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15일 오늘의 역사
2021년 탈레반 아프간 정부 완전 장악
8월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자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20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했다. 미국 역사상 최장기 전쟁이던 아프간전도 20년 만에 막을 내렸다. 바이든 정부는 미군이 철수해도 아프간 정부가 1년6개월은 버틸 것으로 예상하며 8월 30일을 철군 완료 시점으로 제시했지만, 아프간 정부는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의 해외 도피를 시작으로 무너졌다. 탈레반은 8월 15일 수도 카불에 무혈입성했고 카불 주재 미국대사관 관계자들은 쫓기듯 철수했다. 탈레반 정권은 공포 통치를 시작했고, 여성 인권을 짓밟았으며, 통화가치 폭락과 물가 상승으로 인한 심각한 경제난과 좌절감이 아프간엔 만연하다.
2021년 봉오동 전투 승리 홍범도 장군 유해 78년만에 본국 송환
일제강점기 봉오동 전투 승리를 이끈 홍범도(1868~1943) 장군의 유해가 78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을 단장으로 한 특별사절단은 15일 오후 카자흐스탄에 안장된 홍 장군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한다. 홍 장군의 유해는 17일까지 대국민 추모 기간을 거쳐 오는 18일 대전현충원에 정식 안장될 예정이다.
홍 장군의 유해 봉환은 16~17일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국빈 방한을 계기로 성사됐다. 2019년 4월 문재인 대통령의 카자흐스탄 국빈 방문 당시 합의했던 유해 봉환 약속이 2년 만에 결실을 맺었다.
홍범도 장군은 1920년 6월 최진동 장군과 함께 독립군을 이끌고 봉오동 골짜기에서 추격 일본군 157명을 섬멸시키며 항일무장 독립투쟁 역사상 최초의 전면전 승리를 거뒀다. 봉오동 전투는 4개월 뒤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 승리로 이어졌다.
홍 장군은 이듬해인 1921년 연해주로 거처를 옮긴 홍 장군은 '만주 사변'을 계기로 소련군 일원이 됐다. 1923년 군복을 벗고 연해주 집단농장에서 일을 하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카자흐스탄 크즐오즈다 지역으로 밀려났다.
평양 출신인 홍 장군은 김일성의 항일 행적과 비교된다는 이유로 북측에서 소외당했고, 반공을 이유로 남측에서 조차 배척당한 경계인의 삶을 살다가 1943년 10월 크즐오르다에서 숨을 거뒀다.
2020년 해군 잠수함 노르웨이 상선과 충돌
부산 가덕도 인근 해상에서 장보고급 해군 잠수함(1200t급)과 노르웨이 상선이 충돌했다
이 사고는 '교신내용 파악 오류'에 의한 것으로 파악됐다.
충돌 직전까지 해군 잠수함과 노르웨이 상선 호그런던호 사이의 교신은 전혀 없었으며, 실제 교신은 호그런던호와 이 선박의 우측에 있던 다른 해군함정 사이에 이뤄지면서 혼선이 빚어진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해군함정은 사고 직전 "현 침로(직선 항해) 및 속력을 유지하겠다"며 호그런던호에 교신했지만, 호그런던호는 이를 마주오던 잠수함과의 교신으로 오인해 통상적으로 이뤄지는 '좌현(뱃머리 왼편) 대 좌현 통과'로 인식하고 항해 중에 침로를 우현으로 변침했다.
그러나 해군함정과 호그런던호 사이의 교신내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잠수함은 갑자기 근거리에서 교신도 없이 호그런던호가 항로를 트는 것을 확인했고, 이를 급하게 피하기 위해 속력을 내 회피기동을 시도했으나 잠수함 함미(꼬리) 부분이 다 빠져나오지 못하고 호그런던호 뱃머리와 충돌했다.
이 충돌로 인해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잠수함은 스크류 4개가 떨어져 나갔고 수평타와 음탐기 등이 손상된 것으로 확인됐다. 호그런던호는 뱃머리 하단에 구멍이 뚫렸고 뱃머리 정중앙 부분 3곳이 휘어지는 피해를 입었다.
2011년 뉴질랜드 오클랜드 82년 만의 폭설
2010년 광화문 1865년 원형으로 복원, 개문식(開門式)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이 1865년 고종 때 중건(重建)된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이번 광화문 복원은 1990년부터 20년간 진행된 제1차 경복궁 종합정비 사업의 마무리 작업으로 2010년 8월 15일 ‘제65주년 광복절 경축식’의 식전 행사로 진행되었다.
고종 2년(1865년) 경복궁 중건시 만들어진 현재의 광화문은 1926년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경복궁 동쪽으로 옮겼다. 광복 후 6·25전쟁 때 불타버린 것을 1968년 경복궁 정면으로 옮겨 복원했는데, 이때 문루(門樓)는 철근 콘크리트로 세워졌고 위치도 원래 자리에서 북쪽으로 11.2m, 동쪽으로 13.5m, 경복궁 중심축에서 3.75도 틀어졌다. 이번 복원을 통해 문화재청은 원래 자리에다 옛 방식대로 나무로 문루를 다시 세우고, 자료 고증과 발굴 조사 결과를 토대로 복원 공사를 진행하였다.
