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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8일 오늘의 역사
2022년 폭염으로 스페인 대형 산불 열차운행 중단 승객 탈출 소동, 북아프리카 알제리 북부 14개 지역을 강타한 산불로 최소 26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열림, 남북한 선수단 공동입장, 여자농구와 카누 조정 등 6개 종목 단일팀 구성
2018년 크리켓 국가대표 출신 임란 칸 파키스탄 총리 취임
2016년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박형규 목사 세상 떠남(94세)
2014년 박인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LPGA챔피언십 우승
2009년 미국 명(名)칼럼니스트 로버트 노박 타계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칼럼니스트 로버트 노박(Novak·78)이 2009년 8월 18일 워싱턴 자택에서 지병으로 타계했다.
노박은 2003년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의 도덕성에 엄청난 타격을 입힌 '리크(leak·누설)게이트'의 주인공이다. 리크게이트는 부시 행정부 고위관리가 중앙정보국(CIA) 직원의 신분을 노박에게 누설해 미 연방법을 위반한 사건. 그해 7월 노박은 뉴욕타임스(NYT) 칼럼을 통해 "조지프 윌슨 전(前) 이라크 대사의 부인 발레리 플레임은 CIA 비밀요원"이라고 폭로했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행정부 관리가 누설할 리가 없다"고 변명했으나 나중에 사실로 밝혀지면서 궁지에 몰렸었다.
노박은 1963년 5월 보도를 곁들인 첫 칼럼을 쓴 이후 지금까지 NYT 등 여러 신문에 46년간 칼럼을 써왔다. NYT뿐 아니라 AP통신,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자를 지냈고 CNN 방송의 토크쇼 '크로스파이어(Crossfire)'의 진행자로도 활동했다.
노박은 1952~53년 6·25 전쟁에서 미군 대위로 참전했었다.
2009년 김대중 전(前) 대통령 서거
김대중(金大中·85) 전 대통령이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서울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폐렴 후유증으로 인한 다발성 장기손상으로 서거했다. 지난달 13일 미열과 감기증세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 이후 36일 만이다. 김 전 대통령은 입원 직후 폐렴 진단을 받았지만 증세가 호전돼 22일에는 일반 병실로 옮기기도 했지만 다음 날 폐색전증이 발병해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 치료를 받았고 29일엔 기관절개 수술도 받았다.
박창일 연세의료원장은 서거 직후 기자회견에서 “신체 장기들이 더 이상 회복 불능 상태가 되어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고 고인을 조용히 보내드렸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의 측근인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부인 이희호 여사와 김홍일·홍업·홍걸 삼형제와 며느리, 가족과 측근들이 임종을 지켰다”고 발표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큰 정치지도자를 잃었다. 김 전 대통령의 생전 뜻이 남북화해와 국민통합으로 이어지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여야 정치권도 “대한민국의 위대한 지도자 한 분을 잃었다”(한나라당) “이 시대의 위대한 스승을 잃었다. 어버이를 잃은 것처럼 황망하고 허전하다”(민주당)며 애도했다.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지난 50년간 우리 정치의 한 축을 담당했던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영남 대 호남’의 경쟁과 대립의 정치구도에도 변화가 일 것으로 전망되었다.
민주당은 김 전 대통령이 자리했던 정치적 구심점의 부재 상태에서 ‘DJ 이후’에 대한 새로운 진로 모색이 불가피하게 됐고, 여권(與圈)도 오랜 세월 DJ를 상대로 삼아 왔던 대야(對野) 노선에 변화를 요구받게 됐다. 김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리를 중심으로 전개돼 민주화와 지역정치라는 공과(功過)를 함께 남긴 ‘3김(金) 시대’도 마침표를 찍게 됐다.
1924년(호적상 1925년) 전라남도 신안에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제15대 대통령(1998년 2월~2003년 2월)을 지냈다. 1971년 이후 모두 4차례 대선에 도전한 끝에 1997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2000년 6월 15일에는 평양에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가졌고, 그해 12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
전 대통령의 장례는 6일간 ‘국장(國葬)’으로 치러졌으며 23일 영결식이 거행됐다. 장지는 서울 동작동 국립 서울현충원으로, 대한민국 건국 이후 국장은 1979년 10월 재임 중 서거한 박정희 전 대통령 장례가 유일했다. 따라서 김 전 대통령의 국장은 역대 두 번째가 되고 전직 대통령으론 첫 국장이다. .
