 위해서 하나를 잃어야 함을 뼈저리게 느낀 그녀는 그날이후, 여자이기를 거부했다. 필요하다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렇게 사갈미인(蛇蝎美人)이 되었다.
어둠이 밀려온다.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그 어둠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저 어둠이 자신을 집어삼킨다면 다시는 세상을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싫었다.
어떻게 살아온 세월인데…
이렇게 죽는단 말인가?
싫다!
결코 죽고 싶지 않았다.
불현듯 한 사람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
정말 거대한 바위와 같은 사람.
고요하고도 침착하여 그의 곁에만 있으면 천군만마가 달려들어도 무섭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
갑자기 그를 향한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사람을 보고 싶다는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가끔 그가 떠오른 적이 있었지만, 문득문득 생각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이 무슨 까닭인지 알지 못했다. 목적을 달성한 이상, 그를 죽여야 했음에도 손을 쓰지 못한 이유을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가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가슴 속에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었음을…
「죽기 전에 한번만 볼 수 있다면…」
문득 그녀는 중얼거렸다.
의식이 어둠 속으로 둥둥 떠오르고 있음을 느끼면서…
그런데 그 순간, 저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물체가 나타났다.
왕승고였다.
꿈인가, 생시인가…
왕승고를 그녀를 향해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반가움이 차 올랐다.
하지만 아니었다.
다시 보니 그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저렇게 크지 않았다. 저렇게 뚱뚱하지 않았다.
맙소사!
극도마마였다.
그날 밤처럼 그가 그렇게 벌거벗고 있었다.
그는 미륵불처럼 자애하게 웃으며 그녀를 맞고 있었다. 그리고 어린아이를 다루듯이 그녀를 안았다. 거대한 품으로.
그 끔찍한 얼굴이 거대한 보름달과 같이 다가왔다.
『안돼애--!』
야숙진은 전신을 버둥거렸다.
있는 힘을 다해서 악을 썼다.
이젠 싫다.
그럴 순 없어!
그때였다.
『정신이 드오?』
어디선가 침착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 목소리는?」
야숙진은 가슴이 뛰었다.
끝없이 나락으로 꺼져만 가던 정신이 문득 되살아나는 듯했다.
눈을 떴다.
희미한 어둠.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 불빛 속에서 왕승고가 예의 그 바보같은 얼굴로 조용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
『창에 독이 묻어 있었소. 다행히 오래되어 그 독기가 많이 약해져 있어서 해독이 가능했소!』
말을 하던 왕승고의 눈에 순간적으로 놀람의 빛이 피어올랐다.
야숙진이 마치 맹수와 같이 벌떡 일어나 자신의 품에다 얼굴을 묻었던 것이다.
죽어도 놓지 않겠다는 듯이 야숙진은 왕승고의 목을 끌어쥐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그녀는 그 말만을 되풀이했다.
자신이 지금 어떤 신분임을 잊어버린 것일까.
문득 그녀의 귀에 왕승고의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은 남자인데, 이게 옳은 태도라고 생각하오?』
야숙진은 머리를 들고서 그를 바라보더니 문득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남자가 아니라는 걸 당신이 더 잘 알텐데 지금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설마하니 아직도 내가 남자라고 생각한다는 건가요?』
당돌한 물음이었다.
왕승고는 일순 말문이 막히는지 물끄러미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난 야숙진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창백한 얼굴.
진땀이 흘러 앞머리가 그 얼굴에 엉겨붙었다.
머리에 썼던 두건이 날아가버리고 없는 상태, 그녀의 머리카락이 흑단처럼 길게 늘어져 있는 그 모습은 처염(悽艶)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둠 속에서 보는 여자의 얼굴은 더욱 아름다운 법이다. 그것이 미녀의 얼굴이라면 더더욱. 게다가 두 사람은 서로의 호흡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 얼굴은 야숙진의 본래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가 본래의 모습에 단순히 남자로 가장했었더라면 왕승고가 그녀를 몰라볼 리가 없었을 터이다.
『독기를 뽑아냈다고는 하지만 상처가 가볍지 않소. 운기조식해서 기운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이 무덤에 들어온 것 같소』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던 왕승고가 문득 입을 열었다.
『……』
조금 아연한 빛으로 잠시 그를 바라보던 야숙진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맞아, 그게 당신답지! 목석같은… 여자의 마음도 모르는 바보 같으니!」
그녀는 정색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누가 들어왔는지 알아요?』
『모르겠소. 벽을 타고 은은히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고 한 둘이 들어온 것도 아닌 모양이오…』
『그런데 여기는… 악!』
문득 야숙진이 비명을 질렀다.
왕승고를 발견하고 들떠서 아픈 것도 몰랐었다. 그런데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지독한 고통이 밀려왔던 것이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시오. 창을 맞은 옆구리의 상처는 그런대로 독기를 빨아내고 치료를 했지만 허벅지의 상처는 조금 심하오』
왕승고가 그녀의 어깨를 조용히 눌렀다.
이 함정 속은 사방이 일장여의 둘레를 가진 석실이었다. 석실의 중앙에는 쇠로 된 침봉과 같은 것이 날카로운 끝을 세우고 있는데 그 길이는 두자 가량이었고 중앙 부분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다.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는 천장이 사오장 가량의 높이인 것을 본다면 거기서 떨어진 사람이 어떻게 죽을지는 명약관화했다.
왕승고와 그녀가 있는 곳은 그 침봉(?)이 있는 외곽이었다.
그녀의 판단은 옳았었다.
만약 그녀가 몸을 비틀어 옆으로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몸은 이미 산적(散炙)이 되어 참혹한 죽음을 당했을 터였다.
그렇게 임기응변을 했어도 횡액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바닥에 떨어지면서 외곽에 있는 창 하나에 허벅지를 관통당해 버렸던 것이다. 그 상태에서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독기가 번져가니 그녀는 꼼짝도 못한 채 정신을 잃고 말았었다.
왕승고가 그녀를 발견한 것이 조금만 더 늦었더라도 그녀는 독기 때문이 아니라, 출혈과다로 죽고 말았을 것이 분명하였다.
눈앞에 음산하게 번뜩이고 있는 창날의 무리를 보면서 그녀는 문득 소름이 오싹 끼침을 의식했다.
그리곤 선뜻한 것을 느끼고 자신을 내려다 보다가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옷매무새가 이상했던 것이다.
『옆구리의 상처를 치료했소』
그녀의 기색을 알아채고 왕승고가 말했다.
『독기도 빨아냈나요?』
좀 전 그의 말을 기억해낸 야숙진의 물음에 왕승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방법이 없었소』
『알았어요』
야숙진은 웃음기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 때문인지 그녀의 태도는 싹싹하게 변해 있었다. 이미 자신의 허벅지도 드러나 있고 그 위쪽이 출혈을 막기 위함인 듯 끈으로 동여진 것도 보았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없이 품속에서 약을 꺼내먹고는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내가 도와주겠소』
왕승고가 그녀의 뒤에서 손을 들며 진력을 일으켰다.
정규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급한 마음에 수하고수들을 모조리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일단 들어오고 나니 도대체가 어디가 어딘지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들어설 때까지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그리고 입구에서 발견한 엄청난 숫자의 해골들을 보고는 기가 질리기도 했지만 정작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석조복도에 들어왔는데 어떻게 된 것이 이 놈의 복도가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오행미로라는 미궁(迷宮)임을 정규 일행이 알 리가 없다.
더더구나 그 미로가 기관의 발동에 의해 이미 전과는 달리 길조차 섞여버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는 그였다.
『이렇게 길단 말이야?』
무공을 연마한 그들이라 해도 쉬지 않고 말을 달리고 쉬지도 못한 채 다시 긴장된 상황하에서 똑같이 생긴 복도를 끊임없이 걷다보니 지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지중에 신음이 흘러나올 수밖에.
뭔가 이상함을 느낀 그는 수하들을 쉬게 해놓고 두 사람만을 데리고 천천히 앞으로 전진했다. 물론 돌아갈 수 있도록 벽에다 표시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멀리 갈 생각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행과 떨어지는 것이 좋을 리 없다는 것은 바보가 아니라면 다 알 일이니까.
『이건?』
불과 십여걸음을 가지 않아 정규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천리화통의 불빛에 복도 모퉁이 석벽의 깨진 부분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한참 전에 그가 만들어 놓은 흔적이었다. 가도 끝이 없자, 석벽에다 표시를 하면서 걸었었다. 그런데 그 표시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제자리란 말인가?』
기가 막히자, 맥이 빠졌다.
그가 그런데 다른 사람이라고 별 다를까?
금세 다리의 힘이 풀리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으악…!』
비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건?』
정규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의 수하들이 있는 곳인 듯했다.
그는 두말도 없이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한걸음 한걸음이 조심스러워서 전진이 힘들었었다. 그런데 별다른 함정이 없는 미로임을 알게 된 마당에다가 수하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머뭇거릴 여가도, 여유도 없었다.
그와 수하들이 떨어진 거리는 불과 모퉁이 두개였다.
『으악!』
그런데 그가 막 두번째의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그의 뒤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그것이 그의 뒤를 따르던 수하의 것임을 모를 리 없는 정규였다.
왼쪽 모퉁이를 돌던 그는 순간적으로 왼쪽 팔꿈치로 벽을 찍었다. 그 반동으로 그의 신형은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모퉁이를 되돌아 뒤로 퉁겨져나갈 수 있었다.
