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한씨 시조 한란(853~916)의 묘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 산 18번지
2014년 6월5일
7월6일 충북도시개발과 풍수지리활용방안 주제 발표를 앞두고 청주지역을 두번째로 방문하여 이곳 저곳을 들러보다.
아침 8시30분 서울을 출발하여 10시경에 청주에 도착하다. 청주에서 청주지역을 안내하여 줄 지영학선생을 만나서 청주한씨시조묘부터 둘러보다. 청주한씨 시조묘는 조선의 8대명당 중 하나로 꼽는 곳 중의 하나인데 혹사는 자리가 아니라고 하는 자도 있고 이곳이 명당의 요건을 갖춘 것이라고 하는 자도 있는데 우선 입구에서 묘역전체를 조망하다.
현장을 볼 때는 멀리서 거시적으로도 보고 가까이에서 미시적으로도 보고 다각도로 보아야 한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하는데 멀리서 조망하지 않고 가까에서만 보면 실체를 제대로 보기가 어렵다. 청주의 주산인 우암사을 와우산이라고도 하고 우암산이라고도 하는데 청주의 우암산을 소의 모습으로 본 사람이 있는냐고 물어보면 왜 우암산인지를 본 사람이 없다고 한다.
청주시내에서 아무리 살펴보아도 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 아니란 말인가? 조망점이 중요한데 우암산의 소의 모습으로 본 것은 우암산 건너편의 부모산에 올라 우암산을 조망하면 소가 누워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부모산은 고등학교 다닐 때 몇번 다녀왔지만 그런 생각 없이 산에만 다녀왔으니 우암산을 소의 모습으로 보지를 못했다. 눈이 있어도 다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다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다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고 조망하면 보일 것이요, 귀를 열면 들릴 것이요, 내가 몸소 체험하고 생각하면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청주를 어떻게 볼 것인가, 청주한씨 시조묘로 부터 시작해서 공군사관학교, 목련공원, 육거리시장, 청주읍성, 청주시청, 시내거리, 오창산단과 오송산단을 풍수적으로 둘러본다.
청주한씨 시조묘를 보는 방법은 풍수의 기본 요건인 용혈사수의 관점에서 조명해 보아야 한다. 용맥의 기본조건, 태정순강고저, 기동지비평의 혈의 조건, 사신사, 물의 형태 등 풍수의 기본원리를 대입하여 보자. 그리고 다른 시조묘와 대비하여 보면 공통점이 보인다. 제천에 있는 청풍김씨 시조묘, 예산에 있는 대구서씨 시조묘, 춘천에 있는 평산신씨 시조묘,......최근에 다녀 온 몇 몇 시조묘와 비교해보아도 이곳에 대한 평가가 가능하다.
충북에는 청주와 충주의 2군데의 화장장과 납골묘가 있다. 이곳과 비교하여 보아도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파악할 수가 있다. 청주의 목련공원 화장장은 청주시에 들려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주 좋은 입지를 잡았고 여러곳에서 이곳으로 온다고 한다. 그런데 청주한씨 시조묘와 목련공원을 비교해 보면 이곳에 대한 평가가 더욱 확실해 진다.
이곳을 보면 어떤 곳에 조상을 모셔야 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청주한씨 후손들은 지금도 각계 각층에서 국사를 담당하고 있으며, 조선조 시대 문과 급제자 315명, 상신(삼정승) 12명, 공신 24명, 대제학1명, 왕비 6명이 청주한씨 후손이다. 영의정을 지내 한명회, 한석봉(한호), 한교(인조 때 학자), 한구, 한규설(한말 참정대신, 을사조약 끝까지 반대), 한용운(33인중 하나), 한징(한글학자)등 수많은 인물들이 있다. 왕비로는 한면회의 딸 예종비와 성종비, 한학의 딸 덕종비, 명나라 태종비와 선종비도 청주 한씨이다.
최근의 인물로는 한덕수총리, 한명숙총리. 한승헌 감사원장, 한갑수, 한화갑.....수 없이 많은 인물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청주한씨, 한란선생을 시조로 하는 청주한씨는 2,000년 기준 70만 4,365명으로 우리나라 성씨 286성 중 12위를 랭크한다. 문중에서는 100만 한씨문중이라고 이야기 한다. 청주시 인구보다 훨씬 더 많은 후손들이 퍼졌다.
배영식 한국실전풍수지리연구원장이 그린 산도
한란 선생묘 설명
산도에 설명을 붙이다.
