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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4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이집트 카이로 인근 교회 예배 중 화재발생 41명 이상 사망
2021년 카리브해 섬나라 아이티에서 규모 7.2 강진이 발생해 최소 2000명 이상 사망
2021년 터키 남부 지역에서 산불 진화에 나섰던 러시아제 소방용 항공기 1대가 추락해 탑승자 8명 전원 사망
2015년 3선 의원 조홍규 전(前) 관광공사 사장 별세
13·14·15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홍규(趙洪奎·72) 전 의원이 14일 오전 8시 별세했다.
광주일고 및 고려대를 거쳐 정일형 의원 비서실장으로 정계에 입문, 198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만든 평화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광주 광산에서 13대(평화민주당), 14대(민주당), 15대(새정치국민회의)에 걸쳐 3선했다. 민주당 원내수석부총무, 새천년민주당 당무위원, 한국관광공사 사장과 성균관 이사회 이사장을 지냈다.
여야 가리지 않고 인간관계가 두터웠으며 유머가 뛰어나 정치인 및 관광공사 사장 시절 많은 일화를 남겼다.
2015년 ‘삼성 창업주 장남’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 별세
삼성 창업주 이병철 전 회장의 장남이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형 이맹희(84) 전 제일비료 회장이 별세했다.
이맹희 전 회장은 2012년 일본에서 폐암 수술을 받았으나 암이 전이돼 그간 중국 베이징에서 투병 생활을 해 왔으며, 14일 오전 9시 39분(현지 시각) 베이징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이맹희 전 회장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형으로, 당초 이병철 전 회장의 뒤를 이어 삼성그룹을 이끌 후계자로 꼽혔으나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이병철 전 회장과 갈등을 빚다가 이건희 회장에게 밀려났다. 이후 이맹희 전 회장 가족은 삼성그룹으로부터 제일제당 관련 기업을 분리해 나갔으며, 이는 이후 CJ그룹이 됐다. 현재 이맹희 전 회장의 장남 이재현 회장이 CJ그룹을 이끌고 있다.
아들 이재현 회장은 6200억원대 비자금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2078억원 상당의 탈세·횡령·배임을 저지른 혐의로 2013년 7월 구속 기소됐다.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상고해 대법원 확정 판결을 앞두고 있다.
2014년 석촌지하차도에서 길이 80m 동공 발견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한국방문
프란치스코(78) 교황이 14일 오전 10시30분 알이탈리아 편으로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이날 교황은 "한국을 방문하게 돼 기쁘다"며 우리나라 방문 소감을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중 나온 박근혜 대통령의 영접을 받고 "나도 한국에 오게 돼 기쁘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한국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교황 방한 계기로 따뜻한 위로가 전해지고 분단과 대립의 한반도에 평화와 화해의 시대가 열리길 바란다"고 말했고, 이에 교황은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고 왔다"고 답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영접 나온 세월호 유족들과 인사하면서 손을 맞잡고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다. 가슴이 아프다"며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있다"고 위로했다.
2013년 이집트 군부 라바 알아다위야 사원과 카이로대학 앞에서 시위군중에게 발포 578명 사망 3,500명 부상
2013년 남북 개성공단회담 타결 5개항 합의서 채택
2010년 롯데 자이언츠 이대호, 세계 프로야구 최다 연속경기(9회) 홈런 기록 수립
8월 4일 잠실 두산전부터 이날 광주 기아전까지 9회 최다 연속경기 홈런으로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이대호는 이 해에 홈런 44 안타 174 타율 0.364 타점 133 득점 99 장타율 0.667 출루율 0.444로 도루 제외한 타격 7관왕 최초로 기록
2005년 8·15 민족대축전 남·북통일축구경기
2005년 한산대첩 학익진 413년만에 재현
2005년 민족대축전 北대표단 국립현충원 참배
2005년 8·15 민족대축전 남·북통일축구경기
2005년 8월 14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 통일축구는 ‘친선’의 성격이 강한 경기였다. 그러나 동아시아선수권 때의 부진으로 경질론까지 대두됐던 본프레레 감독은 느긋하게 친선을 즐길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6만여 관중이 “오, 통일코리아” “통일 조국” 등을 외치며 양 팀을 응원했지만 선수들은 달랐다. 한국의 3대0 승리에서 알 수 있듯이 전력을 다한 경기였다.
