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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9일 오늘의 역사
2014년 미국 미주리 주 퍼거슨에서 마이클 브라운 총격 사건(Shooting of Michael Brown) 발생.
2010년 서울 행당동 버스 폭발 사고
2010년 8월 9일 오후 4시 57분경에,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2동 서울 지하철 5호선 행당역 인근에서 신호대기 중이던 대원여객 소속 서울시내버스 241B번 CNG 버스의 연료 탱크가 폭발한 사고이다. 이 사고로 인하여 탑승자 17명이 부상을 입었고, 1명은 발목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다 당시 이 사고는 차량의 노후화에 따른 천연가스통 손상으로 인한 밸브 오작동으로 인해 일어난 사고로 밝혀졌다. 이후 구형 차량을 시작으로 동일 운행노선의 2002년 이전형식 차량들까지 모두 신형 차량으로 교체되어 241B번은 전 차량이 신형으로 운행하게 되었다. 이 사고로 인해 전국적으로 자일대우상용차 차량에 대한 불신이 심해져 기존의 자일대우상용차 차량을 출고하던 업체들이 현대자동차를 출고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2007년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240억$ 긴급 공급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업체들의 부도위기가 증가해 글로벌 유동성 수축으로 금융시장의 불안 커지자 금융시장의 신용경색확산 사전 차단 목적, FRB는 이어 10일 380억$ 13일 20억$ 16일 50억$ 등 다섯 차례에 걸쳐 총 880억$ 투입, 17일에는 재할인율 0.5%p인하
2005년 미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 14일만에 무사귀환
2005년8월9일 오후 9시 11분(이하 한국 시각·현지 시각은 오전 5시11분) 우주왕복선의 흰색 선체는 동트기 전 칠흑같은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와 활주로에 내렸다. 캘리포니아주 모하비 사막 에드워즈 공군기지였다.
디스커버리호의 랜딩 기어가 지표면에 내려앉자, 3000㎞ 넘게 떨어진 휴스턴의 지휘센터에서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선장 에일린 콜린스는 모니터로 “우리는 돌아왔다”고 인사를 전했다. 지휘센터 엔지니어들은 화면에 비친 선원들에게 “친구 여러분, 환영한다”고 화답했다. 8일부터 악천후로 착륙 시도가 네 차례 연기되는 우여곡절 끝이었다. 우주왕복선이 지구에 무사히 돌아온 것은 2003년 2월 컬럼비아호 폭발 참사로 귀환에 실패한 이후 30개월 만에 .
디스커버리호는 당초 플로리다주 케이프 커내버럴 우주센터에 도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 기상 악화로 착륙 시각은 9일 오후 6시 7분, 오후 7시 43분 등으로 계속 연기됐고, 결국 착륙 장소까지 에드워즈 기지로 바뀌었다.
앞서 대기권 진입과정도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디스커버리호는 대기권 바깥에서 위아래를 뒤집은 채 비행하다가, 오후 8시 6분 지구 재진입을 위해 선체의 앞뒤를 180도로 돌린 채 엔진을 2분간 점화해 감속했다. 이어 선체를 제 방향으로 되돌리고 시속 2만6900㎞로 대기권에 들어왔다. 대기권 진입시 섭씨 1650도의 마찰열이 발생했다. 지난 3일 우주 공간에서 수리한 선체 외부 단열재의 과열로 인한 폭발 가능성이 우려됐으나,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디스커버리호의 착륙이 잇따라 늦춰진 이유는 일반 항공기가 악천후시 착륙할 때와 같은 사고 가능성 때문이었다고 NASA는 밝혔다. 디스커버리호는 지난달 26일 케이프 커내버럴 우주센터에서 발사됐다. 28일 칠레 상공 국제우주정거장(ISS)에 도착해 장비와 보급품을 전달했다. 지난 3일엔 우주 공간에서 선체를 수리하는 업적도 거뒀다.
