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덕 高仁德 (1887 ~ 1926)】 " ‘경북의열단사건’ 자결 기도하고 심장마비 사망"
본관은 제주(濟州)이고, 1887년 경상남도 밀양군 부내면(府內面) 내이동(內二洞)에서 유력 가문의 재산가인 아버지 고삼종(高三宗)과 어머니 윤종이(尹宗伊)의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08년 내일동에 밀양읍 교회(현 대한예수교장로회 밀양교회)를 설립할 만큼 신앙심이 깊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15세 때부터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1908년 대구 계성중학(啓聖中學)에 입학하여 다니다 2학년으로 중퇴하고 밀양기독청년회(密陽基督靑年會) 일을 보았다.
그 후 1918년 11월 만주로 망명하여 지린(吉林)과 상하이를 오가며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하였고,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귀국하여 밀양청년구락부(密陽靑年俱樂部)를 조직하고 유치원을 세워 경영하였다. 국내 일제 기관 총공격 거사를 위해 1920년 봄에 밀입국해 있던 의열단원 중 다수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거사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체포되지 않고 잠행 중이던 이종암(李鐘岩)과 김상윤(金相潤)의 요청으로 귀국할 때 상하이에서 구입하여 가지고 온 폭탄 제조기 및 폭약을 이들에게 제공하여 폭탄 2개를 만들도록 해주었다. 그 폭탄으로 최수봉(崔壽鳳)이 동년 12월 27일 밀양경찰서 투탄 의거를 실행하였다.
1921년 2월 10일 밤에 내일동의 밀양읍 교회에서 밀양청년회, 밀양기독청년회, 밀양여자청년회 공동 주최의 강연회가 개최됨에 약 150명의 청중 앞에 연사로 나서서, ‘안락의 근본은 고초에 있다’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한일 관계와 식민지 한국의 현실을 나무와 해충, 포유류들의 서로 잡아먹음과 잡아먹힘, 해난(海難) 등으로 비유하여 가리키고, “한국 민족은 독립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함은 이민족의 방해가 있기 때문이니, 이천만 민족이 일치 협력하여 그를 배제함에 노력하고 그 필요를 위해 사재(私財)를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 안 그러면 영원히 멸망하게 된다. 경신년(庚申年, 1920년) 중에 우리는 의미 있는 생활을 했는데, 신유년(辛酉年, 1921년) 올해도 다시 분발하여 우리가 절실히 바라는 독립의 목적을 이루어야 한다”라고 역설하니 청중이 모두 격앙되었다.
고인덕 발상식(『동아일보』 1926.12.26) [판형2] |
이 일로 다른 연사 백희원(白熺元)과 함께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동년 3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죄목으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항소하였으나 5월 9일 대구복심법원 판결에서 기각되어 대구와 진주감옥에서 복역하였다. 앞서 동년 4월에는 폭탄 은닉 혐의로 감옥에서 밀양경찰서 형사부장의 취조를 받고 가택수색도 당하였다. 1년 6개월 만인 1922년 가을에 병보석으로 가출옥한 후, 동년 3월 별세한 아버지의 유산 중 농지 일부를 매각한 돈 3,000원을 특파원 편에 중국으로 보내어 의열단 자금으로 쓰도록 하였다.
1925년 만주에서 밀입국한 이종암이 폭탄 거사 자금을 마련코자 경상도 일원의 동지들과 접촉하며 암행하다 11월 6일 경북경찰부의 은신처 급습으로 붙잡힌 후 10여 명 관련자들이 모두 붙잡혀가던 중에 같이 피검되어 경북경찰부로 압송되었다. 취조 결과 5년 전인 1920년 밀양경찰서 투탄자인 최수봉에게 폭탄을 만들어준 사실이 드러나, 1926년 11월 2일 종료된 예심에서 유죄 결정이 내려지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12월 7일부터 대구지방법원에서 개시된 공판에 나갔다 온 후 정신이상 증세가 생겨서, 처방된 약병과 변기를 깨뜨린 파편으로 자기 몸의 여러 부위를 찔러 큰 상처를 입고 병감(病監)으로 옮겨졌으나, 21일 밤에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하였다. 대구형무소 측의 발표 내용은 그와 같았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죽음이라는 의혹도 있다. 10년 구형의 기소는 재판부에 의해 즉시 기각 결정되었고, 유해는 가족(부인과 2남 4녀) 및 친지들이 밀양 선산으로 옮겨 묻었다. 현재는 국립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모셔져 있다.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21.5.9) [판형2] |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1963년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
본관은 제주(濟州)이고, 1887년 경상남도 밀양군 부내면(府內面) 내이동(內二洞)에서 유력 가문의 재산가인 아버지 고삼종(高三宗)과 어머니 윤종이(尹宗伊)의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08년 내일동에 밀양읍 교회(현 대한예수교장로회 밀양교회)를 설립할 만큼 신앙심이 깊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15세 때부터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1908년 대구 계성중학(啓聖中學)에 입학하여 다니다 2학년으로 중퇴하고 밀양기독청년회(密陽基督靑年會) 일을 보았다.