정부는 최규하·노무현 전 대통령 등 전직 대통령의 장례가 국민장으로 치러진 전례를 들어 국민장을 권유했지만, 김 전 대통령측과 민주당은 국장을 요구했으며 최종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6일 국장’ 안을 결정했다.
2007년 ‘한국 춤의 역사’ ‘조선의 마지막 무동’ 김천흥(98세) 세상 떠남
2005년 아시아나항공, 조종사 파업 타결 이후 정상화 첫날 국내선 공짜 운항
아시아나 항공. 아시아나항공이 국내선 운항 재개 기념으로 18일 하루 동안 공짜로 비행기를 탈 수 있는 행사를 열기로 하자 대부분의 해당 노선 예약이 불과 몇 시간 만에 매진됐다.
아시아나항공은 16일 오전 “불편을 겪은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하루 동안 무료탑승 서비스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이 사실이 인터넷 등을 통해 알려지자마자 예약이 폭주했고 오후 3시쯤엔 해당 노선 전체에서 표가 동이 났다. ‘공짜 비행기’ 대상은 제주 출발·도착 항공편을 제외한 국내선 전 노선이었다.
아시아나항공은 또 19일부터 21일까지는 같은 노선 이용객들에게 운임의 30%를 깎아줬다. 이미 표를 산 승객도 발권처에서 할인금액만큼 환불 받을 수 있도록 했다.
2005년 중국-러시아, 사상 첫 합동군사훈련
2005년 남북농업협력위원회 제1차회의(개성 2005.8.18~19)
2004년 한국축구 2004아테네올림픽서 56년만에 8강 진출
2004년 8월 18일 새벽 그리스 테살로니키 카프탄조글리오 스타디움에서 열린 올림픽 축구 A조예선 말리전은 조재진·김동진이 공동 주연한 드라마였다. 전반 7분, 24분, 후반 10분 은디아예에게 잇달아 골을 내줘 0―3으로 뒤진 상황. 탈락이 걱정되는 상황에서 조재진은 후반 12분, 14분 김동진의 크로스를 받아 연속 헤딩골을 터뜨렸다. 말리 탐부라의 자책골까지 얻어 3대3 동점을 만든 한국의 추격에 대해 AP 등 외신은 ‘놀랍다(amazing, surprising)’는 반응을 보였다.
조재진은 이날 활약으로 이회택-차범근-최순호-황선홍-최용수로 이어지는 한국축구 스트라이커 계보에 이름을 올려놓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조재진은 혼자가 아니었다. 김동진이라는 든든한 동료가 그의 뒤에 있었다. ‘골넣는 수비수’ 김동진은 첫 경기 그리스전에서 선제골을 뽑아낸 데 이어 말리전에서 두 차례 연속 그림 같은 크로스를 날려 조재진에게 기회를 만들어 줬다. 조재진은 “나야 주워먹은 것밖에 더 있느냐”고 말해 김동진에게 공을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듯 2002월드컵 4강의 저력을 보여준 한국 올림픽축구팀은 22일 새벽 열린 2004아테네올림픽 8강전에서 파라과이에 2대3으로 패하면서 4강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2004년 ‘영화음악의 거장’ 엘머 번스타인 별세
‘십계’ ‘황야의 7인’의 배경 음악을 작곡한 ‘영화음악의 거장’ 엘머 번스타인이 82세를 일기로 2004년 8월 18일 별세했다. ‘피아노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라 아론 코플랜드 밑에서 작곡을 배운 번스타인이 할리우드에 처음 진출한 것은 1950년대 초. 그는 ‘토요일의 영웅’을 시작으로 영화음악 작곡을 시작했고 이후 70년에 걸쳐 약 200편의 영화와 80편의 TV 드라마의 음악을 작곡했다.
대표작으로 ‘황야의 7인’ ‘십계’ ‘고스트버스터스’ ‘나의 왼발’ ‘흐르는 강물처럼’ ‘갱스 오브 뉴욕’ 등이 있다. 특히 서부 영화 ‘황야의 7인’을 위해 만든 말발굽 소리 같은 행진곡은 이후 ‘말보로’ 담배 광고에 삽입돼 더욱 유명해졌다.
