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 감상 例詩
(1)달 밤
이호우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낯 익은 풍경이되 달아래 고쳐 보니
돌아올 기약없는 먼 길이나 떠나온 듯
뒤지는 들과 산들이 돌아 돌아 뵙니다
아득히 그림속에 정화된 초가집들
할머니 趙雄傳에 잠들던 그날밤도
할버진 律 지으시고 달이 밝았더니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 세상 쉬는 숨결 한 갈래로 맑습니다
차라리 외로울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
(2) 봄의 말
노중석
한 아름
꽃을 안고
등걸마다 다가 서서
마을
구석 구석
향기를 끼얹는데
아무도
낯 익은 얼굴
알아 보 지 못한다
(3) 청맹과니
이봉수
“저는 생선 한 토막을 분명히 훔쳤습니다”
“아니야 너는 절대로 훔치지 않았어”
오히려
도둑맞은 개가
고양이를 감싼다
“훔쳤습니다!”“아니야, 잃어버린게 없어!”
촛불이 흔들리고 천정이 무너졌다
관중은 청맹과니가 되어
까무라쳐 버렸다
(4) 겨울추상화
지성찬
모두를 버린 후에/하늘 바라 서 있구나
하늘 폭 휘감으며/飛天하는 겨울나무
銀白의 휘장이 내리면/ 여기가 바로 천국
장엄한 秘景앞에/ 새들도 날지 못하네
실낱같은 고요로움/ 千의 소리보다 굵고나
죄스런 눈빛으로는/거기 닿지 못하네
(5) 목련꽃 밤은
지성찬
나무는 서성이며
백년을 오고 가고
바위야 앉아서도
천년을 바라본다
짧고나,목련꽃 밤은
한 장 젖은 손수건
(6) 여름
박시교
매미의 음절마다
단 과즙이 떨어진다
활발한 풍향계가
구름을 몰아 오고
바람의
장대끝에서
침몰하는 깊은 바다
(7) 겨울 광릉에서
박시교
세상일 문닫아 버린 겨울 광릉에 가서
발목 잡는 눈에 갇혀 한 마리 짐승 되면
마침내 마음의 귀로 듣게 되는 산 우는 소리
내 몸을 내리치는 그것은 칼바람소리
이 순백의 계절에 홀로 남루한 자, 곧은 의지의 생명들 앞에
더없이 비굴한 자의 상심, 아아 눈숲에 엎드린 작은 나의
짐승이여
타는 듯 핏빛으로 번지는 내 안의 갈증이여
(8) 가을 수채화
김춘랑
까치밥 몇 알 남은
감나무 꼭대기에
집없는 잘새들을
배경으로 앉혀 놓고
갈길 먼
시월상달이
수채화로 걸려 있다
(9) 숨은 나 찾기
--회초리(2)--ㅇ ㅇ ㅇ
복성*에 놀란 마음
좌우를 살펴 보고
편성*에 다친 마음
위 아래 분별하면
시퍼런
쓰린 자국도
숨은 나를 찾아 낸다
* 복성(복聲) : 옛날 학생 훈계용 회초리의 소리
* 편성(鞭聲) :관리처벌용 회초리의 소리
(10) 인도네시아 바탐섬 ㅇ ㅇ ㅇ
볼거리 는 게 없는 바탐섬에 다시 갔다
싱가폴 가까이 있어 못 살아서 가보는 곳
우리의 50년대를 여기 와서 만난다
이름 없는 미개의 섬 우리 기업 인연 열어
오고 오는 코리안이 이웃 같은 사람들,
그렇게 거쳐간 자리마다 우리 내음 배어간다.
물이 흐르듯이 낮은 데로 흐르는 문화,
잘 사는 이웃나라 닮아가며 사는 거지.
망가진 정글을 보며 10년 후를 접는다.
제28회 가람 시조문학상(08.5.13)
*새벽
이우걸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새벽은 새벽이 된다
봉두난발 상처뿐인 제 가슴 쥐어 뜯으며
유백의 찻잔을 만드는
어느 도공의 기도처럼
길은 아직 헝클린 채로 안개속에 묻혀 있는데
조간처럼 달려온 소중한 여백 하나
새로운 출발을 권하는
아 ~ 숨가쁜 초인종이여
*부록. 부록같은
이우걸
각주도 나보다 팔자가 낫다고
뒷 페이지에 앉아서 투덜 거릴 때가 있다.
세상이 그런 투정을
받아 주진 않지만.
서언처럼 유려하게 얼굴을 내밀 수 없고
결론처럼 화끈하게 주장을 펼 수 없다는
카니발 뒷좌석에 앉은
부록들의
불만을
아내의 성화에 못이겨 전세집을 옮기고
아들의 고집으로 전학을 시키면서
김씨는 어쩌면 자기가
부록 같은 생이라고?
........수상 소감 ....... 이우걸
먼저 이 상을 제정하고 관리해 주신 분들 그리고 뽑아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 내색하진 못했지만 가람시조문학상은 꼭 받고 싶었습니다. 현대시조라는 장르를 시로 열어주신 큰 스승의 상이기 때문입니다.
학문으로 시조의 중요성을 증명하고 창작으로 시조형식에 피를 돌게 하신 가람은 그 인품만으로도 국민의 큰 스승으로 소탈 하면서도 격조를 지닌 선비였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특히 시인인 저로서는 생활과 시를 일체화해서 모범을 보여주신 가식 없는 가람의 시풍을 흠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유효한<시조혁신론>의 실천에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그 정성에 대한 격려라고 생각 하니 감회가 적지 않습니다.
무딘 어어의 날이지만 더 갈고 닦아 현대시조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는데 이바지 하고자 합니다.
감사 합니다.
제27회 가람시조문학상 수상작
지팡이
이한성
무심코 손에 주워든 박달나무 막대 하나
어머니가 두고 가신 늙은 발이었다,
한 세상 굴곡진 길을 평발로 걸어오신
앞발이 이끈대로 따라 나선 뒷발처럼
늙으면 지팡이도 의지하는 몸인 것을,
불혹의 고갯길에서 발이 먼저 알고 있다
동지달 찬바람이 나이테를 감는 밤
발목이 붉은 박새 볼에 묻은 흰 점처럼
어머니 놋대접 사랑, 길을 환히 열고 있다
(제5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작품 : 1988)
*戀歌(11) 외 5편*
이 월 수
하이얀 옷고름께 내리던
몇 오큼의 햇살들이
치렁한 머리칼 끝에
꽃등처럼 불 밝히듯
오늘도
귀 기대어 선
발목 시린 내 하루.
