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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3일 오늘의 역사
2021년 3000톤급 중형 국산 잠수함 도산 안창호함 진수식
13일 취역한 3000톤급 중형 국산 잠수함 1번함 도산안창호함엔 SLBM 발사에 필요한 수직발사관(VLS)이 6문 장착돼 있다.
도산안창호함에 탑재되는 '현무 IV-4'는 사거리 500㎞의 지대지 탄도미사일 '현무 II-B'를 잠대지미사일로 개량한 것이다.
도산안창호함이 디젤엔진을 주동력원으로 사용하는 이른바 '재래식' 잠수함 중에선 3000톤급으로 큰 편(길이 83.5m, 폭 9.6m)에 속하는 데다, 연료전지를 이용한 공기불요추진체계(AIP)와 SLBM용 VLS를 모두 장착하고 있다.
디젤 잠수함은 기본적으로 디젤엔진을 돌려 잠수함에 실려 있는 축전지를 충전한 뒤 이 축전지의 전력을 이용해 추진 모터를 돌리는 방식으로 운항한다.
그러나 디젤엔진에서 연료를 태우는 데는 공기 중 산소가 필요하기 때문에 디젤 잠수함은 잠항 중 주기적으로 수면 가까이 올라와 흡입관으로 공기를 빨아들이고 배기관을 통해 폐가스를 내뿜는 작업(스노클)이 필요하고, 이는 잠수함이 작전 수행 중 적에게 노출될 위험을 키우는 요인이 된다.
도산안창호함엔 이 같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디젤엔진과 납축전지 외에도 수소연료전지를 이용한 AIP를 탑재했다. 그 결과, 도산안창호함의 잠항기간은 최장 3주 가량으로 늘었다.
2021년 성추행 피해 여군 중사 자살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한국 양궁 전 종목 우승
2015년 UN 본부 윤리국장에 한인 1.5세 발탁
한인 1.5세인 엘리아 암스트롱(54)이 유엔 본부의 최고위직 중 하나인 윤리국장(Director of Ethics Office)에 발탁됐다.
유엔은 13일 “반기문 사무총장이 조앤 엘리스 더빈스키 윤리국장 후임으로 암스트롱을 임명했다”며 “암스트롱은 1999년 이후 유엔과 캐나다 연방정부, NGO(비정부기관) 등에서 일해 왔다”고 소개했다. 윤리국장은 사무총장에게 각종 윤리적 문제를 직접 보고하는 최고위직의 하나다.
1961년 한국에서 태어난 엘리아 암스트롱은 8세 때 부모와 캐나다로 이민 간 한인 1.5세다.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에서 사회복지학, 토론토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영국 런던경제대에서 '개발도상국의 사회정책과 계획'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3개 국어(한국어·영어·프랑스어)에 능숙한 그는 2006년 유엔 윤리국 창설 때 수석 윤리관을 맡았으며, 이후 유엔개발계획(UNDP) 윤리국장(2008~2012), 유엔 경제사회국 공공행정 및 개발경영과장(2012~2015)을 거쳤다.
대학생 때 연세대에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남편인 찰스 암스트롱 컬럼비아대 교수를 만나 1986년 결혼했다. 암스트롱 교수는 세계적인 한반도 전문가이고, 시어머니인 리아 암스트롱은 세계국제결혼여성총연합회(World-KIMWA) 상임 고문이다.
2014년 세계수학자대회(ICM) 서울 코엑스에서 열림
2009년 북한, 현대아산 근로자 유성진씨 석방
2009년 3월 30일부터 북한에 억류돼 있던 현대아산 근로자 유성진씨가 억류 136일 만인 8월 13일 오후 풀려나 남측으로 돌아왔다. 북한은 이날 '추방' 형식으로 유씨를 석방했다. 통일부는 "유씨 석방에 어떤 대가를 지불한 것은 없었다"고 밝혔지만, 남북 간 어떤 협의가 있었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북측은 자기측 출입국사업부에서 추방 형식으로 유씨를 우리측에 신병을 인계했으며 유씨가 '반공화국 책동을 했다'는 기존의 추상적 주장만 되풀이했다.
