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3:1-18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한 이름 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에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 처가 나은 자니라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육이니라”
지난 시간에 적그리스도가 어떤 존재냐... 말이 많지만 의견의 합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세에 나타날 정치적인 권세와 경제권, 종교권을 다 한몸에 가진 악의 화신일 것이라. 거기에는 이제 일치하고 별다른 이의가 없습니다.
자, 이런 존재가 종말에 나타날 수 있을 것이냐? 온 세상의 권세를 다 자기 손에 걸머쥐고 심지어 자기를 하나님으로 경배하게 까지 하는 막강한 권세를 가진 자가 출현될 수 있는가? 그런 가능성을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문명의 추세대로 간다면 한사람 자꾸 중앙집중적으로 권세가 권력들이 집중되는데 이런 것들이 마침내 전세계적으로 통합될 수 있을 것이라. 여기 이제 짐승이라고 표시했는데 짐승은 다니엘서의 영향으로 계시록이 짐승이라고 표시했습니다. 다니엘서는 하나님과 성도들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나라들을 표시할 때에 적대적인 나라를 표시할 때에 짐승으로 표시했습니다. 그 표현을 요한계시록도 맏아서 짐승으로 표시를 했습니다. 하면, 적그리스도가 요한계시록에 나오고 요한1서에 나오는데 거기는 적그리스도들이라고 하는 것을 말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적하는 자들을 적그리스도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면 적그리스도를 막는 것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대부분 로마나라를 적그리스도를 막는 것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초대교회가 핍박을 받으면서도 아주 로마를 적그리스도로 보지않는 초기에는 보지 않았다는 그런 교회의 예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뿔이 나오매” 그럴 때 뿔이 나온 것을 네로가 다시 살아서 왕으로 되돌아 올 것으로 기대를 한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핍박이 지나가고 이제 콘스탄틴 대제의 등극 이후에는 더 이상 교회가 핍박되는 그런 자리에 있지 아니하고 숨어있는 자리에서 성도들의 할 수 있는대로 바라는 것은 조용한 중에 경건한 생활을 하기 바라는 것과 같은 삶의 자세에서 사회를 주도하는 적극적인 세력으로 나타나게 됐습니다. 그래서 콘스탄틴 대제 이후에 보통 1,000년간을 로마교회의 평화시대라 생각하고 이때를 1,000년기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중세 천년기간을 살펴보면 우리처럼 우리가 생각하듯 소박하고 평화롭고 그런데 아니고 온갖 부조리와 악과 타락이 참 많았습니다. 그리고 세속화가 많이 깊이 진행되므로 권세들을 사고, 권세들을 높은 성직자들의 자리도 사고, 성직자의 자리도 살 뿐만 아니라 또 그 사람들이 세상 권세를 취하게 되고 그리해서 어려움이 많이 있었고, 힘은 가졌지만!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그와 같은 역사는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 때가 되니까 그와 같은 세상 권세를 다 탈취하고 교회권세까지 함께 가지면서 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라고 하는 칭호를 받은 로마교힝을 종교개혁자들이 한결같이 적그리스도로 지목을 했습니다.
결국 여기서 부터 칼빈도 그러하고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이 한결같이 적그리스도는 로마교황이라 그렇게 했는데, 사실 그렇게 말을 받을 만큼 로마교황이 악한 것을 많이 했고 별로 선한 교황들이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교황이 바꿔지기 시작한 것이 20세기 들어와서라 할 것입니다. 그전 까지만, 20세기 들어와서 특히 요한 23세 그 전에서 부터 세상권력과 통치력을 구하던 데서 벗어나서 교회에 전념을 하게되고 교회에 전념하게 된 것이 결국 62년 제 1회 바티칸 공회를 소집하는데 이르게 되었습니다.
요한 23세는 79세 땐가 교황이 됐는데 그때 교황이 되기 전에는 론갈리 추기경이라는 이름으로 추기경을 했어요. 그런데 열심히 목회에 전념을 하고 평생소원이 목회자로서 목회에 전심하기 바라고 또 요한복음에 나타나 있는대로 주님이 그 대제사장의 기도의 이 우리 이 우리의 속한 우리 말고 우리 밖에 있는 자에게도 자들에게도 하나되게 바라는 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대로 교황이 이렇게 갈라진 교회에도 하나이 되서 한 목자이 되기를 바랬습니다.
키프리아누스 이후서 부터 로마 특히 도나투스의 분리 때부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을 했는데 그것을 핍박받을 때도 로마교회가 주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을 했고 더구나 갈려져 나간 개신교에 대해서는 열교로 찢어진 교회이기 때문에 이 원리를 적용해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열심히 주장을 했는데 갈려져 나간 개신교도들 한테 형제들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이들이 하나되게 하기 위해 먼저 우리 교회의 문제 자체부터 반성을 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모인 것이 바티칸 제 2공회인데 그때에 개신교와 구교가 합칠 수 있도록 로마의 전통적인 미사 예배의 모범을 바꿔서 거의 개신교식으로 만들었죠. 그리고 그를 이어가던 바울 6세 지금 요한바울 2세 등도 목회에만 전심하는 사람들이 되서 세상적인 권세를 별로 추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지금은 로마교황을 가리켜 적그리스도라 그렇게 하는 말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20세기 초엽까지도 개신교에서 적그리스도는 로마교항이라 하는 것에 있어서는 아무런 변동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럴만 하기도 해요. 왜냐하면 여기 음녀, 음녀라고 했는데 음녀로 표현된 것을 보면 타락한 교회들을 지칭하죠. 물론 글자 그대로 돈을 위해서 권력을 위해서 지조를 파는 것을 가리켜 음녀로 지칭하지만 여기서 음녀라고 말할 때는 타락한 교회라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로마교회가 적극적으로 통합을 위해 노력하고 그리고 WCC 정식회원으로 가입은 안했어도 업서버로 참가하고 있습니다. 로마교회가 개신교도들과 희랍정교회가 정회원으로 가입되 있지요. 한국교회의 보수교회 몇몇을 제외하고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들이 거의 다 WCC에 가입되 있습니다. 그런데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인 (판넨베르크?)가 글을 쓴게 있는데 우리가 다시 로마교황권 밑에 합칠 수 있다고 이야길 했습니다. 단지 로마교황의 무오설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인정할 수 없다 그렇게 주장을 했어요. 제가 그전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한스 큉이 로마교황청에 도전을 해서 로마교황의 무오설을 인정할 수 없다. 교황의 무오라는 것도 그냥 무오가 아니라 ( ), 교황의 좌(座)에 앉아서 교회와 예배모범과 윤리에 관해서 정치에 관해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전적으로 무오하다고 주장을 해 왔습니다. 이 주장이 공식 로마교회에 공식 교리로 채택된 것이 1870년, 제 1바티칸 공회에서 로마교황의 무오설이 로마교회의 정식 교리로 채택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많이 주장을 했어도 대량 주장을 못 한거지요. 사실 로마교황쯤 되면 최소한 지금 7억 인구가 되낟고 할까요? 7억이 못될른지, 그 정도의 인구를 다스리는 그 큰 자리에 앉았는데 교황의 무오를 주장하는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어처구니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그렇게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들도 어떻습니까? 목사님들, 교회에서 설교하실 때, 목사님들이 말씀하는 것을 곧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으로 받으라고 강요하지 ㅇ낳아요? 그런데 더구나 이것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카디날 추기경, 대주교들을 모아서 결정을 하고 교황이 승인을 해서 자기의 교설로 공포를 하면 그게 오류가 있다 그렇게 말할 수가 없지요. 그래 추기경과 대주교들은 교황의 보좌관으로 자문위원으로 일하는 격이 됩니다. 그러니까 공의회가 결정을 해도 일단 교황의 결정이 되는 거지요.
이렇게 해서 교황의 무오설을 이제까지 주장하고 여기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교황이 세속적인 자리와 권세를 추구하던 자리에서 목회만 전심한 것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습니다. 시기적으로 기간적으로 따지면 중세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13세기에 체계를 완전히 구상을 했어요. 그래서 본래 로마교회에 있어서 은혜와 자유와의 관계는 은혜가 더 자유보다 상위 개념입니다. 자연은 본래 부족하게 불충분하게 창조됐어요. 그러기 때문에 이 은혜가 와가지고 이 자연을 회복하는 수준도 있습니다. 또 부인하지 않아요. 인정을 하지만 그러나 그 은혜가 와가지고 부족한 것을 끌어 올린다. 낮은 수준의 상태에서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려요. 그걸 완성한다 그럽니다.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완성한다.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완성한다. 그러니까 로마교회도 타락으로 멍들은 병든 것을 인정은 하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은혜는 와가지고 자연을 낮은 그 병들고 멍든 자연을 치료함과 동시에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립니다. 그러니까 은혜의 영역을 다스리는 통치자는 자연의 영역을 다스리는 통치자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을 통치하는 영역에 있는 사람보다 은혜의 영역에 있는 사람이 자연의 영역까지 지배해야 된다. 그렇게 해서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모든 권력이 통합되도록 체계화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토카스 아퀴나스의 책에 의해서, 뭐 그전부터도 그렇게 했찌만 세속 권세를 위해서 아주 맹렬하게 싸웠습니다. 그래서 중세는 사실은 신성 로마제국이 있지만 이것은 허수아비이고 실제로 다스리는 것은 영주들이지요. 영주들이 다스리고 실제로 이 말을 해서 유럽 전체에 한 권위를 가지고 모든 백성들을, 지역 구석 구석까지 전달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사람은 교황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그 지역에 국한되었을 뿐이지 구라파 전체에 영향력을 결코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권세가 보통 권세가 아니지요. 그리고 옛날에 위세 찬란한 드골 대통령이 불란서 대통령으로 남미를 방문했을 때 그 남미의 추기경들 앞에서 무릎 꿇고 그 손에다 키스한 것을 여러분들이 TV나 신문을 통해 보시고 기억을 하실 것입니다. 항상 교회가 모든 것을 다스리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어디든지 가면은 모든 사회 조직을 교회화 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권세 아래 다 두게 되어 있습니다. 전부 다 교회 지배 아래 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위계적으로 사회를 구성했는데 종교개혁 때 와서 그 위계적인 사회질서를 다 끊어버리고 모든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국면들은 하나님 앞에서 다 동등하다, 다 평면적으로 동등하게 하나님 앞에 책임을 갖고 선다 그렇게 고친 것입니다. 완전히 위계적으로 되어 있던 전 사회질서를 뜯어서 평면화한 것이 종교개혁의 큰 공헌입니다. 그래서 각 영역은 그것대로의 고유한 법칙과 성질을 갖고 있어서 다른 영역이 그 영역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없다, 그 고유한 법칙과 성질을 갖고 있으므로 그 영역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다 선다 그렇게 평면화 시켰습니다. 그래서 그 영역이 그 영역대로 하나님 앞에서 주권을 갖는다. 그것을 1880년 아브라함 카위퍼가 1880년 아직 40대의 젊은 나이였는데 자유대학을 암스텔담에 세웠습니다. 자유개혁대학을! 한국에서는 한동안 보수가 너무 심할 때는 자유라는 말이 붙었기 때문에 이 자유주의 신학교란 말로 생각을 했지요. 우리나라에서! 자유라는 말이 붙었으니까 Free Refommed University, 이제 라전어 이름으로는 ( ), 자유개혁대학이라. 자유라는 말은 그때 당시 정부가 너무 종교에 대해 간섭을 많이 하고 또 교권이 너무 간섭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 정부와 교회의 간섭에서 벗어나서 대학이 대학으로서의 독자적인 영역을 갖고 일을 하겠다는 뜻으로 자유대학으로 붙였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이 그렇지 않습니까? 문교부가 총장을 승인을 안하면 안되고 문교부가 뭐든지 간섭하지 않습니까? 사립대학이라고 해서 정부가 외국처럼 돈을 주는 것도 아니면서 뭐 이러쿵 저러쿵 온갖 제재를 다 하지요. 이사장은 문교부가 승인하지 않으면 안되지 않습니까? 지금 사당동 이사장 문교부가 승인을 안주기 때문에 지금까지 8개월이 넘도록 이사장이 없는 상태에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 이상으로 간섭을 많이 하고 1870년, 이야기 하다 벗어가서 미안합니다. 화란 의회가 이 신학부의 법을 고쳐가지고 신학부가 아니라 종교학을 가르치는 학교로 변화시켜 버렸습니다. 그래서 화란은 지금 신학대학부가 이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정부가 임명을 하고 교회가 필요로 하는 신학을 가르치는 것은 교단이 파송을 합니다. 이중구조로 되어 있어요. 그런 교수를 ( )라, 교회가 파송한 교회교수라 그렇게 해요. 그렇게 하니까 더이상 이것이 바른 신학을 가르칠 수가 없게 되었지요. 정부가 늘 통제를 하니까! 그러니까 그것을 막기 위해서 1880년 자유대학을 세워서 신학부를 세웠습니다. 그래 지금 화란에서 자유대학만 이중교수제가 아니고 신학부가 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1880년 자유대학을 세우면서 아브라함 카위퍼가 ( ), 즉 자기의 영역에서 주권이라 하는 말로 자유대학 설립의 개회사를 했습니다. 그래 그 말이 지금 영역주권이라는 말로 바뀌었는데, 그렇게 전해 오는데 지금 영역주권의 사상이 종교개혁이 가져온 큰 선물입니다. 그래 모든 영역들이 그 영역의 고유한 법칙에 의해서 유지되고 다스려지게 해야지 다른 영역이 다스릴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종교개혁이 가져온 큰 공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 다시 없어져서 중앙집중화 되어서 다 다시 절대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위계화 되어가는 중앙집권적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자, 종교개혁이 위계적인 이렇게 사회질서를 평면적으로 바꾸고 또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심판을 받도록 그렇게 세워놓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부라든지 교육이라든지 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의 법에 의해서 그것을 건설해야지 교회가 이렇게 저렇게 좌지우지 할 수 없는 거지요. 실질적으로 로마교회 사회에서는 전부 다 신부들이 전체적으로 이러쿵 저러쿵 다 지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 그런데 찰스 핫지라고 하는 19세기 유명한 조직신학자가 큰 조직신학책을 썼는데 찰스 핫지가, 핫지에도 개신교가 공통으로 주장하는 적그리스도는 로마 교황이라, 위계화되면 아마 집중권력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로마교하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20세기 들어와서는 오히려 로마교황이 세상 권세를 추구하던 데서 목회에만 전심하는 목회자가 되었으니까 이것도 다시 우리로 하여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돈의 위력이 크고 정말 그 영향력이 지대해도 지금도 모든 나라에서 국민들의 생활에 가장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부분은 정치입니다. 정치권력이지요. 경제의 힘도 크지만 이 정치가 경제를 자기 영역으로 통합한 이후에 더욱 정치력이 세어졌고 그래 정치만큼 모든 사람이 피부에 구석 구석 와 닿는 것이 없단 말이예요. 자연과학이, 또 기초과학이 이렇게 발달해도 옛날에는 자연과학자들 수준에서 그것을 연구하고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떠한 과학의 프로젝트도 어떠한 연구단체라든지 개인들이 모아가지고 그 프로젝트를 해낼 수 있는 수준이 도저히 안됩니다. 모든 과학은 전부 다 국가산업이고 국가 정치력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국가의 정치력이 국가가 개입해서 추진하기 전에는 이룰 수가 없는 상태에 와 있습니다. 또 이렇게 과학적인 기술의 추구, 축적 그리고 그것을 응용하는 일이 쉴 새 없이 진행되고 멈춰지지 않지마는 그러나 이렇게 모든 프로젝트들이 어느 대학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수준은 완전히 넘어섰습니다.
얼마전에 토쿄대학이 인공위성 로케트를 발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무슨 관서 학원대학인가 하는 대학 교수가 암스텔담에 왔을 때 제가 물어 보았어요. 동경대학이 얼마나 크면 로케트를 발사해 낼 수 있느냐 그렇게 물었어요. 그러니까 이건 말로 할 수 없는 거대한 괴물이라. 자기도 같은 대학의 교수인데 그 대학의 교수가 하는 말이 동경대학도 쉽게 말해서 하나의 대학이라고 볼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 거대한 괴물이라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정부하고 밀착이 안되면 대학의 모든 연구 프로젝트들이 진행이 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전부 다 대학의 일들을 정부가 주재하고 그리고 돈을 대고 그 연구하는 것까지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 북구라파에 세른이라는 소위 그 세크린톤, 그러니까 그 입자 가속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 나라가 할 수가 없어서 여러 나라들이 합동으로 해서 지은 거대한 프로젝트입니다. 그래 연구도 그런 수준의 입자 가속기를 세우는데도 한 나라가 할 수 없어서 여러 나라들이 합동해서 세웠습니다.
자, 그리고 내가 구라파에 있을 때에 미국이 너무 비행기 시장을 석권하고 횡포를 부리니까 구라파에서 도저히 우리가 안되겠다, 우리도 비행기를 만들어내자, 그래서 에어포트 프로젝트를 세웠습니다. 그럴 때에 이 에어포트 프로젝트를 독일이나 불란서와 같은 그와 같은 국력을 가진 나라가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결코 혼자 하지 않고 다 공동으로 하더라고요. 서독, 불란서, 이태리, 화란, 그 주요한 나라들이 전부 공동으로 출자를 해가지고 에어버스를 생산해 내는 일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대학의 그 큰 연구소들에서 필요한 기구들을 설치하는데도 정부의 보조가 가지 않으면 안되고 정부와 합작으로 그 연구 프로젝트들이 다 진행되지요. 그러니까 모든 과학 기술이 정치에 예속되고 정치를 위해서 진행됩니다. 그래 권력을 잡은 자들이 갈수록 권력이 커지고 결코 포기하지 않지요. 과학이 독점적으로 진행되는 줄 알면 큰 오산입니다. 결코 현대 과학 문명에 있어서는 지식의 발달과 새로운 연구 프로젝트,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 대학의 연구기관이나 미국의 사설 큰 연구기관들이 혼자 할 수 있는 때는 벌써 훨씬 넘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할 때도 미국 같은데는 주 정부들이 돈을 막대하게 투자를 해가지고 일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정치권력 만큼 국민 각자에게 와 닿는 피부로 직접 느끼는 일이 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지금은 보수, 혁신 이렇게 갈등해 가지고 이 뭐 혁신세력이 나라를 뒤엎을 것처럼 그렇게 해서 좌경세력을 척결해야 한다고 그러지만 그게 오래 못 갈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정권이 유지를 할 것 같아도 결코 그렇게 못합니다. 두고 보십시오. 얼마 안가서 우리나라도 복지 정책을 대거 도입해 들이지 않으면 정권이 유지될 수 없는 상황이 옵니다. 그렇게 되면 점점 더 중앙 집권적으로 권력들이 모여지고 국민들의 각자의 생활을 통제하게 됩니다. 돈이 오면 국민들의 생활을 전부 통제하게 됩니다. 동구에서, 소련에서, 북한에서 다 여성들도 직장에서 일해야 하기 때문에 탁아소를 만들고 아침부터 여자들도 평등하게 일하고 군대 복무하고 하게 하면서 가정 교육의 지침을 전부 다 중앙정부에서 내려보내게 하거든요. 복지국가 정책을 도입해 들이면 그렇게 됩니다.
자, 그렇게 볼 때 다시 로마교회 교황청이 이 권력을 한꺼번에 잡고 휘두를 수 있는 날이 올 것인가,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인가? 거기에 대해 제가 회의를 가져보는 겁니다. 이제까지 전통적으로 16세기 부터 20세기까지 400년 이상 500년 가까이 우리 개신교가 전통적으로 적그리스도는 로마 교항이라, 그렇게 이제까지 가르치고 믿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 로마 교황이 이렇게 전세계가 통합될 때에 그 활약을 다시 잡아 쥘 수 있고 그렇게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시고...
이 666의 수의 해석인데 라전어로 로마 교황을 가리켜서 교황의 다른 명칭이 (빅가리우스 필리데이 ), 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입니다. 그런데 이게 로마자로 수를 666을 만들어내요. 자 D가 500 아닙니까? C가 100이지요. 그러면 600 나왔습니다. L이 50이지요. 그러면 650까지 나왔는데 16이 어디서 나와야지요. 빅가리우스 필리데이에서 666을 끌어내요. 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 대리 통치자,
여기 지금 13장에 666이라는 수가 나옵니다. 네, 666을 많은 경우에다가 적용을 합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네로를 희랍어로 써 가지고 666을 적그리스도의 수로 맞췄습니다. 얼마 전에는 키신저를 적그리스도로 해가지고 키신저에다가 666이라는 수를 맞췄습니다. 키신저가 왜 적그리스도입니까? 그도 유태인인데, 유대인, 유대교의 대의를 아랍세계에다가 팔았다. 평화를 위해서!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하고 애굽하고 화해하고 국교를 맺도록 하지 않았습니까? 키신저가! 그래서 666을 키신저에다가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레네이우스라고 하는 2세기 중엽의 신학자가 있습니다. 소위 성경이 기록된 이후에 최초의 조직신학자란 말입니다. 이 사람이 적그리스도의 수를 설명하면서 소위 느부갓네살의 신상도 666의 수와 맞는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살펴보니까 다니엘서 2장, 3장에 600은 안나오고 60하고 6은 나와요. 66, 3장 보면 “느부갓네살이 금으로신상을 만들었으니 고는 60규빗이요, 광은 6규빗이라” 그래 가지고 느부갓네살의 신상도 666에 해당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666을 적용할 수 있는 사례들은 많다. 그러나 누가 진짜 666의 수를 완전히 적용받을 수 있는지는 그 출현까지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렇게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666을 사람에게 적용해 가지고 적그리스도라고 지목하는 것에 대해서 아주 조심하도록 하는 얘기를 한 거지요.
자, 그러면 666이 무엇이냐?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되느냐? 지금은 그러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은행에서 발급되는 크레디트 카드에 6을 이렇게 세 개 모아가지고 찍고는 일련번호를 붙였습니다. 그래가지고 별별 소리가 많지요. 여기다가 수를 새겨서 은행에 들어가면 문이 자동적으로 열리고 돈이 나오고... 여기 13장에 보면 매매를 못하게 한다고 그랬거든요. 우리가 읽은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매매를 못하게 한다, 그것은 생존권을 박탈함을 뜻합니다.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한다. 매매를 못하게 하면 옛날에야 자급자족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자급자족할 수 있는게 어디 있습니까? 전부 다 돈으로 매매를 해야 하는데 이 표 받지 않는 자는 매매를 못하게 한다. 생존권을 박탈하는 거지요. 어떤 경우에 자기 짐승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들을 죽이게 하요? 그런 자들은 종이나 자유자거나 간에 매매를 못하게 했지요. 생존권 박탈하는 거지요. 이 적그리스도를 혹은 불법의 사람을 경배하지 않으면 생존권이 박탈되도록 그렇게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런 것 같지 않아요. 크레디트 카드가! 그래서 한동안은 컴퓨터가 적그리스도라고까지 했는데 컴퓨터가 적그리스도가 출현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요. 예, 컴퓨터야 혼자 할 수 있습니까? 물론 마이컴, 퍼스날 컴퓨터 같은 거야 혼자 하지만 그러나 항상 여러 사람들이 대형 컴퓨터는 일을 해야 되거든요. 집중적으로! 그렇게 해서 다량의 정보를 모으고 거기서 결정을 내리고, 그런데 이것을 666을 글자대로 해석해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이제 옵니다. 글자대로! 그런데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너무 사랑해 가지고 우리가 이 요한계시록을 언제부터 강의하기 시작했느냐 하면 소위 길선주 목사님 때부터 소위 요한계시록 강해를 시작했습니다. 나라가 어두워 기울어지고 정말 백척간두에서 나라의 운명이 흔들거릴 때에 이 정말 위안을 주고 소망을 주게 하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을 강해하기 시작하면서 이 문자대로 푸는 연습을 거의 100년 가까이 우리 한국교회가 길들여 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글자대로 풀어야 이것이 정통이고 달리 풀면 이게 자유주의나 이단으로 규정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로 한국 사람들이 많이 의존하는 요한계시혹 주석 책은 일본 사람들의 주석이라고 하는 흑기 주석, 한국 사람들이 지금은 좀 덜 하겠지만 옛날 목사님들이 다 일본 건너가 공부를 하셔서 구로자끼 주석을 많이 인용을 하시는데 이 일본 주석들을 보시고서 거기에 맞는 주석대로 하는 것은 정통이고 아닌 것은 자유주의 이단으로 몰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 해석의 원리에 있어서 한 두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로, 불명료한 부분은 명료한 부분에 의해서 해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산문으로 기록된 명백한 문장에 의해서 운문, 시로 된 상징적인 언어들을 해석해야 옳습니다. 이 초대교회서 부터 성경을 해석해 오는 기본 원칙입니다. 분명한 언어로 기록된 부분에 상징적인 언어, 시적인 언어들이 비췸 받아서 해석되어야 된다. 그것이 첫째고... 둘째는 물론 같은 맥락입니다마는 그 부분은 전체에 의해서 해석되고 조명되어야 된다. 그런데 지금 요한계시록이 제일 구약의 계시록적인 묵시문학의 영향을 다니엘서, 에스겔서의 영향이 제일 많이 들어가 있는 성경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리고 이 상황 때문에 성경을 썼기 때문에 이 적그리스도의 나라들, 그러니까 교회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나라들을 지명할 때 짐승으로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그 짐승을 해석을 했습니다. 여기도 용, 옛뱀, 그리고 곧 사탄이라고 해석을 해요. 이것은 용이라고 하면서 그 다음은 옛뱀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인류역사 초기 낙원에서 생긴 사건에 이 옛뱀이 개입된 것을 지적합니다. 이 옛뱀이라고 하면서 그 다음 다시 한번 풀어서 설명하기를 바로 사탄이라, 그러니까 그 처음 낙원에서 인류들을 타락했을 때의 그 사탄이 뱀을 이용해 가지고 인류를 꾀일 때에 그 뱀을 도구로 함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일치시켰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도 심판하실 때에 사탄이라고 지목하시면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고 뱀에게 내리는 심판과 저주로 사탄에게 심판과 저주를 같이 내리셨어요. 그러니까 창세기 3장에 나타나는 뱀의 정죄와 저주에 대해서는 꼭 사탄에게만 적용하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뱀은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 것이요 여인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리라. 그래 뱀이 발을 잘 물어요. 그리고 지금은 하도 뱀이 보신재로 좋게 되어 가지고 뱀을 잡아다가 보신재에 쓸 생각을 많이 하지만 제가 어렸을 적만 해도 뱀만 보면 다 잡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뱀과 우리 사람사이에 적개심을 하나님이 심어 놓으셨어요. 사탄과도 적개심을 심으셨지만 그렇게 직접적인 도구 역할을 한 뱀에게도 적개심을 심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어릴 때라도 뱀만 보면 반사적으로 돌을 쳐서 다 죽였지 그냥 내 보내 주지 않았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이 나이 많으신 분들은 갖고 계실 겁니다. 지금 어디 뱀을 잘 구경해 볼 수 있습니까? 실뱀이라도 다 잡아다가 보신탕재, 개소주에다 다 넣고, 뱀탕에다 넣으니까 뱀이 참 좋은 존재이어서 우리나라 뱀 같고는 안되니까 외국에서 수입을 많이 하지요. 그런데 외국에서는 뱀이 많으니까 아열대 지역에 뱀으로 인해서 죽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주로 발꿈치를 물거든요.
자, 그 뱀과 사탄과 일치시키면서 또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용, 그러면서 옛뱀, 낙원에서 일을 저질렀던 그 옛뱀, 그리고 사탄이라. 그리고 세 번 같은 저자가 풀어요. 그래 요한계시록이 가장 상징적인 언어로 쓰인 책입니다. 짐승이라고 하는 것도 다니엘이 짐승이라고 하면서 그 나라들을 지목하지 않습니까? 지목을 해요. 그러니까 이 짐승이라고 하므로 하나님과 그의 교회를 대적하는 적대 세력들을 지목하기 위해서 짐승을 썼습니다. 그래 여기도 지금 13장도 짐승을 썼어요. 제가 다 한 눈에 보이도록 설명해 드릴 수는 없지만 가장 극단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와 같은,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해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자, 그렇기 때문에 가장 큰 적대 세력이기 때문에 그것을 짐승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리고 666이라고 하는 수를 붙였습니다. 자, 성경을 해석하는데 요한계시록은 문자대로 해석을 하고 이제까지 전통적으로 요한계시록에 맞추기 위해서 다른 부분들을 영해해다가 이제까지 맞춰 왔습니다. 전통적인 성경해석의 원칙이, 명료한 부분에 의해서 불명료한 부분이 조명되고 해석되어야 하고 부분이 전체에 의해서 조명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에 이 사람에 관해서 뭐라고 말했느냐 하면 불법의 사람이라고 말했어요. 불법의 사람( )이라, 그러면 여기에 나타난 적그리스도가 곧 불법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수들을 글자 그대로 받으면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144,000을 우리 생각해 봅시다. 박태선파가 시온성에 들어오는 144,000만 구원에 이른다고 열심히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한국 교회가 거기 박태선파에 144,000명만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을 반박해서 이 144,000에 관한 한은 글자대로 봐야 하는 것은 거부했습니다. 144,000도 글자 그대로의 수가 아니지요. 24장로도 마찬가지, 666도 마찬가지 입니다. 숫자들이 상징적인 숫자이고 또 대부분이 상징적인 언어들로 쓰인 책이 이 요한계시록입니다. 144,000은 우리가 생각하듯 그런 144,000이 아니고 144,000은 구약 교회를 대변하는 12 수의 신약교회를 대표하는 숫자 12에다가 10의 완전수의 세곱인 1,000을 곱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교회와 신약교회가 구원 얻는 총수를 144,000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이것이 너무 적다고 생각해서 144,000을 유대인들 구원수로 한동안 또 바꿔서 주장을 했습니다만 유대인들로서 구원받을 자가 144,000 뿐일 것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기껏 144,000! 그렇게 말하기가 나는 어렵다고 봅니다. 그러면 144,000은 옛날부터 10이라는 숫자가 상당히 힘을 가진 수로 표시하는데 10의 3승, 구약교회, 신약교회의 구원받을 수의 총수를 144,000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666도 이렇게 크리디트 카드에 666 찍어 가지고 하니까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수가 아니고 이제 이것도 글자 그대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24장로도 마찬가지지요. 보좌에 보면 24장로가 있어요. 거기에 장로들이 앉아 있어요. 그들이 면류관을 벗어 던지면서 하나님의 어린양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니 24장로는 거기 앉고, 우리는 그러면 서 있어야 되는 거지요. 그런게 아니고, 그 24장로도 구약의 교회 대표의 12, 신약교회 대표의 12, 합해서 표현해서 24장로입니다. 그러니까 신구약 교회의 구원 얻는 총수의 대표가 24장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 666도 마찬가지 원칙에 의해서 그렇게 그냥 크레디트 카드에 666 찍어 놓았으니까 이게 적그리스도의 수다. 그러니까 더이상 우리가 지옥 가지 않을려면 은행하고의 거래를 하지 않아야 된다. 지금 세대론의 책들 가운데 그런게 많이 나와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석할 것이 아닙니다.
