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개발 통권157호 /한국교육개발원
교육의 오래된 미래? 홈스쿨 가족 이야기
서덕희|서울대학교 교육연구소 연구원, artee1@snu.ac.kr
교육의 오래된 미래?
내가 홈스쿨링(homeschooling)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들었던 때가 아마 7년 전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매스컴에도 자주 등장하여 학교 밖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지만, 당시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1990년대 초반 교육에 관심을 둔 학자와 실천가들 사이에서 대안교육, 대안학교라는 말이 등장하고 실지로 다양한 형태로 실천되기 시작했지만 홈스쿨링이란 말은 1999년 ‘교실붕괴’라는 말이 등장하면서야 비로소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었다. 미국에서는 이미 약 150만 명이 홈스쿨링을 하고 있으며 모든 주에서 법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종교적인 이유를 제외하고는 아이와 부모가 자신들에게 적합한 교육을 찾아 학교를 가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2000년 초 내가 처음 홈스쿨 가족들을 만나면서 놀랐던 것은 비록 ‘스쿨링(schooling)’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학교라는 제도의 틀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교육 형태였기 때문이다. 일반학교든 대안학교든 학교의 틀이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학교라는 특정한 공간에서 전문적 지식을 갖춘 교사가 가르치고, 연령이 같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같은 교과를 배우는 방식인 반면, 홈스쿨링은 시간·장소·관계·활동 어느 것 하나도 정해진 것이 없다. 정해진 것이 있다면 부모와 자녀 관계가 어떤 다른 교육의 형태보다 중요하다는 것뿐이었다.
인류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생존의 차원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실존의 차원에서 스스로의 가능성을 가르침과 배움의 과정을 통해 실현해 나갔고, 그 교육의 결과 학문, 예술, 종교, 각종 도의 세계 등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여 왔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혈연관계인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그러한 가르침과 배움의 과정은 시작되었다. 분명 홈스쿨링은 그 이름의 생소함과는 반대로 ‘오래된’ 교육의 형태이다. 오히려 지금 당연시되는 제도화된 교육의 형태인 근대 ‘학교’는 200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학교의 위기가 공공연히 이야기되고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이은 정보화와 더불어 특정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교육의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홈스쿨링이 ‘미래적’ 교육의 형태로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홈스쿨링은 교육의 ‘오래된 미래’로서 다른 교육의 형태가 지니지 못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 아래에서는 짧지만 내가 만난 세 가족의 홈스쿨 이야기를 간략히 기술하고 그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를 통해 우리는 거꾸로 ‘학교’의 틀이 무엇인지 그것의 한계는 또한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는 거울을 얻게 될 것이다.
홈스쿨 가족 이야기
아래 소개할 세 가족의 아이들은 공통적으로 1999년을 전후하여 학교를 그만두었다. 물론 그 계기는 다양했다. 지훈이네는 부모의 해외유학 후 학교를 다니면서 드러난 학습장애로 지훈이가 ‘왕따’와 ‘체벌’에 시달리면서, 혜정이네는 오랜 야학교사와 학원강사의 경험으로 가지게 된 확고한 부모의 교육관으로 인하여, 구름이네는 모범생의 아버지이자 생활협동조합운동을 하던 이상래 씨가 학교운영위원을 맡게 되면서 갖게 된 학교에 대한 회의 때문에 홈스쿨링을 시작했다. 그러나 어떤 계기든지 간에 학교에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는 그들의 판단은 공통적이었다.
1) 지훈이네: 행복 그리고 자유
지훈이가 학교를 그만둔 것은 1999년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올해 스무 살이 된 지훈이는 재작년 1년 간 괌의 한 호텔에서 요리사 인턴으로서 일을 했다. 귀국한 후 일본어를 배우고 싶어하여 어학원을 열심히 다니더니 지금은 아버지 이광일 씨의 도움으로 일본에 있는 ‘슈타이너 인지학’ 공동체에서 세운 발도르프 사범대학의 청소년 프로그램을 듣고 있다.