유씨는 이날 밤 9시12분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에 도착해 간단한 소감만 말하고 서울로 떠났다.
개성공단에서 숙소 관리 업무를 하던 유씨는 3월 30일 오전 개성공단 현지에서 북측 당국자들에 의해 체포됐다. 북측은 "유씨가 (북한) 체제를 악의에 차서 헐뜯으면서 공화국의 자주권을 침해하고 해당 법에 저촉되는 엄중한 행위를 감행했다"고 발표했었다. 그 뒤로 북측은 남북 당국 간 접촉에서도 유씨가 어디서 어떤 상태로 지내고 있는지 밝히지 않았고 우리측의 접견요구도 거부해왔다.
유씨 문제가 해결됨에 따라 정부 당국자는 "지난달 30일 동해 북방한계선을 넘었다가 북측에 예인된 연안호 선원 석방 문제도 해결이 되지 않고 있는 등의 문제도 있어 그동안의 대북정책 기조가 갑자기 크게 변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하지만 유씨 석방으로 남북 관계에 숨통이 트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했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야스쿠니 신사 참배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2001년 8월 13일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전격 참배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당초의 방침이었던 `8월 15일 참배`를 이틀 앞당겨, 이날 오후 4시43분쯤 태평양전쟁 주모자인 A급 전범 14명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도착, 참배를 마쳤다.
이날 야스쿠니 신사엔 수백명의 일반 참배객이 모여 일장기를 흔들며 환호성을 보냈고, "만세"를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이날 참배와 동시에 고이즈미 총리는 과거 침략을 반성한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으나, 그동안 한국과 중국 등 국제사회가 참배를 강력히 반발하거나 비난해 왔다는 점에서 공허한 변명으로 비춰졌다.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는 1996년 7월 자기 생일에 참배한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당시 총리 이후 5년 만의 일이다. 한국과 중국 정부는 각각 성명을 발표, 고이즈미 총리의 참배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2000년 러시아 핵잠수함 쿠르스크호 노르웨이 북쪽 바렌츠해에서 침몰 승무원 118명 전원 사망
1998년 러시아 소유즈 우주왕복선, 카자흐공화국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발사
1996년 정석해 전 연세대 교수 별세
정석해 전 연세대교수가 1996년 8월 13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97세를 일기로 타계한 서산 정석해 선생은 격동의 우리 현대사를 직시하며 살다 간 20세기의 선비이자 참스승이었다.
1899년 평안북도 철산 태생인 선생은 연희전문학교 문과재학 중 3·1운동이 터지자, 기독학생회장으로 학생시위를 주도하면서 이미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망명, 이어 프랑스와 독일에서 서양철학을 공부했다. 이 때에도 그는 언제나 태극기를 지니고 다닌 확고한 애국심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1940년 귀국해서도 일제의 탄압으로 연금-은거생활을 했던 선생은 광복이 되자 교육계에 투신, 연세대 철학과에서 후학을 길러내는 일에 전념했다.
4·19가 터졌을 때 학생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정권은 더 이상 존속할 이유가 없다며, 교수데모를 주동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선생은 5·16 이후에도 대일 굴욕외교를 정면으로 반대하다가 정치교수 1호로 꼽혀 줄곧 탄압과 감시에 시달리는 고초를 겪었다. 이 땅에 민주 국가 건설을 염원했던 선생은 그러나 전두환 정권이 등장한 1981년 미국으로 떠났다.
1993년 강원도 태백 한보에너지 통보광업소 탄광 매몰 사망 5명 1명은 91시간 만에 구조
1991년 원로 한학자 김종무씨 별세
1989년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제4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대상 수상
신예 배용균 감독이 제작·연출한 극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1989년 8월 13일 스위스에서 열린 제4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금표범상을 수상, 한국 영화 70년 사상 처음으로 세계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하는 쾌거를 기록했다.