본프레레는 발바닥 부상으로 동아시아선수권 때 거의 뛰지 못했던 박주영을 김진용·정경호와 함께 최전방에 세웠다. 박주영은 왼쪽과 중앙, 최전방과 미드필드를 부지런히 오갔다. 전반 8분과 16분 북한 수비진 뒤로 돌아가는 김진용에게 절묘한 공간 패스를 연결해 슛 찬스를 만들어주고, 동료들과 2대1 패스로 페널티지역 중앙을 파고들어 직접 슛하는 장면도 몇 차례 연출했다. 후반 23분에는 김진규의 공간 패스를 받아 한국의 세 번째 골을 뽑아내는 등 ‘제 모습’을 거의 찾은 모습이었다.
한국의 첫 골은 전반 34분 세트플레이에서 만들어졌다. 북한 페널티지역 오른쪽 밖 모서리에서 김두현이 낮고 빠른 프리킥을 하자 정경호가 북한 골문 앞으로 달려들며 헤딩슛을 했다. 자세를 낮추기 위해 순간적으로 넘어지는 동작이 인상적이었다.
두 번째 골은 2분 뒤 중앙 공격수로 뛴 김진용이 만들어냈다. 미드필드 왼쪽에서 백지훈이 크로스한 공을 향해 김진용이 달려들며 발을 살짝 대자, 공은 크게 튄 뒤 북한 GK 김명길을 넘어 골문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처음 대표로 뽑힌 수원 삼성의 조원희는 오른쪽 윙백으로 공격과 수비에 부지런히 가담, 무난한 데뷔전을 치렀다는 평가를 받았다.
전반전 김영광을 골키퍼로 기용했던 본프레레는 2―0으로 앞선 후반에는 김용대를 뛰게 해 기량 테스트의 기회로 삼았다. 후반 중반 이후에는 이동국, 곽희주, 이천수, 오범석을 차례로 투입해 17일 열리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월드컵 최종예선에 대비했다.
본프레레 감독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동아시아선수권에 비해 선수들 움직임이 월등히 좋았다”며 “자신감을 끌어올린 것이 소득”이라고 말했다. 그는 “오늘 새로 투입된 선수에 만족한다”면서도 “일부 선수는 경기력이 지금보다 더 떨어지면 대표팀 유니폼을 입을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성 발언을 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개막식 남북한선수단 공동입장
2003년 서울지방법원 간첩누명 쓴 수지 김 유족에 42억 원 국가배상 판결
2003년 미국-캐나다 동부 대규모 정전 사태 발생
2003년 8월14일 오후4시 미국 북동부와 토론토 등 캐나다 일대에 대규모 정전 사태가 발생했다 미국 사상 최악으로 꼽히는 이번 정전 사태로 지하철 운행을 중단하고 놀란 주민들이 한꺼번에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큰 혼잡을 빚었다.
정전 사태는 14일 오후 4시(한국시각 15일 오전 5시) 미국과 캐나다 국경의 나이아가라폭포 인근 지역에서 시작돼 미국 뉴욕·뉴저지·코네티컷·매사추세츠·버몬트주 등 북동부 지역과 미시간·오하이오주 등 중서부 지역, 캐나다 온타리오주 등으로 번져갔다.
뉴욕의 존 F 케네디 국제공항 등 미국 내 5개 공항과 캐나다 2개 공항에서 비행기 이착륙이 한때 금지됐으며, 미국 내 4개 주의 9개 원자력발전소도 가동을 중단했다. 뉴욕주와 뉴저지주는 정전 사태가 발생하자 즉각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캐나다 오타와와 뉴욕 브루클린에서 산발적인 약탈이 있은 것을 제외하고는 정전을 틈탄 무질서는 거의 없었다.
