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簡易集 제9권 / 희년록(稀年錄) 栗谷文集跋
文章。道之餘。詩又文章之餘。公之平生仁義之言。菽粟之文。其存而可傳者。如彼盛矣
문장이란 도(道)의 여사(餘事)요, 시는 또 문장의 여사이다. 공은 평생에 걸쳐 인의(仁義)에 관한 말을 남기고 숙속(菽粟)과 같은 문자를 저술하였다. 그것이 지금 저토록 성대하게 보존되어 후세에 전해질 수 있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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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愭, 『無名子集』, 文藁, 冊九,「殿策」 “臣竊瞷殿下天縱聖姿,日新睿學,沈潛乎經傳之旨,貫穿乎性命之奧,旣有以明夫天下之理。而和順積中,英華發外,餘事文章,超詣古昔,艱易奇順,隨處有法,宜可以致一世於實地之學、菽粟之文。”
신은 삼가 보건대, 전하께오서는 하늘이 내리신 성인의 자품과 날마다 진보하는 예학(睿學 임금의 학문)으로 경전의 지의(旨意)에 침잠하고 성명(性命)의 심오함을 꿰뚫어, 천하의 이치를 밝혔습니다. 화순함이 내면에 축적되어 영화가 밖으로 드러나, 여기(餘技)에 불과한 문장은 고금에 탁월하니, 간삽함과 간이함, 기굴함과 순순함이 곳곳마다 법도가 있습니다. 의당 실지(實地)의 학문과 숙속(菽粟)의 문장에 한 시대를 올려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등극하신 이래, 인재를 양성하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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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致遠 『孤雲先生文集』 권2, 「無染和尙碑銘 竝序」.
“復惟之。西學也。彼此俱爲之。而 入中國受學。則彼此同。爲師者何人。爲役者何人。豈心學者高。口學者勞耶。故古之君子愼所學。抑心學者立德。口學者立言。則 任安書。太上立德。其次立功。其次立言。 彼德也或憑言而可稱。是言也或倚德而不朽。可稱則心能遠示乎來者。不朽則口亦無慚乎昔人。爲可爲於可爲之時。復焉敢膠讓乎篆刻。”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건대, 중국에 들어가서 공부한 것은 피차 똑같다고 할 것인데, 스승으로 예우를 받는 자는 어떤 사람이고 그를 위해 부림을 받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어쩌면 마음으로 공부한 사람은 높아지는 것이고 입으로 공부한 사람은 수고로운 것인가. 그래서 옛날의 군자가 공부하는 것을 신중히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 보건대, 마음으로 공부한 사람은 덕을 세우고 입으로 공부한 사람은 말을 세우는 법인데, 저 덕이란 것도 혹 말을 의지해야만 일컬어질 수가 있고, 이 말이란 것도 혹 덕을 의지해야만 썩지 않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덕이 일컬어질 수 있게 되면 그 마음으로 공부한 것이 멀리 후세에까지 전해질 수 있고, 말이 썩지 않게 되면 그 입으로 공부한 것 역시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일은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때에 하는 것이니, 또 어떻게 감히 篆刻을 굳이 사양만 할 수 있겠는가.
♣無染和尙碑 :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
성주사 (聖住寺)에 주석했던 낭혜화상 (朗慧和尙) 무염 (無染, 801 ~ 888)이 입적하자 이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비석 전체 높이가 486.6㎝에 달하는 신라에서 가장 큰 비석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최고의 문장가인 최치원 (崔致遠, 857 ~ ?)이 비문을 지었고, 최인연 (崔仁兗, ? ~ ?)이 썼다. 낭혜화상이 입적하고 2년이 지난 890년 (진성여왕 4)에 비문을 지으라는 왕명이 있었지만, 비석 건립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대체적으로 924년에 세워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비문을 지은 최치원은 868년 12세의 나이로 중국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 7년 만에 당나라의 빈공과 (賓貢科)에 합격하여 관직 생활을 하였다. 특히 황소의 난 때 지은 『격황소서 (擊黃巢書)』는 명문으로 알려졌다. 29세 때 신라에 돌아와 관직 생활을 하였으나, 골품제에 기반한 신분 체제의 한계와 문란한 정치 상황으로 인해 결국 은둔의 길을 택하였고, 908년 이후 세상을 떠났다.
