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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창작 10계명 ②> 묘사와 진술, 경(景)과 정(情), 시의 구조를 생각하라! / 권갑하 시인
<어떻게 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을까?> 두 번째 강의 시간이다.
지난번 수업, 시 이미지화에 대한 복습
같은 대상이나 정황에 처하지만 시를 발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백수 정완영 선생은 생전에 박재삼 선생을 일러 <시가 오는 길목에서 시를 낚아채는 재주를 가진 시인>이라고 칭찬하셨다.
좋은 시의 발견이나 시상 포착을 위해서는 사물이나 대상, 상황을 시적으로 보고 해석하는 감각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좋은 시를 많이 접해야 한다.
북두칠성 / 김명수(1945~ )
먼 길 떠나시던
아버님 발자국이 보인다
어두운 밤 홀로 흰 두루막자락 날리시며
검은 산 넘어 넘어
먼 길 가시던 날
어머님이 감추시던
눈물 어려 몇 방울
나 이젠 나이 들어 어린 딸 거느리고
여름 저녁 한때 언덕에 서면
만주땅 어느 곳에 잠들어 계실
아버님 모습....
풀벌레들 정적 더하던
고향 옛집에서
철모르던 우리 남매 잠재워 놓고
두만강
된서리 묻어 온 두루마리
남몰래 읽으시던 우리 어머니
촛불에도 떨리시던
당신의 눈물 모두 어려 보인다
북두칠성 하면 어떤 시상이 떠오르나요? 사람마다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보고 들은 견문이 다르니 대상을 보는 관점도 다르겠죠. 김명수 시인은 북두칠성 별자리를 보고 일제강점기 만주를 떠돌던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북두칠성의 별자리가 마치 아버지가 만주를 떠돌며 활동했던 거점처럼 보였던 것이죠. 이미지가 아주 선명합니다. 이러한 이미지를 어머니가 삶 속에서 겪은 아픔과 연결하면서 시는 감동을 확보합니다.
책의 등 / 고영민(1968~ )
책꽂이에 책들이 꽂혀 있다
빽빽이 등을 보인 채 돌아서 있다
등뼈가 보인다
등을 보여주는 것은
읽을거리가 있다
아버지가 그랬고
어머니가 그랬다
절교를 선언하고 뛰어가던 애인이,
한 시대와 역사가 그랬다
등을 보이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다
잠깐 다른 곳을 보는 것이다
옷을 갈아입는 네가
부끄러울까봐
멋쩍게 돌아서주는 것이다
이 시 또한 상상과 발견이라는 측면에서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작품이다. 책꽂이에 책의 등을 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책의 등에서 시를 발견한 사람은 고영민 시인뿐이다. 책장에서 본 책의 등을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 애인, 역사의 등으로 상상과 사유를 확장해 나간 뒤 등에 대한 시인만의 의미를 제시해 독자의 공감과 감동을 견인하고 있다.
책탑 / 권갑하
읽지 않은 책들을 차곡차곡 쌓는다
때론 누런 봉투도 뜯지 않은 그대로
고고한 순수를 꿈꾼
몽상의 시인*처럼
탑을 쌓기에 적합한 사각의 책, 책들
시름 던 영혼들의 안치된 사리함 같은
속세를 떠나는 것만이
도피는 아닌 것을
지향 물씬 풍기는 높고 낮은 책탑들
시주한 금액과 이름, 발신처도 선명한
그 언제 무너질지 모를
상아탑을 쌓는다
*몽상의 시인 ; 19세기 프랑스 시인 A. 드 비니(Alfred de Vigny), 예술지상주의에 빠졌던 인물, 관념적인 성향을 비판적으로 지적하는 용어로 통용된다.
문예활동을 하다 보니 어떤 날은 여러 권의 책들이 집으로 배달됩니다. 그러다 보니 방안 구석구석 책을 쌓아놓게 되는데 그게 시인에게는 탑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떤 날은 쌓아놓은 책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 시는 그런 현실 상황과 그로 인한 깨달음을 담은 작품이다.