그 후 1918년 11월 만주로 망명하여 지린(吉林)과 상하이를 오가며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하였고,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귀국하여 밀양청년구락부(密陽靑年俱樂部)를 조직하고 유치원을 세워 경영하였다. 국내 일제 기관 총공격 거사를 위해 1920년 봄에 밀입국해 있던 의열단원 중 다수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거사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체포되지 않고 잠행 중이던 이종암(李鐘岩)과 김상윤(金相潤)의 요청으로 귀국할 때 상하이에서 구입하여 가지고 온 폭탄 제조기 및 폭약을 이들에게 제공하여 폭탄 2개를 만들도록 해주었다. 그 폭탄으로 최수봉(崔壽鳳)이 동년 12월 27일 밀양경찰서 투탄 의거를 실행하였다.
1921년 2월 10일 밤에 내일동의 밀양읍 교회에서 밀양청년회, 밀양기독청년회, 밀양여자청년회 공동 주최의 강연회가 개최됨에 약 150명의 청중 앞에 연사로 나서서, ‘안락의 근본은 고초에 있다’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한일 관계와 식민지 한국의 현실을 나무와 해충, 포유류들의 서로 잡아먹음과 잡아먹힘, 해난(海難) 등으로 비유하여 가리키고, “한국 민족은 독립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함은 이민족의 방해가 있기 때문이니, 이천만 민족이 일치 협력하여 그를 배제함에 노력하고 그 필요를 위해 사재(私財)를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 안 그러면 영원히 멸망하게 된다. 경신년(庚申年, 1920년) 중에 우리는 의미 있는 생활을 했는데, 신유년(辛酉年, 1921년) 올해도 다시 분발하여 우리가 절실히 바라는 독립의 목적을 이루어야 한다”라고 역설하니 청중이 모두 격앙되었다.
고인덕 발상식(『동아일보』 1926.12.26) [판형2] |
이 일로 다른 연사 백희원(白熺元)과 함께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동년 3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죄목으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항소하였으나 5월 9일 대구복심법원 판결에서 기각되어 대구와 진주감옥에서 복역하였다. 앞서 동년 4월에는 폭탄 은닉 혐의로 감옥에서 밀양경찰서 형사부장의 취조를 받고 가택수색도 당하였다. 1년 6개월 만인 1922년 가을에 병보석으로 가출옥한 후, 동년 3월 별세한 아버지의 유산 중 농지 일부를 매각한 돈 3,000원을 특파원 편에 중국으로 보내어 의열단 자금으로 쓰도록 하였다.
1925년 만주에서 밀입국한 이종암이 폭탄 거사 자금을 마련코자 경상도 일원의 동지들과 접촉하며 암행하다 11월 6일 경북경찰부의 은신처 급습으로 붙잡힌 후 10여 명 관련자들이 모두 붙잡혀가던 중에 같이 피검되어 경북경찰부로 압송되었다. 취조 결과 5년 전인 1920년 밀양경찰서 투탄자인 최수봉에게 폭탄을 만들어준 사실이 드러나, 1926년 11월 2일 종료된 예심에서 유죄 결정이 내려지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12월 7일부터 대구지방법원에서 개시된 공판에 나갔다 온 후 정신이상 증세가 생겨서, 처방된 약병과 변기를 깨뜨린 파편으로 자기 몸의 여러 부위를 찔러 큰 상처를 입고 병감(病監)으로 옮겨졌으나, 21일 밤에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하였다. 대구형무소 측의 발표 내용은 그와 같았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죽음이라는 의혹도 있다. 10년 구형의 기소는 재판부에 의해 즉시 기각 결정되었고, 유해는 가족(부인과 2남 4녀) 및 친지들이 밀양 선산으로 옮겨 묻었다. 현재는 국립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모셔져 있다.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21.5.9) [판형2] |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1963년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