할리우드에 매카시즘이 불어닥쳤을 때 좌파적 사상에 동조적이었다는 이유로 거대 스튜디오에서 외면당해 저예산 영화를 전전하기도 했다. 그러다 역설적으로 ‘안티 공산주의자’였던 세실 B 드밀 감독이 건강이 악화된 빅터 영을 대신해 ‘십계’(1956)의 작곡자로 그를 고용하면서 다시 빛을 보게 됐다. 번스타인은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로 14번 올랐으며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1967년 ‘모던 밀리’ 주제음악으로 오스카상을 수상했고, 1964년 TV물 ‘대통령 만들기’로 에미상을 수상했다.
2003년 라이베리아, 정부-반군 평화협정 체결 - 내전 4년 만에 종료
2002년 북한 주민 21명, 어선을 타고 서해 공유상을 경유해 귀순
2002년 8월 18일 북한 주민 21명을 태운 북측 어선 ‘대두 8003호’가 서해 공해상을 경유해 귀순했다. 이들은 인천 옹진군 덕적면 울도 서쪽 17마일 영해상에서 어른 11명과 자녀 10명 등 21명을 태운 북한 어선이 순찰 중이던 해경 경비정 119호정에 의해 발견됐다.
해경의 현장 조사 결과, 이 선박의 선장은 순룡범(46)씨이며, 순씨의 아버지 순종식(70)씨와 부인 김미연(68)씨 일가족 13명, 순종식씨 사위 최동현(41)씨 일가족 4명, 기관장 리경성(33)씨의 친척 방희복(45)씨 일가족 3명 등이 타고 있었다. 선장에 의해 감금된 채 탈북한 기관장은 8월 21일 본인의 희망대로 북으로 송환됐다.
이들이 타고 온 배는 114지도국 소속으로 기관이 있는 20t급 목선이며, 배에는 가스버너와 기름버너 각 1개와 압력밥솥 1개 등 취사도구와 TV 1대, 쌀 5kg, 소금 8포대, 경유 650ℓ 등이 적재돼 있었다. 이들은 지난 8월 17일 평북 선천군 홍건도 포구에서 출발해 공해상을 우회해 들어왔다고 말했다. 선박을 통한 해상 탈북은 1997년 5월 12일 북한 주민 안선국(54)씨 일가 14명의 해상 탈북 이후 처음이었다. 1987년 2월에도 김만철씨가 일가족 10명을 배에 태우고 귀순해 온 적이 있었다.
2001년 필리핀 호텔 화재로 70명 사망
1999년 경남 고성군 마암면서 1억년전 유충화석 발견
1998년 김종필 제31대 국무총리 취임
1998년 콘택트 렌즈 발명한 체코의 발명가 오토 비흐테를 사망
1994년 종이 크로마토그래피를 개발한 영국의 싱 사망. 1952년 노벨화학상 수상
1990년 체신부, sbs 주파수를 `폴 VHF 6`으로 결정, 공보처에 통보
1990년 미국 심리학자 스키너 박사 세상 떠남
1989년 갈란 콜롬비아 대통령후보‧상원의원 마약밀매조직에게 피살
1985년 중국 하얼빈 부근에서 정원 초과한 페리호 전복 174명 사망 실종
1984년 가칭 신민주당 창당 발기대회
1983년 서울지법, 중국기 납치범 실형선고
1982년 이스라엘군, PLO의 베이루트 철수위해 점령지 철수 개시
1980년 이라크, 시리아대사관원에 추방령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1976년 8월 18일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에 있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 50~60명에게 도끼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은 이날 오전 10시 45분쯤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국제연합(UN)군측 제3초소 부근에서 일어났다.
미군 장교 2명과 사병 4명,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 등 11명이 시야를 가리고 있는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는 한국인 노무자 5명의 작업을 지휘․경호하던 중, 북한군 장교 2명과 20여 명의 사병이 나타나 "나뭇가지를 치지 말라"고 요구했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북한군 장교와 50~60명의 북한 병사들이 달려와 도끼․쇠꼬챙이․몽둥이 등을 휘두르며 폭행해 미군 장교 2명을 도끼로 살해하고 나머지 9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UN군 트럭 3대와 초소를 파괴하고 물러갔다.
사건 직후 주한미군과 한국군은 전투태세를 갖추었으며, 미국은 2개전투비행단과 제7함대 기동부대를 급파했다.
미국은 북한의 해명과 배상을 요구하는 한편, 8월 21일 새벽 7시 데프콘 2호 (전쟁돌입상태)하에서 문제의 미루나무 절단작업에 나섰다.