기억소자와 ( )는 제가 잘 모르겠고 ( ), 하나님의 수에 관한 책을 제가 받았는데 키신저가 666으로 나와 있습니다. ( )는 솔직히 우리는 키신저가 적그리스도라고 믿지 않는다. 자, 사실 누구든지 알파벳 숫자를 조장을 한다면 어떤 사람의 이름도 666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자, 666이라는 수가 어떻게 나왔는지 그것은 참 설명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이 666이라는 수를 그냥 그대로 딱 붙일 수 있을 것이라, 이름에다가 연결시켜서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666이란 수는 데살로니가 후서 2:3절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오스카 쿨만은 “저느느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라 하느니라 지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호라동하였으나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이 부분을 오스카 쿨만이 해석해서 바로 적그리스도를 막고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복음의 권세이기 때문에 복음을 힘있게 전파하고 있는 바울 자신이 적그리스도를 막고 있는 자라고 돌려서 지칭을 했다 그렇게 해석하고 있어요. 오스카 쿨만이!
그런데 이 불법의 사람이라고 그러면 인류 역사가 그 종말에 도달해서 나타났을 때 악의 화신으로 나타날 사람이라. 악의 화신을 불법의 사람으로 표현하는 거지요. 그러면 666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제일 처음의 6은 6일에 창조된 전 창조를 지시한다. 그리고 60은 창조의 성취로 완성되었을 때를 말합니다. 600은 창조가 모든 과정에 다 도달해 완성에 이르렀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이 창조를 포함한 모든 인류가 역사의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 나타날 악의 화신을 666으로 썼습니다. 그러니까 그 악한 자가 초자연적으로 오기로 하지만 물론 뒤에 용이 서 있지요. 사탄이! 그러나 역사의 진행의 과정에서 나타나요. 처음에 낙원에서 나타난 악이 역사적인 과정에서 계속해서 나타나는데 이 악에 불법이 마침내 역사가 거의 그 완성 단계에 이르렀을 때 나타날 한 개인으로 집중될 악의 화신이다. 그것이 666이라.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한국의 장로교들이 신앙고백서로 채택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교회론 부분에 적그리스도는 교황이라 그렇게 햇다고 하는데 아까 내가 로마 교황을 현재 상황에서 적그리스도라고 볼 수 있느냐는 데 대해서 내가 의문을 제기한 데 대해서 반론을 제기했는데 이제 이 교리에 대한 로마교회와 개신교회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로마교회에서 교리는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동일하게 믿어지는 것 그것이 교리입니다. 그래서 여기는 수정이라든지 변개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로마교회가! 그런데 우리 개신교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성경을 모든 것의 최고의 표준으로, 궁극적인 척도로, 또 원리 원천으로 삼기 때문에 교리를 우리가 가장 필수적으로 여겨도 그러나 교리의 수정 가능성 인정을 합니다. 우리가 성경 이해에 더 깊이 나아가고 바로 나아가면 우리가 성경을 바로 이해하면 잘못된 성경이해에 기초된 교리들을 수정할 수 있습니다.
로마교회는 교리가 전혀 변개 불가능한 일이지만 우리 개신교에서는 이와 같이 성경 이해가 깊어질수록 교리도 수정되고 바르게 교정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개신교에서는 제 2 니케아 공회가 787년에 소집되어서 주요한 교리들을 결정을 했는데 이때도 성상숭배를 교리로 채택했습니다. 마리아 상 같은 것 말이예요. 상을 숭배하도록 결정을 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그때도 로마의 황제들은 성상 숭배르르 반대를 했는데 교회의 주교들은 찬동을 했어요. 그래 황제를 바꾼 거지요. 그래 가지고 지상적인 것은 하늘의 것의 상이라, 그래서 상을 숭배해도 된다 그렇게 결정을 했습니다. 787년 제 2 니케아 회의 때! 그래도 그 공의회가 그렇게 결정을 했어도 중요한 의제를 결정을 했기 때문에 787년 제 2 니케아 공의회까지를 우리가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결정된 공의회 결의들은 전혀 성경에 근거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로마 교황의 무오설을 우리가 결코 인정하지 ㅇ낳지요. 그것은 자유주의든지 보수주의든지 마찬가지입니다. 로마 교황의 무오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다 같애요. 개신교의 공통점입니다. 그렇게 배척하는 면에 있어서는 아직도 로마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보는 경향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보통 이제 적그리스도가 어디에서 나오느냐에 대해서 지금 지배적으로 많이 퍼져 있는 견해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지금 로마, EC하고 ( ), 유럽공동체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올 것이라, 왜냐하면 유럽공동체가 열 나라가 아니고 열 두 나라지요. 터어키가 가입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터어키, 터어키가 아시아계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 터어키가 EC에 가입하려고 해요. 왜 그렇습니까? 지리적으로 터어키가 소아시아 반도를 건너서 그 마게도니아 반도의 일부에 터어키 나라의 영토가 있습니다. 그것도 구라파란 말이예요. 강 전너서는 구라파니까, 바다 건너는! 그 영역 때문에 터어키도 유럽 공동체에 가입하려고 합니다. 12개 나라인데 지금 ( )가 가입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 가입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72년까지는 한 통상권이 된다. 그러면 강력한 강력한 블록화가 이루어져서 영내에는 완전히 자유로운 무역이 이루어지지만 그 EC 밖에는 완전히 강한 장벽으로 들어오기 어렵다. 그렇게 많이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만큼 많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요. 그래도 옛날 신성로마제국 시대처럼 EC가 그렇게 통합되어서 돌아갈 것이가? 아직은 속단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전에는 상당히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이 예언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도 하고 있지만... 보통 미국의 일년 초가 되면 주요한 경제 학자들이 모여서 금년도, 89년도 미국의 GNP가 총 몇 조원 몇천억원이 될 것이라, 달라가 될 것이라 계산해 냅니다. 모든 자료를 다 수집해 가지고 그래서 이와 같은 생산성으로 이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면 총 연말에 도달할 국민 생산을 달라로 환산했을 때 몇천억 몇조가 될 것이라 계산해 내는데 상당히 많이 접근하는 것은 사실이예요. 그러나 30억, 50억 이 정도 차를 제외하고는 거의 마지막 통계낼 때 접근하는 것은 사실이예요. 그러나 딱 맞아 떨어지는 통계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미국 사람들이 쓴 것을 내가 보니까 더 이상 예언하는 것에 대해서, 미래에 대해서 과학적인 자료에 의해서 예언하든지 이것이 도대체가 만지 않지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그것을 확정적으로 말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언하는 것을 그렇게 타당하지 못한 걸로 봅니다.
그러면 EC가 한 세대가 지났을 후에 강력한 중앙정부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7년 가까이, 6년 3개월 제가 구라파에 있었는데 물론 화란이란 작은 나라에 있어서 파리나 본 같은데 살았으면 조금 더 시각이 달라졌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작은 나라에 있어서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쉽게 정치권력까지 통합이 되어서, 물론 유럽의회가 있습니다. 유럽의회가 있어서 통상문제도 거기서 협의하고 그렇지요. 정치 권력까지 통합해서 하나의 정치권자가 유럽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확대되어서 스칸디나비아 저 위의 나라들까지 다 EC에 통합을 해가지고 다스리게 될 것인가에서 제가 현재로는 확정적으로 말을 할 수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쉽게 될 것인가? 이제 전통적으로 구라파 사람들의 한결같은 의식 속에 자기들이 로마의 연속이라는 사고가 지배적입니다. 로마를 연속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프랑크 왕국이 다시 나라를 세웠을 때도 로마 나라를 재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항상 로마나라의 재판을 꿈꾸는 것... EC에서 적그리스도가 출현할 것이다.
몇달전에 한국 여자로서 하란인하고 결혼한 분이 있었어요. 그 남편이 화란에서 제일 좋은 공과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고등학교 밖에 졸업을 안햇는데 펜팔을 해서 결혼을 해 잘 살아요. 그런데 한국엘 왔어요. 와 가지고 언니를 만나니까 소위 세대론에서 나온 책들을 열심히 읽는데 조용기 목사님 이야기를 들먹거리더라고요. 거기에 보면 적그리스도가 지금 EC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 그러면 EC를 통합해서 다스릴 통치자가 벌써 이 적그리스도가 출현하는 것은 곧 가까운 일이다. 그러니까 집 사고 아파트 사고 또 사업하고 애쓸게 없는 거지요. 곧 종말이 다 되었으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불안에 가득 차 가지고 이러고 있는데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형부가 그런다 이거예요. 그래서 나한테 오니까 그래 설명을 죽 다 해 주었어요. 가서 다시 설명을 해줘라. 그래 다시 설명을 해주고 또 설득을 하고 적어가고 해서 말해 주니까 이제 거기서 놓여 났어요. 그런데 그런 주장을 하시는 분은 엘림 복지원 같은 큰 ( )를 짓고 그것도 수백억 재산으로 평가될 일이 아닙니까? 또 신문사 내지 않았어요? 신문사! 그것도 완전히 개인 소유로 내지 않았습니까? 내일 모레 EC에서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다스릴 날이 곧 오는데 신문을 왜 내고 엘림 복지원을 왜 만들어 내냐고요. 물론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서 그런 좋은 뜻으로 했지요.설명을 다 듣고 나서 내 책도 일고 거기서 놓여났어요. 해방감을 갖고 이제 다시는 조국에는 안가겠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어요.
두번째로, EC가 앞으로 미국의 경제가 쇠퇴하면, 지금도 많이 쇠퇴했지요. 쇠퇴했는데 이제 EC가 강대해지면 결국은 항상 분쟁은 아랍인들과 유대인들간에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때 EC에서 통합을 하는 통치자가 거기 개입해서 중동문제 평화를 이루어 줄 것이라 그렇게 보지요.
그리고 이제 다른 견해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유대인 중에 적그리스도가 나올 것이라. 왜냐하면 외부의 세력은 도저히 아랍세계와의 평화를 이루어낼 수 없기 때문에 유대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전에 앉는다.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이 성경대로 하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거기다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피 제사를 복귀해서 그때에 아랍전쟁과의 문제를 해결하는 통치자가 나타나서 자기를 적그리스도로 선언할 것이라.
글쎄요. 유대인 스스로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올 수 있을 것인지 참 기대되기 어렵지요. 그러면 점점 이렇게 세계가 통합되는 과정에 있어도 아직 현재로는 누구의 손에, 어느 국가의 손에 의해 세계 모든 권력이 통합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단지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 )에서 했던 말,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사람이 누구라고 억지로 갖다 뜯어 맞추는 일은 삼가야 될 것입니다.
이마의 표 받는 것, 적그리스도의 수를 받으므로 은해의 거래가 점점 더 한국도 더하지요. 한국 사람들은 외국 사람들은 전부 다 자기 수표를 가지고 물건 사고, 슈퍼에 가서 물건 사고 그러는데 우리 한국은 전부 현금을 좋아하거든요. 그렇지만 큰 돈은 다 수표로 하지요. 점점 더 세계의 경제가 통합되면 은행 거래가 완전히 전 세계적으로 통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 것도 배제될 수가 없어요. 지금처럼 이렇게 통합되는 과정으로 가면 세계의 금융의 흐름이 전체로 통합되는 그런 것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은행의 거래를 못하게 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할 수 있지요.
자, EC에서 나온다. 유대인에게서 나온다. 물론 유대인에게서 나온다는 그런 어느 정도의 근거도 가능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지금도 세계 재정권의 거의를 쥐고 있기 때문에 참 배후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요. 미국에서 사는 유대인들이 600만 밖에 안되기 때문에 아주 극소수지요. 소수 중에 소수인데도 미국에서 대통령이나 상원의원을 해먹고 그리고 하원에서 의원을 해먹기 위해서는 유대인에 대해서 한 마디라도 빗나가는 말을 해가지고는 정치생명이 끝납니다. 살 길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까지 어느 대통령치고 이스라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러나 이런 사태의 진행 때문에 우리가 곧 유대인들 가운데서 적그리스도가 나올 것이다. 글자대로 데살로니가후서 2:3절 이하를 해석해서 하나님의 성전에 앉는다. 그래서 성전, 그런 것 보다는 적그리스도가 모든 정치권과 경제권, 종교권까지 통합을 하면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자기를 하나님으로 경배하도록 강요하게 되고 그 경배를 로마 황제가 그랬던 것처럼 거부하는 자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그와 같은 핍박이 심하게 진행되지요. 그때가 환난의 때입니다.
그러면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어떤 일을 할 것이냐? 물론 전세계적으로 통치를 하지만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박멸하기 위해서 전세계적인 핍박을 감행할 것입니다. 전세계적인 핍박,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더 이상 존속하지 못하도록 하고 교히 형태를 가진 자들이 다 적그리스도에게 붙어서 그를 섬기는 자리로 되돌아 갈 것입니다. 그래 메시야로 모시는 거지요. 전세계를 통치하게 되니까 그리고 진정으로 이 적그리스도에게 경배를 거부하는 자들은 살아남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쯤 있을 것이냐? 지금은 속도가 하도 빨리 진행되기 때문에 먼 세월이 안 걸릴 것으로 보지만 나는 날짜를 계산하는 분들처럼 그렇게 곧 이루어질 것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구원된 인류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계발된, 창조의 계발, 열매들도 다 하나님의 나라에 함께 들어가기 때문에 종말이 갈수록 하나님의 창조된 ( )과 깊어져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결과들이 나타나고 그것들이 다 하나님의 나라에 통합될 줄로 그렇게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데살로니가후서 2:3절 글자대로 보다는 하나님처럼 경배받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옳을 것이라.
그러면 이렇게 일이 진행되면 종말이 문에 다다른 것은 확실하지요. 그러면 이제 조금 순서를 바꾸어서 정말로 역사가 종말에 도달할 수 있느냐? 과학적으로 과학에 의존해서 현재 나와있는 과학의 이론과 결과들에 의해서 사태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목사님들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그래요. 아무리 자연과학이 눈부신 결과를 내고 그 때문에 흔들림이 없는 것 같은 원리와 원칙이 제시되어도 자연과학은 결코 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과학은 곧 변합니다. 과학에 의해서 확정적인 단언을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18,19세기 헐버트라고 하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 철학을 건설할 때에 뉴톤의 물리학 중에서 물질의 질량의 법칙 중에서 자기 철학을 건설했습니다. 질량의 불변의 법칙 거기에! 이것이 가장 확실한 원리로 원칙으로 제시되니까 그렇게 믿고서 했는데 거기에 버틀란트 럿셀이 심하게 공격을 했습니다. 20세기에 유명한 철학자요 수학자인 럿셀이 과학은 확정적이고 불변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과학에 기초해서 했다. 지금 와서는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라고 하지 질량 불변의 법칙이라고 하지 않지요. 미지의 세계에서 핵들이 결합되어 있던 것들을 깨면 거기에 그러니까 원자 속을 묶고 있던 결합들이 소실되어 버려가지고 찾아낼 길이 없다. 그래서 에너지 결손을 말해요. 결합에너지가 소실되어 버려서 나타나지 않는다. 이제까지 전통적인 이해에 의하면 그 에너지가 형태만 바꿀 뿐이지 화학변화 전후에 에너지 총화는 같았다. 그것이 전통적으로 이해되어 왔는데 지금은 그렇게 말하지 앟지요. 그러니까 과학에 의해서 신학, 우리의 믿음의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 전혀 맞지 않고 또 부당한 것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과학 중에서 우주론 중에 ( )이론이 있습니다. 혹은 핵폭발이론, 어느 시점에 우주 한 공간에 물질이 놓였다. 그 물질이 공간에 놓였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팽창하면서 우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 이 퍼져나가면 소위 엔트로피 법칙, 그 가용 에너지의 감소법칙에 의해서 퍼져나가는 것이 어느 수준에 가서 멈춰질 것이다. 무한정 에너지가 공급되고 계속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멈추게 되면 그 때 세계가 서게 될 것이다. 그래 지금까지 나타난 가장 확실하고 보편적인 타당성을 갖는다는 열역학의 법칙, 1법칙과 2법칙, 1법칙은 에너지 보존법칙, 2법칙은 엔트로피 법칙인데 갈수록 가용 에너지가 줄어들기 때문에 일정한 기간이 진행되면 이것이 멈춰질 것이라.
그 예로 달이 지구가 있는데 달이 지구를 도는 그 궤적이 조금씩 늘어난다고 그래요. 그런에 이 궤적이 늘어나는 것이 1,2년을 두고 늘어나는 것이 아니고 몇십년을 두고 관찰해야 되는 것이니 최소한 30,50년을 두고 관찰해야 되니까 그것도 확신적으로 말할 수 없는 거지요. 그러나 하여튼 달도 지구를 중심하고 도는 궤적의 길이가 늘어나고 있다. 그래 이렇게 무한정 늘어나고 나면 나중에 없어진다는 이론에 대해서 ( ), 진동설을 겸해가지고 확장해 가지고 다시 줄어든다. 그래서 원상을 다시 유지한다는 그런 이론이 있습니다만 흑백 이론을 가지고 종말을 많이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러나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런 식으로 우주가 종말이 된다면 아직도 수십억년, 수백억년 가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속도로 자꾸 퍼져나가고 늘어가는 것이 된다면, 그리고 과학이 이것도 이론이지 확실한 법칙이 아니지요. 이론입니다. 어떤 사태를 설명하기 위해서 가설을 세워가지고 실험을 반복해서 그것이 많은 사례들에 의해서 입증이 될 때 그것을 이론으로 말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이론이지 법칙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곧 뒤집히지요. 요새 플라스마 이론을 가지고 태양열과 같은 그것 보다 더 높은 상태에 나타나는 물질의 상태가 풀라스마라 그래 가지고 플라스마 이론으로 우주의 생성을 설명하는 그와 같은 이론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제 창조론에 많이 연결시키기 때문에 반동으로 나오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이 들었는데 과학의 이론은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이것에 의해서 우주가 역사가 진행된 다음에 역사가 종말에 도달할 것이라 그렇게 결코 말할 수 없고 말해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자연과학자들이 정말 자신있는 소리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광대무변한 우주 앞에 개인들이 자연과학자들이 너무 왜소하고 초라한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옛날처럼 그렇게 담대하고 자만에 빠진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들의 거리도 허블상수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일정한 거리 이상을 넘어가면 그 별들의 거리에 대해서 확정적인 말을 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우리가 과학에 대해서 종말이 있을 것이라 그렇게 기대하고 거기에 대해서증거를 받으려고 하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 이론입니다. 철학적으로 이 우주가 끝이 있느냐 이것을 증명해낼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에 진술하기를 철학적으로는 이 우주의 시작을 증명도 부인도 못한다. 투마스 아퀴나스가! 철학적으로는 이 우주의 시작을, 창조가 시작되엇다고 하는 것을 증명도 부정도 못한다. 그래서 철학자로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한 말입니다. 신학자로서는 달랐겠지만! 근세에 와서 칸트가 소위 전통적인 신존재 증명을 다 무너뜨렸습니다. 무너뜨리면서 우주가 시작이 있느냐, 아니면 영원하느냐를 두 가지로 다 증명 가능하다. 시작이 없이 무한정 계속되었다 해도 가능하고 시작이 있어서 되었다는 것도 다 증명 가능하다. 결국 그 말은 철학적인 논리적인 사유로 이 우주의 시작과 종말을 결코 말할 수 없다.
다음은 이제 철학적으로 안되니까 인륜적으로 도덕적으로, 많은 사람들 속에 종말에 대한 생각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이것 사례들을 많이 수집해 갖고 통계를 내지 않아서 그렇겠지만 제가 고등학교 땐가 중공하고 대마도하고 싸우면서 거문도를 사이에 놓고 막 폭격을 가할 때에 내가 시골에 갔더니 거기 할아버지가, 동네 할아버지가 오셔서는 자, 이렇게 돼 가니 3차대전이 나서 세상이 끝나지 않겠느냐? 그래도 학교 다니니까 네가 더 알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나한테 물어봐요. 그런데 내가 무슨, 고등학교쯤 다닌다고 말할 수 있는 뭐가 있습니까? 그래 좀 싸우다 말겠지요. 이런 식으로 대답을 한 것 같애요. 그러니까 그분이 하는 말이 다 하늘의 정하심이 있는데 그러니까요, 내가 자란 동네가 서씨들의 단일 성받이 동네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에 대해서 아주 강력한 반대를 많이 갖고 있고 ( )는 아주 극소수예요. 그런데 이렇게 반기독교적인 정신이 가득한 분이 오셔가지고 전쟁이 나니까 온 세상이 뒤덮여가지고는 세상이 끝날 것으로 두려워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전쟁이 나고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면 다 종말이 오는 것으로 생각을 하지요.
그렇게 볼 때에 사람들의 마음 속에 종말에 대한 뿌리 깊은 의식이 있는 것으로 봅니다. 왜 그러냐? 하나님의 언약 체결 때문에 그렇지요. 하나님이 처음 역사해서 인류와 언약을 체결하시고 그 언약을 체결하시면서 책임을 다하게 하셨고 그리고 그것을 마침내 보고하게 하셨으니까 이 종말에 대한 인식이 대부분 다 갖고 있는 것으로 봐야 맞을 것입니다. 그리고 낙원에서 하나님께서 두 인류를 세워놓고 심판하실 때도 종말을 분명히예시하셨다고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런 것에 의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류역사를 통치하시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이루시기 위해 천지의 대주재가 되셔서 역사를 주재하시는데 그분이 자기의 구속을 다 완성하실 때에 세상을 완결시키실 것입니다. 그래 이것은 현재 진행된 체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진행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를 마침내 심판하실 것이 있을 것이라. 그러니까 심판에 대한 생각이 사람들에게 다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존재를 그들 마음 깊이 다 인정하고 있지요. 제가 과학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지나가는 에피소드로 이야기하고 싶은데 종말에 가면 시간이 영원에 통합되지요. 통합되는데 폰 바이젝커라고 하는 유명한 물리학자가 있어요. 이 사람이 쓴 책에 보면 이 사람은 세계가 무한하다고 주장하는데 거기 보면 어떤 것이 있느냐 하면 이 처음 우주가 시작된 시간은 소실되어 없어진 것이 아니고 우주의 끝부분에 가면 시간과 공간이 합친다. 그래서 이 우주의 중앙에서 시작된 시간의 시작이 우주의 끝에서 만날 수 있다 그래요. 그래서 내가 웨스트민스터에서 개핀하고 신약신학을 토론할 때 그랬어요. 하나님께서 시간이 영원에 통합되는 구조를 창조에 넣어 놓으셨다. 그러니까 시간의 끝에 가서 만난다. 그것을 역으로 뒤집으면 바로 우주의 시간에 영원이 통합되는 것으로 넣어 놓은 것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처음 상태로 되돌아가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
자, 지나가는 에피소드고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하나님께서 인류역사를 주재하셔서 자기 백성들을 다 만드시며 그리고 자기의 창조가 계발되어 그의 영광이 충분하게 드러날 때에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를 종결시키시고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를 도입하시므로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시는 그때를 이루실 줄로 우리가 믿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례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철학이나 과학을 끌어오는 것은 좋으나 철학과 과학에 의해서 그것을 기초해서 설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과학은 오래갈 것 같고 확실한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곧 없어질 것도 있기 때문에 또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그렇게 열등의식을 갖고 그렇게 두려워할 것도 없는 것 같애요. 과학이 눈부신 기술과학으로는 일을 했어도 그게 다 가설의 영역이 대부분이니까요.
제가 여기까지 왔는데 순서를 이제 바꾸어서 조금 시작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시간이 다 되어 가니까... 중간기 상태에 대해서 재림으로 바로 가지 않고 중간기 상태로 조금 살피려고 합니다. 중간기 상태라고 하는 것은, 중간 상태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죽음부터 주님 재림까지의 개인의 영혼 상태를 중간 상태라 그럽니다. 역사의 영역에 속하지 않으면서 죽은 자들이 어떤 형편에 속하느냐, 그걸 따지는 것이 중간 상태라고 말합니다.
보통 중간 상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견이 많이 있고 또 그 처소에 대해서 여러 가지가 있고 또 중간기 상태에서 새로운 기회들을 얻는다고 하는 생각도 드는 것에 대해서도 로마교회 외에도 개신교회에 아주 이 생각이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종말 마지막 재림을 하기 전에 이 부분을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보통 죽음은 세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자, 죽음은 첫째로 하나님에게서의 분리이고,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죽음은 영과 육체의 분리일 뿐만 아니라 또 죽음은 우리가 사는 하나님의 세계, 창조 우주에서의 분리를 포함합니다. 단지 우리가 영육이 분리되는 것만 알면 문제가 많습니다. 영육이 분리되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그 죽음이지만 죽음은 창조와의 분리라는 말을 분명히 기억을 해야 이게 문제를 푸는데 크게 도음을 받습니다. 우리는 성경대로 죽음이 진화론자들의 말이나 혹은 펠라기우스나 다른 파들처럼과 달리 죽음이 죄 때문이라고 하는 것, 또 현대신학도 죽음이 죄 때문이라고 하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 구조 자체가 원래 죽게 되어 있고 이렇게 불합리하고 불완전하게 임시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하지 인류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죽음이 들어오고 하나님의 저주로 인해서 현재와 같은 죄 상태 아래 놓임으로 이와 같다 하는 것은 전혀 인정하지 않지요.
과학이 더구나 이런 것을 증명할 수도 없고 가르칠 수도 없기 때문에 과학적인 사고로 세뇌받은 현대인들, 또 그 환경에서 신학하는 사람들이 이 죽음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함에 대한 하나님께 대한 범죄로 인한 저주로, 정죄로 형벌이라고 하는 생각이 현대인들에게 없습니다. 본래 다 사람으로서 이렇게 출생해 가지고 죽게 되어 있는 것이지 그런 존재, 죽지 않을 존재 방식을 가진 존재를 한번도 우리가 본적이 없기 때문에 인간 존재 자체가 이렇게 임시적이고 불완전하게 창조되었으므로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었고 죽음의 씨를 처음부터 갖고 있는 존재로 봅니다. 그래서 현대신학은 본래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을 임시적으로 불완전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하나님의 창조의 중보자를 세우셔서 그 창조 중보자라고 해서 성경이 말하는 창조 중보자가 아닙니다. 현대 신학에서 말하는 창조 중보자는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 중보자가 아니예요.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을 지으실 때 본래부터 임시적이고 파편적이고 불완전하게 지으셨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원형을 그 후에 지어 놓으셨어요. 그리고 그 원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완성하기로 작정하셨어요. 그러니까 그 원형이 예수 그리스도예요. 그 사람처럼 짓도록 하나님께서 작정을 하셨어요. 바르트도 그렇게 논의를 전개합니다. 바르트의 제자들도 그렇게 논의를 전개합니다. 로마교회도 그렇게 논의를 전개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불완전한 인간을 완성하려면 기준이 있어야 될 게 아니냐, 표준을 예수 그리스도로 정하셨습니다. 그래 처음 아담을 지으실 때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란 역사적 인물을 하나님의 눈에다 보고 아담을 지으신 겁니다. 그래 처음부터 완전하게 창조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혹 우리가 전통적으로 믿어오는 B.C 4004년에 천지 창조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4000년 후에 지어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땅을 지을 때 눈에다 넣고 지으셨어요. 지금 아담은 임시적으로 파편적으로 지으셔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인 인물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형으로 고쳐 지으시기로 하셨어요. 그 바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고쳐 짓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닮아가야 할 표준이 예수 그리스도라, 그 면에 있어서 나사렛 예수가 창조 중보자가, 성경이 말하는 창조 중보자가 아니고요! 그래도 창조 중보자라고 그럽니다.