2000년 남북, 서울~판문점~평양 첫 광통신망 개통
2000년 `원곡체` 창안한 서예가 김기승씨 별세
원로서예가 원곡 김기승(91)씨가 2000년 8월 14일 자택서 별세했다. 1909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원곡은 중국 상하이 공대를 졸업, 서예에 입문했으며 특유의 힘찬 한글체인 `원곡체`를 창안했다. 원곡은 글자 머리 부분을 찍어 눌러 쓴 이 독특한 서체를 통해 궁중 여인들이 썼다는 반흘림의 궁체와 대비되는 남성적이고 힘찬 서예의 세계를 개척했다는 평을 들었다.
원곡은 1960년 국전 초대전을 가진 이래 무려 33회의 개인전을 열었을 만큼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쳤다. 각종 서체에 능통했던 그는 중국어 성경을 국전에 출품하기도 했으며, 제갈량의 출사표, 노자의 도덕경 등을 작품으로 남겼다. 또 기독교에 심취, 몸에 밴 신앙을 성경구절에 담아 수백점의 서예 작품으로 남겼다. 그는 보수적인 서예가들로부터 공격을 받으면서도 일종의 서예 전위예술이라는 묵영(청묵의 번짐이나 먹물의 농담을 조절해 시각효과를 나타내는 기법)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또 교육자로 후진 양성에도 힘썼으며, `원곡서예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인생을 정리한다는 뜻에서 그가 소장하고 있던 추사 김정희와 오세창, 김구의 글씨를 비롯한 많은 작품들을 아들 명호씨의 모교인 연세대에 기증했으며, 자신의 작품도 이화여대와 고려대, 중앙대 등에 나눠주기도 했다.
2000년 판문점 남북 연락사무소 4년 만에 재가동
1999년 덴마크와 스웨덴을 연결하는 최초의 다리(전장 16km)완공
1999년 8월 14일 덴마크와 스웨덴을 연결하는 최초의 다리가 완공되어 두 나라가 빙하기 이후 7000년 만에 다시 하나로 연결됐다. 스웨덴과 덴마크, 그리고 전 유럽을 연결하는 최초의 다리 개통식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덴마크의 프레데릭 왕자와 스웨덴 빅토리아 공주가 다리 위에서 만나 키스를 나누며 해후의 기쁨을 나눴다. 해저터널 등을 통한 외레순 해협의 연결은 이미 1876년부터 논의돼왔고, 1991년 양국 정부가 교량건설에 합의했었다.
덴마크의 코펜하겐과 스웨덴의 제3도시 말모에를 연결하는 이 다리는 지난 1995년 스칸디나비아 남부 `외레순` 해협에서 착공, 전장 16km 높이 55m, 총 공사비 26억 달러가 소요됐으며, 일반 차량 통행은 2000년 7월부터 허용됐다. 일반 도로와 철로 및 터널 등으로 구성돼 있는 이 다리의 개통으로 유럽 대륙 북단에서 최남단 스페인의 지브롤터 해협까지 육상 여행이 가능하게 됐으며, 해상 페리선으로 1시간 이상 걸리던 현재 덴마크-스웨덴 구간은 15분 거리로 줄어들게 됐다. 이 건축물은 다리 길이만 8km로 세계 10위이며, 자동차와 기차가 동시에 다닐 수 있도록 2층으로 설계돼 유럽의 관광명소로 자리잡았다.
1998년 대한민국 50년 `우리들의 이야기전` 화려한 개막
조선일보사와 예술의 전당이 주최하고 포항제철과 현대그룹이 협찬한 `대한민국 50년-우리들의 이야기`전 개막식이 1998년 8월14일 예술의 전당 미술관 1층 로비에서 열렸다. 개막식에는 김 대통령을 비롯 각계 각층의 인사 3백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우리들의 이야기전에는 1백여명의 전문가와 전시기획팀이 2년여의 준비를 통해 수집한 2천 여점의 사진자료와 3백여건의 희귀문서 5백여점의 실물자료 등이 전시돼, 대한민국 50년의 생생한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개관 첫날인 15일에는 1만3천63명의 관람객이 찾아와 예술의 전당 개관 이래 하루 최고 관람인파를 기록했다. 이 전시는 15일부터 일반공개에 들어가 9월25일까지 휴관없이 열렸다.