캘리포니아주 경찰서에는 디스커버리호가 마하 20 이상의 엄청난 속도로 대기권에 진입하며 발생시킨 소닉붐(음속폭음)을 폭발음으로 오인한 주민들의 신고 전화가 빗발쳤다.
2005년 상해임정기관지 창간호 발견, 천안 독립기념관을 통해 공개
2003년 브라질 한 교도소서 죄수 84명 땅굴 파서 탈옥
2003년 ‘백담사 만해마을’ 준공
만해사상실천선양회(총재 법장 불교조계종총무원장)는 9일 오후 3시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1136―5 일대에 조성된 ‘백담사 만해마을’ 준공식을 가졌다.
스님·시인·독립운동가로 한국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 선생의 사상과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만해마을에는 2000여 평의 부지에 만해문학박물관·만해사(寺)·만해학교·문인의집·심우장(尋牛莊) 등 5동의 현대식 건물과 만해광장, 만해평화지종(萬海平和之鍾), 만해상(萬海像)이 들어섰다.
충남 홍성 태생인 만해는 3·1운동으로 3년 옥고를 치른 후 백담사에 와서 시집 ‘님의 침묵’을 탈고하는 등 심신이 지칠 때면 이곳을 찾았다.
스님이자 독립운동가 시인이었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 선생은 1925년 여름, 시집 ‘님의 침묵’을 탈고하였다. 그로부터 78년이 흐른 올여름, 이 근대문학사상 불후의 명시집 산실에 그의 호를 딴 만해마을이 완공됐다.
백담사 만해마을은 설악산 자락의 십이선녀탕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강원도 인제에서 속초로 가는 46번 국도를 달리다 십이선녀탕 계곡 입구에 이르면 ‘백담사 만해마을’이라는 입간판이 보인다. 건물들의 앞뒤에는 내린천 상류인 북천과 설악산 자락인 안산이 자리해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산을 등지고 물이 앞에 놓임)의 지형이다.
만해마을에 들어서는 사람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입구 왼쪽에 위치한 ‘심우장’(尋牛莊·지상 2층)이다. 만해의 만년 거처였던 서울 성북동 심우장의 이름을 따온 이 건물은 문인·종교인·학자들이 함께 이 시대의 정신과 사상, 문학을 토론하는 곳으로 마련됐다.
심우장 뒤편에는 만해마을의 정문인 ‘경절문’(徑截門)이 자리하고 있다. 두 장의 큰 돌판을 기역(ㄱ) 자로 이어붙인 듯한 현대적 감각의 경절문에 들어서면 ‘만해학교’(지상 2층)와 ‘문인의 집’(지상 4층, 지하 1층)이 마주보고 있다.
다시 그 뒤는 만해마을의 중앙으로 ‘만해사’(萬海寺·지상 2층)와 ‘님의 침묵 만해광장’이 자리잡고 있다. 북천을 내려다보는 만해광장은 약 500~600명이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야외행사를 할 수 있는 반원형(半圓形)의 열린 공간이다.
만해마을에서 만해의 정신적 고향인 백담사까지는 약 3㎞ 거리로 바로 이어지는 도로가 최근 만들어졌다. 만해는 20세 때 처음 백담사에 들어와 인연을 맺었고, 잠시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25세 때 다시 백담사로 돌아와 이듬해 출가했다. 또 3·1운동으로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난 후 다시 백담사로 내려와 시집 ‘님의 침묵’을 탈고하는 등 심신이 지칠 때면 백담사를 즐겨찾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희미해지는 만해와 백담사의 인연은 1996년 신흥사 회주 오현(五鉉) 스님의 주도로 만해사상실천선양회가 발족하고 만해상·만해축전이 잇달아 만들어지면서 다시 부각됐다.