자, 그러니까 인간 본성의 죽음이 본래적이고 자연적인 것이예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죄는, 죄에 대한, 죄과에 대한 형벌로 도입되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분리이고, 우리가 말하는 죽음은 영육의 분리인 동시에 그것은 창조, 우주에서의 분리라. 이것을 분명히 세번째를 분명히 안하면 조금 문제점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의 귀신론 같은 것도 지금 많이 유행해 다니는 귀신론, 예, 일단 죽으면 창조세계에서 분리되기 때문에 김기동 목사의 귀신론의 잘못이 120년 살아야 되는데 60년 살면 60년 떠돌아 다니다가 간다 그러는데 그런게 아니고 죽으면 죽는 순간 이 창조 세계에서 완전히 분리되어서 갑니다. 죽음이 이렇게 형벌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사는 곳이 산 자의 세계예요. 그리고 주 안에서 죽은 자들도 우리 인간에게는 인격에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가 필수적인 요소로 귀결되기 때문에 육체가 없는 상태는 부족한 상태입니다. 완전한 인격의 상태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품에 가 있는 자들도 죽은 자의 세계에 속한다 그럽니다. 그러니까 일단 죽으면 영육이 분리될 뿐만 아니라 창조세계와 분리되기 때문에 그 영혼들이 아직도 세계와 미래를 갖고 왔다 갔다 하는 게 하니예요. 떠돌아 다니며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 내가 며칠 전에 어느 은사를 만났는데 자기가 근무하는 실습하는 병원에 어느 박사가 귀신이 들렸는데 자기 오빠의 영이 들어 있다. 그런다는 거예요. 그래서 귀신들린 흔적을 갖는다는 얘기를 나한테 해요. 그래서 알아듣게 설명하기는 어려워도 그 오빠의 영이 그냥 들어온게 아니고, 물어보니까 오빠가 결혼하지 않고 죽었다더냐 그러니까 그렇다고 해요. 그 귀신이 그 영을 받아서 처녀에게 들어간 거지요. 그런 것이지 그 오빠의 영이 사람에게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영육의 분리이고 창조하는 분리가 아니어서 이 지상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들! 죽으면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로 딱 갈라지는 것이지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죽은 자가 산 자의 세계로 넘나드는 것도, 죽어 가지고 그 영이 이 세계에 방황하고 배회하고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죽으면 중간기 처소로 성경대로 천국과 지옥이 있지 별도의 중간기 처소가 따로 있지 않다. 거기까지만 말씀하겠습니다.
질문>저기 보면 불신자에 대한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높은 사람들을 위하여 불신자 왕의 사역에 대해 간여하시는가?
응답>예, 하나님께서 인류를 통치하시는데 이렇게 시민정부를 세워 가지고 인류를 다스리게 하시고 그들이 불신자이건 신자이건 간에 그 팔의 권세를 맡기심으로 악이 제재되고 질서와 선이 이루어지므로 인류의 시민생활이 가능하게 하고 그렇게 해서 인류 종족이 보존되어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받도록 하셨을 뿐만 아니라 국가 생활을 통해서 국가 질서가 세워짐으로 창조를 계발하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정부는 하나님께서 인륜세계를 다스리는 통치의 방식이예요. 그러니까 타락 후에는 하나님께서 시민정부를 세워서 다스림이 악을 억제하는 방편이고 그리고 인류 세계가 존속되게 하는 법이예요. 그러니까 불신자이어도 악을 제재하고 선을 포상해서 선을 장려해서 시민생활이 가능하게 하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그리고 바빙크가 ( ), 그것은 고등 종교들에 성령께서 역사하셨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그것이 맞지 않는 것은 아무리 고등한 종교도 그런 종교는 다 우상종교이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참 종교가 아니지요. 그런데 거기에 역사하셔서 기도굑 수준으로 오도록 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마침내 모든 종교가 발달하면 기독교 수준에 도달한다. 그렇게 볼 수 있지요. 그러나 맞지 않다.
다음에 카위퍼가 일반은총에 대해 ( ). 일반은총은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 이후에 그때 대기권과 생태계가 많이 변했습니다. 보통 그 전에 노아 홍수 전에 비가 쏟아졌지만 땅에서 솟아 올랐지요. 보통 창조론 과학자들이 그때는 수증대가 있었을 것이라, 그래 수증대가 설치되었으므로 이렇게 보온 효과가 큰 물이 열을 받아 가지고 열을 흡수했다가 밤에는 모자랄 때 발산하므로 밤이나 낮이나 기온 차가 없게 해서 아담과 하와가 옷을 입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그와 같은 온실 효과를 갖도록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홍수 전에는 온 지구가 고루 따뜻해서 모든데서 생물이 번창했다 볼 수 있지요. 그렇게 번창하도록 했기 때문에 북극과 남극에 석유와 석탄이 많이 매장되어 있는 것을 그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그렇게 추워갖고야 거기에 별로 많은 나무들, 식물들이 자랄 수 없지요. 그때는 수증대에 대해서 온 지구가 온실 효과를 가지므로 따뜻했기 때문에 북극과 남극에 다 거의 나무가 잘자라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노아 홍수로 그 수증대를 헐어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기상의 변화가 아주 대대적으로 커졌지요. 참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연의 질서를 고정시키고 그리고 일반 은총의 역사로 악이 계속해서 죄악에 흥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민 생활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양심이라든지 여론이라든지 시민선이라든지 이런 것들에 의해서 악을 마음대로 행하지 못하게 했지, 그런 것들이 그리스도에게로 가도록 결코 끌어가는 역할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와서 선포될 수 있는 기관은 마련되고 유지되어 왔지, 그 일반은총의 역사가 바로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은 결코 마련하지 못합니다. 둘째 시간에 설명했듯이 타락한 후에 그들이 하나님을 섬긴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지 그렇게 일반은총의 역사 수준에서 된 것이 아닙니다.
다음에 마태복음 24:29절에 하늘의 별들도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하는데 그때 여기 이제 박윤선 박사는 대기권의 변화를 말한다고 하는데 지금 창세기하고 요한계시록을 같이 읽으면 이 별들이 언제까지만 빛을 내고 빛을 발하느냐 하면 현 역사가 진행되는 데까지만 그럽니다. 그때는 그리스도 자신이 영광의 빛을 비추고 하나님의 빛이 비취므로 태양과 별들이 더 이상 빛을 낼 필요가 없어여. 그런 의미로 이 별들의 세계가 그 봉사의 기간이고 역사적 기간이라 잠정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 별들과 태양의 영광들은 하늘 나라에서 종말 때 전개될 그 찬란한 그 영광의 빛을 예표하지요. 그러기 때문에 주님 오실 때에 이 현 질서 체계를 바꾸시기 때문에 이 처체계가 흔들릴 것으로 봐야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6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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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강
안녕하십니까? 성경말씀은 누가복음 16장입니다. 제가 19절을 읽은 후에 한 절씩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31절 까지입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 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오늘 이 시간에는 중간 상태를 오늘로 마치기를 바라고, 제일 종말론의 중심기론이 천년기론인데 다음 시간부터 천년기론을 여러분과 같이 논의해 보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 죽음은 하나님께로 부터 분리이고 영과 육체의 분리이며 또 인간의 거주환경인 우주로부터의 분리이다 거기까지 말씀드렸습니다. 죽어서 어떻게 되느냐? 그런데 과학에서는 영혼이 육체와 별도의 존재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 과학이 다 부인합니다. 과학은 감각적인 기관에 의해서 대상들을 탐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이 감각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육체로 끝나고 그 이상에 대해서는 전혀 없는 것으로 과학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없는 것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특히 현대 의학에서 영혼이 없는 전통이 그대로 받아져서 지금 육체안에 독립적인 존재로서 영혼이 존재한다 하는 것에 대해서 거의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길버트 라일이라고 하는 20세기의 영국의 경험론 철학자에 의하면 “우리 몸 안에 육체하고 구분되는 독립된 별도의 존재가 있다고 하는 것은 마치 기계 안에 유령이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우리 안에 별도의 독립적인 존재가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은 마치 공장의 기계가 돌아가는데 그 안에 옛날처럼 유령이 들어 앉아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과학적으로는 전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정말 과학적으로는, 감각기관을 통해서만 모든 걸 탐구하는가? 그래서 표상이라는 말이 철학에는 참 깊이 쓰여지고 있어도 우리 한국 말에는 조금 생소한 말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냥 칸트에 의하면 물리학 시간의 (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기관이 상을 만든다. 사물의 이치를 바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 자체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우리의 의식 기관이 이와 같이 사물들을 볼 수 있도록 이와 같이 상을 만들어 준다. 그렇게 상이 이루어지는 것만 감각기관으로 좇아갈 수 있는 것이어서 그것만 과학의 대상이라,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그래서 심리학이나 의학에서 영혼은, 그것을 만일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두뇌의 기능, 작용일 뿐이지 별도의 독립적인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주장하고 그것이 공통적으로 맞는 것으로 다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미국에 갔을 때에 그 어느 마취하는 한국 의사가 그런 이야기를 해요. 사람을 마취를 했더니 영혼이라는 별도의 존재가 있으면 비록 육체가 마취되었다 하더라도 그 영혼으로서의 기능을 나타내는 것이 있어야 할 터인데 마취 상태는 완전히 송장이었다. 그러니 그게 진짜 영혼이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런 이의를 토론 석상에서 제기해요. 평신도니까! 자, 그래서 전통적으로 과학적으로는 우리의 두뇌작용 외에 별도의 독립기관으로서 영혼이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 왔습니다.
그런데 과학도 다 항상 선입주견, 전제가 더 중요한 것이어서 같은 과학자이면서도 영혼의 존재를 분명히 믿고 주장하고 가르치고 또 자기대로 증명했다고 하는 삭람이 있습니다. 와일드 팬 필드라고 하는 미국 태생의 카나다 두뇌 과학자입니다. 이 교수는 본래 의학을 한 사람이 아니예요. 1921년 프린스톤 철학과를 졸업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의 일류대학 몇 개 중에서 미국은 모든 과가 일류대학이면 다 좋은게 아니고 대학별 과별로 좋은 대학이 있어요. 철학으로는 지금도 자타가 공인하듯 프린스톤을 제일 좋은 학교로 봅니다. 1921년 프린스톤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이 사람이 철학을 공부하고서는 두뇌의학으로 전향을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당시의 영국의 세계적인 두뇌학자인 쉐링턴 경에게 가서, 그때 당시 쉐링턴 겅이 또 세계적인 대가였는데, 세계적인 권위였는데 이 두뇌과학에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서 두뇌의학을 공부해 가지고 소위 팬 필드가 또 세계적인 권위가 되었습니다. 이름은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소련의 국보라고 하는 수학자가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쳤을 때 이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 와일드 팬 필드 교수를 초청했습니다. 소련 당국이! 그럴만큼 탁월한 두뇌 의학자 입니다. 가서 두뇌가 완전히 깨어졌는데 검사를 해보니까 의식이 있고, 그래서 수술하지 않도록 하면서 고치도록 그렇게까지 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두뇌의학을 해가지고 수없는 간질 환자들을 수술했습니다. 그리고 수천명의 교통 사고 만난 사람들을 두뇌를 수술해서 고쳤습니다. 그러니까 두뇌에 대해서만은 정말 구석구석 연구를 잘 했어요. 그러면서 얻은 결론이 영혼은 두뇌하고 개별적인 독립적인 존재로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또 그럴 뿐만 아니라 이 영혼은 출생하고 나아가서 창조된다고 해야 바르다고 하였습니다. 순전히 과학적인 근거에 의해 가지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두뇌 전체에 대해서 연구를 했는데 가령 어떤 기관에 어떤 기억을 장치하고 있는 기관에 전기를 걸어가지고 압력을 세게 가했을 때는 그 말을 보여 주면서도, 그 환자에게는 말해도 못하니까 그 근처에 비슷한 단어를 말하게 하고 모든 결론들을 다 집약해 가지고 그 사람이 영혼은 독립된 존재로 존재하고 그리고 사후에도, 육체의 죽음 후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일을 하려면 에너지가 공급되어야 하는데 육체를 떠난, 육체와 분리된 상태의 영혼은 에너지가 공급되지 아니하므로 새로운 일은 하지 아니하나 기억은 그대로 갖고 있다.
마치 우리가 공부를 많이 하면 이 사람이 어떻게 비유를 했느냐 하면, 영혼은 컴퓨터의 프로그램에 비유하고, 그리고 두뇌는 컴퓨터에 비유를 했어요. 그래서 우리의 지식 수준이 학습의 도가 높아갈수록 낮은 수준의 지식 활동은 거의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고 그 영혼이 개입하지 않을 정도로 이루어지고 그 수준이 넘어서는 영혼이 되어 고차원적인 수준에서 작업을 하게 된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이 1975년, 그 사람이 죽었는데 1976년 그후에 책이 나왔어요. 그 책 ( )란 책으로, 그 책을 죽기 얼마전에 미국의 철학회에 우리나라에도 철학회가 있습니다. 작은 철학회들이 있는 것을 아는데, 미국 전체 철학회에 가서 그 제목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마음의 신비”라 하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고 1975년에 죽었는데 1976년에 책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프로그램을 작성해 가지고 멐퓨터에 입력해 놓으면 프로그래머가 없어도 일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두뇌의 상당한 수준까지에 학습으로 그 과정을 마치면 그건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고 영혼도 더 고차원적으로 일할 수 있다. 컴퓨터 프로그램이 우리나라에서는 작은 퍼스날 컴퓨터 프로그램이 발달해서 프로그래머가 계속해서 키펀치를 쳐줘야 일이 되지만 큰 프로그램 같은 걸 보면, 미국에 있을 때 보니까 별로 큰 회사가 아닌데도 이 방보다도 큰 데이타가 아주 큰 컴퓨터가 여러 대 장치되어 있는데 프로그래머가 프로그램을 세워가지고 키펀치들이 와서 키펀치를 해놓고 가면 이게 계속해서 프로그램을 해내거든요. 누가 없어도, 자동적으로!
마찬가지로 영혼이 두뇌와 별도로 활동할 수 있고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뿐만 아니라 영혼은 출생하고 그리고 창조된다고 해야 맞다. 그리고 영혼은 그러기 때문에 육체의 사후에도 존재하고 또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러나 육체를 통한 에너지의 공급이 없이 때문에 새로운 지식의 습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생존시에 가졌던 모든 것이 다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그런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몸을 완전히 신진대사를 한번 하는데 7년이 걸린다고 하지요. 그러면 기억을 담고 있는 물질들이 7년이면 완전히 바뀌는데도 그 물질 자체에만 기억이 들어있다면 이게 완전히 바뀌어 버렸는데도 어찌해서 기억은 계속 존재할 수 있느냐? 그랬더니 이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반대가 일어났습니다.
그가 부록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있어요. 자기가 이렇게 자연과학으로 많은 사람들을 과학적인 증거에 의해서 이렇게 자기 학설을 뒷받침하고 그리고 정립을 했지만 그러나 이렇게 가도록 하는데 자기가 어려서 부모님들에게로 부터 받은 신앙교육, 주일학교에서 배운 하나님이 말씀의 교육이 자기로 하여금 이 결론에 이르도록 역사를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녀 교육에 있어서 집에서의 신앙교육, 말씀을 가르치는 것, 그리고 주일학교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큰지를 다시 새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놓으면 커서 자연과학을 아무리 연구하고 세상 학문이 어떻다 하더라도 바른 결론에 도달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참 하나님의 나라를위해서 큰 일을 한 사람이지요. 그가 두뇌의학에 큰 공헌을 했는데 이 사람 소설도 썼어요. 소설도 쓰고, 두뇌 수준이 높으니까 의학자라고 소설 못 쓸 것 뭐 있습니까? 철학을 하던 사람이 의학 못 한다는 법도 없는 거지요.
자, 과학적으로 두뇌와 독립된 존재로서 영혼이 존재한다. 그리고 사후에도 존재할 뿐만 아니라 기억을 갖고 있다. 나아가서 이 영혼은 출생한다고 해야 맞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두뇌가 얼마나 긴요한 것이냐! 통계가 나옵니다. 지금 현재 알려진 우주의 원자가 몇 개냐.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가 몇개냐 하면, 이것이 추정치이지만 1에다가 0을 66개 한 것 만큼! 그런데 두뇌 속에 있는 뉴우런들의 결합은 몇개냐? 두뇌 안에 있는 뉴우런을 형성하는 그 결합들이 몇 개냐? 7에다가 0을 2백 7십 8만 3천개 붙인 것 만큼 있다. 이런 굉장한 두뇌를 실은 우리가 많이 못 쓰고 있다. 얼마냐 쓰고 있냐? 윌리암 제임스라고 하는 하버드의 철학자이고 심리학자이며 소위 근세 실험심리학의 창설가, 그러니까 심리학을 과학적인 기초 위에 확립해서 건설한 사람이라고 할 윌리암 제임스가 뭐라고 했느냐면, 우리의 두뇌를 많이 써도 10%-20% 밖에 못 쓰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그런데 기이한 것은 유물론을 강력히 가르치는 공산주의 세계의 대학들이( ), 이상심리, 정상심리가 아니라 투시나 원시, 예언할 수 있는 능력, 예언과 같은 영혼의 능력이 물체에 영향주는 것과 관계를 다룬 이런 이상심리를 공산주의 세계가 가장 많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1930년에 이 이상심리가 학문으로 확립되었는데 그 때에 듀크 대학에, 소위 닉슨이 나온 법과 대학에 심리학과에 라인 박사가 이상심리를 연구하고 확립하고 결론 내리기를 인간은 피와 살 덩어리의 결합만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피와 상덜어리 만으로 아는 공산주의 세계에서 그 대학들에서 이것을 가장 많이 연구하고 있다. 과학으로 그런 인간이 피와 살 만이 아니고 그 이상 넘어가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인간들이 다 알고 있는 거지요.
자, 그러면 아무리 과학이 뭐라 하더라도 다른 과학은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고 죽으면 그 영혼이 존재해서 저 세상으로 간다. 자, 그런데 철학적으로도 그 영혼에 대해서 존재하느냐, 안하느냐 해서 확실한 말은 못해요. 이제 칸트가 18세기에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세 개의 비판을 썼습니다. 순수이성비판에서 그가 쓴 것은 인간의 영혼이 인간의 지성의 능력으로 알 수 있는 세계는 이 감각기관으로 표상할 수 있는 세계 뿐이고 내세라든지 하나님이라든지 초월의 세계 이런 것에 3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게 단언할 수 없는 거지요. 그래 마지막에 가서 나는 신앙을 위해서 지식이 자리를 양보하도록 한다. 이렇게 말을 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늙어서 한 말이고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인간의 이성의 능력으로는 저 영원의 세계 미래의 세계 이런 것을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해서 어찌 알 것이냐? 하나님은 체계를 구성하기 위해서 학문을 구성하는데 체계를 구성하기 위해서 요청해요. 하나님이 꼭 있어서 증명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체계를 구성하는데 통일의 원리로서 한계개념으로 체계를 구성하는 데 하나님은 그런 한계개념으로 요청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세계라고 하는 말, 세계는 어떤 사람도 경험해 보지 못한 통일의 원리예요. 세계가 무엇이냐? 세계를 몇 바퀴 여행하면 우리 한국 분들 요새 여행 자주 다니시는데 그 어디서 돈이 많아서 자주 다니시는지, 나는 외국에 한 10년 있다 돌아와서 갈 일도 없지만 돈도 없어서 한번도 못 나갔습니다. 한 몇 번쯤 여행하면 세계를 알 수 있습니까? 한 열 두 번쯤 돌면 압니까? 세계라고 하는 것이 물론 이런 우주적인 세계도 말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그냥 세계라고 할 때는 우리가 갖는, 지구상의 인류가 갖는 모든 지식을 포함해서 경험이 곧 지식이지요? 모든 경험들을 총화를 이룰 때 그걸 세계라고 표현을 해요. 그러니까 세계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내용을 전달하는 진술을 할 수가 없지요. 과학의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세계에 대해서 확정적인 그런 진술을 할 수 없는 개념이다. 단지 우리의 경험을 통합하기 위한 통일의 원리로 그 체계를 구성하기 위한 한계개념으로 세계를 필요로 한다. 그것 뿐이지 그것을 넘어서서 세계가 어떻다고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합니다.
자유대학에서 철학부에 있으면서 철학을 열심히 박사과정을 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한번 토론을 했습니다. 그래 세계 철학이 하는 의미가 무엇이냐? 그랬더니 ( ) 실제의 총체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이 철학이다. 그렇게 답을 해요. 그래서 내가 묻기를 도대체 ( ) 이 뭐냐? 그 사람 미국에서 온 학생인데,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서, 물론 자유대학 박사과정 하기 전에 자유대학 과정을 하고 박사과정을 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 이야기가 철학이 무엇이냐? ( )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 철학이다. 그래서 내가 단번에 묻기를 도대체 ( )가 뭐냐? 실제의 총화가 무엇을 말하느냐? 도대체 네가 무슨 내용을 그것으로 말하려고 하느냐? 그것은 단지 어휘, 단어의 장난일 뿐이지, 그 안에 무슨 내용이 있느냐? 말해 봐라. 네가 그것으로 무슨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느냐? 그러니까 날 보고 하는 말이 너는 너무 칸트적으로 말을 한다. 그래요.
자, 마찬가지로 (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세계란 말로, 그렇지만 우리가 ( )라고 할 때 무슨 구체적인 진술을 할 수 있느냐? 저 사람이 지식을 가질 수 있도록, 그런게 없지요. 단지 경험을 통합하기 위한 통합의 원리로서 세계를 한계개념으로 체계 구성에 도입한 것이지 실제로 그런게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면 신은 무엇이냐? 이와 같은 모든 세계에, 우리가 경험하고 살고 있는 세계 내에 있는 모든, 전체를 하나로 통일하고 있는 통일의 원리, 결국 어디서 왔느냐? 신에게서 온 거지요. 그 이 좋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그런 의미로서의 하나님이 아니고 이 모든 우리가 갖는 경험을 통일해 주는 통일의 원리로서 필요합니다. 이것은 체계를 구성해 주기 위한 한계개념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철학을 하시지 않는 분들에게는 이게 너무 어려울는지 모르겠습니다.
자, 그러면 세계나 신이나 이런 것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우리의 감각적인 기관을 통해서 세계나 신에 대해서 이런 총체적인 경험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 이런 존재에 대해서 도대체 있다 없다 말할 수 없어요. 칸트의 철학으로는! 그러면 칸트가 그걸로 끝내느냐? 그게 아녜요. 실천이성비판에 오면, 실천이성이란 말은 윤리적인 이성 도덕적인 이성을 말해요. 혹은 윤리 공동체가 바른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데 그 바른 삶의 법칙을 제시해 내는 일을 하는게 실천이성비판이라. 우리의 윤리적인 행동, 사람으로서 행동하는 이 윤리적인 행동하는데 그걸 하는 데 있어서 칸트는 이제 순수이성비판에서 지식에 대해서 도저히 알 수 없다고 하는 내세와 하나님과 자유의 개념을 도입해 들입니다. 어떻게 도입해 들이느냐? 인간이 우리가 덕을 닦고 살아야 하는데, 인간의 본질이 윤리 아닙니까?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바르게 사는가? 그걸 칸트는 의무감에서 하는 행동, 그것이 윤리적이라. 우리 윤리가 무엇이냐? 도덕적인 것이 무엇이냐? 의무감에서 하는 행동들 그것이 윤리다 도덕이다 그렇게 말해요.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지요. 관용해야지요. 그리고 이해해야지요. 그런데 이게 말은 쉬워도 잘 됩니까? 이해한다는 것이 잘 됩니까? 여러분도 아시는 총신 교수 중에 부인이 의사인데 미 8군에서 정신 담당 의사로 일을 해요. 그래 한번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 하는데 그 미국인들이 너무 외롭고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 사는 여자들 하고 결혼을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와서 죽으려고 한다는 거예요. 상담을 하는데, 나느느 한번도 내 아내하고 진지하게 대화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밥을 내 구미에 맞도록 한번도 식사를 해 준 적이 없습니다. 이거 보통 기가 막힌 일이 아닌 것 같애요. 그래 어떻게 하느냐? 싸우다 못해서 서로 완전히 냉전 상태에서 자기는 빵에다가 버터 같은 걸 발라서 치즈 끼우고 이렇게 채소 썰어 넣어서 자기가 해서 들고 서서 먹고, 아내는 김치하고 된장찌게 해 갖고 밥하고 먹고 앉았단 말이예요. 그러니 이게 참, 한번도 이해 차가 나는 걸 설득하고 논의하는 걸 하려는 법이 없다는 거예요. 한번도 대화해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 어떻게 삽니까? 결혼했는데, 물론 이혼하고 털털 털고 가버릴 수 있지요. 그러나 결혼한 그들 중에는 그리스도인도 있을 터인데 마음대로 이혼 못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냥, 그 국제결혼의 장벽이 얼마나 쎈지, 오죽 하면 미국에 가서 사는 한국 동포가, 우리 교포가 나중에는 천대와 박대가 너무 심하니까 자살해 죽어 버렸어요. 그리고 많은 경우에 한국 여자들이 속으로 고민하고 자기부족을 탓하지 적극적으로 나서서 저쪽을 네가 틀렸다고 증명해 주고 그렇게 잘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압박받고 천대를 받을 때마다 그걸 가서 토로하고 어디가서 호소하지 못하고 혼자 당하고 고민하고 괴로와하다가 그 사이클이 계속 돌면 나중에는 미치고 이혼하고 죽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 언어의 장벽, 문화의 장벽을 넘어서기가 그렇게 힘들어요.
이해해 주는 것 얼마나 중요합니까? 환자들이 말할 때 사람들이 고독하다 고독하다 하면 누굴 부른다고 합니까? 한국은 아직 그러지 않는지 모르지만 한국은 아직 떼지어서 어울려서 사는 사회입니다. 고독하다 고독하다 견디다 못해 의사를 부른다고 합니다. 의사는 자기 말을 들어 주니까! 그런데 조그만 차이에서 오는 이해의 갭을 메꾸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거예요. 서로 이해하는 것, 이번 동의대 사건도 대통령이, 죽자마자 뭐 순국했다, 무슨 순국입니까? 자기들이 죽여놓고! 설득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데 왜 강경진압만 하냐고요. 내가 5월 초에 갑자기 KBS에서 오라고 그래서 폭력에 대해서라니까 다 피하니까 날보고 오라고, 그래서 갔습니다. 가서 이야기 했어요. 데모하게 해라. 강경진압, 원천 봉쇄해 가지고 한번 데모라도 일어나면 정치생명이 내일이라도 끝나는 줄 아는데 누가 그렇게 정권 물러나라고 하느냐?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이나 국민들이 그러길 원하느냐? 데모하게 하라. 의사발표를 해야 될 것 아니냐? 의견 발표하면 순환여부는 해당 ( ), 그건 빼버렸어요. 나중에 편집할 때 보니까, 데모하게 하면 스트레스 효과도 있다, 하게 해라. 그리고 공공질서가 어긋날 때는 그 최루탄이나 총포 쏘지 말고 소독처럼 고무 호스로 물 뿌리면 안되느냐? 그렇게 하고, 정부가 너무 가진 자 편에 서서만 그러는데 중재해라, 중재! 정부하고 노동자들, 그래서 그들의 생존권, 농촌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면에 대해서 해야 된다. 그러면서 광주사태도 이야기하고 다 했습니다. 할 이야기를 저는!
그런데 그렇게 학생들을 설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설득 안했다. 대화를 안했어요. 너무 급해 가지고, 막 때려 부수고! 감히 어떻게 나를! 하는 방식으로 하기 때문에 그 젊은 사람들 6명이나 죽였는데 사실 그렇게 우리 한국은 경직된 사회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 너무 힘들지요. 그런데 그것이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을 넘어선다는 것 참 어렵거든요. 그래 우리 한국 사람들 외국에 가서 보면, 내가 한번 KAL 비행사에 갔어요. 암스텔담 지점에 갔는데, 본사에서 나와서 그 화란 사람들 직원을 조사하는데 말이예요. 그 심문조로 하는 것 같애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기분이 나빠가지고 화가 나가지고는 곧 싸울듯이 내가 뭐 이 회사 아니면 일할 데가 없냐? 난 나가도 좋다는 식으로 하고 버티고 그러는 거예요. 한국 사람들이 어학, 말이 짧으니까 외교적인 술어를 못쓰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마음 안상하고 물을 말 다 묻고 다 부탁할 것 다 할 수 있는데 그러고 나가서는 자기는 잘했다고, 본사에서 나왔기 때문에 우월감을 가지고 화란 사람들을 우리가 고용한 회사니까 그런지 몰라도 완전히 한국 회사에 대해서 적대감을 갖게 하고, 그래 내가 물어 봤어요. 그 지점장 보고, 한국 항공회사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여기서 일하는 것을 수치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이 짧으니까 외국 나가서 상담을 해도 이런 외교적인 언어들을 전혀 못하거든요. 말이 짧으니까! 우리 말로 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통역을 시켜 놓고! 이해를 해야 이게 사회생활이 되고 좋은데 이해할 길이 없는 거지요.
우리는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원수까지 잘 사랑할 수 있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그렇게 죽으셨으니 원수를 사랑합시다. 사랑합시다 그렇게 말하면 얼마나 외치기도 좋고 듣기도 좋습니까? 허나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대학원에서 강의할 때 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어느분이 목사님보고 7계를 범했다고 하고 그냥 소문을 내서 왈칵 뒤집어졌는데 그래 가지고 목회 생명을 망쳐 놓은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물으니까 사랑을 어떻게 해요? 죽어도 못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그랬는데 어떻게 사랑하다니요? 그게 원수 아닙니까? 세상적인 원수야 듣기도 좋고 말하기도 좋지만 법적으로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뒤집어 씌워가지고 목회 생명을 망쳐 놓고 내어 쫓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까지 가려면 성자의 경지에 가야지요. 바쁘게 살다보면 언제 그 경지에까지 갑니까? 짧은 이 세상에서 돈벌고 가정생활하고 바쁘게, 아무리 열심히 그리스도인이 덕을 쌓아가면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함양해 간다 하더라도 이거 어려운 거지요.
그러니까 이 세계에서는 칸트가 80을 살았는데도 그 바른 도덕을, 덕을 함양하는 데는 이 기간이 너무 짧다. 그러니까 내세가 있어야 되겠다. 내세가! 그리고 이 세상 살면서 온갖 악을 행한 사람들은 잘산다. 그렇지요? 지금 뭐 5공 비리를 행한 사람들 그냥 뭐 백담사에 가 앉아 있어도 철옹성 속에 가 앉아 있지 않습니까? 누가 총을 들고 가 쏘겠어요? 칼을 들고 가 찌르겠어요? 정호용이 물러나야 한다고 그래도 내가 왜 물러나? 내가 37명이나 되는 TK사단의 장인데... 그렇지요? 내가 대통령을 해먹을 그 다음 바통을 이을 사람인데, 내가 왜 물러나? 그러고 끄덕도 안하고 잘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뭐 존 많이 먹은 사람들 얼마나 잘 삽니까?