1994년 불가리아의 소설가 카네티 사망 - 1981년 노벨문학상 수상
1992년 범국민서명운동본부 해직교사 원상복직에 92만 명 서명 발표
1989년 국사학의 태두 이병도 박사 타계
국사학계의 태두 두계 이병도 박사가 1989년 8월 14일 9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896년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한 이 박사는 해방후 국학 진흥의 구심적 역할을 해 온 원로학자였다.
30대 초반에 국사연구에 뜻을 두었고 90이 훨씬 넘도록 왕성한 연구를 거듭, 국사학을 비롯, 동양사 서양사 고고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깊고 폭넓은 학문적 영향을 끼쳐왔다. 두계는 특히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한국사’ 전7권을 완성하는 등 일제말, 광복후의 어려운 상황에서 국학의 명맥을 잇는 교량역할을 했다. 지난 1980년에는 사재를 털어 ‘두계학술상’을 제정, 후학들의 연구의욕을 북돋우기도 한 두계는 90세 되던 1985년초 ‘한국유학사’를 집필함으로써 학계의 놀라움을 사기도 했다.
해방 후 서울 문리대를 조직하다시피 한 두계는 1926년 ‘이율곡의 입산동기’를 시작으로 총 80여편의 논문을 썼으며 ‘한국사 대관’ 등 27권의 저서를 남겼다. 1980년대 이후 두계의 실증사학은 식민사관의 이름 아래 상당한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국사학계를 비롯, 사회전반에서 일기 시작한 민족사관이 두계의 일제시대 활동상황과 철저한 실증론에 입각한 그의 학문적 방법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그 비판이 그의 학문적 공로와 영향을 축소-감소시킬 수 없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평가이다.
1989년 보타 남아공 대통령 사임
1989년 데 클레르크 남아공 대통령 취임
1989년 트랜지스터 개발한 공학자 윌리엄 쇼클리 사망
트랜지스터 개발로 1956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쇼클리가 1989년 8월 14일 사망했다. 그는 존 바딘, 월터 하우저 브래튼과 함께 트랜지스터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노벨상을 공동 수상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 해군의 대잠수함 전쟁 수행 연구군(硏究軍) 책임자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난 후 벨전화회사로 돌아가 트랜지스터 물리학 연구 책임자가 되었고, 1954~55년에는 국방부의 무기체계평가회의의 보좌관을 지냈으며, 1955년에는 쇼클리 반도체연구소를 세웠다.
1963년에 캘리포니아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최초의 포니아토프좌 공학교수가 되었으나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인종간의 지적 차이에 대해 논의하면서, 흑인들이 백인들에 비해 열등함을 드러낸다고 주장해 물의를 일으켰다.
1988년 문성길 WBA 밴텀급 세계챔피언 획득
22전 20승 2패. 문성길의 프로통산 전적이다. 그는 20승 가운데 16번을 KO로 이겼다. 그가 한국 프로복싱 사상 경량급에서 가장 무서운 주먹을 가진 선수였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수치다.
이 `돌주먹`은 두체급 세계챔피언을 지냈다. 첫번째는 WBA 밴텀급. 1988년 8월 14일인 오늘 태국의 카오코 갤럭시를 물리치고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가 1989년 7월 9일의 3차 방어전에서 갤럭시에게 챔피언을 되돌려주었다. 두번째는 1990년 1월 20일 가나의 나나 코나두를 누르고 따낸 WBC 슈퍼플라이급. 1993년 11월13일 멕시코의 호세루이스 부에노에게 10차 방어전에서 타이틀을 빼앗길 때까지 그는 3년 10개월간 왕좌에 있었다.
