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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는 그냥 친구들이랑 재밌게 놀고 싶어요. 하루만 스케쥴이 좀 없었으면…”
- 라디오 방송, 소희가 했던 말 中
벌써,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일 정도로 눈이 내리는 커플의 계절 겨울이다. 게다가,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일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커플들끼리 짝지어 다니는, 커플들의 날,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길 그렇게 기대하고 있었는데, 사실 눈은 크리스마스 이틀전에 내리고, 정작 크리스마스 되니까, 아침부터 햇살이 쨍쨍하다. 그래도 아직 눈이 덜 녹아서, 그나마 한발한발 걸을 때마다 뽀드득뽀드득 하는 소리도 꽤 듣기 좋고, 눈 때문에 흰 거리가 시각적으로 참 예뻐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왕 눈 올거면 이틀만 참다가 크리스마스 때 좀 내려주지.
그러고보니, 어느덧 원더걸스라는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팀에서 내가 빠져나온 것도 어느덧 100일이 지나, 4개월째 정도로 접어들어가고 있다. 이렇게 내가 나오고나서, 새 멤버인 유빈언니를 영입하고, 타이틀곡 ‘ Tell Me ’ 를 앞세워, 1위란 1위는 거의 싹 휩쓸어버리고, 거기다가 한창 유행이라고까지 감히 말할 수 있을정도로 너도나도 ‘Tell me’ UCC를 올리는걸 그저 이렇게 홀로 집에서 TV를 통해, 혹은 컴퓨터를 통해 지켜보고 있노라면, 사실 질투가 아예 안 난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물론 ‘Tell me’ 가 굉장히 중독성 있는 노래인데다가, 춤동작도 간단하고, 따라하기가 쉬워 사람들이 남녀노소 불문하고 좋아하는거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왠지 내가 나오고나서 이렇게 대박을 터뜨리니까, 꼭 내가 나가서 잘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게다가, 싱글앨범 활동 때부터 나를 암흑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길 좋아하는 악플러들의 ‘현아가 나가니까 훨씬 낫네’ 라는 악플들은 내 기운을 더 푹 빼놓는다.
하지만 질투가 조금 난다고 해서, 화가 난다던가, 짜증이 난다던가 하는건 아니다. 원더걸스의 대 성공은 오히려, 내가 저런 그룹의 멤버였구나, 라는 자부심을 갖게 만들기도 하니까. 특히, 그런 점도 참 좋지만, 가장 나를 기쁘게 했던 사실은 사실, 소희의 인기 급상승이었다.
워낙에 소희는 자기한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사람에게만 아주 조심스럽게 마음을 열어줄 정도로 무척 소극적인 아이인지라, 솔직히 나 조차도 소희의 곁에서 소희의 밝은면을 이끌어내는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노력하는 자에겐 복이 있다고 했던가. 열심히 소희한테 장난도 치고, 농담도 걸고, 시비도 걸어보니, 어느새 소희가 웃는다. 그리고 곧잘 나에게 장난도 잘 건다. 가끔은 심술이나서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고 앉아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런 아이였다 소희는.
하지만 문제점은, 소희는 자신이 마음의 문을 열어준 사람에게만 저렇게 밝은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데뷔하기 전, 우리의 연습과정을 쭉 촬영해왔던 ‘MTV Wondergirls’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항상 TV앞에 앉아서 모니터를 하고 있을 때 소희를 자세히 바라보면, 내 앞에서는 워낙에 장난도 잘 치고, 밝고, 귀여워서, 팬들이 우리를 더러 초딩이라고 부를 정도로 소희는 엄청난 발전을 했지만, 내가 잠깐이나마 신경을 써주지 못할 때면, 소희는 언제나 조용하고, 묵묵하게 혼자서만 시간을 떼우고 있었다.
선예언니는 당시 들어온지 얼마 안된 예은언니를 도와줘야 한다고, 예은언니와 함께 늦게까지 연습하고 들어오느라 우리들을 챙길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고, 선미는 자기가 좋아하는 지구과학만 열심히 파고들며, 자기 세계에만 빠져있는 아이인지라 혼자서 워낙 잘 놀아 우리와 그리 어울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나만큼이나 소희에게 먼저 선뜻 다가가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소희가 아무래도 쉽사리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만큼이나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못하는 듯 보였다.
“야 안소희. 좀 너도 다같이 놀 때 같이 껴서 막 웃으면서 놀려고 좀 노력해봐 – 꼭 너 혼자 겉도는 것 같잖아 - ”
“내가 뭘 - ”
“너도 좀 적극적으로 언니들이랑, 선미하고 좀 놀려고 해보라고.”
“잘 놀고 있거든?”
“웃기고 앉아있네.”
“이씨. 너 자꾸 태클걸래?”
“태클이 아니라, 이 언니가 니가 걱정되서 해주는 말이잖아.”
“언니 좋아하네. 언니들 다 얼어죽었냐?”
“내가 그래도 너보다 일찍 세상의 빛을 봤어, 이거 왜 이래.”
“고작 몇일차이 가지고 치사하게 굴래? 니가 그러니까 초딩 소리를 듣는거 아냐!”
“안소똥 너도 만만치 않거든? 알고보면 니가 제일 유치해 – 알어?”
“너 진짜 자꾸 까불래?!”
결국 참지못하고 소희의 통통해서 잡기 쉬운 두 볼을 잡아 쭈욱 늘려버렸더니, 소희는 잠시 어버버버 거리다가, 질 수 없다는듯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인 긴 다리를 뻗어 내 무릎을 발로 빵빵 찬다. 이것이 항상 우리만의 K1 경기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은 우리를 말릴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그저 주변인들은 끌끌 혀만 내두를법한 그런 격렬한 싸움이 시작되는거다. 하지만, 이런 우리를 단번에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 존재했다. 바로, 우리의 정신적 지주를 맡고 있는 선예언니.
“니들 둘 다 시끄러! 싸우려면 나가서 해결보고와! 어디 한 두번도 아니고 니들은 눈만 마주쳤다 하면 싸움질이냐?!”
“…. 두고봐 건방진 야생마.”
“ 너 자꾸 까불래? “
“그 – 래.”