『윽?』
그의 눈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막 그의 등을 향해 검을 휘둘러오던 흑의인과 정면으로 마주친 것이다.
그가 이렇게 움직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듯 검을 쳐오던 흑의인의 움직임도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거리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정규가 퉁겨져나오는 바람에 너무 거리가 가까워져 버렸다.
콰작!
그의 얼굴에 정규의 주먹이 그대로 작렬했다.
채 비명조차 지를 여가도 없이 그 흑의인은 훌쩍 날아가 세차게 석벽에 부딪혔다가 떨어졌다.
보나마나 머리통이 부서졌을 것이니 살아남기는 틀렸을 터이다.
바닥에 굴러떨어진 천리화통의 꺼져가는 희미한 불빛에 그를 따르던 수하 둘 중 하나가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중 또하나의 가슴에다가 검을 찔러넣고 있는 한 흑의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리는 일장이 채 되지 않는다.
『이 노옴!』
정규가 노호를 터뜨렸다.
그의 신형이 비호처럼 허공을 갈랐다.
그의 손에 들린 대도가 빛살처럼 바람을 가르며 흑의인에게로 쏘아져 갔다.
가공할 속도였다.
순간, 정규의 수하를 쓰러뜨린 흑의인이 슬쩍 한걸음 물러나면서 검을 쳐냈다.
쨍!
어둠 속에서 불꽃이 일었다.
그것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천리화통에서 불이 꺼졌다.
찰나간에 찾아온 암흑.
『감히 어디로!』
정규가 노호하면서 대도를 휘둘렀다.
무섭게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났다.
쨍그렁!
그의 대도가 석벽을 치면서 불꽃을 퉁겨냈다.
『이런 쥐새끼 같은…』
정규가 이를 갈았다.
그들을 공격했던 흑의인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피할 곳이 없었다.
그런데도 단 한순간에 흑의인은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수하 둘은 이미 절명한 상태였다.
어이 없는 일이었다.
천리화통에서 다시 불빛이 살아나고 정규 일행이 모였다.
순식간에 세명이 죽고 두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놈은 몽고족이 아닌 거 같습니다』
정규에게 얼굴을 맞고 절명한 자를 살펴본 이겸이 보고했다.
『흩어지지 말고 주위를 경계해』
정규는 내뱉듯이 말하고 조금 전에 흑의인이 사라졌던 곳을 면밀히 살폈다.
수하 둘이 천리화통을 두개나 들고 그의 옆에서 불을 밝혔다.
『그렇군』
그 석벽을 두들겨 본 정규가 문득 중얼거렸다.
천천히 숨을 들이킨 그는 기합을 내지르면서 그 석벽을 쳤다.
쿠웅…
석벽이 크게 울렸다.
그렇게 몇번 용을 쓰자, 끽끽 소리가 나면서 석벽에 틈이 생겼다.
겉도 조금 부서지고 금이 갔지만 실상 이 석벽에는 숨어있는 문(暗門)이 있었다.
당연히 그렇듯 무식하게 문을 연다고 열릴 리가 없다.
하지만 기관을 찾을 수가 없으니 힘으로 디밀어보는 수밖에.
끼끼…
문을 닫고 있던 기관이 부서진 것인지 두어차례 더 용을 쓰자 석벽이 빙글 돌면서 문이 하나 생겼다.
한사람이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만한 크기의 문이었다.
불빛으로 안을 비추었으나, 보이는 것은 또 다른 복도일 뿐,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도대체 이 놈의 복도는 어디까지 이어진 거야?』
한참을 조심스럽게 경계를 하면서 걷던 정규가 신음했다.
암문으로 들어왔기에 이젠 끝인가 했더니, 끝없는 미로가 다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들어오면서 기관을 건드려서 전체 배치가 바뀐 듯 해요. 제 생각대로라면 아마… 일층과 이층이 뒤섞여 버렸을 것이고 삼층의 본묘로 가는 길은 폐쇄되었을 것 같아요』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야숙진이 말했다.
『어떻게 가야 될는지 알겠소?』
『이 함정은 원래 욕심내어 가묘를 건드리는 자를 죽이기 위한 것이었을 거예요. 그렇다면 생로를 만들어놓을 리가 없었겠죠. 하지만 이미 기관이 발동하여 상황이 바뀌었으니 탈출할 수도 있을 거예요』
『우리가 떨어진 곳으로 올라가면 어떻겠소?』
일순, 야숙진의 얼굴에 아연한 빛이 떠올랐다.
『저 높이를 나를 데리고 말인가요?』
『필요하다면 그렇게라도 해야겠지. 아니면 다른 방도라도?』
피식, 웃은 야숙진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어쩌면 이곳을 통하면 지름길처럼 칸의 무덤으로 갈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벽의 몇군데를 살펴본 다음에 왕승고를 향해서 입을 열었다.
『여길 부술 수 있겠어요?』
한참 주변을 살펴본 야숙진이 한 말이다. 벽을 두드려 본 왕승고의 안색이 조금 굳어졌다.
『문이 아닌 듯 한데?』
『석벽이에요』
『벽을 부수란 말이오?』
『그럼, 함정에다 문을 설치해놓는 사람도 있어요? 빠져나가라고?』
야숙진이 빤히 그를 올려다 보면서 물었다.
『……』
왕승고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야숙진이 말한 벽을 가볍게 쳤다.
웅~ 하는 떨림이 손을 통해 전신으로 느껴졌다.
『두 자는 넘는 듯하군…』
왕승고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여기서 가장 약한 곳이에요』
문득 그녀가 활짝 웃었다.
『만약 이곳을 뚫고 빠져나갈 수 있다면 우리는 단숨에 능의 중심부에 도달할 수 있게 될지도 몰라요』
『능의 중심부?』
『그래요. 도면대로면, 이 능은 오행에 의거하여 지어졌어요. 비록 금목수화토의 배열을 따른 게 아니지만 기관은 다섯겹으로 설치되어 능묘를 보호하고 있죠. 오행미로, 병총, 가묘… 그리고 현실(玄室)에 해당하는 본묘(本墓)를 둘러싸고 있는 음양하(陰陽河)와 아직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기관 하나까지. 그런데 이렇게 갈 수만 있다면, 모든 기관을 무력화하여 바로 본묘에 도달할 수가 있을거예요』
『그렇다면 해볼만한 가치가 있겠군』
왕승고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의 머리카락이 절로 훌훌 날리기 시작했다.
주위에 공기의 파동이 일었다. 그것을 본 야숙진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그때와는 또 다른 경지에 이르른 것이 분명해.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그녀는 내심 머리를 저었다. 영리한 그녀였다.
남에게 지기 싫어서 갖은 수모를 다 겪으면서도 뼈를 깎는 고초를 이겨내면서 무공을 연마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무공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의 무공은 상당한 경지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무공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름을 느낀 다음, 한걸음 앞으로 나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왕승고의 무공 진경속도(進境速度)는 실로 상규(常規)를 벗어난 것이라서 불가사의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참으로 우연찮게 그녀는 왕승고가 제대로 무공을 알지도 못할 때부터 그를 알게 되었었다.
그런데 그 시원찮은 추물(醜物)은 다음에 만났을 때는 제법 강력한 무공을 구사했으며, 아예 사람의 면목조차 바뀌어 그 형상은 가히 환골탈태(換骨奪胎)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러더니 그때부터 그는 만날 때마다 그녀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이젠 아예 그녀의 앞에 태산과 같은 존재가 되어 서 있는 것이다. 「초식은 귀재(鬼才)가 있어서 빨리 익힐 수 있다고 하지만, 내공까지 속성할 수 있는 것일까? 더구나 마공을 연습한 것도 아닌 듯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왕승고는 나지막한 기합을 터뜨리면서 일장을 쳐냈다.
꽝!
굉음과 함께 강한 울림이 일었다. 돌가루가 튀었다. 하지만 석벽은 온전했다.
비록 부서지고 금이 가 있긴 했지만 그것으로 무너질 정도의 두께가 아니었다.
잠시 그것을 보던 왕승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내 뒤로 물러서시오』
그가 침착히 말했다.
동시에 그는 천천히 한손을 들어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것과 함께 그는 그 손으로 벽을 쳤다.
콰쾅!
뇌성벽력.
돌가루가 미친 듯 이는 가운데 왕승고의 주위로 날아든 부서진 돌덩이들이 호신강기에 막혀 이리저리 퉁겨져 나갔다.
『아!』
야숙진의 입에서 경악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벽이 허물어져 있었다.
휑하니 뚫린 벽의 저쪽이 지옥의 어둠처럼 천리화통의 깜박거리는 불빛을 튕겨내면서 자리했다.
강력하게 일어난 돌풍으로 인해 천리화통의 불이 꺼질 듯 깜박거리자 야숙진은 천리화통을 가리면서 내심 신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벽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두터웠다.
그런데 그걸 단 한번에 부셔버릴 줄이야.
물론, 처음 한번 친 것은 있었지만 그것이 두께를 가늠해보기 위한 것임을 알아보는 것은 그녀의 무공수위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뇌정신공……』
부지중에 그녀가 나직히 중얼거렸다.
『……』
왕승고는 조용히 숨을 몰아쉬면서 눈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
순간, 실수한 것을 알아차린 그녀는 당황하여 입을 다물었다.
지난날 천주산에서 교화사자로서 문인미의 그 뇌정신공의 가공함을 목도한 그녀였던지라 부지중에 그 이름이 입에서 튀어나오고 만 것이다.
