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의 열매
고린도전서 9장 23-27절 / 이동원 목사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이것을 행함은 너희와 함께 복음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자 함이라. 24. 경주할 때에 달리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한 사람이 상을 받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리라. 25. 이기려고 애쓰는 자마다 모든 일에서 절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썩을 관(冠)을 얻고자 그 일을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관(冠)을 얻고자 하느니라. 26. 그러므로 내가 이와 같이 달리되 정해진 것이 없는 것처럼 하지 아니하고 또 이와 같이 싸우되 허공을 치는 자같이 하지 아니하며 27.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킴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받은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9:23-27 KJV)
미국의 농구 코치 가운데 커튼 [피시먼스]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조금 유명하게 이유는 이 사람이 인도하는 농구팀이 항상 꼴 등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데 놀라운 사실은 구단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코치를 해직하지 아니 하고 그대로 썼다는 사실입니다. 거의 하위권에서 맴돌고 꼴등하는 것이 다반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번은 이 커튼 피시먼스라는 코치가 자기 팀도 전환이 필요하다 새로운 출발이 필요하다. 그러기위해서는 심리적 전술이 필요하다 그래서 심리적 설득을 자기 선수들을 데리고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 팀이 게임에 나갈 때 마다 항상 지는 팀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가지 마십시다. 이번 게임만은 여러분이 나가실 때 이런 생각을 하고 나가세요. 우리는 항상 이겨왔던 팀이다. 그래서 이긴 척 하고 나가십시오. 영어로 pretend라는 말이죠. Just pretend 그냥 한번 계속 이 겨왔던 팀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 나가십시오. 이긴척하고 나가십시오. 그리고 이번 게임이 평범한 게임이 아니라 우리가 계속 이겨서 마지막 챔피언 결정전에 최후에 마지막 결정전 게임까지 올라왔다. 올라온 척하고 그렇게 pretend하고 여러분~! 한번 하고 나가십시오. 그렇게 해야 자신감 self confidence가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그렇게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졌어요. 코치가 화가 났습니다. 막 화가 나서 “아니 여러분, 내 말을 뭐로 들으셨습니까? 내가 그렇게 호소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코치를 한 선수가 가만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하더래요. “코치님, 그냥 우리가 이번 게임도 이긴 척 하세요. 그냥. 이긴 척” 이 에피소드의 교훈은 우리가 경기의 승리를 위해서는 심리적 전술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승리라는 것은 심리적 전술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실력이 있어야 하지요. 실력이 없으면 이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실력이라는 것은 훈련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훈련이라는 이 단어를 성경에서는 독특한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절제'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 훈련이야 말로 승리와 패배를 결정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 절제라는 말은 본래 헬라어의 '애크크라테이아(Ακκράτεια)'라는 단어가 쓰여 지고 있습니다. 크라토스라(Κρατόσρα)는 단어로부터 나온 말인데, 이는 우리가 가진 모든 종류의 욕망을 훈련을 목적으로 자제한다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뜻입니다. 영어로 이 단어를 번역할 때 self-control 이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갈라디아서 5장22절에 성령의 열매를 말할 때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그리고 마지막 열매가 뭐예요?
절제의 열매입니다.
마지막 열매가 마지막 열매이니까 우리는 생각하기를 제일 중요하지 않은 열매라는 인상을 가질지 모르겠어요. 바울이 강조할 때 아마 제일 중요한 의도로 강조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절제 없이는 다른 선행하는 모든 인격적인 열매들이 맺어지지 않아요. 그만큼 절제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해가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올 한해가 처음 시작할 때, 금년에 올 초에 우리 마음속에 나름대로 금년 한해를 향한 우리들의 꿈이 있었습니다. 목표가 있었습니다.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 꿈과 목표가 얼마큼 이루어지셨습니까?
얼마큼 우리들의 꿈과 목표가 이루어 질수 있었느냐? 그렇게 이루어지지 못했느냐?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얼마나 control 하고 우리 자신을 얼마나 잘 훈련했느냐? 저는 거기에 달려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절제라는 것은 우리가 절제합시다. 라는 절제의 결심, 결단만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절제할 수 있는 어떤 동기가 부여되어야 합니다. 어떤 동기부여적 삶의 열망이 필요합니다. 절제하기 위해서는 어떤 삶을 열망해야 하느냐 이것이 제가 묻고 싶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절제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삶을 열망해야 할까요?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쓰임 받는 삶을 열망해야 합니다.