이번에 공개된 주요 복원 건물은 광화문을 비롯해 부속 건물인 용성문(用成門), 협생문(協生門), 동·서 수문장청(守門將廳), 영군직소(營軍直所) 등 7동이다. 또한 복원된 광화문 현판(懸板)은 1968년 복원시 만들어져 걸려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쓴 한글 편액 대신 고종 때 경복궁 중건시 영건도감 제조(提調·책임자) 임태영(任泰瑛)의 현판을 디지털 복원해 사용했다.
이번 광화문 복원으로 제1차 경복궁 종합정비 사업은 사실상 마무리 되었다. 이후 2011년부터 2030년까지 궁궐의 생활 및 문화환경을 복원하는 제2차 경복궁 종합정비 사업이 진행될 예정이다.
2009년 신종플루 첫 사망자 나옴
2009년 말까지 감염자 60만 명 이상 사망 176명, 208개 나라에서 감염자 발생 사망 1만 명
2005년 남북 이산가족 첫 화상상봉
광복 60주년을 맞은 15일, 남북 이산가족 40쌍이 50인치 대형 TV모니터를 통해 반세기 만에 혈육을 만나는 감격을 누렸다. 이날 화상(畵像) 상봉은 서울 중구 남산동 대한적십자사, 부산, 인천, 대전 등 전국 6개 상봉장과 북측 평양 상봉장을 화상으로 연결해 이뤄졌다. 화면에 나타난 부모·형제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통곡, 화상 상봉장이 눈물바다를 이루기도 했다.
남측 대한적십자사(한적)와 북측 조선적십자회는 이날 오전 7시 40분쯤 서울 한적 본사와 평양을 잇는 화상상봉 시스템을 개통했다.
이어 8시부터 남쪽의 서지염 씨(95세)가 북에 있는 두 아들 황부(64세)ㆍ황모(61세)씨와 딸 황실 씨(59세)를 화면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는 등 남과 북의 40가족은 이날 대한적십자사 본사를 비롯한 전국 11개 장소에서 평양 상봉장을 화면으로 연결, 떨어져 살던 가족들과 차례로 만났다.
화상 상봉시스템이 가동되기까지는 수많은 난관이 있었다. 남북한의 통신 환경이 크게 다르고, 분단 이후 처음으로 통신망을 직접 연결하는 데 복잡한 작업 절차를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화상상봉 시스템 구축에 동원된 인원만 하루 평균 45명에 연인원이 20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2005년 8·15 민족대축전
광복60돌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8·15민족대축전’의 둘째 날인 15일 서울 시내 곳곳에서 시민·사회단체들의 크고 작은 집회가 열렸다. 보수·진보단체들이 각기 집회를 열어 광복 60돌을 기념하면서 시내 전역에서 하루 종일 구호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보수단체들은 이날 ‘한미동맹 강화’ 등을 주장한 반면, 진보단체들의 집회에서는 ‘반전·반미’ 구호로 맞섰다. 경찰은 대학로 29개 중대, 광화문 15개 중대, 서울역 9개 중대 등 5000여명을 행사장 주변에 배치했으나 우려하던 보수·진보단체 간 충돌이 없었다.
반핵반김 국민협의회 회원 2000여명은 오후 3시부터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광복 60주년 자유통일 국민대회’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전날 북한 대표단이 국립현충원을 참배한 일을 두고 “과연 그들이 자격이 있느냐”며 “민족의 분단을 가져온 김정일 정권을 타도하고, 국내에 있는 친북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대표 정순희씨가 “정부차원의 대북지원은 핵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국제사회와 연대하여 싸워야 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읽기도 했다.
참석자들은 집회 중간 중간 ‘친북세력 북한으로 추방하자’ ‘6·25 망각하면 6·25가 다시 온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보수단체인 국민행동본부 회원 2500여명은 낮 12시부터 서울역 앞 광장에서 ‘광복60주년 자유통일 국민대회’를 열어 정부의 대북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집회 참석자들은 “광복 60주년을 맞아 남북한의 이단세력이 서울을 무대로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부인하려는 굿판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애국 시민들이 총단결해 좌익세력을 몰아내자”고 말했다. 이들은 또 국가의 정통성 수호를 위한 행동강령으로 ‘헌법을 위반한 6·15 선언 폐기 및 관련자 처벌’, ‘대북 전력송전 반대’, ‘북한인권 개선’ 등을 주장했다.
집회 도중 한 참석자가 무대 쪽으로 뛰어나와 인공기를 불 태우려고 했으나 “위법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변 사람들의 저지로 무산됐다.
이날 집회에는 전날 남북통일축구대회가 열린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주변에서 보수단체 회원들이 태극기를 나눠주다 저지당한 것에 항의하는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한편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 회원 200여명은 오후 1시부터 서울 탑골공원 앞에서 ‘태평양전쟁 희생자 위령제’를 열었다. 이들은 종로를 거쳐 일본대사관까지 행진했다.