나희덕 시인이 <못 위의 잠> 또한 시상 포착의 감각을 보여준다. 여러분은 이 시 제목에서 어떤 장면이 연상되나요?
못 위의 잠 / 나희덕(1966~ )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 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하나, 그 위의 잠
처마 밑에 지은 제비집이 새끼를 낳고 너무 좁아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제비집 옆에 박힌 못에 앉아 졸고 있는 아비 제비를 본 것이 이 시의 시상 포착의 순간입니다. 이를 통해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아버지의 삶, 나아가 서민들의 힘든 삶을 오롯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이렇게 시상을 포착하고, 또 시를 발견하게 되면 시로 얼개를 짜는 형상화는 그리 어렵지 않게 된다. 그러기에 일상의 장면 속에서 시를 발견하는 감각을 키우는 것이 시 창작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런 감각을 바탕으로 좋은 시 창작 10계명, 그 두 번째 주제인 <묘사와 진술, 경과 정의 조화! 시의 구조를 생각하라>로 들어갑니다.
실존주의 대표 철학자 하이데거(1889~1976)는 ‘시는 언어의 건축물’이라고 했다.
시의 구조, 시의 전개 방식을 이해하게 되면 시적 형상화도 쉬워집니다. 오늘날 해체 시, 혼종 시의 등장으로 시의 구조나 전개 방식을 이해하는 게 무척 혼란스럽지만 기본적인 시의 구조에는 변함이 없다.
시는 외면 풍경인 경(景)과 내면 풍경인 정(情)의 만남이며, 대상과 의미, 묘사와 진술의 어울림의 예술이다. 어떤 대상이나 상황을 비유를 통해 의미를 창출해 읽는 이에게 지적 정서적 자극을 주는 방식이다. 성경을 비롯한 좋은 글들이 이런 비유적 틀을 갖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조찬 / 정지용(1902~1950)
해ㅅ살 피어 / 이윽한 후,
머흘머흘 / 골을 옮기는 구름.
길경 꽃봉오리 / 흔들려 씻기우고.
차돌부리 / 촉 촉 죽순 돋듯.
물소리에 / 이가 시리다.
앉음새 갈히여 / 양지 쪽에 쪼그리고,
서러운 새 되어 / 흰 밥알을 쫏다.
*이윽한 : 시간이 지난, *길경 : 도라지
2연까지는 자연 풍경을 묘사한다.
7,8연에서는 쪼그리고 아침을 먹는 시적 화자인 새의 서러운 감정을 담아낸다.
동양 서정시의 오랜 창작의 원리인 선경후정(先景後情)의 시상 전개 방식이다.
물론 묘사 중심의 <이미지 시>가 있다면 생각을 풀어내는 진술 중심의 <관념시>도 있다. 일괄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대상을 통해 생각을 표출하는 전개 방식이 일반적이다. 시가 묘사로 시작해 진술로 끝난다는 말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경(景)에 해당하는 대상은 ‘객관적 상관물’로 구체적 관찰과 감각적 묘사가 중요하다. 정(情)의 진술은 대상물을 관조해 느낌, 깨달음을 의미화하고 승화, 반전을 통해 독백 환기하는 구조를 띤다.
시가 대상에 대한 감정을 직접 발화하지 않고 비유를 통해 이미지로 간접화하는 방식이다.
우리 자유시와 시조, 그리고 일본의 하이쿠 작품
시가 짧아지면 이러한 시의 구조, 뼈대는 더욱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이 점을 자유시와 시조, 하이쿠 작품을 예로 들어 보자.