발도르프 홈스쿨링
특수교육 중에서도 영재교육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광일씨가 ‘슈타이너의 인지학’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순전히 지훈이 때문이었다. 귀국 후 학교에서 학습이 부진하고 언어적·문화적으로 어눌하다고 하여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교사로부터 체벌을 받았던 지훈이의 상처를 치유하고 함께 공부하는 일은 영재교육과는 달랐다. 홈스쿨링을 시작하기 전 대안을 찾던 중 생명에 대한 경외감, 인간 본질의 이해, 서로를 살리는 상생의 정신, 예술적 요소 등을 중시하는 슈타이너 인지학은 그의 교육관의 중심이 되었다.
슈타이너 인지학에 기반한 ‘발도르프 홈스쿨링’의 특징 중 하나는 ‘에포크(epoch) 수업’이다. 에포크 수업은 ‘주기집중수업’으로 매 교과나 주제를 한 달 정도의 주기를 가지고 집중적으로 공부해 나가는 것이다. 가령, 자신들의 주거지역인 고양에서 내려오는 전래동화 읽기를 통해서 마을의 지형적인 특징들도 알게 되고 마을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원래 책은 문어체로 되어 있지만, 읽고 난 후 장면 몇 개를 설정해서 그림을 그리도록 하고 그 그림을 보면서 구어체로 다시 이야기를 쓰도록 했다. 지훈이는 이야기를 자기 글과 자기 그림으로 만들어가면서 예술 창작의 기쁨을 느끼며 지역의 역사와 지리에 대해서 익혔다.
주로 오전에 에포크 수업으로 역사와 사회, 지리 등을 다루고 오후에는 어머니 서지혜가 영어와 국어 등을 함께 공부했다. 책은 주로 동화책이나 역사책, 위인전 등을 선택하지만 그 주의 주제와 연결되도록 배려했다. 영어 역시 혼자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정해서 하고, 차근차근 올라갈 수 있도록 쉬운 교재를 선택했다. 오후 2시 공부가 거의 끝나면 지훈이가 아주 좋아하는 태권도와 피아노를 늦은 오후에 번갈아 배웠다. 피아노도 일반적인 진도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지훈이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중심으로 배웠다.
이러한 학습 과정에서 염두에 둔 것은 무엇을 배우는가보다는 ‘어떻게’ 배우도록 하는가였다. 공부는 평생 하는 것이며 따라서 공부가 하고 싶게끔 하는 의지를 키우고 혼자 공부하는 방법을 터득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또한 직접 토끼와 텃밭에 채소를 기르고 복지관의 장애인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도록 했다.
삶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과정
처음 지훈이 어머니 서지혜 씨는 학습장애가 있다는 지적 때문에 지훈이의 교육을 전적으로 책임진다는 것이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 없었다. 그러나 지훈이의 학습능력은 학교라는 장막에 가려 있었다. 수학에는 학습장애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만화 그리기를 좋아하고 언어를 배우는 능력은 남달랐다. 또한 열다섯이 넘으면서 지훈이는 부모와 함께 공부하기보다는 독립적이길 원했다. 만화가가 되기에는 자신의 능력이 모자란다는 것을 깨달은 지훈이는 요리학원을 다니면서 요리사가 되고 싶어했다.