진보단체들의 모임인 전국민중연대·통일연대는 오전 10시 30분 대학로에서 1만 2000여명(경찰 추산)이 모인 가운데 ‘반전평화 자주통일 범국민대회’를 열었다.
집회 참석자들은 낮 12시 10분쯤부터 종로5가를 거쳐 종각까지 약 2.5㎞의 거리 행진을 했다. 8·15 광복을 상징하는 815명의 풍물패들이 앞장선 가운데, 참석자들은 대형 한반도기를 비롯해 푸른색·분홍색 등 삼각 깃발을 들고 넘실대는 파도의 모습을 나타냈다. 한반도 통일과 평화를 상징하는 모형배와 ‘통일815’ 열차 조형물도 거리행진에 등장했다.
한편 ‘8·15민족대축전’의 첫날인 14일 서울 시내 곳곳에서는 북측 대표단을 환영하는 단체의 집회와 이를 반대하는 단체들의 집회가 각각 열렸다. 그러나 우려됐던 양측의 충돌은 없었다.
2003년 조오련, 한강 600여리(250km) 열흘 만에 종단 성공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53)씨가 한강수계 600여리(250km)를 역영해 15일 오후 골인지점인 서울 여의나루 선착장에 도달했다.
조씨는 5일 오전 북한강 최북단인 강원도 화천군 민통선 북방 10km 지점에서 물에 뛰어들어 2시간9분을 헤엄친 끝에 12km 떨어진 평화의 댐에 도착, 첫날 일정을 마쳤다. 6일부터는 화천댐·춘천댐·의암댐·청평댐·팔당댐을 거친 뒤 광복절인 15일 여의도 선착장에 도착해 대장정을 마쳤다. 하루 평균 7시간씩 수영하는 강행군이었다.
조씨는 1970년, 1974년 아시안게임 남자 자유형 400m와 1500m를 각각 2연패했으며, 은퇴 후 대한해협과 영국 도버해협을 수영으로 건넜다.
동계 바다수영 부문서 기네스 기록 두 개를 갖고 있는 중국 출신의 왕강이(王剛義·47)가 2001년 12월 22일 ‘2002월드컵 성공 개최’를 기원하며 뚝섬에서 한강을 헤엄쳐 건너는 것을 지켜본 뒤 한강 주파를 결심했다.
조씨는 7월 말부터 강원도 파로호 선착장 인근에 캠프를 차리고 죽마고우인 지봉규 수영감독 등과 함께 훈련 해왔다
2001년 `6·15 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 8·15 공동행사`에 참석한 일부 남측 대표단, 북한의 조국통일3대헌장 기념탑에 참배해 물의
2001년 북한에서 개최된 `6·15 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 8·15 공동행사`에 참석한 남측 대표단, 북한 통일탑 개·폐막식 행사에 참석해 파문
김일성 생가라는 만경대에서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이라고 써 파문을 일으킨 동국대 강정구 교수가 김포공항에 들어오면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있다.
`6·15 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 8·15 공동행사` 참석차 2001년 8월 15일 평양을 방문한 남측 대표단 중 일부가 당초 정부와의 약속을 어기고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통일탑)` 앞에서 열린 개·폐막식 행사에 참석해 파문이 일었다.
대표단은 정부에 "기념탑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방북했었다. `조국통일 3대 헌장`이란 7·4 공동성명에서 천명됐던 `조국통일 3대 원칙`과 1980년 노동당 6차 대회에서 밝힌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1993년 제9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발표된 김일성의 `민족대단결 10대 강령`을 뜻하며, 기념탑은 이를 기념, 선전하기 위한 탑이다. 또 방북단 중 강정구 동국대 교수는 만경대(김일성 생가)를 참관하면서 방명록에 "만경대정신 이어 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는 글을 남겨 많은 국민들에게 격심한 통분을 안겨주었다. 방북단의 상당수 인사들도 "돌출행동이자 객기"라며 비판했지만, 정작 통일연대측은 "연방제를 불온시해선 안되고, 통일탑 행사 참석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고 나서 南南(남남)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
정부는 "대표단 4명으로부터 출발 하루전 각서를 받았고, 이같은 사실을 대표단 전원에게 알렸다"며 발뺌했지만, 통일문제에 대한 왜곡된 인식은 물론, 현행법마저 무시하는 인사들까지 정부가 서둘러 방북 승인을 했다는 점에서 `예고된 사고`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더구나 통일부가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로 규정된 한총련과 범민련 남측본부 간부들의 방북을 불허해야 한다는 검찰 등 공안당국의 반대의견을 묵살하고 방북 하루전 당초의 `불허`에서 `승인`으로 번복한 것으로 알려져 우리 정부의 안이한 대북인식이 위험수준에 이르렀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이들이 귀환하자 경찰과 국정원은 16명을 공항에서 긴급체포, 조사한 후 이들중 姜 교수를 포함 7명을 구속했다. 姜 교수는 연행 前 김포공항에서 "만경대 정신이라는 개념을 언론이 확인도 없이 멋대로 왜곡·과장해 문제 삼은 것"이라고 밝히며 책임을 언론에 돌렸다
2000년 남북 이산가족 200명 서울-평양에서 50년 만에 혈육 상봉(-18일)
남북한의 이산가족들이 광복절인 2000년 8월15일부터 18일까지 3박4일간 서울과 평양에서 애타게 그리던 혈육들을 만나 울고 또 울었다. 북한 고려항공 특별기편으로 도착, 서울 쉐라톤 워커힐 호텔을 숙소로 정한 북한 방문단 100명은 15일 오후 4시 40분 서울 종합전시장(COEX) 3층 컨벤션 홀에서 그리던 가족을 50년 만에 처음 만났다.