기다림의 빈 의자 위에
돌아오고 있을 그대
자꾸만 문틈으로 열리는
두 귀의 그리움은
수천 별
넘치는 반짝거림
눈물의 빛깔이네.
가득히 담겨 쌓이는
청순한 소망은
내 마음 비단 색실 뽑아
그대 눈빛 짜는 것
이 밤도
뜨락에 내려
손톱달을 헤아린다.
*청자 한 점*
대숲에 와 머무는 바람소리
긴긴 밤 결로 삭아 내리고
고운 선 빚어낸 흙의 속살
무지개로 피어 정갈한데
진실로 영혼이 담긴
청아한 눈빛의 그대 감성.
몇 겁으로 흔들어 주는 신비 속
그 내재된 바람의 투망은
손끝으로 불 지핀 침묵
붉은 피가 돌아 귀가 열리고
비로소 참선의 심오한 의미
생수로 넘치는 청자 한 점.
*고향은*
청람빛 고운 하늘은
새살 돋듯
섭리호 감겨오고
잃어 버렸던 그리움의 오한
오늘 따라
사슬로 목을 죈다
고향은
끊길 듯 끊기지 않는
평생 푸른 연분이다.
아직도 전설같은 꽃불
잡초처럼 졌다
살아나고
민들레 씨앗 끈질긴 아미
바람따라 흩어져도
고향은
버릴래도 버릴 수 없는
깊은 사랑 그 점액질이다.
*바람*
바람은 구슬픈 실로폰이 되어
내 시계를 흔들어 주고
문갑 위 향낭을 풀어놓는
세 촉의 한란 그 눈빛마저
끈적한 날을 세우듯
마구 가슴을 달구어 댄다.
물 무늬 정갈한
새벽 강물을 보았는가
맑은 눈빛의 바람소리
소금기로 넘쳐나고
신선한 섭리로 다가온 끝
꽃잎 하나 피우고 있나니.
등짐을 벗어내듯
하루를 풀어놓고
생각의 텃밭에다
한 잎 한 잎 꽃을 피우면
제 마다 살아있음이
바람으로 돋아난다.
*戀歌*
그대의 가슴 안 채마밭에 피는 진실
짙고 붉은 빛깔이야
정을 빚은 마음인데
고여도 마냥 아쉬운 것
아쉽기만 하는 것.
출렁이는 그대 바다 위
노를 젓는 배가 되어
그 고운 노을빛 속에
기다림의 현을 켜면
어느새 지평을 건너
일렁이며 오는 환희.
지성의 꽃잎 따라 그리움을 주렴 엮어
고향같은 그대 품안
한 뜻만을 간직하면
세월의 뜨락 가득히
눈부신 사랑이 피네.
*회향의 노래(1)*
화두 끝 걸린 낮달
창호지마다 묻어나고
짓밟아도 다시 뿌리를 여는
민들레 그 접어둔 속마음이
아직도 지게자리에
바람으로 타고 있다.
동짓달 매운 삭풍
가난마저 돋아나고
군불 지핀 솔갱이 내음
피붙이 그 깊은 정이 되어
내 삶의 옷고름마다
무지개로 뜨고 있다.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사화집『火中蓮』 pp.61∼66)
◐이월수 시인 약력◑
-약력은 『火中蓮』에 수록된 것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 1940년 일본 출생
* 진주여고 졸업
* 1960년 <영문> 추천, 1967년 <시조문학>추천 등단
* 저서 시조집『학연가』, 『인연』 수필집『가슴에 흐르는 빗소리』등
* 경상남도 문화상, 가람시조 문학상 수상
*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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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작품 : 1990)
*對峙 외 5편*
김 춘 랑
兵丁들은 말이 없고
부릅뜬 銃口란다
아무래도 알 수 없는
너와 나와의 對峙
背面한 핏줄은 그래!
하나 푸른 강줄긴데.
보라!
저 나울치는
東海 푸른 물굽이를
밤낮으로 어울려서
相思하는 저 情況을
피 타는 노을을 안고
에닯고 몸이 닳는
해후 푸른 종소리
골골마다 메아리져도
不眠의 歲月속에
對話는 눈 먼 빗장
피얼진
靑史의 恨을
밤새 우는 不死鳥
*새벽바다*
마지막 은혜의 말씀
금빛 날개를 펴고
찬란히 불의 새가
노을깃을 접어간 뒤
체념의
짜디짠 소금을
저며우는 해조음.
아득히 뭍의 기억을
멀어져간 絶海孤島
키 잃은 한 생각의 배
分別없는 길을 열어
외로운
임의 등대는 시방
깜박이고 있는가
비로소 잠을 깨는
悔恨의 내 바다가
한 음계 낮은 곡조의
쏘나타로 뒤채다가
속 삼킨
울음을 터뜨려
해일토록 넘치는가
*우리네 예사 사랑*
한 생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으로도
이 저승 더 밝혀 환할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으로도
사랑을 더러는 더러 마음으로 한다데만-
뻐꾸기 울음이 타는 유월 상순 한나절은
길 떠난 선부님도 목이 타는가
우물가에 새 낭자 눈웃음 건넨 물 한 모금으로도
상사병 몸져서 누운 기찬 사랑도 있다데만-
진종일 비 나리는 음칠월은 녹녹하여
불 지핀 아래 윗목에 살 간지런 우리 사랑
뉘라서 속되다 하고 볼을 붉게 할 것인가
*待日散題*
1. 待春
몇 밤을 손꼽으면
기별 닿은 봄볕일까
고샅 햇병아리 첫 나들이 하는
오늘은 내참 알 수 없네
꽃이라도 필 것 같은
2. 待日
비 갠 뒷날에는
누군가가 올 것 같은
아쉬움 골을 메워
하염없이 젖어오는
기다림
몇 만 주름을
걷어가도 빈 하늘.
3. 待信
정작 보낼 이 없고
더욱 올 리도 없는
오늘 꼭 어디선가
엽서라도 올 것 같아
설레어 바란 洞口앞
우체부도 오지 않네.
*작은 행복론*
무심코 다짐했던
말 한마디 지중(至重)함에
천길의 벼랑 위에서
두렴없이 뛰어 내릴
진실로 용기있는 벗
그 하나가 있다 하면
아무리 작은 아픔이라도
백성들의 것이라면
이 일은 내 큰 탓이라고
크게 말할 수 있는
선택된
백성중에 백성인
왕(王)하나가 있다 하면,
떠날 때 꼭 오리라던
맹서를 굳게 믿어
그 많은 고독한 밤을
혼자 울며 지새우고
센 카락 고웁게 빗은
빈처(貧妻)하나 있다 하면,
*史草를 다시 하며*
모반(謀反)의 칼을 휘둘러 피로 물들인 통곡의 땅
피지 못한 꽃잎의 함성 숨소리도 거친 날에
모래성 드높은 누대 용마루도 빛났던가.