11개국 18편이 본선에 오른 경쟁부문에서 ‘달마가...’는 대상을 비롯, 청년비평가상(2위), 기독교평론가상, 최우수작품상, 국제기자협회상(1위), 바크리상(2위) 등 특별상 4개부문도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세계 8대 영화제의 하나로 꼽히는 로카르노 국제영화제는 1-2편을 연출한 신인 영화감독들만을 대상으로 역량을 평가하는 전통깊은 세계무대 등용문이다.
1951년 대구 출생인 배용균 감독은 서울대 미대를 거쳐 프랑스 파리대 대학원에서 조형예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후 대구 효성여대 서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었다. 파리유학시절부터 세계영화제에 진출, 그랑프리를 거머쥐겠다는 집념을 불태워 왔다는 그는 이번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8년의 정열을 쏟아부었다.
1988년 건설부, 1992년까지 16조3천억원을 투입, 택지 5천7백만평을 마련해 주택 2백만호를 건설한다고 발표
1986년 전교협(전국교사협의회) 준비위원회 구성
1983년 독도근해간첩선격침사건
독도 근해를 초계중이던 강원함이 남하하는 의아선박을 발견, 정선을 명했으나 도주, 함상헬기가 출동 격침, 19명 사살 추정
1981년 경기도 안양 보신탕집서 프로판가스 폭발 사망 10명 부상 20명
1980년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정계은퇴 발표
1979년 중국, 산아제한정책 발표
1978년 베이루트 PLO본부 폭파 200여명 사망
1978년 이란 반정폭동 격화
1977년 북괴, 리비아탁구팀 코치 김창제씨 납북기도
1977년 영국 런던서 전후최대의 인종폭동
1969년 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서 중국 국경경비대와 소련군 기갑부대 격렬한 무력충돌
1965년 국군1개사단 전투병력 월남파병 동의안 국회통과
1965년 8월13일 전투부대 베트남 파병안이 국회에서 심의되었다된다.
야당 의원은 한명도 참석하지 않은 채 여당인 공화당 소속 의원들만이 표결에 참여한다.
출석 의원 104명 가운데 101명이 찬성함으로써 전투부대 베트남 파병안이 통과된다.
베트남 파병과 한일협정에 대한 반대운동을 벌여온 야당 의원들은 모두 사퇴서를 내고 이날 표결에 참가하지 않았다.
전투부대 파병안의 국회 통과로 같은 해 10월 9일 청룡부대가, 11월 20일에는 맹호부대가 베트남에 도착한다.
이듬해 4월 16일 혜산진부대가, 8월 15일에는 백마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함으로써 우리 나라는 미국 다음 가는 베트남 파병국이 되었다
1964년 월남파병안 국회 통과
1961년 베를린 장벽 설치 시작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베를린은 동,서 베를린으로 갈라졌다
비록 땅은 갈라졌지만 거기서 사는 사람들의 왕래는 자유로웠다
그러나 1949년 동베를린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통제와 억압을 견뎌내지 못한 사람들의 탈출이 빈번히 발생했다,
전문직 종사자나 숙련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한 해 20만 명 정도로 체제유지가 힘들 정도였다
동독이 극단적인 대책을 고안했다
동,서 베를린을 연결하는 주요도로와 거리에 철조망을 설치했다
1961년 8월13일 아침에 일어난 주민들은 밤새 벌어진 기막힌 광경에 깜짝 놀랐다
탱크가 곳곳에 배치됐고 군인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다
이제 도시가 완전히 반으로 갈라져 서로 오갈 수 없게 되었다
동서냉전을 의미하는 철의장막이었다
동독은 다시 철조망이 쳐진 곳에 장벽을 쌓았다
1962년에는 장벽으로부터 100m이내의 모든 건물을 철거했다
아무도 다닐 수 없는 죽음의 지대였다
그래도 부족했던지 1975년 까지 몇 차례 더 콘크리트로 장벽을 강화 했다
베를린을 동서로 나눈 장벽은 43km, 서베를린 외곽을 둘러싼 장벽은 156km에 달했다
감시탑은 116개소나 되었다
1961년부터 1989년까지 5,000여명의 동독인이 탈출을 시도했다
1960년 윤보선 제4대 대통령 취임
1960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프랑스로부터 독립
1959년 일본 적십자사와 북한적십자사, 인도 캘커타에서 재일교포북송협정 체결
1959년8월13일 북한과 일본 정부가 인도의 캘커타(Calcutta)에서 '재일교포북송에 관한 협정'에 정식 조인했다.