그리고 우리같이 이렇게 의롭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 조금만 교인들이 돈을 가져와도 황공스럽고, 혹 돈을 조금 받아도 이게 부끄럽고 창피스럽고, 이렇게 여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늘 가난하게 살고, 그러나 통 큰 사람들, 그렇게 전두환 씨 같은 사람들 쥐고도 잡고 7,8년, 9년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잘 살고, 그래 죽어가지고 그 사람이나 나나 똑같다면, 내세가 없어서, 무슨 차이가 있느냐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악하게 살았든 선하게 살았든 간에 아무 차별도 없이 내세에 가서 똑같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예요? 그러면 누가 일률적으로 살려고 하겠어요? 바르게 살려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셔서 이 선악의 진보의 도에 따라 상급과 형벌을 주는 존재가 있어야 된다. 그러니까 요청이예요. 요청!
하나님이 계셔서가 아니고 우리의 윤리생활을 바로 하려면 내세도 있어야 하고 또 하나님도 있어야 한다. 또 그것 뿐이요? 강제 아래서 선을 행한다면 그건 의미가 없는 거지요. 강제 아래서 선을 행하면 그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자유 의지 있는 것 증명할 수 있습니까?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어요? 그러니 바른 윤리 생활을 하려면 자유가 요청됩니다. 증명되지 않지만 요청됩니다. 자유를 증명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제까지 자유에 대해 많이 노래하고 찬양하고 자유를 위해서 투쟁해도 자유를 증명할 수 있어요? 궁극적인 문제에 있어서 증명하지 못하지요. 그러나 요청됩니다. 자유가 있어야 된다고 말해야 윤리가 성립하지, 자유가 없이 어떻게 윤리가 성립하겠어요?
결국 자유와 내세와 영원의 불멸,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가 요청됩니다. 이건 지식적으로 증명되는 상황이 아니예요. 요청됩니다. 그런 식으로 칸트는 하나님과 내세를 요청해요. 이건 증명되는 상황이 아니예요. 윤리 생활이 가능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요구되는 상황이예요. 철학적으로도 내세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아까 과학으로도 참 과학도 증명을 하지만 대부분의 거짓 과학은 부정하지요. 거짓 과학들, 그러니까 우리가 과학을, 이중에 자연과학을 가지고 신학을 하신 분도 계시겠지만 과학을 모르는 우리들, 과학에 대해서 조금 컴플렉스가 있지요. 잘 모르니까! 그래도 과학에 대해서 그렇게 컴플렉스 가질게 없습니다. 과학처럼 부정확하고 불확실한 것이 없어요. 가장 확실한 건 하나님 말씀이고 하나님 계시지요. 하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영혼이 사후에 존재한다. 그리고 죽으면 신자는 하나님 품으로 가고 불신자는 여기 음부라고 되어 있는데 지옥으로 간다.
자, 죽으면 영혼이 어디로 가느냐? 주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계신 그곳으로 가요. 그곳이 어디냐? 그렇게 증명을 하고 말하라 그러면 어렵지요. 그러나 그 세계는 시간이 지배되고 있는 이 세계는 아니다. 그럼 은하계 밖이냐? 은하계 밖이면 그럼 시간이 없느냐? 또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요. 시간이라는 것이 명암으로, 상태의 변화로 나타나니까 영혼은 육체를 벗으면 그와 같은 상태를 벗어나요. 그래 영원의 세계로 가지요. 하나님이 계신 곳에!
그러면 죽어서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을 하기 전에, 그러면 낙원하고 음부는 무엇이냐? 자, 지금 신지들이 죽으면 낙원에 가고 주님 오셨을 때는 천당에 가는 걸로 알고 있고, 불신자는 음부에 가고, 주님 재리하신 심판 후에는 지옥으로 가는 걸로 알아서 중간기 처소가 따로 있는 걸로 대부분 믿고 있어요. 그런데 낙원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계신 곳하고 별도의 처소로 낙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상에 못 박힌 그리스도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는데, 강도르르 향해서! 그것은 왜 그렇게 하셨느냐 하면, 낙원이 천당과 별도의 곳에 있기 때문에가 아니고 여기보면, 누가복음 23장 43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 그 낙원이라고 하는 것이 천국과 별도의 지점으로 불신자들이, 악한 자들이 가는 마지막 종착역 전에 음부에 상하는 지점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러면 주님이 낙원이라고 했느냐? 첫 낙원이 타락으로 인해서 폐쇄되고 그리고 노아 홍수 때, 나는 그렇게 믿고 주장을 해요. 언제 이것이 완전히 소실되었느냐? 노아 홍수로 하나님이 완전히 흔적을 없애 버리셨다. 나는 그렇게 믿고 주장을 하는데, 현대 신학자들은 낙원이라는 것을 별도의 그와 같은 존재로 인정하지 않지요. 칼 발트도 낙원이라고 하는 것은 일하는 장소를 뜻할 뿐이지 어느 지구상의, 지도상의 여기를 딱 찍어서 낙원이라고 지시할 곳이 아니라 그렇게 해석합니다. 칼 브르트가! 지구를 딱 펴놓고 바로 여기라고 할 곳이 지구상에 없다. 그래 지금 보면 ‘동쪽에’ 그렇게 되어 있지요.
자, 그런데 처음 낙원이 소실되니까 후대 유대교에서 낙원의 사상을 발전시켜서 하늘로 올렸습니다. 지상에 있던 낙원을 후기 유대교가 하늘로 올려요. 그래서 후기 유대교에 의하면 낙원이 메시야의 처소입니다. 그래서 낙원이 하늘로 올라가 형성되는데 메시야의 처소를 낙원이라고 말해요. 그 바로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그 사상을 예수님께서 “오늘 에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하심으로 밑에 사람들이 다 듣고 있지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백성들이 다 듣고 있는데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하심으로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내가 너희들이 못 박은 내가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낙원을 사용하심으로 자기가 메시야이신 것을 백성들에게 선언하신 것이예요. 그런 것이지 낙원이 천당보다는 증간지점, 우리가 아브라함이,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품처럼 아직 천당과 같은 상태 이전의 곳이 아니라, 죽으면 다 주님 계신 곳에 가지 낙원이란 별도 처소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 음부는 어떠냐? 음부는, 음부란 말은 구약에서는 스올이라 그러고 희랍어에는 하데스라고 되어 있어요. 그 23절에 보면 ( ), 하데스에서 그의 눈들을 들어서, 어디 있느냐? ( ), 밑에 있으면서,( ) 멀리서 아브라함을 보면서 ( ), 나사로도 보고 그의 품 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 그래서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가고 부자는 음부로 갔으니까, 하데스라는 곳으로 갔으니까 음부라는 곳이 따로 있지 않느냐? 그런데 여기서 스올이라고 하는 히브리어가, 보통 여기서 세 가지 뜻인데 첫째로는 죽음을 뜻하고, 두번째로는 무덤을 뜻하고, 세번째로는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을 뜻합니다. 우리 한국에도 기독교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는 죽은 자들이 다 저승으로 간다고 했어요. 다 저승으로! 그 저승이 죽은 자들의 세계 아닙니까? 스올로 간다. 죽은 자들에게로 간다. 구약도 말했는데 계시가 점점 더 명백히 밝혀지면서 스올이 죽은 자들이 가는 곳에서 구분되어 나왔지요. 그때는 선한 자와 악한 자들이 구분되는 것으로 말하지 않았어요. 죽은 자들이 다 같이 가는 곳으로 말했는데 이것이 이제 하데스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데스나 스올이나 다 마찬가지로 악령들이 가는 곳이라. 그러면 이곳이 지옥 전이냐? 아브라함 카위퍼는 재미있게 해석을 해서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이기 때문에 지옥의 문 앞과 같은 데다. 하데스를! 아브라함 카위퍼가요! 이 본문 보면 거기서도 분리되는 괴로운 곳이니까 다 지옥을 뜻합니다. 그래서 음부하고 지옥을 말하고 별도의 처소가 아니다.
그러면 왜 죽은 자들의 세계라고 하느냐? 지난번에도 제가 말씀했듯이 우리의 인간의 인격에는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가 필연적인 구성요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육체가 없는 영혼은, 육체를 벗은 영혼은 산 자의 세계에서 끊겨있고 적극적인 활동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죽은 자에게 속합니다. 그리스도의 품에 가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도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의, 그러니까 주님께로 간 영혼들은 죽은 자에 속하지 산 자에 속한다고 할 수 없다. 죽은 자에 속한다.
자, 중간기는 있으나 중간기 처소는 없다. 그것이 지금 말하려고 하는 요점입니다. 중간기 상태는 있으나 중간기는 있지요. 중간기 처소는 없다. 개인 영혼이 죽을 때부터 주님 오실 때까지가 중간기 상태라. 그러나 별도의 처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자, 그것이 바른 기본이고 죽으면 죽은 자가 일단 산자의 세계에서 끊긴 것이니까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공중에 배회하는 것도 아니고 바로 저쪽 가야 할 자리로 갑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야기가 나오겠습니다만 인간의 영원한 운명은 죽은 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입고 살아 있는 생존기간에 결정이 됩니다. 그것이 확실하고 확실히 해야 할 진리입니다. 이 중간에 많이 생긴다고 하는 이론이 많아요. 그러기 때문에 문제가 있어요. 첫째 하나가, 이것 하기 전에 스칸디나비아에 스웨덴보르크라고 하는 아주 입신의 경험이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스웨덴보르크에 의하면 인간의 몸은 둘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완전한 육체적인 몸하고 영적인 몸으로 되어 있다. 죽으면 육체적인 몸은 벗고 영적인 몸으로 부활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스웨덴보르크에 의하면 참 좋아요. 죽는 것이 더 좋은 겁니다. 왜냐? 육체적인 몸을 벗고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영적인 몸은 우리가 부활 때 주의 권능으로 변화되는 것이고 우리 지금 현재 몸 속에 영적인 몸이 또 들어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아는 이와 같은 몸 이외에, 영적인 몸이 또 있다고 하는 것을 성경이나 다른 것으로 전혀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스웨덴보르크는 신인합일, 또 입신 이런 걸 너무 많이 해서 세계를 너무 많이 돌아다녔기 때문에 이런 것을 만들어냈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전혀 이런 것은 없습니다.
영혼이 주의 품으로 가는 것이고 지옥으로 가는 것이지, 영적 몸으로 부활, 우리의 몸이 이중 구조로 되어 있어서 지금 보이는 몸이 육체적인 몸이고 이 안에 영적인 몸이 또 있어서 영적인 몸으로 부활한다. 죽음이 바로 부활이예요. 스웨덴보르크에 의하면 죽는 것 자체가 부활입니다. 영적인 몸으로, 옛몸을 벗어버리고 영적인 몸으로 살게 되니까요.
그 다음에 스피리티즘이라, 영계주의인데, 이게 지금 뭐라고 번역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저 뉴욕에서 생긴 사건인데 어느 집에 살인사건이 생겼어요. 19세기인가, 18세기인가, 그런데 이 영이 늘 들어와서 괴롭힌다. 그러니까 그 딸이 어느날 그 집의 딸이 뭐라고 말했느냐면 이 테이블을 가지고 표시를 하게 하자 그렇게 했는데 실제로 영이 와서 테이블을 흔들었다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이제 두렵고 그래서 딴 집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 영이 또 그대로 따라왔다. 그 집에 와서 또 테이블을 흔들었다. 그러면서 영이 나타나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기도 하고 또 연필로 긁어 써서 의사를 표하기도 하고 그래서 이 영혼이 현재 살아있다. 저 세계로 가지 않고, 저승에 가지 않고 이 세계에 살아서 운동하고 활동하는 걸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 초대교회서 부터 있던 이단이지요. 그래 이것이 변형된 형태가 소위 김기동 목사의 귀신론, 김기동 목사 여러분도 다 아시지요. 글을 안 읽어도 다 돌아다니는 말로 아시지 않습니까? 저도 읽지는 못했어요. 김기동 목사 저도 옛날에는 만나서 압니다. 옛날에 60년대 69년인가 70년도 그 어간에 내가 만났어요. 그때는 아주 귀신을 쫓는 초보적인 단계였습니다. 그래서 아직 이단으로 정죄되지 않을 때고 그렇게 문제가 아주 적을 때였어요. 그런데 귀신을 쫓아냈을 때 녹음한 것을 틀어주면 이것이 귀신이 말하는데, 여자 귀신인데 이것이 김기동 한테 데리고 와갖고 나를 나가게 하려고 그런다고, 목소리를 변해갖고 말하는 걸 들어보고 했는데, 이 사람은 이 김기동 목사는 어디서 이렇게 희한한 귀신을 만들어 내는지, 인간의 수명이 홍수 이후에 120세까지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120세가 인간이 정상적으로 살아야 할 수명이고 그 이전에 죽으면 120세 수명을 지상에 있으면서 떠돌아 다니다가 120년이 차면 저승으로 간다. 음부나 낙원으로 간다 그러는데, 자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죽은 자가 죽은 자의 세계로 가면,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고, 우주로 부터 분리되기 때문에 산 자의 세계에서 죽은 자로 가지 산 자의 세계에 남아 있을 수 없고, 일단 죽은 자의 세계에 갔던 자가 산 자의 세계에 넘나들 수 없습니다. 이게 전적으로 그릇된 이론이고 그 귀신이 되어 가지고 또 들어간다고 그러는데, 죽은 자의 영혼이 귀신이 되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본래 귀신이 있습니다. 있는데 죽은 사람이 버정상적으로 죽었을 때 그 되풀이를 할 수 있는 그와 같은 근거를 가지고 그 사람의 탈을 쓰고 그 사람에 해당되는 사람에게 들어가지요.
내가 며칠 전에 어느 의사를 만났는데 그 병원에 약사로 근무하는 약사에게 귀신이 들렸다는 거예요. 누구 귀신이 들렸느냐? 오빠의 귀신이 들렸다. 여자가 몇 살이냐? 28살이라. 그래 그러면 내가 물어봤어요. 그러면 그 오빠가 결혼하지 않고 죽었다더냐? 그렇다 그래요. 처녀귀신, 유명한 이야기 아닙니까? 내가 추측하긴 그래요. 오빠가, 그런데 영락없이 귀신 행세를 한다는 거예요. 영이 들린 사람이! 그래 할 수 없이 병원에서 쫓고 원장도 벌벌 떨고 많이 어려움을 당했다는데!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자기 갈 곳으로 갑니다. 신자는 주님의 품으로, 악한 자는 다 지옥으로 가지요. 중간 상태는 없습니다. 그런데 억울하게 죽은 경우, 그런 경우는 귀신이 그 한을 가지고 죽은 사람의 경우에 그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명분을 얻고 그 일을 하지요. 그런 것이지 사람의 영혼이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김기동 목사도 사람의 영혼이 귀신된다고 말하는데 사람의 영이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악령들이 있는데 그 악령들이 그렇게 죽은 사람들의 한을 받아가지고 지상에 산 사람들에게 악을 행사하는 거지요. 그러나 산 사람의 영혼이 죽으면 귀신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사무엘서에 보면, 사울이 하도 위기를 당하니까 사무엘을 불러 올리지 않습니까? 그건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성경이 구약의 그러한 현상까지 부인하는 게 아니예요. 인정은 해도 그렇게 하는 것을 금했지 그러한 현상까지 부정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영들의 활동은 인정을 한다고요. 목사님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라고 가르치셨어요? 교인들에게! 분명히 영매를 이용해서 사무엘을 부르니까 사무엘은 몰라도 영매들은, 그 점쟁이는 보지요. 사무엘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느냐? 허연 옷에 어현 수염을 내고 머리가 어떻게 생기고 했다. 그래 맞았다. 영락없이 사무엘이다. 그러면서 네가 오늘 죽을 것을 예언한다 말이예요. 그러니 이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사무엘의 영이 이렇게 신접한 자에 의해서 불려져 올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말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그 귀신이 신접한 자의 영매에 의해서, 주술에 의해서 귀신이 사물엘의 형태를 입고서 나타난다. 예언은 어떻게 하느냐? 예언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사무엘 자신이 예언한 것이 아니라 사무엘이 말한 것처럼 사무엘의 형태로 예언을 한 거지요. 하나님이 지금 사울을 죽게 하기로 작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영들이기 때문에 알아요. 될 일을! 그런 것이지 사무엘의 영이 땅으로 부터 올라오는 것이 아니지요.
자,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사람의 영은 죽으면 저승에 간다. 우리 말로 하면! 신자들, 선한 사람의 영혼은 주님의 품으로 가고 악한 자들의 영혼은 지옥으로 가지 이 산 자의 세계를 넘나들며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 다음에 아까 제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 대해서 여러분께 이야기 했는데 칸트에 의하면, 칸트가 제일 강조하는 것이 윤리입니다. 물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제일 훌륭한 저서이고 그 책이 근세를 만든 분수령입니다. 칸트 이전의 신학하고 칸트 이후의 신학은 180도 반대극에 서 있어요. 그러니까 근세 신학 이후에 전개되는 것을 알려면 칸트를 이해하지 않고는 도대체 근세신학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고 왜 그렇게 내용이 바뀌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칸트를 알아야 필수입니다. 근세철학과 신학에서 분수령이 칸트입니다. 그런데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으로 인간의 이성이 알 수 있는 영역을 제한해서 이 감각세계, 시간과 공간의 세계로 제한을 했습니다. 그런데 칸트가 그렇게 한 기본 이유 중에는 오히려 윤리 세계의 생활이 바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그와 같이 한 것입니다. 칸트에게 있어서 중심점은 순수이성비판, 그러니까 지식을, 순수한 지식을, 과학적인 지식을 탐구하는 그 영역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인간이 바르게 살 수 있는가 하는 윤리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칸트 만큼 의무를 강조하고 윤리의 법을 도덕을 강조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칸트 속에 칼빈이 들어있고 또 둘이 서로 영향을 주었다. 한쪽은 16세기 사람이고 한쪽은 18세기 사람인데, 200년의 차이가 있는데도 그런 소리를 해요. 그만큼 칸트가 윤리를, 법을 강조를 했어요.
그러기 때문에 칸트에게서 영향이 한 세 가지로 나타나는데 기독교 영향으로는 슐라이어막허가 그와 같은 신학을 했고 슐라이어막허의 윤리주의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의 영향을 입은 사람들이 윤리의 진보를 많이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후에 이것이 운명이 완전히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죽은 후에도 발전하고 윤리를, 인간의 덕을 함양하는 진보의 단계가 있다 그렇게 주장을 했습니다. 19세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죽을 때 일이 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계속적으로 완전한 운명을 결정하는 일이 차후에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그걸 반대하지요. 전통적인 우리의, 특별히 개혁주의 입장에 의하면 살아있을 때, 중생 후의 성화의 과정이 어떠했든지 간에 죽는 순간 하나님의 그의 특별한 영적인 은혜의 역사로 성화를 종결시키고 완결시킵니다. 그래서 주님 앞으로 갈 때에는 완전히 죄과를 벗고 죄의 몸을 벗고 깨끗해진 영혼으로 주 앞에 가요. 그러니까 죽은 후에도 지상에서 성화가 계속되는 방식으로 성화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죽을 때 하나님께서 그 순간 특별한 하나님의 역사로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켜서 완전하게, 깨끗하게 해서 주님의 품으로 데려 가십니다. 그때는 비록 어린 아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어린 아이라도, 선택된 경우는 성령의 특별한 공작에 의해서 그를 중생시켜서 완전히 깨끗하게 해 가지고 주님 품으로 가요. 그러기 때문에 죽은 후에 성화같은 진행이 주님 품 안에 가 있는 동안, 천국에 가 있는 동안 진행되지 않는다. 그런데 윤리주의자들은 그렇게 말해요. 죽은 후에도 계속적으로 덕의 진행이 이루어진 다음에 사후에 완전한 운명이 결정된다. 그러니까 이게 신학을 이해하려고 해도 철학을 조금은 알아야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러냐면, 18세기에, 18세기가 분수령인데, 개신교의 신학자들이 신학하는 원칙을 정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이 우리가 갖고 있는 복음, 신약의 복음을 그 당대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 그것이 신학작업입니다. 그것이 신학하는 원칙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복음의 내용을 그 당대의 언어로, 그 당대의 사상으로 번역하는 것, 그래서 그 당대의 사람들이 알아 듣도록 하는 것이 신학 활동의 기본작업이라고 정했습니다.
이 원칙 이후 때문에 18세기 이후에 그렇게도 많은 신학이 일어났다가 사라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 철학이 나올 때마다 그 철학에 맞추어서 신학을 새로 만들어요. 칼 바르트도 그렇고, 불투만도 그렇고, 틸리히도 그렇고, 지금의 몰트만도 그렇고, 판넨베르크도 그렇고, 다 철학 없이는 생각할 수가 없어요. 다 그 배경이 전부가 철학이 결정하고 있어요.
이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연옥, 연옥은 로마교회가 중요한 교리로 확정을 하고 있지만 연옥교리는 로마 교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희랍정교회도 갖고 있습니다. 희랍정교회가 갖고 있다는 말은 초대교회 교부들에게도 이 연옥 사상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근자에 와서 연옥 사상이 생긴 것이 아니고 초대 교부들, 그러니까 그레고리, 대 바실, 그런 사람들에게 벌써 연옥 사상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말해야 되냐면 로마교회는 계속적으로 교리를 발전시켜 왔는데 이 희랍정교회, 동방정교회는 5세기가 제일 분수령이예요. 451년 칼세돈 공의회가 의합 신학자들의 활동의 최고 피크이고 그 이후에는 거의 없는 것처럼 사라져요. 거의 신학 활동이 없어집니다. 그 이후에는 완전히 서방측으로 논의 주도권이 넘어옵니다. 그런데 787년 제 2니케야 공의회는 거의 신학활동이 없다고 해야 맞습니다. 동방교회에, 그러니까 그전에 이미 형성된 교리만 붙여가고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네들이 정교회라고 주장합니다. 정통교회, 그러니까 희랍정교회는 연옥은 있어서 거기서 정화의 과정을 밟는다는 것은 인정은 하나, 그 면은 인정은 하지만 로마교회는 지상에서 하는 행동이 그 연옥에서의 정화과정과 시기를 결정한다고 하는 것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로마교회는 미사와 선행과 많은 헌금을 통해서 연옥에 가 있는 자들의 정화기간을 단축하고 천국으로 들일 수 있지요. 그러나 희랍정교회는 지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선행이라든지 교회의 많은 헌금이라든지,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큰 일을 하는 것이 이 연옥에 가 있는 사람들의 정화과정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 그러나 우리는 서방교회에서 나왔기 때문에 연옥은 성경적으로만 생각하지 아니하고 목회학적인 관점에서만 생각하면 이게 참 그럴듯하고 좋은 점 아닙니까? 내가 미국에서 참 신실한 가톨릭 신자를 만났어요. 자기 말로 그래요. 자기는 거짓말도 하지 않고 그저 자기가 어느 음식점, 식품회사 같은 데서 일한다고 해서 거기서 혹시 피로하면 먹기는 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을 갖고 싸 짊어지고 집에 가는 일은 없다. 참 착실하고 훌륭한 크리스챤, 로마 가톨릭이야요. 그래 내가 물었어요. 너 오늘 저녁 죽으면 천당가지? 예수 믿지? 한참 있다가 연옥은 가겠다. 천당가는 자신이 없어요. 연옥은 갈 수 있대요. 내가 교회 속해 있고, 양심에 거리끼는 일 안했고 그랬기 때문에 천당에 직접은 못가도 연옥은 갈 수 있다. 연옥이 성경에 아무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연옥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믿는다 말이예요. 죽을 때에 세례 받고서 죽을 때에 교회하고 화평한 중에 죽지 못했거나, 그러나 완전히 고해성사를 이루고 죄과를 다 해결하지 못했거나 그의 생활이 바르지 못한 사람은 바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옥으로 간다. 그래 얼마나 인도적이고 좋습니까? 거기서 정화해 가지고 그 악들을 다 쏟아내고 정화해서 천국으로 올라가니까 좋은 거지요. 그런데 그 천국에 올리는 것을 누가 하느냐? 천국과 지옥의 열쇠를 받아 가진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교회가 해요. 그러니까 미사 같은 것을 통해서 천국으로나 지옥으로는 안보내지요. 천국으로 보내고 단축기간을 줄일 수 있다. 지상에서 진행된 큰 선행이나 교회를 위한 큰 봉사나 교회에 바친 큰 헌금들이 그 기간을 단축시킵니다. 그것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들어온 것이지 성경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가 없다.
여기 보면 우리가 오늘 본문으로 읽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도 보면 죽은 자가 바로 지옥에 가고 또 나사로가 바로 아브라함의 품에,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갔지, 중간기 처소에 가서 정화하는 기간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선한 사람들은 천국에 가지만 세례받고 완전하지 못한 사람은 연옥으로 가고, 그래도 악한 자들은 지옥으로 가고, 그리고 이제 세례도 받지 못하고 어렸을 때 죽은 선악을 가부간에 행하지 않은 어린 아이들은 림보에 간다. 로마교회에 가면 천국, 연옥 림보, 지옥, 세례도 받지 않고 선악을 행하지도 않은 어린 아이들은, 세례도 받지 않았으니 구원받을 수 없지요. 로마교 교리에 의하면! 그렇다고 지옥으로 보낼 수도 없기 때문에 림보로 보낸다. 림보는 적극적인 악과 고통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자연적인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곳이라 그래요. 이것도 목회학적으로 참 좋은 것이지요. 어린 아이가 낳자마자 얼마 안되어서 죽었는데, 죽어서 얼마나 참 슬프고 섭섭한데 신부님이 오셔서 유아림보에 갔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 할 때 얼마나 위로가 되고 소망이 있겠어요? 내 자식이 지옥은 안갔으니까 소망이 있고 기쁜 거지요. 참 우리는 이런 데 가서 뭐라고 위로할 말이 없어요. 뭐라고 위로를 합니까? 지옥을 갔다고 말해 주겠습니까? 천당을 갔다고 말해 주겠습니까? 말 못해 주지 않습니까? 로마교회는 훨씬 앞서 있어요. 그런 면에!
그래 노르만 빈센트 필 목사도 그 책에 보면 처음 목회지에 갔을 때 젊은 부부가 사는 집에 어린 아이가 죽었다. 찾아가도 할 말이 없는 거지요. 뭐 위로할 말이 없는 거지요. 그래도 위로하면서 교회도 아직 자기 교회 나오지 않는 사람인데, 자기기 부임해 왔기 때문에 찾아가 위로한 거예요. 등을 툭툭 두드리면서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 말 밖에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아들이 죽었는데 뭘 나를 사랑해요? 그런 슬픔과 고통이 심할 때에 그래도 하나님이 당신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나왔더니 그 후에 장례 지내고 다 끝나고는 자기 교회 나와서 좋은 크리스챤이 되었다.
우리는 할 위로의 말이 없는데, 어린 아이들이 죽었을 때 가서 로마교 신부님은 유아림보에 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고 염려하지 말아라. 그래 얼마나 좋은지... 거기는 또 좋지만, 자기 남편이 죽었는데 지금 연옥에 갔다. 불의를 행해서 고통을 받고 있으니까 교회를 위해서 큰 일을 하면 고통 받는 기간이 단축되고 빨리 정화가 이루어지니까 큰 고별미사를 하도록 해라. 재산 다 바치는 거지요.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냥 다 바치고 나면 살 게 없는 거지요. 살 게! 그래 나중에 어디로 갑니까? 천막 치고 성당 주변 가서 교회서 주는 옥수수 죽 먹고 사는 거지요. 남미가 대부분 그 상황이예요. 성당 주변이 다 빈민촌이예요.
그리고 림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이전에 죽은 사람들, 구약 교회 조상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흘리지 않았기 때문에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그래 천당에 못갔어요. 어디에 가 있어요? 조상림보, 조상들의 림보에 가 있어요. 그래 또 그럴 만한 성경구정이 또 있어요. 없는게 아니라고요. 어디에 있습니까?
자, 베드로전서 3장에도 있어요. 18절,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또 여기만 있습니까? 바울에게도 있어요. 어디에 있습니까? 사로잡힌 자들을 땅에 내리셨던 그가 하늘로 올리시면서 사로잡힌 그들을 하늘로 데려가셨다고 되어 있어요. 바울이 그랬어요. 그러니까 이 조상림보라고 하는 것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좋은 거지요. 왜 그들이 천당 못 갔느냐? 아직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흘리기 전에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그래 천당 못 간거지요. 그러니까 조상림보에 가 있다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셨을 때 그 오신 곳이 어디예요? 여기 영으로 옥에 있는 악한 자들에게, 베드로전서 3:18에 이렇게 되어 있는데, 전파했다고 하는데 바로 이때 주님이 그들에게 가서 옥 문을 열고 조상림보에 갇혀있는 아담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 이전에 죽은 유대인들을 다 끌어 내셨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답해야 됩니까?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지금부터 2,000년 전에 흘려졌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영의 권능에 의해서 그의 피와 그의 의가 그의 조상, 택한 백성들에게 전가되게 하심으로 바로, 물론 그들의 죄도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용서되었지만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서 그의 피의 공로가, 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의 의가 구약 백성에게 전가되게 하심으로 그의 공로에 의해서 하나님 품으로 갔어요. 시간적으로 사고하는 현대인들에게 로마교회의 조상림보가 더 설득력이 있어요. 그러니까 저 나치에 관한 그런 글들을 읽어보면, 기억이 분명히 잘 안납니다만 이제 독일에서 김나지움을 다니다가 뉴욕으로 이민을 가서 자기는 문학에 소질이 있어서 문학가가 되기를 원했는데 모든 친족들이 다 반대를 해서 할 수 없이 법관이 되기로 했어요. 변호사, 그래서 밥을 벌어놓고 문학은 그때 해도 된다. 그래서 문학을 해서 자기가 김나지움 시절에 나치 시절에 박해받던 이야기를 써놨어요. 그런데 보면 그 헤르초크, 공작의 아들이 한 반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 사람과 자기와의 관계를 주로 써놨는데 그때 자기를 향해서 나치에 대해서 선전을 하니까 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지옥으로 꺼져라! 그렇게 저주하는 이야기를 써놨어요. 그러니까 나치 아이들이 아는 이야기가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지옥으로 꺼져라! 이 말을 보면, 그리스도의 피 이전의 사람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지옥 갔을 것이고 조상들의 림보로 갔다.
