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전 해설
<토끼전>은 조선 후기 판소리계의 동물우화소설이다. 따라서 그 이본(異本:좋은 우리말 아시는 분 알려주세요) 역시 판소리계 이본과 소설계 이본으로 양분되며, 그 이본의 명칭 또한 다양하다. 대체로 <별토가>나 <수궁가> 등으로 불려지는 작품들이 판소리계에 속하고, <별주부전>이나 <토끼전> 등으로 불려지는 작품들이 소설본계에 속한다. 그러나 이본 가운데는 판소리본이나 소설본의 중간적 성경을 지닌 것도 많고, 그 명칭도 다양하여 그 구분이 단순한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입수한 이본은 모두 62종이다. 그러나 이 외에 그 존재는 알려졌으나 입수하지 못한 이본까지 합친다면 전체 이본의 수는 이보다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어쨋든 62종이란 이본의 양은 적은 것이 아니고 또 이본에 따라 그 내용이나 분량, 사건이나 등장하는 동물, 주제나 작가 의식이 같지 않아 이에 대한 연구 또한 단순하지 않다.
<토끼전>은 인도의 본생설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중국의 한역경전(漢譯經典)을 거쳐 전래된 불전설화에 그 근원을 두고 성립된 설화계 소설이다. 우리나라의 문헌설화로는 <삼국사기> 소재의 구토설화(龜兎說話)가 해당된다. 이들이 조선 후기의 토끼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순서대로 보면 다음과 같다.
인도본생설화 -> 중국불전설화 -> 한국구토설화 -> 수궁가 -> 토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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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전설화 --------+
즉, 외국의 전래설화가 토착화되어 구토설화나 기타 구전설화가 되고, 이들이 다시 판소리 사설화하여 <수궁가>가 되었다가, 판소리 대본의 정착과정에서 문자화되면서 <토끼전>으로 소설화 된 것이다.
<토끼전>의 주제는 대체로 충(忠)을 앞세운 중세적 유교의 지배논리를 강조하는 경우, 이들 충과 유교적 도덕률에 대한 야유와 비판, 서민적 풍자적 해악이 주제인 경우, 또 이들 양자가 공존, 내지 혼재하는 경우의 세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퇴별가 -완판본-
(원나라 순제 연간) 갑신년에 남해 광리왕이 영덕전을 새로 짓고 좋은 날을 택해 집을 지을 때, 동서북 삼해의 왕에게 사신을 보내 오기를 청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니, 영타고 옥용적과 능파산 채련곡에 풍유도 장할씨고, 삼위로 구전단 등 선약을 싫토록 서로 먹고 이삼 일이 지나도록 실컷 놀아 주었더니, 좋지 않은 잔치는 없는지라, 잔치를 파한 후에 용왕이 병이 나서 임금 자리에 높이 누워 여러 날 신음하여 용의 소리로 우는구나.
수중의 온 벼슬아치들이 정성으로 구병할 때 수중에서 나는 것들을 연이어 쓴다. 술병 때문에 그런가 물 먹여 보고 양기가 부족한가 해구신도 드려 보고, 폐결핵을 초잡는지 풍천장어 대령하고, 비위를 붙잡기에 붕어를 써 보아도 백약이 무효하여 병세가 점점 심해진다.
온 나라가 허둥지둥하여 하늘에 빌더니, 하루는 오색 구름이 수궁을 뒤덮으며 기이한 말소리와 큰 향내가 사면으로 일어나며, 한 선관이 들어오는데 청하의와 명월패에 흰 새깃으로 만든 부채를 손에 쥐고 표연히 당에 올라 손을 들어 길게 인사하고 무릎을 거두고 옷자락을 바로하여 단정히 앉거늘, 용왕이 대경하여 공손히 묻기를,
"누추한 집에 천선이 강림하니 감사한 말씀 측량없사오나, 과인이 병이 있어 거동을 못하므로 문에 나아가 영접하지 못하였으니 무례하다 하지 마옵소서."
선관이 대답하되,
"은하수에서 배를 타고 장건과 배 뛰워 놀다가 여동빈의 편지가 와서 창오산에서 놀자기에 그리로 가옵더니, 오다가 듣사오니 대왕께서 몸조리를 잘못하여 오래 고생한다기에 뵈옵자 왔사오니, 재주는 없사오나 증세나 듣사이다."
용왕이 크게 기뻐 애련하게 하는 말이,
"우연히 얻은 병이 골수에 깊이 들어 백약이 무효하기에 반드시 죽을 것임을 알았더니, 옥황상제의 은덕으로 명의 선관을 보내시니 자세히 살펴 좋은 약을 이르소서."
저 선관 거동 보소. 두 소매 뒤 걷으며 손을 넌짓 들어 온 몸을 만져 보고 앞으로 물러 앉아 기색을 살핀 후에 묵묵히 생각하다가 용왕께 여쭈오되,
"대왕의 귀한 몸이 사람과 다른지라, 사람이라 하는 것은 오장육부 있는 병을 맥을 잡아보면 뛰는 것이 있거니와, 대왕의 귀한 형체 제 누구라고 짐작하리오. 눈빛이 영롱하되 돌과 바위 못 보시고, 두 다리가 높아 말소리를 뿔로 듣고, 턱 밑의 큰 비늘이 거슬러 붙었기에 화를 내면 일어나고, 입 속의 여의주가 조화를 부리오니 몸을 적시자 하면 못 속에도 잠겨 있고, 변화를 하자하면 하늘에도 올라가고, 용맹을 쓰자하면 태산을 부수고 큰 바다를 뒤집으니, 구름과 안개가 둘러싸고 벽력같은 호령이라. 이 형체 이 기상에 병환이 중하오니 인간 침약으로 누구라고 구하릿가. '황제소문'·'의학 입문' 같은 의서가 만병을 논하지만, 대왕의 저 병세는 그 중에 아니들고, 사람 몸에 소머리를 한 신농씨가 삼백초를 하였으되 대왕께서 당한 약은 그 중에 없는지라. 비늘 껍데기가 굳었으니 침이 어찌 들어가며, 화식을 안하니 탕약을 어찌 잡수릿가. 병세를 자세히 보고 이치를 생각하니 천년된 토끼의 간이 아니면 구할 길이 없습니다."
용왕이 묻자오되,
"토간이 어떠하기에 약이 된다 하십니까?"
선관이 여쭈오되,
"토끼라 하는 것이 묘방을 맡았기에 새벽에 닭이 울어 날을 비칠 때, 양기를 받아먹고 달에 들어가서 계수나무 그늘 속에 장생약을 찧을 적에 음기를 받아먹어, 해와 달빛의 음양기운이 간장 사이에 들었기에 토끼가 눈이 밝아, '눈이 밝다'는 별명을 가진 것은, '눈은 간에 속한다'하니 간장이 좋으므로 눈이 그리 밝사오니, 토간을 잡수시면 병환이 바로 낫고 장생불로 할 것이요, 만일 그 약이 아니면 화타와 편작이 좌우에 모시더라도 구할 수가 없사오니 힘을 내어 구하옵소서. 갈 길이 바빠서 그만 가옵니다."
소매를 떨치고 문 밖에 나서더니 선관은 간 데 없고, 맑은 옥피리 소리 공중에서 들리거늘, 용왕이 생각하되 토끼라 하는 것이 인간세상의 짐승이라, 명령을 내리시니 수궁이 진동하여 '임금이 부르시면 수레를 기다리지 않고 달려감이라', 만조백관들이 풀풀 뛰어 달려들 때, 태호 복희씨 '용이 하늘로부터 상서를 내리자 용으로 관직을 정했다'는 말이 <사기>에 있었으니, 용궁의 벼슬 이름 아주 옛날에 생긴 것이라서 조선과는 다르겠다.
동편에 문관 서고 서편에 무관 서서 양반을 구별하여 일시에 들어올 때, 좌승상 거북이, 우승상 잉어, 이부상서 농어, 호부상서 방어, 예부상서 문어, 병부상서 숭어, 형부상서 준치, 공부상서 민어, 한림학사 깔따구, 간의대부 물치, 백의재상 쏘가리, 금자광록 금치, 은청광록 은어, 대원수 고래, 대사마 곤어, 용양장군 이무기, 호위장군 장어, 표기장군 벌덕게, 육격장군 새우, 합장군 조개, 참군 매기, 주부 자라, 청주자사 청어, 서주자사 서대, 연주자사 연어, 주천태수 홍어, 청백리 자손 백어, 탐관오리 자손 오징어, 허리 긴 뱀장어, 수염 긴 대하, 구멍없는 전복, 배부른 올챙이 떼가 품계 차례 대로 들어와서 주르르 엎드리니, 조관들이 들어오면 '의관을 정제한 몸이 어로향에 끌려'서 향내가 날 터인데, 속 뒤집는 비린내가 파시평보다 더하도다.
용왕이 명령을 내리되,
"임금과 신하의 의가 서로 다름을 경등이 아는가?"
좌승상 거북이 여쭈오되,
"신의 집이 선세로부터 신명하기로 유명해서, 천문 지리를 통달하니 인간의 임금과 현인들이 다 그 힘을 입었으니, 하우씨가 천하를 다스릴 아홉 가지 큰 법 알기를 신의 선조가 가르치고, 주공이 수도를 낙양에 정하기를 신의 선조가 가르치고, 삼대 적 성군들이 천하를 다스릴 때, 구복과 서복의 운명을 쫓되, 경·대부·사를 쫓고 백성의 뜻을 쫓았으니, 신의 집이 공이 많은 것을 만고에 전한 <사기>가 신의 집에 다 있어 임금과 신하의 나뉜 분수 중한 줄을 자세히 아나이다."
용왕이 또 물어,
"어찌하면 충신인고?"
좌승상이 여쭈오되,
"임금에게 좋은 것이면 제 몸 죽기를 돌아보지 않으므로, 진나라 개자추는 허벅다리 살을 베어 굶주린 진문공을 먹였고, 한나라 기신이는 고조를 대신해 불에 타 죽었습니다."
용왕이 또 물어,
"우리 수궁에도 그런 충신이 혹 있을까?"
우승상 잉어가 옆에 서서 생각하니, 같이 정승으로 함께 입시하였다가 문벌과 유식 자랑 좌승상은 했는데 나는 대답하지 못하면 '주발이 등에 식은 땀을 가득히 흘리는 것'처럼 무색하지 않겠느냐? 썩 나서서 대답하되,
"신의 집이 학문 좋아하는 것으로 만고에 유명하기에 천하의 대성인 공부자가 신의 이름 빌어다가 그 아들을 이름하고, 왕상 같은 정성이나 신의 집 아니면 효자될 수 없사오니, 작은 비단에 쓴 편지를 배에 품고 용문에 뛰여 올라 성군을 섬기오니, 천고의 <사기>를 모를 것이 없사오되, 충신이라 하는 것이 평시에는 알 수 없어, 어지러운 바람이 불때 강한 풀을 알 수 있고 세상이 혼탁할 때 충신을 알 수 있으니, 평시에 봉할 때는 다 모두 충신이나 환란을 당하면 충신이 귀합니다."
