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편) 노량진 갤러리
신외숙
김창순은 노량진에서만 60 평생을 살았다.
태어나기는 경기도 평택에서 났는데 2-3살 때 서울로 입성해 둥지를 틀었던 곳이 바로 노량진이었다. 그가 어릴 적만 해도 노량진은 달동네 판잣집이 많았었다. 지금 동작 경찰서가 있는 곳에 야트막한 동산이 있었는데 사시사철 맑은 개울이 흘렀고 풀이 무성해 아이들 놀이터로 안성마춤이었다.
놀이터 옆에 동사무소가 있었는데 어린이 도서실도 딸려 있어 그는 방과 후면 그곳으로 달려가 동화책을 읽었다. 때는 군사정권 시절이라 물자도 부족하고 부자유스러운 분위기가 많았지만 어린 동심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는 늦둥이 어린 여동생을 들쳐 업고 도서실을 찾았다가 아기가 우는 바람에 쫒겨나기도 했다.
동네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한강이 보였다. 노량진에서 두 정거장만 걸으며 본동이 나타나는데 왼쪽으로 한강 모래사장이 보였고 해마다 국군의 날이면 그것에서 폭격 훈련이 이어지곤 했다.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에 심장이 멎을 뻔한 적도 여러번 있었다.
동네 어른들은 한강으로 낚시를 가면서 아이들에게는 따라오지 말라며 엄포를 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동네 조무래기들과 함께 몰래 뒤따라가 한강 모래사장을 뒹굴며 놀았다. 어른들은 물고기를 잡는 체하며 사실은 술추렴하기에 바빴다. 어쩌다 피라미 하나 낚은 걸 대물이나 낚은 것처럼 뻥치기도 했다.
김창순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린 여동생을 업고 친구들과 놀이하기에 바빴다. 여동생은 그의 등에다 수시로 오줌을 싸댔고 그는 친구들에게 놀림 받느라 얼굴이 벌개졌다. 집안은 가난하여 늘 먹을 것이 귀했고 그건 동네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웃 동네에 사는 현철이네 말고는 모두 가난을 면치 못했다. 당시 현철이네는 2층 대리석 건물에다 고급 승용차와 식모도 두고 살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현철이 아버지는 대학교 교수라 했고 또 방송에 가끔 출연하는 유명인이라 했다.
현철이는 밑으로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었는데 모두 근처에 있는 대학교 부설 사립 초등학교에 다녔다. 당시는 국민학교 그 이전에는 소학교라 불렸다. 보통 공립 초등학교는 사복을 입는 데 반해 사립 초등학교는 교복을 입었고 스쿨버스를 타고 통학을 했다. 그애들은 잘 먹어 얼굴이 뽀얗고 예뻤다. 여자애들은 한 겨울에도 꼭 치마를 입고 다녔고 옷도 백화점에서만 사 입었다. 그리고 창순이 또래가 타는 썰매 대신 스케이트를 타고 놀았다.
50년 전, 노량진 역 맞은편으로 시장과 방직공장이 있었다.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 뒤로 상상 꼭대기 달동네가 형성돼 있었는데 시커먼 개천물이 꼭대기서부터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파른 비탈길 위에 바람만 불면 휙 날아갈 것 같은 루핑을 얹은 판잣집들이 바짝 바짝 붙어 있었다.
그 산 꼭대기 정상에 올라서면 온 동네가 환히 내려다보이는데 그곳에 창순의 초등학교 동창 김영미가 살고 있었다. 그녀가 사는 집은 절벽 같은 곳에 담장도 없이 아궁이와 방이 곧바로 연결된 허름한 판잣집이었다. 집은 찢어지게 가난해도 마음은 한없이 순하고 착한 아이였다.
얼마나 가난한지 영미의 언니는 14살 어린 나이에 편물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영미 역시 초등학교 졸업장이 최종 학력이었다. 영미는 중학교도 가지 못하고 느슨한 고무줄 치마를 입고 집안일을 했다.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말대꾸 한번 못하고 그저 예 예로만 일관했다.
중학생이 되어 우연히 그 길을 지나던 중 창순은 그녀와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그녀는 창순의 교복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눈물을 흘렸다. 어색한 분위기에 서로 말없이 돌아섰지만 그 일은 내내 아픔이 되었다. 뭐라고 말 한마디쯤 했을 법한 데도 둘은 눈만 마주본 체 뜻 모를 메시지만 교환했다.
영미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때 흘린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가난이라는 그 참혹한 현실이 피부에 와 닿는 순간이었다. 당시 영미의 아버지는 폐결핵 중증환자였던 걸로 기억된다. 기침 소리가 방 밖에까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영미는 흔한 소풍 한번 가지 못했고 월사금도 내지 못해 집으로 쫒겨 간 적도 여러번 있었다. 성격도 또래 아이들과 달리 온순하고 순종적이었다. 어른들 말이라면 무조건 예라고 했고 전혀 말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다 엄마 아빠라고 하는데 영미만 유독 어머니 아버님이라고 말해 한바탕 웃던 기억이 난다.
집안은 가난해도 엄격한 부모님 밑에서 제대로 된 예절교육을 받았지 않았나 싶다. 영미가 사는 집 상상 꼭대기에서 눈을 왼쪽으로 돌리면 도도히 흐르는 한강물을 바다처럼 볼 수 있었다. 또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면 영본 시장이 나왔고 곧바로 흑석동으로 연결되었다.
오른쪽 비탈길로 내려가면 상도동으로 통했다. 지금은 상도터널이 뚫렸는데 그 옆 골목으로 빠지면 그 유명하다는 YS 김영삼 대통령 사저가 나온다. 지금은 그 터널 옆에 김영삼 도서관이 우뚝 서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YS가 사는 골목길에 있는 초등학교로 음악 경시대회 나간 기억이 난다.
창순은 초 중학교를 노량진 인근에서 마쳤고 고등학교와 대학은 한강 다리를 건너 다녔다. 고등학교는 지금의 강남이라 할 수 있는 혜화동으로 진출했다. 처음으로 한강을 건너 번화가로 진출하자 신세계가 펼쳐진 것 같았다. 창순이 고교 입시를 치르기 두 해 전 입시제도가 바뀌었는데 대통령 아들과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그 이전까지 창순도 일류 고등학교를 가라는 집안의 압력을 어지간히 받았었다. 뺑뺑이 추첨을 통해 진학한 고등학교는 초 중등학교 때와는 달리 부잣집 아이들이 상당히 많아 빈부격차를 실감케 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입시 경쟁은 치열했다.
천재는 1퍼센트의 두뇌와 99퍼센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허황된 말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왜소한 체격에 도시락을 두 개씩 싸들고 다니면서 공부했다. 새벽에는 학원에서 가서 강의를 들었고 방과 후에는 학교 도서관에 남아 피터지게 공부했다.
그의 부모는 새벽 장사 다니면서 장남의 공부를 뒷바라지 했고 말끝마다 장남의 의무를 강조했다. 어린 나이에 무거운 짐을 어깨에 매단 채 공부에 치여 죽기 직전이었다. 입만 열면 가문 운운하고 일류대학을 외치는 부모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현실도 모르고 주워들은 이야기만 하면서 대리만족까지 추구하고 있었다. 그가 일차 대학에 낙방했을 때 실망을 넘어 분노하던 부모의 모습은 창순의 가슴에 평생 한을 남겼다. 자식이 당한 아픔이나 상처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악담을 퍼붓던 그의 부모는 그가 먹은 밥알까지 계산하며 아깝다고 했다.
