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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6일 오늘의 역사
2018년 서울의 열대야 26일 동안(7월 22일부터) 지속됨
2015년 ‘지금은 맞고 그 때는 틀리다’(감독 홍상수) 스위스 로카르노국제영화제 황금표범상(대상)과 남우주연상(정재영) 받음
2012년 남아공 북서부 마라카나 백금광산 임금인상요구 노동자에게 경찰발포 사망 34명
2009년 양용은, PGA챔피언십 우승 아시아인 메이저대회 첫 제패
양용은(37)이 2009년 8월 16일(현지시각) 미국 미네소타주 채스카의 헤이즐틴 내셔널 골프장(파72·7674야드)에서 열린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메이저대회인 PGA챔피언십 최종라운드 경기에서 2타를 줄여 합계 8언더파 280타로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를 제치고 우승했다.
PGA 메이저대회에서 한국선수는 물론 아시아인이 우승한 것은 양용은이 처음이다.
우즈에 2타 뒤진 공동 2위로 4라운드를 맞은 양용은은 이날 보기 2개를 기록했지만, 이글 1개, 버디 2개를 쳐 전날보다 2타를 줄였다. 전날까지 선두를 지켰던 우즈는 이날 3오버파를 치며 5언더파 283타로 양용은에게 3타차 역전을 허용했다.
이날 경기는 후반부터 양용은과 우즈의 매치플레이 양상으로 전개됐다. 전반이 끝날 때 양용은은 6언더로 우즈와 공동선두에 올라있었던 것. 우즈는 지금까지 메이저대회에서 14승이나 올렸고 특히 3라운드 선두로 나섰을 때 역전패를 당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양용은은 역전불패 우즈를 맞아 조금도 주눅들지 않는 플레이로 세계 골프팬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남겼다.
승부처는 14번홀(파4)이었다. 양용은과 우즈는 티샷 한 방으로 그린을 노렸다. 양용은의 티샷은 그린 못 미친 벙커 바로 옆에 걸렸고 우즈의 티샷은 벙커에 빠지고 말았다. 양용은이 20여m를 남기고 친 칩샷은 그린 위에 사뿐이 내려앉더니 10여m를 굴러 홀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즈를 무너뜨린 이글이었다.
양용은이 우즈를 이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양용은은 지난 2006년 11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HSBC 유러피언 투어에서 당시 7연승을 질주하던 우즈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이번에 세계랭킹 110위 양용은이 세계 1위 우즈를 꺾은 것은 또 하나의 진기록이 될 전망이다.
양용은은 지난 3월 혼다클래식에서 미PGA 투어 첫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생애 두 번째 우승에서 메이저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양용은은 우승 상금 135만달러(약 16억7천만원)를 받아 시즌 누적 상금이 335만달러를 돌파했다.
2008년 자메이카 육상선수 우사인 볼트 베이징 올림픽 남자 100m 9초 69 세계신기록
2008년 장미란 선수 베이징 올림픽 여자역도 최중량급 우승(세계신 5개)
2004년 미국 전설적 사진작가 칼 마이단스 별세
30년대 미국잡지 ‘라이프’에서 포토에세이 분야를 개척했던 전설적인 사진기자 칼 마이단스(97)가 2004년 8월 16일 별세했다. 마이단스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모습 등이 담긴 세계대전과 미국 이주노동자들의 참상을 그린 보도사진으로 유명하다.
1936년 라이프지에 사진기자로 입사한 그는 취재기자인 셀리 스미스와 결혼한 뒤 함께 제2차세계대전을 취재·보도해 라이프의 성가를 높였다. 마이단스는 전쟁으로 초토화된 유럽과 아시아를 발로 뛰며 생과 사의 이미지를 가감없이 담았으며, 그 와중에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에 잡혀 1년 가까이 포로생활을 하기도 했다.
2003년 우간다 독재자 이디 아민 세상 떠남
1999년 대우그룹 채권단, 대우그룹과 재무구조개선 수정약정 체결
자산기준 재계2위의 대우그룹이 30여년에 걸친 화려한 성장신화를 1999년 8월 16일부로 마감하게 됐다. 32년전 대우실업이라는 중소업체로 출발, 한 세대안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재벌그룹 중 하나로 부상한 대우그룹은 제3공화국 이래 한국경제를 지배해왔던 성장모델의 상징적 존재였다.