아아아악!! 진짜, 저 유치원생보다 더 유치한 안소희를 도대체 어찌해야 하면 좋단 말인가. 안소희 저 녀석이 꼭 약올리는 말투로, ‘그래’ 라고 하면, 왜 이렇게 속에서는 열불이 터져 오르는건지.
그래도, 저렇게 나오는데 뭐라고 한마디 더 대들고 싶어도, 선예언니의 말은 우리에게는 엄마의 잔소리라던가, 선생님의 훈계, 뭐 이런 존재였기 때문에, 선예언니가 한 소리 하면 우리는 그냥 차게 식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뭐… 아무튼 우리는 매번 이런식이다. 진심을 담아 소희에게 주의를 주고 싶어도, 저렇게 나오는 소희 때문에, 결국 우리의 대화주제는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알 수 없는 무인도로 버려지게 때문에, 소희의 성격을 고쳐준다는 것은 차라리 하늘의 달을 따오겠다고 결심을 하는게 더 쉬울 정도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탈퇴를 결심하게 되었을 때, 가장 걱정스러운 부분이 바로 소희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소희를 두고 떠나기에는 안심을 할 수 없기에, 멤버들에게 먼저 탈퇴선언을 하고, 소희에게 가보라는 선예언니와 예은언니의 부추김에, 다음 날, 소희가 영화촬영 중 부상으로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이번에야 말로, 꼭 소희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하고 올 거라고, 굳게 마음을 먹고 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그렇게 싸우고, 툴툴대고, 단 한번도 다정스럽게 서로에게 대한 적 없는 소희와 나였지만, 그래도 그렇게 티격태격 한만큼, 또 가장 정이 많이 든 것도 소희였으니까. 그런 소희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하는지, 사실 정말 까마득했다. 이 푼수 같은 눈물이 제발 나오지 말아야할텐데 …
드디어 소희의 병실 앞, 긴장으로 자꾸만 북을 쿵쿵 쳐대는 심장을 심호흡으로 후후 내쉬면서, 병실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가니, 소희는 침대위에 앉아서 책장을 한장한장 넘기고 있었다.
“소똥아 – 나왔어 - ”
“니가 왜 여기있냐.”
“우리 소똥이 보고 싶어서 왔지.”
“웃기지마. 태클 걸고 싶은데 걸 사람이 없으니까 지금 나 괴롭히러 온거지?”
“야.. 나도 양심이란게 있지, 어떻게 입원해 있는 애를 괴롭히냐?”
“너 같으면 충분히 가능하거든?”
“너는 진짜 일부러 문병 온 사람한테 그렇게 대할래?”
“내가 너를 믿을 수가 있어야지!”
또 시작이다. 덕분에 방금 전 병실까지 오면서 쌓여있던 수많은 긴장감은 눈이 녹듯이 싹 사라져버렸다. 이래가지고 어디 오늘 안으로 이야기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제발 소희가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줘야 할텐데.
이런저런 걱정으로 나를 자꾸만 밀어내려는 소희를 무시하고 소희의 침대 옆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고, 그런 내 모습에 소희는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경계하듯 째려보며, 그냥 서론은 싹 잘라버리고 확 밀어부치자는 생각으로 소희의 두 손을 갑자기 덥썩 붙잡아, 최대한 애절한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똥아. 너 정말, 그 소극적인 성격 좀 개선시킬 생각 없어?”
“또 그 소리 - 정말 너도 지겹지 않냐, 이제?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이제 제발 신경 좀 끄지? 얘가 오자마자 무슨 홍두깨 같은 소릴 하고 앉아있어. 너 진짜 할 일 없어서 온거면 번지수 잘못 찾아왔다. 나는 너랑 한가하게 말장난치고 놀 시간같은건 없어.”
“너는 내가 진심을 담아 부탁을 해도 그러냐?”
“나 신경 쓸 시간 있으면 제발 너나 신경써. 팬들이야 우리를 사랑해주니까 그렇다쳐도, 팬들이 아닌 사람들은 우리를 냉정하고 차갑게만 본단 말이야. 그러니까, 제발 방송 중에는 몸 속에서 날뛰는 야생마 좀 어떻게 참아보란 말이야.”
“어라- 우리 소똥이가 지금 날 걱정해주고 있는거야?”
“누, 누가!”
“당황하는 것 좀 봐. 어이구- 우리 귀여운 소똥이.”
“시, 시끄러!”
“소똥아 - ”
“왜, 초딩아.”
“한가지 부탁이 있어.”
“이상한 부탁하면 우산 가져와서 얼굴 한대 후려친다?”
“…… 방송할 때, 꼭 항상 웃어주고, 그리고 다른 멤버들이 웃을 땐 너도 같이 일부러라도 하하 웃어주고. 명색에 영화배우인데, 안 웃겨도 웃는 연기쯤은 쉽겠지? 그리고, 인터뷰 중에 마이크가 너한테 넘어가면, 좀 적극적으로, 똑부러지게 대답하고. 웃기건 안 웃기건 무조건 말수 좀 늘여.”
“얘가 왜이래. 갑자기 진지해져선. 어디 아퍼?”
나도 모르게 괜히 정말로 진지해져선, 고개를 푹 숙인체 차분해진 말투로 중얼중얼 소희에게 원하는걸 읊었더니, 소희가 많이 당황한 것 같다. 하긴, 이렇게까지 진지한 모습을 소희에게 거의 보인 적 없으니까. 맨날, 투닥거리면서 애들처럼 쌈박질이나 했지.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진지하게 나와주니까, 이제서야 소희의 표정도 조금은 굳어져서 진지해진다. 아니 어쩌면 내가 정말 어디 아픈건지, 의심을 하고 있는 표정일지도.
“아프긴 어디가 아퍼. 야생마가 아픈거 봤냐.”
“그럼 왜 그래 – 혹시 나 입원해 있는사이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안소희.”
“왜.”
“내가 너 진짜 많이 아끼는거 알지? 많이 좋아하고, 많이 애정갖고 있다는거 알고있지?”
“야… 너 진짜 어디 많이 아픈 것 같다. 왜 헛소리를 하고 그래, 사람 불안해지게.”
“헛소리 아니거든? 솔직히 애정없는 사람한테 그렇게 태클걸고 장난치고 싶냐?”
“너… 혹시 뭐 나한테 잘못한거 있어? 하긴.. 니가 나한테 잘못한게 한 두가지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이번에 너 대형사고 쳤구나? 혹시….”