1987년 김포공항 부근 화공약품 저장창고에서 화공약품 폭발 사망 10명 중경상 100여명
1986년 서진룸살롱 집단살인 사건
1986년 8월 14일 20대 청년 4명을 생선회 칼로 난자, 살해한 뒤 병원에 버리고 달아난 사건이 발생했다. 유흥가를 무대로 한 조직폭력배 사이에 세력확장을 둘러싸고 빚어진 살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4명이 피살됐다는 점 보다도 범죄의 잔인성에서 충격적이었다. 피살자 4명은 이날 밤 10시 30분쯤 룸살롱인 강남구 역삼동 603호 서진회관에서 다른 조직 폭력배 8명이 휘두른 칼에 살해되어 자동차를 이용, 병원 계단과 수술대에 버려진 것으로 밝혀졌다. 폭력조직배들의 세력다툼으로 벌어진 살인극은 관련자 4명이 사형선고를 받는 등 단죄됐다. 검사의 논고대로 `스스로 인간이기를 거부한 자`들의 끔찍스런 범죄였다.
1986년 파키스탄서 정치폭동. 야당총재 부토 체포
1983년 파키스탄, 시민의 반군정. 불복종운동 시작
1980년 김대중 등 24명 내란음모혐의로 첫 군사재판 받음
1980년 바웬사, 폴란드 레닌조선소 파업 이끌어
재정파탄에 직면한 폴란드 정부가 1980년 7월 고기값을 한꺼번에 30∼60%나 올린 것이 화근이었다.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항의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노도와도 같았던 분위기가 점차 사그라들 조짐을 보였다.
8월 14일, 한 사내가 1만6000여명의 노조원이 파업 중인 폴란드 그단스크의 레닌조선소 담을 넘었다. 10년 전 이 공장에서 해고된 전기공 레흐 바웬사였다. 그 자리에서 파업위원장에 선출된 바웬사는 여세를 몰아 곧 그단스크·소포트·그디니아 3개 지역을 총괄하는 연합 파업위원장에 오른다. 바웬사가 16개 항을 요구하며 정부를 몰아붙이자 궁지에 몰린 정부는 자유노조 설립과 검열 완화, 파업권 승인 등을 양보했다.
파업은 2개월 만에 마침표를 찍었지만 수원지에서 발원한 ‘자유’와 ‘민주화’는 이미 강물로 내쳐 달릴 시내를 이루고 있었다. 자유노조 ‘연대(連帶·Solidarity)’가 결성됐고 바웬사는 ‘연대’를 이끌었다. 베를린 장벽과 철의 장막을 무너져 내리게 한 균열의 시작이었다.
1980년 바웬사, 그다니스크 조선소 파업위원장에 선출
1980년 7월 재정파탄에 직면한 폴란드 정부가 고기값 인상을 발표하자 노동자들이 반발, 파업에 돌입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초반에 보였던 노동자들의 노도와 같은 분위기도 명확한 정치적 프로그램 부재로 와해될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런 상황을 지속적인 노동운동으로 전환시킨 사람이 전기공 바웬사였다. 바웬사는 1970년 불법파업의 중심인물로 당시에는 그다니스크조선소에서 해고된 상태였다. 1980년 8월 14일 조선소 담을 넘어 진입한 바웬사는 파업을 지도하는 파업위원장에 선출됐다. 8월 17일 다른 지역 노동자들의 호소로 바웬사는 그다니스크-소포트-그디니아 3개지역을 총괄하는 연합파업위원장이 됐다.
위원회는 정부에 파업권 승인과 자주관리노조 설립, 검열 완화, 표현의 자유 등 16개 항목을 요구했고 정부는 마침내 8월 31일 연합노조 `연대`의 결성을 승인했다
1975년 방글라데시 쿠데타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 초대대통령 일가족과 함께 암살됨, 외국에 있는 바람에 살아남은 딸 셰이크 하시나는 현 방글라데시 총리(1996년-2001년, 2009년 1월 6일~)
1974년 키프로스 전쟁 다시 일어남
1972년 동독의 일류신 62기 동베를린 공항 이륙도중 추락 156명 사망
1972년 한국에 온 B-29 ‘통일호’ 명명식
1969년 구봉서와 MBC TV '웃으면 복이 와요' 첫 방송
구봉서(1926~)는 한국 코미디의 짧은 역사와 튼튼하지 못한 기반에도 불구하고 무대와 스크린에서, 라디오와 TV에서 수십 년 동안 팬들에게 웃음을 선물한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다.
