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2일 오늘의 역사
2015년 중국 텐진 화학물질보관창고에서 초대형 폭발 사망 114명 실종 57명 부상 700여명 2014년 미국 영화배우 로빈 윌리암스 사망 2012년 문지영 제13회 에틀링엔 국제청소년 피아노콩쿠르 1위, 베렌라이터 특별상 2012년 이란 바르자콴 진도 6.2 지진 사망 306명 부상 3,037명 2010년 한국의 대표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김 별세 한국 최초의 남성 디자이너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패션 디자이너인 앙드레김(75 본명:김봉남)이 2010년 8월 12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1935년 경기도 고양에서 태어난 앙드레김은 6·25전쟁 당시 부산피난길에 접한 영화 ‘퍼니 페이스’에서 드레스를 입은 오드리 헵번을 보고 디자이너의 꿈을 품었다. 1961년 최경자씨가 명동에 설립한 국제복장학원 1기생으로 입학하여 디자이너 수업을 받았다. 1962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첫 패션쇼를 열고, 그해 복장학원을 졸업하고 소공동에 개인 살롱 ‘살롱 앙드레’를 차렸다. 1966년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 의상협회 초청으로 파리 컬렉션을, 1968년엔 미국 뉴욕에서 패션쇼를 열었다. 2008년엔 문화훈장 보관장(3등급)을 받았다. 패션에서 인생의 반쪽을 찾았다며 평생을 독신으로 산 그의 의상은 팝스타 마이클 잭슨, 배우 나스타샤 킨스키 등 국내외 스타들의 선망이 되었다. 그는 패션이라는 문화 콘텐츠로 외국와 소통했던 패션 외교관이었으며, 뜨거운 ‘화이트’의 창조자이자,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패러디할 만큼 대중적인 패션계의 거인이었다.
2009년 원로 연극평론가 한상철씨 별세 원로 연극평론가 한상철(73)씨가 2009년 8월 12일 오후 9시 노환으로 별세했다.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청주대·성심여대·한림대에서 영문학 교수로 재직한 고인은 1970년대부터 전문지 '연극평론' 등을 통해 현장 연극을 비평하는 날카로운 글을 썼다. 고인은 서울 대학로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연극평론가 중 한 명이었다. 2006년 서울연극제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연극이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관객이 없어서가 아니라 연극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그렇다"고 일침을 놓은 것도 그런 애정 때문이었다. 연극평론가협회장을 지냈고 유치진연극상, 서울문화예술평론상 등을 받았다.
2008년 검찰 정연주 전 KBS사장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혐의로 긴급체포 2005년 조오련 3부자, 울릉도-독도 횡단 성공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55)씨 3부자가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헤엄쳐 건넜다. 조씨와 아들 성웅(24)·성모(20)씨 3부자는 12일 오후 1시 울릉도 도동항을 출발한 지 18시간 만인 13일 오전 6시58분 독도에 도착했다. 조씨와 UDT 출신 성웅씨, 현 국가대표 수영선수인 성모씨는 번갈아 안전망(가로 25m·세로 9m) 속으로 입수, 동해를 가로질러 역영했으며 마지막 1km를 남긴 지점부터는 3부자가 함께 안전망을 벗어나 독도로 향했다. 이들 부자는 당초 난류(暖流)를 따라 울릉도와 독도의 직선거리 87.4km보다 30km 정도 돌아 포물선을 그리며 갈 계획이었으나 예상보다 일찍 난류를 만나 직선에 가까운 경로로 이동할 수 있었다. 또 뒷바람이 불고 파도도 잔잔해 당초 예상했던 24시간보다 6시간 단축된 18시간 만에 독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조씨는 독도에 도착한 뒤 “제가 온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의 마음을 싣고 온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2003년 제주해녀항일운동 주동자 김옥련 할머니 71년 만에 건국훈장 포상. 2002년 유럽 곳곳에서 100여년만의 최악의 폭우 2002년 제7차 남북 장관급회담 중단 9개월 만에 서울서 개막 2000년 프랑스 화가 장 카르주 사망 철사가 얽힌 듯 한 선의 화필로 유명한 프랑스 화가 장 카르주가 2000년 8월 12일 도르도뉴 지방에서 향년 93세로 사망했다. 시리아의 아르메니아계 집안에서 태어난 카르주는 1924년 파리에 발을 디딘 뒤 처음에는 생계를 위해 정치인 캐리커처를 그리다가 점차 회화뿐만 아니라 판화, 삽화, 무대 미술 분야에서도 활동하면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마노스크의 프레장타시옹 교회에 묵시록의 풍경을 담은 대형 벽화를 남겼고, 오페라 극장과 코메디 프랑세즈 극장의 공연물 무대 미술과 의상도 맡았다. 랭보, 이오네스코, 헤밍웨이 등 유명 문인들의 작품에 독창적인 삽화를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1977년 프랑스 미술원 회원으로 선출됐고, 레종 도뇌르와 문학 예술 훈장 등을 받았다.