『갑시다』
왕승고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움찔, 떨림이 그녀의 손에서 전신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반항할 이유도 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부축이 없다면 원활하게 움직이기 힘든 자신임을 알기 때문이다.
옆구리의 상처는 그런대로 견딜만 한데, 허벅지의 상처는 심해서 발을 딪기가 힘들 정도였다. 뭐 목에 칼이 들어오는 상태가 된다면 그 발로도 뛸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이 그런 상태가 아닌 바에야 굳이 고집을 부릴 필요가 어디 있을까.
그에게 몸을 맡기자 그녀는 다시 놀라게 되었다.
어떤 힘 한줄기가 그녀를 부축하여 거의 통증없이 앞으로 전진함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한 무공은 그녀를 다시 놀라게 하기에 족했다.
무너진 돌무더기를 밀쳐내고 그들이 들어선 곳은 어둠이 넘실대는 석조복도였다.
『이 능이 축조될 때, 기본 모형이 바로 진시황릉이었다고 하더니 정말 거대하군요』
주위를 살펴보던 야숙진이 감탄해 중얼거리자 왕승고가 침착히 말했다.
『한 사람의 침릉(寢陵)으로 쓰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의 피와 눈물이 흘렀소. 이런 일을 하고 그 왕조가 어떻게 오래 갈 수가 있었겠소, 쿠빌라이는 이 능묘를 건축하면서 이미 원왕조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야숙진은 발끈해서 소리치려다가 자신의 신분을 생각하고 억지로 성질을 누르며 말을 둘러댔다.
『정복한 자는 정복당한 자의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음이 초원의 법이니, 그들만을 탓할 수는 없죠. 당하고 싶지 않다면 스스로 강해져야 하겠지요』
『……』
물끄럼히 그녀를 바라보던 왕승고는 시선을 돌려 눈앞에 뻗어있는 복도를 바라보았다.
『어디로 가는게 좋겠소?』
그와 논쟁을 하면 이길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기도를 견뎌낼 힘이 야숙진에게는 없었다. 그러한 기도를 이겨낼 수 없는 이상, 논쟁을 한다는 자체가 무의미했다.
그것은 철벽에다 계란을 치는 것과 다름없는 까닭이다.
천리화통을 들어 복도를 살펴본 야숙진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는 함정에 떨어져서 기관이 발동한 상태에서 이곳으로 뚫고 나왔어요. 만약 이 복도를 지나서 비밀통로를 만날 수 있다면, 우리는 바로 능묘로 들어갈 수 있게 될거에요』
『그럼 갑시다』
왕승고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다시 앞으로 전진했다.
어둠이 천리화통의 불빛에 밀려나면서 복도가 그들을 향해서 끊임없이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잠시만요!』
야숙진이 갑자기 소리쳤다.
그리고 그녀는 복도의 한쪽 벽을 힘주어 밀었다.
그러자, 복도가 빙글 돌면서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암도(暗道)가 나타났다.
『찾았어요!』
야숙진이 득의만면해서 소리쳤다.
암도는 도면에도 표시가 되어 있었다.
원래 원세조밀기를 남겨둔 사람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알고 자신이 탈출할 수 있는 암로(暗路)를 만들었었다.
그것은 모든 기관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지름길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그것이 완성됨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전체 공정이 완공을 앞두게 되자, 비밀이 새어나갈 것을 염려한 감독관들이 그 기술자들을 미리 죽여 입막음을 한 까닭이다.
그리고 그들을 죽였던 그 감독관들마저 마지막 완공후에는 죽어 새떼의 밥이 되었다.
그러니 그 암로는 원세조밀기에 남아있는 것 외에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그 비밀도면이 발견되어 원세조밀기에 첨부되었던 것일까.
암도는 좁았다.
두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기에는 무리가 따를 정도였다. 그렇다고 왕승고가 그녀를 품에다 품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왕승고가 앞서고 그녀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한 오장쯤 암도를 걸어갔을 때였다.
어둠 속에서 문득 소리도 없이 무슨 기척이 날아듦을 왕승고는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안력은 비상하여 그것이 암기류임을 알아보고는 나직한 기합과 함께 앞을 향해서 일장을 쳐냈다. 그의 일장은 가히 태산과 같은 잠경(潛勁)을 몰고서 앞으로 쳐나갔다.
뒤에 야숙진이 멋모르고 따라오고 있으므로 물러날 수도 없었고 피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전력을 다할 수밖에.
쾅!
『으악!』
맹렬한 폭음이 터져나오면서 비명이 일었다.
그리곤 갑자기 그들의 앞쪽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야숙진이 놀라 손을 들어 눈을 가릴 정도였다.
한사람이 참혹한 모습으로 널부러져 있었다. 즉사한 것이 분명한 형상이었다.
하지만 그가 넘어진 곳은 암도가 아니었다.
왕승고의 일장이 친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라, 암도에 있던 암문(暗門)이기도 했다.
그 일장에 암문이 열어젖혀지면서 암격을 가했던 자 또한 밖으로 퉁겨져 나가 죽어넘어진 것이다.
그런데.
쨍! 쨍그렁……
『으앗!』
『감히 물러나지 못할까!』
문이 열림과 동시에 밖에서 격렬히 싸우는 소리와 함께 호통이 뒤섞여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대체 이게…』
황급히 왕승고의 옆으로 다가와 밖을 내다본 야숙진이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바깥은 넓다란 석청(石廳)이었다.
한변이 대략 오장가량으로 사각형인 그 석청에서는 십여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생사결전을 벌이고 있었다. 군데군데 버려져 불빛을 피워올리고 있는 횃불 두어개가 죽은 사람에게 옮아붙어서 활활 타올라 기괴한 냄새가 주변을 온통 역겹게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싸우는 사람들은 생사의 갈림길에 처한 상황이라서 감히 한눈을 팔지 못했다.
석청에는 왕승고가 나온 암도를 제외한다면 따로 세개의 통로가 있었다.
난데없이 벽이 무너지면서 그가 나타남을 보고 사람들은 놀란 빛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공자님! 으악!』
누군가가 소리치다가 비명을 질렀다.
『고운(高韻)!』
왕승고는 그를 알아보는 천마와 같이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왕승고를 알아보고 그를 불렀던 흑의인은 정규와 함께 온 수하고수였는데, 그는 이미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왕승고를 바라보다가 뒤에서 검을 휘두른 자의 손에 의해 심장이 꿰뚫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 그를 공격한 암습자는 왕승고의 일격에 피를 뿌리며 날아가 맞은편 벽에 세차게 머리를 박으며 떨어져버렸다.
『고운,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일행은 다 어디가고 너 혼자 만이야?』
왕승고가 그를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저, 저는…』
고운이 숨을 헐떡였다.
암도는 그야 말로 보보살기(步步殺氣)요, 처처함정(處處陷穽)이었다. 상대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정규와 그 일행은 계속해서 속수무책 당하기만 했다.
어디가 어딘지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날아드는 암습, 게다가 조금만 잘못하면 바닥이 꺼지고 옆의 벽에서 창날이 튀어나와 사람을 산적꿰듯이 뚫어버리고 마니 이런 상황에서는 전진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정도였다.
거거산(去去山)이라, 그나마 발동한 기관에 의해 고운은 일행 둘과 함께 떨어져 암도를 헤매다가 간신히 여기에 이르렀지만 암습….
『으악!」
비명이 일었다.
고운을 부축한 왕승고를 공격하려던 자가 얼굴을 감싸쥐고서 훌렁 나가떨어졌다.
야숙진이 왕승고의 뒤에서 손을 내렸다.
왕승고는 숨을 거둔 고운의 눈을 감겨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쓰러져 죽은 사람을 태우고 있는 역겨운 횃불로 인해 드러나 있는 석청, 그의 앞에서는 여전히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한무리가 있었다.
털옷에 몽고복장을 한 자들 다섯, 그들은 왕승고의 손에 죽은 자와 그를 덮치려다가 야숙진의 암기에 맞아 죽은 자와 같은 일행인 듯했다.
그외 라마 둘이 있었고 회색옷을 입은 자도 하나 있어 그들과 어울려 싸우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것은 고운을 비롯하여 일곱.
「손을 멈추어라!』
왕승고가 소리쳤다.
하지만 누구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몽고족 다섯의 무공은 사납고도 신랄(辛辣)하여 회색옷을 입은 자를 사경에 몰아넣고 있었다.
라마 둘은 왕승고가 나타나면서 한쪽 구석으로 물러나 눈치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회색옷을 입은 자의 무공은 높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더구나 그는 이미 중상을 입어 왕승고가 소리칠 때는 피할 길도 없이 벽에 몰린 상태였다.
검이 날아들었다.
쨍!
날카로운 음향이 일면서 그를 향해 날아들던 검이 퉁겨져 나갔다.
왕승고가 어느새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검을 빼지도 않고 손에 쥔 검으로 몽고족 둘을 격퇴시킨 왕승고가 그를 보면서 물었다.
『노야의 수하냐?』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왕승고의 뒤에서 대한 둘이 대도를 휘두르면서 달려들었다. 흉포한 기세였다.
『물러나라!』
왕승고가 그들을 돌아보면서 질타했다.
『으악!』
동시에 합창하듯이 터지는 비명.
그들의 손에서 대도가 장난감처럼 부러지면서 날아갔다. 검광이 번뜩이는 사이에 그들이 피를 뿌리면서 쓰러지고 있었다.