묘역으로 들어가기전 묘역 건너편에서 묘역전경을 관찰하다.
주산의 용맥과 연결되고 우선수에 좌선룡의 역관이 아주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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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으로 당겨서 촬영하다.
우뚝 솟은 혈장과 그 앞의 우물
청주한씨 시조묘의 이력
묘역 좌측의 묘
조안산의 모습
시조묘의 특징, 조안산이 겹겹이 겹쳐진다.
이곳은 밖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은폐된 곳이다.
좌청룡 역관의 모습, 우물이 정사각이다.
청룡이 잘 역관해주고 백호 위안산이 일품이다.
우측의 모습
좌측의 모습
묘역 전경
다시 전면
우측
우측면 계속
좌측면
건좌
손향
입수용맥
건좌손향을 확인하다.
잔순과 조안산
한자 韓蘭 墓 영어음역 Han Lan's Grave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
지역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 산 18
집필자 차용걸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번호 충청북도기념물 제72호
건립시기/연도 고려시대
관리자 한씨 종중
[정의]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에 있는 한씨의 시조인 한란의 묘소.
[개설]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대표적인 씨족 중의 하나이며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시조인 한란(韓蘭)[?~?]은 청주지역의 대표적 호족으로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청주를 지날 때 군량미를 도와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봉해지고 개국공신이 된 인물이다.
[위치]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 산 18번지에 있다.
[변천]
원래의 묘소는 1659년(효종 10)에 훼손되어 후손들이 1690년(숙종 16)에 봉분을 복원하였다고 전해진다. 묘소는 원래의 모습에서 변형되었지만 고려시대의 묘비와 상석 등이 현존하고 효종 때의 문인석과 용마석이 보존되어있다.
[금석문]
묘소 앞의 신도비는 후손인 한익모(韓翼慕)가 찬하고 한광회(韓光會)가 비문을 썼으며 한덕필(韓德弼)이 전액을 써서 1768년(영조 44)에 세워졌다. 『청주읍지(淸州邑誌)』에 실린 그 비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우리 동방의 대성에는 반드시 한씨를 칭하게 되는데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와서 후손으로 성을 얻은 자가 셋인데 한씨가 그 하나이다. 그 후 수백 년을 지나 우리 태위부군에 이르러 비로소 호서의 청주에 일가를 이루어 모든 한씨의 조상이 되니 대개 보고 들은 바로 자연히 알 수 있다.
부원군 한란은 고려 태조(太祖)를 도와 공훈으로 벼슬이 삼중대광에 이르렀다. 청주 동남쪽 10리에 있는 방정리(方井里)는 당시에 복거하신 구지이다. 방정리에서 가산 아래 남록 남쪽 67리에 있는 묘지는 부감(負坎)의 언덕으로 실로 부원군의 옷과 신발이 묻힌 곳이다. 중간에 실전이 되어서 타인들이 모점(冒点)하여 봉분의 형태가 없어지고 묘역을 찾을 길이 없었다.
1605년 후손 한백겸(韓百謙)이 청주목사로 와서 방정리 유허지에 단을 축조하고 해마다 한번씩 제사를 지냈다. 1689년에 참판 성우(聖佑), 장령 영(濚), 군수 숙(塾)이 같이 나서서 관청에 제송하니 조정에서 경조를 파견하여 사중을 파본 즉 부장품 등 확실한 증거물이 나오므로 범인이 사실을 자백하였다.
이제야 투장한 것을 파서 옮기고 여러 자손들이 나가서 봉분을 쌓고 묘역을 깨끗이 정리하였다. 이것이 부군 묘소를 잃었다 찾은 내력이다. 이에 모든 종중이 서로 재물을 거두고 돌을 다듬어서 묘 옆에 세우고 이런 사실을 기록하니 부군의 후손되는 사람들은 이것을 거울삼아 근본에 보답하는 도와 선조의 적덕의 보은을 알지어다.
여러 일가가 돌을 깎아 다듬어서 8척으로 하여 글을 새겨 영원토록 후손에게 밝히노라.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정 세손전 익건(翼謇) 찬.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첫댓글 좋은곳 다녀오셨네요..대명당이죠.. 좋은기 많이바드셨으테고..열심히 활동하시는것을 보니 부럽기도하고 존경스럽읍니다...
7월6일 현장 답사도 가고 청주에서 세미나도 있으니
꼭 참석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