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8시에 방송하는 '허영만의 백반기행' 에 대선후보들이 나왔다.
을지로 골목 식당에서 허영만 화백과 만난 이재명 후보는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지난했던
과거를 이야기했다.
이 후보의 나이를 보니 1964년생이다.
6.25전쟁 직후에 태어난 사람들에 비하면 '그래도 좀 나은 편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 시절에는 살아가는 게 거기서 거기였다.
부유했던 가정이 몇이나 됐을까.
척박한 섬, 제주도 여인들의 삶은 머슴이나 다름 없었다.
남자들은 공부라도 시켰지만 여자들은 공부는커녕 잠자는 시간 외에는 손이 쉴 틈이 없었다.
10살 되면 허벅 지고 물 길어 오고 11살 되면 산에 가서 솔잎을 긁어 왔다.
오뉴월 뙤약볕 아래 검질(김) 매는 건 기본이며 소 달구지 없는 집에선 보릿단을 등에 짊어지
고 몇 리를 걸어 옮겨 왔다.
보릿가시가 살을 파고들고 땀방울이 눈을 가려도 장마 전에 보리 수확을 마치려면 서둘러야 했다.
비료 푸대 들고 고구마 이삭을 주우러 다니고 삼마를 캐내어 팔아 학용품 사고 인동초를 따다
한약방에 팔기도 했다.
남자애들은 지네를 잡아 팔기도 했지만 그것만은 무섭고 징그러워 도저히 못 했다.
지네가 아무리 값을 잘 쳐 준다해도.
쌀밥은 운동회와 소풍날에나 반지기밥(쌀과 보리가 반반)을 먹을 수 있었고 늘 먹는 건 시커먼
깡보리밥에 자리젓갈이나 마늘지가 전부였다.
영양가 있는 음식을 못 먹으니 얼굴엔 허옇게 버짐이 피어 나기도 했다.
할머니가 할망당에 간다며 맷밥을 했는데 솥에 달라붙은 밥알이 얼마나 맛 있던지.....
요즘은 건강식이라고 일부러 보리와 잡곡을 섞어 먹지만 그시절 먹었던 곤밥(쌀밥)은 냄새만
맡아도 구수했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가 바다여서 물때가 되면 소라, 보말, 해초를 캐다가 호화 반찬을 해 먹기도
했다.
그 시절엔 가난이 뭔지도 고생이 뭔지도 정확히 몰랐다.
다 그렇게 살아가는가 보다 했다.
그렇다고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궁핍했지만 자연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자연이 준
곡식으로 은혜로움도 배우며 겸허함을 익혔다.
친구들은 뭍으로 나가 공순이도 되고 공돌이도 됐지만 누구나 자신의 삶을 비참하다고 여기지
않았고 그저 순리대로 살았다.
내세울 것은 없었지만 부끄러워 하지도 않았고 주눅들지도 않았다.
가난은 자랑거리도 아니지만 삶을 위축시키는 悪도 아니었다.
열대여섯 살에 물질을 배워 해녀가 된 친구들도 시집을 가서 소박하게 살더니 어느덧 머리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나이가 됐다.
이재명 후보는 아버지가 돈을 대주어 사시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공무원도 했고 경찰도 했고 광부들이 일하는 광산에서 사무를 봤다면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은 아닌 것 같다.
그 시대의 우리 아버지들은 일자무식도 많았다.
흙수저나 금수저나 다 자기 하기 나름이다.
두 대선 후보는 대통령이 되면 '편 가르지 않기' 와 '서로 미워하지 말자' 를 내세웠다.
허 화백은 두 후보에게 직접 그린 캐리커쳐를 선물했는데 이 후보의 가느스름한 눈과
윤 후보의 커다란 덩치를 절묘하게 표현한 그림을 보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방송 말미에 '뭐니뭐니해도 등 따시고 배 부른 게 최고의 삶' 이라는 멘트가 귀에 와 닿았다.
'그래! 그게 최고의 행복이여'
그래서 난 늘 행복하다.
* 두 후보를 비교, 분석하는 것은 조심스런 부분이라 각자 인터넷 조회나 재방송을 보시면
알 수 있으리라 봅니다.
첫댓글 그당시 도회지의 삶은 제주도 보다는 아무래도 나았겠죠.
산이나 바다에서 나는 먹을거리가 없으니 무엇이든지 사 먹어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하니까 그 삶도 만만치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많이 먹지는 못 햇 지만 그래도 그때 그시절이 좋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먹는것만 해결되면 모든것이 만사형통이었으니까요.쌀 뒤주에 쌀만 있어도
저절로 행복해 지던 시절이였으니까요.ㅎㅎ
그당시 잔칫날 신부 들러리 가는 사람한테
꼭 부탁하는 말이 있었죠.
"독세기(계란) 싸 오라"
얼마나 계란 먹기가 힘들었으면...
어릴 땐 구경도 못했어요.
계란이 어떻게 생겼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