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흘리기 이전에도 아담과 셋과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택한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가 역으로 진행되어서 하나님의 품에 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기 이전에라도!
그 다음에 현대, 이것 하기 전에, 조건적 영생설, 본래 사람은 다 죽도록 창조되었는데 예수를 믿은 사람은 영생에 이르고 믿지 않은 사람은 멸절된다. 또 조건적 영생설과 비슷한 말이 있지요. 조건적 불멸설, 또 뭐 있습니까? 보면 마찬가지예요. 본래 사람이 죽지 않도록 창조되었지만 죄 때문에 다 죽게 되었고, 멸절설, 죄 지은 사람은 다 죽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죄 지은 사람으로는 살 수 있는 사람이 없고, 그거나 멸절설이나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구원에 이르고, 없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은 멸망에 이른다. 이 설에 의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예수 믿으면 영생하지만 예수 안 믿으면 끝나니까 뭐 세상에서 마음껏 살다 죽어도 두려울게 뭐 있어요? 끝나는데, 멸절하는데, 죽으면 멸절이 아니지요. 멸절하고 죽은 것 하고는 다르지요. 오히려 죽으면 적극적인 행동이예요. 존재방식이 변하지요. 이런 것들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에 배치, 만일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선행을 하고 하나님을 봉사하는 사람이 영생에 이름이 합당하다면 하나님을 배척하고 훼방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끝까지 거부한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 의해서 영벌을 받아야 맞지 그냥 죽어버린다, 멸절해 버린다고 하는 것은 맞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대인들의 사고에는 이게 맞아요. 왜? 현대인들은 죽으면 무로 돌아가는 것이 끝이예요. 죽음이란 모든 것의 마지막입니다. 죽음이 무엇이냐? 하이데거가 뭘 강조합니까? 죽으면 무로 돌아간다. 아무 것도 없는 거지요. 열반, 열반으로 되돌아가요. 열반이 무엇입니까? 극락이란 곳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열반이라고 하는 곳은 우리처럼 영원히 있어서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흐름이 불교에 있어서 도는 것이다. 그래 영혼이 저 극락세계로 간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민족 사상을 원효가 토착화해 놓은 것이고, 불교 이름으로! 본래 불교 용어로는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흐름만 있다. 그것이 해탈하면 더 이상 사이클에서 놓여나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 형태로 구애받지 않아요. 그래 의식이 소산되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의식이 흩어져요. 없어져요. 완전히 의식의 흐름이! 그것이 입적이예요. 열반이예요. 그것이 소위 불교가 말하는 우리 무식한 한국 백성들이 믿고 열심히 시주하게 한 그 극락세계에 가는 거지요. 없어져요. 죽으면 끝나요. 불교에서는! 해탈하면, 다 거짓 종교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지옥,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선인들이 영생에 이른다고 믿습니다. 영원한 상급에 이른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끝까지 거부한 사람들은 영벌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하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지옥이 정화처이기 때문에 종말에 가면 지옥이 소실된다고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것이 근세에 20세기에 들어와서 칼 바르트의 신학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초대교회 부터 이 사상이 있었습니다. 오리게네스, 오리겐에 의하면 하나님이 만유를 회복하셔요. 하나님의 지으신 존재 중에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지 못할 존재가 아무도 없습니다. 마지막에 모든 것을 회복하시고 완성하실 때에 심지어 사탄까지 정화되어서 그 완성된 단계에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지옥은 뭐하는 곳입니까? 정화하는 곳이예요. 정화처!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를 완전히 회복하신 그 때에 그 때, 물론 다음 얘기가 또 있습니다만, 너무 복잡하니까 할 건 없고, 그 때에 지옥에 있는 모든 영들이 다 정화되어서, 원상 회복입니다. 그 때에 그런 것을 일으킨 모든 것의 장본인인 사탄도 정화되어서 하나님의 그 완전히 회복하시는 그 세계에 회복되어요. 사탄까지도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해요. 그러므로 모든 인류의 역사의 드라마가 끝납니다. 그 다음 얘기 또 있지만 그 얘기는 할 필요 없고... 어떻습니까? 이 이론은? 아주 좋지요?
칼 바르트가 20세기에 와서 구원론을 폈는데, 전통적인 개혁신학에 선택교리가 있지 않습니까? 선택교리, 이게 이것 때문에 얼마나 개혁교회와 개혁신학이 욕을 먹어요? 칼빈이 제일 욕을 많이 먹지 않습니까? 죽을 때까지! 그 때 칼빈이 죽었을 때 교황 이름이 피요스네스인데 그 사람이 칼빈이 죽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 교황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나도 내 신하 중에 저와 같은 이단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칼빈이야말로 정말 돈에 욕심 안부리고 복음만을 위해서 일생을 자기 뼈를 갈아서 바친 사람 아닙니까? 대의를 위해서 전력을 다했지요.
한번은 카디날이 칼빈을 방문했습니다. 처음부터 자기를 카디날이라고, 추기경이라고 소개하지 않았어요. 다 제네바의 삐에르 성당, 교회당과 자기의 집들을 다 보여 주었습니다. 살고 있는데 너무 비참하게 살고 있거든요. 칼빈이 그리고 금으로 된 권총을 하나 주었어요. 칼빈에게 카디날이! 그래 바로 그걸 받아서 헌금함에 넣었어요. 그리고는 자기가 카디날이라고 소개를 했어요. 그러자 칼빈이 크게 사과를 했어요. 제가 추기경이신 줄 알지 못하고서 추기경의 존귀에 합당하도록 처음부터 예우하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사과한다. 그런데 칼빈은 로마교회도 싫어하고 루터교회도 싫어하고 복음주의요 감리교 계통도 싫어하고 다 싫어 하거든요. 너무 지독한 사람이라고! 그 중에 제일 미움받는 이유 중에 첫번째로 꼽아댜 할 이유가 바로 선택교리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기쁘신 뜻대로( ), 부패의 덩어리들 중에서 일부를 영생에 이르도록 선택하시고 그 나머지를 간과하셨다. 그게 선택 교리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20세기에 와서 칼 바르트가 완전히 뒤집었어요. 칼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선택은 그렇게 악한 자와 선한 자와, 구원 얻을 자와 구원 얻지 못할 자와, 야곱과 에서로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과 함께 인류 전체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기된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 유기됨으로 모든 인류가 다 유기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선택하므로 모든 인류가 그 안에서 다 선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칼 바르트에게 있어서 선택교리는 밝은 태양불이지 어둠이 없어요. 어둠이 좋습니까? 물론 죄 지으려면 좋지만, 태양만이, 밝은 빛만이 좋은 거지요. 모든 인류가 다 선택되었어요. 그러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과 교회 밖에 있는 사람과의 차이가 무엇이냐?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선택된 사람인 줄 아는 것이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그러기 때문에 복음의 전달이라고 하는 것은 선포하고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서 알게 해 줘야 해요. 그들도 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해 줘요. 다 선택되었는데 누가 유기됩니까? 다 선택되었는데 어느 종교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입니까? 그러니까 종교간의 대화가 충분히 가능한 것입니다. 이 사상에 근거해서 로마교회도 종교간의 대화를, 그리고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교회 밖의 그리스도, ( ) 칼 라너가 참 비상한 정력가 입니다. 윈스터 대학에서 가르쳤는데, 칼 바르트가 14권의 조직신학 책을 쓰지 않았습니까? 13권, 그런데 이 사람도 13권인가 14권인가, 그는 신학을 위한( ), 그는 주제 아래 쓴 것이 아니고 아티클들로, 제목들로 썼습니다. 3,000아티클 이상, 이렇게 굉장히 방대한 책을 썼습니다. 그 중에( ), 무명의 그리스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다 가증적으로 그리스도인, 다 이미 은혜에 접해 있는 사람, 하나님이 어디에 계셔요? 라너에 의하면 이성의 자기를 계시하십니다. 이성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모를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것이 20세기 로마교회 신학자의 논리입니다. 20세기 개신교 신학자인 칼 바르트의 논리도, 논의가 시작이라고요. 그러면 모든 인류가 다 선택되었어요. 지옥에 가서 마지막에 멸망으로 끝맺음 해야 할 필요가 어디 있어요? 바르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지옥이 정화처로서 지옥이 종말에 의무를 다해요. 그래 지옥이 종말에 소실돼요. 그래 다 불로 정화해서, 악을 제거해 가지고 만유가 회복되었을 때 거기에 동참할 수 있게 했는데 지옥이 더 이상 남아 있을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종말에 지옥은 없어집니다. 이것이 만인구원설의 가정, 결론입니다.
이 바르트 좋지 않습니까? 왜요? 화란에서 내가 설교를 가끔 들어봅니다. 참 신학적인 논의는 매끄럽게 잘 하는데 복음의 생명력은 없거든요. 그래 내가 그랬어요. 저 사람 바르트 신학을 잘 개진하고 있다. 자, 만인구원설이 되면 예수 안믿어도 됩니다. 지옥에 가서 고생 좀 해도 최후에는 다, 사탄도 정화되어서 완전히 창조에 회복되는데 우리야 육체를 입고 조금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물론 많이 사람을 죽인 자도 있지만, 사탄보다는 다 정하지 않습니까? 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유를 회복하실 때 다 회복되었습니다. 회복된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으려고 바득거릴 필요가 없어지지요. 그렇게 되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가 있어요? 오늘 이렇게 해서, 그리고 제 2 시련설이 있는데, 그것만... 이것도 연옥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윤리적 진보를 말하는 중에 매개 신학자들, 이거 뭐 옛날 이야기니까 할 필요는 없지요. 19세기 매개 신학자들, 헤겔 철학의 영향을 입은 신학자들을 쉽게 말하면 매개 신학자들이라고 합니다.
거기도 하늘로 올라가도록 인류가 작정되었기 때문에 그렇지요. 자, 살아 있는 동안 예수를 믿지 않았어도 죽은 후에 머무는 상태에서, 거기는 아직 중간기 상태이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죽은 자의 상태에서 복음을 거절할 때만이 정죄되어 지옥에 이른다고 하는 제 2 시련설이 있습니다. 이것도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 죽은 자의 운명은 죽음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변경이 사후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복음으로 구원할 자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복음 외의 방법으로 또 한번의 구원의 길을 내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로 복음을 내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예수의 구원을, 이 방법 외에 다른 물리적인 방식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바울이 복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세라, 권능이라고 그랬는데 로마서 1장 16,17절에 복음의 충족성에 배치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 외에 다른 방법으로 구원이 또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경륜, 구원의 경륜을 근본적으로 해치는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이 아니라!
자, 그 이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의 사람들은 또 구원에 이르는 길은 이스라엘 밖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셨고, 그 이후의 구원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구원의 방식외에 다른 방식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그의 영원한 경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그의 작정에 전적으로 배치된다. 그러기 때문에 배척을 해야 맞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제 7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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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강
지난번에 읽었던 요한계시록 20장을 더 읽도록 하겠습니다. 20:1-10까지.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리라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이제까지 종말론에 관한 서론 부분들을 거의 다했고요. 오늘은 재림과 그리고 천년기론에 대해서 재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초대교회 부터 지금까지 교회가 주님 오심을 간절히 바라고 또 기도하고 언제든지 주의 재림이 이루어질 것임을 확실하게 믿고 그리고 2천년을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특별히 재림과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와 간절함이 참으로 심했던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 복음의 내용이 예수 믿어서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채 다 알기도 전에 한국이 국가적으로 크게 위기의 연속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한국교회로 하여금 주의 재림을 열망하고 또 오늘 읽은 요한계시록 20장에 전개될 천년기의 도래를 열망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일면의 재림을 그렇게 열망하고 또 천년왕국을 그렇게 열렬히 사모해도 이면에는 재림을 그렇게 기쁘고 즐겁게 마음을 확 열고 기쁨으로 맞이할 생각을 하기 보다는 좀 두려움과 불안, 막상 주님이 재림을 하신다고 할 것 같으면 그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상당히 크게 한국교회 성도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지 않는가 제가 그렇게 느껴집니다. 제가 잘못 느끼고 혹시 제 마음이 그렇게 느끼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천년왕국은 강조를 해도 주의 재림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강조가 놓이지 않고 천년왕국이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심판의 무서움에 대해서 별로 두려움이 적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제게 들어요. 천년왕국은 지상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아직도 이 현 역사의 체계가 진행되는 것이 완전히 종결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없죠. 그래서 주의 재림이 있고 천년왕국이 있어도 우리의 운명이 단번에 결정나고 그런 것으로 인류의 역사가 다 끝나는 것이 아닌걸로 생각되기 때문에 아마 주의 재림, 그리고 그로 인해서 함께 올 심판에 대해서 큰 두려움이 적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막상 천년왕국을 주장하고 그걸 그렇게 크게 기다리는 분들도 생활에 있어서는 천년기를 맞을 만한, 주님의 재림을 맞을 만큼 확실하고 분명하게 진행되지 않지 않는가 그런 느낌을 제가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통상 천년왕국이 천년왕국 혹은 천년기가 ( )이 교회가 핍박받고 위기에 처하고 존립이 위태하게 그와 같은 때가 될 때에 천년기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강렬해졌어요.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복음이 들어오고 얼마 안돼서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운동, 백만 부흥운동이 일어나서 새롭게 교회가 일어난 놀라운 역사가 있었지만 그것은 나라가 다 운명이 끝나갈 그와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욱 간절히 기도하고 회개하고 열심히 노력할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여러분 잘아시고 유명한 조만식 장로, 조만식 장로의 회개가 평양에서 그 큰 회개운동과 그 큰 대부흥운동을 일어나도록 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죠. 참, 남한의 이승만 하면 북한에 조만식이라 할만큼 민족을 대변한 큰 지도자가 교회 장로로써 흠잡을 데 없이 잘 사시든 분이었는데 이분이 어느 과부의 재산 처리를 맡아가지고 재산을 처리한 후에 그 과부에게 넘겨준 것이 아니라 일부는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일부만 그 과부에게 넘겨주었는데 그래서 평양에서 일어난 부흥운동 집회 때 조만식 장로가 나와서 그것을 회개한 일이 있었죠. 그 회개사건이 참으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크게 각성하게 하고 회개운동을 일으키게 했고 그리고 교회가 백만회로 확산되는 부흥운동이 시작됐고 전개 됐습니다. 그때부터 그때 길선주 목사님께서 아주 우리 한국교회의 지도자급에 속하는 큰 목사님이셨는데 그분이 요한계시록을 강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천년왕국을 열렬하게 가르치고 고난받고 나라가 망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실 뿐만 아니라 이런 핍박과 어려움이 후에 우리가 천년왕국, 주님의 통치 아래서 이 모든 고통을 씻고 그리고 왕노릇하게 되며 의와 평화와 번영의 때를 맞아서 이 고통이 다 사라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왕노릇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굶주리고 못먹고 할벗은 그런 상태에서 그런 것이 다 벗어나는 때가 올 것을 열렬하게 가르치고 성도들을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나라가 망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부터 1919년 3.1운동이 있었고 광주학생 독립운동이 있었고 대대적으로 독립운동은 있었지만 정말 참담하며 어두움이 계속되어 아무런 소망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독립선언서를 쓴 최남선 이광수 같은 글 그때 당시의 민족의 지도자들이고 선각자들이 더 이상 일본의 세력에 무슨 반항세력이 일어나서 이와 같은 것을 무너뜨리고 나라가 독립하겠는가? 절망에 빠졌기 때문에 친일파가 되고 지조를 팔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와 같은 어두운 참담한 때에 위로와 소망을 줄 수 있다면 요한계시록의 강해를 통해서 주의 재림하시면 그때 우리가 이 고통을 벗어나고 그때는 왕노릇하며 악인들을 지배하고 또 세상이 저주를 거두심으로 생산이 풍성하게 넘치게 되고 그리고 동물들의 성질도 변해서 이사야가 예언한 것과 같은 평화의 시대가 도래할 터이니까 소망을 갖게하고 교회로 하여금 핍박받는 중에 좌절하지 않고 살게 했습니다. 그러나 일면 그와 같은 우리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교회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친일파들이 되어서 다 일본과 일본을 봉사하고 편들며 그들의 앞잡이가 돼서 참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자들을 다 잡아주는데 앞잡이 노릇을 하고 그들이 교회의 모든 지도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1937년, 1937년으로 기억하는데 혹시 36년인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대부분의 미션스쿨이 폐쇄되고 선교사들이 다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에 일본과 대한교회 지도자들 그리고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교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현세적인 아부와 현세에서의 삶에 만족하는 삶을 계속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해방을 겪고도 여순반란과 대구동란 반란, 그런 또 여수폭발, 제주도 폭동 사건 그와 같은 일이 많이 생기고 50-53년에 걸친 4년에 걸친 6.25, 휴전 후에도 계속된 불안한 정치정세, 이런 것들 그리고 4.19, 또 5.16 이와 같은 어려움의 시절을 겪으면서도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강해를 벗어버리지 못했습니다. 60년대 말까지도!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요한계시록 강해하는 것이 수요일밤 힐수 과제였고 대부분 부흥사들이 요한계시록 강해를 해서 주님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늘 강조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언제든지 긴박하게 올 수 있다는 그와 같은 생각을 많이 갖고 그래서 학생들도 학교 보내는 것도 금지하고 많이 보내야 중학교, 그리고 더가면 성경학교나 해서 고등학교나 오고 대학교 가면은 다 세속화 되어 참 신앙의 길에서 떠나서 자유주의 신앙을 갖게 됨으로 더 많은 교육은 교회로 하여금 타락하고 배도하려 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교육을 시킬 수 없도록 그렇게 했습니다. 사실 5.16이 나서 63년 민정으로 이양되기 까지 어둠의 시절을 지나고 설이 돌아온다 하더라도 떡을 하고 명절을 맞을 준비를 별로 못하는 그와 같은 상황을 3년을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60년대 중반부터 경제 5개년 계획을 세워서 열심히 정부가 노력해서 자본과 기술들을 도입하고 열심히 부흥을 노력해서 70년대 기간산업들 처음에 1차 산업 기간산업들을 세워서 공업국으로 도약할 만큼 그와 같은 기초를 놓게 되고 수출입국으로 수출만이 사는 길로 해서 수출 2백억불을 달성하면 다 잘살게 될 걸로 믿게 되었고 4백억불을 달성하면 다 잘살게 될 걸로 그렇게 믿으면서 열심히 노력하고 수고했습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까 사회가 크게 부흥하고 또 교회도 마찬가지로 크게 부흥을 했습니다. 내 기억으로 70년대 부터는 70년대 중반 이후 부터는 그래서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요한계시록 강해가 사라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때는 외국에 있었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모릅니다마는 지금 대부분 요한계시록을 강해하는 목사님들이 별로 많지 않고 부흥사들도 저녁집회는 다 요한계시록, 낮집회 공부에는 요한계시록 강해로 성경공부를 계속했는데 그것이 다 사라지고 축복에 대한 강조가 요한계시록 강해를 대체하게 됐습니다. 그 교회가 번창하게 잘 살게 되고 특별히 농촌교회가 아직도 어렵고 농촌 교역자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교회가 너무도 많지만 도시교회들은 너무나 부자들이 된 교회가 많아지게 되서 목사님들도 많은 여유를 갖게 되고 성도들도 여유를 갖게 돼서 웬만한 계획들은 다 집행하고 시행하지 못할 일이 없을 만한 수준이 됐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별로 종말에 대한 긴박한 생각도 없고 기대도 크지 않는데 한편에서는 이렇게 재림과 재림보다는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와 부풀음이 강하게 일고 있는 것은 어찌된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초대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2세기 중엽에 이레네우스라 하는 기독교 최초의 신학자가 소위 “이단들에 대하여”라는 책들을 썼습니다. 이것이 라틴어로 번역이 되서 희랍어 원문은 대부분 소실되고 또 번역된 라전어 판이 남아있고 일부의 희랍어 원본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 ) “이단들에 대하여”란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 특별히 영지주의자들, 그노시스주의자들에 대한 그들의 신관과 그들의 주장들을 논박하면서 마지막에 종말론에 관해서 천년기론을 잘 개진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천년기를 세우실 때에 그때에 열심히 그때는 온 지구가 비옥한 생산을 하게 되어서 포도 한송이를 두 사람이 메도 멜 수 없는 그와 같은 풍성한 수확을 내게 되고 의와 평화가 이루어져서 굶주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없게 되고 질병이 다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이 신앙적으로 더 성숙해서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갈 때에 천년기가 끝나는 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인도할 만큼 될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3세기 들어올 때에 우리가 아직도 핍박이 무섭게 진행되고 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핍박에 의해서 순교를 받고 있는 그와 같은 때에 천년기에 대한 반대가 교회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천년기에 대한 강한 반대를 먼저 주장한 사람이 소위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인 오리게네스 입니다. 오리게네스는 천년기에 대한 강력한 반대를 시작하고 그것과 함께 육체의 부활도 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신경에 나와 있는 “죄를 사해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 그것을 배척했습니다. 그런데 오리게네스가 오리겐이 그와 같은 천년기를 배척할 때에 교회가 핍박아래 있으면서 많은 순교자를 내고 있는 그와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함께 천년기를 배척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어거스틴이 4세기 말부터 5세기까지, 어거스틴이 4세기 중엽에 나서 5세기 초엽에 죽었습니다. 대 교부가 아주 강력하게 천년기론을 배척했습니다. 그런데 천년기를 배척할 때에 오리겐이 반대한 육체의 부활은 교회가 한사코 주장하고 굳게 붙들면서 배척을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그렇게 큰 핍박과 환란을 맞고 있는 중에도 교회가 천년기를 배척해서 사도신경에 나와있는 것보다 조금 더 복잡하고 정교하게 이루어진 것이 325년 니케야신경인데 여기 보면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영광 중에 다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사도신경이 보통 2세기 중엽에 형성된 걸로 봅니다. 2세기 중엽에 아직도 핍박을 받고 있을 때입니다. 순교자를 많이 낼 때입니다. 2세기 중엽 저스틴 마터가 초대 변증가로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때에 형성된 신앙고백이 “저리로 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한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때에 신앙에서도 신앙의 규범은 사도신경이 같은 내용이지만이보다 더 확실하고 정교하게 구분돼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성육신 구속의 경륜에 대해서 더 자세하고 확실하게 돼 있습니다. 325년 니케야 공회의가 최초로 에큐메니칼 공회의로써 기독교 믿는 신앙의 내용을 말했습니다. 거기에도 사도신경보다 조금 더 자세하게 돼 있지만 근본은 사도신경의 내용과 같습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경이 여기 2조에 덧붙히기를 그의 만세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시고 그리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다 확정을 했습니다. 그의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경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천년에 국한한 것이 그릇됐다고 하는 사상을 정식으로 배척을 했습니다. 천년기는 천년기론의 공통된 특색은 지금 하나님 나라는 현세에 있지 않고 주님이 오셔서 천년왕국을 세울 때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세워진다고 했습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회가 공식으로 천년왕국을 배척을 해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영원한 나라라고 하는 것을 확정했을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5:24-28에 있는 “그 마지막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나라를 바칠 때라” 그래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종결될 것 같은 이해를 갖도록 하는 성경 구정에 대해서 24절입니다. 그 다음 끝에 오는데 아버지 하나님께 나라를 바칠 것이라. 그래서 바울이 24절에서 제기한 이 그리스도의 나라가 끝이 있을 것으로, 이에 대해서 천년기에 국한 할 수 있다고 하는 이것을 정식으로 배척하고 정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천년기를 가장 크게 열렬하게 교회서 완전히 추방한 사람이 대교부인 어거스틴입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의 신경들이 다 천년왕국이 다 이단으로 정죄되고 바른 교회의 믿음이 아니라고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소수의 분파들에게 내려왔고 종교개혁 때 다시 신경을 확정할 때도 천년왕국이 전혀 무가치하고 가치가 없는 이단적인 설로 배척을 했습니다. 이것이 재세례파들에게 이 천년왕국이 수납되었다가 내려왔는데 그것이 다시 크게 일어났냐면 소위 19세기 중엽 혹은 초엽 ( ) 달비가 영국교회가 너무 의식화 되고 형식화 되어가 그에 대한 반동으로 필리스마 형제단을 조직하고 성경공부를 시작하면서 문자적인 해석을 성경해석의 가장 바른 원리로 볼 때 천년기론이 다시 크게 열렬하게 수납되고 그것이 그 후에 미국의 달비가 여러차례 6-7번인가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교회의 이 천년기론을 열심히 선전해서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이 다 달비가 가르친 천년기론, 현대형의 미국 천년기라 그것이 세대론입니다. 세대론이 가장 바른 천년기론으로 받아들였고, 19세기에 미국교회가 그의 천년기론을 받아 들이게 됨으로 선교사로 온 선교사들이 대부분 이와 같은 천년기론 사상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천년기론이 그대로 전달돼 와서 가장 확실하고 바른 이론인 것처럼 이때까지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공교회에 로마교회가 정교회와 종교개혁교회들에 공교회들의 신앙고백서가 다 전통적인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고 보편부활 보편 일반적인 부활, 그리고 보편적인 심판 그리고 신천신지의 도래, 이와 같은 종말도식을 가장 바르고 확실한 교회의 신앙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천년기론은 많이 많이 퍼졌고 추종자들이 많습니다마는 이와 같이 통일된 진술된 형태로 나타난 적도 없고 교회 신앙고백의 형식으로 한번 더 수납되고 채택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고난 받는 교회들에게는 천년기론이 그렇게 호소력을 갖게 되고 특히 세대론에 의하면 주님 재림전에 무슨 꼭 표징이 있어야 되는게 아닙니다. 주님은 문밖에 와 계시기 때문에 언제든지 즉각 오실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 천년기론 특히 세대론의 가르침 입니다. 그런데 한국이 잘살게 되었어도 일부에서는 천년기론에 대한 세대론적인 선전이 크게 일고 있어서 한국교회가 이 세대론을 그의 확실하고 분명한 교리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미국에 가시면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계속해서 설교만 나오는 텔레비젼 프로그램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아침예배하러 가기 전부터 계속해서 목사님들 설교가 나오는데 저녁예배를 마치고 돌아와서 텔레비젼을 틀면 거기에 통상적인 예배 중계가 다 끝나고 이제 단독 혼자 나와서 성경을 풀이하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분은 철두철미한 세대론자로서 세대론의 도식을 그걸 가지고 열심히 연대를 그리며 해설을 해서 다니엘서와 계시록이 말하는 주의 재림이 곧 가까이 임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증인파, 안식일파만 주의 재림의 날을 확정한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 당시에도 재세례파들이 그러했고 17세기에도 그러했고 18-19세기에도 그런파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보면 주의 재림이 가까운건 확실하고 우리가 아직도 종말시대에 살고 있는건 분명합니다.