2000년 러시아 핵잠수함 쿠르스크호, 노르웨이 북부 바렌츠해에서 침몰 러시아 핵잠수함 쿠르스크호가 2000년 8월 12일 노르웨이 북부 바렌츠해에서 훈련 도중 침몰했다. 원인불명의 폭발음을 남기고 해저 108m에 가라앉은 쿠르스크호는 1994년 건조돼 이듬해 배치된 최신형 오스카급 전략 핵잠수함이었다. 배수량 1만 3900톤에 길이가 154m, 폭이 9m인 최신예 잠수함이었다. 최대 24기의 핵탄두 미사일을 탑재하고 수심 500m에서 120일간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사고 당시 118명의 해군 장병이 타고 있었다. 침몰 사실은 서방 측이 먼저 공개했고, 러시아군은 이틀이 지난 후 이를 공식 확인했다. 러시아는 보안을 이유로 구조작업에 늑장을 부렸고 서방의 구조지원도 거절했다. 휴가 중이던 푸틴 대통령은 위기상황에도 모스크바에 즉각 귀환하지 않아 국내외 여론의 질책을 받았다. 자체 능력으로는 구조가 어려워지자 러시아는 나흘이 지나 노르웨이와 영국의 심해구조팀의 지원을 받아들였다. 러시아 측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쿠르스크호 선체에 먼저 접근, 생존자가 없음을 확인한 것은 노르웨이 구조대였다. 러시아는 선체와 승무원 시신 수습에도 영국 등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뒤늦게 구조작업을 진두지휘한 푸틴은 승무원 유가족들의 항의를 받고 파격적인 보상을 약속했다. 사고원인과 관련, 서방 언론은 신형무기 실험 중 오발로 폭발한 것 같다고 보도했다. 환경단체와 핵안전 전문가 등은 방사능 누출 가능성을 경고했다. 러시아는 사고해역에 있던 미국 또는 영국 잠수함과 충돌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러시아 의회의 사고 조사반은 한 달 후 러시아 핵순양함 페테르 대제호가 오발한 어뢰에 맞아 침몰한 것 같다고 밝혔다.
1999년 남북한 노동자 축구대회 평양서 첫 경기 분단이래 최초의 남북 노동자 축구대회가 1999년 8월 12일 오후 4시 평양 양각도 축구경기장에서 열렸다. 남쪽의 민주노총 축구단과 북한 직업총동맹 축구단간의 이날 경기는 4대5로 북측의 승리로 끝났다. 경기시작 전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경기장에 물이 흥건히 고여 정상적인 플레이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전문선수’들로 구성된 직업총동맹팀이 월등한 기량과 조직력을 앞세워 전반전을 5-0으로 리드했다. 후반전은 북측이 느슨한 경기를 펼쳐 민주노총팀이 4골을 만회했다. 북한은 이날 경기를 TV와 라디오 방송으로 생중계했으며, 관중석을 가득 메운 북한 주민-학생들은 경기 도중 양쪽 모두를 열심히 응원했다. 이날 경기는 남북한 양팀끼리 경기를 치렀으나 이튿날인 13일에는 평양 모란봉경기장에서 남북한 혼성팀(명칭은 백두-한라팀)끼리 친선경기를 치렀다.
1999년 재외동포법 제정 1999년 신구범 축협회장, 농협· 축협· 인삼협을 농업협동조합으로 통합하는 농업협동조합법안 통과에 항의 할복 1998년 통일그룹, 금강산 유람선 관광사업을 추진하고 평북 정주에 평화공원을 조성키로 북한측과 합의 1996년 한총련, 연세대 점거 과격시위 1995년 제1회 세계한민족축전 열림 1994년 북-미 3단계 회담 합의 성명 발표 1. 북한의 흑연감속로를 경수로로 대체한다. 흑연감속로를 대신할 대용에너지를 제공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 2. 북한과 미국 양국은 상대방의 수도에 외교대표부를 설치하고 무역 및 투자 장벽을 제거한다. 3. 미국은 북한에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핵무기로 위협하지 않는다는 담보를 제공하고 북한은 남북비핵화선언을 이행한다. 4.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의 성원으로 남는다.”