최치원이 지은 대표적인 비문을 사산비명 (四山碑銘)이라고 한다. 4개의 비석은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 쌍계사 (雙磎寺) 진감선사탑비 (眞鑑禪師塔碑), 초월산 (初月山) 대숭복사비 (大崇福寺碑), 봉암사 (鳳巖寺) 지증대사탑비 (智證大師塔碑)이다. 이 중 진감선사탑비와 대숭복사비는 최치원이 글씨도 썼다.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는 화려하게 만들어진 신라 석비의 전형을 보여줄 뿐 아니라,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에서 가장 긴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의 한자가 유입된 이후, 우리 땅에서 완벽하게 체화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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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彦瑱(1740~1766) : 요절한 천재 역관.
전기가 6편이나 있지만 이언진을 직접 만나보고 쓴 작가는 없어
관상과 달리 출세 못한 채 요절하다
박지원의 혹평에 충격, 병들어 죽기 전 원고 대부분 불태워
신분이 한어 역관인 이언진(李彦瑱, 1740~66)은 압물판사(押物判事)로
1763년 조선통신사 행렬에 따라갔다.
일본에서 문인들에게 환대를 받고 돌아 온 뒤 연암 박지원에게 자신이 지은 시를 보냈다. “오직 이 사람만은 나를 알아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암은 시를 가지고 온 사람에게 “이건 오농세타(吳儂細唾)야. 너무 자질구레해서 보잘것없어.” 하였다. 오농세타는 중국 오(吳)지방의 가볍고 부드러운 말을 뜻한다. 이언진이 명나라 말기 오 지방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유미문학을 본떴다고 비판한 것이다. 이언진은 노하여 “미친놈이 남의 기를 올리네.” 하더니, 한참 뒤에 탄식하며 “내 어찌 이런 세상에서 오래 버틸 수 있으랴.” 하고는 두어 줄기 눈물을 흘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언진이 세상을 떠나자, 연암은 자신이 젊은 천재를 타박한 것을 뉘우치며 「우상전(虞裳傳)」을 지어 주었다. 우상은 이언진의 자이다.
전기가 6편이나 있지만 이언진을 직접 만나보고 쓴 작가는 없어
소라이 학파의 중견학자 미야세 류몬의 필담집 『동사여담』에 실린 이언진의 초상. 계미사행 때에 일본 문인들이 조선통신사 수행원들과 주고받은 필담을 기록한 책이 30여 종 남아 있다.
이언진은 25세에 일본에 가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돌아온 뒤 조선에서도 이름이 알려졌지만, 2년 뒤에 병으로 죽었다. 일본에 가기 전에는 하찮은 역관이었기에 그를 만나본 사대부 문인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지었던 작품마저 불태워 버리고 죽어 그의 생애에 관한 자료는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도 여섯 명이나 되는 사람이 그의 전기를 지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를 만나본 작가는 한 명도 없다. 그가 남긴 시와 전해들은 이야기만 가지고 암중모색하며 그의 모습을 재구성해 낸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를 가장 잘 이해했다는 이덕무도 그의 전기를 지으며 왜어 역관이라고 기록했다. 일본에 간 역관이니까 왜어 역관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은 한어 역관이었다. 물건을 관리하는 押物判事로 따라간 것이다.
1763년 「조선통신사 행렬도」. 정사 뒤에 판사가 말을 타고 간다. 이언진은 압물판사였다.
아버지 李德芳이 문장이 뛰어난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관제묘(關帝廟)에 빈 뒤 이언진이 태어났는데, 그는 총기가 매우 뛰어나 눈길이 한 번 스치면 모두 이해했다. 문장이 뛰어난 아들을 원한 것을 보면 글을 잘하는 집안이었던 것 같은데, 아버지는 역과에 합격하지 못해 『역과팔세보(譯科八世譜)』 「합천이씨(陜川李氏)」조에 ‘생도(生徒)’로 기록되었다.