21일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UN군측에 사과문을 전달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고, 9월 1일부터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남과 북으로 분할경비하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는 9월 16일부터 효력을 발생했다.
1972년 남북회담용 직통전화 20회선 개통
1972년 온 나라 큰 비(-8.20) 수원 461.8mm 서울 452.4mm 529명 사망 또는 실종.
1971년 서울대 문리대 교수들, 대학자율화 등 요구
1971년 서울 중부지방 폭우 463명 사망 91명 실종, 이재민 47만 명 재산피해 267억원
1969년 육군 특수전사령부 창설
1966년 홍위병 100만명 집회
1966년 8월 18일,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경축 군중대회’가 열리고 있는 중국 베이징 천안문광장. 인민복 차림과 붉은 완장을 한 100만명 학생들의 함성이 광장을 뒤흔들었다. 단상에는 마오쩌둥(毛澤東)이 자리했고 학생들의 표정에는 흥분으로 가득했다.
소조(小組)로만 활동해 오던 홍위병(紅衛兵)들의 첫 대규모 세(勢) 과시였고 중국 전역을 광란과 파국으로 몰고간 문화대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3개월 전 칭화대 부속중에서 발원한 홍위병은 이후 중국 현대사를 파괴한 상징어였고 구타와 살인을 일삼아도 책임을 면할 수 있는 증명서였다.
마오쩌둥의 호응과 묵인으로 기세등등해진 홍위병들은 ‘네 가지 낡은 것(사구·四舊)’ 즉 구사상·구문화·구풍속·구습관을 파괴하는 데만 열심이었을 뿐, 속절없이 사회가 무너져 내리는 것에는 관심도 없었다. 부녀자들은 단발머리를 해야했고 치마를 입으면 곤욕을 치러야 했다. 외국과 관련있는 것은 무조건 공격대상이었다. 인민일보가 ‘실로 훌륭한 일’이라며 옹호하고 격려하는 가운데 유서깊은 문화재들이 파괴됐고 그 자리는 마오쩌둥의 초상화로 대체됐다. 반혁명분자로 몰린 사람들은 삭발을 당하거나 머리에 먹물 글씨가 씌어졌고 심지어는 인두로도 몸이 지져졌다. 광기의 시대였다
1955년 한국, 일본과 경제관계 단절
1950년 정부, 부산으로 이전
1949년 중앙선 죽령터널 열차사고
1949년 8월 18일 오후 6시25분경 서울발 안동행 중앙선 제505열차가 죽령터널 속에서 원인모를 사고로 정차했다. 이 사고로 승객 3백80여명 중 51명이 연기에 질식해 사망하고 64명은 중태에 빠졌다. 마침 선로감시반이 사고현장을 목격하고 긴급연락했으나 사고발생 2시간30분 만에 겨우 구조작업이 시작돼 인명피해가 크게 늘어났다.
사고원인은 제3번 객차 후미와 제4번 객차 머리부분 사이에 기관이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단양과 죽령 사이에 있는 이 터널은 그 길이가 6km나 돼 기차가 통과하는데 만 약15분이나 걸리는 남한 최장의 터널이다. 그런데 사고 이틀전인 8월 16일 죽령역에 공산 무장게릴라들이 나타나 안동발 제천행 열차 7량을 탈취하여 터널로 끌고 들어가 불태운 사건이 발생해 그 일대에 경찰이 수색전을 펼치고 있었다.
1948년 이승만 대통령 '대마도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는 성명 발표
1946년 국제학생연맹 창립총회, 프라하에서 열림
1945년 일본 괴뢰국 만주국 해체, 국왕 부의(溥儀) 소련 억류
1945년 만주국 해체
1940년 미국 캐나다 공동방위조약 성립
1940년 크라이슬러사(社)의 설립자 크라이슬러 사망
1940년 조각가 김복진 사망
한국 근대 조소예술의 길을 낸 최초의 조각가 정관 김복진이 1940년 8월 18일 3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조선 미술비평의 첫 스승, 토월회를 만든 연극인,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카프)을 창립한 사회주의 사상운동가였던 김복진은 1901년 충북 청원에서 태어났다. 19세때인 1920년 배재고를 중퇴하고 도일(渡日)했다. 동경 미술학교 조각과에 재학중인 1924년 일본 제전(帝殿)에 조각 `여인입상`이 입선하면서 이름을 날렸다.
