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목소리'로 칭송되는 주디스 더럼과 출신 세계적인 팝 디바 올리비아 뉴튼 존이
닷새 간격으로 잇달아 별세해 호주가 국가적 비탄에 잠긴 가운데
두 레전드 아이콘을 배출한 멜버른을 중심으로 존경과 추모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HIGHLIGHTS
‘호주의 목소리’ 주디스 더럼 향년 79세로 별세, 빅토리아 주정부 장례로 치러져
The Seekers의 'Isa Lei'… 윤형주 번안 '우리들의 이야기'로 한국에서도 큰 사랑
'세계적인 팝 디바' 올리비아 뉴튼 존도 73세로 영면… 지구촌 애도 물결 이어져
뉴튼 존, 30년 유방암 투병 '희망의 상징'… 호주 암 연구에 천 칠백만 달러 쾌척
한 주 사이 호주를 빛낸 세계적인 가수들의 별세 소식이 잇달아 전해져 충격을 던졌습니다.
호주의 국민밴드로 칭송되는 더 시커즈의 (The Seekers)의 리드 싱어 주디스 더럼(Judith Durham)이
향년 79세로 별세한 지 닷새만에 1970∼80년대를 풍미한
호주 출신의 세계적인 팝 디바 올리비아 뉴튼(Olivia Newton-John) 존의 별세 소식이 잇따랐는데요.
마치 데자뷔를 보는 것 같습니다. 올해 초 호주 크리켓의 아이콘 셰인 원(Shane Warne)이
태국에서 심장마비로 돌연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호주 크리켓의 전설 앤드류 시몬즈가
자동차 전복사고로 현장에서 숨져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바 있었죠.
오늘 컬처 IN에서는 호주를 빛낸 레전드 싱어 주디스 더럼과 올리비아 뉴튼 존의 음악인생을 짚어봅니다.
유화정 프로듀서 함께합니다.
주양중 PD(이하 진행자): 호주 대중음악의 큰 별들이 졌습니다.
추모 물결이 전 세계적으로 이어지고 있고 호주는 비탄에 잠겼는데요.
공교롭게도 별세 소식이 한 주 사이에 잇달아 전해져 충격을 더했어요.
유화정 PD: 그렇습니다. 먼저 지난 금요일 ‘호주의 목소리’로 사랑받아온
호주 대중음악의 아이콘 주디스 더럼(Judith Durham)이 향년 79세로 별세했습니다.
주디스 더럼은 4인조 국민 밴드 ‘The Seekers’의 홍일점이자 리드 싱어로
무명의 밴드를 월드 반열에 올려놓은 주역이기도 한데요.
Anthony Albanese 호주 연방 총리는 Durham을 “국보이자 호주의 아이콘”이라고 칭송했습니다.
알바니지 총리는 트위터에서 “더럼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목소리를 내고,
새로운 세대의 호주 아티스트를 위한 길을 닦는 데 기여했다”며 “그녀의 친절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울 것이고
그녀가 우리 민족에게 바친 찬가는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진행자: 주디스 더럼의 마지막 가는 길은 빅토리아 주장 state funeral으로 치러지는데,
더럼은 2015년 ‘Victorian of the Year’로 선정되기도 했죠.
유화정 PD: 빅토리아는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자 1964년 시커즈의 멤버로 음악활동을 시작한 곳이기도 합니다.
더럼은 1943년 빅토리아 주 작은 도시 에센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꿈은 피아니스트로, University of Melbourne Conservatorium에서 전문적인 피아노 연주와 클래식 보컬
트레이닝을 받으며 블루스, 가스펠, 재즈 곡 등을 연주했는데, 이는 훗날 가수이자 작곡자로서의 기틀이 됐습니다.
주디스 더럼은 호주 대중음악에 공헌한 공로로
1995년 호주 국민훈장 (Medal of the oder of Australia)을 수훈하기도 했습니다.
진행자: 한국 주요 방송과 매체에서도 주디스 더럼의 별세 소식을 다뤘는데요.
특별히 한국 팬들에게 익숙한 이유가 있다고요.
