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심으로 그 길을 가라 역대하 17:1~9 / 김병삼 목사
[역대하 17장 1-9절] 1.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대신하여 왕이 되어 스스로 강하게 하여 이스라엘을 방어하되 2.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또 유다 땅과 그의 아버지 아사가 정복한 에브라임 성읍들에 영문을 두었더라 3. 여호와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으니 이는 그가 그의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바알들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4. 오직 그의 아버지의 하나님께 구하며 그의 계명을 행하고 이스라엘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라 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나라를 그의 손에서 견고하게 하시매 유다 무리가 여호사밧에게 예물을 드렸으므로 그가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첬더라 6. 그가 전심으로 여호와의 길을 걸어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도 유다에서 제거하였더라 7. 그가 왕위에 있은 지 삼 년에 그의 방백들 벤하일과 오바댜와 스가랴와 느다넬과 미가야를 보내어 유다 여러 성읍에 가서 가르치게 하고 8. 또 그들과 함께 레위 사람 스마야와 느다냐와 스바댜와 아사헬과 스미라못과 여호나단과 아도니야와 도비야와 도바도니야 등 레위 사람들을 보내고 또 저희와 함께 제사장 엘리사마와 여호람을 보내었더니 9.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되 그 모든 유당 성읍들로 두루 다니며 백성들을 가르쳤더라.
제가 페북에 “이런 기도는 처음이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입니다. 어제 새벽 집회를 마치고 기도하는데 간절한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오늘 새벽 우리나라 축구 이기게 해주세요!" 평소에 그런 기도 하면 얼마나 하나님 힘드시겠느냐고 말했던 저로서는 참 힘든 기도였죠. 참 유치하다는 생각이지만, "하나님, 우리 민족 사랑하시면 축구 꼭 이겨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과 선거를 지나며 차곡차곡 쌓인 분노들. 그래서 누군가를 향해 그 분노를 쏟아 붓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들. 그래서 큰 함성과 함께 우리 마음속에 응어리들을 다 털어버렸으면 좋겠노라고 말이죠.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반쪽만 사랑하시는 듯합니다. 아니 “이제는 너희의 몫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역시 우리는 생각보다 잘해서 비긴 것보다는, 이길 수도 있는데 진 것 때문에 또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돌려야 하는 모양입니다.
분노와 억울함을 비난과 질책을 한번 칭찬으로 바꿔봅시다. 새로운 캠페인이 시작되면 좋겠습니다. "좋은 말하기!" 이런 기도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의 나쁜 점보다는 누군가의 좋은 점이 내 마음에 들어오게 하소서!" 문제를 하나 낼까요?
어느 집에 다리 긴 개와 꼬리 긴 개가 있었답니다. 두 마리 개가 싸움을 합니다. 어떤 개가 이길까요? "힘센 개가 이깁니다!" 그러면 어떤 개가 힘센 개일까요? 주인이 먹이를 잘 주는 개가 힘이 세집니다.
분노에 힘을 주면 분노가, 용서에 힘을 주면 용서가, 불의에 힘을 주면 불의가, 정의에 힘을 주면 정의가, 사랑에 힘을 보태면 사랑이 이깁니다. 싸움과 논쟁에는 끝이 없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저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끊임없이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또 "뭐가 하나님의 뜻이냐?"고 따지기보다는, 그저 겸허하게 무릎을 꿇으면 보이는 그 뜻을 보기 원합니다. 무릎만 꿇으면 무슨 문제가 해결되느냐고 묻는 것보다, 무릎을 꿇어야 보이는 그 일을 하자고 말해 봅니다.
아름다운!/ 좋은!/ 기쁜!/ 감사한!/ 너무나 사랑스러운!/ 뭐 그런 말들이 넘쳐나는 하루가 되기를.
오늘의 주인공은 지난주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아사 왕의 아들로 유다의 4번째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는 나이 35세에 왕이 되어, 25년 동안 유다를 다스린 왕으로, 선정을 베푼 왕, 선한 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삶 역시 자신의 선택입니다. 그렇게 산 그의 삶을 기록한 것입니다.
역사는 한 사람이 살아온 생애를 지켜본 역사가들이 기록하는데, 이렇게 호의적으로, 아름답게 기록하는 사람은 아주 드문 일입니다. 여호사밧 왕에 대한 기록은 무려 성경에서 4장을 차지할 정도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백성에게 칭찬을 받았고, 누구나 인정하는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사밧은 아무래도 개혁자의 이미지가 강한 사람입니다. 그가 단행한 개혁은 여러 방면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러면 여호사밧이 걸었던 길이 어떤 길이었을까요? 첫째는 “스스로 강하게 되어”라고 되어 있는 1~2절 말씀에 먼저 주목해 보겠습니다.
