뛴다
백금태
1) 얼마 전, 초등학교 동기회에서 봄놀이를 갔다. 졸업한 지 60여 년이 다 되어 가는 세월이다. 80여 명의 졸업생이 누구는 하늘로 가고, 아프고, 타지로 떠나는 등등의 이유로 쉰 명 남짓 남았다. 그나마도 여행길에 오른 이는 삼십 명 내외였다. 쭈글쭈글한 얼굴을 서로 쳐다보며 우리 건강하자고 억지웃음을 짓는다.
2) 초등 동기회가 결성된 지 50년이 넘었다. 신년회, 송년회, 봄가을 나들이, 체육회 등등 동기회 행사는 끝이 없었다. 나이가 들어 자식들의 혼사가 시작되니 행사 횟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동기의 자녀 결혼식 날이 바로 동기회 날이었다. 혼주가 주는 답례금을 두둑이 받아쥐고는 식당으로, 야외로 자리를 옮겨 코가 비뚤어지게 마시고 먹으며 동기의 정을 쌓아갔다. 이제는 결혼식 날의 동기회도 차츰 빛을 잃어간다. 집마다 절혼 했거나 몇 남은 자식은 결혼을 포기했는지, 아니면 인연을 찾고 있는지 결혼 소식이 뜸하다.
3) 동기회 행사의 꽃은 단연코 붐, 가을 나들이였다. 일 년에 두 번, 50여 년을 이어왔으니 거의 횟수로 100번은 족하다. 매년 참가하는 사람 수만 줄었을 뿐이지 지금도 행사는 여 축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어찌 보면 동기생 모두가 목을 매는 행사인지도 모른다. 나들이를 위해 며칠 아니 몇 달 전부터 체력보강을 한다. 웬만한 체력으로는 나들이를 무사히 치를 수 없기 때문이다.
4) 나들이 날 꼭두새벽에 관광버스에 오른다. 밥이며, 떡이며, 과일이 관광버스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도 남는다.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이 술이다. 소주에 맥주에 막걸리까지 동원된다. 사정이 좋은 해는 양주까지 곁들어진다. 그 많은 것을 어찌 다 처리할까 걱정하지만 돌아올 때쯤에는 거의 다 동이 난다. 사람의 뱃 속 크기는 얼마 만일까 궁금해진다.
5) 관광버스가 출발 시동을 걸고 바퀴가 움직이자 아이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회장은 술병을, 총무는 술안주를 들고 술잔을 건넨다. 술잔은 바꾸지 않고 하나로 돌아간다. 다른 사람의 침이 묻든, 병이 옮든 개의치 않는다. 따라 준 술을 한 방울 남김없이 비워야 다음 사람에게로 술잔이 넘어간다. 술을 피하려 해 보지만 버스 안이니 도망갈 곳도 없다. 그렇게 술잔이 한 순배 돌고 나면 술 따르기 바통이 넘어간다. 전 회장, 전 전 회장 등으로 몇 순배 돌고 나면 너네 없이 정신이 알딸딸하고 얼굴은 불콰해지며 기분은 최고조에 달한다. 그때부터 춤판이 벌어진다. 차 통로는 발 디딜 틈 없이 복작거린다. 엉덩이에 엉덩이가 부딪히고, 젖가슴 위에 젖가슴이 포개어진 채 흔들어댄다. 운전기사도 더 격하고 신나는 음악을 틀어 광란의 몸짓에 힘을 보탠다. 차 바퀴가 구르는 이상은 뛴다. 휴게소에서는 쉬는가 싶지만, 그 시간마저도 아까워 화장실 갔다 오기가 바쁘게 주차장 마당에서 또 한숨베 뛰고 올라온다. 그랬는데 영원할 것 같았던 동기들의 체력도 세월 앞에는 버틸 수 없는가.
6) 올해도 동기들은 어김없이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다. 자리가 듬성듬성 여기저기 비어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리가 모자라 보조 좌석까지 채우지 않았던가. 해가 갈수록 빈자리가 늘어갔다. 아침밥을 먹고 회장이 술병을 들고 권하지만 너도나도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회장도 예전처럼 술잔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이미 건강을 염려하는 나이가 되었다. 밥 먹기 바쁘게 뛰던 체력은 어디로 갔는지 조용하다. 술도 먹지 않았으니 맨정신으로 뛰기가 좀 머쓱하리라.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소곤소곤 정담을 나누는 이, 의자에 기대어 잠을 청하는 이, 버스 안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있는 것이 영 어색했다. 참다못한 몇몇이 옛날 분위기가 그리워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7) 점심시간,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에 들어갔다.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져 있었다. 회를 비롯한 해산물이 술을 불렀다. 하지만 상에 올려진 술병은 뚜껑도 열리지않은 채 괄시받고 있었다. 너도나도 밥그릇에만 열심히 손이 갔다. 점심을 마친 이들이 누가 빨리 나오라고 재촉이라도 하는 듯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이것 또한 전과 다른 풍경이었다. 점심에 반주를 곁들이다 보면 술에 취해 기분에 취해 자리를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음 일정을 다그치지만 벌어진 술판이 끝나지 않아 일정에 차질을 초래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었다. 마시지않은 술병을 반납하기 위해 주섬주섬 챙기던 총무가 한마디 던졌다. “다 됐다, 다 됐어. 빨리도 일어나네.” 무슨 말인가. 서로 쳐다보며 씁쓸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8) 나들이하면 뛰기가 전부였던 동기들이었다. 펄펄 날던 힘이 소진되어 가고 있다. ‘뛴다’라는 단어가 점점 더 그리워지리라.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숨 죽은 초등 동기회 나들이 버스 안의 풍경에 세월의 무상함이 묻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