‘칼커터 협정’이라고도 한다.
3개월 후인 1959.11.12부터 발효, 이를 매년 연장해 오다가(150여차, 8만 7천여명), 1966.8.23 일본 정부의 의결에 따라 1967.11.12로서 폐기되었다.
재일교포북송 문제가 처음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1955년 2월이었다.
당시 북한은 6․25전쟁에 따른 노동력 부족을 이유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계 재일교포들의 귀환을 추진하면서 귀환자들의 생활을 최대한 보장하겠다는 입장을 대내외에 알렸다.
그 무렵 일본도 인구증가와 각종 사회․경제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모색하던 중이었으므로 양측의 이해관계는 서로 일치했고 협상은 급진전되었다.
이에 대해 한국에서는 재일교포북송 반대시위가 잇달았으며 외교 활동도 다각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한국내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1958년 11월 17일 재일조선인귀국협력회가 결성되는 등 북송을 실현시키기 위한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마침내 북한과 일본 정부 간에 협정이 조인되었고, 1959년 12월 14일 975명의 북송재일교포 제1진이 니가타 항[新潟港]을 출발한 것을 시작으로 동(同) 협정의 만료시한인 1962년 11월 12일까지 7만 7,288명의 재일교포가 북송되었다.
이후 기한이 연장되어 북송이 계속 진행되었으나, 북송교포의 비참한 생활상이 알려지면서 그 수가 급감해 북송사업은 종결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1956년 제2대 지방의회 의원 선거 실시
제3대 대통령선거가 끝난지 약 석달 뒤인 1956년 8월 13일 전국 437개 선거구에서 제2대 서울시의원-전국 도의원선거를 실시했다. 선거결과 정당별 당선자수는 자유당이 의원총수 437명의 57%인 249명으로 과반수를 넘었으며 민주당은 98명, 무소속 83명, 기타 7명이었다. 시·읍·면장과 시·읍·면의회 의원선거는 도의원선거보다 5일 앞선 8월 8일 실시되어 자유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이번 제2대 도의원선거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3선당선 여세를 악용한 자유당의 방종과 관권개입으로 부정불법이 전국적으로 판을 쳤다. 곳곳에서 관권의 협박 때문에 야당후보들의 사퇴가 잇따르자 야당 국회의원들이 이에 항의,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자유당은 무더기 대리투표, 표바꿔치기 등의 불법 행위를 곳곳에서 저질렀다. 전북 정읍군 서성면에서는 투표함의 봉인을 뜯어내고 자유당후보표를 무더기로 집어넣는 광경을 투표함 호송경찰관 박재표 순경이 목격하고 8월 27일 동아일보 본사에서 양심선언을 통해 폭로했으며 민주당 김의택 국회의원도 전남 함평군 선거에서 경찰이 투표함을 개표장으로 호송하는 도중 무더기 표바꿔치기를 했다고 폭로했다.