2001년 요트맨 김현곤, 태평양 1만5000km 단독횡단에 성공
바람과 돛에 의지한 채 태평양 1만5000km를 단독 횡단한 요트맨 김현곤(41)씨가 130일간의 항해 끝에 2001년 8월 9일 오후 11시 부산 수영만에 도착했다. 대한해협의 기상악화로 마지막까지 악전고투를 벌여야 했던 김씨는 예정시간보다 4시간 늦게 부산에 도착, “바다를 더 소중히 생각하게 됐고, 더 사랑하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태평양 단독횡단은 지난 1988년 김원일씨에 이어 두 번째, 단독 세계일주는 1994년 강동석씨가 유일하게 성공했다. 2001년 4월 2일 전장 10m짜리 요트 ‘무궁화호’에 몸을 싣고 캐나다 밴쿠버항을 출발한 김씨는 폭풍우에 돛이 찢기고, 무전기가 고장나고 식수탱크마저 파손되는 사면초가 속에서 배터리를 아껴 바닷물을 식수로 만드는 워터메이커를 3시간씩 돌려 겨우 식수를 확보, 항해를 계속할 수 있었다. 김씨는 “하와이 인근 해상을 지날 때 우리나라 참치잡이 선주협회로부터 무전기 등 장비와 식량을 지원받고, 일본을 거쳐 부산까지 오면서 하루 두 번씩 무전교신을 하면서 기상정보를 얻어 횡단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지난 1981년 부경대(전 수산대) 전자통신학과에 입학하면서 요트와 인연을 맺은 김씨는 20여년간 부산 금정산을 오르내리며 굶기와 버티기 등 체력훈련을 쌓고, 막노동과 선물가게를 운영해 5만달러의 자금을 모아 지난 3월 캐나다로 건너갔었다.
1999년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 임명
1999년 `히노마루-기미가요`가 일본 국기-국가로 확정
1998년 원로 소설가 최태응씨 별세
원로 소설가 최태응(81)씨가 9일 오전 9시(현지시각) 샌프란시스코 근교 자택에서 별세했다.
1930년대 한국 휴머니즘 문학의 기수로 일컬어지는 소설가 최태응은 ‘문장’에 단편소설 ‘바보 용칠이’ ‘봄’ ‘항구’로 24세에 등단했다.
1916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공간’에서 이태준과 채만식을 만났다. 채만식은 1936년, 은율까지 내려가 최태응에게 소설 지도를 해준 스승이요, 선배요, 형님 같은 존재였으나 6·25 직전 이리에서 폐결핵으로 49세에 병사하고 말았다.
최태응은 평화신문·자유세계·문화세계·문예 등에 작품을 발표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1957년 경북문학가협회가 창립되고 백기만이 회장이 됐다. 사무국장 박훈산은 그 이듬해 격월간으로 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문학계(文學界)’를 창간했는데, 최태응은 여기에 단편 ‘사랑의 힘’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최태응이 향토에 남긴 마지막 작품이었다.
1956년 대구를 떠나 서울에서 생활하던 최태응은 1979년 막내딸만 수원에 남겨두고 장남과 장녀, 그리고 차녀가 있는 뉴욕으로 이민을 갔다. 그 이듬해 샌프란시스코 변두리로 옮겼고, 거기서 이보석씨를 만났다. 환갑을 넘겨 재혼한 그는 “두 식구 사는 데는 불편이 없는 오두막살이나마 하나 장만해 지내고 있다”며 지인들에게 근황을 알리기도 했다.
1996년 권영민 서울대 교수가 서울 태학사에서 100여 편의 작품을 담은 ‘최태응 문학전집’(전3권)을 발간했다. 그리고 그 해 6월 샌프란시스코의 현지 한인신문사가 출판기념회를 마련했다. 17년간 현지에서 문학지도를 해온 최태응은 출판기념회에서 여러 문인들에게 “향도요 등불”이라는 평을 받았다.
1993년 일본 호소카와 연립내각 탄생(자민당의 1당 지배 붕괴)
7당 1파로 구성된 호소카와 연립내각이 1993년 8월 9일 성립됨으로써 38년간 지속해 온 자민당 단독정권이 붕괴되고 45년 만에 연립정권이 탄생했다.