대우그룹 채권단은 이날 대우 계열사를 지난 6월 현재 25개사에서 연내에 6개사로 줄이는 대우 구조조정 방안을 확정, 대우그룹과 재무구조개선 수정약정을 체결했다. 채권단은 매달 구조조정 실적을 점검,실적이 부진하면 담보주식을 처분하고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이나 회사정리 절차에 넣는 등 강력하게 제재할 것이라고 밝혔다. 채권단은 대우증권과 서울투신운용, 대우전자, 대우중공업 조선부문 등은 계열분리한 뒤 매각하기로 했다. (주)대우 건설부문은 계열분리 후 외자유치를 하거나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대우그룹은 대우자동차, 대우차판매, 대우캐피탈, 대우통신 자동차부품부문 등 자동차 관련 4개사와 자동차 해외판매를 맡을 (주)대우 무역부문, 대우중공업 기계부문 등 6개사로 축소됐다. 채권단은 수정약정에 각 계열사별 계열분리와 매각 시한을 명시하고 대우측이 이를 준수하지 못하면 현금화하기 쉬운 담보부터 처분하기로 했다.
1997년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 월북
1992년 남북예술단, 제1회 통일예술제 사할린서 개최
1990년 이라크, 쿠웨이트 일대 해상 전면 봉쇄(걸프전 발발)
1987년 미국 디트로이트 메트로폴리탄 공항에서 비행기 고가도로 충돌 폭발 154명 사망
1986년 민중민주당 창당
1984년 국내 첫 여기자 추계 최은희 세상 떠남
1982년 전두환 대통령 아프리카 4국 순방 등정
1980년 최규하 대통령 하야
광주 사태와 관련 사임.
1980년 8월16일 최규하 대통령이 청와대 영빈관에서 제10대 대통령직을 사임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광주사태 등 국내 소요사태에 책임을 통감하고 평화적 정권이양을 위해 사임한다고 이유를 밝혔다.
국무총리로 재직 중이던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로 같은해 12월 6일 대통령직을 승계한 최규하 대통령 !
전두환 장군 주도의 신군부 세력에게 실권을 넘겨준 최규하 대통령은 대통령이 된지 8개월만에 스스로 청와대를 떠났다.
1977년 엘비스 프레슬리 사망
‘팝의 제왕’,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가 1977년 8월 16일 43세로 사망했다. 심장병이 사인이었지만, 지나친 약물 복용으로 그의 몸은 이미 엉망이 된 상태였다.
1933년 미시시피주 이스트튜펠로의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나 흑인과 백인이 공존하는 멤피스시에서 자란 덕에 그는 백인이면서도 흑인의 감성과 음감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다. 끈적하고 격렬한 창법이나 외설적인 무대 매너는 분명 흑인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이전의 스탠더드팝 가수인 빙 크로스비나 프랭크 시내트라에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매력적인 목소리와 외모, 무대 매너로 흑인 음악 리듬&블루스와 백인음악 컨트리&웨스턴의 결합으로 태어난 록을 미국과 세계에 알렸다. 1956년 기념비적인 작품 ‘하트브레이크 호텔’과 감미로운 사랑의 테마 ‘러브 미 텐더’가 소개되면서 그는 세계의 우상으로 급부상했다. 그는 또 두차례의 세계 전쟁에서 승리한 뒤 풍요로운 소비생활을 만끽하고 있던 미국 중산층 보수주의자들의 나른함과 자만을 ‘비천하고 야한’ 그의 춤과 노래로 위협했다. 그가 출현하자 당시 청소년이었던 비틀즈의 존 레논은 “그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잘라 말했고, 폴 매카트니는 “구세주가 나타났다”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이날 사망할 때까지 그는 18곡이나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렸고, 앨범과 싱글을 포함해 전세계에서 4억장에 이르는 음반을 팔았다. 지금도 그가 묻혀있는 밀워키에는 하루 1만명의 조문객이 줄을 이으며 그를 추모하고 있다.
1976년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 지진 사망 8천여 명
1972년 문교부, 기초한자 1800자 확정
1972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국보 3호) 북한산 비봉에서 경복궁으로 옮김
1968년 미국 최초의 다핵탄두미사일 포세이돈과 대륙간탄도탄 미니트맨3 발사에 성공
1966년 전쟁 희생자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한 제네바협약 국내에서 발효
1961년 한국경제인협회(전경련 전신) 창립
1960년 키프러스공화국 독립
1960년 국회, 장면 국무총리 인준
1954년 국내 공중전화 처음 설치
국내에서는 1954년 8월 16일 사람이 관리하는 유인(有人) 공중전화 서비스가 시작됐다.