검을 격발(擊發)한 왕승고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범과 같이 무섭게 나머지 몽고족 대한을 향해서 덮쳐갔다.
검광이 햇살과 같이 빛났다.
그것은 단순히 불빛에 반사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몽고족의 대한들로서는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공을 수련한 그들도 그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놀랍고도 빠르고 막강한 검세.
그들은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검을 쳐들어 앞을 가리면 뒤로 물러나려 했다.
쨍강!
날카로운 금속성.
『으악!』
『으아악!』
두 마디의 비명과 피보라가 일었다.
왕승고의 검을 막던 대도가 장난감처럼 뚝뚝 부러져 나가고 그들이 피를 뿌리는 것이다.
왕승고는 사정없이 손을 쓰고 있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을 야숙진은 놀란 빛으로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를 만난 이래로 저렇듯 무섭게 살인하는 왕승고는 본 적이 없었던 그녀였던 것이다.
『누구의 수하냐?』
왕승고가 나직이 입을 열어 물었다.
그의 검 끝에 마지막으로 남은 몽고대한의 목젖이 걸려 공포로 걸떡거리고 있었다.
묻는 왕승고의 음성은 나직하다.
하지만 그 기세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는 무서운 불꽃이 일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그가 부축했던 고운의 가슴에서 흐른 피가 묻어 있는 것이다.
『홀가적의 수하예요. 백랑기(白狼旗)에 속한 자들이에요. 기병인 다사특비룡기(多斯特飛龍旗)와는 달리 암습과 싸움에 능한 자들이죠』
야숙진이 말했다.
그 순간, 털옷을 걸친 그 몽고인이 야숙진을 발견하고는 놀라 눈을 꿈벅거렸다.
『호, 혹시 야…!』
『흥!』
냉소가 터졌다.
동시에 단말마의 비명이 그 몽고인에게서 터져나왔다.
야숙진의 손에서 푸른 빛이 번뜩임과 같은 순간이었다.
『……』
왕승고는 말없이 야숙진을 바라보았다.
『암습에 능한 자예요. 그런 놈들은 오래 상대하면 손해를 보게 되죠』
말과 함께 그녀는 눈길을 돌려서 한쪽 구석에서 놀란 빛으로 도주할까말까 엉거주춤하게 망설이고 있는 라마 둘을 보았다.
『활불도 여기 들어왔느냐?』
『……』
라마들은 불안한 눈빛만 굴릴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왜 말이 없어? 죽고 싶어?』
그녀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왕승고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벽에 기대 숨을 헐떡이고 있는 회색옷의 장년인을 보았다.
『노야의 수하냐? 일행은? 여긴 어떻게 왔느냐?」
『……』
그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그는 우리를 공격…』
문득 뒤에서 거의 듣기도 힘든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왕승고가 시선을 돌려보니 고운의 일행, 죽은 줄 알았던 그의 수하가 안간힘을 다해 말을 하고 있었다.
『괜찮으냐?』
왕승고가 한달음에 날아가 그를 부축했다.
『그, 그 자는 우리를 암습… 적…!』
더 이상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입에서 피가 솟구쳐올라왔던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서라!』
그의 눈을 감겨주면서 왕승고가 냉엄히 소리쳤다.
회의인이 그 순간에 소리도 없이 몸을 날려 석청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왕승고의 외침은 듣지 못한 듯 죽을 힘을 다해서 도주할 뿐이었다. 그의 입장으로서야 당연히 설 리가 없었다.
그러나 한가닥 바람이 그의 곁을 스치는 것 같은 순간에 그는 자신이 회오리바람에 휘말린 듯이 그렇게 바닥에 내팽개쳐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안면으로 지독한 통증이 치밀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석청으로 돌아와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구의 수하냐?』
왕승고가 얼음 같은 표정으로 그의 앞에서 물었다.
『이런…!』
그러나 다음 순간, 왕승고의 얼굴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회의인의 입에서 괴이한 웃음이 떠오르는가 싶은 순간에 그의 입에서 검은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머리를 늘어뜨렸다.
『독을 깨물었군요? 제법 독한 걸…』
야숙진이 옆에서 참견했다.
그가 잠시 회의인을 따라갔다 온 사이에 그녀의 앞에 있던 라마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
왕승고는 굳은 얼굴로 죽은 회의인을 바라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기억력은 과인(過人)했다.
그는 분명히 이 회의인이 노야가 보냈다는 그 중년인과 같이 왔던 일행중 하나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무엇 때문에 왕승고의 일행을 공격한 것인가?
단순히 오해에서?
말이 되지 않았다.
오해라면 이렇듯 간단하게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리지 않을 터였다.
이미 강호의 경험을 가진 왕승고다.
그는 이렇게 간단히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무섭게 철저한 조직에서 훈련된 사람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일 뿐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 이들이 노야의 수하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하지만 노야의 수하가 맞다면, 그들이 정규 일행을 공격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한다는 말인가.
『맙소사! 설마 했더니… 정말 여기에 대주천연환곤쇄진(大周天連環困鎖陣)이 펼쳐져 있군요!』
문득 옆에서 경악에 찬 야숙진의 음성이 들려왔다.
왕승고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믿기지 않는 듯 머리를 저었다.
『정말 이런 건축이 가능할 줄이야… 정말 내가 대주천연환곤쇄진을 보게 되다니…』
『대주천연환곤쇄진이 뭐요?』
『최고의 기관건축술이에요. 도면에서 조금 이상한 걸 느끼긴 했지만 설마 정말로 대주천연환곤쇄진이 펼쳐져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살아서 움직이는 건축물.
건축가라면, 기관매복을 설계하는 대가(大家)라면 누구라도 꿈에서도 소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상황에 따라 반응하는 건축물이다.
『그걸 지금 나더러 믿으라는 것이오?』
왕승고가 어이없는 듯 되물었다.
살아서 움직이는 건축물이라니?
그럼 이 대한지릉, 쿠빌라이의 무덤이 살아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물론, 생명을 가진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대주천연환곤쇄진은 살아 있는 것과 별다름 없어요. 일단 발동하면 전체의 기관이 발동하면서 모든 것이 한데 다 뒤섞여 버리게 돼요. 통로도 다 바뀌어버려요. 개방되었던 통로는 모두 막히고, 막혀있던 통로들이 개방되면서 전혀 다른 길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던 왕승고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는 보통 사람과 다른지라, 이미 그녀의 말속에 뭔가 다른 것이 숨어 있음을 알아낸 것이다.
『그럼 그 다른 길은?』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실제로는 모두 다 같은 곳으로 가게 돼요. 끝은 같다는 소리죠』
문득 그녀의 얼굴이 묘해졌다.
『이 무덤에 어떤 자들이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그곳에 가면 모두 다 볼 수 있게 되겠군요』
『거기에 뭐가 있소?』
『그건 나도 몰라요. 하지만 좋은 게 기다리지는 않겠지요. 이 기관은 무덤에 침입한 자들을 죽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니까요』
야숙진이 말했다.
결국 이 통로의 끝은 죽음의 함정이라는 소리.
왕승고는 석청의 통로를 무거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다른 길은?』
『찾아봐야겠어요. 이 무덤을 설계한 사람의 능력은 나보다 훨씬 뛰어나니… 그 기관을 파해(破解)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르죠』
문득 그녀는 코를 막았다.
『우선 여기를 벗어나고 봐요』
그러고 보니 역한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사람이 타는 냄새…
처음에는 역하던 그 냄새가 묘하게 구수하기도 했다. 사람이 타도 고기가 타는 그런 냄새가 나는가. 생각이 그에 미친 야숙진은 갑자기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입을 틀어막고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하지만 마음뿐, 허벅지를 다친 것을 잊어버린 터라 채 대여섯 걸음을 나가지 못해서 극통을 느끼면서 하마터면 거꾸러질 뻔했다.
그런 그녀를 부축하는 손이 있었다.
왕승고였다.
그는 바위와 같은 모습으로 그녀를 부축하고 있었다.
대체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그를 바라보는 야숙진은 자신의 감정을 설명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이 단순한 한 동작에서 대체 어떻게 이런 감동이 느껴지는 것일까.
『……』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들킬까봐 암중 입술을 물고서 다급히 눈길을 돌려야 했다.
야숙진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몸져 누울 중상을 입고 이렇듯 움직일 수 있음은 그녀가 내가고수인 까닭이다.
누워 있어야 할 그녀가 연달아 움직이자, 창백한 얼굴의 이마에서는 연신 식은땀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그러나 정작 그녀가 땀을 흘리는 것은 힘이 들어서가 아니라, 막대한 심력을 소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미 석청 전체에다가 가득 도형을 그리고 있었다. 하나를 그리고는 그것을 들여다 보면서 고뇌, 한참 후에 다시 도형을 그리고 고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이젠 흘러내린 땀방울이 코 끝에 맺혀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했다.
『좀 쉬는게 어떻겠소?』
보다못한 왕승고가 입을 열었다.
다시 도형을 그리던 야숙진이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이미 그녀의 눈은 전과 같이 날카롭거나 매섭다기 보다는 부드러워진 듯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확실히 보이는 것은 그녀의 눈거풀이 천근처럼 무거워 보인다는 것이었다.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거에요. 대주천연환금쇄진이 발동하면 일정시간 뒤에는 마지막 금제가 발동하게 되어 있어요. 그럼… 우린 이곳을 정말 묘자리로 삼아야하겠죠.』
말하던 그녀의 눈가에 문득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하긴, 이곳에서 남은 생을 같이 보내는 것도 나쁠 것 같진 않군요?』
말끝은 묘한 여운을 담았다.