“1.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대신하여 왕이 되어 스스로 강하게 하여 이스라엘을 방어하되 2.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또 유다 땅과 그의 아버지 아사가 정복한 에브라임 성읍들에 영문을 두었더라”
왕이 ‘스스로 강하게 하였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자크’라고 합니다. 이 말은 견고하다, 강화하다, 강하게 하다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데 남에게 의지하기보다는, 주변의 정세를 탓하기보다는 스스로 강대한 나라를 만들어 나갔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스스로”라는 말이 하나님과 관계없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이 끝까지 신앙을 지키지 못했던 것은 축복 때문에 교만해지고 하나님 없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 ‘스스로’였지만, 여호사밧의 ‘스스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강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가 먼저 이스라엘의 침략에 대비한 방어체제를 정비했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요새가 있는 모든 성읍에 군대를 두고, 유다 전역에 그의 아버지 아사가 점령한 에브라임 성읍들에 수비대를 배치한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제가 올해 들어 많이 강조하는 일인데, 믿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해야 하는 최선을 다해야 하죠.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왜 죄를 짓고, 죄의 유혹에 빠지는지. 우리 자신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성실하게 살지 못했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나요? 커닝이 죄라는 것을 왜 모르나요?
그런데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기 때문에 유혹을 느끼고 죄를 짓는 것이 아닐까요? 사업을 하면서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왜 모릅니까? 하지만 잘 안 되기 때문에 죄의 유혹을 느끼지 않나요? 가끔 이력서를 쓰면서도 거짓의 유혹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준비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의 아버지 아사가 왜 북이스라엘의 침공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아람 왕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을까요? 그가 자신의 나라를 잘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요?
저는 지금 내년도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생각은 올해 우리가 생각을 ‘radical’ 하게 가지고 기본기를 충실하게 다졌다면 다음은 ‘action plan’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년에는 첫 주부터 우리의 삶에서 해야 할 일을 말씀 위에서 하나하나 짚어가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여 이야기하자면, “스스로 강하게 된다!”라는 것은 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잘 산다는 것이죠. 한 나라의 왕으로서 중요한 것은 국방을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힘이 있어야 불의와 타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후배 목회자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죠. “해야만 하는 일을 하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가 온다!” 종종 우리 신앙의 문제가 뭔가요? 하나님 앞에서 하고 싶은 사역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신분에 맞게 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하면서 하나님 일에만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나님의 전이 좋은 것 좋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머물러 현실감을 잃어버리면 하나님께서 쓰실 수 없습니다.
변화산 사건을 기억하시죠?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되고 3명의 제자는 너무나 황홀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이곳에 예수님을 위하여, 모세를 위하여, 엘리야를 위하여 초막 셋을 짓고 살자고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을 데리고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내려오자마자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 고쳐주십니다. 아무리 좋아도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사명은 준비된 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사밧의 훌륭한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왕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하죠. 이제 그는 아버지처럼 이방의 왕을 의지해야 할 일도, 유혹을 받을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사실 우리는 유혹을 무서워하는데, 더 무서운 것은 우리가 유혹을 받을 상황과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술과 여자와 명예에 유혹받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유혹받는 자리에 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자신의 준비로 교만해지는 것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준비된 사람이 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이것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여호사밧이 좋은 모범이 됩니다. 자신이 준비된 그 일을 통해 ‘전심으로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왕으로서 여호사밧이 한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을까요? 여호사밧의 가장 큰 장점은 왕으로서 성실하게 열심히 준비한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를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스스로 강하게 한 것”을 넘어서 전심으로 여호와의 길을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여호와의 길을 걸어갔다. 오늘 본문 6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전심으로 여호와의 길을 걸어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도 유다에서 제거하였더라” “전심으로”라는 말을 영어 성경에서는 “His heart was devoted to God”이라고, 메시지 성경에서는 ‘일편단심’(singleminded in following God)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일편단심”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우상을 제거하는 것이죠.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을 제거했습니다. 산당들이란 이곳저곳에서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즉,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죠. 굳이 성전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것. 자기중심적인 신앙의 모습이죠. 아세라 신이란 풍요를 상징하는 이방의 신입니다. 이방의 문물과 함께 들어와 신앙의 순수성을 빼앗아 가버린 신들입니다.