사대부 족보는 조(祖) · 부(父) · 자(子) · 손(孫)으로 내려오지만, 역과 합격자들의 친가 · 외가 · 처가 선조들을 기록하는 『역과팔세보』는 손자부터 아들 · 아버지 · 할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가며 기록했다. 이언진의 할아버지 이세급(李世伋)은 1717년 역과에 10등으로 합격하여 동지중추부사(종2품)를 지냈으며, 외할아버지 이기흥(李箕興)은 1714년 역과에 7등으로 합격해 절충장군(정3품)까지 올랐는데, 집안 대대로 청학(淸學), 즉 만주어를 전공했다.
이언진은 1759년 역과에 13등으로 합격했다. 그리 뛰어난 성적은 아니었다. 중국에 두 차례나 다녀왔지만 나설 기회가 없었다.
위항시인들의 시선집인 『풍요속선』에서는 이언진을 “파리한 모습에 광대뼈가 두드러졌으며 손가락이 길었다.” 고 묘사했는데, 마치 창백한 천재의 분위기가 연상된다. 이상적은 그를 두고 “총기가 뛰어나, 한 번 보면 잊지 않았다.” 했다. 이덕무는 “책 읽기를 좋아하여 먹고 자는 것까지 잊었다. 다른 사람에게 귀중한 책을 빌리면 소매에 넣어 가지고 돌아오면서, 집에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해 길 위에서 펼쳐보며 바삐 걸어오다가 사람이나 말과 부딪치는 것도 알지 못했다.” 고 기록했으니, 그는 타고난 천재일 뿐만 아니라 노력하는 천재였던 듯하다. 스승인 이용휴는 제자의 유고집 서문에서 이렇게 평했다.
생각이 현묘한 지경까지 미쳤으며, 먹을 금처럼 아꼈고, 문구 다듬기를 마치 도가에서 단약(丹藥)을 만들 듯했다. 붓이 한 번 종이에 닿으면 전할 만한 글이 되었다. 남보다 뛰어나기를 구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 가운데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었다.
먹을 금처럼 아꼈다는 말은 시를 쓰면서 표현에 꼭 필요한 글자만 썼다는 뜻이고, 단약을 만들 듯했다는 말은 불순물을 걸러내기 위해 여러 번 달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아쉬움과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생전의 활동은 1763년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가 있던 몇 달이 전성기였다. 그래서 박지원도 “일개 역관으로 한양에 살면서 이름이 골목 밖으로 난 적이 없고 사대부가 얼굴을 알지 못했으나, 하루아침에 이름이 바다 밖 만 리 먼 나라에 떨쳐졌다.”고 했다. 그때 그는 25세 청년이었다.
관상과 달리 출세 못한 채 요절하다
통신사 일행은 1763년 8월 3일 출발했으며, 쓰시마에서 출발을 기다리던 12월 1일에 이언진이 기행시 「해람(海覽)」을 가지고 서기들을 찾아갔다. 일행 486명 속에서 처음 개인적으로 인사한 것인데, 원중거는 이언진에 대한 인상을 그날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비점을 쳐서 돌려주었으니, 모두 기이한 재주이다. ‘해람(海覽)’이라고 제목을 지었는데, 험운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고, 대체로 시체(詩體)가 바르지 못했다. 그러나 그 기묘하고 현란함이 마치 장수가 바야흐로 무예를 펼쳐 뛰어남을 드러내는 듯했다. 이 같은 재주가 있으면서도 머리를 굽혀 역관에 종사하고 있으니 안타깝다.
험운을 썼다는 말은 표현이 생소하고 기교가 지나치다는 뜻인데, 처음 보는 일본의 모습을 장편시로 다 표현하려다 보니 자연히 그렇게 된 것 이다.
통신사 일행은 오사카까지 조선 배를 타고 가 육지에 상륙해 수군은 남겨 두고 사신과 수행원들만 육로로 에도에 갔다. 자연히 오사카에서는 체제를 정비하느라고 며칠 묵기 마련이었는데, 1월 22일에 손님이 워낙 많이 찾아오자 제술관 남옥은 오쿠다 쇼사이(奧田尙齊)라는 문인을 이언진에게 미루었다.