대동상고 3년생이던 1945년 어느 날, 구봉서는 친구들과 밴드 연습을 마친 후 아코디언을 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한 중년 신사가 그를 불러세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신사는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른 김정구의 형 김용환으로, 유명 악극단인 ‘태평양가극단’의 단장이었다. 구봉서는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아들여 가극단에 입단했다.
무대에서 주로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던 1946년 어느 봄날, 단장으로부터 “무대 위로 올라가라”는 느닷없는 지시가 내려졌다. 당시 가극단은 나운규 원작의 가극 ‘아리랑’을 마포의 도화극장에서 공연하고 있었는데 바보총각 역을 맡은 배우가 연락도 없이 사라져 급한 대로 구봉서를 대타로 올린 것이다. 구봉서는 하도 떨려 무대 위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르게 떠들었는데도 관중은 박장대소했다. 코미디언 구봉서의 인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후 무대에서 바보스러운 몸짓과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기만 하면 관객은 자지러지며 웃음을 터뜨렸다.
구봉서의 출세작은 1958년 4월 19일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오부자’였다. 아버지 역에 이종철, ‘영·웅·호·걸’ 4형제 역에 양훈, 양석천, 김희갑, 구봉서가 출연한 ‘오부자’는 공전의 히트를 쳤고 이 땅에 희극영화의 붐을 일으켰다.
이후 구봉서는 막 개국한 MBC TV 가 야심차게 준비하던 국내 첫 TV 코미디 프로그램인 ‘웃으면 복이 와요’에 참여했다. 그는 1969년 8월 14일(목) 첫 방송을 시작한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자신의 재주를 맘껏 발휘했다.
구봉서는 ‘웃으면 복이 와요’를 통해 당대 코미디계의 아이콘이 되었다. 쌍꺼풀진 눈매에 살짝 얹혀 있는 웃음기와 다소 처진 양쪽 볼에 끼어 있는 심통기가 어울린 그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웃으면 복이 와요’는 한국 코미디 프로그램의 대명사로 군림하다가 1985년 4월 17일 방송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구봉서는 ‘웃으면 복이 와요’가 방송되던 16년 동안 786회 모두 개근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1967년 신민당, 6.8부정선거 백서 발표
1967년 중국 북평에서 반소(反蘇)데모 발생
1965년 한일협정비준동의안 국회 통과
1964년 중앙정보부, 인혁당사건 발표
1964년 8월 14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인혁당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북한 노동당의 지령을 받아 조직된 인민혁명당이 국가변란을 기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표 20일 뒤, 3명의 공안부 검사가 사건 기소를 거부하고 사표를 제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건의 진실성에 의혹이 제기됐다. 검찰은 숙직검사를 동원해 26명을 국가보안법 혐의로 기소하긴 했으나 1개월 뒤에는 14명의 공소를 취하하고 추가로 구속된 양춘우를 포함한 13명의 공소장을 반공법으로 변경하는 등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와중에 고문사실이 폭로되고 국회 법사위도 고문혐의가 짙다는 보고서를 냈다. 이듬해 1월, 서울 형사지법이 피고인 13명 중 도예종·양춘우 2명을 제외하고 박현채 등 11명 피고 전원에게 무죄선고를 내림으로써 무리한 기소였음이 확인됐으나, 이어진 항소심에서 서울고법이 원심을 파기하고 13명 전원에게 유죄판결을 내리자 사법부마저 오락가락하는 게 아니냐는 불만 섞인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대법원의 상고 기각으로 3년형이 확정된 도예종은 10년 뒤 되살아난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끝내 죽음으로 내몰렸다.
1961년 한국-가봉국 국교 수립
1960년 김일성, 남북연방제 제의
1959년 대한노총 분열
1957년 서울시립교향악단 발족
1956년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사망
1954년 수에즈 운하 주둔 영국군 철수
1953년 UN경제사회이사회, 한국 민간인 구제 결의
1947년 파키스탄, 인도로부터 분리 독립
1945년 일본 포츠담선언 수락
1941년 미국-영국. 대서양헌장 발표
영국의 처칠 수상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1년 8월 14일 카나다 동부해안에 정박중인 영국의 최신예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함 위에서 평화롭고 민주적인 국제질서 수립을 목표로 하는 `대서양헌장`을 발표했다.