우리가 쓰임 받는 삶을 열망하게 된다면 절제하게 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에 위치하고 있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씁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 은 인생을 게임에 비유합니다. 혹은 신앙생활을 게임에,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신앙생활은 일종의 게임입니다. 당시에 아테네에 서는 이미 올림픽 비슷한 게임들이 이루어져 있었고, 당시에 고린도에서 소위 이투미안{Ιτουμιανά)이라는 체전이 매년 고린도 도시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이런 게임의 룰이라든지 규칙, 문화에 대해 매우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이 게임에 선수로 출전하는 자체를 커다란 명예로 생각했습니다. 최대의 명예, 인생을 살면서 명예는 이투미안이라는 게임에 선수로 한번 나가보는 것이다. 그것을 명예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최대의 불명예는 뭐냐면 이 게임에 선수로 뛰던 선수가 자격을 박탈당하고, 실격 당해서 선수로 자격을 상실하는 것을 최대의 불명예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문화적 습관을 염두에 두고서, 본문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바울은 틀림없이 이런 문화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서 오늘의 본문을 기록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마지막 2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27.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킴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받은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버림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뭐냐? 신학자들이 여러 가지 토론을 합니다. 혹시 바울이 다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얘기한 것이 아니겠느냐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서 학 자들은 그런 의미는 아니고, 이것은 바울이 현재 주님께 붙들림을 받아 쓰임을 받고 있는데 이방인의 사도 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쓰임을 받고 있는데 내가 어느 한순간 자격을 상실하고 주님이 나를 더 이상 쓰시지 않는다는 그런 사태는 일어날 수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버림이라는 단어를 어떤 성경번역에는 disqualify 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번역한 일이 있습니다.
실격, 자격을 상실했다. 자격을 상실하게 될까봐 바울이 두려워했다. 지금은 나를 쓰시고 있습니다. 주님이 쓰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 안 되겠다. 내가 너희를 더 이상 쓸 수가 없다. 뭐 그 사람을 다시 지옥 보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더 이상 주님에 의해서 쓰임을 받지 못한다 이것은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일이겠습니까?
1988년 9월27일 월요일 아침 캐나다의 CBC 아침뉴스에서 “오늘은 우리 캐나다의 국가적 수치의 날입니다.”라는 아나운서의 멘트로 뉴스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캐나다의 국가적 영웅, 세계적인 육상선수, 세계에서 가장 빨리 뛰는 선수를 보유하고 있다고 자랑스러워했던 캐나다 국민의 hero, 영웅이었던 벤 존슨이 약물복용으로 선수의 자격을 박탈당한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모든 기록은 깨끗이 취소되고 말았습니다. 약물복용을 했습니다.
기자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벤존슨에게 왜? 약물을 복용했냐? 솔직히 저는 그 동안 훈련을 게을리 해 왔습니다. 의욕이 없었습니다. 참피언의 명예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저는 약물을 복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게 의욕이 상실되었을 때 더 이상 그는 훈련을 기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계속 쓰임 받고 싶다. 라는 사실을 우리가 정말 열망한다면 우리는 훈련을 기피해 갈 수가 없습니다.
또 기피해서도 안 되지요. 그래서 바울은 오늘 이 마지막 27절을 읽어 보시면. 바울이 자신의 결심을 단 호한 결단을 말합니다. ➤“27.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킴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받은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내가 내 몸 을 쳐서 복종시킨다. 내 몸을 쳐서 내가 복종시킨다. 그 이유는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내가 다시는 쓸모없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 쓰임 받고 싶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훈련한다. 절제한다. 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요한복음 15장에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다. 사실은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그 이유가 있는데 너희로 항상 과실을 맺는 삶을 내가 보고 싶어 한다. 과실을 맺는 삶, 열매를 맺는 삶, 다시 말하면 이것은 유용한 삶, 쓰임을 받는 삶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써 주시려고, 사용 하시려고 부르셨단 말입니다. 선택 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쓰임을 받으려고 한다면, 내 은사가 많든 적든, 달란트가 크든 적든, 내 모습 그대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그리고 이 세상 속에서도 우리가 유용하게 쓰임을 받는 인생을 살려면 무엇보다 절제가 필요하다. 라는 사실입니다.