그 말에도 왕승고의 태도는 여전히 반석과 같으리라, 반응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한 말이었다. 어둠이, 주위 여건이 그녀로 하여금 그러한 말을 서슴없이 하게 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래도 좋겠지만, 아직 우리에겐 할 일이 남아있으니 그도 쉽지는 않을 것 같군.』
뒤이은 왕승고의 대답에 멀뚱히 그를 쳐다보던 야숙진은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렇죠.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롭기에는 아직… 빠르겠죠? 자제(自祭)하기에는 아직 우린 젊고 할 일도 많이 남아있군요.』
자제란 스스로를 제사지낸다는 뜻이다.
그녀의 말은 아마도 귀거래사로 유명한 도연명의 자제문(自祭文)을 염두에 둔 것일터이다. 도연명이 죽던 그 해에 스스로 자신의 제문(祭文)을 쓴 것은 유명한 일화인 까닭이다.
그녀는 말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자명(自明)하다.
왕승고가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자, 그녀는 입을 열었다.
『가요!』
『어디로 말이오?』
『가지 않으면 계속 여기 있을 건가요?
『그럼 갑시다.』
왕승고가 고개를 끄덕이자 새삼 야숙진은 그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워낙 그런 사람이려니 하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물어볼 터이다.
단서를 발견했느냐고.
그런데 그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정말 곰이네.'
암중에 머리를 흔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조잘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우리는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 어쩌면 기관이 발동하기 전에 현실(玄室)에 들어갈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어요.』
『그곳은 괜찮겠소?』
『괜찮겠죠. 기관을 설계한 사람이 무덤을 통째로 무너뜨리려고 했다면 몰라도, 그 무덤의 주인은 스스로의 무덤이 통째로 무너지는 것을 원치는 않았을거에요. 최소한 그 현실은 보존할 수 있도록 만들었겠지요. 다만…』
문득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밖으로 나갈 통로가 있을는지, 그게 문제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그때였다.
왕승고의 안색이 굳어졌다.
『무슨 일이에요?』
야숙진이 긴장된 얼굴로 물었다.
왕승고가 한손으로 그녀를 부축하고 한손으로 천리화통을 들고 있게 된다면 그야말로 손발을 묶어 놓는 꼴이 되는 터라 천리화통은 야숙진이 들고 있었다. 그녀는 왕승고의 움직임이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그의 굳어진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명소리요』
짧게 대답한 왕승고는 이어 다시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이 대한릉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온 것 같소』
『그런 것 같군요…』
야숙진은 말끝을 흐렸다.
마음 속에 거리낌이 있는 까닭이다.
『어디로 가야 하오?』
『이 통로에서 좌측으로 꺾어지면 다시 두 갈래 길이 나타나야 해요. 그럼 왼쪽으로 가는 길에 암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갑시다』
말과 함께 야숙진은 자신의 몸이 구름을 탄 듯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천리화통의 불빛이 깜박거리는 가운데 세찬 바람이 그녀의 귓전을 스쳤다.
사오장 거리를 가로질러 좌측으로 꺾어지자 정말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왕승고는 서슴없이 다시 좌측으로 들어갔다.
『여기쯤일 거 같아요』
야숙진이 벽을 쳤다.
양쪽 석벽에는 길게 사냥을 하는 벽화로 장식되어 지금껏 새로 나타났던 통로와는 조금 달랐다.
그녀가 벽을 침과 동시에 끽끽 소리와 함께 벽이 한사람 들어갈만한 공간으로 열렸다.
『으아악…!』
그런데 천만 뜻밖으로 그 문이 열리자 안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길게 메아리치면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건?』
『여기도 이미 누구에게 발견된 모양이군』
『그럴 리가…』
야숙진이 믿기지 않는 듯 중얼거리는 순간에 다시 다급한 비명소리와 함께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시다!』
왕승고는 그녀와 함께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어둠이 천리화통의 불빛에 따라 밀려났지만 왕승고의 전진에는 거침이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만은 불빛이 없어도 어느 정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의 안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통로는 정말 끝없이 뻗어 있는 듯했다.
하지만 비명소리는 순간적으로 가까워졌다.
『이건?』
앞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본 왕승고의 안색이 달라졌다.
중원인의 복색이었다.
무사차림의 그는 가슴에 칼을 맞고 죽어 있었는데, 한사람이 아니라 그와 비슷한 차림을 한 사람은 서너명이나 되었다.
몽고인에 이어 라마, 거기에 이젠 중원인까지….
대체 그처럼 비밀리에 움직인 일이 어떻게 되어 이렇게 커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개자식들…』
앞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호통과 함께 비명, 격렬한 싸움소리가 뒤를 이었다.
왕승고의 신형이 다시 날았다.
불빛이 가물거렸다.
바닥에 떨어진 횃불이 벽을 그슬리면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불빛을 받으면서 서너명의 사람들이 격전을 벌이고 있다. 일렁이는 희미한 불빛에 드러난 그들의 싸움은 마치 한바탕의 춤사위를 보는 듯하지만 그들의 앞에 쓰러져 있는 피투성이의 주검들을 보자면 이것이 죽음을 부르는 사망무(死亡舞)임을 실감케 한다.
『으악!』
한사람이 칼을 맞고 거꾸러졌다. 하지만 그 칼을 휘두른 사람은 옆에서 찔러온 창에 옆구리를 찔리고는 괴로운 신음을 흘려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수중의 칼을 휘둘러 그 창을 잘라버리고는 사나운 호랑이처럼 달려들어 그 자의 목을 쳤다.
피분수가 솟구쳤다.
『그만!』
한사람이 날아들었다.
『좋아, 얼마든지 오너라!』
사내가 고함치면서 칼을 휘둘러 새로 나타난 사람에게로 덮쳐갔다.
사내의 칼에는 살기가 무섭게 이글거렸다.
『정대장, 나요!』
나타난 사람이 소리쳤다.
동시에 그는 자신에게로 덮쳐오는 사내의 대도를 막아냈다.
캉!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사내의 대도가 휘청, 하면서 공격했던 사내가 반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두어걸음 뒤로 물러났다.
『으악!』
사내의 뒤에서 비명이 일었다.
사내가 나타난 사람, 왕승고를 공격하는 사이에 그와 싸우고 있던 자가 뒤에서 정규를 암습하다가 바람처럼 날아간 왕승고에 의해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공자님?』
반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던 사내, 정규가 그제서야 왕승고를 발견하고 떨리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어떻게 된 거요?』
그가 혼자임을 본 왕승고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정규의 모습은 참혹했다.
머리는 헝클어져 산발이었고, 전신 여기저기에는 자신의 피인지, 남의 것인지 모를 피가 묻어 혈인을 보는 듯했던 것이다.
망나니가 보고 놀라 도주할 모습이었다.
『무,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
왕승고를 확인한 정규가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다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옆을 지키지 못해서… 더구나, 같이 온 수하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저 혼자만 이렇게 남았으니 무슨 면목으로…』
그는 말끝을 맺지 못했다.
『다… 죽었단 말이오?』
『중간에서 헤어져서 확언은 할 수 없지만… 속하를 따른 다섯명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의 얼굴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매복자들이 있습니다. 놈들은 어둠 속에 숨어 있다가 공격을 하는데, 기관을 이용하여 정말 대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굳은 얼굴로 잠시 침묵을 지켰던 왕승고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생각하오?』
왕승고가 뒤에 선 야숙진에게 물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다.
『이해하기 어렵군요.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누군가가 이 무덤의 기관을 조종하여 들어온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는 뜻인데… 그럴 수는…』
야숙진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였다.
『으악…!』
앞쪽에서 다시 비명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상황을 알아봐야 할 것 같소』
왕승고가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알아볼 필요 없을 것 같아요』
문득 야숙진이 입을 열었다.
『……?』
그녀를 본 정규의 눈이 묘하게 변했다.
갑자기 여자가 된 그녀를 일순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야숙진은 그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금 전부터 들여다보고 있던 벽을 쳤다. 그러자 벽에서 벽돌 하나가 튀어나오면서 그 자리에 그 벽돌만한 틈이 생겼다.
그리고 그 틈 안에는 두개의 황동고리가 달려 있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중 하나를 잡아 돌렸다.
끼릭, 끼릭…
돌이 마주치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석벽에서 일어나더니 그들 앞에 있던 석벽 전체가 밑으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리곤 어둠이 물러갔다.
그들의 앞에는 거대한 광장이 하나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둠에 잠긴 그 광장은 묘하게도 붉은 빛이 일어나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맙소사…』
야숙진이 광장을 둘러보고는 신음했다.
그 광장은 그들이 처음 보았던 그 가묘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광장을 둘러싼 호장하(護莊河)와 같은 거대한 물길이 있다는 것뿐….
물.
하지만 그것은 물이 아니었다.
당연히 물길일 수도 없었다.
활활 타오르고 있는 물길을 본 적이 있는가.
어둠을 밝히면서 지옥의 혓바닥처럼 넘실거리면서 들끓는 불길이 천천히 꿈틀거리면서 흘러가고 있는 광경을…
그것은 물길이되, 또한 불길이었다.
『저, 저게 뭡니까』
후끈후끈한 열기를 느끼자 정규가 부지중에 실성을 흘려냈다.