양국 정상은 5일전부터 선상에서 독일-이탈리아-일본 3국동맹의 전쟁진행방향에 대해 논의했으며 양국의 공통정책을 확인한 이 헌장을 발표함으로써 연합국측의 결속을 과시했다.
`대서양헌장`은 연합국측의 전쟁에 대한 자세와 전후 국제질서의 이념을 8개 항목으로 정리한 것으로 특히 8조는 전쟁을 일으킨 나라에 대해 무장해제와 항구적이고 일반적인 안전보장제도의 확립을 제창했다.
1939년 서울에 인동차(人動車) 등장
1933년 판소리 명창 공옥진 태어남
1925년 프랑스 독일, 관세조약 국경협정 조인
1920년 제7회 앤트워프 올림픽 개막
제1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생생하게 남아있는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1920년 8월 14일 제7회 올림픽이 개막됐다. 어렵게 개최권을 따낸 벨기에는 4년간의 독일 전쟁으로 극심한 피해 속에 힘겹게 대회를 준비했다. 짧은 준비기간 스타디움이 건설됐고, 실내 경기 종목을 위해 지붕만 덮은 체육관과 기타 보조 경기장들이 마련됐다.
대회 사상 처음으로 참가한 남미의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을 비롯 29개국 2천 5백 43명(여자64명)의 선수가 참가 대회출전지역이 확산됐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킨 패전국 독일, 헝가리,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등은 초청되지 않았다.
대회 사상 최초로 대형 오륜기가 높은 깃봉에서 펄럭였고, 참가 선수들을 대표한 올림픽 선서가 도입됐다. 암울한 전쟁의 상처를 지워버리듯 각국 선수들은 화려한 색상의 고유의상으로 단장, 개막식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1917년 중국, 독일 오스트리아에 선전 포고
1907년 남17세, 여15세 이하의 조혼을 금함
1904년 제2인터내셔널 암스테르담 대회
1900년 8개국 연합군 북경 점령, 의화단 진압
영국, 러시아, 일본,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연합국 8개국이 1900년 8월 14일 북경을 점령, 전지역을 폐허로 만들었다. 연합군은 전 북경을 장악, 공사관 구역을 포위하고 있던 의화단과 청조군을 완전 진압했다. 이어 연합군은 3일동안 병사들의 약탈과 방화를 인정했다.
의화단으로 추정되는 중국인들이 모두 살해됐음은 물론 부녀자들에 대한 폭행이 공공연히 행해졌다. 연합군이 북경 진격을 위해 대공항에 상륙한 것은 6월중순이었다. 의화단이 북경을 장악하고 각국 공관을 공격하고 있는데도 청조정은 이를 진압하기는 커녕 조장하는 듯한 태도까지 보였다.
연합군은 한때 의화단의 반격에 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으나 곧 우세한 화력으로 대고 포대를 점령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한때 열강에 선전포고를 할 만큼 기세등등했던 서태후는 꼬리를 내리고 양무파의 이홍장이 협상에 나섰지만 연합군은 진격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1897년 고종 연호를 광무로 결정
1871년 중국 청의 9대 황제(1875-1908) 광서제 출생
1867년 영국의 소설가 골즈워디 출생 - 1932년 노벨문학상 수상
1863년 동학교조 최제우, 최시형에게 전위
1860년 영국 화가/작가 시튼 태어남
1842년 아편전쟁 종결
1841년 과학적 교육의 창시자인 독일의 헤르바르트 사망
1592년 이순신장군, 한산대첩 거둠
1592(임진)년 충무공은 4차 출전하여 10전 10승하였다.
그중에서 제 3차 출전시의 한산대첩은 충무공의 용의주도한 작전계획으로 왜수군의 정예부대를 한산섬 앞바다에서 격파함으로써 모든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임진왜란을 승리하게 하였다.
664년 신라, 지진발생으로 민가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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