그러면 이제 주의 재림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주님의 재림하시는 것은 또 한번의 유예기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재림하시면 그의 재림의 역사는 종결하고 구원을 완성하며 그리고 심판을 이루므로 심판을 이루어서 완전히 새인류를 이루시므로 하나님께서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시는 그와 같은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역사의 끝이고 역사의 완결입니다. 주님의 재림 이후에 지금과 같은 형태의 시간이 또 계속되고 진행되는게 아닙니다.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 흐름이 그 자체로 종결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그는 아무런 가치가 없고 사면에 불가한 질문입니다. 역사 자체는 역사 자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게 아닙니다. 역사를 종결합니다. 그것은 역사 밖으로부터 역사가 종결돼요. 주님이 재림하시므로 그렇게 됩니다. 주님의 초림 때에 그가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 사람들을 구원해 내시고 자기의 백성들을 확실하게 구원해 내시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그 일을 하고 계시죠. 그러면 주님의 오시는 것은 그 구원을 완성하시는 것이고 마침내 악을 소제하므로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악을 다 소제하시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대신 그 천국에 도달하는 것이 종말입니다. 재림은 종말이지 재림후에 반복되는 종말이 반복되는 재림이 또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20장을 어떻게 이해하던지 간에 교회가 한번의 재림과 한번의 보편부활, 한번의 보편심판으로 일이 종결되는 걸로 했지 계속적인 여러차례의 재림과 또 여러차례의 심판, 여러차례의 부활을 말하지 않는 것이 성경 전체와 교회의 회의였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주님이 한번 오시면 또 한번 유예기간이 종말전에 끼인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주님의 오실 것을 맞을 것이 두렵고 내 생전에 오시면 어쩔까 두려운 생각이 많습니다. 종말론은 그냥 종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전통적인 종말론이 대부분 기독론과 상관없이 진행됐습니다. 처음 초림으로 피흘려 사람들을 구속하셔서 처음 하나님께서 인류역사에서 인류와 언약을 맺으셔서 이 백성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만드시기로 하시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는데 그것이 실패되고 낭패됐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그리스도께서 피흘리심으로 이루셨습니다. 죄를 속하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와 죽음 가운데서 살려 내셔서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생산해 내는 일을 시작하셨으므로 이 자기 백성들을 완전하게 하나로 모으시는 일을 하셔야 합니다. 이 처음 재림은 초림 때 이룩하신 구원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종말론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게 기독론의 연속이죠. 성육신하신 그 몸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모든 처음 하나님의 경륜에 작정하셨던 모든 백성들을 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으시고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쎄거 초림 때에 성육신하셔서 사람이 되시므로 구원을 이루셨는데 구원을 이루심 때문에 그 아버지에 의해서 주와 그리고 구주로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주재로 왕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그가 역사의 주인으로서 역사를 관할하고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역사가 도달할 목표는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그 사역의 완성이 그 역사의 목표입니다. 이 역사가 다른 것을 위해 진행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다 완성해 내시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완전하게 이루십니다. 그것이 역사가 목표하고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 이가 완결하기 위해서 오시는거죠. 그러니까 이 구원의 완성은 주의 재림 때 이루어집니다. 지금 통상, 지금 받은 구원은 구원이라. 지금은 우리가 예수 믿어서 우리의 영혼이 죄를 씻음받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영혼만 구원에 이르렀지 육체가 구원에 동참한게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배척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성립합니다. 구원은 영혼만의 구원으로 성립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뿌리 깊은 확신입니다. 구원은 반드시 우리의 영혼과 함께 육체가 함께 구속되어야 되는 것이지 영혼만 구원에 이르고 육체와의 현상세계는 그대로 있는 상태, 그런 구원만 가져온 메시야는 메시야일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유대교였습니다. 이 뿌리 깊은 확신, 지금도 예수를 못 믿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예수가 진정 메시야이면 영혼 만이 아니라 육체까지도 완전히 구원해야 하는 것이 바른 일이라! 그러니까 언제 예수 믿느냐? 우리의 육체까지 구원을 가져올 때 그때 예수를 믿을 수 있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사고입니다. 우리도 지금 구원에 이르러서 성령님이 우리안에 와 계시고 우리가 영생에 이르는 씨를 받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한 건 아직 못됩니다. 우리가 완전히 구원되는 길은 주님이 재림하셔서 우리의 육체도 하나님 구원에 동참하게 하고 우리의 거소인 이 현상세계도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야 구원이 완성된 거죠. 구속이란 구원하고 구속이 별차이가 없는 것 같아도 그게 큰 차이를 냅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만 구원에 이르는 것이냐 그런게 아닙니다. 육체가 이 땅을 거소로 하고 살고 우주와 유기적인 연관을 맺는데 우리의 땅은 우리의 육체는 부활해서 구원에 이르고 이 지구는 우리의 생존세계는 현상대로 있는 것도 완전한 구원이 아닙니다. 그 때는 우리의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할 때에 우리의 거소도 변화돼서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해요. 구원의 완성은 구속이라고 합니다.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주님이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을 대표로 해서 언약을 맺음으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삶의 길을 작정해 놓으셨는데 그 삶의 길을 바르게 살 것인지 안살았는지를 하나님 앞에 보고하고 결말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 역사는 종결돼야죠. 그래야 그 역사가 목표에 도달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역사의 끝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 역사가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하고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이 인류의 역사가 불합리와 부조리의 연속으로 흘러가는 것 같애도 그리스도께서 역사를 주재하고 계시므로 그렇게 부조리와 불합리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참담한 전쟁과 질병과 재앙들이 연속되기 때문에 이 역사가 역사 자체로 무의미한 것 같애도 그 자체로 보면 무의미해도 다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하고 진행되고 하나님의 영광의 도달을 목표로 하고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역사가 무의미로 허무로 종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를 이루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실려고 작정하시고 역사를 진행하셨는데 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걸 방해하는 일 이 요소들 유혹자들과 그리고 죄악들을 제거해 내시므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나라를 이루시고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셔서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십니다.
그 영광에 이르는 그것이 역사의 목표입니다. 그러니까 무의미가 무의미와 연속이 무의미의 연속이 부조리가 불합리가 역사를 지배하고 진행되는 것 같아도 이 역사 자체 내에서만 보면 그러해도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서 역사의 주재자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하고 진행됨으로 역사가 무의미 불합리 허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 귀결됩니다. 바로 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서 역사의 주재이시고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단지 심판만 하시기 위해서 오시는게 아니죠. 지금 하나님이 하나님이셔도 지금 우리의 역사 진행 상황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하나님으로 역사하심을 잘 모릅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이와 같은 전쟁과 질병과 참혹함이 있을 수 있느냐? 2차대전 때 나치 아래서 폭격을 받고 고생하는 그들이 하나님이 계시면 도대체 이와 같은 일들이 진행될 수 있느냐? 하나님 믿을 수 없다. 그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일 줄은 생각하지 못하는 거죠.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의 나라됨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고 사람들을 병들어 죽게하고 멸망에 이르게 하고, 그 근원인 유혹자들 사탄과 죄악을 그로 인해서 도입된 죽음을 제거하는 일이 함께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구원의 완성이 그 근본목표라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나라를 방해하고 훼방할려고 했던 악의 세력들을 완전히 제거해 낼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시간에서도 배우는 과정에서 우리가 살폈지만 역사 악이 진행되어서 악의 화신이 죄의 사람, 불법의 사람이 나타날 수 있느냐 할 때에 그럴 수 있습니다. 죄가 그냥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두려워하고 적게 짓는 상황에서는 죄의 무서운 세력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어떠한 죄악된 습관과 그리고 습관이라고 할지 그와 같은 삶의 방식을 갖고 있으면 웬만큼 해서 못 벗어납니다. 그 정말 팔을 찍어버리기 전에는 못 끊는거죠. 팔을 찍어내고 못 끊는거죠. 이 팔을 끊어버리라고 하는 명령이 다리를 끊어버려라 팔을 끊어버려랴 눈을 빼버리며 이 주의 명령이 코란경에 반영이 돼 있습니다. 그래서 도둑질한 사람들은 잡히면 팔을 자른다고요. 카이로의 어느 외교관 집에 애굽 여자를 하녀로 데리고 살았는데 손버릇이 나빠요. 그러니까 영국식으로 생각해서 너 경찰서에 갔다 오너라. 보냈어요. 그런데 갔다오더니 팔이 없어 오는거예요. 입이 딱 벌어지고 눈이 빠질 것 같은거죠. 그런다고 고쳐집니까? 한팔 잘라버렸으면 이 팔 갖고 도둑할려 그래도 이것 또 자를까봐 못하겠지마는 그러나 죄된 습관을 한번 형성해 놓으면 그 죄로 마지막 귀결에 도달하기 전에는 못 고치죠. 못 깨닫죠. 영으로 은혜로 그것을 깨치기 전에는 하기 어려운거죠. 그러니 여러분들이 조금의 죄악된 습관과 풍습도 여러분들이 형성되기 전에 끊어야 합니다. 깊이 진행되기 전에! 손으로 죄를 짓거든 끊어버리라고 하지 않았어요? 마가복음인가...? 이것 가지고 안만질 것 자꾸 만지죠. 특히 그 계명을 하실 때에 남녀간에 관계에 대해서 주님은 말씀을 하고 계신다고요. 안만질 데를 자꾸 만지니까 이게 문제죠. 끊어버리기 전에는 둘 다 끊어버리면 못만질 것입니다. 그런데 갈수록 악이 심하게 진행되고 악화되죠. 어릴 적에 보던 습관들이 그 풍습들이 지금 다 없어지는 것 같아요. 지하철 타고 가다가 나도 앉을려고 하면 어린아이들이 와서 먼저 앉아버린다고요. 가만히 보면 저 어린아이가 나도 이렇게 머리가 허옇는데 저 어린아이가 제가 먼저 가서 앉는다. 내가 시골에 충청도에 부모님이 계셔서 가끔 버스타고 가보는데 어린 중고등학생들이 앉아가지고 할머니가 와도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제가 한번 일어났어요. 할머니가 올라오실 때 “앉으십시오” 했더니 차장이 하는 말이 “어찌 일어나십니까?” “특별합니다” 한번도 일어나는걸 못 본거예요. 그 다음에 할머니 옆에 어린 딸이 손녀가 따라왔는데 그 애가 그 자리에 딱 앉아요. “애 네가 날 비켜줄 차례 아니냐?” “할머니가 자리 비켜 줬으니까” 그러나 끄떡도 안하고 앉아서 가요. 요새 아이들이 어디가서 앉느냐 하면 제일 뒤에 가서 앉아요. 앞에쯤 앉으면 할머니 할아버지들 올라오면 안일어나면 괴롭고 하니 맨 뒤에 가서 앉아 일어날 생각을 안한다고요. 악이 강할수록 진행되면 더 담대하고 큰 규모로 진행됩니다. 여러분도 많은 경우의 상상의 세계가 다 큰줄 알아도 실제의 세계가 항상 상상의 세계를 넘어간다. 감히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데 실제 세계의 일은 일어나거든요. 우리의 상상을 못미치는거죠. 중학생 열다섯 살 짜리 아이가 9,8살 되는 어린 여학생을 데려다 성폭행하고 마침내 찔러 죽이기까지 하지 안했어요? 그런데 한겨레 신문에 보니까 그렇게만 나와 있는데 중앙일보를 보았더니 집에 가봐야 어머니가 없어 매일 텔레비젼만 봤다. 텔레비젼만 봤겠어요? VTR만 봤죠. 그러니 공부도 못하고 그러니까 VTR만 보니까 모든 성영화들 그런 필름들 뿐이죠. VTR이! 그것만 보니까 부모님도 다 보니까 엄마 아빠 없으니 그것만 보는거죠. 어머니는 어디가고 무슨짓을 하고 돌아다니면서 아이를 살인자로...!
미국에서 타임지에서 들었는데 미국에서 또 진행되는 악의 번창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마찬가지죠. 열살 미만 아이가 어린 아이에게 들려있는 25전 동전을 안준다고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미국에서 일어났습니다. 미국에서의 범죄가 얼마나 심한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현상이 진행되는 것 같애요. 인신매매단, 그것이 멀리 신문에만 있는 얘긴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집 옆에서 그와 같은 얘기를 해주더란 말입니다. 나는 우리 집 옆에 젊은 여자가 사는데 동생하고 신사동 가구 백화점 가서 가구를 보는데 한 젊은 청년이 나와서 한데 얼굴도 순진하게 생기고 얌전하게 생긴 남자가 나오더니 하는 말이 “싸면서 좋은 명가구가 있으니 오라” 하더랍니다. 그러니까 그 여자 동생이 따라갈려고 하니까 그러니 딱 치면서 “얘 요즘 인신매매가 심한데 네가 따라갈려고 그러냐?” 그랬더니 얼굴이 빨개지면서 달아나더라. 그 남자는 양심이 있는 것 같애요. 그런데 거기다 이야길 덧붙히는데 부끄럽고 흉해서 말하기가 어려운데, 또 한 여자가 인신매매단에 끌려갔는데 전부 다 요구르트를 줬다든가 하여튼 마시고 전부 다 마취상태에 있는데 자기는 안마시고 넣어 놓았는데 전부 다 쓰러져 있는 동안 옷을 벗겨버리고 자기들은 가서 음식먹고 희희낙낙 좋아하는데 그때 발가벗은 몸으로 튀어나와 손을 들고 차를 세우는데 누가 차를 세워 주겠어요. 다 미친여자로 생각하지! 그래서 차를 세워 자가용을 태워주는데 그래도 그분이 생각이 있는 분이어서 옷을 벗어줘서 몸을 가리고 “집이 어디냐?”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경찰서로 갑시다. 경찰서로 가서 경찰과 함께 그 장소로 갔더니 벌써 한사람이 탈출했기 때문에 전부 데리고 도망가 버렸더라. 도망가지 못하게 옷을 다 뺏어가지고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행방불명 된 사람이 참으로 많다. 그러면 인신매매가 말로만 있던 것이 아니라 내 옆에서 진행되는 것을 볼 때에 보통 끔찍한 일이 아니예요. 조금 쉬었다가 그 다음 계속 하겠습니다.
오늘 제가 천년기를 강의할 생각을 갖고 왔는데 오면서 좀 불안하고 무겁고 그래요. 어떻게 해야 바르고 잘 설명을 해서 확신있게 되도록 할까 그런걸 생각을 하니까 좀 마음이 많이 무거웠습니다. 주님이 시작한 구원을 완성하시니까 종말론은 기독론의 연속이죠. 기독론의 일부이고! 또 그가 구원을 완성하므로 인류역사를 종결하고 악을 심판하기 때문에 심판주로 오십니다. 악이 얼마나 크냐? 다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얼마나 크고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행이 됐느냐? 그것도 다 헤아리지 못하죠.
이번에 7.7선언을 연구한 미국의 시카고 대학의 커밍스 교수의, 내 아직 다 읽지는 못하고 한겨레 신문에 요약된 것만 다 읽었습니다마는 미국무장관이 7.7선언을 했는데 7.7선언이 미국의 국력에 힘들고 또 너무 국력을 2차대전에 소모하기 힘들어서 보통 우리는 7.7.선언한 것으로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커밍스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사실 7.7선언을 해서 한반도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고 하므로 북한과 소련으로 하여금 남침하게 할 때에 그들로 남침자라고 하는 낙인을 찍게 하므로 반공하게 하는 큰일을 할 수 있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서 산업을 부흥시키게도 할 수 있기 때문에 7.7선언을 했다. 고도의 정책인 선언을 했다. 한 나라가 자기 나라 잘되기 위해서 한 나라를 전쟁의 불바다로 끌어 넣으면서, 한국을 구해준 은인인 것 처럼 나타났다고요. 정치라고 하는 것, 상상을 못할 일이죠. 베트남 전쟁도 사실은 미국 재벌들이 베트남 주변에 나는 유전이기 때문에 전쟁을 시발한 것이라 그런 이야기도 있고 그런 것 보면 인류 역사가 얼마나 악으로 진행됐는지 알 수 있는거죠.
악이 소제되지 않고야 이 땅에서 어떻게 정의가 실현될 수 있습니까? 악이 소제되지 않고야 이 땅에 어떻게 공평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악이 소제되지 않고야 이 땅에 어떻게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이루어질 수 없는거죠. 이건 잠정적인 평화이고 임시적인 평화이지 영속한 평화는 악의 제거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거죠. 그러니 구원의 완성이 악을 제거하고 심판하는 것은 구원의 완성의 다른 면이니까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가 육을 입으셨고 구원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역사의 주재자가 되시므로 그가 손으로 하나님께서 악을 처리하는 일을 하시므로 그 영화에 크게 도달하게 하는 일을 그리스도의 손에 하나님께서 위탁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종말론도 다 그냥 역사가 진행되니까 끝에 가서 이렇게 종결된다. 그러니까 종결하기 위해서 주님이 오신다 하는게 아니라 주님이 이룩하신 그 역사의 목표를 이루게 하시고 그리고 완성하시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완전히 이루기 위하여 악을 소제합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올 수 밖에 없다. 사탄을 심판하는 일이 꼭 있어야 하고 그로 인해서 인류 역사에 진행되고 이루어졌던 그 큰 악들이 소제되고 징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 악이 얼마나 큰지는 우리는 다 알지는 못하는 거죠. 그래도 우리가 이만큼 사는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보전의 역사로 그런거죠. 그러지 않으면 우리도 다 악의 용사들이 되서 다 한 몫을 단단히 할 수 있는 자들일 터인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입히시고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악이 마음껏 흥왕해서 땅과 역사를 민족을 멸망케 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제재하시기 때문에 이와 같이 역사가 진행될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창조와 개발되는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구속된 백성만 포함되고 변화된 이 창조가 낙원의 표준에로 되돌아가는 그 수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신 이 창조의 개발, 창조, 요새 쉬운 말로 개발해서 나타나는 결과들도 다 하나님의 나라에 선별되어 포함될 것입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오시니까 그때 오시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시는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지금이야 하나님이 우리는 계시는 줄 알지만, 우리가 믿음이 약해지고 시험이 들 때는 하나님이 계신가 하고 의심하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담대히 악을 행해도 징벌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이와 같은 현상을 본다면 정말 하나님이 계시냐 할 수 있는데, 종말에 가면 하나님이 구원을 완성하시고 악을 완전히 소제하셔서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실 때 완전히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 계시고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재림이 언제 이루어질 것이냐? 세대론에서는 주님의 재림 전에 특별한 징조들이 있는 것도 없다. 언제든지 오실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천년전기와 그리고 무천년의 교회 종말론에 의하면 주의 재림 전에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고 그리고 그후 이스라엘이 회심하는 일이 있고 큰 배도가 있고 전쟁과 환란이 있으며 그리고 적그리스도가 출현할 것이라. 그와 같이 말하지마는 그러나 기근과 전쟁과 지진이 많이 생겨도 그것 가지고 바로 종말이다 말하기 어렵죠. 거대한 로마 나라가 4백 몇년에 망했을 때 정말 그 거대한 나라가 망할 줄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나라가 망하고 환란이 닥치면 곧 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고 또 그렇게 믿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6.25,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멸망 때 주님 자신도 마태복음 24장에서 예루살렘 멸망과 주님 자기 자신의 재림과를 이렇게 일치시킨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 가지고 종말의 시기를 계산해 낼 수 없다. 그것을 이시간에 확실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의 징조는 알 수 있어도 징조는 분별할 수 있어도 날짜를 계산하는 것은 유대주의의 묵시문학의 결론이지 그것이 성경적인 종말론은 아닙니다. 때를 계산하는 것, 유대주의 묵시문학의 일이예요. 언제 이루어지느냐? 하나님의 백성들을 완결하기 위해서 오시니까 주의 복음이 편만하게 전파돼서 마지막 피택자가 복음을 받을 때 그 때 주님이 오실 것이라. 그리고 주님 오실 때 쯤 해서 상당히 많은 창조의 가능성들이, 보화들이 개발될 것이라.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오시느냐? 그 날은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밤에 도적이 온것처럼 오는 것 그 이상 저 분명하게 날짜를 계산할 수 없다. 주님이 오실 때에 그냥 보편적으로 오시지만 인격적으로 오시고 가시적으로 오시고 어느 일정한 시기에 오시고 그리고 장소에 오시고 그걸 모든 인류가 다 알게 돼죠. 그리고 예측할 수 없게 오실 것이라. 오실 때에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이라. 그냥 오시지 않고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이라. 이 일을 심판주이시고 역사의 주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 전에 반복해서 이 일을 강조하셨습니다. 물론 주님의 오심이 제일 처음에 성령강림 때 오셨습니다. 성령강림 때 인류에게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 때는 영으로 오셨고 영 안에서 인류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통치권 행사로 모든 인류에게 늘 오시고 지금도 가까이 오신다고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이 역사적인 큰 사건들을 진행하시고 일을 이루실 때 인류에게 가까이 오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넓게 더 편만해서 확실하게 주의 백성들이 일어날 때 주님이 오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멸망 때 주님이 오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주님이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오심은 영적으로 오심이요 육체로! 초림 때 그 몸으로 오신게 아니죠. 이제 오시는 것은 영적으로 오시는게 아닙니다. 가견적으로 육체적으로 인격적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 오심은 반복될 오심이 아니어서 한번 오심으로 모든 역사를 종결하시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이 마지막에 오시게 되면 육체로 인격적으로 가견적으로 만인이 볼 수 있는 형태로 오십니다. 성령강림 때 주님의 오심을 제자들은 성령 받은 분들은 다 알았습니다. 이미 통치권을 행사하시므로 주님이 인류 가까이 오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는 알지 못합니다. 예루살렘 멸망 때 주님 친히 심판하시기 위하여 역사하셨던 것을 초대교회 교인들이 다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가견적으로 육체로 인격적으로 오시는 예는 재림 때 오심이 마지막이고 이 재림으로 완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셔서 창조를 회복하시고 새인류를 완전히 만드셨어요. 구속을 완성하시고 그리고 악을 완전히 소제해 내시고 악의 근원자인 사탄을 완전히 인류세계에서 창조세계에서 제거해 내시고 그리고 이 창조를 완전히 새롭게 만드셔서 새 창조를 만드심으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모은 인류와 창조를 제시하시기 위하여 오실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새 인류에게 오셔서 풍만하게 완전하게 거하시고 그로 영광에 충만하게 돼서 하나님이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시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전에도 처음 낙원에서 2절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 처음 낙원에 인류와 함께 계셨습니다. 낙원이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의 기능을 행사한 곳이 낙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교제를 하시고 거기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낙원이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였고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범죄하므로 하나님께서 그 영을 거두셨습니다. 그런데 언제 다시 인류에게 오셨느냐? 완성하고 떠나신 건 아니지만 구약의 백성들에게 성전 성막에 하나님께서 오심으로 백성들 가운데 사시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쉐키나'라고 그러죠. 하나님이 백성들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살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 계심은 기계적으로 마력적으로 한 곳에 부착해 계심이 아니라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 위에 계심이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계심이 임의로 철수할 수 있고 그리고 변경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하나님의 임재가 성육신으로 한 육체 가운데 하나님 자신이 골로새서에 '플레로마'(πλήρωμα)로 표시했는데 하나님 자신이 혹은 하나님의 신성의 충만이 그리스도의 육체안에 완전히 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육체가 성전으로 하나님의 충만을 완전히 가진 곳이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해 있었고 그리고 그 몸에서 하나님의 죄사함이 완전히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육체 나무와 돌로 지은 물리적인 성전이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그 성전을 헐어 버리셨습니다. 그 이후에 교회에 성령 강림 이루에 성령으로 인류에게 교회에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 계심은 보증으로 또 하나님의 종말에서 완전한 임재의 예배로 계심이었지 이게 만유안에 만유가 되시는 방식으로 계심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하게 만유안에 만유가 되심은 종말에서 새인류에게, 그 때는 하나님이 우리중에 충만히 거하시므로 하나님의 임재를 피할 길 없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길 없어서 하나님이 우리안에 완전히 전부가 되시는 그와 같은 때가 될 것입니다. 그 일이 종말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모든 질병가 고통과 죽음과 이런 것들이 다 소제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충만히 계시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와 같은 질병과 고통과 죽음이 있게 됐습니다. 그 때는 죄가 완전히 제거됨으로 하나님의 거룩이 충만해져서 모든 곳이 다 하나님 임재의 처소입니다. 스가랴에 써있는 그대로 말발굽에까지 여호와께 거룩이라고 써붙히듯 완전히 모든 세상이 다 거룩한 세상이므로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기 때문에 거룩하지 않는 부분이 없습니다.
자, 그러면 천년왕국, 주님이 재림하신 다음에 그 재림이 언제 이루어지느냐? 재림하고 천년기하고 사이에 문제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교회의 종말론, 재림, 부활, 심판, 전통적인 종말론에 의하면 주님의 한번 재림으로 모든 인류가 선악간에 다 부활하고 그리고 모든 인류가 선악간에 다 심판을 받고 그리고 정화가 이루어지고 새롭게 되는 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신천신지가 도입된다. 그것이 전통적인 교회의 종말론적인 도식입니다. 그런데 천년기론에 의하면 전통적으로 천년기를 칼리아즘이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킬리아가 천이니까 킬리아 킬리아즘에서 처년기론이 나왔습니다. 킬리아즘은 소위 전통적인 역사적 천년기라. 주님의 재림이 천년기와 어떻게 연관이 있느냐에 따라서 무천년론, 역사적인 천년기, 후천년론, 세대론, 그런데 그 전에는 킬리아즘이라고 했는데 요새는 세대론이 성하고 부터는 밀레니아즘으로 용어가 바뀌었습니다. 밀레가 천 아닙니까? 전통적으로 킬레니아즘에 의하면 주님이 재림하신 이후에 천년에 지상에서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고 의와 평화와 번영의 때가 시작된다. 그와 같은 나라가 세워진다. 주님이 재림하시고 천년의 지복의 때가 시작된다. 천년재림 전에 일어나기 때문에 밀레니아즘, 프리 밀레니아리즘 천년기 전에 재림이 있다.
다음 후천년기론은 정확하게는 최근의 형태를 제외하고는 교회 천년기라 그럽니다. 말이 좀 생소한 모양인데 콘스탄틴 대제가 313년에 동로마제국 막센치우스를 쳐부수고 로마의 통일된 황제가, 유일한 통치자로 등극을 했습니다. 313년에! 그 때부터 핍박받던 교회가 공인됐습니다. 313년이 기독교 공인 해 아닙니까? 그리고 콘스탄틴이 서방에서 자기 아버지와 군대에 의해서 황제로 추대됐습니다. 선언됐습니다. 동방에 다스리는 황제가 막센치우스 입니다. 막센치우스가 너무 핍박을 많이 하니까 콘스탄탄에게 청원을 했어요. 이걸 좀 해방시켜 달라. 군대를 몰고 막센치우스를 펴부수러 왔습니다. 티벨강가에서 3번 싸웠는데 마지막 싸우기 직전에 콘스탄틴이 환상을 보았는데 주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네가 십자가의 기호로 대적을 쳐부수라”하는 환상을 보고 모든 칼과 방패에다 십자가 기호를 붙이고 막센치우스와 싸워서 쳐부수었습니다. 그리고 막센치우스를 티벨강에다 수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통일된 황제가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 때가 이제 핍박과 압제와 순교의 교회가 지하에 있던 교회가 드러나서 옛날에 이방종교가 왕노릇하던 자리에 교회가 올라섰습니다. 그 때부터 교회에 평화가 찾아오고 그리고 교회가 번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교회가 사람들을 칼의 권세로라도 다 교회에 들어오도록 했습니다. 그 말을 어거스틴도 강력하게 주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밖에 나가는 자들은 칼로 맞을 수 밖에 없는 거예요. 도나스티스트가 분립해서 나갈 때도 어거스틴이 그렇게 극력 반대하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칼의 권세를 동원해서라도 모두를 다 교회 안으로 들여야 된다. 그 때부터서 보통 13세기까지를 소위 교회의 천년기라 그럽니다. 이 기간에 교회가 평화를 누리고 복음이 널리 번창해 나갔기 때문에 이 때가 요한계시록이 말한 천년기 기간이라. 어거스틴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자기 말년에는 벌써 반달족에 의해서 히포성이 유린당하고 그러니까 무장을 하고 그들과 싸웠지요. 이 천년기간에도 교회가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하고 세속의 권세가 성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한가지 유익한 것은 이 험악한 때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선포됐다. 화란의 유명한 우빙크라는 신학자가 있는데 조그마한 책을 하나 썼어요. “기독교 세계와 정치”라. 거기에서 이 기간에 천년기라고 할 수 있지만 평화의 때라고 할 수 있지만 이 때 얼마나 어려움이 많은 시기였느냐 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그것보다 더 늘여서 1789년 불란서 혁명으로 교회가 완전히 배척당한 그 때까지가 천년기라 그렇게 주장을 하기도 해 왔습니다. 이 기간이 천년기라. 그래서 이 전통이 남아가지고 천년후기에 의하면 복음의 권세가 넓게 퍼지므로 그 복음이 모든 민족들 국가의 생활에 지배적이고 주도적인 세력에 대해서 복음의 도가 완전히 지배하게 되므로 악이 완전히 극도로 쇠퇴해져서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은 전 세계적으로 주의 재림전에 복음이 모든 민족들의 생활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므로 그 때에 의와 평화의 번영의 때가 천년간 있을 것이라 그렇게 주장을 합니다. 그것이 천년후기이지요. 그런데, 천년후기가 맞아들지 그것은 잘 모르겠어요. 지금 다시 중공이 복음을 전할 수 있을만큼 조금씩 문을 개방을 하고 그렇기는 하지마는 그냥 그것 때문에 우리 너무 성급하게 해서 이젠 다 복음이 완전히 다 열릴만큼 전달될 만큼 전달되고 그렇게 되면 중공과 소련이 완전히 복음이 전파되면 이제는 다 완전히 복음이 전파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불행하게도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의 인구가 해년마다 줍니다. 아프리카 지역은 거의가 기독교 세력에서 식민지된 나라여서 지금 매년 기독교 세력 영역들이 줄어들고 회교도 세력들이 늘어납니다. 중동지역도 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제 전통적인 기독교 세계 남미와 북미 구라파 이 지역들이 기독교가 많이 늘어나는 것 같아도 실질적으로는 늘어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명맥이 그래도 유지되고 있는데는 카나다와 미국 정도이고 구라파도 복음의 권세에서 거의 대부분이 이탈해 있다 해야 맞을 것입니다. 내가 암스텔담에서 영국에서 온 옥스포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암스텔담에 온 친구를 만났는데 자기도 영국 국교에 속한다고 그래요. 그런데 카톨릭과 개신교는 성한데 영국 국교는 되질 않는다 그래요.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래서 얼마전에 영국의 기독교 인구가 10% 이하로 떨어지니까 영국의 복음화...
구라파가 학문이 발달할 수 있도록 횃불을 옮겨준 곳이고 그리고 복음을 대륙으로 전달하는데 큰 몫을 한 영국인데 이 영국의 개신교 인구가 5백만 밖에 되지를 않습니다. 한국의 인구보다 적어요. 그것도 잘 믿는 크리스챤이라 할 수 있을런지 의문입니다. 독일도 마찬가지! 정말 개신교 복음주의로 설교하는 데를 제외하고는 황폐하기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낮예배는 그렇게 천 명씩 모이는 데가 저녁예배는 5백명이 모이면 많이 모이고 한 2,3천 명 형태로 떨어지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한국이 1세대를 한 삼십년 지나면 지금처럼 많이 모일까? 그 때는 분명히 복지정책이 많이 도입되어서 보편화 될터인데 잘먹고 잘사는데 뭐가 부족해서 하나님 부르짖으러 갑니까? 목사님들도 어렵고 개척교회 시작할 때는 열심히 기도하지만 교회가 어느정도 부흥해서 한 5백명 정도 되면 뭐 산기도 잘 가시던가요? 설교 지으러 가지요. 기도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설교 지으러 가요. 산에는 가지만 그전처럼 그냥 붙들고 울며 기도하기 보다는 설교 지으러 조용한 자리 찾아 가지요.