『용암(鎔巖)이로군… 여기에 화산지맥이 있단 말인가?』
왕승고가 나직히 중얼거렸다.
『이곳이 음양하(陰陽河)로군요…』
옆에서 야숙진이 신음하듯이 중얼거렸다.
『음양하?』
『그래요, 물이면서 또한 불이니 음과 양이 혼돈(混沌)되어 있는 모양… 이곳이 음양하가 아니라면 또 무엇이 음양하이겠어요? 정말 이곳을 설계한 사람은 대단하군요. 용암을 끌어들이다니… 어떻게 이런 공사를 할 수 있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아요.』
그녀는 기가 질린 듯 했다. 거대광장의 형상은 지난번 가묘와 거의 흡사했다.
하지만 다른 점은 가묘가 있던 제단이 중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광장의 끝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고, 그 제단의 아래쪽으로는 병사들의 모습이 아니라 각 지역의 대표들로 보이는 사람의 석상들이 제단을 향해서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늘어선 자들을 굽어보면서 제단의 위에는 거대한 석인(石人) 하나가 용좌에 앉아 있음이 보였다.
그의 옆에 사나운 기세로 웅크리고 있는 이리, 청랑왕의 형상이 보인다.
그가 누구인지는 자명하다.
쿠빌라이 칸.
원의 세조인 홀필열(忽必烈)인 것이다.
그는 죽어서도 제왕이고 싶었던 것일까.
보통 사람의 두 배 정도의 크기로 된 그의 석상은 용좌에 앉아 자신의 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제왕(帝王)으로서 천하를 내려다 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군림성좌(君臨星座)라고 새겨진 그가 앉은 거대용상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또 있었다.
하늘이 그의 뒤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찬란한 별들의 무리가 그의 뒤에서 솟구쳐 올라가 천장을 온통 뒤덮었다.
장관(壯觀)이었다.
마치 별이 쏟아지는듯한 광경이었다.
한쪽 면만 벽이고 나머지 삼면은 용암으로 둘러싸인 이 광장으로 들어서면 바로 그러한 압도적인 느낌을 받도록 설계된 듯 하였다. 여기에 들어서는 사람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군림성좌를 발견하는 순간에 자신을 향해서 쏟아지는 별의 무리를 보면서 경탄(驚歎)할 수밖에 없도록 그 형상은 절묘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제단을 둘러싼 거대한 용암이 뿌려내는 붉은 빛으로 인해 더욱 괴이한 느낌으로 자리했다.
『건너가야 될 것 같소?』
왕승고가 물었다.
『그래야 할 것 같군요…』
야숙진이 나직히 중얼거렸다.
말은 쉽지만 그것은 정말 쉽지 않았다.
용암의 강, 야숙진이 말한 저 음양하의 너비는 무려 십 장에 가까워 보였다.
가히 까마득한 거리다.
『건너갈 수 있겠어요?』
이번에는 야숙진이 물었다.
『바깥이라면 가능할런지도 모르겠는데…』
왕승고가 말끝을 흐렸다.
여기서 건넌다는 것은 그냥 다리를 건너는 것과는 다르다. 건너편으로 갈 수 있는 어떤 것도 눈에 띄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십 장을 날아 건너는 것과 저렇듯 불타오르고 있는 용암의 위를 날아가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더구나 강과 같이 저렇게 넓은 용암의 강을 만들어놓은 것은 웬만한 거리를 새처럼 날아갈 수 있는 존재를 이미 감안한 것이 분명했다.
『달리 건너갈 방도는 없겠소?』
왕승고가 물었다.
『찾아보겠어요. 어딘가 길은 있을 거예요. 하지만… 시간내에 그 길을 찾지 못하게 되면 우리가 있는 곳으로 용암이 쏟아지게 될 거예요』
『여기로 말이오?』
왕승고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용암이 흐르고 있는 음양하를 바라보았다. 공포스러운 불꽃을 이따금 피워올리면서 천천히, 전신을 꿈틀거리면서 흘러가기는 하지만 별다른 위협처럼 보이지는 않는 음양하였다. 통로의 문에서 음양하까지의 거리는 빙 둘러 거의 비슷했다. 삼사장 가량.
『아마 기관이 발동하면 우리가 있는 곳이 가라앉으면서 용암이 넘쳐흐르게 될 거 같아요. 그럼 피할 곳이 없게 되겠죠』
야숙진의 말을 듣고 보니 왕승고 등이 서 있는 곳은 용암 건너편보다 낮았다. 겨우 용암이 넘치는 것을 막고 있는 정도의 높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만에 하나 야숙진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이곳은 사지(死地)가 될 터였다. 그 어떤 무공의 고수라도 용암의 바다에서 헤엄을 치면서 살아날 사람은 없는 까닭이다.
……
시간이 조금 흘렀다. 야숙진은 계속 뭔가를 계산하고는 한참 고뇌한 다음에 석벽 이곳저곳을 더듬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곳이 매우 덥고 또한 상당히 건조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시간이 더 지난다면 숨쉬기조차 그리 쉽지는 않을 듯했다. 그 모양을 바라보고 있던 정규가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던지 암중에 왕승고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저 여자가 정말 그입니까?』
왕승고는 말없이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끽끽…. 야숙진이 한쪽 석벽에서 뭔가를 건드리자, 그들이 들어온 곳과는 다른 쪽의 석벽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앉으며 새로운 통로 하나가 생겨났다.
『으악!』
통로가 생김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그곳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리고는 한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굴러나왔다.
『이겸!』
그를 보자 정규가 놀라 소리쳤다. 피투성이로 안으로 뛰쳐들어온 사람은 다름이 아닌 그들의 길 안내역을 맡았던 이겸인 것이다.
『대, 대장님…』
정규를 보자 바닥에 쓰러졌던 이겸은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바로 그때, 그의 뒤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득달처럼 달려나오면서 그의 머리를 수중에 들린 금강저(金剛杵)를 휘둘러 쳐내렸다. 그것이 머리를 치면 머리가 으깨진 두부가 될 것은 불문가지다.
쨍!
날카로운 음향이 일었다. 어느새 왕승고가 날아가 그의 항마저를 검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웅?』
항마저를 휘두른 것은 라마, 그는 상반신을 벌거벗은 차림이었는데, 왕승고가 경병기인 검으로 자신의 항마저를 막아낸 것은 물론 자신으로 하여금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게 한 것에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그의 입에서는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야 했다. 왕승고의 검세에 밀려 뒤뚱거리며 물러나는 그를 쫓아간 정규가 대도를 휘둘러 단숨에 반쪽을 내버린 것이다.
『개자식이 감히…』
『견딜 수 있겠나?』
왕승고가 이겸을 부축하고는 물었다.
『저, 저보다 동료들을… 그들이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적이 너무 강해서 견디기 어려울…』
정규는 더 이상 듣지도 않고 득달같이 몸을 날렸다. 하지만 왕승고가 더 빨랐다. 그는 찰나간에 정규를 가로지르며 새로 생겨난 통로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정규에게 들리는 말.
『이곳을 부탁하오』
『음…』
정규는 신음을 흘리면서 그 자리에 멈추었다.
이미 자신의 능력이 왕승고에 한참 미치지 못함을 아는 까닭이다.
『어떻게 된 거냐?』
그는 내심 한숨을 쉬곤 이겸을 부축하면서 물었다.
왕승고는 바람처럼 통로 안으로 날아들었다.
은은히 싸움 소리가 들려왔다.
생각할 것도 없이 그곳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은 가히 바람과 같이 찰나간에 십여장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한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서너명이 쓰러져 있고 대여섯명이 어울려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자신의 수하였다.
그는 라마들의 포위 공격에 거의 쓰러지기 직전, 게다가 벽으로 몰려 이젠 피할 곳도 없는 상황이었다.
『멈춰라!』
왕승고가 고함치면서 그곳으로 덮쳐갔다.
쨍쨍!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불꽃이 튀면서 라마들이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평소라면 그들을 물리치는 것으로 끝낼 그였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수하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이미 본 그였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피를 뿌리며 쓰러져 있는 수하가 둘이나 있었다.
그의 검이 뿌연 검빛을 흘리며 그들을 쫓았다.
『으악!』
『크으으…』
잇달아 신음과 함께 피가 뿌려졌다.
막고자 해도 막을 수가 없었다.
왕승고의 검은 형체가 없는 것과 같았다.
분명히 저(杵)를 들어 막고 곤(棍)을 들어 막으며 계도(戒刀)를 휘둘러 후리쳤건만, 그 순간 검은 미끄러지듯이 그들의 가슴을 베어내고 목줄기를 끊었다.
마치 춤을 추듯 왕승고의 검이 지나면서 피를 흩뿌려냈다.
차원이 다른 무공이었다.
『멈추어라!』
몽고어의 고함이 터지며 웅장한 경력이 왕승고를 덮쳤다.
거대한 손바닥이 왕승고를 향해 눌러오고 있었다.
밀종의 유명한 대수인(大手印)이었다.
그것을 보고도 이미 살기가 동한 왕승고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냉소를 터뜨리며 그는 한걸음 나서면서 그 막강한 경기를 향해서 일검을 찔러냈다.
검이 마치 송곳처럼 그 경기를 파고들었다.
대수인 일격을 쳐낸 것은 이미 왕승고와 일면식이 있던 자로서 극도활불의 곁에 있던 자였다.
그는 그제서야 왕승고를 알아보고 놀란 빛을 떠올렸지만 때는 이미 늦은 다음이었다.
