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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1일 오늘의 역사
2021년 천안시 주상복합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발생 차량 666대 피해
2018년 제4차 남북노동자 축구대회 3년 만에 열림(상암동 월드컵경기장)
2018년 배우 기주봉 제71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강변호텔’(감독 홍상수)로 남우주연상 받음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진종오 세계사격사상 첫 올림픽 3연속 금메달
진종오는 11일(한국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데오도르 올림픽 슈팅 센터에서 열린
2016 리우올림픽 사격 남자 50m 권총에서 193.7점을 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로써 진종오는 세계 사격 역사상 최초로 올림픽 종목 3연패라는 대기록을 작성했다.
개인 통산 4번째 금메달을 목에 건 진종오는 양궁의 전설 김수녕(금4·은1·동1)과 함께
한국 올림픽 최다 메달리스트에도 올랐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사상 처음 남자 축구 3위 차지
2009년 '한국 방송작가의 대부' 한운사씨 별세
한국방송작가의 대부로 불리는 한운사(韓雲史·86)씨가 2009년 8월 11일 오전 별세했다. 1946년 서울대 불문과 재학 중 방송작가로 데뷔한 한씨는 50~70년대 최고의 드라마 작가였다. 드라마·소설을 넘나들며 60여년간 100여편의 작품을 남겼다.
라디오 드라마 '잘 돼 갑니다', 영화 시나리오 '아낌없이 주련다' '빨간 마후라', 장편소설 '대야망' 등이 대표작. 새마을운동 노래 '잘살아 보세'의 작사가이기도 하다.
2002년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방송인 명예의전당'에 헌정된 바 있다
2009년 인천 송도국제도시 '세계환경포럼' 개막
저탄소 녹색성장의 실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2009 세계환경포럼(Global Environment Forum 2009)’이 2009년 8월 11일 오전 인천 경제자유구역 내 송도 컨벤시아에서 개막됐다.
’21세기 지구환경 전망 및 지속가능 발전을 향한 저탄소 녹색성장 전략’을 주제로 12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이번 토론회에는 반기문 UN 사무총장을 비롯해 세계자연보전연맹 아쇼크 코호슬라 총재, 프랑스 항공사진작가 얀 베르트랑, 세계환경포럼 공동조직위원장인 고건 전 총리, 안상수 인천시장 등 국내외 주요 인사와 연구기관, 시민단체 관계자 등 1300여명이 참가했다.
이번 행사는 UN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후변화, 생물 다양성 등 지구 환경의 미래가 우려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해결책을 찾아보자는 뜻에서 열리는 것이다.
포럼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아쇼크 코호슬라 세계자연보전연맹 총재, 프랑스 항공사진 작가 얀 베르트랑의 기조연설로 시작됐으며, 참석자들은 2일간 이어지는 그룹토론에서 ▲기후변화 등 미래 환경전망 ▲기후변화와 지속가능한 도시발전 ▲경제위기 속의 주요국 녹색뉴딜.녹색성장 전략 ▲기후변화와 대응책 ▲시민사회의 역할 등을 논의하였다
2004년 신행정수도 충남 연기-공주로 확정
헌법소원이 제기되고 야당이 발표 연기를 주장하는 등 논란이 가열되는 가운데 정부는 충남 연기(燕岐)·공주(公州)를 행정수도 입지로 최종 확정, 발표했다.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는 11일 오후 정부 중앙청사에서 제6차 회의를 열고 4개 후보지 평가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연기·공주를 신행정수도 입지로 최종 결정했다.
정부는 신행정수도 입지에서 탈락한 ▲충북 진천·음성 ▲충남 천안 ▲충남 공주·논산 지역에 대해서는 개발행위허가와 건축허가 제한, 토지거래허가구역, 토지거래허가 특례지역 등 각종 규제를 해제하기로 했다.
이해찬(李海瓚) 총리는 이날 발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수도 이전에 소요되는 비용 중 세금이 들어가는 것은 11조원”이라며 “경제가 어려운데 수도 이전에 왜 많은 돈을 쏟아붓느냐는 ‘잘못된 비판’에 현혹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주장했다. 이 총리는 또 행정수도 이전 반대 여론에 대해 “정부가 이미 전국을 돌면서 공청회를 많이 했는데, 언론이 그것을 올바로 보도하지 않고 왜곡까지 해서 보도한 게 문제”라며 언론책임론을 제기했다.