누림도 하! 눈부셔 고개 들지 못한 시절
바람 한 점 없는 날도 들풀들은 누워야 했고
나는 늘 패자편에 서서 오금이 저리었다.
식자(識者)들은 남산 가서 재갈 물려 입 다물고
그 입술 깨물면서 절통하게 무릎도 꿇고
때로는 승자의 뒤편에 줄서고 흔들리는 갈대였다.
꽃도 열흘 안 붉다는 은유 다시 날(刀) 서던 날
큰칼에 조리돌림으로 고개 떨군 자 누구던가
모래성 무너진 자리 들풀들이 기(旗)를 단다.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사화집『火中蓮』 pp.89∼94)
◐김춘랑 시인 약력◑
-약력은 『火中蓮』에 수록된 것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 1935년 7월 30일 경남 고성에서 출생
* 1968년 <시조문학>지의 추천으로 등단
* 1959년 광복예술제를 창설
*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한국문인협회 윤리위원,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경남문인협회 부회장, 고성문인협회 고문, 소가야문화제 집행위원장
* 수상 : 성파시조문학상, 경상남도 문화상, 가람시조문학상, 제2회 경남시조문학상 수상
* 저서 : 시조집 『우리네 예사 사랑』『서울 낮달』『작은 행복론』, 동시조집『산골마을 오두막집』, 시조선집『지부상소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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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작품 : 1991)
*비누 외 5편*
이 우 걸
이 비누를 마지막 쓰고 김씨는 오늘 죽었다.
헐벗은 노동의 하늘을 보살피던
영혼의 거울과 같은
조그마한 비누 하나.
도시는 원인 모를 후두염에 걸려 있고
김씨가 쫓기며 걷던 자산동 언덕길 위엔
쓰다 둔 그 비누만한
달이 한 떠 있다.
*팽이*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비*
나는 그대 이름을 새라고 적지 않는다.
나는 그대 이름을 별이라고 적지 않는다.
깊숙이 닿는 여운을
마침표로 지워 버리며
새는 날아서 하늘에 닿을 수 있고
무성한 별들은 어둠 속에 빛날 테지만
실로폰 소리를 내는 가을날의 기인 편지.
*바다*
알몸의 저녁바다가 유리창에 어린다.
충혈된 항구의 피로 같은 노을이
어부의 구릿빛 이마 위를 바퀴벌레처럼 기어다닌다.
*물*
1.
동생처럼 먼저 잠이 든
아내를 바라보다가
별스런 욕심없이도
그녀를
건너게 되고
우리는
그때 일어나
한 그릇의
물을 찾는다.
2.
놋그릇에 담겨 있거나
더운 가슴에 고여 있거나
더 깊숙한 어디에서도 우리가 만나야 하는
해갈의 고운 영토를
기다리며 사는 것일까.
3.
둔탁한 벽시계가 하루를 밟고 가고
밟고 가며 남겨둔 검붉은 그늘은 자라
어느 역 뜨락엔 지금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달맞이꽃*
작은 웃음 보이며, 맑게 맑게 반짝이며
노을 속에 서 있는 산 개울가의 너는
장님이 데리고 가던
어느 딸애의 살결 같은 꽃.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사화집『火中蓮』 pp.109∼114)
◐이우걸 시인 약력◑
-약력은 『火中蓮』에 수록된 것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 1946년 경남 창녕 출생
* 경북대 사대 역사과, 경희대 교육대학원 졸
* 1973년「현대시학」으로 등단
* 시집『지금은 누군가 와서』『빈배에 앉아』『저녁 이미지』『네 사람의 얼굴』『사전을 뒤적이며』『그대 보내려고 강가에 나온 날은』등, 평론집『현대시조의 쟁점』『우수의 지평』『젊은 시조문학 개성 읽기』등, 시 산문집『나는 아직도 안녕이라고 말할 수 없다』
* 수상 : 마산시 문화상,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성파시조문학상, 정운시조문학상, 경상남도 문화상, 중앙시조 대상, 경상남도 문학상 수상
* 현 경남문인협회 회장, 오늘의 시조학회 부회장, 진해고등학교 교장
(제9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작품 : 1992)
*빈 잔 외 5편* / 홍 진 기
언제나 내 곁에는
빈 잔이 놓여 있다.
가진 것 모두 담아도
차지 않는 이 잔을
단숨에
그대로 들면
은회색 허공이 된다.
언젠가 달빛 한 줄기
이 잔을 다녀가고
아내의 한숨 소리도
가끔은 드나들지만
시대의
증언을 풀면
전쟁같은 물이 고인다.
*낙엽을 쓸며*
혀 끝에 감겨 도는
녹차의 여운 같은
봄처럼 피어오른
여인의 향기 같은
안으로
익는 살내음을
나는 알고 있는가
해마다 이맘 때면
무심히 뜰을 걷다
버릇처럼 쓸쓸하게
낙엽을 쓸지마는
정말로
쓸어야 할 것을
나는 쓸고 있는가
*봄소식*
오밤중에도 내 귀는
열두 폭으로 열려 있었다
일천문을 닫고 사는
모진 세월을 생각하며
떨어도
문틈으로 새는 바람을
막지 않고 있었다
나목이 진저리치다
유령처럼 우는 밤이면
모닥불 사윈 잿빛같은
어둠을 열어제치고
어디쯤
봄이 오는 소리를
내 귀는 듣고 있었다.