유화정 PD: 한국에서는 더 시커즈의 노래 이사 레이(Isa Lei)를 '세시봉'으로 유명한 가수 윤형주가
1974년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번안해 부르면서 크게 사랑받았는데요.
이사 레이는 본래 피지 섬주민들이 부르던 장중한 느낌의 이별가이지만
그룹 시커즈가 특유의 밝고 가벼운 느낌으로 편곡해 불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선 더 시커즈의 대표 곡처럼 인식돼 있지만
사실 많은 호주인들이 잘 모르는 곡이기도 합니다.
진행자: 더 시커즈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노래 바로 ‘Jeorge Girl’인데,
특유의 경쾌한 리듬에 아름다운 하모니 특히 주디스 더럼의 맑고 깨끗한 크리스탈 목소리가 돋보이는 곡이죠.
유화정 PD: 이 곡은 원래 1966년 동명의 영국 코미디 영화 ‘Jeorge Girl’의 타이틀 곡으로
아카데미 최우수 주제가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되면서 인기가 급상승하는 계기를 마련했는데요.
미국 빌보드 2위, 영국 팝 차트 3위, 호주에서는 물론 장 기간 1위를 석권한 시커즈 최고의 히트 곡입니다.
당시 이 곡은 마시기 좋은 소프트드링크에 비유되면서 부담감이 전혀 없는,
극히 대중적인 ‘소프트드링크 상업 음반’을 탄생시키는 계기의 시발점이 됐습니다.
진행자: “새로운 세대의 호주 아티스트를 위한 길을 닦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앞서 소개한
앤소니 알바니지 연방 수상의 언급처럼 호주 대중음악의 선구자 주디스 더럼이 열어 놓은 길에
혜성같이 등장한 인물이 바로 올리비아 뉴튼 존이죠. 뉴튼 존은 호주 멜버른 출신이지만
종종 영국 가수로 소개되는 경우도 많은데요.
유화정 PD: 뉴튼 존이 다섯 살 무렵 멜버른 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가족 전체가 호주로 이주했습니다.
한 때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영국의 과학자 뉴턴의 후손이라는 보도가 나왔지만 오보였고요.
외할아버지가 독일 출신 물리학자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멜버른 사우스 야라에서 성장한 뉴튼 존은 어린 시절 수의사를 꿈꿨지만 공부에는 흥미가 적었는데,
딸이 일찌감치 여러 호주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며 노래와 무대에 소질을 보이자
그녀의 어머니는 더 큰 무대로 나설 것을 권유했고, 16 세 때인 1966년 영국 런던으로 건너갔습니다.
진행자: 호주 이민자에서 다시 고국으로 돌아간 셈이군요. 영국에서의 활동은 기대대로 성공적이었나요?
유화정 PD: 싱글 앨범을 냈지만 차트 진입에 실패했고, 런던의 여러 클럽에서 공연하며 이름을 알리려고 시도했지만
쉽지 않았는데요. 한 번은 런던 ‘레이몬드 가극단’에서도 공연했는데,
후에 도착해서야 스트립클럽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5년여의 무명시절 끝에
1971년 밥 딜런이 쓴 'If Not For You'가 영국 팝 차트에 7위에 오르며 드디어 기회가 찾아옵니다.
이 때 같은 앨범에 실린 'Banks of the Ohio' 역시 히트하게 되는데,
이 곡은 뉴튼 존의 향후 음악 커리어 방향을 알리는 최초의 컨트리풍의 곡이었습니다.
진행자: 'Banks of the Ohio'를 가수 조영남 씨가 ‘내 고향 충청도’로 번안해 불렀죠.
‘일사 후퇴 때 피란 내려와 살다 정든 곳 두메나 산골~ ’ 전혀 번안 곡이라 생각되지 않을 만큼
한국 토속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데, 원곡이 컨트리풍의 곡이어서 그런 거군요.
유화정 PD: 계속해서 1973년에는 컨트리풍의 앨범 'Let Me Be There'로 마침내 거대한 미국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되는데요. 이 곡으로 뉴튼 존은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여성 컨트리 보컬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진행자: 뉴튼 존은 유럽 최대의 음악 경연대회인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도 출전했죠?