일본에서는 1955년 사회당이 통일되고 보수당인 자민당이 탄생한 이래 세계자본주의국가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1당지배가 지속되어 왔다. 이 배경에는 동서 냉전구조와 함께 일본경제의 고도성장으로 국민들이 보수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의 장기화가 지속되면서 자민당 정권의 부패가 심해져 록히드 사건(1976), 리쿠르트 사건(1988), 가네마루 부총재의 거액탈세사건(1993) 등이 일어나자 국민들은 자민당은 물론 기성야당도 불신하며 새로운 무소속 의원들을 지지했다.
이런 와중에 1992년 호소카와를 당수로 하는 일본신당이 결성됐다. 게다가 1993년 6월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 불신임안이 가결됐고 중의원이 해산되면서 자민당이 분열돼 신생당, 신당사키가케가 탄생했다.
1993년 국방부, 향토예비군설치법과 예비군훈련 지침 개정안 마련
1993년 벨기에 국왕 알베르2세 즉위
1992년 황영조,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우승
1992년 8월 9일 온 국민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날아온 낭보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올림픽 피날레를 장식한 마라톤에서 황영조(22)가 금메달을 목에 건 것이다.
1936년 전 손기정이 일장기를 달고 베를린올림픽을 제패한 바로 그날이었다. TV를 본 국민들은 황영조가 몬주익 언덕에서 일본의 모리시타를 따돌리는 장면에서 특히 흥분했다. 이를 악물고 오르막길을 달리는 황영조를 보며 덩달아 주먹을 불끈 쥐었다 . 메인스타디움 트랙을 돌며 관중에게 두 손을 번쩍 들며 환호하던 그는 2시간13분23초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하자마자 쓰러졌다. 관중석에서 그 현장을 지켜본 손기정 옹은 눈물을 글썽이며 `위대한 후배`와 감격의 포옹을 했다.
풀코스 도전 4번째 쾌거를 이룬 황영조는 명륜고 재학 때 정봉수 코오롱 감독의 눈에 들어 `대기`로 자랐다. 1991년 유니버시아드에서 우승하고 1992년 한국선수론 처음 2시간8분대에 진입, 한국 마라톤의 대들보로 꼽혔다. 그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획득, 명예와 부를 한꺼번에 누렸다. 그의 고향인 강원도 삼척시 초곡리에는 당시 감격을 고스란히 담은 `황영조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1991년 유엔 안보리 전체회의에서 남북한의 유엔가입권고결의안 만장일치 통과
1991년 스리랑카 정부군-타밀 게릴라 전투 사망 261명
1990년 유엔 안보리, 이라크의 쿠웨이트합병은 `법적 타당성이 없으며 무효`라고 선언
1985년 북한-프랑스 합작 건설한 평양고려호텔(45층) 준공식
1984년 일본, 미 핵미사일 적재함 기항 불허 밝힘
1984년 소설가 이기영 사망
1982년 이란 근해서 한국화물선 삼진배너호 피격 침몰 사망 13명
1979년 YH여공 신민당사서 농성
1979년 8월 9일 서울의 YH무역 여성근로자 170여 명이 회사운영 정상화와 근로자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다.
1970년대 초 수출순위 15위로 국내 최대의 가발수출업체였던 YH무역은 1970년대 중반부터 수출둔화와 업주의 자금유용, 무리한 기업확장 등으로 심각한 경영난에 빠져든데다 1975년 노동조합이 설립되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자 1979년 3월 폐업을 공고했다. 이에 노동조합은 회사정상화 방안을 채택, YH무역을 회생시키기 위해 여러 면으로 노력하였으나, 회사측과 정부 당국이 시종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자 4월 13일부터 장기농성에 돌입했고, 8월 9일 도시산업선교회의 알선으로 사회적 파급효과가 큰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감행했다.