평양으로 간 남한 방문단도 고려호텔에 짐을 푼 뒤 호텔 2-3층에 마련된 단체 상봉장에서 부인과 아들, 딸, 형제들과 감격적인 상봉을 했다. 상봉장은 반세기의 슬픔을 한꺼번에 토해내는 이산가족들의 울음소리로 순식간에 통곡의 바다로 변했다. 상봉가족들은 끌어안고 울다가 얼굴을 바라보고 다시 흐느꼈다. 잃어버린 50년 세월을 목이 메여 말을 찾지 못한 채 이들은 그렇게 슬퍼하고, 감격하고, 서러워했다.
상봉단은 3박4일 간의 일정을 마치고 8월 18일 대한항공편으로 각각 귀환했다.
2000년 북한 민항기 50년 만에 한국에 첫 취항
분단 반세기 만에 북한 민항기가 한국에 첫 취항, 남북간 민간 항공교류 시대를 열었다. 북한 고려항공 특별기 816편이 2000년 8월 15일 오전 10시 59분 이산가족 상봉자 100명과 수행원 30명, 기자단 20명 등 모두 151명을 태우고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고려항공 특별기는 이날 오전 10시 평양 순안공항을 출발, 서해안으로 빠져나가 남하해 한국 영공으로 들어오는 항로를 이용했다. 이 항로는 지난 6월 남북정상회담때 처음 이용됐었다. 특별기는 오후 1시쯤 남측 이산가족 상봉 방문단 151명을 태우고 김포공항을 출발, 오후 2시쯤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1998년 이란 성지순례단, 18년 만에 처음으로 양국 국경선을 통해 이라크를 방문
1998년 북아일랜드 폭탄테러로 30년 만에 최대 유혈참극 발생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체결 4개월 만인 1998년 8월 15일 북아일랜드 오마시에서 차량폭탄 테러사건이 발생, 28명이 숨지고 2백20여명이 부상했다.
이날 사건은 1969년 이후 한 세대에 거쳐 3천5백여명이 희생된 북아일랜드 사태 중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의 참극이었다. 폭탄은 한 언론기관에 사전경고가 전달된 뒤 40분쯤 지난 오후 3시쯤 벨파스트 서쪽 80㎞ 지점인 오마시 중심가 대형 수퍼마켓 부근에서 일어났으며, 신·구교도가 함께 희생됐다.
경찰은 범인들이 사전에 경고한 지점으로부터 시민들을 대피시켰으나, 오히려 시민들이 피신해 있는 번화가에서 차량이 폭발해 인명 피해가 더욱 컸다. 경찰은 신페인당을 반대해 온 6명의 용의자를 체포했다.
1998년 정부, 건국 50주년 맞아 총 7천7명 특별사면·복권·가석방
정부는 건국 50주년을 경축해 권노갑 전 의원과 박노해씨 등 7천7명에 대해 특별사면, 복권, 가석방 조치를 15일자로 단행한다고 14일 발표했다. 이번 사면으로 수감중인 2천1백74명이 1998년 8월15일 오전 10시 전국 교도소별로 일제히 석방됐다.
형선고 실효와 특별복권 조치로 과실범과 행정법규 위반자 및 기타 집행유예, 선고유예 기간중에 있는 4천8백16명도 이날을 기해 ‘정상시민’으로 되돌아 갔고, 공안사범 9명과 행형 성적이 우수한 일반 형사범 4명 등 13명은 감형됐다.
이날 출소한 인사들 중에는 사노맹 사건의 박노해씨와 백태웅씨, 중부지역당 사건의 황인오-인욱 형제. 김낙중씨 등 공안사범 94명과 사채시장의 ‘큰손’이었던 장영자씨와 1천억대의 부도를 내고 복역중이던 박성섭 덕산그룹 회장 등이 포함돼 있었다.
법무부는 이와 함께 형집행정지 혜택을 입은 외국인 수감자 77명도 이날부터 순차적으로 석방, 본국으로 송환조치키로 했다.
1997년 김영삼 대통령 8.15경축사 통해 한반도 평화정착 4대 방향 제시
1997년 뮤지컬 `명성황후` 국내 공연사상 최초로 뉴욕 공연
대형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이문열 원작-김희갑 작곡-윤호진 연출)가 1997년 8월 15일 미국 뉴욕 링컨센터에서 공연돼 국내 공연 사상 첫 브로드웨이 입성의 개가를 올렸다.
`명성황후`는 1천5백여 관객들의 기립 박수 속에 첫 공연을 마친 후 24일까지 10일간(총12회) 총 2만5천여명의 관객이 다녀갔다. 교포가 아닌 외국인 관객도 40%나 차지할 정도였다. 첫 공연 관객들은 뉴욕주재 한국 총영사관의 초청을 받은 뉴욕 주재 각국 외교사절과 한국인 초청 관객들이 대부분을 이뤘다.