그는 자리에 몸져 누웠는데 그마저 못 마땅하게 여기며 외면했다. 그는 주저없이 후기 대학을 지원했고 합격했다. 장안에서 내노라하는 공과대학이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입이 귀까지 걸린 부모는 처음으로 아들 등을 두드려 주면서 애썼다고 말했다.
그가 다닌 대학은 공과대학으로 유명했는데 데모가 끊이지 않고 발생했다. 총장이 부패의 주범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의 부인은 이사장으로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총장은 원래 출신이 빈한한 가정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그의 비상한 두뇌를 감지한 장인이 사위로 삼으면서 팔자가 폈다고 한다. 장인은 그를 대학과 일본유학까지 보내고 실물 경제를 가르치고 학교를 설립하는데 막대한 재원을 마련해 주었다.
학교가 번성함에 따라 장인은 자기의 딸을 이사장으로 앉혔고 실제 모든 재산권은 딸 앞으로 돌려놓았다. 창순이 대학 들어갈 당시만 해도 동네에 대학생은 흔치 않았다. 대부분 고졸이거나 그마저 못한 국졸로 끝난 집안도 많았다. 어린 시절 그가 학교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면 동네 어른들은 평상에 들러 앉아 술을 마시거나 화투를 쳤다.
가장이 실업자인 경우가 많았고 매일같이 부부싸움 하느라 날밤 새는 집도 많았다. 창순의 옆집에 사는 경남이 아버지는 오랫동안 실업자로 방구들 신세만 지다가 어느날 일을 시작했는데 기계틀에다 분말 가루를 넣고 용기를 찍어내는 일이었다.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기계 틀(몰딩)에다 분홍이나 파랑색 분말을 넣고 오른팔로 기계를 홱 꺾어 돌리면 뜨거운 열기에 의해 일정한 모양의 용기가 만들어졌다. 그것은 곧 큰 박스에 담겨 어디론가 납품이 되었는데 반찬 그릇이나 도시락 용기로 포장되어 시장에서 판매되었다.
때로는 프라스틱 숟가락이나 포크 젓가락이 되어 밥상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던 몇 년 후 경남이 아버지는 몸져 눕고 말았는데 용기를 만들 때 분말 가루를 흡입하면서 생긴 병이라고 했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암이었다.
창순은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노량진을 벗어나 살아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딱 한번 이사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노량진 관내에서였다. 창순은 초등학교 시절 집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노량진 역(驛)에 간 적이 있었다. 동네 꼬마들과 놀다 보니 어느새 발길이 닿은 곳이 역사(驛舍)였다.
당시만 해도 노량진 역사는 호남선 열차가 정차하던 간이 기차역이었다. 낡은 기와 지붕에 펌프가 있는 아주 낡은 역사(驛舍)였다. 그리고 역사 앞 찻길에는 당시에 운행하던 전차가 있었다. 차도 한복판에 전차가 지나가는데 얼마나 승객이 많은지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전차는 운전기사가 종을 댕댕 치는데 그게 출발 신호였던 것 같다. 해마다 한강에 물난리가 나서 홍역을 치른 적도 여러번 있었다. 범람한 한강물이 역사(驛舍)는 물론 창순이 살고 있는 동네 반은 잠식하고 멀리 흑석동까지 물이 들이 닥쳐 수많은 수재민이 발생했었다.
그러더니 어느날 기차 역사는 전철 역사로 바뀌고 교통수단의 대혁신이 일어나면서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노량진은 일제 강점기 때는 경기도 시흥군이었다가 해방이 되면서 서울로 편입 됐는데 창순이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영등포구였다가 관악구로 다시 동작구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선거구도 여러번 바뀌었다. 해가 갈수록 교통의 발달하면서 인구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40여 년 전 혜화동은 지금의 압구정동과 같았다. 정부 요원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었는데 창순이 다니는 학교와 담장 하나 사이로 내무무 장관이 살고 있어 눈길도 주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지곤 했었다. 학교 진입로에 장면 총리 생가가 있었고 봄이면 진입로에 벚꽃이 만개해 한폭의 풍경화를 연상케 했다.
어느날 창순은 하교 길에 초등학교 동창인 영실이를 만난 적이 있었다. 영실은 그가 다니는 바로 이웃 여자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 사실을 입학하고 나서 한 달 쯤 되어서야 알았다. 마침 벚꽃이 혜화동 일대를 덮으면서 꽃잎이 눈처럼 펄펄 날리던 봄날이었다.
봄 향취에 취해 정신없이 걷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반갑다며 가슴을 턱 쳤다. 문득 정신 차리고 쳐다보니 영실이었다. 허리에 주름을 넣어 바짝 조여 맨 감색 교복을 입은 그녀가 창순을 향해 반갑다며 활짝 웃고 있었다. 예뻤다. 물 오른 벚꽃처럼 싱그럽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너 ◯◯ 고등학교 다니는구나.”
영실이가 그의 교모를 보고 말했다. 이상하게 가슴이 설렜다. 그녀의 부푼 가슴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어릴 때와 달리 그녀는 성숙한 여인의 자태를 하고 있었다. 몸매가 육감적이었고 볼 한 가운데 보조개가 패여 웃을 때마다 애교가 넘쳤다.
영실이와 창순은 초등학교 입학할 때부터 4학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한 반에서 공부했다. 집도 바로 윗 동네에 살아 집안끼리도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녀의 가족은 넓은 마당과 한 겨울에도 찬물 더운 물이 나오는 양옥집에 살았는데 아버지는 고위 공무원이었다.
영실이는 곱상한 외모에 애교가 많았는데 공부는 중간치를 밑도는 수준이었다. 언젠가 동네 아줌마들끼리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5살 때 친척을 통해 입양됐다고 했다. 또 다른 아줌마는 영실이는 아버지가 밖에서 낳아온 아이라고 했다.
어쨌거나 영실이는 가족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제 친부모 밑에서 구박 받고 자라는 아이보다 훨씬 유복하게 자라 일찌감치 시집을 갔다. 그녀는 보조개가 패인 얼굴로 자꾸만 웃었다. 버스 정류장 맞은편으로 극장이 보였다. 그녀가 극장 간판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영화 볼래?”
‘에덴의 동쪽’ 당시 유행하던 영화였다. 외국 영화배우가 그려진 간판은 호기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창순은 속으로 생각했다. 여기서 봤다간 당장 훈육주임한테 들킬 텐데. 더구나 지금은 교복 입은 상태이고. 차라리 충무로 가서 사관과 신사를 보자고 할까.
그래도 당시 풍습으로 보아 남녀 고교생이 교복 입고 영화관에 출입하는 건 날나리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누군가의 눈에 띠기라도 하면 교무실에 불려가 혼쭐 날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영실이에게 충무로로 가자고 제안했다. 영실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좋아라고 응수했다.
그날 둘은 버스를 타고 충무로로 진출했다. 영화 간판으로 도색한 거리는 황홀하리만치 운치가 있었다. 스카라 극장에서 사관과 신사가 상영되고 있었다. 둘은 누구랄 것 없이 극장에 들어섰다. 교복 입은 모습을 보고도 매표원은 말없이 들여보냈다.
화면에 자막이 들 때마다 둘은 숨죽여 글자에 주목했고 몰입했다. 극장을 나온 뒤 둘은 충무로 거리를 걸으며 장래의 꿈을 이야기했다. 영실이는 사고방식이 단순했다. 장래의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현모양처라 대답했다. 한심했다. 그것도 꿈이냐고 했더니 자신은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그때 어른들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영실이는 개구멍받이라더라. 근본을 알 수 없어 누구 씨인지, 뻐꾸기 둥지 알인지.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람. 그녀는 누구보다 행복하고 유복해 보이는 걸. 돈 한푼이 없어 절절 매는 친부모 밑에서 살다가 상급학교 진학도 못하고 공장으로 생활전선으로 내쫒기는 아이들도 상당수로 많은데 그에 비하면 영실이는 행운아였다.