이제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풍요를 기원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헌신된 삶을 살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 나는 ‘산당’도 ‘아세라 목상’도 없다고 자만하지 마십시오. 언젠가부터 자신의 편의로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했다면 가장 가까운 곳에 산당을 두기 시작한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헌신보다는 물질적 풍요가 앞서기 시작했다면 당신의 삶에서 아세라 목상이 서 있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사밧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따르기로 했을 때, 이스라엘은 금송아지 우상이나 바알 신상, 아세라 신상에게 절하며 간구하였지만, 여호사밧은 오직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사밧과 함께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라를 여호사밧의 손에서 견고하게 하셨습니다. 왕이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에는 오직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였습니다.
전도폭발로 유명한 미국의 플로리다 코랄릿지 교회의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 댄스 교습소에서 춤 선생으로 일하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댄스 교습을 마치고 라디오를 틀었습니다. 라디오에서 도널드 그레이반 하우스 목사의 설교가 흘러나왔습니다. “당신은 영원한 운명의 시간을 어디서 보낼 것입니까?”라는 목사님의 설교에 춤 선생은 가슴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는 정신적으로 긴장하며 갈등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나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나는 춤이나 가르치다가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것인가?" 그는 그 순간 쾌락적이었던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버리고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날로 그는 전심으로 주님을 섬기기로 작정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전도폭발 전도교재를 만들어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합니다. 전심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특징은 그의 삶을 통해 누군가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전심의 전염성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던 여호사밧에게 아주 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납니다. 사실 리더십이란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왕위에 있은 지 삼 년이 되었을 때,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7. 그가 왕위에 있은 지 삼 년에 그의 방백들 벤하일과 오바댜와 스가랴와 느다넬과 미가야를 보내어 유다 여러 성읍에 가서 가르치게 하고 8. 또 그들과 함께 레위 사람 스마야와 느다냐와 스바댜와 아사헬과 스미라못과 여호나단과 아도니야와 도비야와 도바도니야 등 레위 사람들을 보내고 또 저희와 함께 제사장 엘리사마와 여호람을 보내었더니 9.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되 그 모든 유당 성읍들로 두루 다니며 백성들을 가르쳤더라.
어떻게 보면 엄두가 나지 않을 일입니다. 그가 다스리는 나라 전체를 가르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진정한 리더십이란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가 아는 것,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기로 작정했을 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됩니까?
여호사밧은 왕이 된 지 3년이 되었을 때에, 여러 방백을 각처로 보내어 여러 성읍에서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벤하일, 오바댜, 스가랴, 느다넬, 미가야, 이들은 백성의 관리들이었습니다. 당시 레위인으로 백성을 가르칠 수 있는, 스마야, 느다냐, 스바댜, 아사헬, 스미라못, 여호나난, 아도니야, 도비야, 도바도니아와 같은 여러 레위 사람들을 백성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 중의 엘리사마와 여호람을 보내었습니다. 그들 지도자는 각처로 다니면서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쳤습니다. 이런 사역이 백성을 풍요롭게 하였고, 살찌게 하며, 바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제가 만나 교회의 리더로 세움을 받았을 때 한 일이 있습니다. 2002년 제가 쓴 책이 있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 이 책을 낼 때 출판사 편집장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이 책을 내지 마세요. 이 책은 부목사로서 쓸 책이 아닙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상황에서 이런 책을 쓴다면 괜히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자리의 문제가 아니라, 꿈꾸는 교회의 목회였습니다. 이 책은 만나 교회를 위해서 쓴 책이 아니라, 꿈꾸는 교회를 위해서 쓴 책입니다. 사실 그 당시 저는 만나교회가 아니라 다른 곳의 사역지를 결정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 책이 출판되고 만나 교회를 떠나려 했을 때, 김우영 목사님이 쓰러지셨고 당시 기획 목사를 맡고 있던 저는 설교를 맡아가게 되었습니다. 예배는 제가, 행정과 재정은 평신도 대표가 대신 맡아가기로 했죠. 그때 제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생각해 보면 여호사밧의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교인들에게 교회에 대하여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당시 제가 그것을 가르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담임도 아닌 것이, 장로님, 남녀 선교회 회장, 그리고 리더를 교육할 때. 때로는 싸늘하고 냉소적인 표정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가르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었습니다. 제 아내와 나눴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옳다고 생각하면 가르치고, 이 가르침으로 내가 사역할 수 없다면 떠나는 것이 옳다. 우리가 하나님의 눈치를 보랴, 사람의 눈치를 보랴.” 그렇게 공부를 하게 되었고, 제가 담임이 되어 교회에서 일어났던 변화들이 순조롭게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저에게 묻습니다. 특히 전통적인 교회에서 새로운 목회적 시도를 원하는 목사님들이 묻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변화시키면 시끄럽거나 저항이 많지 않나요?” 저는 그분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만나 교회에서는 이런 변화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저항이 아니라 기쁘게 변화를 만들어 갔습니다. 하지만 변화를 시작하기까지 정말 힘든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변화가 아니라 변화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으로 풀어간 시간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만일 “변화가 목적”이었다면 하다가 포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나 교회는 변화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교회가 이 땅의 소망이 되기 위해” 바꿔야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교회가 가야 할 방향이 있었기 때문이죠.