*풍경소리*
바람 한 알 건드려도 너는 같이 노래했고
산새 하나 깃을 쳐도 뎅그렁 줄을 골라
속세에
흩어진 정을 온몸으로 말하였다
무섭도록 고요한 날 여운의 실을 뽑아
밤중만 깊어지면 오욕의 귀를 씻고
뎅그렁
달여울에도 후광으로 둘렸다
*아내의 손*
아직도 아내의 손은 땀기가 남아 있다
저승보다 더 시린 이 도시의 막장에서
옹성을
지키는 병사의
이마처럼 끈끈하다
아내의 손가락은 어쩌면 쓸쓸하다
서 돈 짜리 금가락지 들렀다 간 자리에
장난감
흑진주 만한
저승꽃이 피어 있다
*산촌 일기*
한뎃잠에 길들여진
저 자유의 빈 손짓
사는 일 짐이 된다며
소식조차 끊고 사는
누이의
모진 가슴처럼
떨리는 저 매화 가지
양지에 손을 내미는
민들레 속잎에서
포박을 감고 나온
상처들도 참지 못해
밤새워
울던 문풍지
목이 시린 저 청매화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사화집『火中蓮』 pp.123∼128)
◐홍진기 시인 약력◑
-약력은 『火中蓮』에 수록된 것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 1979년 <현대문학> 자유시 천료
* 1980년 <시조문학> 시조 천료
* 한국문협, 국제펜클럽, 현대시협, 시조시협, 시조작가회원, 경남문협 시조분과위원장, 한국문학회 기획상임이사, 가락문학회장, 창원문협, 함안문협 회장 역임, 경남시조시인협회 회장
* 창원대학교 평생교육원, 경남문예대학 강사
* 작품집 5권
* 창원시 문화상, 경남예술인상(본상), 경상남도 문화상(문학)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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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작품 : 1993)
*봄, 아지랑이 외 5편* / 김 정 희
'사람은 하늘이니라'
하늘 말씀 우러르면
언 하늘 맴을 돌던 혼령이 내리시어
아련히 산허리 감도는 도포자락 보이고.
피로 얼룩진 세월
백년도 꿈결이듯
서풍을 마다하고 동풍 따라 나서던
아비의 베잠방이도 먼 들녘에 가물거린다.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꽃보라로 손짓하며 구름결에 나부끼는 것
공중에 걸린 현수막 '개벽'이라 쓰여 있다.
*망월동 백일홍*
'무쇠를 녹이리라'
'무쇠를 녹이리라'
망월동 무덤가를 달구는 저 불가마
장대비 백날을 쏟아도 불길은 끌 수 없고
천둥번개 내리치던
아수라 지옥의 날
사태진 언덕 위에 불기둥으로 솟아
허공에 빛을 뿌리고 몸을 사룬 혼백들.
내 눈물 땅에 묻고
돌아서는 이 길목
은은히 들려오는 우렁찬 저 종소리
에밀레, 종 치는 나무여 네 울음에 발이 묶인다
*어떤 해일(海溢)*
대학로 은행잎이 재채기하며 쏟아진다
때 아닌 황사(黃砂) 한 떼 한치 앞이 몽롱하고
어디쯤 해일이 이는가 포효하는 파도 소리.
밀물을 거느리고 바람기둥 울러 메고
성큼 다가선 태풍의 눈 언저리에
한마당 어우러진 신명 소용 도는 굿놀이.....
무너지는 산의 소리 귀를 막고 듣는다
비 몰고 오는 바람 회오리 감긴 속을
눈앞에 벼랑을 보며 종일 물에 젖는다
*세한도(歲寒圖) 속에는*
하얗게 언 하늘에 별곡(別曲)이 흐르고 있다
서슬 푸른 창대이듯 서 있는 소나무
그 곁에 휘느러진 노목(老木)
예서체 쓰는 날에.
눈 덮인 바닷가엔 솔빛만이 푸르다
용솟음치는 성난 파도 먹물 풀어 잠재우고
적막이 숨죽인 자리
새 한 마리 날지 않았다.
다만, 우주와 교신하는 외딴집 둥근 창 하나
사람은 뵈지 않고 신명만 넘나드는 곳
깡마른 조선의 혼불이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아버지*
녹두꽃
진 자리에
일어선 한 줄기 바람
세상을
바꾸려는 뜻
천지를 휩쓸었건만
소나무
휘인 가지에
옹이로 굳어 있다.
*연못에서 만난 바람*
연못으로 갈거나
연꽃 만나러 온 바람같이
꽃진 자리 잎만 남아 수화(手話)를 읊조리는 곳
눈감고 헤아려보는 마음의 보금자리.
그대 말씀 언저리
산울림인가 먼 종소리
진구렁에 발 딛고 발목 빼지 못해도
눈부신 화엄(華嚴)의 날을 꿈꾸며 살라 하네
연꽃에서 만난 사람
옷깃을 스치누나
저문 날 들녘에서 이마 맞대는 인연
꽃인 듯 그림자인 듯 무릎 꿇고 맞으리라.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사화집『火中蓮』 pp.131∼136)
◐김정희 시인 약력◑
-약력은 『火中蓮』에 수록된 것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 1975년 <시조문학> 천료 등단
* 시조집 :『素心』(1974), 『山여울 . 물여울』(1980), 『빈 잔에 고인 앙금』(1986),『풀꽃은유』(1994), 『녹두꽃 진 자리에』(2002)
* 수필집 :『아픔으로 피는 꽃』(1990), 『차 한잔의 명상』(1999)
* 수상 : 한국시조문학상(1988), 성파시조문학상(1993), 문학의 해 표창(1996), 경남도문화상(1997), 허난설헌 문학상(2000)
* 현재 : 한국시조시인협회 부회장, 시조문학작가회 경남지부장, 진주여성문학인회회장, 연대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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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작품 : 1995)
*그 얼굴 외 5편* / 이 문 형
십 리 산골길에
오두막 한 채
강담 너머 내다보던
나이 잊은 가시버시
이 빠진 누룽지 같은 얼굴
겸연쩍게 웃더라
어쩌다 창 너머로
산을 보다 생각나고
미루나무 꼭대기의
구름 봐도 생각나고
길섶의 쑥부쟁이를 봐도
어리어리 그 얼굴
*搖鈴*
쇠녹 떨어지는 목쉰소리를 하는 반벙어리 무지렁이 사내는 구천길 앞소리꾼이 흔들던 그런 요령을 갖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다.
사내는 요령 하나 가슴에 품고 목소리보다 더 고운 요령소리를 내면서 다니고 있었다.
쬐그만 요령소리는 반벙어리 작은 가슴 울리다가,
파문처럼 나무를 잡고 흔들다가,
성큼 강둑 건너 강마을 고샅을 돌고 돌아 마을 사람 죄 새벽잠 깨워 뙤창에 귀대고 엿듣게 하다가,
다시 들을 지나 산을 넘어 아스라이 실낱같은 하늘 길 건너 알 수 없는 어느 문턱까지 닿고 싶었노니,
오늘도 무지렁이 사내는 가슴 속 요령소리를 듣는구나.
*廢家*
1.
바람이
허문 종부담,
살다 버린
거미집.
풀벌레 몇 마리쯤
놀고보면 제격인
삶이란
다 쓸어가고
낡아빠진 지게 하나.
2.
뒤안 감나무는
누가 돌보고
바자 밑 부추밭은
누가 가꾸고 있노.