사상 처음으로 뉴욕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한국산 뮤지컬 `명성황후`에 미국 언론의 호평이 쏟아졌다. 공연 성패의 시금석 구실을 할 만큼 공연평에 절대적 권위를 지닌 뉴욕타임스는 21일자에서 `명성황후`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황금빛 같은 조명과 기발한 무대 세트, 화려한 의상으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명성황후 주역을 맡은 김원정(명성황후)과 유희성(고종황제), 이재환(대원군)이 놀랄 만큼 강력하고 감정이 풍부한 목소리를 들려줬다고 전했다. 특히 마지막 노래 `백성이여 일어나라`는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나 인터내셔널가처럼 대단한 스펙터클이었다고 극찬했다.
1996년 일본 행동파 지성 마루야마 마사오 사망
1995년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시작, 중앙돔 상부 첨탑 철거
철거냐 보존이냐로 논란을 빚었던 구조선총독부 건물의 첨탑이 1995년 8월 15일 오전 9시 21분 광복 50주년 경축기념식을 기해 잘려내졌다.
일제에 의해 1926년 건립된 이래 19년동안 일제식민통치의 본거지로서, 또 광복후엔 제헌국회 개회식과 초대 대통령 취임식장과 정부청사로 쓰이며 우리 현대사의 영욕을 지켜봤던 이 건물은 1968년 10개월 만에 상징적으로 사망선고를 받았다.
11.4톤에 달하는 첨탑은 독립기념관에 이전, 보관되고 구총독부 청사에 대한 본격적인 철거작업은 현 국립중앙박물관이 조선왕궁역사박물관으로 이전한 후인 1996년 상반기부터 시작해 연말까지 완료하기로 했다. 박물관 수장 유물들은 용산에 새 국립박물관이 설립될때까지 현상태로 보존하기로 했다.
1992년 범민족청년학생연합회 결성
1991년 마다가스카르 대통령 친위대 반정부시위대 138명 학살
1989년 이내창군 의문사
1989년 8월 15일 전남 여천군 삼산면 덕촌리 거문도 앞바다에 한 구의 변시체가 떠올랐다. 당시 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이었던 이내창씨였다. 서둘러 조사를 끝낸 경찰은 나흘뒤인 19일 이씨의 폐에서 플랑크톤이 검출된 것으로 보아 ‘바닷가 암석 해변을 거닐다가 실족해 익사했다’고 발표했다.
당장 의혹이 제기됐다. 이씨의 주검에 7군데나 난 피하출혈 흔적과 평소 약속시간을 잘 지키기로 소문난 이씨가 사건 당일 광복절 행사가 있었고 다음날 총장과 면담상태가 잡힌 상태에서 연고도 없고 생전 가보지도 않은 그 먼 곳까지 간 이유 등등 의문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이렇게 시작된 의혹은 학생과 교수, 교직원과 재야단체들로 구성된 ‘사인진상규명을 위한 범 중앙인 공동대책위’를 낳았고 대책위는 의혹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씨가 사고 전날 안성의 학교로 찾아온 남녀 2명을 따라 나섰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들 중 한명이 안기부 인천직원이라는 사실이 폭로됐다. 또 다른 인물 역시 군인이라는 것이 알려졌다. 이처럼 의혹에 둘러싸인 이씨의 죽음은 석달전 의문의 변시체로 발견된 조선대 이철규군 사건과 맞물려 정권퇴진운동으로 이어졌지만 아직도 명확한 사인이 규명되지 않고 있다.
1989년 임수경양과 문규현 신부, 전대협 대표로 평양축전에 참가한 후 판문점 통해 귀환
1987년 독립기념관 개관
1983년 독립기념관 천안에서 기공
1979년 국방부 국군방송 FM송신 시작.
1979년 보신각 완공
1979년 캄보디아 헹 삼린 정권, 폴 포트 정권 4년동안 300만명이 학살되고 사원 2800개소가 파괴됐다고 발표
1975년 방글라데시 군부쿠데타 무지브라 라만 대통령 피살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서울지하철 1호선이 1974년 8월 15일 개통됐다. 이날 오전 11시 청량리 지하철역에서 개통식을 갖고 첫열차 108호가 청량리-서울역간의 역사적인 첫운행을 시작하면서 지하철시대가 시작됐다. 서울에 고속대량수송수단인 지하철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였다. 그러다 1971년 4월 12일에 착공, 3년4개월 만에 완공된 서울 지하철은 내자 2백36억원과 외자 94억원 등 총3백30억이 소요됐다. 지하15m를 달리는 지하철은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서울역-청량리 간 7.8km를 18분에 주파한다. 이로써 우리는 일본, 중국에 이어 아시아에서 3번째로 지하철을 보유한 나라가 됐다.
