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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1일 오늘의 역사
2021년 역대급 가뭄에 고대 유적 대거 발견
연일 폭염으로 인해 가뭄이 지속하자 강바닥에 묵혀 있던 고대 유적이 세계 곳곳에서 발견됐다. 유럽 강과 저수지 바닥에서 7000년 전 스페인 유물과 로마 시대 네로황제의 석조다리까지 인류문화 유산이 연달아 나타났다.
스페인 서부 스페인 서부 카세레스주 발데카나스 저수지에서는 이달 초 수백개의 선사시대 돌기둥이 발견됐다. 스페인판 ‘스톤헨지’로 불리는 ‘과달페랄의 고인돌’로 불리는 유적으로 이베리아반도의 건조한 날씨로 인해 저수지 수위가 총량의 28%를 밑돌자 유적 전면이 노출됐다.
과달페랄의 고인돌은 약 7000년 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926년 독일 고고학자가 최초로 발견했으나, 1963년 프랑코 독재정권 치하에서 농촌 개발 프로젝트가 진행되자 인근에 댐이 건설되며 수몰됐다. 수몰된 아세레도 마을도 옛 모습을 드러냈다.
체코에선 강물이 메마를 때마다 이름을 새겼던 ‘기근석’이 모습을 나타냈다. 독일에서도 라인강이 흐르는 프랑크푸르트 남부 보름스와 레버쿠젠 인근 라인도르프 등지에서 기근석이 발견됐다.
이탈리아에서는 로마 티베르강에서는 네로 황제가 건설한 것으로 추정되는 다리 유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다리는 네로 황제가 강 건너편에 있는 자기 모친 아그리피나의 저택에 편하게 가려고 만든 것으로 전해졌다.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에서 고대마을의 유적이 나타났다. 롬바르디아 오글리오강에서는 청동기 시절 목재 건축물 토대가 나왔고 인근 코모호수 바닥에선 10만년 전 사슴 해골과 하이에나, 코뿔소 등의 고대 동물 잔해가 발견됐다.
노르웨이에서는 빙하가 녹으면서 철기 시대의 양털 옷과 로마 시대 샌들, 1300년 전 제작된 화살 등이 발견됐다.
중국에서도 세계 최대 고(古) 석불인 러산대불이 전체 모습을 드러냈다.
링윈대불이라고도 불리는 러산대불은 당나라 시기 민강 옆 높은 절벽을 깎아 만들었다. 높이가 71m에 달하는 중국 최대 석불이다
양쯔강 바닥에서는 600년 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이 발견되기도 했다.
가뭄으로 고대 유적만 출토된 게 아니다. 세르비아 항구도시 프라호보 인근 다뉴브강에서는 2차 대전 때 탄약과 폭발물이 실린 채로 침몰한 독일 군함 20여척이 발견됐다. 이탈리아 포강에선 2차 대전 당시 침몰한 화물선과 나치 군용차 등도 발견됐다. 무게 450kg에 달하는 대형 폭탄이 발견됐을 땐 해체를 위해 인근 주민 3천명이 일시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2020년 서울시 코로나19 확산 막기 위해 10인 이상 집회 전면금지 행정명령
2020년 방단소년단 디지털 싱글 ‘다이너마이트’ 발매, 10일만인 8.31에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100 1위 오름
2018년 남북이산가족상봉
2018년 미국, 마지막 나치생존자 야키프 팔리(95세) 독일로 추방
2016년 박인비 1900년 파리올림픽 이후 116년 만에 부활한 리우 올림픽 여자골프 금메달, 골든 커리어 그랜드슬램 달성
2013 미국 매닝 일병에게 징격형 선고
미국 메릴랜드 주 포트미드 군사법원 위키리크스는 국가기밀 64만 건 넘겨준 브래들리 매닝 일병에게 간첩법 위반과 절도 등 20개 혐의로 징역 35년형 선고, 국제앰네스티는 “실제 인권침해를 저지른 사람들보다 인권침해를 고발한 매닝이 더 무거운 형벌 받았다”며 부당하다 주장, 2017년 1월 오바마 대통령의 감형(7년)으로 2017.5.17. 출소, 옥중에서 성전환수술 이름도 첼시로 바꿈
2013년 3년째 내전중인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 인근 구타에 화학무기(사린) 살포
사린 살포로 1,300명 이상 사망하였다, 서방은 정부군소행으로 단정하고 공습 계획했으나 미-러 화학무기폐기안 합의로 사태 마무리
2009년 북한 조문단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 위해 서울 방문
2009년 세계육상선수권, 우사인 볼트 남자 200m 세계신기록으로 우승
남자 100m 결선에서 9초58의 놀라운 세계 신기록으로 지구촌을 깜짝 놀라게 했던 우사인 볼트(자메이카)가 2009년 8월 21일(한국시각) 독일 베를린 올림픽슈타디온에서 벌어진 제12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남자 200m 결선에서도 19초19의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볼트는 지난해 베이징올림픽에서 자신이 세운 종전 세계 기록 19초30에서 0.11초 단축했다. 묘하게도 100m 기록을 0.11초 단축한 것과 수치가 똑같았다.