“혹시 뭐.”
“너….”
소희가 갑자기 싹 무표정이 되어서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왠지 소희의 눈매는 너무나도 날카로워서 이렇게 눈을 마주보고 있으면 소희가 꼭 내 마음 속을 읽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불안해진 마음으로, 무슨 말이 하고 싶냐는 듯한 표정으로 소희를 빤히 바라보았더니, 소희는 앙 다물고 있던 입술을 조심스럽게 떼어놓는다.
“너… 내 짱구 만화책 몰래 방에서 꺼내보다가, 잃어버렸어? 아니면 찢어버린거야?”
“너 진짜!!!”
드디어 인내심이란게 폭발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짱구를 걱정할 정도로 태연한 녀석. 나의 진지한 모습에 조금 같이 진지해져서, 이제 좀 대화가 잘 되나 싶었더니, 역시나 이번에도 실패인건가. 정말, 분위기 확 깨는 녀석이다. 이 녀석과 데이트를 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정말 그 상대방은 소희에게 프로포즈를 하기 위해, 억지로 잡아놓은 무드가 무색해져, 분명 소희에게 지쳐버릴지도 모른다.
“내가 뭘!! 아니면 뭔데 대체? 왜 이러는건데?!”
“이 멍충아! 니 알아서 해 그냥! 아주 그냥 진저리가 난다 진저리가. 잘 먹고 잘 살아라, 이 돼지야!”
그것이 내가 팀에서 나오기 전,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을 낼 줄은 몰랐는데. 결국 끝까지 소희를 설득을 시킨다는건 내겐 무리였다. 난 분명 할만큼 했다. 난 분명 말했는데, 소희가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지 않은 것 뿐이다. 그러니 더 이상 난 모른다.
하지만… 왜 이렇게 가슴이 허전하고, 뻥 뚫린 것만 같지? 그래도 소희한테 나 간다고, 잘 지내라고. 작별인사나 좀 잘해둘걸. 후회된다.
그렇게 터덜터덜한 걸음으로 숙소로 돌아오니, 잘 다녀왔냐며 선예언니와, 예은언니, 그리고 선미가 날 반겨준다. 선예언니는 인사는 잘 하고 왔는지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별로 자세한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비록 티격태격 싸우기는 했어도, 나와 소희가 그만큼 누구보다 정이 많이 들어있다는 것을 선예언니는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속상한 나의 마음을 일부러 들춰내고 싶지 않았던거다. 그리고 그건 속이 꽤 깊은 예은언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직 언니들에 비해 나이가 어린 선미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묻는다.
“인사는 잘 하고 왔어?”
선미의 질문에 “어?” 라고 잠깐 멍하게 풀려있던 표정으로 선미를 바라보며 대꾸했더니, 선예언니가 내 눈치를 한번 보고는 선미
의 어깨를 괜히 자신의 어깨로 툭 치면서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 먼저 대답해준다.
“에이 – 뻔하지 뭐. 보나마나, 티격태격 또 실컷 한바탕 하고 왔겠지. 넌 빨리 부엌에 가서 떡볶이나 좀 젓고 있어.”
“치이… 맨날 나만 시켜.”
선미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잠깐 애교있는 투정을 부려봤지만, 더 이상 뭐라고 대꾸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어려도, 선미도 속이 깊은 아이니까. 분명 선예언니가 눈치를 줬을 때 그냥 잠자코 있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눈치 챘나보다.
“현아. 너는 방으로 들어가서 짐 싸놔.”
“아아, 응.”
선예언니의 말에 슬슬 힘없는 발걸음을 옮겨 내 방에 들어가서는, 내가 없는사이 아무래도 선예언니와, 예은언니가 준비해놓은 듯한 박스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슬슬 책상위에 있는 물건부터 작은 박스에 하나하나씩 담아 챙기는데, 손이 마음처럼 쉽게 움직이질 않는다. 자꾸만 물건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툭툭 다른 물건들과 부딪히기도 하고.
물건을 하나하나 집을수록, ‘아, 이건 소희가 저번에 나한테 열받아서 던졌다가 망가뜨린 볼펜이었지’ 라던가, ‘아, 저건 소희가 나한테 처음으로 선물해줬던건데.’ 라면서, 이 방 모든 것들에 하나하나 베인 소희와의 추억들이 아무래도 내 정신을 쏙 빼놓는 것 같았다.
“좀 도와줄까?”
별로 물건을 싸지도 못했는데 예은언니가 문을 살짝 열고 내 방으로 들어오더니 소심하게 고개를 빼꼼히 내빼면서 묻는다. 아무래도 저 언니가 요리에는 잼병이다 보니까, 분명히 선예언니한테 쫓겨난 모양이다. 맨날 그러니까.
“아아, 응. 고마워.”
내가 들어오라는듯 고개를 끄덕거리자, 예은언니는 부드럽게 웃음지으며 방안으로 들어와, 책상에 꽂혀있던 책들을 하나하나 꺼내 차곡차곡 상자안에 담아주기 시작했고, 그렇게 묵묵히 짐만 5분정도 챙기던 우리 사이의 정적을 예은언니가 조심스럽게 깨뜨렸다.
“소희랑, 인사 잘 했어?”
“음… 말 못했어.”
“어떡하려고 말을 안했어?”
“그냥… 말이 안나오더라.”
“너 이제 내일이면 나간다며. 그러면 이제 기회도 별로 없을텐데… 나중에 소희가 얼마나 속상해하겠냐?”
“에이… 몰라. 나중에 언니들이 얘기 좀 잘해줘. 그리고 걔 나 간다고해서 크게 서운해하지 않을거야. 뒷담이나 안까면 다행이지 뭐.”
“소희가 너 가장 많이 따른거 너도 알잖아.”
“언니. 부탁이 하나있어.”
“뭔데?”
“그래도 우리중에서는 언니가 가장 위트있으니까, 언니가 나 가고나서 앞으로 계속, 소희 좀 잘 챙겨줘. 걔는 바보멍청이라서, 누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가주지 않으면 혼자서 놀거든. 그런데, 또 바보멍청이라서, 그런 지 성격을 몰라 자기는. 그러니까, 언니가 좀 적극적으로 소희한테 다가가주고, 장난도 걸어주고, 그래줘.”