산들만
빙 둘러앉아
굽어보고 있구나.
*개구리 소리*
땅 속서 三冬 나고 꽈리 하나 가져왔네.
三時 밥 먹는 일과 잠밖에 모르는 만석꾼 영감탱이가 어느 골에 살았었네.
개구리 울음소리 알 턱 없는 무지렁이 영감탱이는 시끄러워 잠 못이루겠다고 家奴시켜 밤새워 무논에 돌멩이를 던지게 하였으니.
(제13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작품 : 1996)
*자전거를 타고서 외 5편*
박 영 식
은빛 굴렁쇠에 아침햇살 부수며 간다.
아파트 골목이며 이웃한 도로들이
쾌적한 바람 가르며 천리길을 달린다.
안녕안녕 반갑다고 손을 뻗는 푸른 가로수
빌딩숲 유리창은 수묵담채 치다 말고
서둘러 편지 쓰느라 턱을 괴고 있었다.
내 몸의 찌꺼기가 쏙쏙 빠져 달아난다.
뭐 그리 바쁠 것 없는 세상 구경도 하면서
애마가 시키는 대로 가기만 하면 되는 거다.
*사발*
갓맑음 백금 햇빛
쟁그렁 부셔내고
얼비친 빛무리도
말끔히 가신 알몸
다소곳 명상에 젖어
하얀 이를 내보인다.
壽 福 祿 명문 새긴
둘레는 환한 우주
고요의 수면 닦아
물안개 풀려나면
비로소 둥근 품안에
속옷 벗어 안기는 달.
마셔도 타는 갈증
유두빛 이 그리움
풀뿌리 약사발도
못 다스린 불면으로
끝내는 흰빛 한 자락
꽃물 들일 수밖에.
*목련편지*
새하얀 A4지를 장장이 꾸깁니다.
예쁜 뺨 적셔가며 푸른 편지 쓰는 봄밤
몇 줄은 뒤채는 이웃의 뼈아픔도 눕습니다.
돌아보면 지난 삶이 무척이나 짧습니다
빛처럼 다가왔다 뚝 떨구는 꽃잎같이
누구나 그런 한 생이 찰나임을 모릅니다.
백열등 필라멘트가 갑자기 퍽! 나갑니다.
더는 쓸 수 없는 가슴앓이 사연 앞에
생멸(生滅)은 과연 무얼까 골몰하게 됩니다.
*無*
내 존재의 첫 출발은 아주 미세한 물이었다
흘러 부딪쳐서 묘한 인연 만들었고
哭같은 생의 여로에 화음 몇 줄 보탰다.
있음은 없음을 위한 회귀의 몸짓인 것
그 알몸 습한 일부는 바람에게 내어주고
빈 하늘 굴절된 시각으로 무지개로 떴다가.
생각도 꽃송이도 모두 지운 한 순간
꺼질 듯 다시 한번 빛을 파닥이다가
하늘天 따아地 외우며 이르게 된 無極.
*해바라기처럼*
장맛비 가마솥더위 성큼성큼 건너 뛰어
이 가을 문전에 와 당당히 선 해바라기
일제히 神의 풀무질로 노란 꽃불 일렁인다.
태양을 품은 열애 다진 슬픔 씨앗 여물 듯
문명의 꿉꿉한 삶 마음볕에 잘 말려서
차르르 알곡을 쏟듯 사는 재미 쏟아보자.
미움의 가시 쏘옥 빼고 헝클린 눈빛도 풀고
해 닮아 해맑은 해바라기 해바라기처럼
기벼운 걸음걸이로 웃음꽃 활짝 피워보자.
*장미의 반란*
진초록 봄옷 걸치고 집을 나선 넝쿨장미
부드러운 선을 따라 사랑 촉촉이 그린 입술
립스틱 물빛 웃음이 눈을 질식시킨다.
누군가 손 내밀어 내 옷고름을 풀어다오
내비칠 듯 솟아 부푼 봉긋한 흰 젖무덤
바람이 애무를 시도하다 피 흘리고 만다.
이제 막 물목욕 끝낸
오, 이 살냄새의 어지럼증
뼈가 타는 그리움 한 겹 한 겹 내어주고
저 혼자 넌출거리며 먼 바다로 가고 있다.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사화집『火中蓮』 pp.173∼178)
◐박영식 시인 약력◑
-약력은 『火中蓮』에 수록된 것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 慶南 三千浦 臥龍産
* 제9회 샘터시조상 장원(초가을밤)
* 8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 우수작(片片散調)
* 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白磁를 곁에 두고)
* 85년 계간 <시조문학> 봄호 추천 완료(조가비)
* 제13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
* 저서 <가난 속에 맑은 서정> 외 다수
* 박영식 시조교실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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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작품 : 1997)
*학교 외 5편*
조 종 만
하얀 종이배 타고
죽순처럼 쭉 뻗다가
까만 밤하늘에
별이 되어 깜박인다
달이나 해가 되라고
종은 엄청 울어왔다.
*의암(義巖)에서*
강물은
역사만큼
시퍼런 입술을 깨물고
검무는
뻔적거리며
어루만진 그 상채(償債)
곤욕을
쓰러 안고 간
그 외침이
들린다.
*아침 바다*
바다는 시퍼런
줄을
쭈욱 긋고
빠알간 눈썹 하나
달아 띄우면
온 세상
환한 햇살로
반짝이는
숨소리.
*가을 둘*
등산
귀먹고 눈도 가려 바람같이 오르라네
청솔은 흔들라 하고 새는 지저귀라더니
여보게! 허연 갈대이면 어떠냐고 묻더라.
풍경
햇살 영근 가을빛 담그는 바람소리
언제나 한발 앞서 머언 산이 눈부시고
머리맡 목신 서릿발 낙엽 밟고 가더라.
*어머니*
-내 어린시절 생일에
정화수 바친 손끝
촛불 따라 떨더이다
두 손 모아 주문 외며
빌고 빌던 어머님
등뒤에 무릎 꿇고서
따라 빌며 깨친 뜻
"남의 눈에 꽃이 되고......
비는 데는 쇠도 녹고......"
빌고 나서 절하시면
따라 나도 절을 하고
철없이 따라 엎드려
비는 뜻도 깨쳤다.
*동학사의 겨울*
계룡산 한겨울은
흰옷이 저리 곱다
동학사 도끼질이
세상사 메아린가
지난 봄 나비되더니
눈사람도 좋으네.