용왕이 말하기를,
"짐의 병이 위중하여 선의(仙醫)의 하는 말이 토끼 간을 못 먹으면 죽을 수 밖에 없다 하니 어떤 신하가 토끼를 잡아 짐의 병을 구하리오?"
공부상서 민어 여쭈오되,
"토끼라 하는 것을 얼굴은 모르오나, <사기>로 볼진대 중산의 소산이라. 몽염의 옛 일 같이 에워싸고 잡는 수니 정병 삼천 내어 주어 대장 고래 보내소서."
고래가 분을 내어 출반하여 여쭈오되,
"수륙이 다르니 수중에 있던 군사 육지싸움을 어찌할지 저런 소견 가지고도 문관임을 뽐내 좋은 벼슬 해먹고, 조금 위태한 일이면 호반에게 밀려하니, 배속에 있는 것이 부레풀 뿐이기에 하는 변통없이 하는 말이 고지식한 것과 같습니다."
공부상서 무색하여 아무 대답 없었구나,
한림학사 깔따구가 여쭈오되,
"토끼라 하는 것이 조그만한 짐승이라, 병환에 좋다면 대왕의 위엄과 덕망으로 그까짓 것 구하기가 무슨 염려 있으릿가? 토끼 몇 수 바치라고 산군에게 조서를 당장 올리리다."
용왕이 또 물어,
"조서는 한다 하고 누가 갔다 산군을 줄꼬?"
간의대부 물치 여쭈오되,
"표기장군 벌덕게가 의갑이 굳세옵고 열 발을 갖추어서 진퇴를 다 하옵고, 제 고향이 육지오니 조서 주어 보내소서."
게가 분이 잔뜩 나서 미처 말을 못 하여 입에 거품을 흘리면서 열 발을 엉금엉금 기어나와 변명한다.
"수궁의 벼슬들이 인간과 같지 않아서 세도로도 못 하옵고, 청으로도 못 하옵고 풍신과 물망으로 별도로 선택하여 하옵기로, 농어는 '큰 입과 작은 비늘' 잘 생겼을 뿐 아니오라 장한이 생각하고 소동파가 귀히 여겨 친구가 점잖키로 벼슬차지 이부상서, 방어는 '황하의 방어와 낙수의 잉어'가 유명할 뿐 아니오라 이름 자가 '천원지방'이란 방자 한 편 붙었기에 땅 차지 호부상서, 문어는 다리가 여덟이니 '수기치인의 팔조목'을 응하였고 이름이 글 문자니 예문차지 예부상서, 숭어는 용맹 있어 뛰기를 잘 하옵고 이름이 '재기준수'라는 빼어날 수자인 고로 군사차지 병부상서, 준어는 가시가 많아 사람마다 어려워하고 이름이 '용법엄준'이란 높을 준자인 고로 형법차지 형부상서, 민어는 배속에 갖풀 들어 장인에게 요긴하옵고 이름이 '이용만민'이라는 백성 민자인 고로 장인차지 공부상서, 도미는 맛이 있고 풍신이 점잖으되 이름의 윗자에 쓸 한자가 없고 아래에 고기 어자 안들었다고 상서등용 못하는데, 한림학사 깔따구는 이부상서 농어의 자식이요, 간의대부 물치는 병부상서 숭어의 자식이라. 저의 집 세력으로 입에서 아직 젖내 나는 것들이 요직의 벼슬을 하여 아무 이치도 모르고서 방안 장담 저리 하나, 수륙이 다르니 용왕이 한 조서를 산군이 들을 테요 저희들이 조서하고 저희들이 가라시오."
응왕이 들어 보니, 뿔쌍한 호반들이 문관에게 평생 눌려 분하여 이를 갈며 속을 썩이다가, 이런 때를 당하여서 큰 싸움이 나겠거든, 용안을 비쓱 들어 백의재상 돌아보며,
"토간을 구하기에 시각이 급한데 문무가 불화하여 골라 쓸 수 없으니, 문무간에 보낼 신하 선생이 천거하오."
귈어가 어찌하여 백의재상 되었는고. 수궁 벼슬하기 매우 어렵고 무섭다고 한가히 물러가서, 무릉도원에서 흰 갈매기와 백로로 벗을 삼아, '정승의 자리라도 자연과 바꾸지는 않겠다'는 장지화와 노는 고로, 수궁 군신들이 '강호선생'이라 존칭하여 수궁에 일 있으면 예관 보내 청해다가 의논을 하는 고로 벼슬없이 국사하니 당나라 이필 같이 백의재상 되었구나.
용왕이 병중하야 국사가 위태롭기에 의논 차로 모셔 와서 입시동참 되었더니, 궐어가 여쭈오되,
"'임금만큼 신하를 잘 아는 이가 없다'했으니 대왕이 정하옵소서. 자기의 임무를 감당하지 못할 신하면 불가하다 하오리다."
남의 재기 짐작하기 좀 어려운 노릇이냐. 요임금이 곤 시켜 홍수를 다스리고, 공명이 마속 보내 가정(街亭)을 지켰으니, 허물며 병든 용왕이 신하 재주 알 수 있나 묻는 족족 당챦구나.
"합장군 조개는 온 몸에 갑주가 단단하니 보내면 어떠한고?"
"합장군은 진짜 장부라 보내면 좋을 테나, 도요새와 원수 있어 둘이 서로 다투다가 어부지리 되기 쉽사오니 보내지 마음소서."
"원참군 메기가 주옥으로 꾸며 만든 좋은 관과 긴 수염이 점잖으니 보내면 어떠한고?"
"요사이 물고기 죽이는 가루를 돌 밑마다 풀어 놓으니 민물근방에는 못 가지요."
"'녹봉을 후하게 주는 나라에는 반드시 충신이 있다'하니, 도미가 벌써부터 상서가 소원이라니 다녀오면 시키기로 하고 도미를 보내 볼까?"
"사월 팔일 가까우니 서울은 쑥갓이요 시골은 풋고사리 송기탕 찜감 보냈다가는 곧 죽지요."
"올챙이 배 불러 경륜을 많이 품었으니 보내 어떠할꼬?"
"한두 달에 못 올테니 개구리 되면 올챙이 적 일 알 수 있소?"
문답이 장황하여 오정 때가 되어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구나, 서반 중의 한 조관이 출반하여 여쭈오되,
"효도는 백행의 근원이요 충성은 삼강의 으뜸이라. 천성으로 할 것이지 가르쳐 하오리까? 신의 선대 할아비가 멱나수에 사옵더니, 절강으로 장가가서 굴삼여의 고기는 할아비가 얻어 먹고, 오자서의 고기는 할미가 얻어먹어, 부부지간 두 배속에 충혼이 잔뜩 들어 자손이 나는 대로 아주 배속 충신이요 대대 충신이라. 수중은 고사하고 세상의 사람들도 충심의리 아는 이는 잡아 먹는 법이 없고, 어부들이 잡았으면 사다 물에 넣는 고로 종족이 번성하되 여러 벼슬 아니 하고 좋은 벼슬 구하지 않고, 가문중에서 상자를 뽑아 주부 벼슬 세전하니, 황하수가 오래도록 국가를 모시옵고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할 테니 신의 간을 잡수어서 대왕 환후 나을 터이면 곧 빼어 올리겠으나, 토간이 좋다하니 신의 정성대로 기어이 구하리다."
만조가 다 놀래어 에워서서 살펴보니, 평생 모두 멸시하던 주부 자라거든, 용왕이 의흑하여 자세히 묻는구나.
"토끼를 잡자하면 수국에서 인간세계 가기에 몇 만리 될 터이요, 허다한 천봉만학 어느 산을 찾아 가며, 삼백 모족 많은 중에 토끼를 어찌 알며, 설령 토끼를 만난다 해도 어찌하여 데려올지, 신포서의 충성과 공명의 지략이며, 걸음은 과보같고 눈 밝기는 이루같고, 소진의 구변이며, 맹분같은 장사라야 그 노릇을 할 터인데, 너의 생긴 모양 보니 어디 그러하겠느냐? 백소주 안주하기 탕감이 십상이다."
주부가 여쭈오되,
"충성지략 말 잘하기 흉중에 들었으니 외모 보아 알 수 없고, 외모로 본다해도 과보가 잘 걸어서 해를 쫓아 갔아오되 그 발이 둘 뿐인데 신의 발은 넷이옵고, 맹분이 힘이 세어 구정(九鼎)을 들었으되 목을 감추지 못하는데 신은 목을 출입하고, 대가리가 뽀쪽하니 백기의 지혜옵고, 허리가 넓었으니 오자서의 열 아름 둘레의 크기옵고, 코구멍이 좁사오니 의사는 넉넉하고, 볼이 아니 퍼졌으되 구변은 있사오니, 참혹하게 죽더라도 토끼를 잡아 올 터이오니, 토끼의 생긴 형용을 자세히 그려 주옵소서."
(용왕이 ) 추켜 ,
"충성스럽구나! 주부의 충성이여. 신하로구나! 주부의 신하됨이여."
화공 인어를 불러 들여 백옥으로 새긴 벼루에 먹을 갈고 각색 채색 고이 갈아, 비단을 펴놓고 좋은 붓을 빼어 들고 토끼를 그리려고 할 때 인어가 수궁의 화공이어서 토끼의 화본(畵本)이 없었구나, 만조가 걱정하더니 전복이 썩 나오며,
"내 전신(前身)이 꿩이라. 산중에 있을 때에 사냥꾼의 날이든 독수리 급한 변이 무디무디 일어날 제, 산중에 만만한 것이 나와 토끼 뿐이로다. 양자택일로 저 아니면 나 죽기로 어려움에 처해 서로 도와 구해주며 지냈으니, 금수가 달랐으되 불쌍한 처지가 각별하였기에 토끼의 생긴 형용, 속에 그저 눈앞에 아른거리니 내 말 대로 그려내라."
전복은 가르치고 화사는 그리는데, '촛불같은 횐 달' 바라보는 눈 그리고, '여기저기 새 우짖는 소리' 듣는 귀 그리고, '봄바람에 만발한 꽃' 향기맡는 코 그리고, '여기저기 뒹구는 밤과 도토리' 주워 먹는 입 그리고, '준견이 쫓는 발저는 토끼' 다라나는 발 그리고, 진나라 중서령이 붓 매었던 털 그리고, 두 귀는 쫑끗, 두 눈은 도리도리, 허리는 짤록, 꼬리는 짤막, 설설 그려내니 자라가 화상 받아 목에 넣고 움뜨리니 아무 염려 없었구나.