“바보같기는… 우리가 소희 혼자놀게 그냥 놔둘 것 같애? 걱정마. 소희 우리가 알아서 잘 챙겨줄 테니까. 너는 니 몸이나 좀 신경써라. 아프지말고, 꼭 다 나아서 우리랑 또 같이 활동하자. 알았지?”
“응…”
다음날, 아빠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듣고, 나는 어젯밤 열심히 책상앞에 앉아 써내려갔던 편지가 담긴 편지봉투를 책상위에 살포시 내려놓은 뒤, 소희에게 직접 특별한 인사도 한번 하지 못하고 다는 멤버들의 배웅을 받아, 나를 데리러 오신 아빠의 차에 올라타 정든 숙소를 떠났다. 과연 내가 떠나고나서, 퇴원 후 숙소로 돌아온 소희가 나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 뭐라고 할지… 궁금하면서도, 조금은 긴장된다. 혹시 전화라도 한 통 해주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숙소에서 나와 집에 들어와서 살게 된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록 소희에게는 연락 한 통 오질 않는다. 고작해봐야, 그냥 잘 지내냐는 선예언니의 간간한 안부전화만 올 뿐. 역시, 이 녀석 나에 대한 미련은 눈곱만큼도 남질 않았다는 건가? 좀 많이 섭섭하다 안소희. 난 그래도 나름대로 널 가장 많이 챙겨주고, 가장 많이 소중히 대해줬는데.
원더걸스가 정규앨범을 내고, 교통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접해들은 나는 서둘러 병원으로 문병을 갔지만, 그 때도 소희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단지, 다리를 많이 다쳐서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다리를 하고 누워있는 선예언니와, 그 주위에 빙 둘러앉아있는, 예은언니와, 유빈언니, 그리고 선미만이 나를 반겨줄 뿐.
“그런데 소희는?”
“아… 화장실 갔나? 나도 잘 모르겠네.”
선예언니에게 괜찮냐고 안부를 묻고나서, 요즘 잘 지냈는지, 어떻게 지냈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뜸 내가 소희를 찾으니, 선예언니는 뒷머리를 잠시 긁적이다가 애매하게 대답을 해줬는데, 그 모습은 마치 대답하기가 무척 곤란하다는 표정이었다.
“야… 솔직히 얘기해 그냥.”
더 이상 참질 못하겠다는 듯, 예은언니가 한숨을 푹 쉬며, 내 쪽으로 할 말이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모습에 나는 약간 긴장이 되어 속으로는 아무도 몰래, 그저 마른침만 꿀꺽 삼키며, 예은언니 앞에서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밝은 척, 평소 내 트레이드 마크라고 불리던 환한 모습으로 웃으며 물었다.
“뭔데?”
“사실은 소희가…”
예은언니가 입술을 뗀 순간, 화기애애하던 분위기의 병실은 금새 모두들 나의 시선을 피하느라 먼 산을 바라보거나, 물 좀 떠오겠다며 자리를 피하느라 바빴다. 도대체 소희가 뭘 어쨌다고, 다들 저렇게 오두방정을 떠는건지.
“소희가… 널 다시는 보고 싶지 않대.”
“뭐? 아니 왜?”
예은언니의 뜻밖의 말. 그 말은 순간 내 가슴에 비수를 꽂은 듯, 순간적으로 가슴을 쿡 찔러 아프게 만들었다. 물론, 소희에게 특별한 인사도 없이 숙소를 떠나온 건, 나도 후회를 한다. 하지만, 이 정도로 심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 그래도, 몇 년간 같이 연습을 해 온 동료인데, 그게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말 한마디로 쉽게 끊을 수 있는 그런 간단한 인연이었던가.
예은언니는 아무래도 특별한 말 한마디 없이 떠나간 나에게 상처를 많이 받은 것일 뿐이라며, 시간이 좀 지나고 안정을 되찾으면, 그 때는 자기도 후회하고 분명 나에게 전화를 할거라면서 나를 애써 위로했지만, 그런 위로 따위가 나에게 통할리가 없었다.
“…… 됐어. 내 잘못이기도 하잖아 어차피. 소희가 싫다면, 나도 굳이 만나고싶지 않아.”
그것이 정말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분명 나는 소희에게 연락이 올 까봐 조마조마하거나, 혼자서 기대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 또한, 내가 원하는 한국 예술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 혹은 조언들을 듣기 위해 선예언니에게 간간히 전화를 하는 것 외에는, 원더걸스 멤버들과의 통화를 되도록이면 자제했다.
‘Tell me’ 라는 노래가 엄청나게 뜨고 나서, 소희의 ‘어머나’ 포즈 때문에 소희의 팬이 급증했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는, 괜히 소희가 잘 됐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기뻐서, 솔직히 소희한테 연락을 하고 싶어 애가 타 죽을 뻔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째 소희는 나한테 반항을 하자는건지, 내 말을 안듣고,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심하게 골이 난 표정으로 매번 인터뷰에 응했으며, 그 때문에 피해를 입는 것은 팀의 리더인 선예언니와, 선예언니와 동갑인 예은언니였다.
‘저 멍청이…’
역시 저 녀석은 내가 없으면 안되는건가. 무대 위에서나잠깐 웃어주는 모습을 빼고는, 영 장난치거나, 웃는모습 하나 보기가 힘들다. 하여튼, 옆에서 안 챙겨주면 더 저런다니까. 애기야 애기.
하지만, 소희가 날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나에게는 초이스라는게 없었다. 그래서, 원더걸스가 MKMF 신인상을 받았을 때에도, 선예언니에게 조용히 문자만 한 통 보냈을 뿐이었다. 축하한다고. 예은언니, 유빈언니, 선미에게도 축하한다고 전해달라고. 그 안에 소희의 이름은 절대로 넣질 않았다. 안소희, 그 아이가 날 찾기 전까지는 나도 그 아이에게 먼저 절대로 다가가지 않을거라고 결심했으니까. 나도 깡 세고, 자존심 있는 녀석이라고. 이렇게 무시당했는데, 내가 굳이 숙이고 들어갈 필요는 없지. 그래도 나 고등학교 실기시험 붙었는데, 선예언니한테 연락했으니 언니가 멤버들에게 다 얘기 해줬을텐데, 이 녀석은 축하한다는 인사 한마디 없냐. 쳇.