<자유시>
탁본(拓本) / 서대선
네
위로
나를 포개어 보는...(1)
먹물에 흠씬 젖어
네 위에 엎어져 보는...(2)
팔만대장경
혹은
월인천강지곡 같은
사람...(3)
*서대선, 2009년 시집 <천 년 후에 읽고 싶은 편지>로 활동
이 시는 탁본의 과정을 마치 사랑의 행위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3단계의 의미 구분이 가능하다. (1)(2)는 경, 1차원적인 상황 제시로 묘사. (3)은 정, 직유법을 활용해 너를 팔만대장경 혹은 월인천강지곡 같은 사람으로 의미화하는 진술, 즉 정의 세계다.
<자유시>
옛 마을을 지나며 / 김남주(1946~1994)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a)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b)
묘사와 진술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매우 짧은 시다. ‘홍시 하나(a)’까지가 경에 해당한다면 나머지 (b)는 시인의 생각을 담아낸 정, 즉 진술에 해당한다.
<시조>
꿈을 꾸나 봐요 / 정완영(1919~2016)
내가 사는 석촌 호수
밤이 자꾸 깊어 가면(1)
불빛도 물속에 들어가
잠자리를 본답니다
가끔은 흔들립니다
아마 꿈을 꾸나 봐요(2)
석촌 호수 풍경 묘사를 통해 불빛이 물속에서 잠자리를 본다거나 꿈을 꾸는 것으로 상상하는 시인의 생각을 진술하는 구조입니다.
우리의 시조와 같은 일본의 정형시 하이쿠 시적 구조, 전개 방식은 어떨까?
한적함이여
바위로 스며드는
매미의 소리
-바쇼-
여름 소나기
잉어 머리를 때리는
빗방울
-시키-
풍성하고 고운
어둠이 감싸도다
반딧불 등롱
-카토 미나코-
꽃잎 하나가 떨어지네
어, 다시 올라가네
나비였네!
-모라다케-
우리 시조와 중국 한시, 일본 하이쿠 비교
하이쿠는 5/7/5 음절로 구성되는 정형시다. 위 시도 3개의 의미 단락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하이쿠도 우리 시조처럼 3개 의미 덩어리가 결합된 구조 속에서 우리 시조의 종장에 있는 반전의 미학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이쿠는 무척 짧은 시지만 이러한 반전 구조로 인해 시가 힘을 발휘한다. 하이쿠 작품을 통해서도 시인의 느낌이나 깨달음을 드러내는 진술이 시의 구조에서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가를 확인할 수 있다.
중국의 한시가 5행(5연) 또는 7행(7연)의 시라면 우리 시조는 3행(3장)의 시이며, 일본의 하이쿠는 1행의 세 마디 시다.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가면서 어떤 영향 때문인지 모르지만 5(7)행에서 → 3행(3장) → 1행으로 짧아졌음을 알 수 있다.
시의 외형은 짧아져도 시의 구조, 전개 방식은 시에서 중요한 요소인 반전의 장치가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형식 문제와 별개로 시조에는 인간사의 희로애락이 담기지만 하이쿠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숨결이 감지되지 않는다. 하이쿠는 자연에 대한 묘사, 사계절의 변화를 중시한다.
시는 경의 묘사를 거쳐 정의 진술로 깊어진다. 진술의 힘은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묘사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묘사가 언어를 회화적 방법으로 가시화한다면, 진술은 의미 있는 느낌이나 깨달음을 담은 독백 양상이다. 묘사를 가시화시켜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비유다.
그러고 보면 비유적 시상 전개 구사가 시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할 수 있다. 10계명의 첫 번째 주제에서 은유적 상상력을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묘사나 진술만으로도 시가 될 수 있지만 깊은 감동의 창출은 쉽지 않다.