외당에 손님이 있으니, 나가서 접대해야겠습니다. 사역원 주부 이언진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조정에서 오랫동안 경사를 해설하고 고사를 잘 아니, 그대는 만나보도록 하십시오. 분명히 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남옥이 이날 만나 함께 시를 지은 일본 문인이 19명이나 되었으므로 한 사람쯤을 이언진에게 맡긴 것이다. 이언진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해박한 학식과 번쩍이는 시를 지어 일본 문인의 기억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월 23일과 25일에는 하야시 도안(林東菴)이라는 관상가가 객관에 들려 조선 수행원들의 관상을 보아 주었다. 이언진이 자신의 관상이 어떠냐고 묻자, “골격이 준수하고 학당(學堂)에 근본이 부족하지 않으니 크게 출세할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학당은 귓문(耳門)의 앞쪽을 가리키는데, 관상서인 『태청신감』에서는 학당을 총명지관(聰明之館)이라고 하였다. 귀와 눈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학당이 넉넉하면 문장을 떨치게 된다.
귀국한 지 2년 뒤에 이언진이 병들어 죽은 데다 아들마저 없어 양자를 들였으니 하야시 도안의 관상풀이는 틀렸지만, 조선 문사들과 필담을 나누며 한시를 주고받던 그가 이언진의 영민한 모습에 주목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러한 관상 이야기는 『한객인상필화(韓客人相筆話)』에 실려 전한다.
일본 문인들은 조선 문사들의 시를 얻고 싶어서, 음식을 싸 가지고 며칠씩 걸어와서 만났다. 명함을 들여놓으며 만나 달라고 신청한 다음에, 허락받으면 들어와서 인사를 나누고 필담과 시를 주고받았다. 하루에도 몇 명씩 만나고 몇 십 수씩 시를 짓느라고, 조선 문사들은 지치기 일쑤였다. 그러나 서기들은 그것이 임무였기에 피할 수 없었고, 서너 달 동안에 2,000수 정도 짓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언진이 일본 문인들에게 처음 접근해서 필담을 나누었던 대조루.
그러나 이언진은 한어 역관이었기에 바쁜 일이 없었다. 일본어 통역을 해야 할 필요도 없었고, 서기들처럼 의무적으로 일본 문인들을 만나 시를 주고받을 필요도 없었다. 그 대신에 자신이 만나고 싶은 문인이 나타나면 자기가 먼저 그에게 접근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시를 주고받았다. 서기들처럼 하루에 100여 수를 짓다 보면 천편일률적인 시가 나올 수밖에 없지만, 그는 어쩌다 짓고 싶을 때에만 지었기 때문에 개성이 번쩍이는 시를 지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이언진의 시를 받아 본 일본 문인들은 그를 가장 높이 평가했으며, 사신 행렬이 어느 도시에 들어가기 전에 그의 이름이 먼저 퍼졌다. 박지원은 「우상전」에서 그가 부채에 써 준 것만 해도 500개나 되었다고 했다.
박지원의 혹평에 충격, 병들어 죽기 전 원고 대부분 불태워
사상이 다양했던 일본 문인들은 성리학 일변도의 조선 문사들과 필담을 나누며 한계를 느끼다가, 명나라 고문파(古文派) 문인 이반룡과 왕세정을 숭상하는 이언진에게 흥미를 느꼈다. 정주학(程朱學)에서 벗어나 옛날의 말로써 경전을 해석하자고 고문사학(古文辭學)을 주장하는 조래학자(徂徠學者)들이 찾아와 송학(宋學)을 비판하자, 이언진은 “국법이 송유(宋儒)를 벗어나 경서를 설명하는 자는 중형을 내리니, 이런 일에 대해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하고 사양하면서 문장에 대해 논하자고 하였다.
구지현 박사는 「이언진과 일본 문사 교류의 의미」라는 논문에서 “필담 내내 이언진은 왕이(王李)로, (조래학자) 이마이 쇼안(井松菴)은 이왕(李王)으로 칭하는 것에서부터 양쪽의 견해가 이미 처음부터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하였다. 이언진은 고문처럼 쓰는 게 목적이 아니라 고문의 정신을 잘 체득하여 자기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이반룡이 아니라 왕세정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이언진이 앞서 지나왔던 곳을 돌아가는 길에 다시 이르자 그의 시집이 이미 출판되었다. 하지만 일본 문인들은 이제 그가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에 관심이 시들했다.