2004년 서울대 최진호 교수팀, ‘뿌리는 바코드’ 첫 개발, 제품 변조막는 첨단 나노기술
2004년 국사편찬위원회, 미국 OSS와 한국 독립운동단체가 합동 진행한 ‘옐로 프로젝트(Yellow Project)’ 자료 공개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9월, 일본이 점령하고 있는 중국 북부 지역에서 미국 전략첩보국(OSS)이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후방 교란과 정보 수집 작전을 벌였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발견됐다. 국사편찬위원회는 2004년 8월 11일 OSS와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혁명자통일동맹 같은 독립운동단체가 합동 진행한 ‘옐로 프로젝트(Yellow Project)’ 관련 자료를 공개했다.
국편이 지난 2004년 3~7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등에서 수집한 이들 문서는 OSS 본부와 중국 현지 책임자 등 관련자들 사이에서 오간 것으로, 이 문서에 따르면 OSS는 1944년 8월 우수한 한국인을 선발하여 중국 북부 지방에 침투시킬 계획을 세운다. ‘옐로 프로젝트’라고 이름붙인 이 작전에 응한 사람은 모두 4명. 이들은 모두 개신교 신자로 어학 실력이 뛰어났으며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혁명자통일동맹에 소속돼 있었다. 작전의 지도자는 ‘옐로 1’로 중국 남부 쿤밍(昆明)에 머물고, ‘옐로 2’는 톈진(天津)-베이징(北京), ‘옐로 3’은 산둥(山東) 반도, ‘옐로 4’는 차하이-샤우제 지역으로 파견되어 한국인을 이용하여 첩보 활동을 벌였다. 이번에 국편 조사 결과 ‘옐로 1’은 조선민족혁명당 중앙감찰위원 김윤서로 확인됐다.
그동안 OSS와 한국인의 합동 작전은 1945년 진행된 ‘냅코 작전(NAPKO Project)’과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이 알려져 있다.
2003년 라이베리아 전 대통령 찰스 테일러 사임
2003년 NATO 아프칸에서 평화유지 활동 시작(유럽 외 지역에서 처음)
2000년 전국 의료계, 의약분업 강행에 반대하며 2차 총 폐업
1999년 제1회 남북노동자축구대회 남쪽 대표단 37명 평양 도착
노동조합이 남북교류의 물꼬 텄다는 점에서 주목, 서해교전과 금강산 관광객 민영미 억류 등으로 남북관계가 경색된 시점에 열려 통일운동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됨
1999년 20세기 최후-최대의 개기일식 진행
1995년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변경
1993년 북한군 인민무력부 임영선 중위 휴전선 넘어 귀순
국가안전기획부는 11일 최근 북한을 탈출한 후 동남아의 제3국을 통해 귀순을 요청해온 북한군 중위 임영선(30)이 이날 오후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함에 따라 인도적 차원에서 임중위의 귀순을 허용키로 하였다 안기부는 임중위가 인민무력부 군사건설국(공병부대)에서 5년간 장교로 복무하면서 대학에 진학하려했으나 부친이 남한출신(경남(慶南) 거창)이라는 이유만으로 좌절되자 북한체제에 불만을 품고 金日成.金正日 부자를 비방하는 전단을 제작, 함경도 일원에 살포한 뒤 수사망이 자신에게 압축돼오자 북한탈출을 결심하게 됐다고 설명했 다.
임중위는 북한에 어머니(60)와 형 2명,누이동생 2명 등 모두 5명의 가족을 두고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93년 한국-모잠비크 국교 수립
1992년 한국 최초 과학위성 ‘우리별 1호’ 발사(프랑스령 기아나)
1992년 8월 11일 오전 8시 8분(한국 시간) 한국 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별 1호가 아리안(Ariane) 로켓에 실려 발사되었다.
발사는 남아메리카 프랑스령 기아나의 쿠루 우주 센터에서 이루어졌다.
우리별 1호는 지상 1,325㎞에서 공전하는 과학실험용 소형 위성으로 크기가 50×50×80㎤, 질량이 50㎏이며 5년의 수명을 가진 갈륨-비소 태양전지를 전원으로 사용했다.
공전주기는 110분으로 1일에 지구를 13회 공전하도록 되어 있으며, 한국 상공을 통과하는 횟수는 1일 7회이다.