거꾸로 우리가 절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쓰임 받는 삶을 열망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 끝까지 쓰임 받고 싶어요. 이 모습 그대로 쓰임 받고 싶어요. 유명해지진 않아도 좋아요. 그러나 쓰임 받는 인생 살고 싶습니다. 이 쓰임 받는 삶을 열망하는 사람마다 절제의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새천년에 쓰임 받는 삶을 열망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쓰임 받는 삶을. 아멘 하는 사람만 쓰임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두 번째로 열망해야 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말씀에서 아마도 2가지의 게임을 연상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되요. 자, 24절에 보시면 ➤“24 경주할 때에 달리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한 사람이 상을 받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리라.” 달음질, 육상의 race를 생각했겠지요. 또 26절에 ➤“26 그러므로 내가 이와 같이 달리되 정해진 것이 없는 것처럼 하지 아니하고 또 이와 같이 싸우되 허공을 치는 자같이 하지 아니하며” 또 달음질이 나와요. 그 다음에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고 이것은 무슨 게임을 연상했을까요?
허공을 치지 않는다. 아마도 복싱을 연상하지 않았을까? 권투경기를 연상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되어 집니다. 자, 여러분 이런 광경을 연상해 보십시오. 육상게임이 시작됩니다. start line에 서서 출발신호와 함께 출발을 합니다. 그런데 한 선수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골라인, 결승 라인은 저쪽에 있는데 결승라인과 정 반대 방향으로 죽어라고 사력을 다해서 열심히 뛰어요. 무서운 속도로 스피드로 뛰었어요. 반대방향으로. 무슨 소용이 있어요. 사력을 다 해도 땀을 흘려도 그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이따금씩 사각의 링에 오른 복서가 열심히 해요. 열심히 하면서 땀을 흘리면서 계속 주먹을 휘두르는데 그냥 허공을 향해서 휘 둘러요. 그는 결코 승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종종 우리 가운데는 열심은 있는데 목표를 잃어버린 열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표 없는 열심, 목표 없는 최선을 하고 있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그의 인생의 게임은 패배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정말 왜 우리가 제대로 자기 인생을 훈련하지 않습니까? 목표가 없기 때 문입니다. 목표가 설정되어 있으면, 뚜렷한 목표가 있으면 그 목표에 준한 진정한 훈련이 이루어져 갈수가 있을 것입니다.
목표가 분명한 삶, 훈련된 삶
미국 대통령을 지낸 사람 가운데 린든 비 존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먹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탐식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몸무게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인이 미세스 존슨 여사가 first lady가 남편에게 경고도 했겠고, 호소도 했겠고, 애걸도 했어요. 하지만 부인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몸무게가 불어났어요. 그러니까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고 느꼈던지 남편에게 어느 날 이런 자극적인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한국에는 그 말이 있는데 미국의 영어에는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 말이 자극적으로 들렸다고 해요. 뭐라고 했냐면 자기 남편보고 “여보!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립니까?” 자신을 다스리지 못 하는 사람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느냐? 그런데 이 말이 화살처럼 박혔대요. 그것이 자극이 되고 충격이 되었대요. “내가 미안하오. 내가 노력 하겠다고 내가 좋은 대통령 되겠다고 그리고 좋은 대통령 되려면 건강해야 하겠고, 건강하기 위해선 몸무게 이제부터 조정하겠다고. 당신하고 약속하고 1년 동안 20파운드 줄이겠다.” 그리고 그 1년 동안 23파운드를 줄였대요.