그러나 정부당국은 치안상의 이유를 들어 8월 11일 새벽 2시 경찰 1000여 명을 신민당사에 투입, 농성중이던 근로자를 강제해산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여성근로자 1명이 추락, 사망하였고 10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신민당원 및 취재기자들도 폭행당했다.
이 사건은 1970년대의 일대 여성근로자쟁의 사건으로서, 사건 직후 야당 및 여러 민주화운동세력이 공동전선을 형성, 반유신투쟁에 나서는 계기가 되어 10·26사태의 도화선이 되었다.
1974년 피카소특별전, 덕수궁에서 개막
1974년 닉슨 미국 대통령 사임 - 포드 부통령 미국 제38대 대통령에 취임
1972년 국기에 대한 맹세 제정
1972년8월9일 문교부(지금의 교육인적자원부)가 각급 학교에 국기에 대한 맹세를 시행토록 시달했다.
이 날부터 전국의 학교와 관공서에서는 기존의 애국가 제창이나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외에 국기에 대한 맹세가 국민의례의 새로운 항목으로 추가됐다.
그보다 네 해 전 충청남도 교육위에서 문안을 만들어내 보급하기 시작했다는 국기에 대한 맹세는 유신시대와 5공화국 군사정권 시절을 거쳐 정치적 민주화가 사뭇 진전된 지금까지도 시행되고 있다.
그 법적 근거는 5공 시절인 1984년 2월21일 대통령령 제11361호로 처음 공포된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이다.
이 규정 제3조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에는 다음의 맹세문을 낭송하여야 한다.
다만, 국기에 대한 경례 중 애국가를 주악하는 경우에는 이를 낭송하지 아니한다고 전제한 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고 맹세의 내용을 밝혀놓고 있다.
1971년 중국, 핵금(核禁)세계정상회의 제의
1969년 정부, 개헌안 공고
1967년 제1차 한일각료회담
한국과 일본이 국교가 회복된 이래 처음으로 1967년 8월 9일 동경 영보관에서 제1회 각료회담을 개최했다. 한일각료회담의 주요의제는 한일양국관계의 전반적 검토, 최근 국제정세에 대한 양국입장설명, 양국경제현황설명, 경제협력문제, 무역문제, 조세문제, 농수산문제, 해군 및 선박차관문제 등이다.
한국의 장기영 부총리와 일본의 미끼(三木武夫)외상을 수석대표로 한 이 회담에서는 양국에서 각기 6명의 각료와 두차례의 개별회담을 비롯해 두차례의 전체회의, 그리고 문제별로 분과회의로 나뉘어 열렸다. 이번 회의는 지역적 협력체제의 유지강화를 위해 계속 협력한다는 기본관계원칙을 확인하고, 일본은 한국의 제2차 5개년계획 조기달성을 위해 2억달러의 민간상업차관을 새로 공여할 용의가 있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폐막했다.
1966년 제9보병사단(백구부대) 선발대 부산항 출발
1965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
1962년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 사망
독일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헤르만 헤세가 1962년 8월 9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로지 자기 실현의 길만을 걸어왔다.
남독일 뷔르템베르크의 칼프 출생으로 러시아 태생의 선교사인 부친과 목사의 딸인 모친에게서 금욕주의적인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러나 천성적인 자연아로서, 개성에 눈뜨면서 미래의 시인을 꿈꾼 헤세는, 신학교의 속박된 기숙사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그곳을 탈주, 한 때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 후 서점의 점원, 출판조합의 조수, 기계공장의 견습공 노릇을 하면서 그는 이웃이나 타인과의 따뜻한 조화를 갈망했다. 희망과 좌절 사이에 방황하던 그는 서점의 점원생활에서 안정을 찾는다.
그는 성실하게 근무하는 한편 밤이면 수많은 책을 읽었고 시와 산문을 썼다. 성서와 괴테의 ‘시와 진실’을 늘 곁에 두었다. 22세 때 그동안 써온 시를 묶어 ‘낭만의 노래’라는 시집을 출간하지만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해 발간한 시집 ‘한밤중의 한시간’은 릴케로부터 호평을 받아 문단의 관심을 끌었다.