묘사로만 이루어진 시 감상
그릇6 / 오세영(1942~ )
그릇에 담길 때
물은 비로소 물이 된다
존재(存在)가 된다
잘잘 끓는 한 주발의 물
고독(孤獨)과 분별(分別)의 울안에서
정밀히 다져지는 질서(秩序)
그것은 이름이다
하나의 아픔이 되기 위하여
인간은 스스로를 속박하고
지어미는 지아비에게
빈 잔(盞)에 차를 따른다
엎지르지 마라
엎질러진 물은
불이다
이름 없는 욕망이다
욕망을 다스리는 영혼(靈魂)의
형식(形式)이여, 그릇이여
오세영의 그릇6은 진술 중심의 시다. 이렇게 진술로 한편의 좋은 시를 성공시키려면, 정신세계나 신념이 새로운 상상력을 토대로 해야 가능하다. 그만큼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묘사에서도 새로운 표현이 생명력이지만 진술의 생명력도 남들이 보고 느끼지 못한 새롭고 신선한 사유가 필수적이다.
묵화(墨畵) / 김종삼(1921~1984)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한 낮 / 이호우(1912~1970)
매미소리 뚝 끊치고
사계화(四季花) 주룩 진다
하늘엔 구름 한 자락
조을 듯 머무르고
양은(洋銀) 빛 볕살이 아리는
추녀 끝 빈 거미줄
물먹는 소와 할머니가 일체를 이루는 김종삼 시인의 묵화는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한 폭의 그림과 같다. 묘사에서 중요한 것이 언어로 어떻게 가시화하는 점과 표현에서의 감정의 절제인데 이 작품은 이 둘을 잘 구현하고 있다.
이호우의 시조 한 낮은 시적 묘사로만 이루어진 산뜻한 이미지의 시다. 그러나 묘사 중심의 시일 경우 자칫 의미 창출이 약해 독자에게 전해지는 감동 또한 약할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묘사와 진술, 경과 정의 조화를 어떻게 이뤄 낼 것인가?
감자떡 / 이상국(1946~ )
하지가 지나면 성한 감자는 장에 나가고
다치고 못난 것들은 독에 들어가
가을까지 몸을 썩혔다
헌 옷 벗듯 껍질을 벗고
물에 수십 번 육신을 씻고 나서야
그들은 분보다 더 고운 가루가 되는데
이를테면 그것은 흙의 영혼 같은 것인데
강선리 늙은 형수님은
아직도 시어머니 제삿날
그걸로 떡을 쪄서 우리를 먹이신다
이상국 시인의 감자떡은 앞부분에서 감자가루가 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런 다음 ‘이를테면 그것은 흙의 영혼 같은 것인데’라는 독백 같은 진술을 던져놓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의 사유가 담긴 이 한 줄의 진술은 앞뒤의 상황 묘사와 연결되면서 강한 여운을 남깁니다. 경과 정, 묘사와 진술의 절묘한 결합이 주는 효과다.
마음의 수수밭 / 천양희(1942~ )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 잎 몇 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개밥바라기 : 저녁 무렵 서쪽 하늘에 보이는 금성을 이르는 말
천양희 시인의 마음의 수수밭은 묘사와 진술이 조화롭게 융합된 작품이다. 앞에서 묘사를 가시화 시켜주는 효과적인 방법이 비유라고 했는데 제목부터 은유적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이 작품은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거나 산을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 알았다 와 같은 잠언적 진술을 통해 시가 깊어짐을 알 수 있다.
다음 문장의 첫 부분을 한 행의 끝의 글처럼 넣은 기법은 행간의 장력을 견인하는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세밀한 관찰을 통해 그림을 그리듯이 가시화하는 것이 묘사라면 관조를 통해 느낌 또는 깨달음을 설득이나 고백 조로 토로하는 것이 진술이다. 묘사는 객관적, 주관적 묘사로 나눌 수 있는데, 김종삼의 <묵화> 같은 작품이 객관적 묘사의 유형이다.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처럼 절제된 표현이 묘사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주관적 묘사 시 감상
처서(處暑) 지나고 / 김춘수(1922~2004)
처서 지나고
저녁에 가랑비가 내린다.
태산목泰山木 커다란 나뭇잎이 젖는다.