이로써 볼트는 이번 대회 스프린트 더블(2관왕)에 올랐다.
그가 피니시라인을 통과하고 바로 계측기는 19초20의 기록을 나타냈다. 하지만 바로 뒤 나온 공식 기록에는 그보다 0.01초 적은 19초19가 찍혔다.
2009년 그리스 산불 비상사태
2009년 8월 21일 밤 그리스 마라톤시 인근 마을에서 발생한 산불은 이틀에 걸쳐 전국적으로 83건에 달하는 크고 작은 산불로 커져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20일 아테네에서 북서쪽으로 20㎞ 떨어진 마굴라 근처에서 산불이 일어난 후 소방관 100여명과 소방차 16대, 헬리콥터 5대 등이 동원돼 화재 진압에 나섰으나 강풍으로 인해 화염이 번져나갔다. 특히 수도 아테네에서 불과 20㎞ 떨어진 인구 1만명의 아지오 스테파노스에는 주민 대피령이 내려지는 등 화마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처럼 그리스 산불이 2년래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으면서 피해가 커지자 유럽연합(EU)이 공동대응 메커니즘을 가동했다.
2008년 파키스탄 와(Wah)의 무기공장에서 자살폭탄테러 사망 78명 이상
2003년 2003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개막
‘벽을 넘어 하나로, 꿈을 펼쳐 미래로’. 지구촌 대학생들의 스포츠제전인 제22회 2003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가 2003년 8월 21일 오후 화려한 막을 올렸다. 전세계 174개국 7000여명의 선수·임원이 참가해 사상 최대규모로 펼쳐졌다.
이날 오후 6시30분 부터 대구 유니버시아드 주경기장에서 벌어진 개회식은 첨단 IT기술을 응용한 대형 공연과 남북한 선수단의 동시입장으로 분위기가 뜨겁게 달구어졌다. 국제스포츠대회에서의 남북한 동시입장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과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2003년 일본 아오모리 동계아시안게임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였다.
열전의 11일 동안 중국과 러시아가 각각 1, 2위를 달성했고, 한국은 당초 목표(금메달 16~19개)를 훨씬 넘는 금메달 26개, 은메달 11개, 동메달 15개를 따내 역대 최고 성적인 3위를 달성했다. 8월 31일 그 막을 내렸다. 13개 종목에서 185개의 메달을 놓고 뜨겁게 대결하며 우정을 나눈 젊은이들은 아쉬움을 접고 차기 개최지인 터키 이즈미르에서 재회할 것을 기약했다.
남북한은 단일팀을 구성하여 함께 입장 하였다
1995년 경기여자기술학원 방화
경기도 용인군에 있는 경기여자기술학원에서 불이나 원생 서른일곱명이 숨졌다.
당시 기숙사에 있던 원생들은 백서른일곱명. 원생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출입문과 창문이 모두 잠겨 있어 인명피해가 더 컸다.
경찰에 화재 원인 조사결과 기술학원에 수용된 원생들이 처우에 불만을 품고 불을 지른것으로 드러났다.