용왕전에 하직하니 용왕이 부탁하되,
"옛날에 진시황이 불사약을 구하려고 서시를 보냈더니, 큰못이 가로막아 오지 않아서 한 줌의 흙이 되었으니 그 아니 불쌍한가? 경 같은 장한 충성은 만고에 쌍이 없으니, 인간세계에 있는 토끼를 빨리 잡아 돌아와서, 짐의 병을 낫게 하면 땅을 자손에게 나누어 주어 그 공로를 갚을 테니 부디 가 조심하라."
주부가 하직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주부가 인간세계에 간다는 말을 집안에서 벌써 듣고 온갖 내외 친인척들이 전송차 다 모였다.
주부의 대부인이 주부를 경계한다.
"너의 부친 식욕 많아 낚시밥을 물었다가 청년 나이에 죽었기에, 독수공방 내 설움이 너 하나를 길러 내어, 불면 날까 쥐면 꺼질까, 아침에 나가 늦게 오면 문에 기대어 기다리고, 저문 때 나가 아니 돌아오면 이문에 기대어 바라보았더니, 네가 지금 벼슬하여 임금을 섬기다가 임금이 병환 계서 약 구하러 간다 하니, 임금과 신하가 간난과 사생을 함께 하는 것은 당당한 직분이니, 지성으로 구하다가 만일 약을 못 얻거든 모래밭에 뼈를 드러내 거기서 죽을 것이지 돌아오지 말지어다. 대대로 충신 집에 선조들의 덕을 더럽히게 될 것이니 두어서 무엇하리?"
주부가 여쭈오되,
"정성을 다해서 위로 임금의 병환 아래로 모친의 마음 둘 다 편케 하오리다."
주부의 마누라가 하직을 하는데, 그도 또 법도에 맞게 한다.
"부부의 화목한 정은 잠시 이별 어렵지만, 오륜을 마련할 때 '군신유의' 먼저 쓰고, '부부유별' 후에 쓰니 군신의 중한 의가 부부보다 더한지라. 임금을 위하다가 죽는데도 한이 없네. 당상의 늙은 어머니 내가 봉양할 것이요, 슬하의 어린 자식 내가 길러 낼 것이니, 집안 생각 아예 말고 토끼만 얻어다가 임금 환후 낫게 하오, '채찍을 휘둘러 만리 밖으로 사라지니 어찌 규방을 근심하는가'라는 말 낭군이 모르시오."
주부가 대답하되,
"부인 말씀 듣사오니 충신의 아내되기 부끄럽지 아니하니, 말씀대로 할 것이니 어머님을 지성으로 모시고 어린 것들을 자주 찾아 멀리 가게 하지 마소. 세상에 흉한 놈들 말굽자라 맛 좋다고 건져다가 삶아 먹지."
차례로 하직할 제,
"아저씨 평안히 다녀 오시오."
"헝님 평안히 다녀 오시오."
"조카 잘 다녀 오너라."
"소상강 손 빨리 다녀 오너라."
주부의 처가는 소상강이던가 보더라. 이종사촌 고동, 내종사촌 소라, 진외척숙 우렁, 육지사돈 달팽이 연이어 하직하는데, 천만 뜻밖 해구라는 놈 옆에 와 앉았거든, 주부가 물어,
"너는 어찌 예 왔느냐?"
"조카가 먼 데 가니 하직 차로 찾아 왔지."
주부가 화를 내어,
"우리집 내외척이 다 내력 있느니라. 고동, 소라, 우렁들이 내 목과 같아서 들락날락하는 고로 촌수가 있거니와 너는 어찌 친척관계가 있노?"
해구가 웃어,
"내 좆도 네 목 같아 서면 들고 앉으면 나오기에 주부에게 아저씨되지."
좌중이 광객이라고 해구를 쫓은 후에, 주부가 길을 떠나 수국퐁경은 조석에 보던 데라, 산중을 어서 찾아 만경창파 얼른 지나 천봉만학 두루 밟을 때, 역산의 밭두둑은 순임군 따비 흔적, 도산의 넓은 터는 하우씨 공 받던 데, 대악에 묻은 옥백 헌원씨 제사요, 이구산 노구 자리 숙양흘이 빌던 데라, 수양산 새 고사리 백이·숙제의 청절 가련하고, 면산에 돋은 풀은 개자추의 충혼 적막하다.
태산의 공부자는 천하를 적다 하고 무우의 증점이는 봄옷을 떨쳤구나. 기산 아침볕에 봉황이 어디 가며, 농산 봄바람에 앵무가 말을 한다. 추역산 올라가니 태아검 묻히었고, 계명산 지나가니 옥소성 끊이었네. 낙안봉 어느 날에 범아부가 천상을 보았는고. 태행산 가는 구름 적인걸의 고향 생각, 상산에 흩어진 것 사호의 두던 바둑, 기산에 빈 것은 소부의 버린 쪽박. 부춘산 맑은 소리 엄자릉의 바람이요, 천목산 남은 향기 도연명의 국화로다. 여산의 큰 구렁은 진시황의 굴총터요. 현산의 이끼돌은 양숙사의 타루비, 낭거산 세운 비석 한공을 새겼으며, 팔공산 많은 초목 진나라 병사인가 의심하네. 향산의 깨진 것은 백낙천의 약솥이요. 화산에 남은 집은 진도남의 운대로다.
형산사 구름 걷기 한유의 정성이요, 용문산 눈이 오니 양공의 구정이라. 금성산 두른 송백 한승상의 사동이요, 무이산 좋은 천석 주회암의 금서로다. 향산의 긴 뱀은 수미진을 치고 있고, 숭산에 우는 학은 선관이 모았구나. 낙가산 관음보살 감주 병을 들고, 오대산 문수보살 감중련에 앉았구나. 구룡산 운화부인 금간옥첩 볼 수 없고, 천태산 마고선녀 상전벽해 수놓는다.
곤륜산 안기생은 선단바쳐 옥경 가고, 봉래산 적송자는 구름 깊어 못찾겠다. 관산 밝은 달에 피리가 처량하고, 무산 저문 비에 선녀가 소식 없다. 이곳저곳 두루 찾아 한 곳을 당도하니, 우산에 낙조하고 창오산에 구름 일고 회계산에 안개 덮여 천지 적막커늘, 바위틈에 몸 숨기고 혼자 앉아 졸더니 아미산에 달이 돋아 '영입평강' 밝았거늘, 여산 동남 오로봉을 밤 새도륵 찾아가니, 향노봉에 해 비치어 붉은 내 일어나고, 폭포 소리 요란커늘 잠깐 앉아 구경하니, 어떠한 식구 하나 온 몸에 이슬 적선 이슬을 흘리고서 앞으로 지나간다. 주부를 얼른 보고 인사를 부치는데 유식한 체하느라고 문자로 하여,
"객은 어디서 오는 길이오(客從何處來)?"
주부가 자세히 본즉 제 형용과 비슷하거든 문자로 대답하여,
"나라고 하는 이는 동으로 가나 서로 가나 나그네로 정처 없거니와 거기서는 뉘시요?"
저것이 때답하되,
"내 성명을 이르자면 본사가 장황하여 입담간에 못 할 테나, 당신의 생긴 모습 나하고 비슷하니 내력을 말하오리다. 우리 선조께서 남해 수궁 벼슬하셔 대대 충신 지내더니, 조부님이 곧고 강직하여 임금에게 바로 고하다가 소인에게 참소 당해 인간세계로 유배가니, 다시 고향 못가시고 산중에 노닐며 바위 위에서 노래불러 안색이 초췌하고 형용이 야위어서 파리 하니, 인간세계의 사람들이 '얌전하고 불쌍하여 굴삼려와 같다'하여 당호를 지었으되 남해에서 왔다하여 남녘 남자 떼고 '온 세상이 다 취했지만 나만 홀로 깨어 있다'의 깰 성자 떼어, 남성선생이라 부르더니, 그 아내가 수중 있어 기다리다 못하여서 여필종부 찾아 나와 육지 사람 아주 되어, 자식들을 나은 것이 산 중에서 사는 고로 도토리를 주워 먹어, 참 나무 살이 올라 돌 위에 지나가면 나막신 신었는 듯, 가난한 우리 형세 이름 매양 질 수 없어 조부님 당호두고 대대로 불러가니, 아들도 남성이 손자도 남성이, 이후 중손 고손 나도 남성이라 한 것시오."
주부가 들어 본즉 동종이로구나. 한숨짓고 하는 말이,
"세상 일 알 수 없소. 우리 선조 형제분의 계파가 갈렸으니 우리는 별자 파요 오자하신 그 방계 조상이 육형제분이신데, 기운이 천하장사 삼신산을 싣고 있어, 이적선과 좋아하여 그 방조 죽은 후 적선이 와 조상하고 죽음을 두루 알렸으니, '여섯 마리 새우가 삼신산을 메고 다니다가 두 마리는 없어지고 네 마리가 메고 있는데 삼산이 흘러 지금은 어디로 갔나'라는 말이 지금까지 전하는데 우리 수궁에는 그 자손이 없기에 자손이 모두 끊어졌나 하였더니, 종씨 말씀 듣사오니 종씨가 그 자손 우리 집 종손이오."
남생이가 이 말 듣고 눈물을 펄펄 흘리면서 정성으로 하는 말이,
"본시 같은 뿌리에서 나왔는데 산수간에 갈리어서 이제야 상면하니 내 마음 반갑기는 측량이 없사오나, 종씨는 어찌하여 저러한 귀한 몸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길을 가십니까?"
"예, 우리 수궁에서 재변나서 해마다 물이 오염되어<?>, 수족들이 모두 없어짐이 가련키에 부득이 수정궁을 자리 옮겨 짓자 하되, 수궁에 지관 없어 청산 월중토끼가 눈이 그리 밝다기에, 수궁으로 모셔다가 대궐 터를 정하고자 하되 토끼의 생긴 형용 잘 모르기에 동분서주 여러 달에 지금 상면 못하였소."
남생이가 대답하되 ,
"산중에 일 있으면 모족들이 모두 모여 공사를 하는데, 나와 두껍이는 몸에 털은 없사오나, 네 발이 돋쳤다고 함께 매양 참여하더니, 요새 무슨 일 있는지 금월 십오일에 낭야산 취옹정에 일제히 모이라고 통문을 써 가지고 다람이가 돌렸으니, 내 집에 가 계시다가 그날 함께 가서 모족 모임 구경하면, 삼백모족 다 보시고 토끼 만나 보오리다."