지훈이 어머니 서지혜 씨는 홈스쿨링을 시작하면서 이광일 씨의 조언으로 발도르프 교사과정에 입학했다. 아내를 외국에 보내고 나서 이광일 씨 혼자 지훈이와 함께 홈스쿨링을 해온 과정은 삶의 무게를 느끼게 할 정도로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이 이광일 씨는 지훈이를 위해 희생한 것이라기보다는 각자 자신의 삶의 방향을 찾아나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수교육분야에서도 영재교육에 관심이 있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운명이 다른 데 있다는 것을 안다. 그는 <발도르프교육 아카데미>를 꾸리고 있고 전인교육, ‘홀리스틱 교육’, 놀이와 예술 등의 주제에 관심이 있다. 제도권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학습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그들을 돕는 사업이나 활동을 해보려고 한다. 그런 아이들을 위한 도시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광일씨에게 홈스쿨링은 ‘삶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과정’에 행했던 다양한 실험들의 연속이었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시도해보고 직접 체험해 보고 또 관찰하면서 또다시 새로운 어떤 것을 찾아나가는 그런 과정의 연속. 그 과정에서 그는 늘 ‘우리는 행복한가’, ‘우리는 자유로운가’라는 질문을 마음에 품었다고 했다. 검정고시도 보지 않고 일반 대학은 관심도 없는 지훈이가 앞으로 뭘 할지 아직 그도 알 수가 없다. 다만 각자의 삶의 철학을 존중하면서 순간순간을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나갈 것이라고 했다.
2) 혜정이네: 자립
혜정이와 혜준이가 학교를 나온 것은 1998년 각각 5학년, 1학년 때였다. 대학시절 교회에서 야학교사로 활동하면서 근로청소년들을 가르쳤고 학교에서 교사경험도 가지고 있던 혜정이 아버지 임호식 씨는 혜정이가 유치원 다닐 때부터 문제의식을 느껴 자신이 직접 어린이영어학원을 세웠다. 혜정이가 고학년이 되면서 학교는 혜정이 부모들이 보기에 쓸데없는 것들을 아이들에게 하도록 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할 여유도 주지 않는 쳇바퀴였다.
탐험가와 짐꾼?
혜정이는 5학년 때 이런 독후감을 쓴 적이 있다. “다른 부모님들은 시험 잘 보라고 문제집도 사주는데 우리 아빠는 내가 총정리 문제집 하나만 사달라고 해도 안 사준다”고. 임호식 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시험을 위한 공부, 즉 암기와 문제풀이를 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체벌이 무서워 중학교 때 외운 6·25참전 16개국을 아직까지 다 외울 수 있지만 그것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학설은 끊임없이 뒤집히는데 그 흐름을 이해하면 되었지 개별 사실들은 외울 필요가 없다. 그가 보기에 탐험가에게 산을 올라가는 일이 재미있는 일이지만, 짐꾼에게는 노역이 된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학교는 아이들을 탐험가보다는 짐꾼으로 만든다.
학교를 그만두고 나서 시간적 여유를 가진 혜정이와 혜준이는 1년 간 오전에는 피아노, 플룻, 아쟁, 대금 등 악기를 배웠고, 오후에는 책을 읽거나 아버지가 운영하는 학원에서 영어 공부를 했다. 또한 1999년 혜정이네 이야기가 한 일간지에 실린 후 같은 지역에서 홈스쿨링을 하는 세 가족이 모여 모임을 시작했다.
2000년 초반까지 세 가족은 임호식 씨의 학원에서 영어와 수학 공부를 했고, 함께 역사나 생태 체험학습을 다니기도 하고, 한 가정은 NIE, 또 다른 가정은 독서토론을 담당하는 등 한 집에 모여 아이들이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했다. 그러나 모임은 서로 다른 생각과 이해관계로 몇 달 만에 와해가 되었고, 혜정이네 학원의 사정도 점차 나빠져 배우던 악기도 그만두게 되었다.