「가쓰 모토무라(勝本浦)」. 배 안에서 지은 시 「해람편」을 이언진이 쓰고, 제술관 남옥이 靑批, 스승 이용휴가 赤枇를 쳤다.
이언진은 사행에서 돌아온 이듬해인 1765년에 『일본시집』을 편집하고 머리말까지 썼지만 출판하지 못했다. 문장이 평범치 않다는 것을 본인도 알아, 병이 깊어 죽게 되자 원고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누가 다시 이 글을 알아주겠는가?” 하고 생각한 것이다.
같은해 박지원에게 품평을 구했다가 혹평을 당한 충격이 컸는데,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박지원은 “우상이 나이가 젊으니 부지런히 道에 나아간다면 글을 지어 세상에 전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고 변명했다. 기이한 것보다 정도에 힘쓰라고 권면한 것인데, “우상은 내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이언진의 아내가 불길 속에 뛰어들어 일부를 건져냈다. 그의 원고는 ‘피를 토하는 글’ 이라는 뜻의 嘔血草라고 불렸으며, 그의 유고집은 ‘타다 남은 글’ 이라는 뜻의 『松穆館燼餘稿』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이언진은 생면부지 사람들의 글 속에서 불우한 천재로 되살아났다.
♣ 『栗谷先生全書』, 卷38, 附錄, 「諸家記述雜錄」“崔簡易岦嘗曰。栗谷自少爲文。不甚著力。而文章出於天然。平正明快。眞所謂布帛菽粟之文也。 -出年譜草稾”
崔岦이 일찍이 말했다. “栗谷은 어려서 문장을 했는데, 공력을 들이지 않았으나 문장은 천연으로 나왔으며 평명정쾌하였으니 이것이 布帛菽粟之文이다.” 『栗谷先生全書』, 卷38, 附錄, 「諸家記述雜錄」“崔簡易岦嘗曰。栗谷自少爲文。不甚著力。而文章出於天然。平正明快。眞所謂布帛菽粟之文也。 -出年譜草稾”
♣崔岦의 문장 중시 견해 : 문장은 도학의 아류로 알고, 문장의 가장 높은 높은 평가가 숙속지문이던 때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崔岦이었다. 崔岦은 문장으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지만, 확실히 자신의 문장에 대한 신념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문장이 菽粟之文인 經學家의 문장이 아니라고 하였다. 程顥는 자신이 처한 북송대의 학술을 개괄하여 文章之學ㆍ訓詁之學ㆍ儒者之學의 셋으로 나눈 뒤, 儒者의 학문만이 ‘道로 나아가는 절실함’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崔岦은 ‘文章之文’도 성인의 글에 통한다면, 程顥가 말한 ‘玩物喪志’의 죄목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매우 조심스러운 異議 제기라고 할 수 있다. 沈慶昊, 簡易集 解題, 1999. 韓國文集叢刊 정호는 이단을 논외로 해 두고 당대의 학술을 문장지학(文章之學)ㆍ훈고지학(訓詁之學)ㆍ유자지학(儒者之學)의 셋으로 나눈 뒤, 유자의 학문만이 ‘도(道)로 나아가는 절실함’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그런데 최립은 ‘문장지문(文章之文)’도 성인의 글에 통한다면, 정호가 말한 ‘완물상지’의 죄목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 : 이규상 (李奎象 , 1727 ~ 1799)이 지은 사부(史部) 전기류(傳記類) 《한산세고(韓山世稿, 총47권)》의 제29권~제31권에
수록.
♣兪晩柱 : 유만주의 《흠영》은 그 자체가 소설에 대한 애모다. 소설에 대한 단순한 적바림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문집에는 소설의 출생 비밀과 가족 관계가 세세히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흠영》은 통원(通園) 유만주(兪晩柱, 1755~1788)의 일기로 영조 51년(1775)에 시작하여 정조 11년(1787)에 끝난다. 이 책에는 저자의 굉박한 독서 편력을 바탕으로 한 학문과 사상이 들어 있다. 우리 고소설사에서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지만 아직 그에 대해 소연히 아는 바는 없다. 그의 가계를 조금만 살피자.