여호사밧이 이곳저곳으로 사람들을 보냈던 것처럼, 저도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주중, 주말, 새벽 낮 밤을 가리지 않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는 이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가장 쉽게 하는 말이 “시간이 없어서”라는 말인데, 그런 말이 핑계가 되지 않도록 모든 시간을 열어놓자는 것이었죠. 제가 초창기 만나 교회 담임으로 사역할 때의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그러니까 아프죠.”
요즘 저는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기에 후배 목회자들에게 건강을 잘 살피라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목회를 하면서 그렇게 아플 정도로 해 봐야 하는 것 아닐까요? “전심으로” 말입니다. 사실 “쉬십시오!”라는 말은 열심히 살아본 사람이 말 할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요?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보지 못한 사람에게 건강을 조심하고 쉬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어렵기는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전심으로 살 각오가 되어 있다면 말입니다.
‘리더십은 영향력이다!’라고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 오스왈드 샌더스라고 합니다. 참 멋진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 리더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여호사밧이 참 좋은 리더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호사밧이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그가 받은 결단을 자신에서 머무르게 한 것이 아니라, 백성에게 가르치고 삶을 바꾸기로 했을 때, 온 나라가 하나님 중심의 나라가 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왕들이 이야기를 보며 리더가 된다는 것, 그리고 리더가 사는 삶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이 되면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던 여호사밧에게도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과 마온 사람들이 동맹하여 여호사밧을 공격을 합니다. 여호사밧의 군대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였습니다. 여호사밧은 지체하지 않고 온 유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면서 기도하며 매달렸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사밧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받은 응답은 너무나 황당한 응답이었습니다. 적이 올라오거든 유대의 군인들은 적을 향하여 그냥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싸우겠다는 것입니다. 수적으로 열세이기 때문에 기도했는데 그냥 나가라니 말이 됩니까? 그런데 여호사밧 왕은 순종합니다.
찬양대를 조직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찬양하면서 적진을 향하여 나아가게 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그들은 서로 죽이는 살육전을 벌였습니다. 암몬과 모압이 일어나 에돔을 족속을 쳐서 다 죽였습니다.
그리고 모압은 암몬을 치고, 암몬은 모압을 치는데, 서로 죽이고 죽이는데,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전멸당하고 말았습니다. 여호사밧은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믿음이 얼마나 큰 영향력이 있습니까? 정말 위대한 일은 백성이 여호사밧의 명령을 따라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말씀 앞에 훈련된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순종할 수 있었겠습니까? 한 사람의 전심이 나라를 구하게 된 것이죠.
한국교회 역사에 중요한 획을 그은 사건이 바로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입니다. 이 부흥운동의 중심에 유명한 길선주 목사님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전까지 그의 설교에도 기도에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집회에서 길선주 목사님은 은혜의 단절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판단했고 숨은 죄까지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결단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길선주는 죽어가는 친구의 부탁을 받고 그의 남은 재산을 정리해주면서 친구의 부인에게 다 돌려주지 않고 가로챈 것을 뉘우치면서 “나는 아간과 같은 놈입니다. 저 때문에 여러분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제인가 제 친구 한 사람이 임종하면서 제게 부탁하기를 ‘나는 이제 죽지만 내 재산을 잘 처리해 주게. 내 아내는 무식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꼭 부탁하네!’라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그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1백 원을 잘라 먹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속였습니다. 저는 내일 아침 일찍 그 돈을 그 부인에게 돌려주겠습니다.”라고 회개하였습니다. 길 목사의 우렁찬 공개 자복이 터지자 회중석에선 통회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저 유명한 성령강림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영향력입니다.
누군가 전심으로 하나님께 굴복하고 기도하기 시작하면, 누군가 하나님 앞에 삶을 드리기 시작하면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의 변화가 아닌 바로 나로부터 변화가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나 자신이 강력한 변화의 근원지가 되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가좋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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