대신 임호식 씨나 엄성주 씨가 두 아이들에게 꾸준히 신경 쓴 부분은 영어였다. 영어에 재능을 보이는 혜정이를 학원에서 직접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원어민교사를 고용하여 늘 영어로만 대화를 하도록 했다. 어렸을 때부터 혜정이는 영어를 좋아하여 텔레비전에서도 영어채널을 보았다. 대회에 나가 상을 받을 정도의 실력이었는데, 엄성주 씨는 학년이 올라가면서 시간을 투자하지 못해 그 실력이 줄어들까봐 걱정하기도 했다. 그래서 2003년부터는 아예 아이들을 학원에 나오도록 했다. 혜정이는 다른 원어민 강사들과 교류를 가지면서 초급수준의 영어를 아예 가르치도록 하고, 혜준이는 컴퓨터 작업, 책자 만들기, 학원에 온 아이들 돌보기 등 학원에서 필요한 작은 일들을 도와주도록 했다. 엄호식 씨는 “실제적인 일도 배우고 책임감도 는다”고 했다.
실제로 써먹기 위한 공부
학원에 나온 이후로 아이들은 아침 8시나 8시 반에 일어나 아침 준비하고 밥 먹고 학원으로 출근을 하고, 학원에서 점심 먹고 일하고, 독서당 숙제하고, 영어 공부를 했다. 2003년 열다섯이 된 혜정이가 낮에는 유치부 아이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오후에는 출결체크 및 반편성 등 비서일을 봤다. 이제 혜정이는 검정고시를 보고 방송통신대에 입학하여 강사 자격증을 따려고 한다. 혜정이는 자립하고 싶다고 했다.
엄성주 씨는 학교를 가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며 실제로 써먹기 위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시장에서 물건도 골라서 사보고, 은행에서 공과금도 내면서 사회에 필요한 사회성을 기른다. 학교에서 기르는 사회성은 그녀가 보기에 사회성이라기보다는 학교성이다. 또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도 다 배울 필요가 없으며 자기가 관심이 있는 것이면 아이들은 ‘알아서 찾아서’ 배운다. 억지로 관심도 없는 과학이나 수학을 배울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교육에서 중시하는 것은 아이가 스스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3) 구름이네: 공동체 속의 자율
학교운영위원을 하면서 교장이 하는 일에 구름이 아버지 이상래 씨가 이의를 제기한 후 모범생 구름이는 학교에서 예상치 못한 불이익을 받았다. 부모와 대화를 많이 하던 구름이가 상처를 크게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래 씨는 학교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구름이가 1998년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1년 동안 학교를 우선 가지 말고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해보자 하던 것이 그 해 말 동생 산이, 그리고 막내 바다마저 학교를 그만 두는 결과로 이어졌다.
자율적인 배움
학교를 가지 않으면서 구름이는 “왜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지”를 비롯하여 왜 “수학을 공부해야 하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했다. 이상래 씨와 고민한 결과 진학을 위해서라는 것, 진학은 사회에서의 경쟁을 통한 성공을 위한 것이라는 답만을 얻었다. 대신 학교를 가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활하면서 새로 얻게 된 교육관은 ‘자율적 배움’이었다.
자율적 배움은 부모가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두되 그냥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들이 살아가는 과정을 보고 그 과정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이상래 씨는 홈스쿨링을 하기 전부터 유기농을 통해 농촌과 환경을 모두 살리고자 하는 생활협동조합활동을 했는데, 2002년 가을부터는 교육과 삶에 대하여 공유하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는 조합원들 40여 명과 함께 <봄에>라는 이름의 “교육생협”을 꾸렸다. 앞으로 건축과 의료도 협동조합으로 자급자족할 것이라고 했다.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세 가정은 아이들을 모두 학교에 보내지 않고 있었고, 열한 가정의 아이들은 여름과 겨울 계절학교에 개별가정의 여건에 따라 참여하고 있었다.
내가 참여했던 여름 계절학교의 하루는 이러했다. 오전에는 아침에 해뜨는 것 보기, 인형 만들기, 오후에는 부침개 해먹기, 갯벌에 맛 캐러 가기, 참외 따러가기, 저녁에는 강강수월래 등이 프로그램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다 같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출을 보러가고 싶은 사람은 일찍 일어나고, 우연히 일어난 아이들 중에 가고 싶은 아이들도 함께 참여하는 식이었다.