가출 청소년들의 기술교육을 위해 경기도의 자금지원을 받아 종교재단에 위탁 운영되던 경기여자기술학원. 양재, 요리, 미용, 자수기술 등을 가르친다고는 하지만 운영과 관리체계가교도소와 비슷해 원생들의 탈출이 잇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경기여자기술학원 방화사건은 선도보호시설에서의 인권침해 시비와 교육과정에 실요성에 대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1991년 소련 쿠데타 실패, 고르바초프 크렘린 궁으로 돌아옴
1986년 구 중앙청 청사를 개조한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1985년 한국, 국제이동위성기구 가입
1983년 필리핀 야당 지도자 아키노 피살
1983년 8월21일 오후1시, 4∼5발의 총성이 필리핀 마닐라공항에 막 착륙한 중화항공 여객기 주변에 울려퍼졌다. 그리고 잠시후 한 여인이 “군인들이 니노이를 쏘았다”고 부르짖었다. 필리핀의 야당 지도자 베니그노 아키노가 피살된 것이다. 잠시후 항공기 정비사 모습을 하고 있는 20대 청년도 군인들이 쏜 수발의 총탄을 맞고 현장에 쓰러졌다.
필리핀 정부는 죽은 청년이 청부살인업자 출신의 범인이라고 발표했지만 야당측이 발표한 목격자들의 증언은 달랐다. 아키노를 태운 여객기가 공항에 도착한 뒤 아키노를 호위하려고 비행기에 올라탄 보안요원들이 살해했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은 필리핀 내 야당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망명지 미국을 떠날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미국 뉴욕의 필리핀 총영사관이 암살설을 근거로 아키노에게 비자발급을 해주지 않자 아키노는 위조여권을 만들어 귀국을 강행하다가 이날 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아키노의 비극은 그가 1973년의 대통령 후보 물망에 오르면서 시작됐다. 그를 경계한 정적 마르코스 대통령은 계엄령 선포(1972년)로 그를 투옥시킨 뒤 사형을 선고했다가 미국으로 쫓아냈었다.
1982년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 레바논 철수 개시
1981년 경제기획원, 제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1980년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전두환 장군을 국가원수로 추대하기로 결정
1978년 태풍 칼멘 호 강타 사망 44명
1976년 UN군 도끼만행사건의 원인이 된 판문점 미루나무 절단
1976년 청계천 하수처리장 준공
1976년 8월 21일 청계천 하수처리장이 준공됐다. 서울시가 성동구 군자동에 건설한 이 하수처리장의 모든 공사가 끝났다. 내자 31억원, 외자 30억원 등 모두 61억원을 들여 6년여 만에 완공을 보게 된 것으로 이 처리장은 매일 청계천에서 흘러내리는 BOD(생물의 화학적 산소요구량) 299.45PPM (허용치6PPM)의 하수25만t을 19PPM으로 정화했다. 이 처리장은 오염된 물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어 두 차례의 침전, 소독을 거쳐 방류하는 활성오니법으로 정화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시도되는 방법이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추풍령서 한진 고속버스 추락 사망 25명 부상 22명
1969년 세기항공 파이피기 안성에 추락 국회의원 조창대 등 5명 사망
1969년 미국 쿠바 외교관 2명 추방
1968년 소련군 체코 침입
1964년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팔미로 톨리아티 사망
1959년 하와이, 미 합중국의 50번째 주(州)로 편입
1952년 인도-파키스탄 국경선 획정 협정 조인
1949년 서독 점령군, 군정 종식
1944년 덤버튼 오크스 회의 개최
1943년 덴마크의 사실주의 작가 폰토피단 사망 - 1917년 노벨문학상 수상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
극동 국경지대 조선인들을 내지로 추방한다.’
1937년 8월21일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결정문(지령 N-1428-326)의 골자다.
명분은 간첩행위 차단.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켜 용모가 비슷한 일본인들의 스파이 활동을 원천 봉쇄한다는 것이었다.
연해주 일대에 뿌리내린 한인공동체에는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강제이주가 시작된 9월 중순 이전에 지식인 2,800여명이 남몰래 처형된 데 이어 한인 17만1,781명 전원이 4,000-6,000㎞ 떨어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쫓겨났다.
바람도 막을 수 없는 화차와 가축열차에서 40여일을 보내는 동안 어린이들의 60%가 얼어죽고 굶어죽었다.