학기가 바뀌고 거리에 낙엽이 깔리는 가을날이었다. 친구들과 창경궁 앞을 지나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등학생 커플이었다. 대담하게 둘은 손까지 잡고서 데이트 중이었다. 허리가 잘록한 여자애는 말할 때마다 남자애의 어깨를 주먹으로 때리며 웃었다.
남자애도 키가 훤출하고 잘생긴 편이었다. 그들이 돌담을 지나 비원 쪽으로 향할 때였다. 창순은 여자애가 궁금해 일부러 그들 곁으로 지나가며 흘끔 쳐다 보았다. 그때였다. 둘의 입가에서 동시에 탄성이 터져나왔다.
“영실아!”
“창순아!”
옆에 서 있던 남자애도 같이 말했다.
“창순이, 너 우리 초등학교 동창 맞지?”
셋은 길거리에서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세월이 인연이라는 게 묘했다. 이렇게 한꺼번에 만나다니. 그날 셋은 비원 돌담길을 돌아 가을을 만끽했고 안국동에서 화랑 구경을 하다가 귀가했다. 그때 만난 초등학교 동창 민욱이는 나중에 지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민욱이는 현철이 여동생과 결혼했는데 장인의 뒷배가 좋았다고 했다. 영실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도에 있는 전문대학에 입학했는데 공부는 뒷전이고 연애만 골몰하더니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다. 그 후 3년 만에 이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 이유가 황당했다.
그녀의 출신 배경을 안 시집에서 그것을 꼬투리 삼더니 과거의 행실도 문제 삼았던 모양이다. 그녀의 연애 경력이 워낙 화려한 데다 혼수 문제도 거론됐다고 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남편이 그녀에게 실증을 느낀 나머지 잦은 구타를 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이혼은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남자에게는 조강지처 여자에게는 일부종사란 개념이 뿌리박힌 시대였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돼 친정으로 쫒겨간 영실은 집안의 수치가 되어 구박을 면치 못했다. 딸린 자식이 없는 것만으로 천만다행이란 표현으로 그녀는 재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흔한 자격증 하나 없이 졸업장 하나 달랑 들고서 맨몸으로 시집을 갔으니 신세가 딱하게 된 것이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그녀로 인해 영실이 부모님은 이혼 직전까지 갔었다고 한다. 영실이 밑으로 남동생이 있었는데 그애 역시 혼외 자식이었다.
영실이와 다른 점은 아빠의 친자가 맞는데 영실이는 전혀 피 한방울 안 섞인 남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영실이 엄마는 친 자녀가 없는 계모였던 것이다. 젊은 때는 자식 못 낳은 죄로 성실하게 의붓 자식들을 키웠지만 세월이 지나자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의붓 자식들한테 향하던 돈과 관심이 자신에게 쏠리면서 이기적으로 돌변한 것이다. 이혼한 지 일 년 만에 영실은 재혼했다. 애 둘 딸린 홀아비였는데 지독한 수전노였다고 한다. 꼭 필요한 생활비 외에는 단 한푼도 그녀에게 주지 않고 집 밖으로는 발 그림자도 내비치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반찬거리나 옷가지도 직접 제 손으로 사들고 왔다. 영실에게는 자식들 유모 노릇이나 잘하라며 아예 식모 취급을 했다. 그러더니 어느날인가부터 친정에 가서 사업 자금 좀 융통해 주라고 볶아대기 시작했다. 시업이 어렵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처갓집 재산을 빼내기 위한 수작이었다. 영실이 부모님은 단번에 거절했다. 그러자 아내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는 영실이가 이혼 못 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심하게 닦달했고 노예처럼 대했다. 영실이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다 술 중독에 빠졌는데 그걸 몰래 본 전처 아들이 제 아빠에게 이르는 바람에 그녀는 무수한 치도곤을 당했다.
참다 못한 영실이가 이혼 카드를 꺼내 들었을 때 남편은 몹시 당황했다고 한다.
설마 니가….
그러면서 위자료는 한푼도 줄 수 없으니 맨 몸으로 나가라 했다. 그때 영실이는 임신 3개월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지워야 하니 중절 수술비라도 달라고 했다. 그러나 남편은 니 아이니까 니가 알아서 하라고 했단다. 그녀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중절 수술을 했고 맨몸으로 집을 나왔다.
이후에 들은 소식은 이러했다. 영실의 전 남편은 영실이가 집을 나가기 전부터 술집 마담의 꾀임에 빠져 전 재산을 투자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몽땅 사기 당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그는 술집 마담이 일부러 사기친 게 아니고 그녀 역시 지인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한다.
끝까지 술집 마담을 감싸고돌던 그는 있던 집마저 날려버리고 그녀와 살림을 합쳤다. 한마디로 미친놈이었다. 술집 마담은 전처 자식들을 굶기고 구박했다. 아이를 임신했지만 모두 유산했다. 그녀는 아이를 잃자 실성해 다시 술집을 나가기 시작했고 그에 광분한 남편은 음주운전을 하다 교통사고로 급사했다.
그런데 우스운 건 영실이의 태도였다. 그런 것도 전 남편이라고 장례식장에 찾아가 울고 불고 난리를 쳤던 모양이다. 전처 자식들은 그녀를 보고도 쮸뼛거리며 인사도 안 했다. 술집 마담은 건질만한 재산이 하나도 없는 걸 알고는 장례식도 치르지 않고 도망쳤다.
남겨진 아이들은 친 외삼촌에게 맡겨졌다가 다시 보육원으로 쫒겨갔다. 영실이는 한동안 반쯤 실성한 듯 지내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 생모가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간 것이다.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이 후 그녀의 소식은 뚝 끊겼다. 그런데 창순의 마음속에 그녀에 대한 연민의 정이 자라고 있었던 모양이다.
가끔씩 길을 가다 영실에 대한 생각이 문득 문득 떠오르는 것이었다. 노량진은 해가 갈수록 변신을 거듭했다. 창순이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 입시학원이 생기더니 나중에는 역 근처가 학원가로 변했다. 유명하다는 입시학원이 줄을 잇더니 그에 따른 음식점과 하숙집 공부방이 생겨났다.
지방에서 올라온 재수생들이 기거할 곳이었다. 그러더니 학원가를 비집고 취준생들을 위한 학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각종 공무원 학원과 요리학원 순위고사를 위한 임용고시학원과 함께 컵밥 거리도 생겨났다. 골목 골목마다 저가의 음식점과 공부방들이 차지하더니 나중에는 주택가 거의 대부분이 고시텔 원룸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터넷 온라인이 성행하면서 차츰 유동인구가 줄기 시작했다. 굳이 노량진까지 진출하지 않아도 온라인으로 학원 수강이 가눙해지면서 지방에서 유입되던 인구가 줄어든 것이다. 한때 노량진은 신림동과 더불어 고시텔 일색인 적이 있었다.
사법고시와 국가고시를 위한 수험생들이 열공하면서 많은 합격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법고시가 폐지되고 수험생들이 떠나면서 집세는 폭락했고 매물도 줄었다. 그나마 신림동쪽은 태세에 대비해 가격을 낮추어 활로를 찾았는데 노량진은 끝끝내 집세를 내리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아예 매물조차 끊겼다.