정신적 유토피아를 묘사한 대작 ‘유리알 유희’로 1946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961년 소설가 계용묵 세상 떠남
1960년 라오스, 쿠데타 발생
1955년 소련군, 북한에 진주
1954년 발칸 군사동맹 조인(그리스, 터키, 유고)
1949년 동물행동과 학습과정을 연구한 미국 심리학자 손다이크 사망
1948년 전국에 수해 (사망316명)
1945년 미국, 일본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
1945년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 리틀보이라는 이름의 원자폭탄을 투하한지 3일만인 9일 인구 27만명의 나가사키에 이름 ‘뚱보’, 파괴력 TNT 2만 2,000t 상당의 플루토늄폭탄을 투하하여 74,000명 사망하였다
1945년 우리말 방송 개시
1939년 프랑코, 스페인 국가주석에 취임
1939년 소설가 이청준 태어남
1937년 제2차 상하이 사변 발발
1937년 춘사 나운규 사망
1937년 8월 9일 오전 1시25분, 춘사 나운규가 짧은 생을 마감하고 전설 속으로 사라졌다. 일생이 영화였고 영화가 일생이었던 35년이었다. 10대 후반에 고향인 함북 회령을 떠나 중국 간도와 시베리아 일대를 떠돌며 독립운동을 하다 1년6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나운규의 삶은 모두 영화에 바쳐졌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조선키네마에서 단역배우로 출연한 것이 영화 인생의 첫 출발이었다.
재능을 인정한 조선키네마가 나운규에게 기회를 줘 제작된 영화가 한국 영화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된 ‘아리랑’이었다. 감독·각본에 출연까지 한 사실상의 원맨쇼였다.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영화가 개봉되자 ‘조선 영화계의 자랑거리’라는 찬사와 함께 나운규는 명성과 인기를 한꺼번에 거머쥔다. 24세 때였다.
자신감이 생긴 나운규는 이듬해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에 나섰으나 첫 작품만 성공했을 뿐 ‘사랑을 찾아서’ ‘벙어리 삼룡’ 등 작품마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파탄의 길을 걷는다. 1936년 마지막 작품 ‘오몽녀’를 찍어 극찬을 받았으나 자신은 폐결핵 악화로 피를 토하고 있었다. 나운규는 분명 한국 영화사의 전설적인 존재였지만 아직까지도 그의 삶과 예술에 대한 기초 연구가 부족해 여러 이설이 제기되고 있다.
1936년 손기정 베를린올림픽서 마라톤 우승
제11회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한 손기정 선수가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함으로써 한국 남아의 기상을 세계에 알렸다. 손 선수의 이날 기록은 2시간 29분19초로 올림픽 신기록이었다.
그러나 손 선수의 가슴에는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가 달려 있었고 이름까지도 일본식인 `기테이ㆍ손(基禎ㆍ孫)`이어서 피지배민족의 서러움을 삼켜야 했다. `민족의 영웅` 탄생에 기뻐하던 동아일보는 1936년 8월 25일자에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게재해 27일 4차 무기정간을 당하기도 했다.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난 손 선수는 16세 때 중국 단둥[丹東]의 회사에 취직하여 신의주∼압록강 철교∼단둥에 이르는 20여리 길을 매일 달려서 출퇴근한 일화로 더 유명하다. 일찍이 마라톤에 소질을 보인 그는 1935년 올림픽 예선전에서 2시간 26분 44초의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그는 1986년 8월 17일 서독올림픽위원회로부터 우승 부상품이었던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를 반환받았다.