재기발랄한 문학청년 김복진은 조각 공부 외에 동생 김기진, 박승희, 이서구 등과 함께 토월회를 창립, 무대장치를 맡는 등 신극작업을 펼쳤고 미술비평과 교육, 사회주의 운동 등을 함께 해나갔다. 미술학교 졸업과 동시에 카프를 창립해 강령과 규약을 작성한 것도, 금산사 미륵전 본존불상을 제작한 것도 그였다. 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 모교인 배재고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김복진의 이름이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요절한 탓도 있지만 그의 작품들이 6.25를 거치며 거의 소실돼 버렸고 더구나 조선공산당 활동으로 이름 석자가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좌익활동 경력으로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다 2001년에야 그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한 전시회가 처음 개최됐다.
1934년 독일 국민투표, 총통에 히틀러 선출
1930년 시인 신동엽 출생
1907년 제2인터내셔널 제7회대회 슈투트가르트대회 개최
1906년 의병장 최익현 등 9명 대마도로 끌려감
1902년 `일본도덕론`(1887)을 저술한 니시무라 시게키 사망
1850년 프랑스 작가 발자크 사망
현실주의 문학의 창시자요 고전소설의 방법을 정착시킨 작가로 널리 알려진 발자크가 1850년 8월 18일 사망했다. 발자크는 19세기 중반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넘어가는 세계 문학사조의 흐름에 위대한 이음표를 그은 작가였다.
17세 되던 해 가을부터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소르본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그의 야심은 문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졸업 직전에 대학을 중퇴, 바스티유 광장에 가까운 초라한 변두리 다락방에 틀어박혀 습작생활로 들어갔다. 그는 ‘올빼미당원’ 이후의 모든 소설을 작중인물의 재등장이라는 수법으로 연쇄하였으며, 전 작품에 대하여 ‘인간희극’이라는 종합적 제목을 붙였다. 이는 모두 70편 가량으로 등장인물이 2,000명에 이르며 대표작품으로는 ‘외제니 그랑데’(1883) ‘절대의 탐구’(1834) ‘고리오 영감’(1834∼35) ‘골짜기의 백합’ ‘농민’(1844) 등이 있다.
완성될 수 없었던 방대한 분량의 작품군인 그의 ‘인간희극’은 아직까지도 세계문학사에서 그 짝을 찾기 힘든 심오하고 위대한 업적이다. 정치적 입장은 반동적인 왕당파였지만 자신의 소설 속에는 근대시민사회의 새로운 주역으로 떠오른 부르조아의 속물적 삶을 생생하게 묘사, 후대 평론가 루카치로부터 ‘리얼리즘의 승리’로 평가받고 있다.
1750년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니오 살리에리 태어남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사망
1593(조선 선조 26) 논개 진주 남강에서 왜장 케야무라와 함께 빠져 죽음
논개(論介, 1574년 9월 3일 ~ 1593년) 또는 주논개(朱論介)는 조선 선조 시대의 열녀이다. 충 계내면 대곡리 출생으로 1574년 선비 주달문(朱達文)과 부인 밀양박朴氏) 사이에서 반가(班家양반)의 딸로 태어났다.
부친 주달문은 진사(進士)로 일찍이 슬하에 아들 주대룡을 두었으나 15세에 괴질로 요절하였고 이후 40세가 넘은 나이에서야 딸 논개를 보았다.
1578년 부친 주달문의 별세 후 숙부 주달무에 집에 의탁되었으나, 숙부가 벼 50석에 김부호(金富豪)의 집에 민며느리로 혼인시키려 하니 이를 피해 모녀는 경상도(慶尙道) 안의현의 친가에서 피신하였고, 이에 부호는 1579년 기소하여 모녀를 구금하였다.
이때, 장수 현감 충의공(忠毅公) 최경회(崔慶會)의 명판결로 모녀를 석방시키고 모녀는 현감의 관저에 의탁하게 되고 후일에 최경회가 성년이 된 논개를 후처로 맞아 들인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최경회가 전라 우도의 의병장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병사를 훈련할 때 논개는 이를 도우며 보필한다.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동행하였으나,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하자 논개는 왜장들이 진주 촉석루에서 연회를 벌이고 있을 때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유인하여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순절(殉節) 하였다.
1503년 교황 알렉산드르 6세 사망
1227년 징기스칸 사망
673(신라 문무왕 13) 태대각간 김유신 세상 떠남(음력 7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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