창순은 왜소한 체격에다 소심한 성격이라 연애도 제대로 못해보고 순진무구 그 자체였다. 그런 그가 대학 시절 낭만을 꿈꿀 수 있었던 것은 미팅에서 만난 현정 때문이었다. 그녀는 동숭동에 있는 교대에 다니고 있었다. 현정은 키가 작고 수줍음이 많은 듯 보였지만 한편으론 욕심이 많고 당찼다.
사귄 지 일 년쯤 되었을 때 졸업해 초등학교 교사 발령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교대는 2년제였다. 자신과 교사는 잘 맞지 않는다며 교대를 지원한 것에 대해 후회하는 말도 했다. 그리고 자신은 누구보다 현실적이고 이기적이라는 것을 은연 중 나타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창순은 오히려 그런 그녀의 태도가 좋았다. 자신에게는 없는 당당함과 굳건한 자신감이 마음에 들어 절절 매다시피 그녀에게 이끌려 갔다. 발령을 기다리던 그녀는 서울에 이미 티오가 꽉 차 있어 경기도로 갈 수밖에 없었다.
서울을 떠나 낯선 타관에 머물자 이질감과 함께 두려움을 호소했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발령받은 곳은 동두천 근처에 있는 도서벽지형 학교였다. 덕분에 수당은 늘었지만 시골 정서가 맞지 않는다며 자주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또 집안에서 매일 맞선 보라고 성화한다고 암시 섞인 말도 했다.
그 말을 듣고도 창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은 나머지 학기도 다 마쳐야 하고 군대도 갔다 와야 하고 또 부모님과 동생들도 책임져야 했다. 자신보다 어린 남동생들은 중학교 고등학교 재학 중이었고 어린 여동생은 이제 막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부모님은 그에게 장남으로서 책임감을 강조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는 어깨가 반은 늘어난 것 같았다. 특히 막내 여동생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어리다는 것이었다. 여동생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어린 아기였다.
학교에만 다녀오면 가족 모두 아기처럼 업어주고 떼를 써도 달래 주기만 했다. 숙제도 오빠들이 달려들어 모두 해주었다. 그는 군대 가기 전까지 막내 여동생 용돈 주랴 숙제 해주랴 바빴다. 때로는 말도 태워 주고 팔 그네도 태워 주어야 했다. 어쩌다 그 이야기를 현정한테 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창순은 현정을 좋아했지만 섣불리 프러포즈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런 창순의 소극적인 태도를 내내 못 마땅해 하다가 그가 군대 간 사이 결혼해 버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교직도 사표 내 버렸다. 자신과 교직은 처음부터 맞지 않았다고 한다.
교사 재직 3년을 못 채웠기에 그녀의 교사 자격증은 저절로 취소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재력 있는 집안의 차남이었는데 보통 여자와 달리 당차고 도도한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어 만나자마자 청혼부터 했다고 한다. 현정이 아이들 가르치느라 다리가 아프다고 하자 당장 그만두라고 해 그녀는 내친 김에 시골 생활을 정리하고 왔다고 한다.
창순은 군대에 있는 동안 그녀가 결혼한 사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가 결혼한다는 편지가 도착하자 군 검열단에서 없애버리고 전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쩐 일인지 휴가를 신청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혹시나 그가 충격을 받아 탈영이라도 할까봐 미리 차단해버린 것이다.
제대한 다음 현정의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엔 어리벙벙한 느낌이었다. 짐작 못한 건 아니었지만 충격적이었다. 누구보다 이기적인 그녀가 결혼을 쉽게 결정했을 리가 없었다. 어지간히 대단한 상대였던 모양이다 생각했다. 창순은 복학해 나머지 학기를 마치고 취업했다.
그리고 오로지 가족들을 위해 헌신했다. 특히 막내 여동생의 대학 진학을 위해 물심양면 힘썼다. 시험 때면 꼭 붙어 앉아 시험공부를 도왔고 어떤 전공과목을 택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한 그를 가족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고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창순은 남동생 둘 다 군대 마치고 취업할 때까지 학비를 혼자 감당했고 여동생이 대학 들어가 졸업할 때까지 결혼도 늦췄다. 결국 그는 삼십대 중반이 되어서야 회사 내 동료와 결혼했다. 그리고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과 동시에 분가했다. 이제 내 책임 다 했으니 홀가분하게 살고 싶다고 대놓고 말했다.
남동생들한테 부모님 생활비를 공동 부담하자고 요구했다. 장남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해놓고 생색내는 거냐며 가족은 모두 쓴소리를 했다. 그때 여동생이 나서서 일을 무마시켰다. 이젠 오빠도 좀 편히 쉬게 내버려둬, 그만큼 울궈 먹었으면 됐지 또 뭐가 모자라서 난리야?
여동생만큼은 오빠에게 받은 사랑을 잊지 않고 있었다. 사실 주변에 보면 자신만큼 여동생을 애지중지 하는 친구도 없었다. 그런데도 가족들은 너무도 당연히 여겼다.
하나밖에 없는 제 여동생한테 그만큼도 못해? 창순은 신혼생활을 임대 아파트부터 시작했다. 아끼고 모은 돈으로 부은 청약주택이었다. 이후로는 아내와 자식만을 위해 살았다. 부모님은 섭섭해 하는 눈치였지만 손주가 태어나자 태도가 백팔십도 바뀌었다.
제사 지내 줄 장손이 태어났구먼.
아이가 할아버지를 꼭 빼어 닮았다며 좋아 어쩔 줄 몰라했다. 아내는 둘째 는 딸을 출산했고 아이들 교육비 핑계로 맞벌이를 시작했다. 자연히 아이들은 노부모 차지가 되었다. 생활비를 갑절로 올려 보내 주었고 평생 헤매던 돈 걱정에서 벗어난 때문인지 좋아라 했다.
아이들이 자라 중 고교에 진학할 무렵 역 근처에 컵밥 거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그때부터 집 밥 대신 매식을 좋아했는데 특히 컵밥을 좋아했다. 3000원에 계란 후라이와 고기 야채가 섞인 일품 요리 맛이 좋다는 것이었다. 취준생 언니 오빠들 틈 사이에 끼어 먹는 맛이 꿀맛이라고 했다.
아이들은 제 엄마를 닮았는지 욕심이 많았다. 특히 경쟁심이 강했는데 지고는 못 견디는 것이 외가 쪽을 닮아 있었다. 한번은 장인이 시의원 선거에 나선 일이 있었는데 온 집안이 출동해 난리가 났었다. 아내의 가장 큰 걱정이 떨어지면 어떡하나였다.
장인은 일찍부터 재리에 밝아 부동산 쪽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었다. 그 아끼고 아낀 재산도 선거운동을 위해 대출 받아 썼다. 정당을 잘못 택한 탓인지 장인은 시의원 선거에 떨어졌다. 심심하면 아내에게 건너오라고 하고는 장탄식을 늘어놓았다.
시대와 상황이 바뀌었는데 옛날 사고방식만 주장했으니 떨어진 게 당연했다. 그런데도 아내는 끝내 장인 편만 들었다. 창순이 회사에 입사에 정상적인 승진 코스를 거치는 동안 세상은 이념과 가치관의 대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평생 직장이 사라지고 명퇴 황퇴 바람이 불면서 승진이 가장 큰 퇴출의 원인이 되었다. 호봉이 높을수록 회사에서 잘리는 일 순위가 된 것이다.