물론 어른들은 각 활동에 대하여 상세히 이야기해주고 생길 수 있는 어려운 점들도 미리 경고해 준 후 자신의 결정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책임지도록 했다. 맛 캐러 가기의 경우 갯벌에 가면 빈 조개껍데기에 발이 찔릴 수도 있으며 갯벌에 빠져서 옷을 모두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갈 사람만 가도록 했는데 아이들은 저녁에 자신들이 캐온 맛을 삶아먹으면서 자신의 상처가 서로 더 크다며 훈장처럼 내게 보여주었다. 또한 부모들이 집 짓는 것을 지켜보았던 아이들은 그 가을 텃밭에 직접 집을 짓겠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자율적이고 자유롭고 자치적인 삶
이상래 씨가 보기에 대다수의 부모들은 제도권, 즉 기존의 자신이 살아오던 환경에서 벗어나면 혹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지금과 같은 제도교육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진학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러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혹은 그보다 많이, 사회가 요구하는 무언가를 배워야 하는 그런 자율적이지 못한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자연이 그러하듯 서로 신뢰하는 만큼 세상은 풍요로워진다고 했다. 부모가 자율적으로 살아간다면 자녀 역시 어른들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으로서 생활의 과정에서 배우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 자체를 스스로 꾸리고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고 보았다.
홈스쿨링의 경계 허물기
홈스쿨 가족들은 그 동기에 따라 부적응, 엘리트교육, 종교, 교육본질 등으로 스스로를 유형화하기도 하지만 실제 가족들은 어느 유형으로도 구분하기 어렵다. 또한 가정의 경제적·문화적 배경도 다 다르다. 사례로 제시된 세 가족 역시 홈스쿨링의 구체적인 과정은 너무나 다르다. 그러나 그들과 만나면서 나는 공통적으로 그들의 교육활동이 ‘학교의 틀’에서는 찾기 어려운 ‘경계 허물기'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첫째, 그들은 집단적이고 획일적인 시간과 공간의 틀에서 벗어나 있었다. 지훈이네의 ‘에포크’ 수업에서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한 주 내내 집중적으로 통합교과적 접근을 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의 자율적 구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계절학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구름이네의 ‘자율적 배움’은 쉬는 공간, 일하는 공간, 공부하는 공간에 대한 구획이 없이 주체의 태도에 따라 어디서나 배움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둘째, 부모와 자녀가 시간과 공간의 틀을 공유함으로써 학교의 틀로 나뉘어져 있던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가 새롭게 형성되었다. 지훈이네와 구름이네의 사례에서도 드러나듯이 홈스쿨링은 무엇이 올바른 교육인가, 무엇이 올바른 삶인가를 끊임없이 부모로 하여금 생각하고 실천하도록 함으로써 가족 모두가 주어진 것을 당연시하지 않고 삶의 방향을 모색하고 찾아나가도록 한다.
셋째, 부모와 자녀의 삶이 분리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삶의 맥락 속에서 배움이 이루어짐으로써 ‘학교의 틀’이 만들어놓았던 이론적 활동과 실제적 활동의 구분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혜정이네와 구름이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이 중시하는 것은 ‘자율’ 혹은 ‘자립’, 즉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리고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중요한 것은 ‘탐험가’와 ‘짐꾼’의 비유처럼 이 능력에는 가치를 스스로 판단하고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학교’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격리(schole)’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경계를 허물고 통합을 그 특징으로 하는 홈스쿨링은 명백히 학교와 반대된다. 그러나 학교의 격리가 의도했던 바가 그 자체가 아니라 ‘여가’이며, 여가의 의미가 일상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자신과 세상을 반성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라고 보면 제도적으로 구획된 격리 자체가 반드시 여가를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홈스쿨링 역시 많은 한계를 지니지만, 그 ‘여가’를 실현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홈스쿨링의 ‘경계 허물기’는 ‘학교’의 위기를 바라보는 한 가지 거울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