주부가 좋다하고 남생이의 집 함께 가서 뭍의 동종들을 면면이 지면하니, 집집이 돌려가며 착실히 대접하고 모임날이 돌아오니 남생이와 함께 낭야산을 찾아가니 털 좋은 친구들이 모두 들어 모이는데, 똑 이렇게 들어와 공부자가 <춘추>를 짓고 절필하던 기린, 천제의 엄격한 법 무섭다 코끼리, 투기많은 여자 암광스레 떠드는 큰 소리 사자, 흥문연에서 '칼을 빼어 춤을 추고(彈劍作歌)''배고파 산을 내려오는(飢熊下山)' 곰, 강물은 동쪽으로 흐르고 밤에 우는 원숭이, 부르짓는 소리 바람따라 구렁에서 일어나는 산군 위엄 호랑이, 복희씨는 희생을 길러 포주를 충당했고, 문왕의 덕화는 장하시다 신성한 곳에서 유유하게 지내는 사슴, 공명이 말을 사냥하려다가 잘못하여 잡아 탄식한 노루, 한문공이 족보 짓던 붓의 후손 토끼, 산 속의 쥐잡기는 하루 천리 가는 명마도 못당한다, 호랑이 없는 산중엔 삵, 진시황을 네 아느냐 옛 무덤과 사당의 여우, '쥐에게 이빨이 없으면 무엇으로 담을 뚫을까' 살살 기는 쥐, 이랬다 저랬다 우롱하니 어찌 알꼬 박랑(博浪)에서 엎드린 다람쥐, 뿔 좋은 고라니, 털 좋은 너구리, 기름 많은 멧돼지, 벌통 뚜껑 감 오소리, 좋고 누런 털 족제비, 부리 횐 조이, 강남길을 어찌 갈꼬 엉금엉금 두꺼비 다 주워 모이더니 서로 높은 자리를 사양하며 기린으로 상좌를 정하니, 기린이 사양하여,
"나는 세상에 아니 있고 성인만 따라 다녀 얼른 왔다 돌아가니 동방 군자국에 갑자 원년 성인 임금 등극을 해 계시니, 잠깐 가서 다녀 오자고 한양으로 가는 길에 모족 모임 한다기에 얼굴을 알자하고 잠깐 찾아온 길이니, 여럿이 모인 높은 자리 손이 어찌 앉으리오?"
여러 번 사양하니 좌편에 별도로 만든 한 자리에 기린이 먼저 앉고 코끼리 사자며 곰과 원숭이가 그 밑에 앉은 후에, 산군이 주인으로 한가운데 주석하고, 우편에 사슴, 노루, 토끼, 여우, 삵 등의 무리가 차례로 앉은 후에 산군이 고개 들어 취옹정 글 써있는 현판을 바라보며 하는 말이,
"구양수 그 어른이 우리하고 원망이 있던가?"
토끼가 물어,
"어찌 하신 말씀이오?"
"'즐기던 사람들은 가고 새들만 즐겁다'는 새라는 글자는 둘을 쓰고 짐승 수자 안 썼으니 그것이 절통하다."
토끼가 대답하되,
"그 글의 힘을 볼진대 '새가 위 아래에서 운다'고 하였으니, 울 명자 아뢴 고로 짐승 수자 못 썼나보오."
사슴이 하는 말이,
"'사슴의 울음'이라니 내 소리는 울 명자가 아닌가?"
산군이 말을 꺼내어,
"오늘 모인 것은 근래 인심이 매우 무서워 짐승을 잡아 먹기 온갖 꾀가 다 생기고, 산중에 수목 없어 은신할 데 없으니, 애잔한 우리 모족 전멸할 것이 가련하기에, 한 자리에 모여 깊이 생각하여 각자 자기의 뜻을 말하고 들어보면 도모할 계책이 있을런지, 난을 피하는 방안이 혹 있을까 이 모임을 하였으니 노소를 가리지 말고 각자 그 계책을 자세히 말을 하라."
너구리 여쭈오되,
"소락의 소견에는 평생 미워하는 바가 있사오나 세력이 미치지 못하여 입을 열지 못하더니 하문을 하시기에 감히 아룁니다. 천지개벽한 연후에 사람이 제일 신령하니, 짐승이라 하는 것은 사람 위해 생겼으니, 성신의 하신 말씀 '오십에 고기가 아니면 먹지를 않는다'하니, 사람이라 하는 것은 짐승 잡아먹는 터이니, 사람 손에 죽는 것은 조금도 서럽지 아이하나 사냥개라 하는 것은 같은 우리 모족으로 사람에게 얻어먹으니, 다른 개와 같은 행세로 똥이나 먹여 주고 도적이나 지켰으면 주인 은혜 갚을 터인데, 무슨 놈의 아첨하는 무리로 냄새 잘 맡는 자랑하여 심산궁곡 층암절벽 찾고 찾아 드러와서, 여기저기 짖는 데도 냄새를 붙여 길을 찾아 굴속에 들었으되, 기어이 물어 내니 제 아무리 애썼으나 피 한 모금 고기 한 점 맛이나 볼 수 있소. 제 몸에 이도 없고 동료만 살해하니 그놈 소위 사냥개라. 산군님 이후에는 다른 짐승 살해 말고, 저 소위 사냥개를 세상에 있는 대로 다 잡아다 잡수시면, 오소리 뿐 아니오라 덕이 모든 짐승에게 미치오리다."
산군이 대답하되,
"사냥개라 하는 것이 소위 분통해 할 만한 것이니, 다 잡아다 먹었으면 네게 설분되고 나도 배 채우련마는, 일등 포수 따라 다녀 낮이면 앞을 서고, 밤이면 함께 자니 어설피 물었다가 조총 귀불이 번듯 총알이 쑥 나오면 내 신세 어찌되리?"
너구리 여쭈오되,
"그리하면 사냥개는 제명 대로 사오릿가?"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필요 없게 된 개는 삶아 먹힌다'하니, 저도 죽는 날이 있제."
노루가 말을 하여,
"오늘 이 모임에 산중 짐승이 다 모이고 기린 선생님이 뜻밖에 왕림하셨으니, 무슨 음식 장만하여 대접을 해야 하제?"
산군이 노루를 추켜세워,
"아마도 늙은이가 인사를 더 아는구나, 장선생 노루가 모임차에 늙은 노자 있는 고로 저런 말을 먼저 하제."
여우가 썩 나서며,
"다람쥐가 겨울나자 밤과 도토리를 많이 모와 두었으니 가져오라 하옵소서."
산군이 좋다하고 가져오라 분부하니 다람쥐가 생각한즉 좌중에 모인 식구 저 보다는 주먹 세어 어찌 할 수 없었으니, 저와 같이 만만한 놈을 제가 가려 또 내세워,
"쥐도 양식 많을 터이니 가져오라 하옵소서."
산군이 좋다 하니 쥐와 다람쥐가 애써 주워 모은 것을 다 갖다 바쳤구나.
좌중이 나누어 먹은 후 산군이 하는 말이,
"나는 실과를 못 먹으니 무슨 요기 해야 하지?"
여우가 또 나서며,
"산군님 그 식량에 사소한 짐승들은 입담 없어 못 할 터이니, 멧돼지 큰 자식이 지금 잡아 팔자 하되 열 냥 값이 푼푼하니 가져오라 하옵소서."
산군이 좋아라고 여우를 훨색 부추겨,
"호(狐)선생 여우가 얌전하여 내 식성을 똑 아는고, 내 옆에 와 앉으시오."
여우가 하하 웃고 팔짝팔짝 뛰어가서 산군 옆에 썩 앉으니, 멧돼지가 분이 나서 여우를 깨물잔들 임금 곁에 붙어 간신 짓을 오래하는 것들이요, 산군 옆에 앉았으니 호랑이의 위엄을 빌렸구나. 어찌 할 수가 없었으니 제 분을 못 이기여 백자 깨진 것을 입에 물고 으득으득 깨물면서 큰 자식을 바치니, 산군이 그 입으로 양볼을 제비 먹을 적에 여우가 옆에 앉아 자랑이 무섭구나.
"저희들이 못 생겨서 남에게 볶이어서 걱정하제, 나같이 행세하면 아무 걱정 하나 없제. 남의 무덤 바짝 옆에 굴을 파고 엎뎠으면, 사냥꾼이 암만해도 불을 지를 수도 없고, 쫓겨가다가도 오줌만 누면 사냥개도 할 수 없고, 아무 데를 가더라도 주관하는 사람에게 비위만 맞추면 일생 평안한 신세 거저 남의 일에 참여하고 놀제."
장담을 한참 하니, 물고기를 버리고 곰을 얻음이라, 곰이 매우 의기 있어 나앉으며 하는 말이,
"오늘 우리 모이기는 산속의 폐단을 없애자 하자더니, 사냥개는 없애려 하되 포수 무서워 할 수 없고, 애잔한 쥐와 다람쥐가 겨우나기로 마련한 살림을 다 빼앗겨 부모처자 굶길터요, 가세 부족한 멧돼지는 아들의 죽음으로 고통을 보았으니, 오늘 저녁 또 지내면 여우 눈에 못 보인 놈 무슨 환을 또 당할지 그놈의 웃음소리 뼈 저려 못 듣겠네. 그만하여 파합시다."
산군이 할 말 없어 파좌하고 일어서니 여우가 그 곰을 별렀다가 이간 부치던지 불 한 번은 받게 한다. 각각 하직하고 돌아갈 제 주부가 남생이 옆에 가만히 엎드려서 각 짐승들이 하는 말을 다 보고 들었구나.
모임을 파한 후에 토끼 뒤에 따라가며 푸른 산 돌길 그윽한 곳에 토끼를 한 번 불러,
"여보 토생원,"
토끼의 근본 성정이 무겁지 못한 것이 겸하여 몸이 작으니 온산중이 멸시하여 누가 대접하겠느냐? 쥐와 여우 다람쥐도,
"토끼야, 토끼야."
아이들을 부르는 듯 이름 불러 버르장머리없이 함부로 하는 것을 평생을 겪고 지내다가, 천만 뜻밖에 누가 와서 생원이라 존칭하니 좋아 아주 못 견디어 깡총깡총 뛰어오며,
"게 누구요, 게 누구요, 날 찾는 게 누구요. 상산의 사호들이 바둑 두자 나를 찾나, 죽림의 칠현들이 술을 먹자 날을 찾나. 청풍명월 채석 가자고 이백이 나를 찾나, 노와 삿대 잡고 적벽 가자 소동파가 나를 찾나. 인생부귀 물으려나 인생무상 가르치지, 역대흥망 물으려나 상전벽해 가르치지."