일반 직원과 달리 간부직은 노조가 없어 어느날 갑자기 백수가 되어 길거리로 쫒겨났다. 나이대로 보았을 때 그들은 모두 창순과 같은 베이비붐 세대였다. 戰後(전후) 가난한 세대에 태어나 범생이로 살아온 죄라곤 성실밖에 없는 중년 남자들이 퇴출 대상이 되어 마구 길거리로 내몰리고 있었다.
다자녀 시대에 태어나 가족의 생계를 어깨에 짊어지고 노부모 봉양하고 자녀 교육에 온몸 부서져라 일해 온 결과치고 너무 처참했다. 누군가 말했다. 창순과 같은 세대를 가리켜 샌드위치 세대 7080 세대 베이비붐 세대라 했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층층시하 시부모 시집살이에 봉제사까지 자녀 양육에 세월 바쳐 봉사하다가 마지막에 버림받는 시대라 했다.
이제 더 이상 시부모 노후를 책임지는 세대는 안 나타날 테니까. 창순이 젊었던 시절만 해도 제사 지내줄 아들은 필수 요소였다. 하지만 세상은 디지털 인공지능이 진화하면서 해가 갈수록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출생인구도 감소했다.
그뿐 아니라 비혼이란 신종단어가 생겨나면서 아예 대세처럼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젠 자식들에게 결혼하란 말도 함부로 하면 안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더 나아가 캥거루족 니트족이란 신종단어가 생겨나면서 다 늙어서도 자식들 뒷바라지에 허리가 휜다고 했다.
또 결혼한 자식들이 맞벌이를 핑계로 손주를 키워 달라고 데려오면 어쩔 수 없이 맡았다가 온 몸의 관절이 통증을 일으킨다고 했다. 그는 아이들과 대화할 때마다 엄청난 세대차이를 경험했다. 요즘 젊은 세대는 희생이란 단어를 몰랐다. 왜 희생을 해야 하냐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제 한 몸 편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미래에 대한 포부는 아예 없었고 도덕관념도 희박했다. 가장 충격적인 건 연애나 결혼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고 부모의 미래에 대해서도 아예 무관심했다.
하긴 제 앞길 헤쳐 나가기에도 힘든 세상이다. 낭만이 사라진 대학은 취업 준비소로 전락했고 인성(人性)은 더 사막화 되었다. 요즘 대학생들은 연애를 하지 않는다. 스펙 쌓기에 바쁘고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날 그는 깜짝 놀랄 기막힌 소리를 들었다.
아들과 딸이 동시에 비혼(非婚)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는 너무 충격을 받아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는데 그 뒤에 나온 말이 더 기가 막혔다. 금수저가 아니라는 게 원인이었다. 순간 창순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어서는 부모와 동생들 뒷바라지에 흔한 외국여행 한번 안 가본 자신이 아니었던가.
평생을 가족을 위해 헌신했는데 그 마지막 희망인 자식들이 금수저 타령을 하다니? 왜 요즘 젊은층들이 비혼과 출산을 꺼려하는지 알 것 같았다. 부모가 들으면 기함할 소리를 하고 나더니 요즘 세상에 자식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다. 제 부모가 할 소리를 지들이 하고 나서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저런 걸 손주라고 제사 지내줄 장손이 태어났다고 기뻐하던 부모의 모습이 생각나 눈물이 흘렀다.
“아빠 왜 울어?”
딸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러자 아내가 옆에서 말했다.
“그래, 그것도 건강하고 힘 있을 때 이야기지 늙어봐라, 꼭 독신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거 아냐? 요즘은 돈 없으면 장례도 못 치르고 납골당도 못 들어가.”
영악한 젊은 것들은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하려 든다.
“그래도 좋은 짝 만나봐라 결혼 안 시켜준다고 난리칠 걸.”
“그렇지도 않아, 결혼했다가도 이혼하는 커플이 얼마나 많은데? 미래도 불투명한 결혼을 뭐하러 해? 그냥 내 마음 편하고 즐거우면 그만이지.”
“그래도 한번 해보고 나서 후회하는 건 어떨까?”
“엄마는 맨날 기운 없다. 뼈마디가 쑤시고 아프다고 하면서 그런 말이 나와?”
딸은 고개를 흔들더니 핸드폰에서 신호음이 울리자 재빨리 제 방으로 들어갔다. 눈치를 보면 분명히 사귀는 남자가 있는 것 같은데 한사코 결혼은 않겠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세월 따라 사고방식도 변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것만큼은 잘 되지가 않는다.
친구들이 모일 때마다 노후대책에 대해 이야기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자식한테 올인하지 말고 각종 노후대책 하나쯤은 들어 주어라. 특히 실비보험은 필수로 들어 놓아야 늙어서도 찬밥 신세 면한다. 그러면서 하나같이 하는 말이 우리만큼 불쌍한 세대도 없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점점 퇴직할 시기가 다가오는데 그는 자리에만 누우면 걱정으로 잠을 설쳤다. 다행히 승진 기회를 놓쳐 이사(理事)까지는 오르지 않은 게 얼마나 천만다행인지 몰랐다. 퇴근 후 거리를 걸으면 언제나 마음이 비감했다. 세월은 앞서 가는데 생각은 뒷걸음쳐 옛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어느 가을날 낙엽이 거리를 뒤덮던 날 그는 동숭동 거리를 찾았다. 4호선 전철에서 내려 밖으로 나왔는데 동숭동 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연극 포스터로 도배되다시피 한 거리는 많은 젊은이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카페나 편의점 하다 못해 음식점까지도 모두 예술을 표방하고 있었다.
광장에는 무대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비보이들의 현란한 춤공연과 기타를 치면서 노래하는 중년의 모습도 있었다. 한쪽에선 연극관람 하라며 호객하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건물마다 뿜어내는 불빛은 경제대국이 아니냐며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거리는 고급 음식점 건물 일색이었고 예술기관을 알리는 이정표가 여기저기서 보였다. 그는 잠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 기분으로 거리를 돌아다녔다. 연극 포스터를 볼 때마다 연극배우가 너무나 부러웠다.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예술을 만끽하는 최대 행복군이 그들이라 여겨졌다. 세상이 돈이 다가 아니었다, 품고 있는 이상(理想)과 꿈이 더 먼저였다.
그건 어떤 가족애나 책임감 보다 더 앞서는 더 긴박한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늘 돈이라는 환상과 현실에 묶여 정체성을 잊고 살아가는 것이다. 걸음을 이화동 쪽으로 옮기다 그는 문득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초 증학교를 노량진 근처에서 마치고 처음으로 한강 다리를 건너 진출한 곳이 고등학교였다.
그것도 당시 가장 번화가였던 혜화동이었다. 당시 혜화동은 동숭동과 마주하고 있었는데 유명한 제과점과 서점이 있었고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데모 물결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젊은이들 가슴에는 애국심과 정의가 살아 있었다.
그가 다니던 학교 주변으로 달동네가 형성돼 있었다. 산꼭대기까지 들어찬 판잣집과 수많은 계단을 오르던 발걸음들. 그리고 교각 밑을 흐르던 더러운 개천물. 그가 졸업할 무렵 그곳에 재개발 바람이 불어 닥치고 있었다. 산이 잘려져 나가고 복개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눈물짓던 생각이 났다. 헐려진 자리에 관공서가 들어서고 상가가 들어섰다. 그리고 잘려져 나간 산자락에는 아파트 군단이 들어섰다. 예술의 거리로 변한 다음부터는 찾지 않았던 것 같다. 딱 한번 아내와 연애할 때 연극관람을 위해 찾은 것 외에는.
문득 영실이 생각도 났다.