도착한 중앙아시아의 동토에 땅굴을 파거나 움막을 세우고 겨울을 난 한인들은 굶어죽으면서도 간직했던 씨앗을 뿌려 허허벌판의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어냈다.
옛 소련의 ‘노력영웅’ 1,200여명 중 750여명이 ‘고려인’으로 불린 이들에게서 나왔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다시금 유랑하고 있다.
각 공화국에 민족주의 바람이 일면서 배척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도 러시아어와 공화국언어ㆍ민족어를 익혀야 하는 삼중고를 겪고 있다.
3ㆍ4세대에서 한국어는 거의 사라져가는 형편이다.
1937년 중국-소련 불가침조약 조인
1934년 한강 인도교 준공
1919년 안창호 등 임정기관지 `독립` 창간
우리 근·현대사에서 ‘독립신문’의 제호를 사용한 신문은 많다. 서재필과 개화파가 창간한 독립신문(1896년), 장기영 등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한 독립신문(1919년), 광복 후 서울에서 발간된 독립신문(1945년), 1919년 8월 21일에 임시정부가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기관지로 발간한 ‘상해판(版) 독립신문’ 등이다.
‘상해판 독립신문’은 상하이에 망명 중인 독립지사들이 자신들의 공동관심사와 독립운동 관련 소식을 모아 발행하던 등사판 신문 ‘우리 소식’을 모태로 출발했다. 사장 겸 주필은 이광수가, 편집국장은 주요한이 맡아 타블로이드보다 조금 작은 크기로 주 3회 발행을 원칙으로 했다. 상하이에 한글 활자가 없어 성경에서 한글을 오려내 자모를 만들 만큼 제작환경이 열악했지만 일제를 통렬하게 비판할 때는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재정난과 일제의 간접적인 탄압으로 1925년 9월, 189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할 때까지 ‘獨立’ ‘獨立新聞’ ‘독립신문’으로 제호가 3번 바뀌었다.
1912년 총포화약류 취췌(取締)령 공포
1911년 파리 루브르 박물관서 모나리자 도난
1909년 도수(屠獸)규제 반포
1903년 일본 정부, 한만(韓滿)보호 기본타협안을 러시아 정부에 제시
1875년 일본 군함 강화도 등에 침입, 약탈, 살육
조선측의 대일문호개방(對日門戶開放)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에, 일본은 열강세력에 앞서 조선에의 진출을 시도한 계획이 지연됨에 따라, 그 타개책으로 무력시위로써 조선당국을 굴복시키고자 군함 30척을 조선연해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와 같은 무력위협정책의 일환으로 운요호를 조선연해에 파견, 8월 21일 강화도 동남쪽 난지도(蘭芝島) 부근에 정박하고 담수(淡水)를 구한다는 구실로 보트에 군인을 분승시켜 연안을 정탐하면서 강화도의 초지진(草芝鎭) 포대까지 접근하였다.
이에 초지진 포대에서는 포격을 가하고 운요호에서도 맹포격으로 응수하여 포의 성능이나 포술이 그들에 비해 떨어지던 초지진을 파괴하고, 영종진(永宗鎭)에도 맹포격을 가하고 그들의 육전대(陸戰隊)까지 상륙시켜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 결과 조선군은 전사자 35명, 포로 16명을 내고 첨사(僉使) 이민덕(李敏德) 이하 400~500명에 이르는 수비병은 모두 패퇴하였고 대포 35문, 화승총 130여 정과 그 밖에도 무수한 군기 등을 약탈당하였으나 일본측은 2명의 경상자를 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이 포격전의 책임을 조선측에 씌워 전권대사를 파견해서 힐문함과 아울러 무력을 배경으로 개항을 강요하였다.