요리 팔짝 저리 팔짝 깡총깡총 뛰어오니, 주부가 의뭉하여 토끼의 동정 보자고 긴 목을 오무리고 가만히 엎뎠으니, 토끼가 주부 보고 의심을 매우 하여,
"이것이 무엇인고?"
제가 의심 내고 제가 도로 그 의심을 버려,
"쇠똥이 말랐는가, 이 산중에 무슨 솥 깨어진 것 같은 큰 재목감이 어찌 저리 묘하게 깨어져 있는가, 애고 이것 큰일 났다. 사냥 왔던 총쟁이가 화약심지 끌러 놓고 똥 누러 갔나보다. 바삐바삐 도망하자"
깡총깡총 뛰어가니, 주부가 생각한즉 그대로 두어서는 저리 방정맞은 것이, 이리저리 못가는 곳 없이 다니는 짓을 한없이 하겠거든 또 한 번 크게 불러,
"여보, 토생원."
토끼가 듣고 의심하여,
"누가 나를 또 부르노? 고이하다 고이하다."
아장아장 도로 오며 주부를 바라보니, 아까 없던 목줄기가 흙담 틈에 뱀같이 슬금히 나오거든, 의심나고 겁이 나서 가까이 못 오고서, 멀찌기 서서 보며 문자로 수작하여,
"내가 이 산중에서 나서 놀고 늙어 몇 해가 되었으되 이제 처음 보는 터에 나를 어찌 알고 무엇하러 불렀느뇨?"
주부가 대답하되,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가 공부자의말씀인데, 어이 그리 무식하여 가까이 아니 오고 처음 본다 괄세하니 인사가 틀렸구만."
토끼가 들어본즉 생긴 것과 말하는 게 옆에서 볼 수가 없거든, 옆에 와 썩 앉으며,
"뉘라 하시오?"
"예, 나는 수궁에서 주부 벼슬하여 먹는 자라요."
"산수가 서로 달라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아무 관계가 없는데 수궁의 조관으로 산중은 어찌 왔소?"
"'아침에는 북해에서 놀고 저녁에는 창오산에서 잔다'고 어디는 못 가겠소? 우리 용왕 장한 덕화 임금의 자리에 있으시고, 팔천리를 진무하니 하루도 쉼 없이 일들이 일어나는데, 신하가 재주 없어 찬양하기 어렵기에 용왕의 분부 뫼셔 임금을 보좌하는 인물을 구하기 위해 천하명산을 두루 다니다가 오늘날 모족 모임 천행으로 만났기에 만좌를 다 보아도 왕을 보좌할 만한 신하는 '곰 아니면 표범이라' 선생 하나뿐이기로, 선생을 모셔 가자고 뒤를 따라 왔사오니 바라건대 토선생은 범수가 왕계 따르듯, 한신이가 소하 따르듯 나를 따라 가사이다."
토끼가 제 인물에 너무나 감사한 말이거든 제 소견도 의심하여,
"어떻기에 내 형용이 곰보다도 나으리요, 표범보다 나으리요?"
주부가 대 답하되,
"곰의 몸이 비록 크나 눈이 적고 털이 덮여 태양 정기 부족하니 미련하여 못쓸 터이요, 범이 비록 용맹하나 코 짧고 줄기 없어 중악이 낮고 우묵하니 단명하여 못쓸 테요, 선생의 기상 보니 잘 다스려진 세상의 정치 수완이 좋은 신하요, 어지러운 세상의 간사한 영웅이라. 눈이 밝고 속이 밝아 천문지리 다 알 테요, 몸이 작고 발이 빨라 산도 넘고 물도 뛰어 따라갈 이 없을 테니, 능란한 저 말솜씨가 소진의 합종인지, 가끔가끔 조는 것 공명의 춘수런가, 생긴 것이 모두 나라에 이로운 신하, 볼수록 모두 모든 성중 모족 중의 제일이니, 우리 수궁 가시오면 입상출장 저 공명을 따를 이 뉘 있을까?"
토끼가 들어본즉 주부의 하는 말이 저 생긴 형용하고 낱낱이 똑 같거든, 가만히 생각한즉 형용은 무던하나 속에 글이 없었으니, 수궁의 글 유무를 알아야 할 테거든 또 물어,
"수궁 조관 중에 문장이 몇이 되오?"
"문장조관 있으면 영득전 지을 때에 상량문을 못 지어서 인간세계까지 멀리 나와 글 잘하는 여선문을 청하겠소?"
또 물어,
"수궁에 훨썩 키 큰 조관 있소?"
"영덕전 상량할 제 키 큰 조관 가리는데 내가 상량하였지요. 그리 큰 수궁에서 나만한 키도 없소. 선생이 드러가면 키 큰 거인 방풍씨 드러왔다 모두 깜짝 놀라지요."
토끼가 생각한즉 너른 의장 좋은 구변 내 속에 흠뻑 들었고, 글 잘하고 키 큰 조관 수궁에 없다 하니, 내 지닌 네 조건 눌릴 데가 얼건마는 '고향 떠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하니 이 사세가 썩 떠나기 어렵구나. 한번 사양하여 보아,
"주부를 따라가면 좋기는 좋을 테나, 산속의 즐거움과 풍월의 흥겨움을 잊을 수가 없사오니, 어찌 따라갈 수 있소?"
주부가 물어,
"산속의 즐거움과 풍월의 흥겨움이 만일 그리 좋으면 나도 여기 함께 있어 수궁으로 안갈 테니, 이야기 조금 하오."
실없는 토끼 소견 제가 주부 속이기로 산림풍월 자랑할 때, 턱없는 거짓말을 냉수 먹듯 하는구나.
"청산에 봄이 오면 온갖 꽃이 만발하여 병풍을 두른 듯, 꾀꼬리는 노래하고 나비는 춤을 추어 좋은 풍류 놀기도 좋거니와, 공자 제자 육칠 관동이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 바람 쐴 때 따라가서 구경하고, 녹음과 방초가 꽃보다 나은 첫여름에 공자(公子) 왕손 답청 구경, 느러진 버드나무 사이에서 다투어 나타나는 푸른 저고리 붉은 치마 그네 구경, 기이한 봉우리 돌비탈 사이에서 여름 구름 피어오르고, 수풀 사이 샘에 피서하여 즐기는 목욕 구경, 여름 철 석 달 다 보내고 가을 바람이 일어나고, 옥같은 이슬이 서리되어 서리맞은 나뭇잎이 봄꽃보다 더 붉으니 세상사 아랑곳 않고 한가로이 지내는 누각과, 국화 피는 구월 구일 용산에서 술마시고 흥겹게 춤추는 좋은 구경, 모든 산에 새의 자취가 없어진 겨울을 나 혼자 맛에 겨워 용문에서 설경을 구경할 적에 구양수도 따라가고, 저는 당나귀를 타고 매화를 구경할 적에 맹호연도 따라서, 산간 사시 좋은 경치를 오는 대로 구경하여 임자 없는 청산녹수 모두 우리 집을 삼고, 값 없는 청풍명월 나 혼자 주인되어 암혈간에 살아가니 반고씨 적 시절인가? 나무 열매를 먹었으니 유소씨 적 백성인가? 이러한 편한 신세 시비할 이 뉘 있으며, 이러한 좋은 흥미 앗아갈 이 뉘 있으리? 수궁이 좋다 해도 '고향을 떠나면 곧 천해진다'하니 갈 수 없제 갈 수 없제. 회수를 건너면 유자도 탱자되니 안갈라제 안 갈라제."
주부가 들으면서 가만이 생각한즉 저를 훨썩 부추겼더니 좁은 소견 교만함이 나서 저렇게 덤벙대니, 되게 한번 탁 질러서 저놈 기를 꺾어 보자 천연스럽게 물어 보아,
"여보, 토생원, 이 말씀 다 하였소."
"예, 다 하였소."
"몹시 불어 제끼시오. 산에서 부는 바람 바닷바람 보다 훨씬 세니 귀가 시려 못 듣겠소. 수중에 있는 이는 산중 일을 모르리라 저렇게 과장하되 당신의 가련한 신세 낱낱이 다 이를 테니 당신이 드르시려오?"
"말씀하시오."
"천봉에 바람 차고 만학에 눈 쌓여 땅에는 풀이 없고 나무에 과실 없어 여러 날 굶은 신세 어둑침침 바위 틈에 고픈 배 틀어 쥐고 적막히 앉은 거동, 진나라 함곡관에 초회황의 신세런가. 북해상 큰 움 속 소중랑의 고생인가. 무슨 정에 눈을 감상하며 매화를 찾나 이삼월 눈이 녹아, 풀도 있고 꽃도 피면 주린 배를 채우려고 이 골 저 골 다니다가, 토끼 잡는 그물 빈틈 없이 둘러치고, 용맹스런 무사 날랜 걸음 소리치고 쫓아오니, 짧은 꽁지 샅에 끼고 코에 단내 풀풀 내면서 하늘 땅도 분간 못하고 도망할 제, 천만 뜻밖에 독수리가 중천에 높이 떴다가 날아 내려 앞 막으니, 당신의 불쌍한 정세 적벽 화전중에 목숨이 아니 죽고 간신히 도망타가 화용도 좁은 길목에 관운장 만난 조조로다. 어느 틈 무슨 경황에 기수 목욕 무우 바람, 사오뉴월 여름되면 당신 신세 더 어떻고? 수풀 깊고 날이 더워 진드기와 왕개미가 온몸을 침질하니, 잡자 해도 손이 없고 두르재도 꽁지 없어 볶기다 못견디어 산밑으로 내려오니, 풋나무 초군이며 김매는 농부들이 호미 들고 작대 들고 이목 저목 쫓아오니, 호랑이 피하려다 이리 만난 저 정경 어떻다 하겠는가? 그네 목욕 구경 생각 어느 틈에 날 터이며, 칠팔 구월 가을되면 공산에 잎 떨어져 산과목실 낭자하니, 물 것 없고 밥 많아서 모족에게 좋은 때는 일년 중 제일이나, 봉봉에 앉은 것은 매 받든 수왈자요, 골골이 뛰는 것은 내 잘 맡는 사냥개라. 몽둥이 든 모리꾼은 양 옆에서 몰이하고 조총 든 명포수는 총구멍에 화약박아 목목이 앉았으니, 당신의 급한 사세 하늘로 날아오를 터인가 땅을 쫓아 나올 터인가? 단풍 구경 국화 구경 내 소견엔 할 수 없네. 우리 수궁 같았으면 태평스럽게 즐거움을 누릴 터기에 모셔 가자 하였더니 화로 망할 살이 사주에 있어 못 가겠다 하시오니, 괵철이 말 아니 듣고 종실의 한신 죽음, 범려의 편지 불신하고 월나라 문종의 죽음, 선생 신세 불쌍하오. 내 행색이 바쁘니 부득이 가나이다."
