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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 개막식에서 장발의 국내 프로야구 선수들이 마치 향토예비군(프로야구 각 구단은 지역연고제 형식으로 창립되었다) 훈련받으러 나가는 모양으로 그라운드로 뛰어나가는 장면은, 159년의 역사를 가진 메이저리그나 129년의 연륜을 가진 일본프로야구는 물론 지금의 국내 프로야구와도 사뭇 다른 '그 때를 아십니까?' 류의 분위기를 가졌었드랬다. 군발정권이 기획한 프로야구 아니랄까봐 개막전에 앞서 OB 윤동균의 선수단 선서는 왜 또 그렇게 군발스럽던지...
어린이에게 꿈을, 젊은이에게 낭만을
이것이 한국 프로야구 원년의 캐치 프레이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이전에 댓구의 묘를 절절이 살린 이 캐치 프레이즈를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해에 우승한 OB의 어린이에겐 프로야구가 꿈이겠지만 OB를 제외한 다른 5개 구단의 어린이들에겐 꿈은커녕 승부세계의 냉혹함 이상도 이하도 가르쳐 주지 못했다. 그 해 15승 65패로 불가사의한 승률 0.188를 기록해 당당히 꼴찌를 '꿰찬' 삼미 팬이 아니었던 걸 위안으로 삼았던 기억만이 있다.
지금 생각해봐도 인천을 연고지로 한 삼미의 어린이 팬들은 본의 아니게 82년을 인생의 시련기, 혹은 암흑기로 강요 당하면서 두 주먹을 부르르 떨었으리라. 소설<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식으로 표현하자면 '유니세프조차도 외면한' 인천의 소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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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은 커녕 단 한 명의 슈퍼스타도 가지지 못했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그 구단 이름자체가 그대로 '꿈'이었던 구단이었던 것이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어린이 팬들이 겪었을 그 절망과 쓰라림의 부피가 다른 팀의 어린이 팬들의 환호와 즐거움의 부피로 그대로 옮겨가는 프로세계의 원리를 누가 부정하겠는가. OB박철순이 22연승을 하기 위해서는 삼미의 감사용 같은 사람이 12연패 정도를 해줘야 한다는 게 프로페셔녈의 냉혹한 세계 아니던가.
다른 구단의 어린이 팬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삼미 슈퍼스타즈의 어린이 팬들이 82년 당시에 묵묵히 감수해야 했던 삼미의 그 거룩하고 숭고한(반어가 아니다) 기록들을 정리해 볼짝시면,
시즌 최저 승률 0.188 (15승 65패)
기별 최저 승률 0.125 (후기리그 5승 35패)
특정팀 상대 시즌 최저 승률 0 (OB 상대 16전 16패)
원정경기 최다 연패 21연패 (82년 5월 26일 ~ 9월 16일)
특정 투수 시즌 최다 연패 감사용 12연패 (82년 5월 30일 ~ 9월 28일)
시즌 최소 타점 272점
더 있지만 이 정도로 끝내겠다. 이 어마어마한 기록들을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에삼미 슈퍼스타즈라는 구단은 해내 버렸다. 그야말로 패와 연관된 대기록들을 누구도 깨지 못하게 삼미는 프로원년에 철옹성같이 구축해 놓은 셈이다. 이 글 읽는 독자덜 중에 혹시 82년경 삼미를 목놓아 응원한 팬이 있다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가슴 한아름의 진심어린 경의와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다시, '어린이에게 꿈을, 젊은이에게 낭만을'이라는 캐치 프레이즈로 돌아가보자.당시 본 기자가 아직 젊은이가 아니라서 낭만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린이 입장에서 그 때의 꿈이 다만 유혹이었을 뿐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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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그 해 코리언 시리즈에서 우승을 결정짓는 OB 김유동의 만루홈런이 터지고 OB 선수들과 팬들이 승리의 기쁨에 환호하고 있을 때, 그 김유동으로부터 단 18.44M 떨어진 곳에서 70년대 한국 최고의 좌완투수 삼성 이선희는 주저앉으며 눈물을 곱씹었다는 사건에서 드러난다.
그 해 코리언시리즈 2차전, 4차전, 5차전을 연달아 던지고 6차전마저 던졌던 이선희가 끝내 눈물을 흘릴 때, 삼성 라이온즈를 불꽃처럼 응원한 수많은 팬들도 동시에 닭똥같은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는 것을 OB팬들은 아시능가. OB팬에게는 꿈이겠지만 삼성팬에게는 상실감과 아픔을 준 프로야구였다. 본 기자에게 그 상실감은 어느 날 학교에서 제트기가 그려진 2층 자석 필통을 잃어버린 그 상실감 이상이었으며 그 아픔은 황소만한 개한테 물린 아픔과 맞먹는 거시어따.