그리고 훨씬 정치력도 높아지고 아주 건강하고 명석한 판단을 하면서 그 해를 잘 보냈다고 합니다. 뚜렷한 목표라는 게 그만큼 중요합니다. 윈드 존슨은 23파운드 성공했다고 하지만 우리주변에도 20파운드 이상의 기적적인 몸무게를 줄인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20세기 말에 일어난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교회 김기태 목사님을 아시나요? 20파운드가 문제가 아니라 20kg을 줄였습니다. 지나간 여름에 제가 탐식 설교를 했었지요? 설교는 제가 했는데, 은혜는 그쪽으로 갔어요.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여기에 다툰다는 말이 온 에너지를 다해서 소모한다. 승리를 위해서. 전력투구하는 모습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여러분 절제의 영역은 한 가지 영역만이 아니라 여러 영역입니다. 우리가 식욕도 컨트롤해야 하고, 성적 욕망도 컨트롤해야 합니다. 명예욕도 컨트롤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온갖 이기적인 욕망도 컨트롤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컨트롤되지 않으면 모든 일에 절제하지 않으면 승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절제가 이루어지기 위해선 뚜렷한 목표가 설정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절제하자는 것인가? 바울은 지금 무엇을 위하여 절제하겠다고 말합니까. 바울에게 있어서 목표는 아주 분명합니다. 그것은 뚜렷합니다. 자, 오늘 본문 직전 구절 23절이 되겠는데요.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이것을 행함은 너희와 함께 복음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자 함이라.
복음 때문이었어요. 복음을 위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내가 전하기 위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내 사명 완수하기 위하여. 이 복음 전도의 위대 한 소명을, Vision을 이루기 위하여 나는 내 자신을 절제하겠다. 그렇습니다. 먼저 목표 설정을 하세요. 새벽기도도 하면서 앞으로 남은 며칠만이라도 뚜렷한 목표설정을 하세요. 그리고 내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절제하겠다. 목표 있는 삶에 대한 열 망 그것은 여러분과 저의 삶속에 절제의 삶을 가져 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목표 있는 삶을 열망합시다.
셋째로, 상급 받는 삶을 열망하십시오.
우리가 절제하기 위해선 어떤 삶을 열망해야 합니까? 첫째로, 쓰임을 받는 삶, 둘째로 목표가 있는 삶 셋째로 상급 받는 삶을 열망하십시오. 당시 올림픽 게임이나, 소위 이투미안 게임의 승자에게 주는 최대의 명예는 저 유명한 월계 수 면류관이었습니다. 월계수는 나무죠. 최대의 명예를 상징하는 상임 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오래가지 못해요. 두면 나중에 시들어 버려요. 지금은 그런 것맘 주지만 옛날에는 월계수관입니다. 시들어 버려요. 썩어버려요.
바울은 이런 걸 생각할 때 시들어 버리고 썩어버리 는 월계수 관을 하나 쓰자고 오래 간직하지도 못할 관(冠)을 위해서 사람들이 시간을 컨트롤하고, 땀을 흘리고 자신을 조절하고 욕망을 조 절하면서 그렇게 애를 쓰는데 썩지 아니할 면류관, 영원한 가치를 위해서 노력하고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 들이 얼마나 자기 자신을 절제하며 삶속에 자신을 투자하고 있느냐. 바울은 이 질문을 묻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말합니까?
오늘 말씀에서 다시 25절을 읽어요. ➤“25 이기려고 애쓰는 자마다 모든 일에서 절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썩을 관을 얻고자 그 일을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관(冠)을 얻고자 하느니라.”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썩지 아니할 관(冠) 그것은 어떤 관일까요? 썩지 아니할 관(冠). 어떤 이는 황금 관. 천국에 가서 금으로 된 관을 기대한다고. 저는 그 금이 상징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한 관은 물질적 관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 관에 대한 study 성경공부를 해 보시면 이 런 낱말들이 나옵니다. 어떤 관이 나오느냐? 영광의 관, 자랑의 관, 혹은 기쁨의 관, 혹은 소망의 관. 이런 것들이 물질적인 것들이 아니요.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사람들에게 전도를 해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요. 전도하는 과정이 쉽지 않아요. 전도를 해 보면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붙들어 놓으면 도망가고,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제대로 믿게 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믿은 사람을 신앙적으로 잘 세워주는 일, 정말 어려운 일이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설립하고 전도해서 그 사람들의 신앙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쓰면서 데살로니가전서 2장 마지막 부분에 이런 편지를 씁니다.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환희의 관(冠)이 무엇이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 있을 바로 너희가 아니냐?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내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여러분은 저의 자랑의 관(冠)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저의 기쁨의 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저의 희망의 관, 여러 분은 저의 영광의 관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관은 무엇을 얘기 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들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천국 가서 내가 그렇게 전도하려고 애썼던 사람이 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 와서 영생을 함께 누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어떨까요?