하직하고 썩썩 가니 토끼가 따라오며,
"여보시오 별주부, 성정 그리 급하시오."
주부가 대답하되,
"내 할 말은 다 하였으니 불러도 쓸 데 없소. 평안히 계시옵소 산속의 즐거움을 누리시오."
앙금앙금 바삐 가니 토끼가 계속 따라오며,
"수궁에 들어가면 화망살을 면하릿가?"
"알기 쉬운 오행 이치 '물이 불을 이긴다'는 것을 모르시오."
"그것은 그러할 터이나, 타국에서 왔다 하고 천대를 하면 그 아니 절통하오?"
"어찌 그리 무식하오. 동해 사람 여상이가 주나라 왕의 스승이 되고, 우나라 백리해가 진나라 정승되니 무슨 천대 받겠소?"
토끼 하는 말이,
"우리 산중 친구들에게 하직이나 하고 가제."
"큰 일을 할 때에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꾀할 것이 아니라 하였으니, 각기 소견 다 다르니 '위험한 곳이니 가지 마라'고 말릴 이도 있을 테요, '그 일이 장히 좋으니 함께 가자'고 할 터이니, 길가에 집짓기라 삼년이 지나도 짓지 못할 테지요"
"우리 처에게 나 간다고 하고 가제,"
"꾀하고자 하는 바가 여자에게 미치면 망하는 법인 것을, 수궁에 가서 공명한 후 쌍교 보내 모셔 가면 오죽 좋겠는가?"
이리저리 살살 돌려 수작하며 가노라니, 방정맞은 여우 새끼 산모롱이 썩 나서며,
"이야, 토끼야 너 어디 가느냐?"
"벼슬하러 수궁간다. "
"이아야, 가지 마라."
"왜 가지 말래냐?"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나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으니 물이라는 것이 위태하고, 아침에 임금의 은혜를 받다가도 저녁에 죽임을 당하니 벼슬이 위태하니, 두 가지 위태한 일 타국으로 벼슬 얻으러 갔다 못되면 굶어 죽고 잘되면 비명횡사한다."
"어찌하여 비명횡사냐?"
"이사라 하는 사람 초나라 명필로서 진나라에 들어가서 승상까지 하였더니, 진나라 수도인 함양에서 허리를 잘려 죽임을 당했으며, 오기라 하는 사람 위나라 명장으로 초나라에 들어가서 정승이 되었더니, 귀척대신을 공격하여 죽이니, 너도 지금 수궁가서 만일 종은 벼슬하면 반드시 죽을 테니, '토끼가 죽으니 여우가 슬퍼한다'는 우리 정다운 처지에 내 설움이 어떻겠나, 가지 마라 가지 마라."
토끼가 옳게 듣고 주부에게 하직하여,
"당신 혼자 잘 가시요, 나는 가지 못하겠소. 천봉백운 내 버리고 만경창파 가자기는 벼슬하잔 뜻일러니, 벼슬하면 죽는다니 객사하러 갈 수 있소?. 어진 벗 우리 여우 충고하여 좋은 데로 이끌어 하는 말을 내 어이 안 듣겠소."
주부가 생각한즉, 다되어 가는 일을 몹쓸 여우놈이 방정을 부렸구나. 여우하고 토끼 사이에 이간을 부쳐,
"좋은 친구 두었으니 둘이 가서 잘사시오. 제 복이 아닌 짓을 권하여 쓸데없소,"
돌아도 아니 보고 앙금앙금 내려가니, 토끼가 도로 오며 자세히 묻는 말이,
"복 없다니 웬 말이오?
주부가 대답하되,
"남의 둘이 좋은 정다운 처지 나진 말이 부당하나, 당신이 물으시니 할 밖에 수가 없소, 내가 육지 나온 지가 여러 달이 되옵기로 여우가 찾아 와서 자기를 데려가라 하되, 방정스런 그 모양과 간교한 그 심술이 떨어질 수도 가까이 할 수도 없을 터기에 못하겠다 떼었더니, 당신 데려간다는 말을 이놈이 어찌 알고 쫓아와서 방해하니 당신은 떼어 보내고 제가 이제 따라오제."
토끼가 곧이 들어,
"참 그러하단 말씀이오?"
"얼마 안 가서 알 일진데 거짓말 할 수 있소?"
경망한 저 토끼가 단참에 곧이 듣고 여우에게 욕을 하며,
"그놈의 평생 행세 사사건건 저러하제. 열 놈이 백 말 하더라고 나는 따라갈 테오."
그렁저렁 내려가니 해변 당도 하였구나. 만경창파 끝이 없어 바다 멀리 수면과 하늘이 하나로 이어져 한가지로 푸르게 되었으니 토끼가 깜짝 놀라,
"저게 모두 물이오?"
"그렇지요."
"저 속에서 살았소?"
"그러하오."
"코 구멍에 물 들어가 숨을 쉴 수 있소?"
"그러기에 내 코구멍은 조그만하게 뚫렸지오."
"내 코는 구멍이 크니 어찌 하자는 말씀이오?"
"쑥잎 뜯어 막으시오."
"깊기는 얼마나 하오?"
"우리 발목 물이지요."
"저런 거짓말이 있소. 만일 거기 빠졌으면 한 달을 내려가도 땅에 발이 안 닿겠소."
"나 먼저 들어갈께 당신은 서서 보오."
주부가 팔짝 뛰어 바다 위에 둥실 떠서 허위허위 헤엄하며,
"어디 깊어 ?"
토끼가 하하 웃어,
"당신 헤엄하오?"
"들어와 보면 알제."
토끼가 시험 차로 언덕에 앞 발 딛고 물 속에 두 발 넣어 시험하여 보려 하니, 주부가 달려들어 토끼의 뒷다리를 뎅겅 물어 잡아채니 토끼가 풍 빠져 서쪽 바다물을 많이 마셨다. 주부가 등에 엎고 해상에 등등 떠서 정처 없이 가는구나.
토끼가 물을 쓰고 주부 등에 옆혀 노니 중도에서 어쩔 수 없는 처지가 되었으니 다시 내릴 수도 없고, 살 없는 제 불알 털 없는 자라 등에 아파 앉을 수가 없다.
주부를 불러,
"여보시오 나으리, 여기 어디 주막 있소?"
"무엇하게?"
"송곳이나 끌이거나 연장 하나 얻어다가 나으리 등에 말뚝박아 손잡이 하옵시다."
"오래 타면 이력 나제."
처음 배 탄 사람같이 토끼가 멀미하여 똥물을 다 토하니 주부가 조롱하여,
"이번은 저 배속에 삼위로 구전단과 같은 선약이 밤낮으로 들어갈 터이니, 산과목실 먹은 것은 훨썩 게워 속을 씻제."
토끼가 대답하되,
"삼위로 맛 못보고 중로에서 죽기 쉽소."
주부가 계속 조롱하여,
"만일 저리. 위태롭거든 산중으로 도로 가제."
그렁저령 가노라니 토끼가 이력나서 무서운 게 하나 없고, 지나가는 경치를 알고자 묻는 말이,
"저기 저것 무엇이오?"
주부의 장한 충성 육지 은 지 여러 달에 밤낮으로 고생하다, 토끼를 겨우 속여 고국으로 돌아가기 시각이 바빴으니, 토끼구경 시키자고 해상에 머물러서 가르쳐 줄 리가 있나. 좋게 대답하여,
"수궁에서 벼슬하면 남해바다 팔천리를 조석으로 구경할 것이니, 지체 말고 어서 가자."
가마꾼의 씩씩한 걸음으로 급히 내려와서 수정문 밖 당도하니, 못난 여러 군사 주부보고 절을 하며,
"평안히 행차하고 토끼 잡아 오십니까?"
주부가 대 답하되,
"오는 게 토끼로다. 착실히 맡아 두라."
문 안으로 들어가니 토끼가 들어본즉 분명히 탈이거든 군사들과 수작하여,
"당신들은 수궁에서 무슨 벼슬 해 잡수시오?"
"문 지키는 군사지오."
"수궁에서 무엇하자고 토끼를 잡아왔소?"
"우리 대왕님이 병세가 위중하셔 토끼 간을 잡수셔야 회춘을 하시리라고 선관이 지시하기에, 별주부 내보내어 잡아오라 하였는데, 당신 속 모르겠소. 죽기가 무엇 좋아 고향을 내버리고 예까지 따라왔소?"
토끼가 들어본즉 별 수 없이 죽었구나.
두 눈만 까옥까옥 생각하고 앉았더니, 잠시 후 대궐 안에 명령 소리 크게 나서 만조가 입시하여, 대좌기 대군물을 불시에 차리는데, 몸집 긴 고래와 큰 곤어는 좌우로 나누어 서고, 도룡뇽과 이무기는 앞뒤에서 좋아라고 날뛰어 정절과 모절을 잡고 창과 방패를 든 것이 부지기수 늘어서서 토끼를 잡아 들이니 조막만한 이 신체가 수정궁 넓은 뜰에 엎디어서 생각하니 넓고 큰 바다에 한 알의 좁쌀이라.
용왕이 병중하여 거동을 못 하더니 토끼를 보옵시고 새 정신이 왈칵 나서, 창문을 열어 큰 소리로 분부한다.
"옥황의 명을 받아 남해를 지켰기에, 인간에게 비 주고 수족을 진무하여 덕이 정중하고 시혜를 널리 베풀었더니, 우연히 병중하여 토간이 아니면 다른 약이 없는 고로 별주부의 충성으로 너를 잡아 바쳤으니, 네 간을 내어 먹고 짐의 병이 나은 후에 토끼 너의 공을 짐이 어찌 잊을소냐. 한나라 기신같이 풀을 묶어 앉힐런지, 기린각 능운대에 네 이름을 새길런지 목숨을 바쳐 명분을 이룸이 그 아니냐. 조금도 서러워말고 배 내밀어 칼 받아라,"
토끼가 분부 듣고 아무 대답 아니하고, 고개를 번듯 들어 임금 자리를 바라보며 눈물만 뚝 떨어뜨리니, 용왕이 생각하되 저것이 나 때문에 죄없이 죽을 곳에 나아가니 오죽 블쌍하랴, 좋은 말로 타일러 웃음을 머금고 죽게 하자, 다시 분부하시거늘,
"서러워서 눈물을 흘리느냐?"
토끼가 여쭈오되,
"죽기 서러워 아니옵고 못죽어서 우나이다."
용왕이 의심하여,
"그것이 웬말인가?"