그로부터 8년 뒤 동전을 투입하는 공중전화기가 설치됐고 이후 공중통신망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공중전화가 사라져 가는 나라이기도 하다.
현재는 공중전화가 휴대전화에 밀려 거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0세 이하 어린이와 70, 80대 이상 노인을 제외하면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물론 중고교생까지 대부분의 국민이 휴대전화를 사용한다는 얘기다.
1951년 서울-부산 간 전화 개통
1950년 한국전쟁 중 미 공군 경북 왜관에 2차 대전 후 첫 융단폭격
오전 11시58분부터 26분간 B-29 폭격기 101대가 1,000톤 폭탄 퍼부음
1949년 미국 여류소설가 마가렛 미첼 교통사고로 사망
1949년 한국 세계보건기구(WHO)가입
1948년 미군정청(美軍政廳) 대한민국정부에 정권이양
1948년 미국 야구선수 베이브 루스 사망
괴력의 홈런포로 메이저리그를 미국의 국민적인 스포츠로 자리잡게한 1등공신 베이브 루스의 원래 포지션은 투수였다. 1914년 볼티모어를 거쳐 둥지를 튼 보스턴 레드삭스는 이미 메이저리그 최강의 팀이었지만, 루스의 가세는 월드시리즈 3회 우승이라는 위업을 보스턴에 안겨준다. 44년 후 깨지긴 했어도 월드시리즈 29이닝 1/3 연속 무실점 기록(1916년∼1918년)을 세운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간간히 타자로 나와 터뜨린 그의 한방을 보고싶어했다. 타자로 전업했어도 첫 해 타율이 0.484나 될 정도로 루스의 야구재능은 천부적이었다. 1920년 뉴욕 양키스로 이적하면서 루스는 야구인생의 화려한 꽃을 피우지만 그를 떠나보낸 보스턴은 이른바 ‘밤비노(루스의 애칭)의 저주’에 시달려야 했다. 이때 이후 한번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적 첫 해 54개, 이듬해 59개. 루스의 홈런 행진으로 야구사도 매년 새롭게 씌어졌다. 지금은 추억의 기록이 됐지만 한 시즌 60홈런(1927년)과 통산 홈런 714개(1935년)는 당시로서는 어느선수도 감히 넘볼수 없는 대기록이었다. 외야의 센터 뒤를 가리킨 뒤 그 곳으로 홈런을 날렸다는 ‘예고홈런’의 전설도 루스였기에 회자됐던 가십거리였다.
통산 94승 46패에 방어율 2.27, 17시즌 동안 12번이나 오른 홈런왕. 1935년 현역에서 물러날 때까지 그가 수립한 기록들은 루스가 왜 20세기 최고의 야구선수로 추앙받아야하는지를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1948년 8월 16일, 야구영웅 베이브 루스가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1946년 서울시, `서울자유시`로 경기도로부터 독립
1946년 8월16일 서울시가 서울특별자유시라는 이름으로 경기도에서 독립했다.
그 전날 제정된 서울특별자유시헌장에 따른 것이었다.
헌장의 제1장 제1조는 경성부를 서울시라 칭하고 이를 특별자유시로 함이라고 규정했다.
서울이라는 이름은 경성이 공식 명칭이었던 일제 때부터 민간에서는 종종 쓰여왔고 해방 뒤 한 해 동안 광범위하게 쓰였지만, 수도의 공식 이름이 된 것은 이 헌장을 통해서다.
서울특별자유시는 정부 수립 뒤인 1949년 7월2일 지방자치법을 통해 서울특별시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수도나 몇몇 중요한 도시들에 대해 일반 도시들과는 다른 특별한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드물지 않은 관행이다.
북한도 평양을 평안남도에서 분리해 특별시로 지정하고 있다.
1960년대에는 가난한 서울 사람들을 두고 서울보통시민이라고 이르는 우스개도 유행했지만, 빈부의 차이를 떠나 서울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지역 사람들에 견주어 많은 특혜를 누리게 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1946년 일본 경제단체총연합(경단련) 창립
1946년 8월 16일 일본 경제단체총연합(경단련)이 창립됐다. 초대 회장은 일본산업협의회 회장 석천일랑이었다. 경단련은 일본의 전국적인 종합경제단체로서 대기업 대표로 구성된 재계의 총본산이다. 24개의 상설위원회를 갖고 있는 경단련 회장은 `재계의 총리`라고 불리어질만큼 권한이 막강하다. 1955년 자민당 결성, 미키 총리시대의 독점금지법 개정반대 등에 큰 권한을 행사했다.