1933년 조선총독부 조선고적 명승 보물 천연기념물 보호령 공포
1933년 나치돌격대 스위스 바젤시 침입
1929년 김구 상해교민단장이 됨
1907년 화폐교환소를 탁지부에서 제일은행으로 이관
1907년 강화진위대 장병 봉기, 강화성 점령
1904년 일본, 러시아 포츠머드에서 강화협상 개시
1900년 소설가 현진건 출생
1898년 미국 마취전문의 콜턴 사망
1896년 최초로 어린이가 이해력을 획득하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스위스의 심리학자 피아제 출생
1894년 시인 오상순 출생
1889(조선 고종 26) 일기청 설치 『승정원일기』 편찬
1869년 독일사회민주당 창립
1776년 이탈리아 물리학자 아보가드로 출생
1631년 영국시인 존 드라이든(1631-1700) 태어남
378년 서고트족이 로마제국에 반란을 일으킨 아드리아노플 전투
서기 3세기에 북방의 게르만 부족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고향을 떠나 발트 해안을 따라 흑해 북방의 스텝지역으로 이주했다. 고트족이라 불리운 이들은 그곳에 거주하던 이란계 유목민족인 알란족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았다. 이들은 흑해로부터 발트해에 이르는 광대한 왕국을 지배했으며 조공을 바치는 수많은 부족들을 거느렸다.
그러나 374년과 375년에 훈족(몽골족의 일파인 흉노)의 갑작스런 공격으로 왕이 자살하고 왕국이 철저히 파괴되자 그들은 일부만 남고 나머지 모두 그곳을 떠나 로마 제국의 경계인 도나우강가에 이르렀다. 이들은 동로마 황제 발렌스의 허락을 받아 도나우강을 건너 트라키아에 머물렀다. 처음엔 이곳에서 로마 제국과 평화롭게 살았으나 생필품 부족에 반발, 반란을 일으켰다. 378년 8월 9일 이들은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로마 황제를 살해하고 로마 군대를 거의 전멸시키는 등 로마인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북방 민족이 로마 제국으로 본격 이동하게 된 것은 이 전투로부터였다. 이들은 단기간의 약탈 원정 후에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다시 동로마의 새로운 황제 테오도시우스와 화평을 맺었고 그후 다시 황제의 병사로 고용됐다.
117년 제13대 로마제국 황제 트라야누스 사망
로마의 속주 출신으로 최초의 황제가 된 트라야누스 로마 황제가 파르티아 원정을 모두 완수하지 못한 채 병에 걸려 로마로 귀국하던 중 117년 8월 9일 오늘날의 터키 가지파샤에서 눈을 감았다. 64세 생일을 한달 남짓 앞두고 20년간에 걸친 치세를 끝낸 것이다. 그는 눈을 감기 직전에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 황제로 지명했다.
간소한 화장이 끝난 뒤 원정에 동행했던 아내가 유골을 안고 로마로 돌아왔다. 대망을 가슴에 품고 동방 원정길에 나선지 4년여의 세월이 지나서였다. 귀국한 황제를 로마 시민은 장례식이 아니라 개선식으로 그를 맞이했다. 죽은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개선식은 869년의 로마 역사상 처음이었다.
53년 에스파냐 남부 이탈리카에서 태어난 트라야누스 황제는 군단장인 아버지를 따라 유대땅과 시리아 등지에서 군인으로 활약한 후 이른바 엘리트 코스인 회계감사관과 원로원, 법무관, 집정관을 역임했다. 92년에는 라인강 상류를 지키는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에 취임해 고지 게르마니아 속주 총독도 겸했다. 단명으로 끝난 전임 황제 네르바에 의해 후임 황제로 임명된 트라야누스는 선정으로 이른바 로마 5현제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도나우강 북쪽에 있던 다키아와의 2차에 걸친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으며, 오늘날에도 기술을 인정하는 석조 다리 `트라야누스 다리`를 건설했다. 많은 공공사업도 추진해 로마를 한층 더 발전시킨 현제였다. 특히 그가 사망하기 전에 파르티아 왕국을 점령함으로 로마의 국경선은 로마 건국이래 최초로 걸프만에까지 확대됐다.
117년 제14대 로마제국 황제 하드리아누스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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