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에 소개하는 이씨는 확인된 경주 이씨가 아닙니다.
통일 신라 시대 때에는 본관을 쓰는 이씨가 없는 것으로 압니다.
이씨 성을 가진 역사인물로만 아시면 되겠습니다.
★ 이거정(李居正)
시대 발해
본관 미상(未詳)
성 이(李)
성별 남
활동분야 문신/관료 / 외교 / 외교가
생몰년 미상. 발해 시대의 외교가.
발해 제11대왕 대이진(大彛震)과 제12대왕 대건황(大虔晃) 시기를 전후하여 활동하였다.
발해에서의 그의 관작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860년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
일본왕이 그가 공경(公卿)의 위치에 있고, 나이가 70세(懸車)를 넘었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 나이가 상당히 많고, 또 높은 지위에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제10대 선왕 말년 경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학업을 마치고 833년 발해사신 고보영(高寶英, 또는 高賞英)을 따라 귀국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가 중년 정도였던 것을 위의 기록을 토대로 추정할 수 있다.
발해로 귀국한 뒤로 그의 행적이 확인되지 않다가, 860년에 이르러 비로소 일본에 발해국사(渤海國使)로 파견되었다.
그 해 겨울 105인의 일행을 이끌고 발해를 출발하여 861년 정월 일본 오키국(隱岐國)에 도착하였다가
다시 이즈모국(出雲國) 시마네군(嶋根郡)으로 옮겨갔다.
이때 사행의 명분은 일본 몬도쿠왕(文德王)의 상(喪)에 조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역시 본뜻은 일본과의 경제적·문화적 교류에 있었을 것이다.
5월에 이르러 일본왕은 이들이 비록 문상을 온 것이기는 하나
이전에 12년마다 한번씩 사신을 파견하도록 한 약속에 어긋나고
국서의 내용도 교만하여 돌려보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한편으로 그가 공경의 지위에 있고 재주가 아주 뛰어나 특별히 우대하여 입경을 허락하였으면 좋겠지만
접대 때문에 당시 가뭄의 피해를 당하고 있던 농사에 방해가 될 것 같다고 하여 결국 입경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발해에서 가져간 국서와 선물도 받지 않고 단지 발해 중대성(中臺省)이 보낸 첩(牒)만 접수하였다.
그리고 이즈모국으로 하여금 사신일행에게 견(絹)·면(綿)을 주도록 하였고,
나중에 대사인 그는 다시 시(?)·면 등을 받았다.
이때 그는 범본(梵本) 동승주(東勝?)를 일본에 전하였으며,
일본은 이를 동승사(東勝寺)에 보관하도록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