햇살도 꽁꽁 얼어
산새 울음 애처롭다
산그늘 밟고서니
풍경도 떠는구나
종소리 눈을 헤쳐서
살맛 나게 하소서.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사화집『火中蓮』 pp.193∼198)
◐조종만 시인 약력◑
-약력은 『火中蓮』에 수록된 것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 1932년 경남 의령 출생, 필명 조영(曺影)
* 부산사범학교,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 진주남중교장 정년 퇴임 '97년
* <영문> 시 2회 천료(59∼60), 시문학 시조 2회 천료(79년 2월, 9월)
* 시집『흑토』『회상의 무늬』
* 현 한국문협, 시문학회 회원, 한국시조시협, 경남문협 이사, 경남시조문학회부회장, 진주문협 자문위원, 진주시조문학회 회장
* 77년 문학부문 지도상(개천예술제) 서울시 교육감상
* 97년 성파시조문학상, 97년 국민훈장 모란장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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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작품 : 1998)
*길 외 5편*
-나무와 낙엽의 속삭임
이 수 정
계절을 가꾸는
부신 손이 조용히 멎자
바람은 맴을 돌며
침묵을 그리고 잇다
이 가을
스치는 만상(萬象)도
묵도(默禱)에 흠뻑 젖고.
뜨거운 저 속삭임
눈물 젖은 이 이별도
계절을 가꾸는 손
언저리로 돌아가는 듯
가는 길
그 낮은 곳을 향한
부신 길이 보이네.
*이 가을*
부끄러운 나이 위에
꿈 하나 가꾸고 싶다
늦지만 눈빛 젖은 시간
가슴에 꼬옥 껴안고
이 가을
말씀의 폭포 아래
흠뻑 젖어 봤으면......
*시간-1*
바람 하나 건지려나
그물 어깨에 메곤
신기루 손길 따라
아장아장 걸어나와
부셔라
프리즘으로 갈린
무지갯빛 방랑아.
알알한 발바닥으로
갈대숲을 헤치더니
아, 숨죽인 귀리빛
사유(思惟)의 강을 건져내
질펀한
들판을 적시는
빛무리의 역사(役事)인 걸.......
*겨울나무*
옷 훌렁 벗고 섰지만
저 부신
생채기, 옹이들
가슴속엔 넘치듯
여울져
맴도는 말씀
내게도
단단한 옹이 하나
진주 빛깔로 품고 싶다.
*여명(黎明)*
캄캄한 혼돈 속을
빛으로 인도하는 향연(饗宴)
날 잃고
나를 찾던
발가벗은
시간 앞에
허망을
불살라 밝히는
그 큰 손길, 부셔라.
*남북 정상의 만남*
-그 피의 능선에서 싸우신 숙부님을 생각하며
시간도 멎어버린 숨막힌 공간에서
겉돌며 방황하던 그 기류 손 덥석 잡은
이 믿음, 벼랑 끝으로 게걸음치지 말았으면......
격전지, 한 땐 카인의 어둠과 싸우시고
오늘은 얼굴 밝혀 노구(老軀)를 가누시며
아, 그때 그 능선의 섬 바라보고 섰을까.
온갖 것 모두 적신 기도를 떠올리곤
구름과 풀꽃들의 얘기를 나누시며
긴 한숨, 안으로 일던 바람 다독이고 계실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사화집『火中蓮』 pp.207∼212)
◐이수정 시인 약력◑
-약력은 『火中蓮』에 수록된 것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 1984년 <현대시학>지에 張諄하河 선생의 추천으로 등단
*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조시인협회, 국제펜클럽한국본부, 경남문인협회, 경남시조시인협회, 진주문인협회 회원
* 시조집『산다는 것, 이 긴 물음』『그 눈부신 절망의 사닥다리』
* 제8회 <현대시조문학상> 수상
* 제15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
(제16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작품 : 1999)
*욕지도에 부는 바람 외 5편*
김 연 동
어둠도 접고 사는 아늑한 요새라지만
다 삭은 시대의 끝 흐린 물길 위로
교회당 종소리처럼 찬바람이 다가선다
막 내린 자부랑깨 늙은 주모 손끝에도
색칠한 낡은 지붕 청보리밭 이랑에도
위장 그 장화를 신고 잔교(棧橋)를 건너온다
이 시간 예전같이 동백꽃 핀 봄이다만
야윈 산 능선 아랜 노을만이 흔들리고
아낙네 가난한 푸념 눈물처럼 흩날린다
휘인 새 소리도 적의(敵意)의 칼이 되어
파도에 밀려오는 넝마 같은 계절 앞에
해안을 지킨 얼굴들 폐선으로 앉았다
*혼곡리(昏谷里) 소고*
바람소리 하나에도 가슴 닫는 사람아
막 내린 가설무대 나팔소리 여운 같은
혼곡리 허물어진 민가 허망 앞에 젖어보라
끊어진 길 위에는 낡은 문이 펄럭이고
스산한 갯바람만 버들처럼 휘청거리는
망초꽃 흐드러지게 저승이듯 환한 동네
*거울 속에 비친 계절*
허리 가는 사람들의 지울 수 없는 상흔으로
씨줄 날줄 엮어 가는 경전 담은 미투리에
투명한 눈물을 뿌려 말간 꽃도 피우고
종일 닦은 거울 속 이마 좁은 우리 우상
은어가 물살 가르듯 어둠을 갈라버리면
계절은 관절을 풀고 강물도 허리 펴고
붉은 구호 흔들리던 가슴 맞댄 광장 위에
무수히 돌 던지던 바람 같던 손끝에도
하나의 화두가 타는 촛불 환히 밝혔다.
*모국어(母國語)*
도공의 손끝에서 청하늘이 빚어지듯
금간 흰 눈물로 가꾸어온 마음 밭이
고장난 장난감처럼 깨어지고 부서지네
칼날 문신으로 상처가 깊던 날도
진양조 휘모리로 가슴 울려 풀더니만
이제는 녹슬어버린 폐광 속의 적막이다
연어 떼 흘러드는 남대천 어귀거나
푸른 대숲 언덕바지 맑은 샘물 흐르는 곳
윤나는 조약돌같이 갈고 닦을 일이다.
*하오의 편지*
말간 새순처럼 수면 아래 피던 얼굴
검은 포도 위를 휘청거리며 걸어간다
개여울 버들개지에 햇살이 부신 하오
피흘리며 회귀하는 연어 같은 편린들로
바람길 젖은 강변 시린 날을 뒤척이며
탁류 속 구겨지는 야위어만 가는 시간
노을이 이마 끝에 붉은 물을 들일 무렵
야한 역류의 꿈 은유 그 손을 보아
여덟 문 검정 고무신 삭은 배에 띄운다
*빗소리*
삭은 사진첩이 윤나는 얘기하듯
한 해가 하루처럼 지나가는 포도 위에
추억은 빗물이 되어
추적추적 뿌립니다
낡은 책갈피 속 시들은 꽃잎 같던
유년의 삿갓을 꺼내 빗소리를 듣습니다.