1993년 경북 성주 무학리 뒤편 넉바위골 해발 300m야산에 헬기 추락 사망 10명 중상 1명 1993년 김영삼 대통령, 금융실명제 발표 1982년이후 두번씩이나 보류됐던 금융실명제가 1993년 8월 12일 전격 실시됐다. 금융실명제는 당초 1982년 말에 제정되었으나 전면시행은 보류되어 오다가 김영삼 대통령이 헌법 76조 1항에 의거, `금융실명제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을 발동, 이날부터 전격 실시됐다. 금융실명제는 금융거래의 정상화와 합리적 과세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제도로써 은행예금이나 증권투자 등 금융거래를 할 때 실제 명의로 해야 하며 가명 및 차명 또는 무기명거래는 인정치 않고 있다. 이 제도는 사금융 등 음성적인 금융거래를 방지하는데 목적이 있다.
1992년 작곡가 존 케이지 사망 미국의 작곡가 존 케이지가 1992년 8월 12일 8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케이지는 1912년 로스엔젤레스에서 태어나 포모나대학을 졸업하고 헨리 딕슨 카우엘과 아르놀트 쉰베르크에게 작곡을 배웠다. 케이지는 시애틀 코니시스쿨에서 교사생활을 하기도 했다. 케이지가 그의 이름을 세상에 떨치기 시작한 것은 1952년 독일의 도나웨신겐에서 열린 현대음악제에 `4분 33초`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이 작품은 4분 33초 동안 어떠한 연주도 하지 않고 청중들의 웅성웅성거리는 소리만 들으며 연주를 끝낸 것으로 음악에 `우연성`과 `불확실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훗날 이 곡은 유럽음악계, 행위예술, 전자음악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은 존케이지의 음악에서 착안해 전자음악 생연주 기법을 생각해냈다. 케이지는 딱히 작곡가라는 말보다 예술가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케이지는 예술의 전통적 모습을 현대적으로 재창조한 사람이며, 그의 이러한 전위예술은 백남준과 요제프 보이스 같은 사람이 계승했다. 케이지는 생전에 "케이지 이전의 음악이 정지된 음악이라면 그 이후의 음악은 움직이는 음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주요작품으로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서트` `Variations Ⅰ` `Imaginary Landscape No.4` 등이 있다. 케이지는 도안악보를 창안하기도 했다
1992년 부시 미국대통령, 미국-캐나다-멕시코 3개국을 포함한 세계최대의 자유무역지대를 창설하는 NAFTA 타결 선언 1991년 일본 요미우리신문 사할린에서 격추(1982.9.1)된 KAL기 블랙박스의 소련 인양 보도 1985년 일본항공(JAL) 소속 보잉747기 오스타카 산에 추락 524명 사망 1984년 신준섭, 서향순 , 유인탁 LA올림픽서 금메달 획득 1983년 정부, 광복절 특사로 1944명 석방 1982년 영화배우 헨리 폰다 사망 1982년 미국 40개국 군축회의서 모든 화학무기공장의 10년내 폐기를 제의 1981년 IBM PC 첫 등장 1981년 8월 12일 미국의 IBM이 뉴욕에서 기자들을 모아놓고 신개념 상품인 PC5105를 출시한다고 발표했다. PC가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보다 5년 앞서 애플컴퓨터가 `애플`이라는 개인용 컴퓨터를 출시했지만, 전문가들은 IBM PC를 PC의 원조로 꼽고 있다. 무엇보다 애플컴퓨터의 8비트 컴퓨터는 일부 매니아를 위한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PC (Personal Computer)는 이제 개인용 컴퓨터를 지칭하는 보통명사가 됐지만 당시는 제품명을 의미하는 고유명사였다. IBM은 인텔이 만든 중앙처리장치(CPU)를 최초의 PC에 집어 넣었다. 또 PC를 움직이는 운영체제로 마이크로소프트(MS)사의 DOS를 선택했다. PC 사업에 동참한 두 벤처기업은 21세기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IBM은 처음 1986년까지 24만1683대의 PC가 보급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PC는 IBM의 상상을 뛰어 넘는 속도로 성장했다. 1983년 12월 타임지는 PC를 `올해의 인물(Man of the Year)`로 선정해 논란을 불렀다. 무생물이 최초로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자리에 선 것이다. 1994년 이후 PC가 인터넷과 결합하면서 PC는 세계경제의 심장이 되었다. 2000년 말 기준 보급대수는 5억여대에 달했다.