멀리 갔다가 혼자서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한 번 멎었다가 가랑비는
한밤에 또 내린다.
태산목 커다란 나뭇잎이
새로 한 번 젖는다.
새벽녘에는 할 수 없이
귀뚜라미 무릎도 젖는다.
주관적 묘사는 김춘수의 <처서 지나고>에서 “멀리 갔다가 혼자서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한 번 멎었다가 가랑비는 한밤에 또 내린다.”처럼 김춘수 시인이 아니면 그려내기 어려운 화자의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세계를 묘사하는 경우다.
진술의 종류
진술에는 고백적, 권유적, 해석적 진술로 나뉘는데, 고백적 진술은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로 시작하는 유치환의 <바위>를 예로 들 수 있다.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로 토로하는 김수영의 <눈>은 권유적 진술 형태다.
서정주의 <무등을 보며>에 나오는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명구는 해석적 진술이라 하겠다.
좋은 시는 묘사와 진술이 조화롭게 어울린 구조의 시다. 좋은 시가 되기 위해서는 감각적인 대상, 상황 묘사에 이어 관조를 통한 느낌, 깨달음을 주는 지적 정서적 충격을 주는 진술을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관건이다. 그런 점에 잘 부합하는 시가 1981년 중앙일보 신춘 당선작인 곽재구의 <사평역에서>이다.
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시골 간이역을 배경으로 막차를 기다리며 느끼는 삶의 쓸쓸함과 그에 대한 연민을 그린 이 시는 다양한 감각적 이미지를 잘 활용하고 있다. 손에 잡힐 듯 눈에 그려질 듯한 사평역의 풍경을 묘사하고 여기에 화자의 심정을 담은 적절한 진술을 통해 아름다우면서도 조금은 애상적인 정서와 분위기를 표출하고 있다.
반가사유상 / 최찬상(1960~ )
면벽한 자세만
철로 남기고
그는 어디 가고 없다
어떤 것은 자세만으로도
생각이므로
그는 그 안에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겠다
한 자세로
녹이 슬었으므로
천 갈래 만 갈래로 흘러내린 생각이
이제, 어디 가닿는 데가 없어도
반짝이겠다
이 시는 2014년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심사위원은 전체적으로 잘 짜여져 힘의 낭비가 없었다면서 외형의 형상을 통해 내면에 대한 구도적 성찰이 돋보인다고 평했다.
이는 묘사를 통해 정, 즉 화자의 성찰적 진술이 돋보인다는 말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심사위원은 또 논어에 나오는 ‘회사후소(繪事後素)’ “본질이 있은 연후에 꾸밈이 있어야 한다"라는 의미를 깊게 생각하게 해주는 시라고 호평했다. 이 또한 정, 즉 시인의 느낌이나 깨달음의 진술이 묘사보다 더 중요함을 강조한 사자성어라 하겠다.
다시 강조하지만 시는 생각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대상이나 상황을 가시화한 뒤 이를 토대로 느낌이나 깨달음을 담아내는 구조다.
그런 만큼, 시상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 시의 구조를 어떻게 짤 것인가에 대한 답은 다름 아닌 묘사와 진술의 조화로운 결합, 어울림에 있다.
따라서 시를 구상할 때나 퇴고할 때는 이 시가 지금 어떤 구조를 취하고 있는지, 묘사와 진술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를 짚어봐야 한다.
그렇다고 어떤 구체적인 형식을 염두에 둘 경우 자칫 상투성에 빠질 수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이상, 좋은 시 창작 10계명, 그 두 번째 주제인 <묘사와 진술, 경과 정의 조화! 시의 구조를 생각하라>는 여기서 마친다.
<출처 : 권갑하 감성TV. 좋은 시 창작 10계명② <묘사와 진술, 경과 정의 조화! 시의 구조를 생각하라> 권갑하 시인, 수필가, 문학평론가
https://youtu.be/lrR-TQ1xG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