그렇게 이를 악물고 지내보니, 벌써 오늘, 크리스마스까지 왔다. 크리스마스 만찬을 위해, 엄마가 저녁에 맛있는 음식을 해주신다면서, 마트에서 장을 좀 봐오라는 심부름 때문에 내 양손엔 벌써 두툼한 비닐봉지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아으… 추워. 크리스마스인데 눈은 안 오고. 미리 이렇게 다 내려버려서 낭만이란 것도 없잖아. 제길. 그런데 이런 날까지, 분명 스케쥴 있을텐데. 불쌍해지네. 이런 날에는 좀 놀아야 되는건데.”
눈이 잔뜩 쌓인 미끄러운 빙판길을 조심스럽게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면서, 손에 든 비닐봉지 때문에 주머니에 손을 넣질 못해 꽁꽁 빨갛게 얼어붙은 내 손으로 주먹을 꽉 쥔 체, 집까지 겨우 도착해 아파트 현관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퍽! 하면서 내 뒷통수로 차가운 눈덩이 하나가 날아와 가격했다.
“아이씨. 누구야?!! 눈싸움 하려면 멀리 가서 해야 할거 … !! “
분명 동네 꼬맹이들이 눈싸움 한다고 눈뭉치를 던지다가 잘못 던져서 내 쪽으로 날아왔으리라 생각하곤 짜증을 내며 휙 고개를 돌렸더니, 그 곳에는 두꺼운 자켓 주머니 안으로 한손을 넣고, 다른 한손에는 여전히 눈가루가 여기저기 묻은체로 나를 특유의 날카로운 눈으로 째려보고 있는 소희가 서있었다.
“니가 여긴 왠일이냐… 스케쥴은 어쩌고?”
“있다가 오후에 있어.”
“너 나 다시는 안본다며?”
“그 – 래.”
“너 아직도 그 말투 못버렸냐?”
“그 – 래.”
“언제까지 그래만 할래?”
“그 – 래.”
“… 관두자.”
“왜 이렇게 순순히 물러나는건데!!!”
비록 소희를 갑자기 만나게 되어, 너무 당황스럽기도 하고, 이렇게 소중한 날, 나를 찾아와준 소희가 너무 고맙기도 해서, 기쁘기도 했지만, 그래서 아직까지도 심장이 마치 고장이라도 난 듯, 끊임없이 세게 뛰면서 내 속까지 울렁거리게 만들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무관심한 듯 ‘그래’만 반복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영 짜증이 나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돌아서면 날 잡아주겠지, 라는 생각으로 관두자며 휙 돌아섰더니, 역시나 빙고 – 소희가 왜 이렇게 순순히 물러나냐며 내 뒤에서 나를 향해 바락 소리를 지른다.
비록 뭐, “잠깐만” 이라던가, “현아야” 라던가 뭐 그런 부드러운 말로 잡아준건 아니지만 그런건 애초에 안소희에게 바래서는 안될 것들이니까. 어쨌든, 나를 잡아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자꾸만 실실 웃음이 나오려는걸 억지로 참으며 정색한 표정으로 휙 돌아봤더니, 소희는 아예 내 뒷통수가 뚫리진 않았을까 걱정이 들 정도로 나를 더욱더 화가 난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며 서있는다. 게다가, 그것 뿐인가. 씩씩거리는 숨소리하며, 눈에는 뿌옇게 습기까지 올라와있다. 아니… 무슨 말을 해도 무관심하게 대답했으면서. 오히려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나라고, 이 멍청아.
“왜 화를 내고 그러냐? 시비걸면 시비걸지 말아라, 시비 안걸면, 왜 시비를 안거냐. 나보고 어쩌라고.”
“너 진짜 밉다. 그래도 어떻게 전화 한 통, 아니 문자 한 통을 안하냐?”
“아, 니가 싫다며 - ”
“그래도 그렇지. 하여튼… 이 바보 멍충이야!!!”
“…… 내가 왜 너한테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건데?”
“갈 거면 갈거라고 말은 했어야지!! 이렇게 편지 하나 달랑 써놓고 가면, 누가 감동이라도 받을 줄 알았냐?!!”
탁!!
소희가 힘껏 던진 편지는 그대로 양 손에 든 짐 때문에 손이 묶여있어 미처 받지 못한 나의 얼굴에 제대로 찰싹하고 명중했다. 한 손에 들려있는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눈 위에 얹어져있는 편지를 들어, 편지에 묻은 눈가루들을 탁탁 털어내고 뒤집어보니, 편지의 한쪽 구석에 ‘To.소희’ 라고 적혀있었다. 이것은 내가 숙소에서 나오기 전, 소희에게 남기고 간 편지가 분명했다.
“바보야. 편지를 놓고 가려면 내 침대위나, 책상위에 올려놓고 가던가 해야지, 니 책상위에 올려놓으면 누가 보냐!!”
“너무한다. 내가 가고나서 니가 날 그리워하면서 내 책상을 한번쯤은 둘러볼 거라고 생각했지.”
“넌, 그 놈의 착각이 문제야. 내가 그거 확인 못했으면 어쩔 뻔했어?”
“그래도 이렇게 발견했잖아. 그럼 다행인거지.”
“그것도 예은언니가 발견해서 준거거든???”
“아… 그래? 어쨌든 보긴 본거잖아. 누가 발견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너 진짜 너무한다…”
“내가 뭘.”
“어떻게 그렇게 한마디도 없이…”
“사실 니가 내 말을 진지하게 안들었잖아.”
“그래도 니가 탈퇴한다고 말했으면 들었지!!”
순간 소희의 독기품은 눈에서는 가득 쌓여있던 습기가 눈물방울이 되어 뚝하고 볼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화를 낼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나 정말 큰 실수 한 것 같군. 어떻게 해서든지 이 녀석 풀어줘야겠는데. 그런데 뭘로 이 녀석을 풀어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방법은 하나. 우는아이는 무조건 안아줘서 어르고 달래야한다. 그래서 일단 두 손에 든 짐을 바닥위에 모조리 싹 내려놓고, 소희에게 다가가 소희의 어깨를 양손으로 감싸안아선 내 품안으로 소희를 살며시 안아 넣어주었더니, 이 녀석 생각외로 나를 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내 어깨에 기대서 더 ‘흐엉 - ’하고 울어버린다.