1980년 80세계복음화대성회 여의도에서 개막(~15일) 1978년 일본-중국, 평화우호조약 조인 1977년 중국, 제11차 전인대 개막 1974년 방글라데시 몬티롱에 홍수 사망 2,500명 1973년 영동역 남방 100m지점서 유조열차 탈선 전복 사망 38명 부상 12명 열차 24량 소실 1971년 대한적십사자, 1천만 이산가족 재회를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북한적십자사에 제의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1971년 8월 12일 남북한의 1천만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해 남북한적십자사 대표가 서울·평양이나 어떤 제3의 장소에서 회담할 것을 북한적십자사에 제의했다. 이에 대해 북한적십자사는 14일 평양방송을 통해 이 제의를 수락한다고 밝히고 회담은 판문점에서 하자고 주장했다. 한적이 이에 동의, 8월 20일 남북한 측 대표가 역사적 첫 대화를 가졌다. 이날 한국 측 대표로는 이창령 윤여훈, 북한 측 대표로는 서성철 염종련이 참석해 9월 16일까지 5차회담을 거쳐 예비회담의 기틀을 마련했다. 남북한 적십자 예비회담은 12월 17일까지 13차례나 열렸다.
1970년 독일-소련 불가침조약 조인 1966년 북한, 자주노선 선포 1965년 민중당 의원 61명, 한일회담에 반대, 국회의원 사퇴서 제출 1964년 007 제임스 본드를 탄생시킨 영국의 스릴러물 소설가 이언 플레밍 사망 1962년 소련, 보스토크 4호 발사 1961년 박정희 의장 63년 여름에 민정이양 하겠다고 성명 1960년 최초의 방송통신위성 에코1호 발사 1960년 윤보선, 4대 대통령 당선 4월혁명 후 정권을 맡을 정치세력으로는 민주당이 유일했다. 1960년 7월29일에 치러진 민의원·참의원 선거는 민주당이 국민들로부터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민의원 219개 선거구에서 무려 172석(78.5%)을 차지하며 기염을 토했지만 민주당 내 신·구파가 우열을 가리지 못할 만큼 팽팽한 의석 분포를 이룬게 문제였다. 갈등이 내연하는 가운데 신·구파 모두 내각책임제에서 국정을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국무총리를 차지하기 위해 암투에 들어갔다. 구파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밀어 두 자리를 독점한다는 전략을 세웠고 신파는 대통령 자리를 윤보선에게 넘겨주되 총리는 자파(自派)의 장면이 차지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따라서 윤보선의 대통령 당선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8월12일 윤보선은 민·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예상대로 208표(재석 259명)를 얻어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두번째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무리한 욕심이 화근이었다. 구파의 김도연을 총리로 지명(17일)했다가 민·참의원 회의에서 부결된 것이다. 윤보선은 할수없이 장면을 지명했고, 장면이 총리 인준에 성공함으로써 제2공화국이 출범했지만 신·구파 간의 갈등은 더욱 깊어만 갔다
1957년 한일회담 속개 1955년 독일 소설가 토마스 만 사망 1955년 비구승 합법대회 전국 사찰 장악 1949년 전쟁포로와 전시 민간인에 대한 대우 등 규정한 제네바 협약 조인 1949년 8월 12일, 전쟁 희생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네바 협약`이 체결됐다. 48년 열린 국제적십자회의에서 제정된 협약안이 이날 최종적으로 채택된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66개국의 조인을 거쳐 1950년 10월부터 발효됐고, 우리나라에서는 1966년에 조인·발효됐다. 제네바협약 체결 과정은 적십자 역사와도 관련이 깊다. 국제적십자를 창시한 앙리 뒤낭이 제안해 이뤄진 첫 국제회의가 제네바협약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1864년 8월에 열린 회의에서는 `전쟁 중 부상자의 상태개선을 위한 협약`이 체결됐고, `적십자 마크` 사용이 결정됐다. 협약은 이후 1906년과 1929년 두 차례에 걸쳐 수정·보완되면서 전시(戰時) 희생자들을 보호해왔지만 2차대전의 경험을 살려 협약내용을 좀 더 가다듬은 1949년의 제네바협약으로 희생을 더욱 줄일 수 있게 됐다. 전쟁지역의 군대 부상자 및 병자의 상태개선(1협약), 해상 부대의 부상자 및 병자와 난파선 승무원의 상태 개선(2협약), 포로 대우(3협약), 민간인 보호(4협약) 등 4개 분야로 구성됐다.