통원 유만주는 경화 노론계의 인물로 명문거족인 기계(杞溪) 유(兪)씨다. 유만주는 유한준(兪漢雋, 1732~1811)과 순흥(順興) 안 씨(安氏)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는데, 5대조는 척화파로 유명한 충간공(忠簡公) 유황(兪榥)이고, 4대 조는 송시열의 문하생인 유명뢰(兪命賚), 증조는 현감을 지낸 유광기(兪廣基), 조부는 학문과 문학으로 이름난 유언일(兪彦鎰)이다. 부친 유한준은 1768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문장으로 명성이 있었으나 벼슬 운이 없었던지 겨우 음직으로 김포 · 부평 등지의 고을 원을 거쳐 형조 참의를 지냈다. 유한준은 16세에 부친을, 17세에는 형마저 잃어 아들 유만주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였다. 유만주 또한 아들 구환(久煥, 1773~1787)을 깊이 사랑했는데 아들이 열네 살에 요절하고 만다. 그는 깊은 상심으로 인하여, 아들이 죽은 다음 해 이승을 하직하고 아들을 따라간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서른네 살이었다.
이제 《흠영》으로 말머리를 돌려 보자. 유만주는 《흠영》에서 중국의 문학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의 고소설 비평에 진지한 관심을 보인다. 통원의 중국 문학사에 대한 인식은 해박하였다. 통원은 “당우(唐虞) 삼대는 경(經)의 시대요, 주말(周末)은 제자백가의 시대요, 한나라 위나라는 고문의 시대요, 당나라 송나라는 시문의 시대요, 원나라 명나라는 소설의 시대다”라고 아예 통사적으로 중국 문학사를 꿰뚫어 시대 구분까지 해놓을 정도였다.
책상물림치고는 소설에 대한 탄탄한 지식으로 무장하였기에, 그의 소설 비평 또한 진수를 유감없이 보여 준다. 이 《흠영》에서 ‘우리 고소설 비평사는 긴 숨고르기와 함께 소설 인식의 물꼬를 완연히 텄다’고 생각한다.
통원의 소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저술된 《흠영》은 두 가지 큰 의미가 있다. 첫째로 우리 고소설 비평의 폭을 일기 문학으로까지 확장시켰으며, 둘째로 우리 고소설 최초의 소설 비평 이론서라는 점이다. 물론 《흠영》 속의 소설 비평들은 18세기의 전후를 이어 주는 소설 비평어들의 가교 역할도 한다.
《흠영》의 두 번째 의의를 집중적으로 살펴보자. 통원의 《흠영》이라는 일기에 보이는 고소설 비평 중 거머당기어 짚어 볼 것은 소설에 대한 기원설과 소설의 정의, 그리고 소설 비평 용어 등이다. 소설에 대한 생각을 모람모람 모아 분석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놀랍다.
유만주는 소설의 기원을 불전(佛典) · 장자(莊子) · 우초(虞初) 세 가지로 고증한다. 모두 현재의 연구자들이 밝히는 중국 소설 기원설과 조금도 어그러짐이 없다. 당시 소설에 대한 기원을 이렇게 정확하게 지적한 것은 우리의 소설 비평에서 찾기 어렵다. 소설의 기원을 ‘야사(野史)’ 정도로 보는 것이 고작이었으니 말이다.
세 가지 설 중 ‘불전기원설(佛典起源說)’을 살펴보자. 유만주는 소설의 기원을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이 불전기원설, 즉 내전설(內典說)이다. 《흠영》 5에서 “소설은 한 글자나 한 격식이라도 내전(內典)에서 나오지 아니한 것이 없다. 내전이 아니면 소설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니, 소설가는 마땅히 내전을 신주와 제문처럼 하여야 한다(小說 無一字無一格 不出於內典 非內典不成爲小說 小說家當尸祝內典)”라고 하였다. 내전은 불교 서적이다. 소설과 불교 서적을 연결 지어 평한 것은 유만주의 견해가 처음이다. 하지만 그가 본 불경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또 불경과 〈서상기〉를 연결하면서 “나는 비로소 〈서상기〉 일부가 내전체임을 알았다. 내전은 게송 사이에 긴 글이 있고 〈서상기〉는 말에 잡박하게 글을 기록하였다. 그러니 서상기독법(西廂記讀法)과 내전의 설경(說經: 경전을 해설하는 일)은 같고 표면에 이름을 세운 것과 그 뜻을 펴 부연한 것이 또한 〈금병매〉 등 여러 책의 연원을 열었으니 내전과 소설은 실상 표리 관계다”라고 한다.
