晉書
《晉書》에 일렀다.
鄧攸字伯道 平陽襄陵人.
鄧攸는 字가 伯道이니 平陽 襄陵人이다.
爲河東太守 沒于石勒.
河東太守가 되었다가 난리통에 後趙의 石勒에게 패하였다.
乃斫壞車 以牛馬負妻子而逃. 又遇賊掠其牛馬.
수레가 망가졌으므로 소와 말에 妻子를 싣고 도망치다가 또 적을 만나 소와 말을 빼앗겼다.
步走擔其兒及其弟子綏 度不能兩全 乃謂妻曰
吾弟早亡 惟有一息. 理不可絶. 止應自弃我兒耳. 幸而得存 我後當有子.
그의 아이와 아우의 아들 綏 를 업고 가다가, 두 아이가 모두 온전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고 이에 아내에게 말하였다.
“내 아우는 일찍 죽고 오직 한 자식이 있을 뿐이니 도리상 그의 代를 끊을 수가 없은즉 예법상 응당 우리 아이를 버려야 하겠소. 다행히 살아남으면 우리는 뒤에 마땅히 자식을 가지면 될 터이오.”
▶止: 예의. 容止
妻泣而從之 乃弃之.
아내는 울면서 그 말을 좇아 자기네 아이를 버렸다.
朝弃而暮及. 明日繫之於樹而去.
그런데 아침에 버렸는데 저녁에 따라오므로 이튿날은 나무에 매어놓고 떠났다.
至江東 仕爲尙書右僕射.
江東에 이르러 벼슬하여 尙書右僕射가 되었다.
攸弃子之後 妻不復孕.
등유가 아들을 버린 후로 아내가 다시 애를 갖지 못했다.
過江納妾 甚寵之.
東晉시대가 되자 첩을 맞아 몹시 사랑했다.
訊其家屬 說
是北人遭亂. 憶父母姓名. 乃攸之甥. 攸素有德行.
첩에게 그 家屬을 물어보았더니 말하기를, 그는 북쪽 사람으로서 난리를 만났으나 부모의 姓名은 기억하는데 곧 등유의 조카로서 평소 등유에게 德行이 있었다고 했다.
聞之感恨 遂不復畜妾. 卒以無嗣.
이를 듣고 감동하고 한스럽게 여겨 드디어 다시 첩을 두지 않으니 마침내 아들이 없었다.
時人義而哀之曰 天道無知 使鄧伯道無兒.
당시 사람들이 의롭게 여기고 슬퍼하여 말하였다.
“天道가 등유의 義를 몰라주어 鄧伯道에게 아이가 없게 하도다.”
[註解]
ㅇ晉書- <晉書> <列傳> 60 良吏傳에 있는 이야기임.
ㅇ石勒- 後趙를 창립한 임금. 羯族人. 일찍이 장사도 하고 도둑질도 하다가 劉淵의 부하가 되어 많은 공을 세웠으며 뒤에 劉曜를 죽이고 대신하여 帝라고 참칭함.
위의 내용은 몽구에 나오는 것이고, 세설신어에도 올라 있고, 소학에도 나온다.
난리 통에 조카와 자기 자식 둘 중에 하나를 버려야 했을 때 등유는 자기 자식을 버린다. 아침에 버렸는데 저녁에 따라오더라고 하며,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나무에 묶어 놓고 갔다고 하였다.
난리가 평정된 뒤에 등유에게 다시 애가 생기지 않았다. 첩을 들였으나 물어보니 등유의 조카뻘이다. 대가족 제도하에서 얼굴 모르는 조카 하나가 난리통에 흘러다니다가 등유에게 첩이 될 뻔하였다. 그 뒤로 등유는 다시 첩을 들여 사자를 볼 생각을 끊고 살다가 죽었다. 백부의 복은 1년인데, 그 조카는 3년의 복을 입었다고 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이 말했다고 한다.
"천도가 무지하여 등백도로 하여금 아이를 못 가지게 하였네."
우리 나라에서도 육이오 때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한 때 티부이에서 이산가족 찾기가 시작되어 연일
"얼굴을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한데, 어깨 한 번 벗어봐라. 내 아우는 점이 하나 있다."
"그래요. 이 점 말인가요?"
"맞다. 아우야. 엉엉"
이런 장면들이 몇날 며칠 이어지기도 했다.
부모 형제가 생이별한다는 것은 사별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등백도가 의리를 지키기 위해 애써 자기 자식은 나무에 묶어 놓기까지 하면서 조카를 데리고 가서 그 조카를 자식삼아 키웠겠으나
그 버린 자식은 어디서 어떻게 자라고 있을까, 평생을 가슴 한 쪽에 응어리져 있었으리라.
그 버려진 아들은 아들대로 평생을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살았으리라. 이순신 장군도 난중일기에서 조카를 먼저 결혼시킨다. 웬간한 일은 조카를 우선으로 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아버지 없는 조카라면. 그러나 둘 중 하나를 버려야 하는 등백도 같은 경우에 처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형제애에 대한 하나의 본보기로 소학에 올라 있고 우리나라 조선 조 사회 같은 경우 너도 나도 그 글을 다 읽고 자신이 그 지경에 처하면 등백도처럼 행동하겠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오늘날 내 자식을 버리고 조카를 살리는 등백도의 경우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등백도는 평생을 살면서 그 버린 자식이 떠오르면 뼈가 저렸으리라.
내게는 육이오 때 행불된 삼촌이 하나 있다. 할머니께서는 그 아들에 대해 돌아가실 때까지 이야기하셨다. 언젠가는 점을 쳤는데 살아 있다고 나오더라 하며, 살아 있다면 통일 되면 만나 볼 수 있겠다고 하셨다.
어쩌면 등백도나 등백도의 마누라도 아무리 해도 잊을 수가 없어 점을 쳐보기도 했으리라. 혹은 부처님 앞에 백 배고 천 배고 절을 올리며 그 아들이 어느 하늘 아래에서 복을 받고 잘 살기를 빌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