왕승고는 조금의 용서도 없이 검을 휘둘러 그 라마의 손을 잘라버렸다.
비명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는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검을 휘둘러 그의 가슴을 찔렀다. 피가 튀면서 그가 마치 거대한 망치에 두둘겨 맞은 듯이 나가떨어졌다.
왕승고는 이미 살기를 일으켜 검강을 운용하고 있어서 일대 고수가 아니라면 누구도 그의 일검을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괜찮은가?』
왕승고는 벽에 기대 헐떡이고 있는 수하를 보면서 물었다.
『겨, 견딜만 합니다.』
『불빛이 보이는 쪽으로 가 정대장과 합류하라. 다른 사람들은?』
『저를 제외하고는…』
그가 말끝을 흐렸다.
바로 그때였다.
『호, 혹시 와, 왕공자가 아니십니까?』
더듬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뜻밖의 소리인지라 고개를 돌린 왕승고의 눈에 벽에 기대앉아 피투성이가 된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중년인이 보였다.
『저, 정말 왕공자이시군요. 저는… 개방의 삼십육천강 중의 하나인 이주(伊鑄)라 합니다.』
그의 말은 더욱 뜻밖이었다.
개방이라니?
여기에 왜 개방의 사람이 있단 말인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어둠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지만 그러고 보니 그의 얼굴은 화산에서 얼핏 본 것도 같았다.
『사공방주도 오셨소?』
잠시 말이 막혔던 왕승고의 질문은 말 그대로 핵심과도 같았다. 그 한마디에 각종 의문이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모시고… 왔습니다』
중년인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삼십육천강은 호방십이개와 함께 개방의 정예세력이었다. 그가 이 머나먼 곳까지 혼자 올 리는 없을 것이고 보면 개방의 방주가 왔다는 것은 이미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왕승고는 말문이 막혔다.
개방의 방주까지 왔다는 것인가?
대체 어떻게 알고?
오늘 이 쿠빌라이의 무덤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일까.
그처럼 극비리에 움직였던 일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으게 된 것인지 왕승고는 일시지간에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멍청히 서 있는 시간은 아주 찰나간이었다.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오로지 한가지뿐이었던 까닭이다.
「설마…」
그는 내심 신음했지만 그가 생각에 잠길 시간은 별로 많지 않았다.
『방주는?』
『모, 모르겠습니다. 안으로 들어와서 기관매복과 기습에 걸려 헤어진 까닭에…』
이주라는 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그의 상처는 가볍지 않았지만, 그의 상처를 돌봐줄 만한 시간은 왕승고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이 쥐새끼 같은 놈, 감히…!』
쩌렁한 고함과 함께 날카로운 격돌음이 그의 뒤에서 들려왔던 것이다.
그것이 정규의 것임을 아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가닥 바람이 일면서 그 자리에서 왕승고의 신형이 사라졌다.
『와, 왕공자!』
다급한 이주의 외침이 뒤를 따랐지만 그를 세울 수는 없었다.
음양하가 흐르는 그 광장에 있는 정규 일행은 성한 사람이 거의 없어 만약 강적이 찾아들었다면 어려운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바람과 같이 암도를 가로지르고 있던 왕승고의 신형이 문득 누가 잡아당기라도 한 듯이 휘청, 옆으로 퉁겨져 나갔다.
식은땀이 쭉 흘렀다.
어둠 속에서 칼날이 옆으로 세워져 있었다.
그것은 그의 목과 높이가 같아서 그가 특별한 안력을 지니지 않았더라면 다급히 몸을 날리고 있던 그는 목을 그 칼날에다 들이민 꼴이 되어 여지없이 목이 날아가고 말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가 위기의 순간을 모면하자, 어둠 속에서 가볍게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 옆으로 세워져 있던 칼날이 뒤집히면서 소리도 없이 그를 따랐다.
어둠 속인지라 거의 보이지도 않는 움직임이었다.
쨍!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어둠 속에서 불꽃이 일었다.
자신을 습격한 검을 퉁겨낸 왕승고는 노하여 수중의 검을 앞으로 쳐내면서 덮쳐갔다. 그의 검에서 희끄무레한 달무리와 같은 검광이 일어나 빛을 뿌렸다. 검기(劒氣)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쨍그렁!
그의 검세에 부딪힌 상대의 검이 퉁겨져 나갔다. 아직까지 이곳에서 만난 사람중 그의 검 일격을 감당한 사람이 없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상대의 무공은 놀라운 것이 분명했다.
어둠 속에서 일대격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몇초가 지나지 않아 나직한 신음이 상대에게서 흘러나왔다.
「이건?!」
그에게 상처를 입힌 왕승고는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상대는 그에게 상처를 입고 반대편 통로로 도주했다. 비록 어둠 속이지만 왕승고는 상대가 어둠 속에 동화되기 쉬운 검은색 옷을 입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나이는 30대 중반?
하지만 그가 놀라 그 자리에 선 것은 상대의 무공이 자신과 비슷함을 느낀 까닭이다. 무공의 높이가 비슷한 것이 아니라, 노수(路數)가 비슷한 것이다.
『천부무공?』
왕승고는 신음하듯이 중얼거렸다.
그가 마지막에 펼친 일격은 이미 살의(殺意)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누구도 피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의 검법은 이미 구대문파의 정수(精髓)를 스승인 한호국의 도움으로 가라앉혔으며, 거기에 더해 천부신공을 터로 삼고 황창의 검무를 수습하여 누구도 넘보기 힘든 경지에 있었다.
그러한 일격을 피해낸 상대의 무공은 바로 천부무학을 기반으로 한 것임을 그는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반대편으로 도주하자 그 뒤를 따르려던 왕승고는 다시 싸움소리와 정규의 다급한 고함이 들려옴을 듣고는 그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발을 한번 구르고는 몸을 날렸다.
『이 개자식들이!』
정규는 고함치면서 대도를 휘둘렀다.
고함소리만으로는 악마라도 단숨에 쫓아낼 듯 하지만 통로를 막고 있는 그는 고함과 같은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연신 뒤로 밀리고 있었고 몽고의 무사들 서넛이 안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이겸이나 다른 사람, 그리고 야숙진까지 누구도 힘이 될 수 없는 상황이니 형세는 다급하기 이를 데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상황에서 날아든 검광은 놀라운 위력으로 몽고무사들을 베어넘겼다.
『공자님!』
정규가 안도의 빛으로 소리쳤다.
『괜찮겠소?』
그의 가슴과 옆구리에서 다시 피가 솟구치고 있는 것을 본 왕승고가 미간을 찡그리면서 물었다.
『견딜만 합니다』
고개를 끄떡인 왕승고는 몽고무사들이 나온 통로를 쳐다보았다.
처음 이 광장으로 통하는 통로는 왕승고 일행이 들어온 통로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이겸이 들어온 통로 외에도 이젠 두군데가 늘어서 통로는 이미 네군데나 되었다. 어떻게 된 셈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모든 통로가 다 개방된 듯했다.
「이래서는 들어오겠다는 자들을 막을 수는 없겠군」
왕승고는 내심 신음했다.
다행히 몽고무사는 정규가 쓰러뜨린 하나와 그가 방금 베어넘긴 셋뿐이었지만 언제 어디로 적이 다시 나타날지 알 수가 없었다.
야숙진은 싸움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서 뜨겁지도 않은지 뚫어져라 용암이 흘러가고 있는 음양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왕승고의 눈길을 느낀 것인지, 벽을 더듬고 있던 야숙진은 시선을 돌려 그를 보았다.
『힘들겠소?』
왕승고의 물음에 문득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찾은 것 같아요』
말과 함께 그녀는 공력을 사용하여 벽 한쪽을 눌렀다. 힘주어 누른 벽은 천천히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냥 밋밋한 벽이 아니라, 정교한 기마도(騎馬圖)의 말머리였다.
돌이 마찰하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
득의에 찬 빛이던 야숙진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기관을 움직이는 열쇠가 분명한 장치를 움직였음에도,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거지…』
그녀가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너무 오래되어 기관이 작동하지 않는 것일…』
왕승고의 말은 채 끝나지 못했다.
끄끄… 끄르르릉…
길게 귓전을 울리는 소리가 음양하 쪽에서 들려왔던 것이다.
『……』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이 흘러간다.
꾸르르릉! 긴 음향을 끌면서 음양하 저쪽에서 석교(石橋·돌다리) 하나가 천천히 뻗어나오고 있음이 보였다.
꿈틀거리면서 흘러가는 용암의 저편에서 그 위를 가로지르면서 뻗어나오는 석교는 장엄(莊嚴)하기까지 했고 어떻게 보면 경이롭기도 한, 압도적인 분위기로 지하광장을 누르면서 천천히 팔을 내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석교는 오장가량의 거리까지 뻗어 오다가 멈추고 말았다.
결국 거기에 이르려면 오장이나 되는 용암의 불길 위를 날아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손님을 별로 반기지 않는군…』
그것을 보고 왕승고가 중얼거렸다.
『쉼터에 살아있는 사람이 들어올 것을 달가워할 사람은 별로 없겠죠. 그 어른도 당연했을 것이고… 저 거리라면, 갈 수 있겠죠?』
말을 받은 야숙진이 되물었다.
『충분하오』
왕승고의 말은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의 안색은 그렇지 못했다.
오장이란 거리는 전이라면 별게 아닐 수 있지만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실로 부담이 되는 거리인 까닭이다.