빗방울 영혼을 깨우듯
연잎에 구릅니다
낮게 가라앉아 숨돌리는 쉬리처럼
무수히 부대낀 시간 거울 앞에 눕습니다
물길을 헤집고 가는
역류의 꿈도 접고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사화집『火中蓮』 pp.215∼220)
◐김연동 시인 약력◑
-약력은 『火中蓮』에 수록된 것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 경남 하동 출생
* 경인일보 신춘당선, 시조문학 천료, 월간문학 등으로 데뷔
* 수상 : 중앙일보 제정 제11회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92>, 성파시조문학상, 경남시조문학상('99)
* 시집 :『저문 날의 構圖』,『바다와 신발』,『다섯 빛깔의 언어 풍경』
* 현재 한국문인협회원, 국제펜클럽회원,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 마산문인협회장, 경상남도교육청 근무(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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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작품 : 2000)
*불꿈 외 5편*
김 복 근
꿈이었다.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꿈이었다.
가랑잎 솔가리에 떡갈나무 자작나무
영롱한 깃발이 되어 생으로 타는 목숨
불은 또 다른 불을 차례로 불러들여
오솔길 산골짜기 의식의 숲을 치며
터질 듯 너울거리는 나방의 원무 속으로
살냄새 타는 그리움 전율처럼 몰려와
붉어 더 선연히 익어타는 사랑으로
냉과리* 숫보기* 같은 나는
화엄을 외우고 있다.
*냉과리 : 덜 구워져 연기와 냄새가 나는 숯
*숫보기 : 순진하여 어리숙한 사람
*가을 입구*
눈 감으면 별이 뜨는 내 하늘의
모롱이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난 이의 주소에도
다정한 우표가 되어 찾아가고 싶어라
*클릭*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로를 헤매고 잇다.
검지손가락 하나로 내 삶의 운명을 걸고
사이버 무한 세계를 마음대로 넘나들다
익명의 정보끼리 몸과 마음 뒤섞인 채
그대 말없는 항변 충혈된 눈빛으로
가상의 사이키델릭 현란한 춤을 춘다.
폼베이 최후처럼 단전이 짓눌리고
깜박이던 커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던 날
오, 온몸 저리는 아픔 출구를 찾을 수 있으랴.
*인터넷*
육질의 정보들이 애무하는 성감대에
떨리는 가슴 안고 나비처럼 들어갔다
지긋이 커서를 바라보며 마우스를 끌어당겼다
내가 내 스스로를 찾아내기 위하여
보일 수 있는 건 다 열어 보이며
무정란 불빛을 따라가는 사이버 넓은 마당
자르고 보태고 풀어낸 생명 위에
네거티브 필름같이 굼틀대는 저 천형의 몸부림
내 마음 더하기 위한 접속을 하고 있다.
*지하상가 6*
-지하에 부는 바람
시가지 중심가에 땅 밑으로 가는 문이 있다.
스스로의 최면에 빠져 종종걸음 걸어가면
오월은 꽃들이 무너져도 모른 체 하고 있다.
낯선 갈 꼬여들어 금쪽 같이 환한 봄날
화려한 불빛 뒤로 몰려드는 허허로움
불어서 시원할 것도 없는 바람이 불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은 방사하듯 오가는데
눈부신 환상을 따라 푸른 절망만 어른댄다.
감추어 남겨두어야 할 저 은밀한 비경 속을.......
*지하상가 7*
-텃새 한 마리
다국적 길목으로 텃새 한 마리 들어왔다.
지천으로 널려있는 불빛 속을 휘저어도
출구를 찾을 수 없어 되돌아가지 못한다.
내 가난한 절망이 습기처럼 배어드는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닌 곳에
가쁜 숨 할딱거리며 막막해진 가슴인 양.
낡은 기와 추녀 밑 조선 햇살 그리며
땅보다 낮은 천장 정수리를 찧으며
불경기 길게 엎드린 윤시월을 날고 있다.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사화집『火中蓮』 pp.229∼234)
◐김복근 시인 약력◑
-약력은 『火中蓮』에 수록된 것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 1950년 경남 의령 출생
* 창원대대학원(문학박사) 국문학(시조문학)전공
* 1985년 <시조문학>지에 추천 등단
* 저서 시조집 <인과율>, <비상을 위하여>, <클릭, 텃새 한 마리> 등
* 마산시문화상, 한국시조문학상, 성파시조문학상, 대통령표창 등 수상
* 경남시조시인협회장 역임
*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국제pen클럽, 민족문학작가회의, 오늘의 시조작가회 회원, 창원대평생교육원, 경남문예대학 강사, 노산문학관 건립 추진위원
* 창원 소답초등학교 교감, 창원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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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작품 : 2003)
*바람 외 5편*
강 호 인
황막한 골짜구니 빈 수레 몰아가다
별빛 저민 가락 풀어 영원을 비질하는
형해도 자취도 없이 뒤척이는 넋이다.
나울 미쁜 파도 위에 갈매기 나래칠 때
펄럭이는 깃발 아래 목쉰 고동 부리면서
때로는 사공이 되어 망망대해 노를 젓고
청산 오르다가 숨이 차 잠시 쉬면
이름 모를 풀꽃망울 살며시 귀를 열어
한 말씀 새겨들을 듯이 반기면서 모신다.
능금알 익어가는 과원 들러 정을 주어
갈햇살 볕여울로 속살 헹궈 꿈 쟁이고
단풍잎 품에 안기면 춤사위도 황홀해.
천심 지심 깨울 소명 신탁 받은 숙명이거나
행여의 고된 사역 못 떨칠 천형이든간에
내민 손 아랑곳 않는 그 무위 거룩하네.
*안개論 . 3*
몽타아즈 한 장 못뜰 범인들의 천국인가
겹겹의 가면 쓰고 탈춤 추듯 능청 떠는
지금은 몇 과장쯤이냐
밤이 오나 날이 새나.
깨어진 거울 조각 난반사로 쏘는 빛 속
대답 못할 물음표가 도처에 널렸지만
자존의 막장을 뚫는
탐조등을 켜야할 땅.
풀밭에 풀들 잠깨는 그 기미를 놓쳤는지
한 줌 햇살
한 올 바람
행방 정녕 묘연하고
냉정히 돌아앉은 건
빌딩들만 아니다.