사실 소희가 우는 걸 보는건 처음이라서, 정말 적응이 되질 않는다. 그 악바리 안소희가, 이렇게까지 통곡하며 울 때도 있구나. 그럴수도 있구나. 왠지 소희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나니, 뭔가 기분이 새롭다.
“울지마. 울지마. 착하지. 뚝!”
“이 나쁜놈아.”
“내가 다 잘못했어. 응? 그러니까 뚝 그치자. 우리아가.”
“누가 니 아가야!!”
순간 소희가 내 어깨를 팍 밀어내며 나를 또다시 톡 쏘아부친다. 정말 감정의 기복이 이렇게까지 심한 녀석은 또 처음이다. 그래서 소희에게 뭐라고 대꾸를 해야할 지 말을 잃었을 때, 갑자기 이 분위기를 확 깨버리는 내 주머니에서 들려오는 핸드폰 벨소리. 덕분에 나는 소희에게 뭐라고 한마디 입도 벙끗 못하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누구인지 확인부터 했다.
젠장할. 엄마다. 아무래도 너무 늦어지니까, 걱정되서 전화하셨나본데, 우리 엄마, 걱정도 참 많으시지. 딸내미를 이렇게 마음약하게 키워서 어쩌실려고.
“야, 나 엄마한테 전화와. 가봐야 될 것 같은데, 집에 들어와서 몸 좀 녹이고 가.”
“됐어.. 스캐쥴 때문에 나도 빨리 가봐야돼. 사실 몰래 나온거야.”
“뭐? 너 선예언니 알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이해해줄거야. 여기 왔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그 냉정한 선예언니가… 이해따위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거야, 너 지금?”
“스캐쥴만 안늦으면 그만이니까.”
“후… 모르겠다. 널 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아무튼 빨리 가봐. 나도 들어가볼게.”
“너 먼저 들어가.”
“…… 그래. 간다. 가면서 전화해.”
소희에게 아까 주웠던 편지를 소희의 자켓 주머니 안으로 쏙 넣어준 뒤, 잠시동안 소희를 묵묵히 바라보다가, 아쉬움을 뒤로하고 슬슬 뒤로 돌아 한발한발 걷는데, 발걸음이 영 쉽게 떨어지질 않는다. 하지만, 내가 전화를 안받으니 우리 엄마 계속 전화해주는 덕분에 전화벨소리는 도무지 오랫동안 끊길 생각이 보이질 않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는 것도 멈출수 없었다. 엄마만 아니면, 이 녀석 정류장까지라도 데려다 주는건데. 워낙에 유명인이 되어서, 정류장까지 가는 것도, 버스타는 것도 쉽지 않을텐데 말이다.
그렇게 소희를 뒤로하고 걷다가 바닥에 내려진 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봉지를 들기위해 잠깐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잠시 굽혀 다시 양손에 가득 쥐 허리를 슬슬 펴고 현관 쪽으로 발을 한걸음 다시 디뎠을 때, 갑자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다시 등 뒤로 들려온다.
“김현아!!”
그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려 소희를 바라보니, 소희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건지 나를 불러놓고도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표정은 또 어찌나 잔뜩 심술 난 꼬마아이 같은지…
“왜 불렀어?”
“……”
결국 한참동안 아무 말 없이 다른 곳만 바라보던 소희는 다짜고짜 나에게로 갑작스럽게 돌진하는 바람에 미처 피하거나, 할 틈이 없었다. 그렇게 돌진해 오는 소희를 피하지도 못하고 어벙하게 서있던 내 입술에 전해져오는 따뜻한 촉감. 바로 누구든 보면 한번쯤 뽀뽀해보고 싶다고 느낄정도로 귀엽다는 소희의 입술이었다.
“….!!!”
너무 놀라 눈도 못 감고, 아니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희를 바라보고 있으니, 소희는 입술을 맞추고 있는 이 순간 눈을 아주 꽉 감고 있다. 어찌나 꽉 감고 있는지, 눈가와 미간사이에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그렇게 약 3초정도 입술을 맞춘 채 눈을 꽉 감고 있던 소희는 서서히 입술을 떼어놓곤, 놀라서 할 말을 잃은 나와 함께 말이 없다가, 마치 열받은 만두처럼 얼굴은 새빨개진채로 갑자기 버럭 또 한마디 덧붙인다.
“나도!!!”
“뭐?”
“나도!!!”
“너도 뭐.”
“……아이씨.”
“……;;”
“좋아!!”
“응?;”
“좋아한다고, 이 멍충아.”
“아아…… 하하하하하하.”
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뻘쭘함. 아무래도 내가 편지에 적었던 고백을 읽고 이 녀석이 대답을 해준 것 같다. 정말 고백에 대한 대답 한번, 안소희스럽게 한다. 그렇게 너무 뻘쭘해서 어색하게 하하하 몇 번 웃었더니 소희가 뭐가 웃기냐며 또 한번 툭 째려본다. 순간 나는 그저 “네” 하면서 짜게 식어서 입술을 꾹 다물수 밖에.
“나…… 나 간다!!”
아무래도 자기도 쪽팔렸나보다. 얼굴이 아까보다 더 빨개져서 이제는 혹시나 가다가 저 만두가 터져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다.
“야야, 안소희!”
“왜!”
아무래도 빨개진 얼굴이 쪽팔린지 내쪽으로 절대로 돌아보지 못하는 소희. 그런 소희가 너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을 지었더니, 소희는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나를 휙 돌아본다.
“아 왜 부르는데 - ”
“버스정류장에서 전화해.”
“…… 됐네요.”
단 한번도, “응” 이라는 대답을 하는 적이 없다, 저 녀석은. 그래도 저렇게 튕기는 척 하면서도 또 하라면 다 하는 녀석이니까, 걱정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 됐다면서 휙 돌아서서 다시 걸어가는 소희를 보면서 소희가 짜증내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또 보고 싶은 마음에 다시한번 소희를 불러냈다.
“야, 안소희!!”
“아 진짜. 또 왜!!”
이번엔 제대로 화났나보다. 하긴, 이 녀석 스케쥴 있다고 그랬지. 거기다가 숙소에서 몰래 나왔으니… 자꾸만 붙잡아두면, 괜히 이 녀석만 혼나게 될 것 같은데, 괜히 미안해지네.