그런데, 천년후기론에 의하면 이제 이것이 진화론과 연결된 부분이 있습니다만은 복음이 주님 재림 전에 편만해져서 온 세계를 뒤덮게 될 것이다. 그때 그 기간이 한 천년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천년 천년 하지만은 전통적으로 천년이 일치된 것이 아닙니다. 보통 천년기가 4백년에서 7백년 혹은 보통 우리가 말하는 천년, 벵겔은 심지어 천년의 두 배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천년전기론의 이야기입니다만은! 자, 이렇게 갈수록 악이 성해지고 배도가 심해지는데 주님 재림 전에 천년기간에 복음이 온 세상을 뒤덮어서 이렇게 될 때 미국교회는 그렇게 될 줄 믿고 사회복음주의를 부르짖었습니다. 지금 미국의 모든 생활 영역이 다 복음화 되었는데 정치와 경제 영역만 복음화 되면 완전히 복음화 되어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윌터 라이센부시가 이 사회복음주의를 열심히 부르짖었습니다. 지금처럼 이렇게 세상이 어려워지고 복음의 도가 크게 퇴락한 상황에서 앞으로 천년기에 복음의 역사가 크게 지배하는 때가 올 것이라. 기대하기 어렵죠. 차라리 교회 종말론, 교회 천년기론, 중세를 지나서 13세기까지가 그런 때라 한다면 합당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천년기론에 가면은 역사적 천년기(세대론), 저도 말씀 드렸습니다만은 역사적 천년전기론하고 세대론하고 몇가지 차이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제외하고는 내 눈에 둘 간에 별로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여졌어요. 그런데 역사적 천년전기 하고 세대론은 미국에 가서 미국판 천년기론이라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맞습니다.그것이 이제 달비에 의해서 미국에 심기워지고 그 다음에 불랙스톤, 또 그전에 브룩스, 또 불랙스톤, 그 다음에 게벨라인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게벨라인, 그 다음에 스페리취퍼, 이런 사람들이 천년기론의 세대론의 대표적인 학자이고 그것을 널리 보편화 하는데 크게 공헌한 것은 스코필드의 관주성경, 그 책이 미국으로 하여금 천년기론에 있어서 세대론이 되게한 근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천년기는 한가지 면에 뚜렷한 차이를 낸다면 세대론하고, 한 두가지 역사적 천년기론은 세대론과의 뚜렷한 차이는 7세대로 나누는 것을 하지 않는 면에서 역사적 천년기론하고 다르고 그 다음에 7년 환난을 세대론은 교회가 통과하지 않고 7년 환난 되기 전에 주님이 오셔서 휴거해서 하늘로 가고 교회가 지상에 없을 때 7년 환난이 이 땅에 임한다. 그런데 비해서 역사적 천년기는 교회가 환난기를 통과한 후에 주님이 오신다. 거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별로 차이가 내가 보기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다윗 왕국을 세우십니다. 메시야 왕국을 세우십니다. 그런데 이 다윗 왕국, 메시야 왕국은 예수님 초림 때 세울려고 하셨는데 이들이 메시야의 왕국에 이 호의의 제공을 거부하므로 할 수 없이 그 때에 메시야 왕국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재림 때로 연기했다가 재림 때 오셔서 이스라엘이 세계의 왕노릇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종속적인 위치에 놓이는 그와 같은 다윗 왕국을 세운다. 그런데 또 한가지 문제점은 세대론에 의하면은 교회는 휴거되어서 영원히 천국에 있고 지상에는 영원히 이스라엘이 다스려요. 이것도 문제지요. 그러니까 초림 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어린양의 제물로 오신 것이 아니고 메시야 왕국을 세우시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약속은 메시야의 왕국을 세워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메시야 왕국을 백성들이 배척하므로 메시야 왕국을 세울 수 없고 재림 때로 연기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구원의 섭리를 이 목적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해방해서 왕되게 하는 세상적인 지상적인 왕국의 설립을 위해서 메시야가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때까지 모든 인류역사에 역사하신 것이 그리고 이스라엘을 불러가지고 민족을 삼으시고 이렇게 인도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세상적인 권세와 영화를 누리고 다스리게 하실려는 것이 아니라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알게 하게 하고 그 백성에게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메시야가 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했는데 이 백성을 두었는데 세대론이 천년기론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메시야 왕국의 설립을 위해서 처음에 오시니 것입니다. 그러니 천년기론 특별히 세대론이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그 근본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배척하는 것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메시야 왕국을 세우는데 첫째로 지금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어요. 아직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언제 세워지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세우십니다. 지금 현상에는 역사적인 천년전기하고 세대론이 공통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이 세상에서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복음은 왜 선포하느냐? 복음의 선포는 그들로 하여금 다 구원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려는 목적 보다는 복음을 증거하므로, 복음 때문에 그들이 심판받게 하는 구실을 준다. 그리고 이 복음을 통해서 이미 택한 자들을 불러 들여요. 그것이지 목음 자체가 이들을 구원해 내는 역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년기론에 의하면 대대적인 인류의 구원과 회심은 천년기 때 이루어진다. 천년기 때! 그것도 하나님의 경륜에 배척되는 것이 바울이 로마서 1:16,17절에서 말하기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이 복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인데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에 권세인데 복음이 유대인과 첫째는 유대이이고 헬라인에게 유대인과 이방인 전체 믿는 자에게 여기에 보면 판티(παντι)를 썼어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이라. 그런데 복음 선포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은 민족들에게 심판에 이르게 하는 증거로 제시되어 저도 어렸을 적에 이런 것들만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저 시골에서 장로님이 목회하는 교회에 가서 하루 저녁 하라고 해서 수요일날 설교를 했어요. 들어온 것이 심판 뿐이지 않습니까? 예수 믿으라는 것은 잘 몰라요. 그래서 열심히 심판만 선전을 했습니다. 심판, 심판... 그러니까 젊은 청년들이 듣다가 획 나가버려요. 그리고 점점 더 갈수록 세상이 완악해지고 악이 성하고 배도가 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불신앙이 성해져서 배도가 심해져요. 배도가 심해지고 그럴 때에 그리스도께서 오십니다. 오셔서 어떻게 하시느냐? 메시야 왕국을 세워요. 초림 때 약속하신 메시야 왕국을 세워요. 그 때에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고 유대인들이 특별한 지위를 갖고 모든 민족들을 이스라엘을 섬기는 종주국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섬기는 자리로 되돌아갑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특별한 지위에 있게 되고 여기에도 견해가 두 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직접 다스리는 경우가 있고 메시야 왕국만 세워놓고 다시 하늘로 가셔요.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그 때에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고 세웠을 때에 구약의 제사와 절기와 법도들이 다시 회복되어요. 그래서 희생의 제사를 다시 드립니다. 이것은 세대론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천년전기도 마찬가지로 주장해요. 그런데, 유대인 제사장들이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기독교의 정신으로 제사가 집행된다. 이것도 근본적으로 끝에는 수정을 해서 좋은 것 같아도 이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허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한 유일한 희생의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로 정하셨어요. 구약의 제사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이 완전한 제사 이 희생을 가르치기 위한 몽학선생 역할을 한 것이예요. 율법만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윤리적인 율법만 아니라 의식법도 다 백성들의 눈을 들어서 십자가에 달려서 완전하게 희생을 이룬 이 희생을 가르치기 위한 훈련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가 구약의 제사들을 그림자라고 하고 그리스도의 제사를 실체라고 했어요. 실체가 와서 완전히 구원이 성취되었는데 그림자로 다시 복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경륜이 바르지 못하다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마련한 유일한 구원의 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인데 이 구원으로 인해서 이 십자가 희생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이 훼파하셨는데 다시 피제사로 복귀해요. 피제사를! 구약의 모든 절기와 제사들을 이것을 다시 다 복귀해요. 그래서 제사를 드려요. 그렇게 되면 세계에서 제일 좋은 양들과 소들을 골라서 예루살렘으로 로켓트에 실어서 보내게 될 것이고 제일 좋은 건포도와 건무화과들을 그리고 또 한국에서도 나는 농약에 의해서 기르지 않은 좋은 소, 한국 소 맛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예루살렘에 가서 잡으면 예루살렘에 힌놈의 골짜기와 같은 더러운 것이 생길 것이니까 여기서 다 잡아가지고 등심 부분, 안심 부분을 로케트에 실어서 즉각 쏘아 올려서 예루살렘에 보내게 될 것이고 그리고 고기 많이 먹으면 입가심도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커피 많이 마시는데 그 커피도 좋지만은 그 수박, 수박 얼마나 좋습니까? 세계 나라의 모든 수박이 많지만은 즉 서리 내릴 때 난다는 무등산 수박 얼마나 좋아요. 다 썰어버리고 속만 해가지고 잘 포장을 해서 로케트에 실어서 예루살렘으로 쏘아 보내면 거기서 내려가지고 다 분배를 해서 우리는 가면 그 맛있는 양고기와 쇠고기 잘 익힌 것, 그리고 건포도, 건무화과, 수박 한점씩 받아 먹게 되고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세대론만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천년전기도 이와 같은 주장을 해요.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고 나라가 세워졌을 때 치제사가 다시 복귀해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 의하면 그 수상이 누가 됩니까? 국무총리! 바울 사도가 수상이 돼요. 수상까지 다 정해져 있어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장관이 되고! 오늘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천년전기를 마치기를 바랍니다.
제 8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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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강
(살전 4:13-5:2)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 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지난 시간에 천년전기 중에서 세대론과 역사적 천년전기와 공통점을 이야기 하다가 다 못하고 중단을 했습니다. 이제 제일 주의 재림을 열심히 기다리는 분들이 소위 천년전기의 종말론을 취한 분들이고 또 그중에도 특히 미국의 천년전기인 세대론을 주창하는 분들이 가장 열심히 주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년기론에 대해 비판을 하기 전에 우선 천년기 내용을 이야기 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시 반복하면 천년전기론에 의하면 전에는 후천년설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천년기론으로 역사적인 천년기론을 지시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후천년설이 또 있기 때문에 천년전기란 말이 확실하게 지목이 되었습니다. 천년전기는 혹은 역사적 천년기 혹은 그냥 천년기론은 이론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는 초대교회 특히 2세기 때 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일 처음에 제일 유명한 2세기 중엽의 변증가인 저스틴, 저스틴이 천년기 비슷한 이야기를 주장을 했고 또, 파피아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대표적인 가장 발달된 체계로 천년기를 주창한 사람은 2세기의 신학자인 이레니우스 였습니다. 이레니우스 였고 그 후에 터툴리안도 천년기를 주장한 사람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에 천년기를 주장한 사람의 수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초기부터 주장되었기 때문에 역사적 천년기론자들은 천년기가 가장 오래된 교회의 종말론이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이 때는 아직 정식으로 기독교의 교리가 확정되지 못할 때입니다. 그리고 온갖 이론이 참으로 많았을 때죠. 아직 교회가 천년기에 관해서 까지 분명하고 확실하게 그 내용들을 숙고해서 신조형식으로 믿음의 고백으로 믿음의 조목으로 결정할 만큼은 아직 못됐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천년기를 가장 비판하기 시작한 사람이 3세기의 오리게네스였고 그리고 천년기론을 교회에서 완전히 추방한 사람이 4세기 중엽서부터 5세기 초엽까지 살았던 소위 아우구스티누스, 교부중에 교부라고 할 아우구스티누스 였습니다.
너무나 강력하게 천년기론을 주창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이 천년기가 완전히 사라졌고 단지 소수의 보수파들에게 가령 도나티스트라든지 몬타누스주의파, 몬타누스주의자 오래 못갔지만 이런 파들에게 두 파들에게 조금씩 남아 있었고 16세기에 들어와서 재세례파에 의해서 이 천년기가 다시 수납되기 시작했습니다마는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이 아 이것들을 이단으로 배척을 했습니다. 그런데 19세기 소위 달비에 의해서 이 이론이 체계화 되기 시작한 후로 전세계의 복음주의 교회에 세대론이 아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서 이것이 가장 성경적인 바른 견해인 것처럼 인식되어 왔고 한국교회도 백년동안 세대론적 천년종말도식에 의해서 지배되어 왔기 때문에 이것 아니면 다른 것들은 이단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히도 공교히가 종말론에 관해서 도식을 신앙고백 신경으로 결정할 때에 다 전통적인 주의 재림, 한번의 재림, 한번의 부활, 한번의 보편심판, 그리고 정화로 신천신지가 이루어지며 이 종말도식이 교회의 표준적인 종말도식으로 정식 수납 채택되었고 종교개혁 때도 이 종말도식이 교회의 가장 바른 신앙으로 수납되고 채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20세기에 들어와서 그렇게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성경에 드러나있는 여러가지 계시록에 있는 비슷한 내용들이 우리 사회에 진행되고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에 천년전기 특히 세대론이 성하게 되었습니다.
달비가 이 천년전기를 세우고 또 어빙파도 세우고 그리고 또 재림제칠일안식교도 이것을 열렬히 받아들여서 특히 그 교단의 교파에서 여선지자라고 할 실질적인 창시자 엘렌 G 화이트 여사가 아주 이 이론을 강력하게 주창을 해서 안식교회 퍼짐과 함께 세대론의 퍼짐도 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달비 이후에 가장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블랙스톤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블랙스톤 그전엔 브룩스 또 지금도 생존해 있는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성서사전의 편집자로 있는 게벨라인 있지만 또 스페리체이프 또 우리나라에 설교논문으로 소개했는데 윌우드 또 ( )신학교 교장으로 메킨타이어, 미국에서도 소위 ( )신학교 메킨타이어가 지금 교장인데 메킨타이어가 그 교단 긜고 달라스 신학교와 그 계통 또 많은 침례교회들이 다 세대론을 주창하고 가장 바른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계속해서 아, 그리고 최근에 제일 영향력있게 전세계적으로 세대론을 많이 번창시킨 사람은 홀린세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사람이 특히 예루살렘의 정복 이후에 더욱 크세 이 세대론적인 도식을 널리널리 주창하고 퍼치게 됐습니다. 그래서 구라파만 아니라 동아시아, 구라파의 복음주의 교인들에게도 상당히 홀린세이의 세대론이 널리 퍼져 있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천년전기와 현대 천년기론인 세대론, 역사적인 천년전기는 아마 대변인이 이레니우스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천년기론에 의하면 세대론이든지 역사적인 천년전기든 간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있지 아니하고 주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때까지 현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는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무엇이냐면 왕 없이 나라는 성립하지 않는다. No Kingdom without king. 지금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을 왕으로 다스리지 않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있다고 하는 것은 불가하다. 그러니까 현 역사 진행상 왕 없이 하나님 나라는 성립하지도 않고 진행되지 않는다. 언제 그러냐? 주님 오셔서 메시야 왕국을 세울 때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다. 그러면 복음은 뭣하는거냐? 복음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하는 믿게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전파될 그와 같은 역사로 전파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 28장 마지막에도 증거하라는 말씀이 있듯이 증거하라 그래서 모든 민족들에게 이와 같은 복음의 도가 있는 것을 증거하는 증거의 수단이 이제 꼭 모든 사람들을 다 예수 믿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 백성이 되게하는 그와 같은 목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의 선포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복음선포라 그러면 증거만 되고 예수 믿게 하는 일은 없느냐? 택한 백성들을 모아들이는 역할은 한다. 대부분의 천년기론자들 세대론자들의 설교에는 그러니까 이 복음의 도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 때 이것이 심판의 구실을 하는 정죄꺼리로만 항상 선포되는 일을 해요.
그 다음, 복음이 실질적으로 증거놀음만 하기 때문에 사람의 일부 택한 백성만 모아 들이는 일을 하지요. 그러나 실질적으로 대부분의 이방인들이 구원에 이르는 것은 주님이 오셔서 천년기간 천년왕국을 세우실 때 이방인들이 대거 하나님 나라에 편입할 것이니까 지금 꼭 구태여 선교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는거죠. 그러니 이 복음의 도가 가서 개인만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도 변화시키고 애쓸 필요가 없는거죠. 지금 우리 한국사회도 예수 믿는 교회는 많이 늘어나도 이 사회를 바꾸는 일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 별 필요가 없는거죠. 우리야 천국갈 사람들이니, 교회안에 방주 안에만 들어오면 되고, 또 밖에야 무슨 짓을 하든지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래서 교회가 수천명씩, 수만명씩 늘어나는 교회가 많아도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에 의해서 그가 사는 사회가 복음의 권세에 변화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다 이 세대론적인 사고방식이 우리 한국교회에 아직도 많이 배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복음의 도가 전파는 되고 증거의 목적으로 전파는 되고 또 그 증거를 통해서 택하신 백성이라고 하더라도 이방인 전체를 변화시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은 없기 때문에 갈수록 세상이 악해진다. 그건 인정하고 그리고 그 면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교회의 종말도식인 무천년론과 마찬가지죠. 악이 점점 무성해진다. 주님 재림전에! 그런데 이 악이 극단화 되어서 환란이 임한다. 적그리스도의 출현으로! 그것에 대해서 역사적 천년전기하고 세대론하고 구분됩니다. 거기까지만 하구요, 그 다음에 악이 점점 배도의 때가 온다고 합니다. 마침내 악이 점점 성해지고 그래서 마침내 전반적인 보편적인 배고가 이루어질 것이라. 그것은 전통적인 교회의 종말도식에 의해서도 이 일이 바른 것으로 인정이 되고 고백되어 왔습니다. 점점 더 역사의 악이 심해질수록 심해지기 때문에 저 악이 성해지고 또 우리가 계산불능으로 항상 더 심한 악들이 진행되는거죠. 또 항상 정치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마성이 들어있어요. 마성! 사탄적인 세력이 들어 있다고요. 권세는! 그러니까 이 권세 가진 자들이 못하는게 없는거죠. 그리고 현대에 와서 갈수록 민주화 되니까 권력들이 더 약화될 것 같아도 민주화는 되면서도 권력은 더 강해지고 어느 나라든지 강력해졌습니다. 그래 레이건이 8년간 집권하면서 루즈벨트, 프랭크 루즈밸트 이전에 연방정부 형태로 가능한 축소시켜서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 할려고 하는 그와 같은 시도로 그가 정권을 잡고 일을 했지마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권력이 선과 악을 결정하고 또 진실과 허위도 결정하는 때가 됐기 때문에 이 악이 권력을 잡고 못할게 없습니다. 그러니 요새 전두환씨 국회 와서 청문회 증언하다고 그러니까 전두환씨가! 그러고 보니 지금도 전두환씨가 머리가 좋은 것 같애요. 그렇게 어려움 당하고 있으면서도 6.29선언 네가 했다고 네가 왕노릇하고 날 골탕먹일려고 그러는데 그건 내가 하지 않았느냐? 그러고도 네가 대통령 된 것 다 내가 정치자금 얻어가지고 해서 했지 뭐 네가 했느냐? 한번 해봐라. 신문에 퍼트리니까 전대통령 전전대통령, 국회 청문회에 나가지 않도록 지시를 내리지 않았어요? 지금 조용하게 별일 없이 진행된 것 같아도 권력을 잡으면 못할 것이 없어집니다. 지지세력이 없어지기 때문에! 좀 곁길로 갔습니다만 이 정치권력에 의한 악의 진행! 이건 보통사람은 생각하지도 못할 수준으로 항상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음에 악이 이렇게 배도가 심해질 때에 주님이 오신다. 그런데 언제 오시느냐? 오시는 것은 항상 임박해 있기 때문에 주님이 오시기 직전에 어떤 징조들이 진행되고서 주님이 오신다고 하는 그와 같은 징조를 전혀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문밖에 서 계셔서 문을 열고 들어오실 수 있도록 그와 같은 상태로 있기 때문에 주님 재림전에 이와 같은 사건들로 인해서 이미 재림이 가까이 왔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일이 못된다. 언제든지 주님의 재림이 임박해 있다. 그 다음에 그렇게 말할 수 있고... 그것을 그것은 주님이 오시되 공중에 오시고 공중까지만 오시고, 또 비밀리에 오시기 때문에 주님이 오신걸 아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성도들과 그리고 이미 죽은 성도들 뿐이라. 그래서 주님이 공중에 재림하실 때에 공중재림 그때에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고 살아있는 성도들이 변화되서 하늘로 올라가서 주님을 공중에서 만나뵙는다. 그것이 휴거입니다. 이때 오심을, 오심은 비밀리에 오심이어서 여기 파루시아를 붙여요. 천년기론에 의하면 주님이 공중에 오심이 파루시아다. 파루시아란 말은 웃시아, 계심, 파라 옆에,파루시아란 마른 성경에 재림이라 쓰여지지 않고 파루시아로 되어 있는데 이 본래 파루시아의 뜻이 오셔서 함께 계심을 말해요. 본래 파루시아의 뜻은 하나님의 도래에 파루시아를 썼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써 하나님으로 이렇게 단번에 오실 때 파루시아로 씁니다. 비밀리에 오시죠. 휴거라! 그때에 살아있는 성도들이 변화해서 부활한 성도들과 함께 주님을 맞으러 하늘로 올라가는데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그걸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어디로 갔는지 몰라서 찾고 다니는거죠. 남편은 아내를 찾고 다니고 아들들은 어머니를 찾고 다니고 찾고 다니는 일이 많아요.
다음 공중휴거가 끝나면 세대론에 가면 7년동안 혼인잔치가 있죠. 저도 어려서 주일학교 다닐 적에 이 세대론의 종말도식을 노래로 해가지고 열심히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언제 이 노래를 그치게 되냐면 특히 이성봉 목사님이 전국으로 다니며 부흥회를 하시고 말라빠진 교리만 붙들고 있고 예수 생명 없다고 하는 노래를 열심히 불렀다고요. 그런데 조동진 목사님의 부친되시는 조현성 장로님이 옛날에 김구 선생과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이제 장로가 되신 후에 전도사가 되어가지고 열심히 시골로 다니시며 전도를 하셨는데 저희 모교회에도 오셔서 전도사님으로 일을 하셨어요. 그때 들어보니까 성결교 노래 말라빠진 교리만 붙들고 예수님 없는 노래 부르니까 주일학교 다닐 때 당장 돌아다니며 이 노래 부르면 안된다. 부르지 마라. 딱 엄명을 내리시니까 그때부터 저희들은 안부르게 됐고 그전에는 하여튼 7년환란이 오기전에 나는 간다라든지 그런 노래를 열심히 배웠습니다.
이제 휴거후에 주님이 땅에 재림하셨을 때가 진짜 재림인데 그때 7년환란이 닥치는데 환란전이나 환란기간에 유대인들이 본토로 돌아옵니다. 이 천년기론에 의하면 환란전이나 환란기간에 모든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다음에 그후에 재림, 여기에 휴거 때 첫번 휴거 있지요. 주님 이 땅에 내려 오실 때 그 때에 내려오시게 되면 불신자나 신자나 모든 사람들이 주님이 오신 것을 알게 됩니다. 알게 되고 그때에 주님 재림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의 메시야를 보고 전체적으로 회심을 해서 주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주님이 오실 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시작부터 특히 바벨론 포로 이후서 부터서 수백년동안 그렇게도 간절히 그 메시야가 그 영광과 권세를 가지고 오시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보고 자기들의 메시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에 민족적 회심기,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심이 있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때 환란기간에 살해된 성도들이 부활하게 됩니다. 그 때는 주로 부활에 이를 자들은 불신 이방인들 중에서 뽑아온 자들이 아니고 이스라엘 유대 백성들 중에서 이 환란 기간동안에 죽은 자들이 부활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은 재림과 동시에 또 적그리스도가 그의 세력을 아마겟돈 전쟁에서 쳐부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건국자들 특히 벤구리온 같은 사람도 아마겟돈 전쟁이 글자 그대로 이스라엘 땅에서 일어날 수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이만만이라고 돼있잖아요? 이만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올 수 있는 나라는 어디냐? 11억이 되는 중공일 것이다. 오늘 그렇게 얘기하죠. 2억의 군대를 몰고와서 아마겟돈에서 전쟁을 한다. 이 아마겟돈이 어딥니까? 그러니까 소위 요시아왕이 애굽의 느보가 바벨론을 치기 위해서 갈그미스로 올라왔을 때 요시아가 와서 막았다. 그 자리가 아마겟돈 입니다. 그 땅에 2억이 모여서 전쟁을 한다. 밴구리온과 초대 이스라엘의 건국자들도 합당하지 못할 걸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적그리스도를 아마겟돈 전쟁에서 그리스도가 그의 대적을 쳐부순다. 주의 재림 때! 그리고 메시야 왕국을 이때 설립을 합니다.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고 그리고 여기서 추상적이고 가시적인 메시야 왕국을 세워서 전세계를 통치하게 됩니다. 그때에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내각에 들어가게 되고 그리고 바울사도가 일부 세대론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반대하는 사람도 있지만 바울사도가 국무총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메시야 왕국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특별한 위치를 갖고 특권적인 자리에 처하며 이방족속들은 종속된 위치에 처하게 될 것이라. 물론 이전에도 심판이 있습니다. 제일 처음에 휴거 때! 성도들에게 심판이 행해지는데 이때는 이미 심판이 아니라 영생의 상급에 이를 자들이므로 이들은 상급을 받죠. 휴거 때! 그리고 재림하시므로 적그리스도를 멸할 뿐만 아니라 이방족속들을 심판하는 일이 있게 됩니다. 메시야 왕국을 세우면 전체적으로 전세계적으로 의와 평화와 번영의 때가 전세계적으로 진행됩니다. 완전히 악이 제거된 건 아니지만 그러나 의가 지배를 하고 죄와 죽음이 역사해도 전세계적으로 생명이 지배를 해서 백살에 죽은 사람은 어린 아이로 죽는 것 같은 일이 진행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제사제도와 경절들과 절기들 이러한 것들이 다시 회복됩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다시 세워져서 거기서 양과 소로 드리는 피제사가 복귀됩니다. 제단에는 예루살렘 멸망으로 중단됐던 제사가 다시 복귀되서 피제사가 있게 되고 이때 다시 이 피제사는 단지 옛날의 제사만 지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제사로 속죄가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피제사가 복귀된다. 왜냐하면 이 나라는 유대인을 위한 이스라엘 나라죠. 메시야 왕국이기 때문에 옛날 다윗 왕 때 진행됐던 그와 같은 나라가 회복된 것입니다. 이때 오실 메시야는 다시 살아온 메시야라. 다윗이 다시 다스리는거죠. 다윗의 왕권이 정식으로 시작돼서 천년간 진행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와 같이 저주가 자연에서 제거되니까 말할 수 없이 풍성한 생산을 넘치게 해서 풍요가 넘치게 되어 굶주림과 고통이 다 없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짐승들도 하나님의 저주로 인해서 그 악한 성질이 생겼기 때문에 짐승의 악한 성질들이 맹수들에서 탈취됩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의 예언대로 어린아이가 독사 구멍에...
오늘 세대론의 도식을 다 비판한 것을 다음에 다 마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천년기가 특히 세대론이 기독교에, 기독교 신학의 산물이라기 보다는 유대주의, 다 비판할 때 다 이 면을 말씀드리려 합니다마는 유대주의가 교회에 들어온 것이지 기독교 신학에 성경에 관한 귀결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메시야가 오신 것이 전세계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정치적인 메시야를 정치적인 메시야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경륜에 있어서 마련하신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세계를 구원하심이고 그리고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이스라엘 한 민족으로 존속하게 하심은 바로 이 구원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출생하게 하는 준비로 그 모태로 태반으로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그 존재의 목적이 있게 하신 것이지 세상적인 영화를 보는 그 나라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산헤드린 공회로 부터 심문받아서 배척받은 근본이유도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이 성립할려면 이 유대교의 산고방식이 그들의 신학에 의하면 메시야가 오시면 메시야 왕국이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강력한 철권정치아래 놓여있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을 가져와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메시야 주장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헤드린 공회에 보면 예수가 죽은 죄목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던 참람죄 때문에 죽은 걸로 돼있는데 근본적으로는 그것이 죄목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내가 그 예수 일대기 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다 보셨겠죠. 왕중 왕 그 영화는 아니고 내가 고난주간에 본 그 영화에 의하면 산헤드린 공회의가 예수를 심문할 때에 성전을 헐고 다시 짓는다고 하는 죄목 갖고도 성립하지 않으니까 마침내 대제사장이 일어났다. 그때 안소니 퀸이 대제사장 역할을 했습니다. 안소니 퀸이 묻기를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 찬송받을 자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니까 ‘내가 그라’ 그러니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제사장의 옷을 찢으면서 참람하도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살려줄 수 없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것이 죄목입니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죄목이지만 그 말 했다고 예수가 죽은게 아닙니다. 그 말 했어도 그 말과 함께 이스라엘을 독립시켜서 메시야 왕국만 선포했으면 죽지 않습니다. 메시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에 해방이 없는 것을 유대교에서는 성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 메시야가 오면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메시야이든지 그냥 다윗의 후손으로써 메시야이든지 메시야가 오면은 이스라엘이 그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서 메시야 왕국을 세우고 전세계를 지배하는 그와 같은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있어서 로마나 유대나라나 동일하게 추구하는 것은 정책이 목표였습니다. 정치적인 메시야 왕국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 이 속죄를 선포하고 가르쳤기 때문에 배척받고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될 것은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출생하기 위한 모태로써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소명되고 조성됐고 유지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출생해서 메시야 사역을 다 이루고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는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물론 정치적인 단위는 아니었지만 민족적 단위로 존속할 이유가 더이상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디도 장군의 손을 통해서 예루살렘성을 다 헐고 그 이후에 또 135년 바 코크바 전쟁 때 바 코크바가 메시야로 추대됐습니다. 그때 한낱 랍비로 그 마지막 봉기를 한게 아니예요. 메시야로 추대돼 가지고 로마에 대해서 항쟁을 한 것입니다. 그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에서 전부 다 쓸어내 버리게 하셨습니다. 특히 더이상 민족적 단위로도 존속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구원 경륜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조성하시고 유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에게서 메시야가 나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피흘려 모든 세상을 구속하시게 됐기 때문에 더이상 이스라엘이 존속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배척받아 죽으시게 되기 때문에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그렇다고 그냥 가실 수 없기 때문에 교회라고 하는 간주곡을 따로 세우셨습니다. 세대론에 이하면! 교회라고 하는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도 알지 못하는 그런 실체였습니다. 구약에 교회라는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생애 대부분도 대부분까지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까지가 율법시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까지가 율법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혀서 교회가 세워지기 이후부터가 은혜시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약성경의 대부분은 이건 하나님 나라의 메시야 왕국이 해당되는 책부분이고 실질적으로 복음서 중에서 일부분만이 교회에 타당합니다. 그런데 교회라고 하는 것은 구약의 성도들과 선지자들이 전혀 알지 못하던 것과 같은 간주곡입니다. 그냥 가실 수 없으니까 교회라고 하는 것을 대신 세워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목표하신 것이 아니라 교회를 목표하셨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이르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 그것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목표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시대는 완전히 율법으로만 구원에 이르고 은혜시대만이 은혜의 복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나오는 산상수훈의 그 법도들도 지금 신약의 교회에 타당한 것이 아니라 메시야 왕국 때에 타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기간은 은혜의 기간이기 때문에 이 기간에만 완전히 은혜의 도로 구원에 이르고 율법은 성도들의 신자들의 생활규범으로 아무런 자리를 갖지 않습니다. 우리가 결코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구원에 이르지만 율법은 구원얻은 백성의 생활규범인 세대론에 의하면 전적으로 율법은 구원얻은 백성의 생활규범인 세대론에 의하면 전적으로 율법은 지금 신약, 은혜의 시대에는 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승천하셨죠. 이 교회기간에는 하나님의 그 소위 다니엘서에 나오는 70주가 중단됩니다. 계산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메시야가 지상에 없기 때문에 승천 때 부터서 재림 휴거하는 비밀리에 오시는 그때까지 그 기간이 70주 계산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휴거 때 부터 다시 70주가 시작돼요. 그 기간에는 메시야가 안계시니까 시간계산이 안된다.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뉴욕에서 콜로라도 덴보까지 가는데 오새 그 한동안 달라스가 성할 때는 텍사스가 유명했는데 지금은 다이제스트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다이제스트에 나옵니까? AFKN에! 다이제스트에는 콜로라도 덴보가 주 활동무대 아닙니까? 뉴욕에서 덴보까지 가는데 길이가 얼마냐? 70마일이라. 70마일을 다가도 덴보가 안나온다 말입니다. 그래서 어찌된 것이냐? 그런게 아니고 앞으로 2,000마일을 더 가야 되는데 70마일은 덴보에서 ( )산에서 70마일을 말하는 것이고 그 선에는 2,000마일이 더 들어있다. 그런식으로 설명을 할 수 있다. 이 계산이 다니엘서에 나오는 70주가 주님이 승천해 가시고 난 후에는 메시야가 계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연대계산이 시간의 달력에 70주가 중단해요. 그러다가 하늘 휴거 때 그때 다시 70주가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야기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대론에 의하면 전세계를 구원하시기 위한 구세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메시야 왕국을 세워주기 위해서 왔다. 그때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정치적인 메시야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어린양으로 오셨고 속죄의 죽음을 말하고 은혜로 구원얻음을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기대에 배치된다. 그러니까 그를 죽도록 하죠.