다만 프로야구가 그나마 본 기자에게 꿈을 줬던 것은 약간의 형광빛이 도는 듯한 파아란 색의 라이온즈 잠바였다. 그렇다. 본 기자 대구의 소년으로서 삼성 라이온즈 어린이 팬클럽 회원이었드랬다.
당시에 각 구단들은 가입비 5000원으로 어린이 팬클럽 회원을 모집했었는데 회원이 되면 주는 물품들이, 구단 스포츠 가방, 구단 야구모자, 구단 야구잠바, 야구볼, 선수 브로마이드, 구단 로고 빼찌, 방수 돗자리, 머그잔, 구단 책자, 스티커 머 이같은 것들이었다. 고교야구가 전성기이던 시절부터 야구를 좋아했거나 좀 있는 집의 부모들은 덜했겠으나, 야구도 통 모르고 형편이 안되는 집에 사는 전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꽤나 시달리게 하는 물품들이었던 것이다.
그 파란색 잠바를 입고 난 다음 동네 골목길에서 같은 파란색의 라이온즈잠바를 입은 놈과 마주치면 그 동지의식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끈끈한 영혼의 점액질로 서로를 묶어주기도 했드랬다. 또한 그 동지의식 만큼이나, 울긋불긋한 OB 베어스나 MBC 청룡의 잠바를 입고 출현한 놈을 보면 가슴 저 밑바닥에서 왠지 모르게 끓어오르는 투쟁심과 적개심이 일어드랬다. 울긋불긋한 OB베어스의 잠바를 입는 그 순간부터 그 놈은 박철순이 되는 것이었고 파란 라이온즈 잠바를 입는 그 순간부터 본 기자는 이만수가 되는 것이어서 본의 아니게 숙명의 대결 구도로 가는 그런 시절이었다.
프로야구의 붐은 제과류와 제지류에서도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인 아이템이 바로 콘과 딱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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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홈런콘 한 개 속에 야구선수가 찍힌 스티커 한 장이 있었는데, 이런 미끼가 들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 기자는 분명 처음에 이 스티커를 모으기 위해 그 홈런콘을 사먹지 않았다. 근데, 본 기자가 사먹는 홈런콘 마다 유독 해태 타이거스의 포수 김무종만 걸리는 것이었다.
당연히 오기가 생겼고, 가산탕진이 될망정 이 홈런콘 사먹기는 본기자에게 일종의또 다른 야구시합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다른 점빵에서 홈런콘을 사먹어도 김무종만 걸리는 것이었다. 홈런콘을 살 때마다 본 기자는 병살타를 친셈이다. 간혹 가다가 MBC청룡의 유고웅이 걸렸을 때(유고웅에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었지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계속 걸리는 김무종.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거나 비슷한 케이스를 경험한 독자들은 메일 쎄려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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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가 초창기였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진기한 기록을 가진 선수는 지금에 와서 반추해도 하나의 추억거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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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전설의 타율 4할 1푼 2리의 기록을 가진 '게브랄 티' 백인천.
어린시절에보기에도 백인천은 여느 타자와 확실히 다른 아우라를 가진 타자였다. 아니다. 그는 감독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감독겸 선수였다. 영화에서 감독겸 주연은 있었어도 야구에서 감독과 선수를 동시에 하는 것은 메이저리그나 재팬리그 역사에도 엄따.
상대편 투수가 백인천 감독한테 빈볼을 못 던지는 것은 물론이었거니와 백인천감독이 안타치고 나가서 선수에게 사인보내고 지시하고 하는 희안한 광경이 일어난 것이다. 본 기자는 영원히 깨질 것 같지 않은 4할 1푼 2리라는 타율도 경이롭지만, 그보다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했으며 당시에 최고령이었던 38세의 나이로 그가 MBC청룡 4번 타자겸 감독이었다는 점이 더 경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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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리 궁뎅이' 김성한.
그는 방망이를 뒤로 눕히고 엉덩이를 쭉 뺀 타격자세도 특이하지만, 그보다 더 특이한 것은 그가 프로원년에 세운 기록이다.