1945년 중국 남경국민정부 붕괴
1945년 조선 건국 준비위원회 조직(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안재홍)
해방 후 최초의 정치 단체인 조선 건국 준비위원회가 1945년 8월16일 조직되었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된 이 단체는 정부 수립까지의 국내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조직이 너무 좌익 진보 세력으로 기울자, 민족주의 계통 사람들이 탈퇴했다.
이후 미 군정이 실시되자 조선 건국 준비위원회는 흩어지고 말았다
1929년 블라디보스톡서 제2회 범태평양노동조합회의 개최
1925년 찰리 채플린의 ‘황금광 시대’ 개봉
몸에 꽉 끼는 웃옷과 헐렁한 바지, 우스꽝스런 콧수염과 외모만으로도 보는 이의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초라한 신사 찰리 채플린. 그가 각본ㆍ연출ㆍ주연한 영화 `황금광 시대`가 1925년 8월 16일 뉴욕 스트랜드 극장에서 개봉됐다. 채플린에게는 2년전 `파리의 여성`에 이어 자신이 직접 제작한 영화로서 첫 장편영화였다.
내용은 금광을 찾아 알래스카에 온 부랑자 채플린이 여러 사건에 조우하면서 결국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는 것이었다. 특히 굶주린 찰리 채플린이 구두를 끓여 먹는 장면은 실로 인상적이었다. 나이프와 포크를 정중하게 사용하면서 볼이 미어지도록 구두끈을 먹고, 바늘 하나 하나를 핥는 장면은 폭소를 유발했을 뿐 아니라, 외곬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이 영화는 흥행면에서도 대성공을 거둬 그 이익이 5백만 달러(그 중 반은 해외시장)에 달했고, 채플린 본인도 2백만 달러이상의 수익을 얻었다.
1924년 런던회의, 도즈안 조인
1918년 일제, 곡류수용령 공포
1914년 경원선(용산~원산) 개통
1913년 메나햄 베긴 이스라엘 수상 출생
1910년 데라우치 일본 통감,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한일합병 조약안 제시하고 수락 독촉
1906년 칠레 발파라이소서 진도 8.6 지진 사망 2만 여명
1904년 이용구, 진보회 조직
1903년 국문학자 양주동 태어남
1895년 나가사키, 부산간 해저전선완성
1888년 영국 영화배우 올리비아 로렌스 태어남
1886년 힌두교 성자 라마크리슈나 사망
힌두교의 성자 라마크리슈나가 1886년 8월 16일 5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836년 가난한 브라만의 아들로 태어나 유년시절부터 종교적 신비감이나 영적 체험을 경험한 라마크리슈나는 22세에 칼리 여신을 모시는 한 사원의 승려가 됐다. 형식적인 성직에 만족하지 않고 3년간을 고행하며 이름을 라마크리슈나로 고쳤다.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를 연구하고 체험한 끝에 궁극에는 모든 종교에서 신에 도달하는 길은 똑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가르침이 널리 알려지자 1875년경에는 뱅골 지방에 큰 종교세력이 형성될 정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신과의 일체감으로 자신을 신의 화신이라 일컬었고, 다양한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사후 제자들은 인도 각지와 동남아시아 각국과 영국 미국 프랑스 및 남미 등지에 `라마크리슈나 선교회`를 설립, 그의 가르침을 전파했다. 특히 제자인 비베카난다가 스승의 종교사상을 세계에 널리 소개한 것으로 유명하다. 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은 힌두교의 전통을 현대에 맞게 접목시켜 인도인들에게 자신감을 고취시켰고, 모든 종교의 조화를 강조해 인류협동의 이상을 드높였다.
1869년 브라질-파라과이 아코스타뉴 전투. 6살배기 포함 파라과이 소년병 3,500명 브라질기병대 2만 명과 맞서 싸우다 전멸, 파라과이의 이 날은 어린이날
1858년 대서양 횡단 해저전신 성공
1845년 1908년 최초로 컬러 사진 감광판을 만든 프랑스의 물리학자 리프만 출생
1819년 영국군 맨체스터에서 열린 참정권 확대요구 10만 명 노동자집회 진압 시민학살(피털루 학살)
1657년 송시열, 시정18조 상소
1653(조선 효종 4) 네덜란드 선원 헨드릭 하멜 일행 표류중 제주도 착륙
1645년 프랑스의 모랄리스트 장 드 라브뤼예르 출생
1482(조선 성종 13)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 세상 떠남
1428년 조선, 월식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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