〈서상기〉는 중국 원나라 때의 희곡이다. 당나라 때 원진(元稹)이 지은 〈회진기(會眞記)〉에서 취재한 〈동서상〉을 희곡화한 소설로 장군서라는 청년이 최앵앵이라는 미인을 사모하여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런 소설과 불경을 연결 짓는다. 그는 또 “내전의 문장은 비록 간략하나 그 말이 자세하고 섬세하여 다시 남음이 없다. 이것이 흘러 후세에 소설의 조종(祖宗: 시조가 되는 조상)이 된 것 아닌가(內典文 雖簡而其辭 則委曲纖細 更無餘有 此所以流而爲後世小說之祖宗也歟)”라고도 하였다. 아예 내전이 소설이라는 확신이 담긴 말이다.
다음을 보면 그가 소설의 근원을 불경으로 잡는 더욱 구체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내전은 ‘무슨 인연 때문인가’와 ‘이렇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두 마디 말을 표지로 하며 그 아래에 섬세한 것을 기술하는 것이 많다. 소설가는 이 뜻을 꿰뚫어 왕왕 일을 서술하다가 간관청설(看官聽說)이라는 한마디를 삽입하니 분명히 이것은 내전으로부터 훔친 것이다.”
이 글에서 통원 유만주가 내전을 소설의 조종으로 여기는 이유를 분명히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무슨 인연 때문인가(以何因緣)”와 “이렇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所以者何)”라는 두 구절 때문이다. 이 두 구절은 불교의 인연설과 관련이 있다. 인연설이란 결과의 원인을 따진다. 여기서 하나의 이야기가 꾸며지고 이를 자세히 기술하다 보니 소설의 문체와 유사하다고 보는 논리다.
소설의 곡진한 글맛이 불경의 서사성(敍事性)과 연관된다고 이해한 통원의 식견이 놀랍다. 실례를 들자면, 《석가여래십지수행기(釋迦如來十地修行記)》 같은 것은 고려에 형성 · 집성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조선조에 유전되면서 〈금우태자전(金牛太子傳)〉, 〈선우태자전(善友太子傳)〉, 〈실달태자전(悉達太子傳)〉 등 10여 편의 소설을 유통시켰다. 또 세종과 세조조에 불경 언해가 주목된 이래, 부처를 《석보상절(釋譜詳節)》이라는 책을 통해서 장편 소설로 입전(入傳)하기도 하였으며, 각훈(覺訓)의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이나 《동사열전(東師列傳)》에는 전기 소설 등이 들어 있음이 이왕의 연구를 통해 이미 확인되었다.
이러한 저간의 연구 결과물들로 미루어 볼 때, 통원의 견해는 소설의 기원설로 의미 있는 탁견이다. 유만주가 우리 고소설 비평사에서 발견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그러나 그는 현재 우리 고소설 비평 연구의 고수로 자리매김하였다. 그가 이 《흠영》을 지은 것은 20~30대 초반이었지만 그는 이미 소설에 관한 한 애송이가 아니었다. 소설을 선회하며 좌충우돌 소설의 정의, 문체, 비평어라는 이전에 보지 못한 초식을 날렸다.
《흠영》에는 또 ‘내문 소설(內文小說)’이라는 명칭이 보이니 이를 짚지 않을 수 없다. ‘내문 소설’은 우리나라 소설이라는 뜻으로, 특히 ‘한글 소설’을 지칭한다. 유만주는 이 용어를 〈사씨남정기〉에 사용하였는데, 이외에 ‘동국 소설(東國小說)’과 ‘동문 소설(東文小說)’이라는 명칭을 쓰기도 하였다. 모두 우리 소설에 대한 자존을 한껏 올리는 용어로 보아도 좋다.
현재의 소설계와 학계의 무림강호라 뽐내는 이들, 모두 유만주에게 10여 수의 초식을 배워야 하거늘 영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섭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