1974년 새마을호 운행 개시
1974년 공군 0-2A 관측통제기 도입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망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
1974년 8월 15일 10시23분 국립극장에서 거행된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이 청중석 뒤쪽에서 뛰어나와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으나 총탄이 빗나가 박대통령 대신 육영수 여사의 머리에 명중 절명했고 합창단의 한 여학생이 유탄에 맞아 숨졌다.
현장에서 체포된 문세광은 재일 조총련계 한국교포 2세로서 1974년 5월 북한의 대일공작선인 만경봉호에서 대통령을 저격하라는 지령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범인이 사용한 권총이 일본 경찰서에서 훔쳤다는 점, 범인이 소지한 여권이 위조여권이었다는 점, 일본인이 공범으로 끼어있다는 사실 등으로 인해 한때 한일관계가 불편해지기도 했다.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된 후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 당하였다.
육영수 여사의 유해는 8월 19일 국립묘지에 안장됐습니다
1971년 바레인, 영국으로부터 독립
1970년 남산 1호터널 개통
1970년 박정희 대통령, 남북통일. 8·15선언 발표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제25주년 광복절기념 경축사에서 "북한은 무장공비를 남파해 폭력으로 대한민국을 전복하고 적화통일하려는 야욕을 버리고 이를 실천하면 남북한에 가로 놓인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 나갈 수 있는 획기적이고도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은 많은 선행조건을 제시했지만 결과적으로 정부의 대북한정책에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세계적 긴장 완화 추세와 `닉슨 독트린`에 따른 미국에 대한 정책 변화와 일반 대중들의 장기 집권에 대한 반발 등 국내 정세의 불안이 이같은 대북 선언의 배경이 됐다.
1970년 김용섭, ‘조선후기농업사연구’ 출간
해방 이후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명저를 꼽을 때 으레 첫 머리를 장식하는 것이 김용섭(1931~)의 ‘조선후기농업사연구’다. 학문적 성취가 뛰어나거나 학계에 큰 영향을 끼친 학자를 거론할 때도 김용섭이 빠지지 않는다. ‘조선후기농업사연구’는 해방 이후 우리 사회에서 제시된 가장 영향력 있는, 그리고 우리 역사 및 사회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이론 중 하나인 ‘내재적 발전론’을 체계화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조선 후기 사회의 치밀한 농업 사료 분석을 통해 한국사를 정체적이고 타율적인 역사로 보아온 식민사학을 바로잡고 한국사의 주체적인(내재적인) 발전과정을 해명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김용섭은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청소년기에 6·25전쟁을 겪으면서 남북분단과 민족상잔의 역사적 배경을 규명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역사학을 선택했다. 서울대 역사교육과(1951~1955)를 졸업할 즈음 “정체성 이론을 극복하려면 실증을 통해서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농업 국가인 조선 후기의 농업사 연구를 중심으로 해야한다”며 자신의 학문적 방향과 목표를 세웠다.
김용섭이 역사학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린 논문은 전봉준의 재판기록인 ‘공초’를 통해 동학농민의 성격을 구명한 ‘동학난 성격고’(1957)였다. 이 고려대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동학농민혁명에서 제기된 지주제의 해체와 토지 균등 경작에 주목한 그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조선 후기 농업사회의 변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농민 봉기와 동학농민전쟁 등 중세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 전환되는 사회변동의 핵심적 원인을 농업구조의 변화에서 찾아낸 김용섭은 중세 봉건사회의 해체과정을 분석하기 위한 연구자료로 토지대장인 ‘양안(量案)’과 호적대장을 채택했다.
그는 양안과 호적대장에 기록된 지주와 경작자의 신분, 토지매매 기록, 토지 경작형태 등을 통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중세 봉건적인 지주와 전호(소작인)의 관계가 어떤 형태로 변모되었는지를 규명했다.
김용섭이 내재적 발전의 강력한 증거로 제시한 것은 새로운 사회세력으로서 ‘경영형 부농’이었다. 경영형 부농이란 봉건 지주층의 땅을 차경(借耕)한 뒤 주로 임노동을 이용해 농업생산, 농업경영에 전력해 부농이 된 이들을 말한다.
1970년 8월 15일과 1971년 1월 30일 일조각에서 각각 1권, 2권이 나온 ‘조선후기농업사연구’는 첫 번째 결산이었다. 그의 연구 성과는 일제시대의 식민사관 뿐만 아니라 서구 중심의 역사관도 극복하며 한국사의 독자성과 ‘내재적 발전론’을 형성하는 탄탄한 기반이 되었다. 또한 ‘조선후기농업사연구’는 해방 후 한국 경제사 최대의 업적으로 평가받는 명저로 자리매김했다.
김용섭은 ‘조선후기농업사연구’에 그치지 않고 ‘한국근대농업사연구’(1975), ‘한국근현대농업사연구’(1992), ‘한국중세농업사연구’(2000) 등을 발표해 ‘내재적 발전론’을 심화·확대시켰다.
한국 자본주의의 맹아가 이미 조선시대에 싹트기 시작했다는 ‘내재적 발전론’은 ‘식민지 수탈론’과 연결되어 1980년대 말까지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성격 규정으로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다.