"아뢸 터이니 들으시오. 소토 같은 작은 목숨 인간세상에 지천이라, 독수리 밥이 될지 사냥개 반찬 될지, 그물에 싸일런지 총불에 타질런지 죽고만 말 터이니, 그런 데 죽사오면 세상에 났던 자취를 누가 다시 아오리까? 배속의 간을 내어 대왕 환후 구하오면, 아무 공로가 없사와도 아름다운 이름을 오랫동안 전함이 절로 될 것인데, 하물며 대왕 덕택에 제가 출세한 저 형용과 인각·운대에 새긴 저 성명이 그 영화 무궁하여 만세에 유전할 덴데, 이 방정맞은 것이 간 없이 왔사오니 절통하기 측량 없소."
용왕이 대소하여,
"미련한 것이로다. 거짓말을 할지라도 그럴 듯하게 할 것이지 천만 부당한 말 뉘 곧이 들을 테냐? 네 배속에 있는 간이 네 몸이 여기 왔는데, 간이 어찌 못 왔는고?"
토끼가 하늘을 보고 한참 크게 웃으니 용왕이 물으시되,
"간사한 모양이 드러나니 할 말 없어 웃는구나?"
토끼가 여쭈오되,
"할 말씀은 많사오나 대왕같은 저 지위에 무식함을 웃나이다. 대왕의 무궁한 변화 하늘에 오르고 땅에 들어가옵시고,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기에 천지간 무궁한 이치가 다 이심하였더니, 소토의 간 출입은 나무하는 아이와 목동들이다 아는데 대왕 혼자 모르시니 그리 무식하십니까? 천상의 차고 이지러지는 이치를 달이 맡아 있삽기에 보름 이전이면 차옵다가 보름 이후면 줄어지니 달의 별호가 옥토이옵고, 지상의 나아가고 물러서는 이치를 조수가 맡았기에 사리엔 물이 많고 조금에는 적사오니 조수의 별호 삼토이오니, 소토의 배속 간이 달빛 같고 조수 같아 보름 전에는 배에 두고 보름 후에는 밖에 두어 나아가고 물러나며 차고 이지러지는 고로 약이 되어 좋다 하지, 안일 다른 짐승같이 배속에만 줄곧 있으면 허다한 짐승중에 소토의 간이 좋다하리까? 금월 십오일 낭야산 취응정에 모족 모임 하옵기에 소토의 간을 내어 파초잎에 고이 싸서 방자산 최고봉에 우뚝 선 노송 가지에 높이높이 매다옵고 모임에 갔삽다가 별주부를 상봉하여 함께 따라왔사오니, 다음달 초하루날 복중에 넣을 간을 어찌 가져올 수 있소?"
용왕이 들어 본즉 이치가 그렇거늘, 저런 줄을 알았다면 약 가르친 선관에게 물어나 보았을 텐데 후회막급 되었구나. 또 물어,
"내가 손도 없는 것이 배속에 있는 간을 어디로 집어 내고 어디로 집어 넣고 임의로 출입한단 말인가?"
"소토의 밑구멍에 간 나오는 구멍 있어 배에다 힘만 주면 그 구멍으로 나오옵고, 입으로 삼키오면 도로 들어가옵지오."
"간 나오는 그 구멍이 분명히 있다는 말인가?"
"소토의 볼기짝에 구멍이 셋이오니, 똥 누고 오줌 누고 간누고 하옵지오."
용왕이 나졸 시켜 밑구멍을 살피니 세 구멍이 완연하구나. 용왕이 물어,
"네 간이 아니며는 짐이 병을 못 고칠 텐데, 네 배에 간 없으니 어찌 하면 좋겠느냐?"
"소토가 나가오면 소토의 간 뿐 아니오라, 함께 걸린 다른 간을 많이 가져오련마는, 소토의 먹은 마음 대왕 짐작 못하시니 소토는 가두시고 별주부 내보내어 소토의 지어미에게 소토 편지 보내오면 간 찾아 보낼 테니 그리하게 하옵소서."
별주부가 옆에 엎드려 시종을 들어보니, 저 놈 데려올 적에도 허다한 고생하였는데, 하물며 제 계집은 얼굴도 모르는 터에 어디가 만나 보며, 설령 만나 본다 해도 그 사이 개가하여 다른 서방 맞았으면 전서방 죽고 살기 생각할 리 있나? 배속에 간이 없다는 말 암만해도 헛말이니 배 가르고 보는 수다.
용왕전에 여쭈오되,
"토끼간이 출입한다는 말이 <사기>에도 없사옵고 이치에도 부당하니, 배를 갈라 간 없으면 제가 인간세계 또 나가서 보름전 토끼 잡아 올테니, 배 가르고 보옵소서."
토끼가 들어본 즉 할 수 없이 죽겠구나. 주부가 말 못하게 막아야 쓰겠거든 주부를 돌아보며,
"내 아까 네 말씀을 용왕전에 하자 하되 만리에 함께 고생하며 맺은 정이 있어 말하지 말자 했더니, 네놈이 하는 거동 갈수록 방정이다. 처음 나를 만났을 제 저 사정을 털어놓았으면 그 날이 보름날 우리 식구 수백명이 함께 간을 빼어내니, 그 중에 나이 늙어 약 많이 든 좋은 간을 여러 보를 주었을 것을, 속이 그리 음험하여 벼슬하러 수궁 가자 속일 꾀만 하니 그것이 첫 번 허물, 대왕의 환후 시급하니 너고 나고 또 나가서 간을 어서 가져와야 치료를 하실 텐데, 나만 어서 죽이라니 네놈의 생긴 형용 눈은 가늘고 다리는 짤고 긴 목과 뾰족한 입, 환란은 함께 누릴 수는 있어도 안락을 함께 누릴 수는 없음이라, 나를 죽여 간 없으면 어떤 토끼 다시 보리? 내가 수궁 벼슬 하자고 너를 따라 간다는 말이 산중에 낭자하였으니, 나는 다시 안 나가고 너 혼자 또 나가면 산중 우리 동물들이 날 다려다 어디 두고, 뉘 속이러 또 왔는가, 토끼잡기 고사하고 네 목숨 어찌 되며, 너 죽기는 네 죄로되 대왕 환후 어찌되리? 의사는 전혀 없고 어거지 말을(악담) 저리 하니, 아나 옛다. 충신 좋제, 나라 망할 망신이제. 내 목숨 죽는 것은 조금도 한이 없다. 독수리 사냥개 에게 구차히 죽지 말고, 수정궁 용왕 앞에 백관 버려 서고 칠척이나 되고 용무의가 새겨져 있는 잘드는 칼로 이 배를 갈랐으면 그런 영화 있겠느냐? 아나 옛다. 배 갈라라. 배 갈라라."
왈칵왈칵 배 내미니 주부는 할 말 없어 두 눈만 까막까막. 용왕이 본즉 그리 될 일이거든 만조를 돌아보며,
"저 일을 어찌할꼬?"
병부상서 준어 여쭈오되,
"두 가지 이상의 죄가 한번에 드러났을 때는 그 가운데 가벼운 죄를 따라 처벌하고 오직 형벌은 될 수 있도록 긍휼히 임해야 하는 것인데, 하물며 저 토끼는 짐승으로 배속에 간 있고 없음이 암만해도 의심이니, 경솔하게 배를 갈라 간이 만일 없사오면 죄인을 신중히 심의하는 것이 못 되오니 가르지 마옵소서."
병부상서 숭어 여쭈오되,
"이왕 아니 죽였으면 '향기로운 미끼에는 반드시 죽은 고기 가 있다'하니 토끼의 제 마음을 감동하게 하옵소서."
용왕이 좋다 하고 성을 내었다가 짐짓 웃음을 지어, 별주부를 꾸짖는데, 토끼를 항상 존칭하여,
"토선생의 하는 말씀 똑 그리 될 일이다. 첫 번 사정 이야기 안한 것이 네가 매우 미련하다. 이 내력 하였다면 두 편 다 좋을 것을, 지난 일은 논하지 말고 토선생님 부축하여 전상으로 모셔 오라."
용왕 좌우 모신 시녀 일시에 내려와서 부축하여 올리는데, 토끼가 품격을 높이려고 원숭이 모양으로 앞발을 추켜 들고 뒷발은 잣 디디고 시녀에게 붙들리어, 눈 길게 발을 떼어 전상에 올라가니, 별도로 자리 하나를 만들었거늘 네 발을 모으고 썩 쪼그려 앉아 놓으니, 용왕이 수인사를 새로 붙여,
"저승과 이승의 길이 서로 다르되 오랜 동안 세상에 두루 알려진 명성을 우러러 보았더니, 스스로 찾아 보지 않고 와서 찾게 하였으니 오히려 미안하오."
토끼 대답하되,
"성화랄 게 원 있겠소. 천만 뜻밖에 어떤 선관이 내 이름을 일렀지요?"
"아까 우리 한 노릇은 모르고 한 일이니 괘념치 마시오."
"순간에 죽을 목숨 대왕 덕택으로 살았으니 무슨 괘념하오리까?"
"선생 간이 그리 좋아 죽는 사람 살리오면, 인간세계에 사람들도 선생네 간을 먹고 효험 본 이 더러 있소?"
"끔찍히 많지요. 제일에 신선 공부 토끼 간의 물을 못 먹으면 성공을 못하기에 안기생 적송자가 다 우리 문인으로 우리 선조 간 씻은 물을 얻어 먹고 신선 되어 장생불사 하는 고로, 지금까지 세시 되면 선과 좋은 과실 설음식을 붕하지요."
"만일 그렇다면 선생은 어찌하여 신선 노릇 아니하고 산중에 묻히어서 독수리와 사냥군의 밥 노릇을 하나이까?"
"그 내력이 또 있지요. 간경은 나무 차지, 목실을 안 먹으면 간에 약이 아니드니 인간세계에 있는 목실 백년 먹은 후에 천상으로 올라가오."
"선생은 인간세계 목실 몇 해나 잡수었소?"
"백년 넘게 먹었으되, 신선 남은 자리 없어 아직 하늘에 오르지 못 하였소."
"그러하면 선생 간은 약이 흠뻑 들었겠소."
"두 말씀 하시겠소? 간 빼어 내는 날은 온 산중이 향내지오."
"선생이 나가셔서 간 가지고 오시자면 몇 날이나 되오리까?"
"수로 팔천리는 주부가 나를 엎고 밤낮으로 하였으면 나흘이나 될 것이요, 육로로 이만리는 내가 주부 엎고 밤낮으로 달아나면 사흘 쯤 될 것이니, 갈 제 이레 올 제 이레, 많이 잡아 보름이면 내왕하기 넉넉하지오."