그는 다름아닌 프로원년 타점왕이자 동시에 10승대 투수였다. 백인천에게 '미스터 프로야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강타자 이미지가 강했던 그가 프로원년에 26경기에 등판해 10승(7구원승)5패 방어율 2.88이라는 투수로써 빼어난 성적을 남긴 것이다. 14명이라는 단촐한 선수단을 구성한 해태 타이거스는 투수 로테이션 상 내보낼 투수가 궁색해지자 군산상고시절 에이스로 활약했던 김성한을 내보내면서 이뤄낸 이 엽기적 기록 역시 초창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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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박찬호보다 먼저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뻔 했던 '무쇠팔' 최동원.
최동원이84년 코리언 시리즈에서 혼자서 거둔 4승은 투수로테이션과 분업이 이뤄지지 않았던 프로 초창기였기 때문에 거둔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롯떼의 다른 투수와 현격한 차이를 보일만큼 최동원의 구위와 정신력은 대단했다. 말하자면 그는 84년 코리언 시리즈를 완벽히 '지배'했던 투수였다. 당시 롯떼와 맞붙은 삼성의 강타선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갈 때 본 기자, 이 안경잽이 투수가 얼매나 밉살스럽던지...
세계 야구사에서도 유래가 드문 이 코리언시리즈 4승 원맨쇼는 롯떼를 극적으로 우승으로 이끌고 삼성에게 져주기 게임으로 인한 망신살을 '꼽'으로 끼얹어 준다. 본 기자 당시 통곡에 가까운 눈물을 흘렸드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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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엽기성을 넘어 어떤 신비감마저 감도는 투수가 프로 초창기에 한 명 있었다. 너구리 '장명부'.
장명부가 83년에 기록한 성적은 그를 삼미슈퍼스타즈의 진정한 '슈퍼맨'으로 만들었다. 30승 16패 6세이브. 427과 1/3이닝투구. 방어율 2.34. 이 기록을 세우는 와중에 3주라는 짧은 기간 동안 '8연속 게임 완투승'이라는 만화와 현실의 경계를 참신하게 무너뜨리는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심판마저 스트라이크 존을 헷갈리게 만드는 잔머리와 능글맞음, 국내 프로야구 선수들에게 빈볼의 개념을 제대로 보여준 배짱, 혹시 마약 쳐먹고 미쳐 저렇게 잘 던지지 않나 의심받게 할 정도의 근성, 이 모든 것들이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다 현해탄을 건너와, 삼미 슈퍼스타즈를 꼴찌팀에서 당당히 2등팀으로 만들어 놓은 풍운아 장명부의 면모다.
그는 '83년 이후 13승과 11승을 거두지만 승보다 패가 두배는 많게 거두는 평범한 성적을 내다가 86년 1승 18패의 초라한 성적을 끝으로 야구계를 떠난다. 그는 야구계를 떠나서도 결코 범상치 않았다. 도박을 하다가 형사입건되기도 하고 마약을 실제로 한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최근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택시운전을 한다는 소식이 들리는가 하면 생사가 불분명하다는 소문만이 간간히 떠돌 뿐 그의 행방이 아직 묘연하다.
프로야구가 시작된지도 22년. 프로야구가 출범해 원년 삼성과 청룡의 드라마틱한 개막전을 보며 첫경험(?)의 짜릿한 흥분을 느꼈던 것이 이제는 까마득한 추억이 되어 버렸다. (물론 본 기자는 앞서 밝혔듯 골수 삼성팬이라 그 때 느꼈던 흥분감은 아마도 분노의 흥분에 가까웠으리라 본다. 뭐, 지역감정 아니냐고 뭐라 할 수도 있겠으나 내가 속한 지역팀의 승리를 바라는 건 건전한 애향심이라 자부한다. 내 자신의 감정을 의심케 하는 이런 불필요한 필터링이야말로 지역감정의 후유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병역비리 파동으로 프로야구가 위기에 봉착했다고들 한다. 프로야구의 인기도 확실히 예전만 못한 것 같다. 한국 프로야구를 할 시간에 메이저리그나 일본 프로야구로 채널을 돌리기 쉽상이다. 왜 이렇게 되었나 굳이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이렇기 때문에 저러해야 한다고 주장할 일도 아니지 싶다. 다만 그 시절에 우리가 가졌던 에너지는 일종의 추억의 형태로 우리에게 돌아왔기 때문에 지금의 프로야구도 22년 후에는 또 다른 추억거리로 남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무규칙이종회상기에 가까웠던 본 기사 마치는 바이다.
딴지 추억전담반
술탄(sultan@ddanz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