고등학교 다닐 때 바로 이웃 여고에 다니던 영실이를 우연히 만나 충무로 있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기억이 났다. 풋풋한 감성으로 충무로 거리를 걸으며 말도 안 되는 미래를 꿈꾸던, 그땐 지금의 이 모습은 상상도 못했었다. 그저 성실하게만 살면 미래가 보장되는 줄 알았다.
지금처럼 인터넷과 인공지능 세상이 오리라곤 상상도 못했었다. 자신이 공학도임에도 그랬다. 그도 회사에서 경력으로 버티곤 있지만 언제 후배 세대에게 밀려날지 아슬아슬했다. 퇴직하면 국민연금으로 생활이야 하겠지만 남아도는 시간을 어떤 식으로 처리해야 할지 그마저 걱정이었다.
친구들 중에는 손자를 여럿 둔 치들도 있었다. 그들은 손자 자랑을 늘어지게 했지만 그것도 젖먹이 때나 그렇지 좀 더 자라면 그런 소리마저 쑥 들어갔다. 그는 자식들이 대학 졸업하면 앞날은 알아서 개척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금수저 운운하는 소리 듣기 싫어 독립심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자식 둔 부모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었다. 다른 건 다 내 마음대로 되는데 자식만큼은 내 마음대로 안 되더라.
창순은 퇴직 시기가 점점 다가옴에 따라 아내와 함께 노후대책에 대해 의논했다. 아내는 팔자 좋게 외국여행이나 다니자고 했다. 여행 경비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여행. 참 설레는 단어였다.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여행 한번 멋지게 떠나 보았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던가.
그러나 일평생 일중독에 매여 살다보니 그마저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건 마음먹기 나름이다. 그는 아내에게 여행과 전원생활을 의논했다. 서울 근교 강가 근처에 전원주택에 들어가 채소나 가꾸며 살자고 제안했다. 반대할 줄 알았는데 아내는 흔쾌히 좋다고 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나서며 말했다.
“우리 둘 다 버려두고 엄마 아빠 둘이서만 경치 좋은 곳으로 가 살겠다는 거야.”
“너희들은 졸업하면 알아서 제 갈길 가야지. 언제까지 엄마 아빠만 바라보고 살 건데? 더구나 결혼도 않겠다며.”
“몰라 몰라, 난 엄마 아빠랑 같이 살 거야. 무서워서 어떻게 떨어져 살라고.”
딸은 어린 아이처럼 말했다. 아들은 스펙을 쌓아 취직은 걱정 없다고 했지만 딸은 겁이 많아 직장생활 하는 걸 미리부터 두려워했다. 퇴직을 몇 달 앞둔 어느날이었다. 창순은 토요일 집을 나섰다가 노량진 역 근처를 걷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세상이 험하게 변해 있었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역에서 빠져나와 어디론가 급하게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코로나로 직격탄을 맞은 음식점들이 줄 폐업을 했는데 그건 컵밥거리도 마찬가지였다. 일렬 종대로 늘어선 컵밥거리는 문을 내린 채 단체 휴업 중이었다.
한때 인터넷 매체에 떠들썩했던 컵밥 거리가 학원생의 감소와 코로나로 인해 줄 폐업한 것이다. 발걸음을 신중앙 시장으로 옮겼을 때 건물마다 광풍같은 음악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신세대 N 세대를 겨냥한 상술이 음악과 함께 발길을 끌고 있었다.
창순이 어릴 때만 해도 주택가였던 거리가 한결같이 음식점 아니면 커피 전문점으로 변해 있었다. 학원생과 취준생들을 위한 뷔페집도 성행 중이었지만 손님이 대폭 줄어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것 같았다. 중앙시장 옆으로 오래된 교회가 보였다. 어릴 때 친구들과 어울려 몇 번인가 갔던 교회였다.
그 교회 위로 상상 꼭대기 달동네가 형성돼 있었다. 바로 초등학교 동창 영미가 살던 루핑을 얹은 판잣집 동네였다. 그 한서린 동네가 거대한 아파트 군단으로 변해 있었다. 50년도 넘는 세월을 뛰어 넘어 변하지 않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기와집이었던 교회도 신축을 거듭해 웅장한 건물로 변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외국인들과 자주 마주쳤다. 동네 골목길에도 아기를 유모차에 태운 흑인 부부가 핸드폰으로 시끄럽게 떠드는 모습도 자주 목격됐다. 육중한 몸집을 흔들며 슈퍼마켓에서 물건 사는 동남아인들도 많았다. 모두 외국인 노동자들이었다.
요즘 웬만한 시골 동네에 가면 베트남 여자들을 볼 수 있다. 시골 군 단위나 면 단위에 가도 마찬가지다. 커다란 현수막에 국제결혼 알선이라는 제목 아래 베트남 신부 정절 최고라는 문구도 같이 쓰여 있다. 단일 민족이라는 국가적 명예가 스러지고 있었다.
아랍권에서 온 신부로 말미암아 가정 파탄 난 집안도 여럿 있다는 소식이었다. 취업을 목적으로 왔다가 영주권을 따내기 위해 결혼한 뒤 돈만 챙기고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케이스다. 참 이상한 일도 다 있지.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사기 결혼이란 걸 알면서도 왜 속임수에 빠지는 걸까.
창순은 그 점이 가장 궁금했다. 젊은 외국 여자들은 길거리에서 골목에서 큰소리로 자기네 나라 말로 통화하면서 깔깔대고 웃었다. 재미있다는 듯 교활한 표정마저 지으면서. 다문화 시대, 그 단어 뒤에는 말 못한 아픔과 상처가 동시에 숨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꿈도 못 꾸었을 다문화 시대라는 단어에 가슴 저린 슬픔이 느껴졌다. 창순이 옛 방직 공장이 있던 자리를 향해 걷고 있는데 누군가 그의 알길을 가로막았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초로의 남자였다. 그는 창순을 향해 빙긋이 웃어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마치 오래된 지인을 만나 것처럼 반가운 미소가 번져났다. 입가 가득 온화하고 아늑한 미소였다. 창순은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생각이 전혀 안 났다.
“누구?”
남자가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한 손으로 마스크를 내렸다 다시 올려 썼다,
“우리 초등학교 동창 맞잖아? 김창순 맞지? 나 기억 안 나? 6학년 때 같은 반이었잖아.”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도 않은 채 재차 확인만 요구하고 있었다.
“글쎄 아! 이제 생각났다. 반장했던 안경철. 그런데 어떻게 날 알아본 건데?”
“아까 저쪽에서 걸어올 때 눈빛을 보고 알아 봤지. 좀 전에 약국 앞에서 마스크 바꿔 쓸 때 맞구나 싶었어.”
놀라운 기억력이었다. 세월이 50년이나 흘렀는데 알아보다니. 하긴 저 녀석은 초등학교 때도 워낙 머리가 좋아 전교 일등은 맡아 놓고 했었다. 그래서 선생님들의 기대주가 되었는데 장차 판사가 되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가만히 차림새를 보아 하니 반듯한 외모에 어딘지 모르게 귀티가 났다.
“그런데 이 시간에 여기 어쩐 일이야? 혹시 이 근처에 사니?”
“60 평생 이 근처를 떠나 본 일이 없다. 그런데 너는?”
“난 외국에 가 있다가 정착한 지 한 오년쯤 돼.”
외국? 창순은 잠시나마 경철과 어떤 차이(差異)가 느껴져 멍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에게서 어떤 위상(位相)이 느껴졌다. 모르긴 몰라도 저 녀석은 벤츠쯤은 타고 다니겠군. 피부도 나이보다 젊어 보이고 탄력 있어 보였다. 동시에 자신은 왠지 초라하게 느껴졌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에 창순은 잠시 당황했다. 경철은 다시금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동네 산다고 했지. 너 교회 나가니?”