용왕이 좋아라고 대연을 배설할 때, 운무병풍 둘러치고 수정렴 높이 걸고, 예부상서 문어 시켜 풍악을 들이라니 경각에 들어오는데 미녀 이십인은 쇠북을 흔들면서 능파대 춤을 추고, 가동 사십 무리는 향내나는 소매를 나풀거려 채련곡 노래하고, 영타의 북을 치고, 소라는 저를 불고, 상수의 신은 비파 타고, 물의 신은 기를 잡고, 바다의 신은 옥쟁반 들어 옥으로 만든 잔과 호박으로 만든 술잔에 삼위로 구전단이 풍류가 낭자하고 연회가 매우 성대하여 불시에 하는 잔치 영덕전 낙성연과 별로 진 것이 없었구나. 경망한 토끼놈이 신선주를 많이 먹고 취흥이 도도하여 선녀들과 크게 춤추며 의뭉한 말을 하여,
"수궁 식구들이 모르니까 그렇지 내 간은 고사하고 입만 맞추어도 삼사백년 예사로 살제."
선녀들이 곧이 듣고 다투어 달려들어 토끼하고 입맞춘다.
온갖 장난 다한 후에, 토끼가 고개 들어 영덕전 바람벽의 상랸문 현판 보고 경개를 의논한다.
"동쪽을 바라보니 방장산 봉래산이 가깝고, 서쪽을 바라보니 사막에서 길잃지 않으며, 남쪽을 바라보니 큰 물이 끝없이 흘러 온갖 고기들을 받아들이고, 북쪽을 바라보니 많은 별들이 현란하게 천자의 자리를 에워싸며, 보는 경치와 지은 글이 신통히 같소마는, 아마도 여선문은 나이 어린 서생이라 망발이 있는 것이, 새로 지은 영덕전이 용왕의 대궐인데, '용의 뼈를 걸어 대돌보를 삼는다'는 '용골' 두 자 망발이오."
용왕이 크게 놀라,
"그 말씀이 과연 옳소. 그 두 자 고치시오."
"용자를 파 내고, 고래 정자 좋을 터이나 내 길이 바쁘오니 다녀와서 하옵시다."
용왕전에 하직하매, 용왕이 의뭉하여 토끼를 달래려고 좌우를 돌아보며, "토선생 저 공로를 측량할 수 없었으니, 간 가지고 오신 후에 무슨 벼슬 무슨 상급 만분의 일이나 갚아 볼까?"
이부상서 농어 여쭈오되,
"주나라 다섯 작위 중에 공의 벼슬이 머리 되고, 진나라 중서령이 토씨의 선대 직함, 토선생 지닌 재주 천문지리 다 보오니, 낙양공 중서령에 태사관을 겸하소서."
호부상서 방어 여쭈오되,
"토선생 장한 공노 작위로만 못 할지라, 땅을 나눌 터이나 동정호 칠백리를 모두 베어 봉한 후에, 푸른 띠 누런 유자 차지하여 공을 받고, 비단 천필 진주 받고 매년 보내옵소서."
토끼가 여쭈오되,
"소토의 간을 잡숫고 대왕 환후 회복되면 작은 상급 없사와도 오랫동안 꽃다운 이름을 남길 테니 과히 근심 마옵소서."
별주부와 함께 주정문 밖 썩 나서니 이번은 살았구나. 이왕에 왔던 터에 착실히 구경하며 산중 여러 동무들에게 이야기나 하자 하고, 주부를 달래어,
"올 때에는 바빠서 만경창파 꿈속이라 아무데인줄 몰랐으니, 오늘은 그리 말고 내가 묻는 대로 자세히 가르치면, 너도 먹고 오래 살게 좋은 간을 한 보 주제."
주부가 생각한즉 이번에 가는 길은 토끼에게 매인 목숨 토끼의 하는 말을 들어야 할 터이거든, 그리하자 허락하니 경망한 저 토끼가 나올 적에 아황·여영과 굴원 본다는 말은 아마도 망발인 것이, 짐승은 짐승까지 사람 말을 물어다가 서로 말을 하려니와, 사람이야 짐승보고 무슨 말을 하겠느냐.
자라의 장한 충성 토끼의 좋은 구변 자랑하자 한 말이니, 짐승으로 꾸밀 텐데 고기 타령 짐승 타령 두 가지 하여 주고, 새타령을 안 해주면 한 잔 술에 눈물이라, 새 타령 안막되 해상으로 지내오니, 새 옆에 물 없으면 가장 중요한 대목이 아니었다.
자라 등에 토끼 앉아 가르치며 계속 물어,
"지내온 데 저기 저것 무엇이냐?"
"'이 봉황대 위에서 봉황새가 놀았다고 하지만 봉황은 날아가고 대만 남아 그 아래 강물만 흐른다'는 그것이 봉황대다."
"저기 저것 무엇이냐?"
"'옛날에 신선은 이미 황학을 타고 날아가 버리고 강위에 저녁 안개 서리고 시름만 더해간다'는 황학루다."
"저기 저기는?"
"'맑은 양자강 건너편에 한양 거리 나무들 보이고 강 가운데 앵무주에는 향긋한 풀이 무성하다'는 그것이 앵무주다."
"저기 저기는?"
"'아마 상비가 달밤에 타는 이십오현 비파 소리 듣고 그 맑은 한스러운 듯한 소리에 감동하여 물러나 가버리는가 보다'는 기러기 돌아오는 소상강이다. "
"저기 저기는?"
'떨어지는 노을에 외로운 집오리 가지런히 날고 가을 물 긴 하늘은 일색이로다'는 따오기 나는 등황각이다. "
"저기 저기는?"
"꾀꼬리 깃든지 이미 오래 모두 서로 낯을 익혔는데 우는 소리도 너댓마디쯤 알아차렸으면 좋겠다'는 꾀꼬리 우는 호상정이다."
"저기 저기는?"
"'달지고 까마귀 울며 서리 기운 대기 속에 가득 차 있고 강기슭 단풍과 고깃배의 모닥불이 잠 못 이루는 내 눈에 비친다'는 까마귀 우는 고소성이다."
"저기 저기는?"
"'달밝아 별 드문데 까막까치는 남쪽으로 날아간다'는 까치 날아가는 적벽강이다."
"저기 날아오는 것 무엇이오?"
"'국경이 얼마나 넓은지 궁금한데, 대붕은 날아가 물빛만 쪽빛'이라는 북쪽 바다에서 남쪽바다 오는 대붕이다. "
"저기 앉은 저것 무엇?"
"'청고잎엔 서늘한 바람이 일고 홍료화 옆엔 백로가 한가롭다'는 거 해오라기다."
"저기 조는 것 무엇?"
"'아름다운 풍류는 표현하기 어렵고 부평초같은 신세는 흰갈매기의 마음같다'는 거 갈매기다."
"저기 나는 것 무엇?"
"'원앙새가 연못 위로 쌍쌍이 난다'는 녹수 쫓는 원앙이다."
"저 까만 것 무엇?"
"'대들보 위를 날아오고 날아가는 제비'라는 강남에서 오는 제비다."
"저기 가는 것 무엇?"
"'강과 하늘은 아주 넓어 끝이 없는데 새는 쌍쌍이 날아간다'는 거 참새다."
그럭저럭 문답하며 창해를 다 지나고, 옥교변에 도착하여 토끼는 앞에 서고 주부는 뒤따를 때, 토끼의 분한 마음 주부의 지른 죄를 (호령)할 터이나, 저 단단한 주둥이로 팔다리 꽉 물고서 물로 도로 들어가면 어쩔 수가 없겠구가. 바다빛이 안보이도록 한참을 훨썩가서 바위 위에 높이 앉아 주부를 호령한다.
"히놈 자라야! 네 죄목을 의논하면 죽여도 아깝지 않도록 괘씸하다. 용왕이 의사 있어 나같이 총명하고, 나의 구변 너 용왕같이 미련터면, 아까운 이 내 목숨 수중원흔 되겠구나. <동래박의>라는 책을 보니 '짐승이 미련하기가 물고기나 짐승이나 같다'더니 어족 미련하기 모족보다 더 하도다. 오장에 붙은 간을 어찌 출입하겠느냐? 네 소위 생각하면 산중으로 잡아다가 우리 동무 다 모아서 잔치를 배설하고 푹 삶아서 백소주 안주감 초장 찍어 먹을 테나, 본사를 생각하면 요임금을 보고 짖는 도척의 개나 계포가 무슨 죄리오? 저마다 자기의 임금을 위하였으므로 십분 짐작하였으며 만경창파 네 등으로 왕래하니, 죽고 사는 고생을 함께 하였기에 목숨 살려 보내주니, 그리 알고 돌아가되 좋은 약 보내기로 네 왕에게 허락하니, 점잖은 내 도리에 어찌 식언하겠느냐? 내 똥이 매우 좋아 열을 내리게 한다 하고 사람들이 주워다가 앓는 아이를 먹인다. 네 왕 두 눈망처에 열기가 과하더라. 갖다가 먹이면 병이 곧 나으리라."
작은 총알같은 똥을 많이 누어 칡잎에 단단히 싸 자라 등에 올려놓고 칡으로 감아 주니, 주부가 짊어지고 수궁으로 간 연후에 구덩이 안에서 달리는 짐승이라니, 토끼 오직 좋겠느냐, 깡장깡장 뛰어가며 방자하게 뽐내 자랑하는 기색이 무섭구나,
"항적은 천하 장사 팔천병 거느리고 한태조와 다투더니 오강을 도로 못건너고, 형가는 만고 협객 삼척검 빼어 들고 진시황 찌르려다 역수를 도로 못 건넜다. 신통한 이 내 재주 잠깐 동안의 말솜씨로 용왕을 속여 놓고, 이 물 도로 건넜구나. 반갑도다 반갑도다. 우리 고향 반갑도다. 의구한 청산녹수 모두 전에 보던 대로다. 푸른 봉 흰 구름은 나 앉아 졸던데, 덩굴 과실 나무 열매는 나 주워 먹던 대로다. 너구리 아재 평안하오? 오소리 형님 잘 있던가? 벼슬 생각 부디 말고 이사 생각 부디 마소. 벼슬하면 몸 위태롭고 타관 가면 천대받네. 몸 익은 청산풍월 낯익은 우리 동무 주야상봉 즐겨 노세."
이 때에 주부는 수궁에 들어가서 용왕이 토끼똥 먹고 병이 나아 충신되고, 토끼는 신선따라 월궁으로 올라가서 이 때까지 약을 찧으니, 자라와 토끼란 것이 동시 미물로서 장한 충성 많은 의사 사람하고 같은 고로 타령을 만들어서 세상에 유전하니, 사람이라 이름 달고 토끼 자라만 못하오면 그 아니 무색한가? 부디부디 조심하오. 토별가 종이라.
무술중추 완서신간
***** '토끼전' 첫 번째 판 수의 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