이때 15분 정도 지상국과 통신이 가능하다. 우리별 1호의 실험과제는 수신된 메시지를 저장했다가 원하는 지상국에 송신하는 축적․송신 통신실험, 저해상도 사진기(4,000×4,000㎞)와 고해상도 사진기(230×160㎞)로 지구환경 연구를 위해 사진을 촬영하는 지표면 촬영실험, 지상국으로부터 수신된 음성신호를 위성 내부에 저장했다가 한반도 상공에서 방송하는 신호처리기술실험, 지구 주위 우주공간의 양성자와 전자 이온, 방사선의 종류와 양 등을 측정․조사하는 우주환경실험 등이다.
한국은 우리별 1호 발사에 성공함으로써 세계에서 25번째 위성 보유국이 되었다
1984년 레이건, 라디오연설 마이크 테스트중 "소련을 폭격하겠다"고 실언
1980년 김포국제공항 새청사 개관
1980년 조오련, 대한해협 도영에 성공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선수가 1980년 8월11일 대한해협 횡단수영에 성공했다.
그는 새벽 0시 5분 부산 다대포 방파제를 출발해 13시간 16분 10초 동안 수영한 끝에 오후 1시 21분 10초 대마도 서북방 소자끼 등대에 도착했다.
직선거리로 48km, 실제 수영한 거리는 52.5km에 이른다.
대한해협 횡단은 1972년 7월 31일 일본의 원영선수 나까지마와 1973년 5월 우리 나라의 박홍석이 각각 도전했지만 실패했었다.
이날 0시 5분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부산 다대포 앞바다에 뛰어든 조오련은 배 세 척의 호위를 받으며 힘차게 파도를 갈랐다.
오전 11시 40분경 근육마비를 일으켜 최대 고비를 맞기도 했으나 물속에서 5분간 마사지를 받은 뒤 다시 역영을 시작해 오후 1시 21분 일본 쓰시마 섬 서쪽 끝 소자키 등대에 도착했다.
대한해협 53km를 횡단하는 데 걸린 시간은 13시간 16분 10초로 당초 목표로 했던 18시간보다 5시간 가까이 빨랐다.
2년 뒤 도버해협 횡단에 성공한 조오련은 2003년 한강 240km를 헤엄치는 등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1979 인도 서부 구자라트 주 댐 붕괴 1만 명 이상 사망
1979년 경찰, 신민당사 농성 YH여공 강제진압
1979년 8월 11일 오전 2시, 1000여명의 경찰이 신민당사 정문을 부수고 침입, 이틀째 철야농성 중인 179명의 YH무역 여공들을 강제해산시켰다. 여공들은 "못 간다. 죽어도 여기서 죽겠다"며 울부짖었으나 곤봉을 휘두르고 주먹과 발길질을 해대는 억센 경찰들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이 여공들과 당직자들을 무차별로 구타하며 여공들을 `닭장차`에 쑤셔넣는 과정에서 100여명이 부상하고 취재기자도 12명이나 폭행당했다. 노조 상임집행위원 김경숙은 당사 뒤편 지하실 입구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병원으로 옮겼으나 곧 숨을 거뒀다.
이른바 `수출의 꽃`으로 불린 여공들이 신민당사를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폐쇄한 공장을 가동시켜 일자리를 달라는 것. 불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던 때였다. YH무역은 한때 수출순위 15위의 국내 최대 가발업체였으나 업주의 자금유용 등으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 그 해 6월에 사업장이 폐쇄된 부실기업이었다. 노조는 한가닥 기대로 야당인 신민당을 찾았으나 유신체제가 막바지로 치닫던 때 신민당 역시 힘이 없었다.
1972년 미국의 마지막 지상 전투부대 남베트남에서 철수
1967년 미국 소련 핵확산금지안 합의
1966년 인도네시아, 말레이지아 평화협정 조인
1966년 해병대 이인호소령 베트남전 동굴 수색 중 전사
1965년 美 와츠 흑인폭동
인종차별을 금한 미국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인권법인 신(新)공민법(1964년 7월)과 흑인투표법(1965년 8월)이 공포됐지만 오랫동안 쌓여온 흑백간의 갈등과 대립이 하루아침에 가실 리 없었다.