“교회? 아아니 그건 왜?”
“저기 보이는 저 교회 있지?”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은 창순이 어릴 때 몇번인가 나갔던 교회였다.
“나, 저 교회 담임목사다. 시간 될 때 찾아와. 이제 우리 나이도 적은 편이 아니잖아, 죽음에 대해 보험 하나쯤은 들어두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생은 잠깐이지만 죽음 뒤에 영원이라는 내생이 있으니 말이야.”
경철은 품에서 명함을 꺼내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창순도 엉겁결에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 주었다. 경철이 놀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야! 너 성공했구나.”
“성공이라니?”
“너 이 정도면 성공한 거지. 암튼 나중에 만나 이야기 하자. 조금 후에 회의가 있어서 들어가 봐야해. 웬만하면 부인과 함께 우리 교회 나와 알았지.”
경철은 또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교회가 보이는 쪽으로 걸어갔다. 돌아서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너 정도면 성공한 거라니? 알쏭달쏭한 말 한마디 던져 놓고 사라지는 경철의 뒷모습에서 이상한 여운이 감돌았다.
며칠 뒤 창순은 경철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다음 주에 자기가 주일예배 설교하니까 아내와 함께 꼭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단번에 말했다.
“나 얼마 안 있으면 은퇴해, 그리고 나면 경기도 근방에 있는 전원주택으로 이사 갈 거야. 집사람하고 농사나 지으며 살 계획이야.”
“누가 가지 말라고 했냐? 그냥 교회 한번 나와 보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렵냐? 넌 초등학교 동창이 어떻게 목회하는지 궁금하지도 않냐?”
“그럼 딱 한번만.”
창순은 마지못해 대답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아내를 설득해 예배 참석하기로 했다. 아내는 군말 없이 옷을 차려 입고 남편을 따라 나서면서 자꾸 웃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가보는 교회라 했다. 길을 가면서도 연신 상가 구경을 하느라 기웃거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교회 앞이었다.
생각보다 교회가 크고 웅장했다. 교인 수도 꽤 많아 보였다. 입구에서 안내하는 교인이 처음 보는 얼굴이라 그런지 친절하게 대하면서 본당으로 인도했다. 초등학교 때 와보고는 처음이었다. 교회 내부는 음향 시스템이 잘 되어 있고 성가대 쪽에는 가운 입은 젊은 여자들이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미모였다. 이윽고 예배가 시작되고 담임목사가 강대상에 나타났다. 성의(聖衣)를 입은 목사, 경철에게서 어떤 위압감과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그가 입을 열어 설교를 시작하는데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폐부를 찌를 듯이 다가왔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조리 있고 명쾌한 설교였다.
처음에는 간단한 말재주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들을수록 감동이 밀려왔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옆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울고 있었다. 그는 난감하다 못해 창피했다. 공연히 아내를 데리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예배가 끝나 주기를 바라면서 그는 잠시 졸았다. 교인들이 예배실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때까지 아내는 울음을 그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아내의 옆구리를 콕 찌르며 빨리 일어서라고 했다. 그때야 정신이 들었는지 아내는 자리에서 일어서다 말고 휘청거렸다.
그때였다. 경철이 창순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와 주어서 정말 고맙다. 사모님께서도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아까부터 울어, 창피해 혼났네.”
아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빨리 나가자고 채근했다. 그들이 교회 밖으로 나가는데 누군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외마디 소리가 나왔다.
“창순아.”
“영실아.”
40년도 넘는 세월 속에서 영실은 어릴 때 모습 그대로였다. 웃는데 보조개가 패였다. 피부도 팽팽했다. 둘은 반가운 나머지 손을 잡고 계속 웃었다. 뒤에서 보고 있던 경철이 말했다.
“오늘 아예 초등학교 동창회 하자.”
그러자 그 옆에 서 있던 목사 부인으로 보이는 미모의 여자가 말했다.
“오늘 하면 딱 좋지. 나도 동창이니까.”
이거 또 무슨 소리?
창순이 경철의 처를 쳐다보자 영실이 말했다.
“사실 저 목사님 사모님이 우리 초등학교 5년 후배야.”
자신보다 5년이나 후배라면서 영실은 깍듯하게 사모님이라 칭했다.
“그랬구나, 그러면 그동안 쭉 알고 지낸 거야?”
“이야기하자면 길어.”
영실이 경철이 아내를 쳐다보며 말했다. 참 기묘한 인연이었다.
“영실이 넌 이 교회 나온지 얼마나 됐어?”
“한 10년 쯤. 우리 수산 시장 가서 회 먹을까?”
창순은 그렇게 말하는 영실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궁금증이 일었다. 이혼하고 나서 일본 갔다는 소문 있더니 어떻게 이 교회 나오게 되었을까. 차마 물어 보지는 못하고 궁금증만 커졌다. 그때였다. 영실이 창순의 아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말 어려 보이시고 미인이시네요.”
아내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에이 뭘요.”
“그런데 자식들은 다 결혼시켰나요?”
“내년에 둘 다 졸업해요, 결혼은 아직… 취업도 해야 하고요.”
“아! 결혼을 늦게 하셨구나.”
모두 마스크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말했다.
“그런데 사모님께서도 우리랑 초등학교 동창이라니 정말 반갑습니다. 그런데 정말 미인이십니다.”
그 말에 경철이 만면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아무리 동창이라고 해도 초면이라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중년의 나이에도 날씬한 체격에 상당한 미모였다. 그녀가 남편의 얼굴을 마주 보더니 말했다.
“어렸을 때 이이가 저희 옆집에 살았어요, 오빠 오빠 부르다 남편이 되었어요.”
그러자 경철이 말했다.
“미국에 유학 갔을 때 같은 클라스였어, 내가 단번에 알아보았지.”
“넌 사람 알아보는 재주가 있나 보다. 지난번에도 날 알아 본 것 보면.”
“내 직업이 사람 알아보는 데 적격이거든.”
옆에서 교인으로 보이는 중년남자가 경철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그러자 경철이 웃으며 말했다.
“네, 맞아요 모두 초등학교 동창이어요, 바로 저 쪽 너머에 있는.”
그러자 남자는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 웃었다. 순하고 너그러운 인상이었다. 그날 영실과 창순과 경철 부부는 수산 시장에서 사온 생선회를 먹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담소를 나누었다. 50년도 넘는 세월 이야기하느라 그들은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창순은 회에 소주 한잔 마시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참았다. 몸과 기력은 쇠해도 어릴 때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각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창순과 영실은 어릴 때 한강에서 수영하다 빠져 죽을 뻔한 이야기를 하면서 몸을 떨기도 했다.
경철의 아내는 어린 시절, 용산에 사는 친구를 찾아 갔다가 길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국립 현충원으로 소풍 갔던 기억도 떠올렸다. 한참 보물찾기 하는데 비가 쏟아져 대피해야 했던, 그때 영실이는 뛰다가 넘어져 옷이 물에 다 젖었었다. 창순은 이야기를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날 출근하려면 먼저 일어서야 했다. 요즘따라 몸이 이상하게 피곤했다. 역시나 나이는 못 속이나 보다 하다가도 괜시리 슬퍼졌다. 창순이 일어서자 모두 흩어졌다. 경철은 다음주에도 꼭 교회 나오라며 몇 번이나 다짐했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창순은 계속 영미가 생각났다.