1955년 국내 최초로 성전환 수술
1953년 소련 수소폭탄 실험
1952년 근로기준법 국회 제출
1951년 국민방위군사건 김윤근소장 등 사형 집행
1949년 지방체신관서설치법(법률 47호) 공포
1948년 한국-대만, 국교수립
1946년 작가 허버트 조지 웰스 사망
영국의 소설가 겸 문명비평가인 허버트 조지 웰스가 1946년 8월 13일 향년 80세로 사망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대학을 마친 웰스는 교사생활을 잠시 거쳐 문필활동에만 전념, 일생동안 10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처음에는 자연과학적인 넓은 교양과 상상력을 결합해 책을 저술했다. ‘타임머신’(1895)과 ‘투명인간’(1897) ‘우주전쟁’(1898) 등이 이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타임머신’에서는 퇴화하고 멸망한 인류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 ‘투명인간’은 남의 눈길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과 소외된 인간의 고독을 현실감있게 그렸다는 점에서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이후에는 ‘연애와 루이셤씨’ 등처럼 풍자와 유머가 넘치는 소설을 썼다. 그는 역사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져 1920년 ‘세계사 대계’를 내 놓았고, 그후 2년 뒤 이를 읽기 쉽게 압축한 또 다른 ‘세계사’를 펴냈다. 이 초판본과 1946년, 1965년 2차례에 걸친 개정판을 비교해 보면, 평생을 사회주의자로 또한 세계정부 지지자로 미래를 낙관하며 살아온 그가 2차대전을 거치며 비관주의자로 변모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자신이 직접 수정한 개정판에서 자신의 세계관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전망에 다소의 잘못이 있었음을 시인했으며, 아버지의 시각을 토대로 웰스의 아들이 다시 수정한 2차 개정판에서는 한국전쟁이 동서 이데올로기 분쟁의 최대 희생물이라고 썼다.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우유부단한 정책과 소련의 뒤틀린 야망이 분단을 초래하고 마침내 엄청난 비극을 몰고 왔다는 것이다.
1943년 광복군, 버마전선에 대일전 참전
1940년 독일 1,500여대의 폭격기로 영국 공습
1936년 조선중앙일보(사장 여운형)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우승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 삭제, 조선중앙일보는 9월 5일 휴간했다가 결국 폐간됨
1935년 심훈의 상록수, 소설 현상공모에 당선
1933년 대동군에서 석회 종유동굴 발견
1926년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출생
1913년 독립의군부 사건 선고공판 열림
1912년 조선삼림미간지 및 산림산물특별처분령 공포 시행 토지조사령 공포
1910년 나이팅게일 사망
“백의의 천사” “등불과 같은 여인” 등으로 알려져있고 박애주의의 대명사로 불려진 나이팅게일이 1910년 8월 13일 런던에서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독신으로 산 나이팅게일은 어렸을 때부터 간호원직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크리미아 전쟁 중에 그녀는 군대병원이 얼마나 비위생적인가를 알고, 간호원팀을 조직하여 터키에 있는 수쿠터리와 발라크라바이 병원들을 소독해가며 위생적인 의료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군대와 싸웠다.
그녀는 영국으로 귀국한 후, 간호원을 양성하기 위해 나이팅게일 간호학교와 기숙사를 세운 다음 건강위생에 대해 전문적인 교육을 강의하였다. 그리하여 영국의 메릿훈장을 수여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1909년 조선고서간행회 조직
1907년 청, 자정원 설립
1899년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 출생
1898년 미국군, 마닐라 점령
1897(조선 고종 34) 독립협회 개국 505회 기념절 기념식 독립관 거행
1888년 세계최초로 텔레비전 방송에 성공한 베어드 출생
1868년 페루 아리카(Arika 현재 칠레) 진도 9.0지진·쓰나미로 2만5674명 사망
1863년 프랑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 세상 떠남
1841(조선 헌종 7) 유학자 간재 전우 태어남
1826년 프랑스 의사 라엔네크 사망
1615(조선 광해 7) 한의사 구암 허준 세상 떠남 『동의보감』 『언해구급방』
1546(조선 명종 1) 도학자 화담 서경덕 세상 떠남(음력 7월 7일)
1467(조선 세조 13) 청년장군 남이 이시애의 난 평정
1396년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 사망
232년 중국 삼국시대 촉한 시대의 전략가 제갈량(제갈공명)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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