1970년 병무청 발족
1969년 우드스톡 축제
미국이 1969년 8월15일, 사랑과 평화를 호소하는 젊은이들이 뉴욕 북서쪽의 작은 마을 베델의 한 농장에 몰려들었다. 훗날 ‘우드스톡 축제((Woodstock Art and Music Fair)’로 불린 ‘평화와 음악의 사흘’이라는 록 축제가 15일부터 3일간 열리고 있는 곳이었다.
참가자는 당초 주최측이 예상한 5만명을 훨씬 뛰어넘어 40만명을 헤아렸고, 대회장 주변 32km는 이들이 타고온 자동차ㆍ자전거 등으로 가득 메워졌다. 조운 바에즈, 재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 등 당대 최고의 포크ㆍ록의 영웅들이 참가해 흥을 돋우는 가운데 학생운동가ㆍ히피 등 축제 참가자들은 반나(半裸) 상태로 강렬한 비트에 몸을 맡긴 채 사흘 밤낮동안 평화를 노래하고 반전을 부르짖었다. 히피이즘적 저항문화가 록과 결합한 절정의 자리였다. LSD와 마리화나가 공공연하게 매매됐고, 출산 여성과 심장마비로 죽는 사람도 생겨났다.
2번의 폭우, 어설픈 설비, 빈약한 식ㆍ음료 어느것 하나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젊은이들은 훗날 ‘평화운동의 전설’로 불릴 축제의 추억을 가슴에 안고 돌아갔다. 그리고 축제의 성공을 그들의 승리로 해석했다. 조운 바에즈가 ’60년대 진흙탕의 반영’이라고 평한 것처럼 축제는 반항적이고 낙관적이며 방종한 60년대를 상징했다. 젊은이들은 ‘우드스톡 축제’를 자신 세대의 연대(連帶)의 상징으로 받아들였고, 스스로를 ‘우드스톡 세대’라고 불렀다. 법정에 선 한 젊은이는 자신은 미국인이 아니고 ‘우드스톡 네이션의 일원’ 즉 ‘소외된 젊은이 나라의 국민’이라고 진술할 정도였다.
1968년 정치활동 정화법 시효만료
1967년 벨기에 화가 르네 마그리트 세상 떠남
1966년 새돈 500원권 유통
1966년 나트랑에 주월(駐越)한국군사령부 신설
1966년 KBS TV 20시 기해 전국 TV방송 실시.
1961년 농업협동조합 발족, 중소기업은행 발족.
1961년 동독 군인 콘라트 슈만, 서독으로 탈출
이틀 전부터 동서 베를린간의 통행이 차단되고 있었다. 열아홉 살의 동독 병사 콘라트 슈만은 철조망 부근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명령서에는 ‘국경을 수비하라’고 쓰여 있었다. 다른 사람의 탈주를 저지해야 할 그가 1961년 8월 15일 서베를린으로 탈출했다. 완전무장을 한 군복차림으로 자동권총을 어깨에 메고 대담하게 철조망을 뛰어넘어 자유의 나라로 넘어왔다.
다음날 그 모습은 전세계 신문의 일면을 장식했다. 철조망을 뛰어넘는 도약의 순간을 카메라가 잡은 것이다.
베를린 장벽 건설은 전후 독일의 가장 암울한 비극이었다. 동독에서는 1953년 6월 17일에 발생한 동베를린 노동자의 봉기 이후, 국민과 정치 체제와의 알력이 확대일로를 걷고 있었다. 1959년 한 해 동안 무려 14만 5천명이 서독으로 망명했다. 1960년에는 젊은층을 중심으로 5만 6천명이 동독을 등졌다. 1961년 7월 한 달동안만 망명자수가 3만을 넘어서자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 울브리히트는 마침내 제동을 걸었다. 장벽건설을 명령한 것이다. 장벽설치가 시작된 것은 8월 13일 새벽 2시였다. 46킬로미터에 이르는 베를린 시내 지역 경계선을 따라 장갑차가 배치되고 경찰, 군인, 민병대가 출동했다. 그들은 포석과 포장을 떼어내고 철조망을 둘러쳤다. 작업은 며칠 동안이나 계속됐다.
슈만은 그 경계선의 감시를 맡고 있었다. 동베를린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 놀러왔다가 장벽설치로 돌아가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던 한 어린이의 애절한 소식과 자신의 사상성을 시험한 동독 비밀경찰의 비열한 행위에 분노한 것이 슈만이 탈출을 결심한 이유였다.
1960년 콩고, 프랑스로부터 독립
1955년 경부선 통일호 개통(서울-부산 9시간 30분)
1954년 전국 댄스홀 폐쇄령
1953년 6.25전쟁으로 부산으로 옯겼던 대한민국정부, 서울환도를 선포
1953년 `Korea Republic(現-코리아 헤럴드)` 창간
1952년 네델란드 인도네시아 서이리안 조약 조인
1949년 헝가리 인민공화국 선언
1949년 서울특별자유시를 서울특별시로 바꿈
1948년 한글맞춤법통일안 발표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하지중장 군정 폐지 발표
1945년 8월 14일 정오,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제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었고, 다음 날인 8월 15일 한국이 독립을 맞이했다.