그것은 야숙진도 마찬가지였다.
『차례로 내가 도와주겠소』
그들의 기색을 알아차린 왕승고가 말했다.
그의 무공이라면 그들을 부축하고도 오장쯤의 거리는 충분히 날아 넘을 수가 있는 것이다.
『좋아요,그럼어서가요! 시간이 별로 없어요』
야숙진이 왕승고에게 초조한 빛으로 재촉했다.
음양하가 묘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다리가 생김과 함께 꾸륵, 꾸륵 소리를 내면서 잔잔했던 움직임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좋소. 갑시다』
왕승고가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 손을 놓아라!』
냉랭하고도 날카로운 날이 선 음성이 들려온 것은.
돌아본 야숙진의 안색이 돌변했다.
한 사람이 천천히 통로를 통해서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고, 그 검에서는 핏방울이 점점이 그를 따라 흘렀다.
그의 뒤를 따라 몽고무사들이 소리없이 밀려들었다. 얼핏 봐도 스무명은 넘는 것 같았다.
살기가 지하광장을 덮었다.
『우린 다시 만났군?』
그 사람이 싸늘히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
왕승고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하면 너를 만날 수 있을까 많이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스스로 찾아와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군 그래』
나타난 사람, 홀가적이 차갑게 중얼거렸다.
그는 음산한 눈빛으로 왕승고의 팔에 허리를 맡긴 야숙진을 쏘아보았다.
『언제까지 놈과 같이 있을 작정인가?』
그의 음성에는 날이 서 있었다.
야숙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은 내 일이니,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
『으핫하하…!』
갑자기 홀가적이 크게 웃었다.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대원제국의 부활을,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 신명을 바치고 있는 내가 가장 위대했던 칸의 무덤이 중원의 개에게 도굴되는 것을 보고만 있으라는 것인가?』
그는 싸늘히 웃으며 다시 말했다.
『놈이 좋은가?』
『당신이 감히 그런!』
홀가적이 냉소를 터뜨렸다.
『네가 누군지 알고도 놈이 너와 같이 있을까?』
그는 싸늘한 눈길로 왕승고를 바라보았다.
『네 곁에 있는 여자가 누군지 아느냐?』
『북원의 공주, 야숙진』
왕승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짧게 대답했다.
그 말에 놀란 것은 홀가적보다 야숙진이 더 했다.
『어, 어떻게?』
놀란 그녀의 입에서 묘한 물음이 흘러나왔다.
왕승고를 제외하고는 그녀의 신분이 밝혀지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야숙진이라니!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야숙진, 본인이었었다.
왕승고가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니….
그녀는 스스로가 철저하게 왕승고를 속이고 있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것이 당연했다.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녀의 신분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녀가 그처럼 발빠르게 움직여서 영호중을 처리하고 그대신 그 자리에 들어설 것임을, 그녀가 그처럼 기관매복학에 조예가 뛰어날 것을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 것인가.
설사 의심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능력을 보고는 의심을 풀어야 했을 터였다.
그런데…
『어, 언제 알았던 거죠?』
야숙진이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능에 들어서기 직전에』
『어, 어떻게?』
야숙진의 눈이 커졌다.
왕승고의 얼굴에 미미한 웃음이 스쳐갔다.
『지금 그런 것을 알아서 무엇하겠소?』
『알면서, 알면서도 나와 같이 있었다는 건가요?』
아무래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야숙진이 머리를 흔들며 다시 물었다.
그녀와 왕승고의 거리는 불과 서너 걸음에 불과했다. 방금 전까지 왕승고가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필요했었소』
왕승고의 말에 그녀의 얼굴이 이즈러졌다.
그랬던가, 내가 오히려 이용을 당했던 것인가.
상대를 속이는 것이 아니고 상대에게 속았다는 느낌이, 분하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뭔지 모르게 가슴이 허전해지는, 설명하기 힘든 느낌이 그녀를 쳤다.
『그리고 당신이 쿠빌라이의 후예라면, 당신에게도 이 무덤을 돌아보고 장보를 가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었소』
왕승고의 말이 이어졌다.
『?』
그 말은 뜻밖이라 야숙진은 얼떨떨한 빛으로 왕승고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으로 보자면 왕승고의 이러한 말은 그야말로 바보 같은 짓이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인 것이다.
『미친 소리! 흐흐… 그런 감언이설로 이 자리를 모면해보겠다는 것인가?』
듣고 있던 홀가적이 냉소를 터뜨렸다.
『모면?』
왕승고가 그를 보았다.
『설마 이 자리에서 아직도 살아남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화산에서 도주한 것이 누군지 그새 잊어버린 모양이군』
왕승고의 대꾸에 홀가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데 문득 옆에서 정규가 그제서야 알아봤다는 듯이 손뼉을 치는 것이 아닌가.
『맞아! 이제보니 그때 상갓집 개처럼 죽어라고 꽁지를 감추고 내빼던 그 백련교의 가짜개로군! 난 또 누구라고… 몽고에 왔더니 별 개새끼가 다 설치고 다니네 그려』
지독한 욕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의 말은 홀가적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른 것이 분명했다. 왕승고만 아니었더라면 그는 지금쯤 중원무림의 맹주로서 예정대로 대업을 진행시키고 있을 터였다.
그의 눈에서 살기가 드러났다.
『모두 죽여라』
그가 망설임없이 싸늘히 소리쳤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저런! 그 말은 좀 이른 것 같은데?』
어디선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히 왕승고 쪽에서 들려온 것은 아니었다.
한 사람이 천천히 반대편 통로에서 걸어나오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너는?』
그를 보자 홀가적의 얼굴이 돌변했다.
『으하하… 저런, 저런! 그렇게 반가우냐?』
나타난 사람이 홀가적을 향해 크게 웃었다. 오만방자한 듯 보이는 그의 태도는 당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협개 사공관, 개방의 방주가 나타난 것이다.
『형님?』
그를 알아본 왕승고가 입을 열었다.
『좋아, 여전하군! 내가 늦게 온 것은 아니겠지?』
협개 사공관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그를 알아본 홀가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흐흠… 화산에서 미친개 한마리를 때려잡던 주역들이 여기 다 모였군! 음? 넌 누구지? 생긴 모양이 그때 놀라 도망갔던 미친개하고 닮았는데?』
협개 사공관이 홀가적을 보면서 생각을 하는듯한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모욕도 그런 모욕이 없었다. 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도 불끈 주먹을 쥐게 됨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흐흐… 좋아, 좋아! 제발로 무덤을 찾아들었으니 모두 이 자리에서 화장(火葬)을 해주마』
홀가적이 음산히 중얼거렸다. 저 꿈틀거리는 용암의 강으로 떨어진다면 화장이 아니라 뼛가루도 찾지 못하게 될 터였다.
『저런, 미친개 눈에는 지금 상황이 어떤지 보이질 않는 모양이군. 하긴 개눈에 뭐가 보일까. 똥밖에 보이는 게 없을 건데… 불행히도 지금은 그걸 보여줄 수가 없군 그래. 본 방주가 여기 들어온 이래 먹은 게 없어서…』
홀가적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이러한 도발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협개 사공관의 뒤로 한무리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냄을 보고 그는 발작을 억제해야 했다. 개방의 고수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치열한 격전을 치렀음을 의미하듯이 여기저기 선혈로 범벅이 되어 과연 그것이 자신의 피인지, 다른 사람의 것인지조차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그들이 나타나자 자연히 기세는 흉흉할 수밖에 없었다. 협개 사공관의 출현으로 상황이 그에게 유리하다고 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 셈이었다. 그는 당연히 혼자가 아니었고 개방의 주인인 방주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개방의 정예(精銳)라 할 수 있었다. 당연히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판에, 홀가적의 앞에는 가장 껄끄러운 상대라 할 수 있는 왕승고가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이제 누가 화장을 당할 것인지 한번 의논해볼까?』
협개 사공관이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
홀가적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바로 그때였다. 상황이 다시 바뀐 것은… 움마니반메훔… 움마니 반메 후우움…. 길게 메아리치는 괴기한 울림. 한 무리가 천천히 통로 하나를 통해서 광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극도활불!」
그 무리를 본 왕승고의 안색이 굳어졌다. 나타난 것은 정말 극도활불이었다. 이미 암도(暗道) 안에서 라마들을 만난 다음이라,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정작 그 본인이 나타나자 상황은 간단치 않은 것이다. 그 와중에도 극도활불은 네명이 어깨에 멘 교자에 타고 있었고 그를 옹위하는 라마의 숫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아서 홀가적의 무사 이십여명과 개방의 고수 이십여명을 합친 것보다 많아 보였다.
……
갑자기 광장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새로운 강자가 출현한 셈이었다.
『어서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야숙진이 한걸음 나서며 입을 열었다. 라마들의 옹위를 받으며 느긋하게 교자에 앉아있던 극도활불은 그 비대한 얼굴을 조금 찡그리는 듯했다.
『상처를 입었소, 공주? 누구에게?』
『기관에 걸렸어요』
그의 시선이 왕승고를 향함을 보고 야숙진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기관? 공주의 능력으로 말이오?』
극도활불은 묘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그때, 정규가 참지 못하고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년 같으니! 이제보니 다 연극이었었구나. 저 중놈하고 붙어서…』
첫댓글
잘읽어 보구 갑니다
즐건한주 힘차게 열어 가셔요^-^
감사 합니다
기쁜 시간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