“…… 사랑한다고 - ”
“…… 바보.”
사랑한다는 말에 소희는 뭐라고 대들지도 못하고 휙 돌아서버린다. 저렇게 돌아서서, 앞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저 녀석 분명히 나 몰래 웃고 있을거다. 내가 아는 안소희는 너무 단순해서, 좋을 때는 또 좋다고 웃어 제낀다. 그것도 이게 자존심 내세울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자존심 때문에 남 앞에서는 웃지도 못한다. 혼자서 실실 웃으면 웃었지. 그렇기 때문에, 분명 저 녀석 혼자 저렇게 뒤돌아 서서 걸으면서 실실 웃고 있을거다. 귀여운 자식.
그렇게 기분좋게 녀석을 보내고 집으로 들어서니, 엄마의 불호령이 역시나 날 기다리고 있었다.
“너 왜 이렇게 늦었어!!!”
“아, 요 앞에서 잠깐 귀여운 고양이를 한 마리 발견해서, 좀 놀아주고 오느라고 - ”
“도둑고양이 함부로 만지면 병걸린다, 너.”
“하하, 네 - ”
식탁위에 봉지를 내려놓고 기분좋게 웃으며 존댓말로 대답까지 해주니, 엄마가 기분이 이상하셨나보다. 마치, ‘쟤가 오늘 약을 잘못먹었나’ 하는듯한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계속 쳐다보셨지만, 나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분좋은 표정으로 돌아서서 내 방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방으로 들어가니, 내 방 한쪽에 붙어있는 원더걸스 단체 포스터.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들어오는 소희의 저 도도한 모습.
“어휴 – 이쁜자식.”
포스터 앞으로 다가가 포스터에 입술을 쪽하고 맞추는데, 그 때 갑자기 엄마가 불쑥 들어오시는 바람에 정말 추한 꼴을 엄마에게 보이고 말았다. 하긴 엄마도 충격이 많이 크셨겠지. 자기 딸내미가, 멀쩡한 대낮에 포스터가 붙어있는 벽에 철썩 매미처럼 붙어있으니…
“엄마는 왜 노크도 없이 들어와서 그래!!”
“너… 뭐하냐?”
“아 그냥, 포스터가 떨어지려고 하길래 다시 붙인 것 뿐이야!!”
“……”
엄마의 의심스러운 눈초리. 정말 신경쓰인다. 하지만 곧, 엄마는 그러려니 라고 생각하셨는지 아빠가 선물 사오셨으니 열어보라고 하신다. 사실 올해 크리스마스엔 그것보다 더 귀한, 소희의 마음이란걸 얻어서 다른 선물따윈 필요없는데. 소희한테 고백받고 나니 배가 불러서인가, 선물 보러 가기가 영 귀찮아서, 투덜대며 발걸음 질질 끌면서 방문으로 향하는데 그 때, 갑자기 요란한 벨소리를내며 전화왔다고 핸드폰이 날 부른다.
‘역시나 – 그렇게 튕기더니.’
기분좋게 웃으며 핸드폰을 들었더니, 액정에 뜬 ‘안소희’ 라는 이름. 이게 도대체 얼마만에 핸드폰 액정을 통해 본 이름과 번호인지 모른다.
“여보세요”
“뭐하냐?”
“나… 그냥 집에 있지 – 너는?”
“버스타고 가는 길.”
“크리스마스인데, 스케쥴있고. 불쌍하다 너도.”
“시끄러.”
“하하, 스케쥴 언제끝나? 끝나고 시간있어?”
“시간따위가 있을 것 같아? 저녁에 박피디님 부산콘서트 게스트 갔다가, 오면 꽤 늦을 것 같은데. 거기다가, 지독한 선예언니 덕분에 연습도 하고…”
“시간되면 만나려고 했더니.”
“나중에.”
“그래…… 나중에.”
“야야, 나 선예언니한테 전화온다. 끊어.”
“어어........ 조심해서 들어가고.”
연인이 생겼다는 설레이는 기분이란게 이런건가. 보통 대화랑 크게 다를바 없는 통화였는데도 이상하게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머리는 멍하다. 그 순간, 갑자기 딩동 – 하면서 문자가 하나 내 핸드폰에 도착했다.
- 오늘이 우리 첫날이다. 매년 크리스마스가 우리 기념일인거고. 날짜 니가 알아서 잘 계산해. 제대로 계산 못하면 죽을줄 알아.
“푸하하.”
무심한 듯 하면서도 하여튼 챙길 건 다 챙기는 녀석이라니까. 하여튼 귀여운 녀석이다. 이렇게까지 말 안해도 내가 엄연히 잘 알아서 할까. 그렇게 신랄하게 웃어재끼고 있는데 또 한통의 문자가 딩동 – 하면서 도착한다.
- 전화는 하루에 세 번 이상. 내가 받지 않더라도 계속 할 것.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데이트는 내가 시간 빌 때 연락할 테니까, 언제든지 나올 수 있도록 준비해둘 것. 이상.
이거 완전히 나 소희부대라는 군대 안에 갓 들어온 이등병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거부하면 또 다시 난리나겠지? 게다가, 거부하고 싶지도 않고. 아니, 오히려 기분 좋다. 만약 사귀면 무심할 것만 같은 소희가 이렇게 먼저 챙겨주니 말이다. 덕분에 내 입가는 찢어질 듯 미소가 한가득이다.
- 충성. 나 김현아는, 안소희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이렇게 문자를 보내고 나니, 얼마 안 있어 곧바로 답장이 날아온다. 그리고 그 답장은, 내 심장에 커다란 자극을 주어 너무 크게 심장이 뛰다못해 내 머릿속까지 울릴정도로 강한 충격이 되었다.
- 사랑해.
왠지… 상상 속에서 소희랑 사귀는걸 그려보면, 항상 굉장히 표현도 없고, 그저 싸우기만 하는 불량커플이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그저 내 착각이자, 상상일 뿐이었나보다. 이렇게나 귀엽고, 표현도 잘 하는걸. 비록 앞에 세워놓고 해보라면 못할게 뻔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귀여운 소희에 흠뻑 물들어 버렸으니, 안소희 아니면 이제는 그 누가 내 옆에 있어도 재미 없을 것 같다. 한마디로, 영원히 이 녀석하고만 함께하고 싶다는거다. 그러니, 누구든지 이 녀석 노리면 나 야생마가, 뒷발로 안드로메다까지 보내버릴지도. 제 아무리, 내 친구 선미라도……
(번외) 현아의 편지.