그러나 '자주 독립'을 성취하지 못함으로서 독립과 동시에 북위 38도를 경계선으로 남과 북에서 각각 미국과 소련이 군정이 실시되었다.
1946년 12월 이승만이 미국을 방문,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추진한 결과 그 해 9월에 한반도 문제가 유엔에 정식으로 상정된다.
국내에서도 이승만 중심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한민당과 연대하여,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추진하는 가운데 11월 유엔 감시 하에 총선거 실시라는 안이 가결되었다.
이에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통일 정부 수립을 촉구했다.
그러나 19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하에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으며, 788만 전체 유권자 가운데 90.8%가 참여한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86석, 한국민주당 38석, 대동청년당 12석 등의 의원이 선출되었다. 5월 31일 제헌의회 개원, 7월 17일 헌법 공포에 이어, 7월 20일 국회에서 실시한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해방 3주년을 맞이한 1948년 오늘 공식적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됩니다.
3년간의 미 군정을 끝내고 이승만 박사와 이시영 선생을 정.부통령으로 한 제1공화국이 탄생 했다.
1947년 인도공화국 수립(초대 수상 네루)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6월 3일 인도와 파키스탄을 분리해 독립시키겠다는 마운트배튼 영국주재 인도 총독의 발표가 시작이었다. 마운트배튼 계획은 영국령 인도를 이슬람교 신봉 주와 힌두교 신봉 주의 2개 자치령으로 분리, 각각 제헌국회를 설립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전날 네루는 국회의사당에서 행한 연설에서 `세계가 고요할 때, 한밤의 종소리가 울릴 때, 인도는 생명과 자유를 향해 잠을 깬다. 오랫동안 억압되었던 한 나라의 혼이 크게 울려퍼질 것이다`고 역설했다.
독립과 동시에 네루를 수상 겸 외무장관으로 하는 내각이 발족하고 제헌의회도 탄생했다. 인도를 지배해 온 영국의 총독은 명목상의 지위로 되어 마운트배튼은 1948년 6월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
한편 파키스탄은 하루전 인도를 사이에 두고 동서 양쪽 2지역으로 갈라진 영토를 소유한 국가가 되었다.
1946년 서울특별자유시 헌장 제정
1945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결성
일제가 패망한 1945년 8월 15일, 여운형 등 국내에서 활동하던 항일독립운동세력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를 결성했다. 이들은 일제하인 1944년 8월 이미 국내 비밀결사조직인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한 바 있다. 위원장에는 여운형, 부위원장에는 안재홍을 선출했다.
여운형은 이날 아침 조선총독부 엔도 정무총감과 회담하고 국내정치범 석방, 치안유지, 재한일본인의 생명과 재산보호 등을 합의하고 사실상의 치안권을 인수했다.
8월 21일에는 건국강령을 발표하고 중앙과 지방조직에 박차를 가해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충하면서 박헌영 등 공산주의자들과도 제휴했다. 9월15일에는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발표하는 등 해방공간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으나 미군이 이들을 인정하지 않고 우익 진영이 참여를 거부해 결국 와해되고 말았다.
1945년 프랑스 페탕원수에 사형 결정
1945년 일왕 무조건 항복 선언, 대한민국, 일제에서 해방
1945년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일본의 항복을 방송했다. 잡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그것이 일본의 패전을 알리는 방송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신문사 벽보에는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했고, 한민족의 독립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국은 해방의 감격에 흥분했고 환호했다. 오전까지만 해도 곳곳에서 보였던 국민복과 몸빼 차림은 자취를 감췄고, 흰 옷 입은 시민들만이 거리를 메웠다. 사람들은 일장기에 푸른색을 덧칠해 급조한 태극기를 들고 울며불며 뛰어다녔고, 하루 종일 전차에 매달려 만세를 불러댔다. 35년 동안의 일제 통치는 이렇게 그 막을 내렸다.
그러나 한국인은 해방 후에도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일장기가 휘날리는 총독부에서 일본군이 미군에게 정권을 이양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서울에 입성한 미군은 9월 9일 일본 총독부로부터 항복문서에 서명을 받았다. 사실상 한국의 해방은 형식적인 해방일 뿐, 힘은 일본으로부터 미국으로 넘어간 것에 불과했다. 일본은 절름발이 경제만을 이 땅에 남겨둔 채 이곳을 떠났지만, 우리에게 닥친 해방은 곧 분단의 시작이었다.
1944년 수풍발전소 완공(당시 세계최대규모 10만KW 발전)
1914년 파나마운하 개통
1926년 시인 박인환 출생
1923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바우하우스전 개최
1917년 레닌 `국가와 혁명` 완성
1916년 대종교 창시자 나철 세상 떠남
1914년 파나마 운하 개통
1912년 침대열차(부산-안동 1등 침대) 첫 운행
1888년 `아라비아 로렌스`로 알려진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 출생
1886년 인도 종교가 라마크리슈나 세상 떠남
1824년 미국의 해방노예들 라이베리아 건국
1771년 영국 계관시인 월터 스코트 출생
176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출생
1534년 로마 가톨릭수도회인 예수회 설립
423년 서로마 제국의 황제(393-423) 호노리우스 사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