1965년 8월 11일, 캘리포니아 순찰대 소속 백인 경찰 2명이 로스앤젤레스 흑인거주지 와츠 부근에서 음주운전을 한 21세 흑인 청년과 격한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흑인 구경꾼들이 몰려든 가운데 경찰이 폭력을 행사하며 흑인을 교통위반혐의로 체포하려 하자 흑인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3000여명의 경찰이 동원돼 진압에 나섰지만 이미 거리는 약탈·방화·투석 등으로 무법천지였다. 14일에는 계엄령에 준한 `폭동사태선언`이 발표되고 1만4000명의 주(州) 방위군이 동원되고서야 17일에 겨우 폭동이 진압됐지만 1주일 동안 34명(흑인 25명)이 죽고 103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체포된 사람도 4000명이나 됐다.
1962년 소련, 유인 우주선 보스토크 3호 발사
소련이 1962년 8월 11일 오전 11시30분 유인 우주선 보스토크 3호를 발사했다. 다음날에도 보스토크 4호를 발사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우주선 연속발사는 우주공간에서의 랑데뷰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12일 오전 12시30분경 `3호, 4호는 서로 가까운 거리에까지 비행했으며 서로 통신무선도 원만하다`고 지구에 보고했다. 보스토크3호는 94시간 25분간, 260만Km, 지구를 64바퀴 선회한 후 15일 오전 9시55분경 카자흐공화국에 착륙했다. 6분후 4호도 같은 지점에 도착했다. 이 랑데뷰는 성공적인 실험으로 세계인의 평가를 받았으며 케네디 대통령도 소련에 축전을 보냈다.
1960년 차드, 프랑스로부터 독립
1957년 캐나다 여객기 퀘벡부근에 추락.79명 사망
1956년 미국 화가 잭슨 플록(44세) 자동차사고로 세상 떠남
1955년 전국의 판자집 철거
1948년 한국 독립운동가 최해 사망
1948년 김성집, 대한민국 올림픽 첫 메달 획득
1947년 좌익진영에 검거 선풍
1947년 미국 공보원 개설
1942년 대구, 섭씨 40도 기록
1939년 매1일을 흥아봉공일(애국일)로 제정
1923년 독일 연합국에 대한 전쟁배상 지불중지 선언
1923년 태풍 2353호(-8.14) 1,157명 사망,실종
1921년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사망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선생이 1921년 8월 11일 4년의 옥고 끝에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박 선생은 경남 울산에서 출생, 구한말 의병장이던 허위 선생으로부터 척사적 반외세 민족의식을 배웠다.
선생은 이후 양정의숙 전문부 법과에 입학, 법률·경제학등을 공부하면서 신·구학문을 익힌 후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됐다. 그러나 한일합방 직후인 1911년 평양법원 판사직을 버리고 만주로 가 독립운동가들과 항일투쟁 방법을 협의한 뒤 돌아와 대구에 독립군 정보연락과 재정지원을 위한 상덕태상회란 곡물상회를 설립했다. 선생은 1915년 동지들을 규합, 비밀·폭동·암살·명령 등 4대 실천강령을 지닌 국내 최대 의열단체인 `대한광복회`를 조직, 총사령으로 활동했다.
1917년 12월 20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1920년 소비에트와 라트비아, 강화조약 조인
1920년 제1차 전세계 크리스토교회의 제네바서 개막
1919년 미국 철강왕 카네기 사망
미국의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가 1919년 8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부호는 시대와 그 문명의 거울이라 했던가. 그런 면에서 카네기만큼 시대를 반영하는 부자도 드물다. 카네기를 재벌로 만든 것은 산업주의의 쌀이라고 부른 강철이었다.
1835년 스코틀랜드 수직공의 아들로 태어난 앤드류 카네기는 14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어려서부터 방적공·기관조수·전보배달원·전신기사 등의 여러 직업에 종사하던 그는 1853년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에 취직했다. 1865년까지 이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침대차회사에 투자하여 큰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신이 내린 부자(富者)’였던 그는 곧 철강 수요의 증대를 예견하고 철도회사를 사직한 후 독자적으로 철강업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1872년 홈스테드제강소에 이어 1892년 카네기철강회사(후에 카네기회사)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1901년 카네기는 이 회사를 모건계의 제강회사와 합병하여 미국 철강시장의 65%를 지배하는 US스틸회사를 탄생시켰다.
이후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를 평생 좌우명으로 삼아 살아온 카네기는 사업일선에서 은퇴하고 자신의 재산을 ‘나누기’ 시작했다. 먼저 1902년 1월 29일 워싱턴 카네기 협회를 설립했다.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액수인 2천5백만 달러의 사재를 털어 2,500여개에 달하는 도서관을 지어 사회에 헌납했다. 카네기는 자신이 일평생 모은 재산 3억5000만달러 거의 전부를 사회 환원했다. 요즘 돈으로 30억달러에 이르는 거금이었다.