1948년 미국과 대만 대한민국 국가 승인 1945년 소련군, 일본 항복에앞서 청진에 상륙 1945년 38선 설정 1942년 미국-영국-소련, 모스크바에서 회담 1942년 경주 지역 43.5℃로 우리나라 최고기온 기록 1940년 독일군, 영국 본토 공습 시작 1940년 8월 12일, 독일 공군이 처음으로 영국 비행장과 레이더 기지를 공습했다. `시 라이언(Sea Lion)` 작전이라고 명명한 영국 침공 작전의 시작이었다. 대규모 공습 후 영국본토 상륙이 독일군의 계획이었다. 8월 15일 독일공군은 다시 전투기와 폭격기 총 1천786대를 동원, 전례없는 최대규모의 공중전을 전개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34대, 독일군은 75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1단계 작전에서 쌍방 모두 피해가 막심했으나 독일이 영국에 비해 2배 이상의 피해가 컸다. 8월 24일 독일군은 제2단계 작전을 시작하면서 공격목표를 해안기지로부터 내륙 항공기지로 전환하는 새로운 전술을 채택했다. 2단계 작전은 영국의 대공 방어체제를 흔들었고, 전투기 손실도 적었다. 9월 7일 약 3백대가 넘는 독일 폭격기가 약 6백대의 전투기 엄호 하에 런던을 대거 공습, 런던 시가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3단계 작전의 시작이었다. 9월 7일 대공습 이후 일주일간 계속된 폭격에 영국의 저항이 약해지자 독일은 영국 공군이 거의 붕괴되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 판단은 오판이었고, 9월 15일은 승리에 도취한 독일 공군에게 암흑의 날이 되었다. 독일 전투기들이 영국으로 다가오자 대거 출격한 영국 공군기는 독일 폭격기를 모두 격퇴시켰다. 독일은 60대의 폭격기를 잃는 참패를 기록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26대의 전투기를 잃었음에도 영국인들은 이날을 `영국 전투의 날`로 경축했다. 그 뒤 산발적인 도시 폭격이 이어졌지만 히틀러는 불리해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결국 11월 11일 공습을 전면 중단했다. 2차대전 초기 연전연승한 독일은 영국 상공에서 최초로 좌절의 고배를 마시고 영국 침공계획을 포기했다. 영국 전투에서 독일은 1천733대, 영국군은 915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1931년 중국 양자강 대홍수, 8000여명 사망 192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곡가 야나체크 사망 1924년 파키스탄의 대통령(1978-88) 자아 울 하크 출생 1923년 북서해안 일대 해일, 용천서만 사망 538명 가옥 피해 7,000호 1919년 사이토 마고토 (제등실) 제3대 조선총독 부임 1912년 독립운동가 안춘생 태어남 1905년 런던에서 제2차 영일동맹 조인 1904년 일본, 내정개혁안 1903년 일본, 러시아에 한만(韓滿)문제타협안 1887년 오스트리아의 이론물리학자 슈뢰딩거 출생 1851년 아이작 메릿 싱어 재봉틀 특허 받음 1848년 증기기관차 발명자 스티븐슨 사망 증기 기관차를 발명한 조지 스티븐슨이 1848년 8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1781년 영국에서 태어나 아버지와 함께 탄광에서 일하면서 기관부·기관공이 되어 여러 가지 기관의 기능을 익혔다. 그 후 킬링워스 탄광에서 탄광주를 설득, 펌프를 움직이는 증기 기관을 연구해 1814년 7월 세계 최초의 증기 기관차 블루처 호를 탄광에서 항구까지 운행하는데 성공했다. 1823년 뉴캐슬에 세계 최초의 기관차 공장을 설립하고, 1824년 스톡턴∼달링턴 간의 세계 최초의 여객용 철도가 부설되어, 1825년 그의 공장에서 제작한 개량형 기관차 로커모션 호를 달리게 함으로써 철도수송의 시대를 열었다. 그 후, 1830년대부터 거의 모든 선진국에 증기철도가 건설됐다. 스티븐슨은 벨기에·에스파냐 등에 진출하여 많은 철도 부설사업에 종사했고, 1847년에는 철도관계 기술자들이 중심이 되어 버밍엄에 창설한 세계 최초의 기계학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1832(조선 순조 32) 감자 재배법 전수, 프러시아 사람 구즐라프가 전라도에서 지도 1827년 영국 화가·시인 윌리엄 블레이크 세상 떠남 1674년 프랑스의 바로크 시대 초상화가 샹파뉴 사망 1642년 영국 청교도혁명 일어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