율법에 의해서만 이스라엘의 세력이 영위될 때만 그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지배하는 그 체계가 유지될 수 있는데 은혜의 복음으로 백성을 자기에게로 돌이키면 자기들이 설 자리가 없다. 그러니까 아나니아가 가야바의 장인, 한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모든 백성이 망하는 것보다 낫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속경륜에 배치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간주곡이라 삽화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은이스라엘과 이방인을 함께 포함한 이 보편한 인류 새인류를 목표하셨지 이스라엘만 목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에는 이스라엘이 특권층으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도 이방인과 꼭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러 갈 자들이지 별다른 특권층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미오시는데 몰래 오셔요. 몰래오시기 때문에 아는 자들이 신자들, 살아있는 신자들하고, 공중에 오시면은 비밀리에 오시기 때문에 아무도 알 자들이 없어요. 그래서 신자들이 부활하고 살아있는 신도들이 변형돼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때부터 어린양과 신부와의 혼인잔치가 시작됩니다. 이 시간이 7년기간입니다. 이건 공중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때에 대환란이 시작됩니다. 왜 환란이 시작되느냐? 세대론자의 설명에 의하면 로케트를 운전하던 운전사도 주님 맞으러 공중으로 가버리고, 비행기를 내버리고, 운전하던 운전사도 운전하다가는 변화되어 하늘로 가버리고, 지하철 운전사도 운전하다 말고 다 공중으로 가니까 그냥 북경에서 이루어지는 혼란 정도가 아니고 대회적인 혼란이 진행되는거죠. 그래서 그냥 비행기가 떨어지고 로케트가 떨어지고 그러니까 세상이 뒤죽박죽 시작하는게 그때 이때부터 환란이 시작되는데 이 환란전에 혹은 환란기간동안에 이스라엘이 전세계에서 자기의 본토로 돌아오는데 이때에 적그리스도와 이스라엘이 연합을 맺습니다. 그래가지고 잘 지내다가 그것이 3년 반입니다. 지나다가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미혹하게 됨으로 대환란이 시작됩니다. 그때 많은 유대인들이 환란을 당해서 환란 때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이 환란기간에 이것도 왔다갔다 말이 많은데 이 환란기간에 유대인들이 144,000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왕국복음을 선포합니다. 빠졌는데 이때 교회가 하늘로 휴거하면 성령도, 교회안에 계신 성령이 교회와 함께 하늘로 가시기 때문에 지상에는 성령이 완전히 철수해 버립니다. 그런데 144,000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왕국복음을 선포해요. 그런데 이 왕국복음을 받아들인다. 성령이 계시지 않아도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의 왕국복음을 듣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온다.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성령의 역사 없이도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지...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내신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구원의 길은 십자가의 길인데 이 십자가와 상관없는 하나님 나라의 왕국복음을 선포해요. 메시야 왕국! 그래 두 복음이 있다고요. 십자가의 피의 복음, 은혜의 복음하고 그리고 왕국복음 두 복음이 있어요. 여기도 어쨌든 문제가 있는 것이 이제 이것도 의견이 나뉘는데 교회는 하늘로 가서 영구히 하늘에 있고 이스라엘은 영원히 지상에 산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완전히 둘이 별개의 두 백성으로 남아요. 이 7년 환란후에 대대적인 살해와 어려움이 많이 생기게 됩니다. 7년 환란후에 주님이 지상으로 내려 오시는데 그 중에는 계시라. 왜? 주님이 오심을 다 알게 되기 때문이죠. 이 7년 기간동안에 두 여인이 맷돌을 갈다가 한여인은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림을 당하고 두 사람이 밭에서 일하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림을 당하고 그러니까 참 생각해보면 구구절절 맞는데가 많아요. 안그렇습니까? 그러니 휴거 후에 교회가 소집되었습니다. 경건한 교회는 대다수의 성도들이 안보이는데 일부만 있다. 경건하지 못한 교회는 몇몇 사람들만 자리가 비고 대부분 그대로 모여 있어요. 목사님도 나아가서 그 사람들을 찾습니다. 사방으로 찾으러 다녀요. 아버지도 가서 자기 아내를 찾으러 다녀요. 아이들도 어머니를 찾으러 다닙니다. 누나를 찾으러 다닙니다. 오빠를 찾으로 다닙니다. 그래도 만나지를 못하는거죠. 그래 대소동이 나는거죠. 그러다 얼마만큼 지나서는 다시 채워져요. 그 자리가 다시 도로 채워지고 없는대로 살까? 잘한 사람은 혹시 그 기간에 재혼할 수도 있지마는 그대로 또 사는거죠. 그리고 오실 때에 천사들과 함께 오시고 그리고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오시고 천사장의 나팔로 오시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때 오신 메시야를 바라보고 자기들의 메시야로 받아들입니다. 메시야를 보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구원의 길로 복음을 선포하셨는데 이 십자가의 복음으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이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는데 메시야가 오신 것을 보고 그 영광에 의해 압도돼서 이스라엘이 대대적으로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구원하는 구원의 방법은 꼭 십자가의 피의 복음만이 아니죠. 세대론은 7세대 나누고 8번 언약으로 해가지고 언약으로 해서 나누기 때문에 그 세대마다 다 구원얻는 길이 다른데 굳이 예수믿어야 구원얻는게 아지요. 그러니까 예수의 영광을 바라보고 유대인들이 대대적으로 개종을 한다고 하는 것은 복음의 길로가 아니고 물리적인 세력에 의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맞는 발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땅에 오실 때 그때에 7년 환란에 환란 때 적그리스도와 그의 세력들에 의해서 살해받은 유대인 성도들이 부활합니다. 두번째 부활이죠. 주님이 내려오시면서 적그리스도와 그의 세력들을 아마겟돈 전쟁에서 다 쳐부숩니다. 전쟁을 통해서! 그런데 이것도 내 눈에는 이게 안맞는 것이 주님이 신적인 권세로 직접 그의 신적인 권세로 창조주로 심판주로 오시는데 육을 가진 군대와 주님이 세상적인 전쟁을 해가지고 싸워 이긴다. 전혀 안맞는 얘기죠. 하나님이 직접적인 그리스도께서 신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해 오시는데 그 적그리스도와 그의 대적들을 멸하기 위해서 세상에 그들이 하는 꼭같은 무기를 동원해서 싸운다. 그래 에스겔서에 보면 7개월동안 거기서 싸운 그 무기들을 회수해서 불을 땐다고 돼있지 않습니까? 7개월동안! 그때에는 핵무기가 없어지고 재래식 무기로 싸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핵이 얼마나 많아요. 내가 정확하게 잘 모르겠지만 지구를 50번인가 이상 파멸시킬 수 있는 핵무기가 지구상에 저장돼 있다. 그런데 마지막 대전쟁이 터지는데 재래식 소총과 자동화기로 싸울지요? 그리고 주님이 신적권세로써 하나님으로써 지금 통치권을 행사하시기 위해서 오시는데 재래적인 방식으로 적대세력을 쳐부신다. 이게 안맞는 이야기죠. 이것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때 가장 성경적이고 정통적인 것 같애도 인간의 사변과 인간의 픽션을 가장 많이 집어넣은 책입니다. 그것은 유대주의 사고방식이지 이게 성경적인 하나님의 구속 경륜에 맞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이 나라가 세워진 후에 얼마나 고통의 연속입니까? 이스라엘 민족만큼 이제까지 살아남은 민족들 중에서 고통을 가장 많이 어려움 당한 백성이 어디 있어요.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그들에게 호의호식을 해주고 영광을 보게 해주는 그런 일이 필요할 것 같긴 하죠. 인간적인 동정심을 발동을 하면은 저도 한동안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스라엘이 얼마나 고통의 연속이고 수난받는 백성입니까? 한번 원을 씻어줘야 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한번 세상에 이런 찬란한 왕국을 세워가지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세계에 왕노릇하게 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라 한번씩 생각도 해봐요. 이때부터 예루살렘을 수도로 해서 천년왕국이 이루어집니다. 그 천년왕국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고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12제자들이 그외 내각 캐빈을 들고 그리고 12제자에 들지못한 바울사도가 수상이 되고 그래서 예루살렘에 다시 여기서도 의견이 두 가지입니다. 주님은 지상에서 이렇게 왕국을 세워놓으시고 다시 하늘로 다시 가신다고 그래요. 그렇게 하고 또 땅에서 직접 다스린다. 그래 두 가지예요. 의견이 어느 것이 진짜라고 해야 좋을지... 땅에서 직접 다스리는 것이 바른 형태 아니겠어요? 그때는 다 예루살렘으로 여행가기 이해서, 지금 많이 가지만 그땐 나도 비행기표를 사는 사람에 속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세계의 모든 크리스챤과 불신자들이 다 주님 왕을 만나기 위해서 예루살렘 순례에 오기 때문에 예수님 하고 악수하고 얼굴을 뵈올 때 일초씩 배분해줄지 이초씩 배분해줄지... 그래서 메시야 왕국을 세우게 되면 이때는 유대인들의 왕국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아주 특권을 갖는 특별한 위치에 세워지고 이방인들은 종속된 위치에 속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도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보다 높은 위치에 이르지 못하고 낮은 위치에 속하게 되죠.
그리고 천년기간에 예루살렘에서 진행됐던 치제사가 복귀되고 절기가 복귀되고 그리고 경절이 복귀되고 그렇게 되는데 이 피제사의 복귀는 단지 옛날 있었던 제사의 개념만이 아니라 이 피제사로 화해와 속죄가 이루어진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제사가 하나님이 마련하신 유일한 제사여서 히브리서는 그 이전의 제사를 다 이 실체에 대해서 다 그림자라고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세상이 속죄되어 구원에 이르지 않고 옛날 피제사가 복귀되어서 다시 그 피제사로 죄가 용서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는 헛되이 흘려졌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온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유일한 구원의 길로 십자가를 세우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신구약 전체의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 구원에 이르지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 하나님이 그의 영원한 지혜로 마련한 것이 사람의 지혜의 어리석은 것이 십자가인데 하나님이 그의 영원하신 지혜로 이룩하신 세상구원의 유일한 길이 십자가의 구원인데 이것을 부인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헌다. 그런 면에서 이 세대론의 천년도식이 사탄적이라 해야 맞습니다. 피제사,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거부, 그것은 사탄이 궁극적으로 없앨려고 하는 목표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상을 구원한 유일한 제사로 삼으셨고 유일한 속죄의 길로 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제사 더 큰 구원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구원이 종말론적이라 합니다. 이보다 더 큰 구원이 앞으로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어디서 그런 소리를 알고 하는지 구약을 다시 기록해야 한다 신약성경을 다시 기록해야 한다 그말은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준비하신 길이 예수 그리스도라 하는 것을 근본에서 허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주의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사람이 용서받고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것을 허는 것 아닙니까? 불트만도 뭐라고 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무슨 마력이 있어서 죄를 씻느냐?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대를 위해서 마지막 하신 말이라 회개하고 돌아오면은 살지만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한 하나의 마지막 말이다. 하지만 십자가의 피 자체로 죄가 용서되고 그런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불트만을 신학자가 아니라고 합니까? 십자가가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궁극적인 말이라 한다. 그러니까 불트만을 신학자라 한다고요. 이제까지 그같이 과격한 비평한 신학자가 아직 없지마는,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유일한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라. 이 길로만이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죄과를 소멸하시고 죄와 사망에 빠진 인류를 구원해 내서 하나님께로 돌리시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다른 복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피제사를 다시 복귀해요.
그리고 성도들과 부활해서 영체가 된 사람들도, 육체를 가진 사람들하고 죄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아요. 억제되어 잠재되어 있는 것 뿐이지 죄가 소멸되고 악이 없어진게 아닙니다. 그것이 어떻게 같이 살 수 있느냐? 한쪽은 영체가 돼 있는데 한쪽은 먹고자고 결혼하고 그리고 자녀를 생산한다. 천년기간에 결혼해서 자녀를 생산하는 일이 진행됩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자녀를 생산하고 그때 살아있는 자들은 자녀를 생산하는데 이에 죽었던 자들 부활한 성도들은 자녀를 생산하는 일을 못해요. 마치 여기서 영혼 결혼이라는게 더러 있죠. 박보위 딸하고 문선명이 죽은 아들하고 영혼결혼을 하지 않아요! 마치 부활한 영체하고 죄악이 아직도 있는데 죄악이 있는 세상이예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통치를 하실 때 같이 섞여 사는 것이나 마치 영혼하고 함께 하는 그런 형태죠. 그럴 수 있어요? 그럴 수 없는거죠.
요한계시록 20장을 다룰려고 그럽니다마는 요한계시록과 에스겔서와 이런 것들이 상징적인 언어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아직도 확실하게 연구를 못해서 그렇습니다마는 에스겔서를 보고 해결못하는 것은 에스겔이 환상중에 예루살렘에 진행된 일을 다 봤는지 아니면 그의 영혼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봤는지 내가 아직 판명을 못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상징적인 언어로 돼있는데 과도히 상징적인 언어로 문자화하고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영해해 가지고 갖다 붙인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세대론적인 도식이 나옵니다.
그리고 환란기가 빠졌는데 세대론에 의하면 요한계시록 4-19장까지가 7년 환란기간에 해당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까지가 교회기간에 해당하고 거기서부터 19장까지가 7년환란에 해당되는 내용이예요. 그러니까 미래의 사건은 한번도 이루어진게 아닙니다. 여기에 ( )에 나와 있는데 그것은 7년 환란기간에 다 이루어진 일들이예요. 4-19장까지가 그래 20장부터가 천년왕국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이 천년기간에 완전히 죄가 다 없어지고 악이 소멸된게 아니고 그대로 존속하고 있습니다. 철권정치 때문에 그들이 반항을 못하는거죠. 우리가 부활하면 우리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거할 이 땅도 이 창조도 함께 변화돼서 영체가 살 수 있는 것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세대론에 의하면 이건 형상은 그대로 두고 동결된 상태죠. 동결된 상태내에서 천년왕국은 진행됩니다. 그 기간에 아직도 죄와 죽음이 역사해서 죽는 자가 있게 됩니다. 신자들도 죽게 됩니다. 천년기론을 하면서 요한계시록 20장을 다룰려고 합니다마는 여기 20장은 문자대로 해석을 하면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천사가 하늘로부터 가지고 내려오는데 제일 강한 쇠를 가지고 오겠죠. 문자대로 본다면! 무슨 쇠가 제일 강합니까? 녜? 첫 해에 와서 83년도에 와서 종말론을 가르칠 때 반에서 얘기를 시켜보니까 스텐이 제일 강하다고 얘기하더군요. 스텐이 불에 제일 강하다. 그러면 숫자만 문자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여기 나온걸 다 문자대로 해석을 해야죠. 그러면 물론 천사들이 있으니까 그냥 없이도 만들 수 있지만 거기도 제철소가 있어야죠. 하늘에도! 포항제철소 보다는 더 좋은 제철소가 하늘에 있죠. 그리고 이렇게 쇠사슬 쇠자물쇠를 가지고 영물을 묶을 수 있느냐? 영물을 묶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귀신은 아직 사람몸을 입고 있어도 쇠사슬로! 그때야 지금보다 약했겠지마는 그땐 아직 쇠사 많이 발달하지 않을 때니까, 귀신은 육체를 입고 있어도 쇠로 묶어놔도 두드둑 하면 다 떨어져 버리는데 사탄은 왕이 이 영물들 중에 왕 아니예요? 그런 영체를 쇠사슬로 묶을 수 있습니까? 또 무저갱이면 이 끝에도 구덩이, 끝이, 굴 坑자 끝이 밑바닥이 없는 굴 아닙니까? 지궁상 어디에 그런 굴이 있습니까? 그런데 아직 다 탐사를 못해서 굴이 없는데가 있을지 모르지마는 직격이 6,400K 뿐이 안됩니다. 6,800인가... 물론 옛날사람 눈으로는 몇백 미터를 내려다 봐도 끝이 아물아물 하는데 6,700Km 위에 올라가서 보면 끝이 보이겠어요? 무저갱이라 할 수 있죠. 어떻게 무저갱이 있을 수 있느냐? 우선 거기까지 하고요 비판을 최종적으로 하기 전에 왜 이와 같은 도식이 생길 수 있었느냐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천년기 세대론 뿐만 아니라 천년전기도 다 유대주의 사고지 기독교 사고가 아닙니다. 왜 이와 같은 사고가 생겼느냐? 그들은 이것이 그들의 묵시문학에서 비롯합니다. 유대교 사상이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하나님 백성을 삼으시고 그들의 율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허락 받았습니다. 율법이 그들에게 구원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백성들하고도 언약을 맺지 않으셨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하고만 언약을 맺으셨어요. 그리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 특별하게 뺀 백성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고 이들에게 세계를 지배하는 약속을 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결국 모든 세계의 중심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들과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세계 지배의 약속도 하셨기 때문에 이들의 끝에 가면은 하나님께서 결국 이스라엘을 위해서 세계를 만드셨다는 귀결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때 해방해 내시고 유월절을 제정하시므로 유월절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 구원의 큰 구원이었습니다. 그때 당시 가장 강력한 로마, 세계제국인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끌어내는 일은 아무도 할 수 없는 불가능이었는데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팡이 하나 들려서 해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구원해 내시므로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이스라엘이 더 큰 구원으로 이루어 가도록 하는 약속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통해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신 것은 그것은 구원의 시작이지 완성이 아닙니다. 그래 유월절 경축을 할 때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 역사 과거에 왔던 그 큰 구원을 이루신 이가 언젠가는 다시 오셔서 이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유월절 경축을 할 때마다 그들은 문은 항상 열려져 있었습니다. 다시 구원자가 오셔서 이미 시작한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중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의 기대에 늘 문을 열어놓고 이 유월절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실 구원자가 다시 오셔서 이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라. 그 구원자를 기다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400년 동안 사사시대에 있으면서 압제를 많이 당했습니다. 그후에 그 압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왕을 요구해서 사울을 세웠습니다. 40년, 다윗에 의해서 대적들을 다 복수시켰습니다. 40-80, 솔로몬에 의해서 평화가 계속됐습니다. 120년이 정상적인 나라로서 평화를 유지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솔로몬이 40년의 평화기간이 우리가 보기에는 황홀하고 찬란한 것만 같애도 성경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오. 그 솔로몬이 그렇게 호화를 극하며 살기 때문에 물론 금은보화가 외국에서 많이 왔지만 그것 가지고 다 안되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많은 백성들에게서 말할 수 없는 착취를 중세의 극을 진행했습니다. 외국에서 물물교환으로 해서 들어오는 그것가지고도 솔로몬의 그 영화와 넘치는 생활을 사치의 생활을 다 담당할 수 없었어요. 그러기 때문에 12지파를 지파별로 했는데 열왕기 읽어보십시오. 거기 보면, 왕실의 식량을 부담하기 위해서 지역별로 재편성을 했습니다. 전체를 그렇다고 해서 12지파가 없어진건 아니지만 지역별로 재편성을 해가지고 왕실의 생활을 책임지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솔로몬의 압제 아래 얼마나 고통을 많이 당했는지 모릅니다. 겉으로는 황홀하고 찬란해도 그것은 외적인 것이요 오죽 감당하기 힘들면 세금을 감해달라 하는 요구가 르호보암이 왕이 되느냐 안되느냐 결정되는 요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뭐라 그랬습니까? 내 새끼 손가락 하나가 내 아버지 허리보다 굵을 것이고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다스렸으면 나는 전갈로 너희를 다스릴 것이라. 그래 솔로몬의 그 압제를 이기지 못해서 르호보암에게 세금과 부역을 감해 달라는 요구가 응해지면 르호보암을 왕으로 삼겠다고 했는데 그 요구가 응해지기는 커녕 솔로몬보다 극심한 압제를 가하게 되니까 그러면 내 집이나 지켜라 하고 우리는 더이상 분깃이 없다 하고 쪼개가지고 이스라엘을 열 지파를 세웠다. 그때부터 어려움이 시작된거 아닙니까? 그러다가 772년 앗수르에서 이스라엘이 망했습니다. 그 이스라엘은 중동지역으로 흩어져가지고 넓은 지역으로 완전히 흩어졌습니다. 다 흩어버렸습니다. 그래서 772년 이스라엘의 북 지파의 10 지파는 완전히 끊겨 버렸습니다. 그래서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소산되어 사라지고 없어질 민족이 되었습니다. 10 지파가 다시 회생되어 나온 것이 아닙니다. 남은 것이 유다 지파하고 조그마한 베냐민 지파, 베냐민 지파야 유다 지파 위에 있죠. 그러니까 베냐민 지파는 실은 제일 먼저 떨어져 나가야 할 지파인 베냐민 지파임에도 불구하고 베냐민 지파는 유다에게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586년 바벨론이 와서 그 나라는 망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북쪽 이스라엘로 완전히 흩어져서 자취가 없어져 버렸죠. 바벨론은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왜 그랬는지 몰라도 이들은 겟토에 모여 살게 했다. 그들의 민족적인 형태를 유지하면서 다시 돌아갈 귀환의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렇지만 70년이 지나서 귀한되고 5세기 후엽 4세기 초엽에 귀환운동이 대대적으로 있었습니다. 돌아가는 귀환 백성이 많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돌아간 수는 내가 계산한 4만 정도 밖에 안됩니다. 아주 극히 일부만이 돌아왔습니다. 늘 그러고도 평화가 계속된게 아니죠. 아직도 돌아와도 페르시아 왕국의 지배아래 있었습니다. 페르시아는 유화정책을 써서 그들의 제사를 다 복귀하게 하고 포로로 잡아왔던 그들을 본토로 다시 돌아가게 하고 이스라엘만 돌아온게 아니죠. 다 다른나라들은 돌아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유한 종교를 다시 부활해서 지키게 했습니다. 유화정책을 함으로 페르시아가 고대 중동에 나타난 나라중에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나라였고 가장 오래 지탱한 나라였다. 300년을 지탱한 나라였다. 그러다가 4세기 말엽 322년경에 알렉산더 대제에 의해서 정복을 당해서 페르시아가 멸망합니다. 그것이 동양인이 건설한 마지막 세계대제국입니다. 세계의 주도권이 서양으로 넘어옵니다. 알렉산더에 의해서 희랍인들에게로 희랍인들에게 가서 로마인들에게로 그 후에는 유럽인들에게로! 그렇게 돌아와서도 페르시아 밑에서 계속해서 압제로 있죠. 페르시아 압제가 끝나고 헬라가 왔습니다.
헬라제국이 세워졌는데 유대인들은 불행하게 소위 시리아의 본부를 두는 셀류키드 왕조에 편입되었습니다. 그 결국 알렉산더가 죽을 때 4개의 나라로 쪼개졌는데 시리아 셀류키드 왕조에 가나안이 편입되었습니다. 셀류키드 왕조는 아주 헬라화를 완전히 전력을 다해 추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유대의 흔적을 완전히 없앨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대대적인 콜롯세움을 짓고 큰 운동장을 짓고 그리고 희랍의 대부분의 스포츠를 도입했습니다. 지금은 별로 안 그러겠지만 그때는 남녀간에 대부분 옷을 벗고 경기를 하는 그와 같은 완전히 옷을 벗고 하는 경기를 도입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제사를 완전히 없애 버렸습니다. 그에 대한 항쟁으로 일어난 것이 마카비 왕 가문의 20세기 초엽의 항쟁, 그것이 게릴라 전쟁을 통해서 결국은 시리아 군대를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중심해서 소위 마카비 유대왕국을 세웠습니다. B.C 160년경에! 그래가지고 내려오다가 로마가 등장하고 내분이 생겼습니다. 무엇때문에? 그때 마카비 왕가가 왕권만 잡은 것이 아니라 제사장직도 함께 잡았습니다. 왕권과 제사권을 함께 겸해 버렸어요. 그러니까 솔로몬 시대 때서부터 사독계 제사장인 후손들만이 제사장을 계속해 왔는데 사독계 후손이 아닌 자들이 하나님 제사장인고 사독계 제사장은 불구하고 제사장 가문에 속하지 않는 자들이 제사장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에 대한 항쟁으로 일어난 것이 소위 시몬 선생을 중심한 쿰란학파, ( )파가 소위 세속화돼 완전히 돈으로 매수해 가지고 하죠. 제사장직을! 그래 보통 시몬 2세를 ( )선생이라 그럽니다. B.C 200년경에 나타난, 그래가지고 마카비 왕가가 100여년을 지배했는데 내분이 생겼습니다. 헬라화를 반대해 가지고 제우스신을 예루살렘 성전 내부에 지성소에 달고 신상을 달고 독수리상을 달고 그래서 제사를 지낸 것을 돼지피를 섞어가지고 오염화 시킨 것을 다 소제하고 다시 예루살렘 피제사를 복귀해 가지고 마카비 왕가를 세웠는데 헬라화에 대한 극단적인 반대정책으로 마카비가 생겼는데 마지막에는 정권이 위태하게 되니까 마카비가 다시 헬라화 정책을 도입했더랬습니다. 그러고는 결국 왕권이 이어지는 것 때문에 내분이 생겼어요. 그때 서로 로마에 가서 B.C 64년경 서로 왕자리를 차지할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로마가 진주해가지고 원로원이 소위 마카비 가문의 후손의 왕좌를 인정하면서 에돔의 후손인 헤롯에게 세금을 걷는 징세권을 주어 버렸습니다. 이론상으로는 마카비 가문이 왕은 가졌는데 세금 징세권이 없는데 무슨 권력을 행사합니까? 헤롯이 왕가문, 로마의 원로원하고 황실하고 잘해가지고 뒤바꾸어 가서 왕까지 다 되어버렸습니다. 로마의 지배아래 들어간거죠. 그때부터 이렇게 수난의 역사 이런 것이 이렇게 되었는데 이건 다 하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 친히 왕으로 다스리시면 우리가 다시 다윗의 영화를 회복하고 그 영광을 맛보리라! 그것이 소위 후기 묵시문학들이 갖는 근본사상이었습니다. 그때 왕이 와서 다스리신다. 메시야만 오시면은 우리가 해방되고 전세계를 지배하는 전세계 지배민족이 되고 다윗 때의 그 영화를 재판하게 될 것이라.
바로 이것이 교회에 들어와서 어떤 천년기론과 세대론이 된 것입니다. 그런 것이지 본래가 기독교에 의해서 성경에 의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비판은 천년기가 합당하지 않느냐는 대부분 했지만 그래도 다시 다음 시간에 조금 더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마카비 왕가 하면서 신약에 보면 사두개파가 있는데 사두개파가 바로 사독 가문 아닌 자들이 대제사장 된 것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파가 사두개파입니다. 신약에 있는... 그런데 마카비 가문 때문만 아니라 그후 다 돈주고 대제사장직을 샀죠. 여기는 소위 문서적인 증서가 있습니까? 소위 후기 유대교 외경들 중에 후기 문헌들 읽으시면 될 것입니다. 성경에 실린 그 이후에, 지금 우리는 구약에서 외경을 갖고 있지 않지만 로마교회는 외경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 교회사적인 것 때문에 그렇죠. 그런데 그 외경 구약 70인경에 외경이 들어있기 때문에 로마교회가 함께 외경을 성경으로 갖고 있는데 거기도 그런게 나타나 있지마는 그 이후에 진행된 많은 묵시문학책들이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영어대조로 되어있는 70인경에도 다 실려 있습니다. 참고해서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책들이라고 말하기 어려워도... 다른 질문 없으면 기도하고 마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