*가을 소망*
바래고 성긴 허울
황황히 벗어 던지고
해맑은 사유의 강
회한 띄워 보내면
한가위
둥근 달 같이
진실뿐인 벌거숭이.
섧도록 짧게 잘리어
포개지는 갈 햇살 속
영혼에 스며드는
가람줄기 야위어가도
속죄의 불꽃을 지펴
투영하는 그림자여.
살을 깎는 몌별(袂別)의 아픔
가라앉는 망각의 늪
질화로 불씨처럼
간직하는 그리움은
대물릴
고전 갈피에
꽂혀지는 낙엽일레.
*세월 속에서*
작설차를 달이면서 미명의 하늘을 연다.
그리움의 섬을 향한 바람의 깃털처럼
뜨물빛 안개를 밟고
하얀 별들 떠난다.
물굽이 차오르는 해를 바라 서있으면
심장의 뜨거운 피 힘찬 박동 시작하고
꽃이슬 반짝임 같은
까치울음 떨어진다.
소망을 퍼올리는 가없는 두레박질
손 터져 짓무르고 관절 꺾여 휘청이는
또 하루 노동을 실어다
건네주는 붉은 해여.
우리는 그 무엇을 이 세월에 물어보나
흘러서 물인 여울 제소리 제가 듣듯
가슴을 적시는 곡조도
제 부르는 노래인걸.
영겁 속 헤아리면 한 생은 짧은 찰나
마셔버린 찻잔처럼 잎 지운 나목처럼
빌수록 차오르는 영혼
온 우주가 들어앉네.
*교실에서*
스무 평 남짓 작은 공간 그나마 벅찬 영토
창 열면 청하늘도 손짓하는 나날이었지만
찬찬히 거울을 보면 흐려지는 자화상
동심은 천심이라 그대로 자연이었고
동심은 또 천진이라 언제나 난만했느니
하이얀 백묵 같은 일월 그리움의 탑은 높고
어린 혼의 광맥이야 무한의 보고인 걸
서투른 석수장이의 정도 끌도 무뎠고나
저만치 돌아간 지축
그 화두도 잊음이여
봄 여름 가을 겨울 물레 돌린 사계를
채우고 비워내며 단풍물 든 사유의 숲
생계를 탁발하느라 길은 아직 멀다 할까
애초에 텅 빈 곳간 마음의 문 열어 놓고
무소유 가벼움으로 강물 따라 흘렀느니
해맑은 심지마다에 불꽃이나 켤 일이다
*종 . 1*
난 이제
한 개의 종
돌종(石鐘)쯤 되어
울고 싶다
세상 허허롭기가 하늘보다 깊은 날도
사람 무심하여 눈물 절로 어리는 날도
새벽녘 까치처럼 가야 할 은혜로운 땅에서
삼생을 삼천 번쯤 윤회로 돈다해도
목숨 삼긴 날이면 살아서 푸른 세월
혼신의 열정을 다해 스스로를 조탁(彫琢)하는
전설 속 석수장이 명품 빚는 석수장이
그 아린 정과 끌에 살과 뼈를 깎아낸 뒤
장엄히 또한 은은히 빛살 같은 울음 우는
나는야
그 떨리는 여운
천년 만년
끌고 싶다.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사화집『火中蓮』 pp.271∼276)
◐강호인 시인 약력◑
-약력은 『火中蓮』에 수록된 것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 1950년 산청군 시천면 사리 출생
* 진주고, 진주교육대학, 경남대교육대학원(논문 :『李鎬雨時調硏究』)졸업
*『현대시조』('85).『시조문학』('86)추천과
『시대문학』('88).『월간문학』('89)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 시집 :『山天齋에 신끈 풀고』('90), 『따뜻한 등불 하나』('91),
『그리운 집』('96)
* 마산문협(89-90), 경남문협(94-95) 사무국장과 마산문협(98-99)부회장, 경남문협 이사(2000-2001) 역임
* 제1회 南冥文學賞('89), 제19회 마산시문화상('96),
제20회 성파시조문학상('03)
* 제4회 馬山敎育賞('95)
*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조시인협회, 경남문인협회, 마산문인협회, 경남시조시인협회 회원
(제21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작 : 2004)
*미아 찾기 전단지를 보며*
서 일 옥
웃고 있는 사진 속엔 환했던 어제가 있다
지쳐버린 공간
이제 시간은 멎고
닳아진 모서리만큼
더 우울한 신경세포.
무심코 바라보는 그 이름 석 자가
부도난 수표처럼
영혼의 환부처럼
타버린 그리움 속에
팡이꽃으로 엉켜 있다.
(서일옥 시인 약력)
-약력은 수상 당시 안내장에 소개된 것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 1951년 경남 마산 출생
▣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1990)
▣ 한국아동문학연구 동시조 신인상 수상(1990)
▣ 경남시조문학상 수상(2003)
▣ 한국시조시인협회장상 수상(2004)
▣ 시집「영화 스케치」(2003)
▣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 경남시조시인협회 부회장.사무국장, 경남아동문학회 이사 역임, 경남문인협회 사무국장
▣ 창원화양초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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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작 : 2005)
*절 규*
윤 정 란(윤말선)
매화분재 눈 뜨는 아파트 창가에서
겁에 질려 울고 잇는 아이를 바라본다
어머니 살려 주세요
사람으로 살고파요.
누렇게 뜬 얼굴 구부정한 어깨 위로
머리 푼 햇살이 쓰다듬고 지나간다
공부가 지겨웠는데
부끄럽고 죄송해요.
학교에서 집에서 힘없이 쫓기다가
골방에 앉아보면 먹구름만 밀려온다
못 버린 새파란 꿈은
새가 되어 나르고.....
망나니 바람 끝에 만나야 할 푸른 날을
막막한 하늘에 손을 저어 보지만
길 없이 내몰린 영혼
꽃잎처럼 나부낀다.
(윤정란 시인 약력)
-약력은 수상 당시 안내장에 소개된 것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 본명 : 윤말선
▣ 1552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남
▣ 1983년 시조문학 가을호에 강변길 천료
▣ 1991년 시조문학 공로상 수상
▣ 1999년 경남문학 수수작품상 수상
▣ 1999년 시집 '푸른 별로 눈 뜬다면' 출간
▣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 역임
▣ 진주문인협회 이사 역임
▣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조시인협회, 경남문인협회, 진주문인협회, 경남시조시인협회, 진주시조시인협회 회원, 진주 여성문학인회 감사
▣ 23년간 '시인서점'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