1919년 독일 바이마르헌법 공포
1914년 프랑스 1차 대전 중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
1914년 경원선 개통
경원선은 본래 서울을 기점으로 철원, 안변을 거쳐 원산에 이르는 총 연장 223.7㎞에 달하는 노선이었다. 수도 서울과 동해·서해를 잇는 산업상·군사상 매우 중요한 간선철도이며, 노선의 완공으로 한반도의 간선철도가 X자 모양을 이루게 되었다. 계획 초기에 경원철도의 부설권을 놓고 1896년부터 프랑스·독일·일본 등 여러 나라가 각축전을 벌였으나, '철도와 광산 경영은 일체 외국인에게 불허한다'는 원칙하에 1899년 국내 철도용달회사에 맡겨졌다.
당시의 노선은 서울을 기점으로 의정부를 거쳐 양주군 비우점까지 약 40㎞ 구간이었다. 그러나 국내 회사의 자금사정의 악화로 중단되자, 일본은 경의철도자금대부약관에 포함되어 있던 '경원철도 부설을 위해 기채할 경우 일본과 먼저 협의한다'는 조항을 이용하여 부설권을 인수받았다. 1904년 6월, 일본은 서울-원산 간 철도부설 노선답사를 실시한 뒤, 그해 8월에 경원선을 군용철도로 부설하기로 결정했다. 1910년과 1911년에 용산과 원산에서 각각 기공식을 가졌으며, 1911년 용산~의정부(31.2㎞) 구간의 개통을 시작으로 1914년 세포~고산(26.1㎞) 구간이 각각 개통되어 전노선이 완공되었다.
1909년 SOS(구난신호) 처음사용
1909년 8월11일. 대서양 연안 노스캐롤라이나주 연안에서 프로펠러 구동축이 고장 난 미국 증기선 아라파호(Arapahoe)호가 처음으로 SOS를 쳤다.
그렇다면 이전까지 해난 신호는 각 나라마다 달랐다
영국은 CQD, 독일은 SOE, 미국은 NC를 조난 부호로 삼았다.
국제공용의 신호를 마련하자는 첫 회의가 열린 1903년, 주최국 이탈리아는 자신들이 쓰는 SSSDDD를 제시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영국의 기준인 CQD의 사용이 늘어났다.
SOS가 국제표준으로 채택된 것은 1906년. 독일에서 열린 국제 무선회의에서다.
모르스 부호로 쳤을 때 가장 간단하고 확실하다는 점에서 채택돼 타이타닉호의 침몰 이전까지 최소한 7차례 조난 부호로 사용됐으나 주류는 여전히 CQD였다.
타이타닉도 처음에는 CQD를 타전하다 침몰 직전에야 SOS를 날렸다.
타이타닉호 침몰은 조난 부호의 통일 필요성을 각인시키고 결국 SOS는 국제기준으로 자리잡아 수많은 생명을 구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1999년 국제해사기구가 조난 신호로 모스부호를 폐기하고 인공위성을 이용한 세계해상조난 안전체제(GMDSS)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1907년 일본군, 강화도 강점
1905년 대한매일신보 영문판 발행
1903년 한국 덴마크 통상조약 체결
1903년 이범윤, 북간도 관리사에 임명됨
1892년 일본의 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 출생
1877년 미국 천문학자 아삽 홀 화성의 2개의 달 포보스와 데이모스 발견
1863년 캄보디아, 프랑스 보호령이 됨
1842(조선 헌종 8) 개화파 김홍집 태어남, 부국책으로 점진적 개화 주장
1837년 프랑스의 기술자 출신 정치가 제3공화국의 제4대 대통령 카르노 출생
1816년 프랑스 군선(軍船), 강화해협거쳐 양화진에 침입
1786년 프랜시스 라이트 제독 말레이시아 페낭에 영국 식민지 건설
1782년 터키 콘스탄티노플에 불 사망 1,000명 건물손실 1만호
1511년 스페인, 멕시코 정복
1433(조선 세종 15) 정초 혼천의(해시계) 왕에게 바침
661(고구려 보장왕 20) 당 나라 장수 소정방 고구려 평양성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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