유화정 PD: 1974년 대회에 영국 대표로 출전해 4위를 차지하는데요.
공교롭게도 그 해 우승자가 ‘Waterloo’를 부른 스웨덴 출신 4인조 그룹 ‘ABBA’였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 보란 듯이 미국 차트에서 첫 1위를 차지하는데,
'I Honestly Love You'. 반 세기가 흐른 지금도 올드 팬들의 큰 사랑을 받는 주옥같은 노래죠.
뉴튼 존은 살아생전 5곡의 빌보드 싱글차트 넘버원과 10곡의 빌보드 싱글차트 탑 텐,
4번의 그래미 수상 등 대중가수가 거둘 수 있는 모든 영광을 누렸습니다.
진행자: 컨트리 팝으로 음악 커리어를 시작했던 올리비아 뉴튼 존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뮤지컬 영화
1978년 존 트라블타와 함께 한 ‘그리스((Grease)’로 이미지 변신을 꾀하는데, 대 성공을 이루게 되죠.
유화정 PD: 올리비아 뉴튼 존은 컨트리 가수에서 팝 가수로 변신해 성공을 거둔 유일한 여가수입니다.
197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컨트리와 포크 스타일의 노래들로 입지를 다진 그녀에게 음악적 변화는 쉽지 않았는데요.
자신을 응원해준 미국 백인들이 좋아하는 보수적인 음악 컨트리를 버리기엔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영화 출연이었습니다.
당시 28살이었던 뉴튼 존은 ‘그리스’에서 주인공 샌디 역을 맡아 자연스럽게 음악 변신을 완수했는데,
뉴튼 존의 호주 억양 대문에 극 중 샌디가 호주에서 온 소녀로 설정이 바뀌었다는 뒷얘기가 있습니다.
진행자: 영화 ‘그리스’에서 보여준 도발적인 이미지는 1981년 앨범 'Physical'을 발표하며 정점을 찍죠.
10주간 빌보드 차트 1위에 머무를 정도로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는데,
그러나 이후 유방암 진단을 받고 30년에 걸친 긴 투병생활을 하게 되죠.
유화정 PD: 올리비아 뉴튼 존은 암 투병과 회복 과정을 통해 인생의 변환점을 맞게 됩니다.
인도주의 및 건강 관련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데요.
1978년에는 참치 어망에 잡힌 돌고래 학살에 항의하기 위해 일본 콘서트 투어를 취소한 바 있고요.
1987년에는 UN의 환경운동 민간대사를 맡아 자연보호에도 앞장섰습니다.
또, 어린 시절 성장기를 보낸 멜버른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암 연구기관인 '올리비아 뉴튼 존 암 (ONJ Cancer Centre) 센터를 설립해 암 연구와 환자 지원 활동도 적극 펼쳤습니다.
진행자: 멜버른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과 멜버른 크리켓 그라운드 아츠 센터 등 멜버른의 대표적 랜드마크에서는
뉴튼-존의 공헌에 경의를 표하는 핑크 빛 조명이 비추어졌는데, 분홍색은 호주 유방암 캠페인의 상징색이기도 하죠.
유화정 PD: 다니엘 앤드류스 빅토리아 주총리에 따르면 올리비아 뉴튼 존은
자신의 암 여정을 통해 다른 이들의 생명을 구하고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뉴튼 존은 호주 암 연구에 1천700만 달러에 이르는 기금을 투척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영화'그리스'에서 뉴튼 존이 입고 나온 전설적인 가죽 재킷과 바지는 2019년 경매에서
40만 5000달러(약 5억 원)에 팔렸는데, 뉴튼 존의 바람대로 경매 수익금은 호주 암 연구에 기부됐습니다.
남편인 존 이스털링도 그녀를 추모하고 싶은 이들은
"꽃 대신 올리비아 뉴튼-존 암센터에 기부해 달라”라고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진행자: 시대를 풍미했던 호주의 레전드 아이콘 주디스 더럼과 세계인의 연인으로 사랑받은
팝 디바 올리비아 뉴튼 존, 별들은 떠났지만 그들이 남긴 음악 향기는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