그는 이상하게 영미가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살던 상상 꼭대기 판잣집이 떠오르면서 상념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아직 살아 있을까. 험한 세상 살면서 또다른 상처는 겪지는 않았을까. 중학교 시절 우연히 만났을 때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슬픈 눈빛이 가슴에 멍자국처럼 생각났다,
이제 다시 만난다 해도 못 알아보겠지. 세월이 50년도 넘게 흘렀으니까. 창순과 달리 아내는 열심히 교회에 출석했다. 성경공부 반에도 들어가도 기도 모임도 참석하면서 신자가 다 됐다. 교인들과도 잘 어울리면서 우애도 돈독히 쌓는 것 같았다. 창순은 술 담배를 끊을 자신이 없어 자주 주일 예배에 빠졌다.
드디어 창순이 퇴직을 앞둔 이틀 전이었다. 아들이 다가오더니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좋아하는 여자 친구가 생겼는데 결혼해도 괜찮겠냐고. 너무 뜻밖이라 창순과 아내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들은 졸업은 했지만 아직 취업 준비 중이었다.
그렇게 비혼과 무자녀를 주장하더니 결혼해도 괜찮겠냐니?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난감했다. 일단 취업부터 하고 나서 결정하라고 했더니 오히려 제가 반문했다.
“여자 친구 집에서 빨리 하라고 성화란 말이야.”
“뭐야? 그럼 너희들 벌써?”
아내가 뒤로 넘어가면서 기함했다.
“무슨 소리야? 벌써라니?”
창순은 눈치 없게 말하고 나서 아차 싶었다. 어린 것들이 벌써 속도위반한 모양이었다. 아들 녀석이 표정이 기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속에서 알 수 없는 원성이 들려왔다. TV 드라마나 인터넷 상에서 듣던 혼전 임신이 자신 앞에 닥칠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창순은 아들의 뜻에 따라 상견례를 하기로 했고 취업도 빨리 서두르라고 닦달했다. 마음이 한없이 서글펐다. 그는 은퇴 후 가기로 했던 전원생활도 포기하고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벼르고 별렀던 해외여행도 이미 물 건너 간 뒤였다. 그는 아들과 예비 며느리에게 미리 단단히 다짐했다.
“결혼은 하되 반드시 분가할 것이며 아이가 태어나도 키워 줄 생각은 없으니 알아서 해라.”
그리고 나서 아들 부부가 생활할 집을 구하기 위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 다녔다. 어떤 배신감과 서글픔으로 그는 자꾸 화가 났다. 하지만 아내는 별 동요없이 모든 걸 잘 처리했다. 아내는 그와 달리 대범했고 차분했다. 아들의 결혼식을 앞두고 창순은 경철을 찾아가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세월에 대해 장탄식을 늘어놓았다.
범생이로 살아온 베이비 붐 세대의 아픔과 상처에 대해 주저리 주저리 늘어 놓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영미를 떠올렸고 낮은 한숨을 쉬었다. 경철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만히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마치 공감한다는 듯이. 그는 목사관을 빠져 나와 일부러 상도동 언덕배기를 걸었다.
교회에서 언덕 하나만 넘으면 곧바로 상도동으로 연결 되었다.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를 지나 숭실대 쪽으로 걸어갔다. 왼쪽으로 상도터널이 보였다. 상가가 밀집된 골목길을 지나는데 음식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영미네 분식.
어떤 느낌에 따라 그는 무작정 안으로 들어갔다. 4평도 안 돼 보이는 좁은 공간에 여러 명이 칼국수를 먹고 있었다. 그릇 안에 바지락과 큰 새우가 보였다. 군침이 돌았다. 그가 자리에 앉으려는데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다가와 물었다.
“주문하시죠.”
여자는 나이 육십도 더 돼 보이는 뚱뚱하고 약간은 험상궂은 인상이었다. 말투도 뚝뚝하고 정이 없어 보였다. 그는 눈을 들어 사업자 등록증을 보았다. 이름이 김영미로 나와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창순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용카드 대신 현금으로 값을 치르고는 밖으로 나왔다. 거리를 걸으며 생각했다.
세상에 흔하고 흔한 이름이 영미가 아니던가. 무언가 홀린 듯이 들어간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웠다. 이튿날 그는 아내와 함께 분식집을 찾았다. 손님이 없어서인지 주인 여자 혼자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물어 보았다.
“아주머니 초등학교는 어디서 나오셨나요? 제가 아는 분과 인상이 비슷해서요. 혹시 이름이 김영미?”
“제 이름 맞아요. 저는 저 구청 앞에 있는 ◯◯◯ 초등학교 나왔어요, 저희 언니 오빠도 다 그 초등학교를 나왔어요. 그때는 국민학교였는데. 제가 어릴 적만 해도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중학교도 못 가고.”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말했다.
“세상에….”
“벌써 50년도 넘었네요. 방직 공장 뒤로 상상 꼭대기 달동네가 있었는데 그 동네에서도 가장 높은 지대에 저희 집이 있었어요. 집에서 보면 산 아랫 동네가 환하게 보였지요. 집은 바람만 불면 지붕이 날아갈 것만 같은 루핑을 얹은 판잣집이었어요, 저희 아버님이 폐병이 있으셔서 저희 형제 모두 국졸로 마쳤어요, 참 어렵던 시절이었지요. 어머님께서도 고생을 참 많이 하셨었어요. 친구들은 모두 중학생 교복 입고 다니는데 나는 집에서 헐렁한 고무줄 치마 입고 집안일이나 하는데 눈물이 어찌나 나던지.”
여자는 말을 하다 말고 눈물을 질금거렸다. 창순도 속에서 알 수 없는 아우성과 함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 자녀분들은 다 출가 시키셨나요?”
아내가 물었다.
“네, 다들 잘 살아요, 그런데 두 분도 혹시 저랑 같은 국민학교 나오셨나요?”
창순은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잠시 아연실색하는 것 같았다.
“세상에 살다가 국민학교 동창을 다 만나다니, 혹시 저 기억나세요?”
창순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냥 제가 알고 있는 이름이 맞는지 … 혹시나 제가 아는 사람이 맞는지 궁금했어요.”
“하긴 저도 전혀 얼굴이 기억나지 않네요, 세월이 벌써 50년도 넘게 흘렀잖아요. 그런데 엄청 반갑고 좋네요, 댁들도 자녀들 다 시집 장가갔나요?”
“이제 겨우 한 놈 보내려는 중이에요.”
그는 아내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미는 눈물이 글썽한 눈빛으로 말했다.
“국민학교 다닐 때 옆 남자 짝꿍을 제가 좋아했더랬어요, 이름이 뭐였더라, 창 뭐라든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린 시절이라 뭣도 모르고. 아이쿠 제가 별 쓸데없는 소리를 다 하네요, 그럼 안녕히 가시고 다음에 또 오세요.”
창순은 또다시 마음속에서 흐르는 눈물소리를 들었다. 꼭 드라마 속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아들을 분가 시키고 한 달 쯤 지난 뒤였다. 이번에는 혼자서 영미네 분식을 찾았다. 분명히 자리는 맞는 것 같은데 상호가 바뀌어져 있었다. 커피 브랜드점이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는 숭실대가 보이는 쪽으로 걸으며 마음이 아려왔다. 그때 왜 말하지 않았을까. 니가 말하는 그 짝꿍이 바로 나 창순이었다고. 후회 반 아쉬움 반 그는 미진한 그리움에 시달리며 상가 앞을 지나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곳에 아들 부부가 사는 아파트가 보였다. 며느리가 임신 중이라 보양식이 필요할 것 같아 찾아가는 중이었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서로 길을 엇갈리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중에는 세월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자신의 모습도 섞여 있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