To. 소희.
이렇게 편지쓰는거 왠지 처음인 것 같아. 너한테 쓰는 편지 말이야. 그래서 그런가 좀 어색하다. 읽는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겠지?
니 병실에 찾아갔을 때, 너한테 꼭 마지막인사 근사하게 남기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어. 비록, 니가 엉뚱한 말만 해서, 라는 핑계로 병실을 나와버렸지만, 사실은 내가 용기가 없었던거지. 너한테 작별을 고할 용기가.
그래서 이렇게 비겁하게나마, 글로 너에게 인사를 전하려고 해.
비록 너와는 티격태격하고, 매일 싸우던 추억밖에는 없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그 추억들이 너무나도 즐거웠어. 아무래도 원더걸스 활동 중, 제일 즐거웠던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아.
미운정이 무섭다는거, 처음엔 믿지 않았는데 사실이었나봐. 그렇게 티격태격 하면서 지내왔는데, 막상 원더걸스를 떠나려니까, 제일 먼저 니 생각과, 니 걱정이 나더라. 제일 보고싶을 사람은 너라는 생각도 들고.
소희야.
비록, 겉으로는 아무 말 안했지만, 사실은 나 너 제일 많이 아끼고 소중했어. 니가 최고였어. 그래서 너한테 더 그렇게 심하게 대했던거야. 니 말대로 나 유치하잖아. 초딩이 관심있는 사람한테 틱틱 시비걸면서 관심 표현하는거랑 똑같은거지.
그냥 그거 하나 알아줬으면 해. 내가 너 많이 사랑한다는거. 그러니까, 꼭 너 안티 같은거 생기지 않게, 방송중에는 내가 말했던대로 항상 웃어야돼. 적극적이어야 하고. 니 이쁜 웃는모습 사람들한테 많이 보여줘. 아마, 사람들 자지러질거야.
아무튼, 즐거웠다 안소희.
사랑한다. 이런 말 하면 니가 부담스러워 할지 모르지만, 팀 멤버로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From. 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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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구픽션 두번째 팬북에 실렸던 비공개 초딩소설 '꼬마산타' 입니다
사실 전부터 공개하고 싶었는데, 원본을 못찾아서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하고 올리는거라죠 아하하
이게 거의 제작년겨울 ? 쯤에 쓴거라서, 아이들이 한참 텔미활동 끝나고 고럴 때라 스토리가 많이 올드된 느낌이 없지않아 있지만 .... 뭐 어때요 소설은 소설일 뿐 <- 응?
요즘 영 카페가 잠잠한 것 같아서 한번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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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왕 오랜만에 보는 이맛 > < 요즘 초딩이 많이 안보여서 슬펐는데 이렇게라도 위로가 ㅠㅠㅠ
정말 간만에 초딩이긴 해요 - ㄷㄷ
어머... 초딩에다 달달! 거기다 리얼물 ㅋㅋ좋아요좋아 ㅋㅋㅋ 제가 원하는걸 다 갖췄군요
ㅋㅋㅋ 작가입장으로선 참 다행인겁니다 <-
리얼물 최고!!! ㅋㅋ 감사합니다 잘 읽었어요 ^^
읽어주셔서 제가 감사할 뿐 :)
와.........와......... 지기님 최고에요 진짜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현아 일기장을 보고있는것 같은 이 기분....... 정말로 이랬을거라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뭉클하네요... 어후.... 매번 느끼는거지만 19픽에는 정말 능력자분들이 넘쳐나시는듯... ㅠㅠㅠㅠ 저희같이 비루한 독자들은 복받은거죠 뭐 ㅋㅋㅋㅋㅋㅋ 정말 잘읽고갑니다 ㅠ_ㅠ
와 이런 긴댓글 전 사랑합니다 *__ ㅋㅋㅋ 최고라니 조금 몸둘바를 모르겠지만, 십구픽션에 능력자분들이 많다는건 저도 인정 ! 그래서 원본 발견하고 올릴까 말까 고민하다 올려버렸는데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다행이예요 :)
와 잘 읽고 갑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랜만에 보는 초딩...... 좋다못해 실신할 지경, 리얼물 완전 좋ㄱ아요 ㅋㅋㅋㅋㅋㅋ 소희랑 현아 둘다 귀엽네요 마지막에 잘되서 정말 다행이에요. 암튼 귀엽고 티격태격하는 초딩이지만 잘 어울리는 한쌍이죠 최고에요!!!
저도 진짜 초딩 너무 사랑한다는 - 투예 초딩 무조건 찬양 달리고 봤죠 전 ㅋㅋ 제 친구들이 미소 좋다고 할 때 초딩이 더 어울린다고 싸웠던 기억이 ... ; 지금은 미소도 좋고 소유도 좋고 ... 투예는 젤 사랑하고 .. <- 응? ㅋㅋ 아무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초딩이다!!ㅋㅋㅋㅋㅋ역시 리얼물이 초고인듯..ㅋㅋㅋ잘봤습니다~
리얼물이 아무래도 생생하죠 ㅋㅋㅋ
역시 초딩이 대박감이라능 ㅠㅠ눈물이날정도로 ㅠㅠ
초딩은 진짜 읽는 재미가 있는 커플인 듯 .. <-
역시 초딩.... 현아가 소희한테 꼼짝도 못하는군..........ㅋㅋ
ㅋㅋㅋ 실질적 리더한테 초딩이 당해낼 수가 .... 있을까요 ? <-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ㅎㅎ
ㅎㅎ너무 재밌네여........초딩커플도 좋은데 ㅎㅎ 좋은글 감사합니다.
저도 초딩커플 참 좋아했었다는 ... 아무튼 감사합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하하하하 저는 손발이 오그라든달까요 ..
으헝헝 난 초딩이좋아ㅜ^ㅜ
우와~~~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ㅎ.ㅎ 초딩커플~~~
(음......저도 팬픽을 쓰고 싶은데 쓰면 막장 안드로메다로 간다는???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