'야 그렇게 나를 애태우더니 예수님 믿고 여기 와서 영원을 같이 누린다.'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그 기쁨이요. 영원한 기쁨. 그리고 내가 전도한 사람 자랑하고 싶어서 만나는 사람마다 저 사람 제가 전도했거든요. 저 사람 제가 전도했어요. 하는 이 끝없는 자랑. 이 자랑의 관 기쁨의 관 그 영원한 가치를 지닌 자랑. 여러분 주님 앞에 서는 날, 그 놓칠 수 없는, 그 영원히 계속될 그 명예를 위하여 그 명예를 바라본다면 그것이 상급이요. 우리의 상급입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그 상 때문에 race에서 경주자들은 그 마지막 관을 위해서 뛰는 것입니다.
여러분, 노벨상보다도 더 명예스러운 우리 주님께 인정받아 영원을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그 관을 그 상급을 얻기 위하여 그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까요? 내가 투자 한 사람, 내가 눈물 흘려 전도한 사람, 전도하고 세운 그 사람 내년에 는 그 목표가 있다면 주일학교교사도 하시고, 사람을 섬기는 일을 해 보세요. 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몰라요.
미국의 필라델피아 근교에 가면 듀퐁가든, 아주 아름다운 가든이 있습니다. 저는 워싱턴에 살았는데 1-2시간 쯤 되나? 저도 여러 번 간적이 있습니다. 손님들을 모시고. 이 듀퐁가든이 만들어졌을 때 듀퐁백작이 자기 부인을 위하여 만든 아름다운 가든에 많은 손님이 왔어요. 손님들에게 자랑을 하면서 그 정원을 돌고 있을 때 사람들이 칭찬했어요. 너무 아름다운 가든이다. 참 예쁘다고. 이때 듀퐁 백작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이 정원에 대해서 저만큼 자랑스러워 할 분은 없을 것입니다. 또 저만큼 정원 때문에 기뻐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정원은 사람들을 시켜서 한 것만 아니라 저의 아내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제가 처음에 손수 일을 하여 저의 정성이 들어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꽃을 심고, 가꾸고, 뿌리고 그 모든 일을 제가 같이 했기 때문이다. 나의 정성이 들어갔기 때문에 이 정원을 볼 때마다 기쁨과 자랑을 느낍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서 우리가 전도한 사람 우리가 세운 사람을 만날 때 똑같은 감격이요. 내가 전도한 사람, 내가 눈물 흘린 사람 내가 이 땅에서 뿌려진 눈물과 봉사와 정성의 씨들이 천국에서 열매를 맺 는 광경을 보았을 때 우리는 크게 기뻐할 거예요. 영원히 기뻐할 거예요. 그 놓칠 수 없는 상급 그 마지막 관을 위하여 우리가 살아간다는 사실이 얼마나 특권이에요? 그것을 위해서라면 나는 모든 것을 절제할 수 있다. 내 시간도 보람 있는 일에 쓰겠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
빌립보서 3장에서 고백하기를 “13. 형제들아, 나는 내가 이미 붙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다만 이 한 가지 일을 행하나니 곧 뒤에 있는 그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그것들에 도달하려고 나아가 1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밀고 나아가노라.”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 저 영원을 통해서 놓치지 않을 상급을 주 앞에 자랑스럽게 붙들기 위하여 훈련으로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 가지 봉사의 기회들이 있는데 거기에 들어가서 참여하시고 그러면서 내가 짤막한 인생이 끝난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부족하지만 저를 쓰셨는데 여기 저의 열매들이 있습니다. 이 열매들에는 나의 눈물과 기도가 들어가 있습니다. 주 앞에 영원을 두고 자랑스러워 할 상급과 명예를 위하여 절제의 열매를 안고 들어서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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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