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2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16 1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2 예루살렘의 ‘양 문’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3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4)·5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6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7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9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10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11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 13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14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15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16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냉정한 사람들
히브리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연못은 ‘치유의 물’이 있는 연못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 연못에서 목욕하거나 씻은 다음에 병이 나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물에 목욕을 하거나 아픈 부위를 담그기만 해도 병이 낫는다고 믿는 연못이었습니다. 그래서 긴 주랑에 많은 병자들이 가득히 누워있고, 그 연못에 온 사람들이 그 연못에서 목욕을 하고 씻으려고 난리법석을 피웠을 것입니다. 나는 성경을 덮고 가만히 그 연못의 풍경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연못에 들어가려고 난리법석을 피우기도 하고, 그 난리 통에 돈을 벌려고 벼르는 사람들이 설치기도 하고, 질서를 잡는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음식을 파는 사람, 청소를 하고 돈을 받는 사람, 환자들을 데리고 온 사람, 들것이나 지팡이를 만들거나 수선하는 사람, 신발이나 옷을 파는 사람 등 장사하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가운데 삼십팔 년이나 움직이지도 못하고 연못가에서 누가 좀 연못에 넣어주기를 기다리는 병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 두 달도 아니고 한 해 두 해도 아니라 삼십팔 년이나 연못에 넣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연못 주변에 길게 늘어진 주랑에는 많은 병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 사람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이 또한 자리 잡고 있었지만 이 가난한 사람을 연못에 넣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냉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눈멀고, 다리절고 팔다리가 말라 비틀어져 있어도 누군가 데리고 연못물에 넣어 씻기고 닦아주면서 매일 간호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같은 시대에 비교해 본다면 간병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이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간병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왔을 것이고, 자신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혼자서라도 그 연못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들끓기 때문에 연못주변은 더 복잡합니다. 행운을 누리는 사람은 며칠씩 물에 목욕까지도 합니다. 며칠이 아니라 일 년 내내 그렇게 호사를 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가난하고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가련한 환자는 들것에 누워 누가 그 연못에 넣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사람을 물에 넣어주지 않았습니다. 무려 삼십팔 년 동안이나 그를 돌보아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좋은 것을 앞에 두고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고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이익이 되는 것이 있다면 조금도 뒤지거나 다른 사람이 차지할 수 없도록 놔두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우리네 인간들의 공통된 심사인지도 모릅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것처럼 탐욕이 끓어올라서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꼴을 보기 싫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소외된 이웃들이 이 세상에는 상상외로 많이 있습니다. 정말 꼴불견과 같은 모양이 지금 우리 주변에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복지라고 외치고 있으면서도 정작 복지는 외면당하고 있으며 많은 사각지대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지(福祉)라는 글자는 참 재미있는 글자입니다. 복지의 지(祉)자의 뜻은 ‘하늘에서 내리는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祉)자의 구성은 하느님을 뜻하는 시(示)자와 ‘머무르다’는 것을 뜻하는 지(止)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하느님이 머무르시는 것’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가장 끝은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복지의 완성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는 사랑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라에서 복지정책이라고 하는 것을 내 세우는데 돈으로 대충 때우려고 하는 것이 복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재난지원금을 주면서 그것도 국민의 세금으로 주면서 정치인들이 생색을 냅니다. 자기들이 복지국가를 실현하고 있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복지는 엄청난 사기입니다.
지금 전 세계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사람 제 1순위가 그분 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분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마음을 두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걱정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들을 위해서 우리의 도움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그냥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살고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본 사람들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살려고 노력하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관심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은 없나요? 우리가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우리의 도움이 간절한 사람들은 정말 없나요? 교황님과 우리가 같거나 다른 점이 있다면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느냐 아니냐가 문제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오랫동안 외롭게 소외된 그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안식일이었지만 그 사람으로 하여금 들것을 들고 걸어갈 수 있게 고쳐주십니다. 그것을 꼬투리로 삼아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치우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트집을 잡습니다. 쌍심지를 돋우는 그들은 안식일이 아닌 날에도 그 병자를 내팽개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짓을 삼십팔 년이나 계속했던 사람들이었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라.’라고 율법조항을 읊조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병을 낫게 된 그 사람은 미움을 각오하면서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그는 물론 그래야 마땅했겠지만 영육 간에 모든 치유를 받았으니 그 은총을 어찌 침묵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손해 보는 일이라도 작은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선택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이웃에게 정성을 모아봅시다. 우리는 냉정한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