이에 따라 양국 간에는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의 개국이 이루어졌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號) 사건
1866년(고종 3년) 음력 7월 12일(양력 8월 21일)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던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를 평양 군민(軍民)들이 반격하여 불에 태워버린 사건이다.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1862년 프랑스 인상파 작곡가 드뷔시 태어남
1838년 독일 시인 샤미소 사망
1821(조선 순조 21)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 태어남
본관은 김해. 아명(兒名)은 재복(再福), 보명(譜名)은 지식(芝植), 세례명은 안드레아. 대건은 관명(冠名)이다. 충청남도 내포(內浦) 솔뫼(지금의 당진)에서 태어났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부이자 순교자.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모방 신부를 통해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 교육을 받았고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로 임명되었다. 조선에 돌아와 전교 활동과 선교사들의 입국을 돕다가 1846년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그의 열성적 전교 활동과 경건하고 당당한 신앙자세는 이후 천주교인들의 귀감이 되었다. 유네스코는 2019년 11월 14일, 김대건 신부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다
1798년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 출생
1789년 프랑스 수학자 오귀스탱 루이 코시 출생
1741년 헨델 오라토리오 `메시아` 작곡
1545년 을사사화 발생
인종의 뒤를 이어 나이 어린 명종이 등극하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진행되면서 정치에 참견하게 된 것을 그의 동생 윤원형은 내심 자기의 시대가 왔다고 기뻐하였다. 그는 그의 무리인 정순붕(鄭順朋)·이기(李芑)·임백령(林百齡) 등과 모의하여, 형조판서 윤임·좌의정 유관(柳灌)·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등 강직 공명한 선비들을 반역음모죄로 몰아 죽이고, 그 나머지 대윤을 싸고도는 40여 명의 선비들을 주살하거나 혹은 귀양보냈다.
그들은 난정(蘭貞)이라는 여인을 궐 내로 들여보내어,
“인종 때 윤임 일파가 자기 권력을 보존할 생각으로 경원대군(명종)을 몰아내고 계림대군(桂林大君)을 그 후계자로 세우려 하였습니다.”하는 말로 대비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이에 대비는 크게 의심을 하여 자기 동생 윤원형을 불러 일을 조사해달라고 부탁하였으니, 누가 꾸민 연극이라고 이로운 보고를 할 리가 없었다. 윤원형 등은 윤임과 유관·유인숙 등을 공모자로 몰아 반역 음모를 했다는 보고를 대비에게 올리는 한편, 대간들을 충동하여 탄핵의 상소를 하게 하였다.
대비는 마침내 대노하여 명종을 데리고 충순당으로 가서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사건의 처리를 하문하였다. 신하들은 그것이 소윤 일당의 농간인 줄 모르는 자가 없었으나, 기사년에 혼들이 났던 여러 신하들이 묵묵히 앉아 있는 가운데 권발과 이언적이 나와서 아뢰기를,“전혀 사실이 아니오이다.”하고 간쟁했으나 대비는 듣지 않고 윤임·유관·유인숙 등을 멀리 귀양보내었다가 사약으로 죽게 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도 혹은 죽이고 귀양보냈다. 그러나 사화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이듬해인 병오년에는 경기 광주 양재역에 붙은 벽서가 사관 안명세(安命世)의 짓이라 하여 그를 죽였으며, 아울러 깨끗한 선비 여럿을 공모자로 몰아 죽였다. 다음 기유년에는 또 이중윤(李仲胤)의 모함으로 유생 수백 명이 죽었다. 그리하여 다시 유림의 기운이 땅에 떨어지고, 백성들은 수심에 잠기게 되었다.
568(신라 진흥왕 29) 진흥왕 황초령에 순수비 세움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는 신라 진흥왕(540~576)이 새로이 넓힌 지역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닌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 이다. 이 진흥왕순수비는 현재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국보 33)·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국보 3)·마운령 진흥왕순수비(북한 국보 111)·황초령 진흥왕순수비(북한 국보 110)가 발견되었다. 진흥왕순수비는 신라가 대외적으로 영역을 확대하던 진흥왕 때의 영토 개척사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진흥왕 때는 신라가 종전의 미약했던 국가체제를 벗어나 영토를 크게 넓히고,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때이다. 진흥왕은 재위 37년 동안 낙동강 서쪽의 가야세력을 완전히 병합했고, 한강 하류유역으로 진출하여 서해안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했으며, 동북으로는 함경남도 이원지방에까지 이르렀는데 이 순수비는 그를 증명하는 것이다.
특히 568년(신라 진흥왕 29) 8월 21일은 진흥왕이 함경남도 함흥군 황초령에 높이 151.5cm, 두께 약 20cm, 너비는 42.7cm인 황초령비와 함경남도 이원군 마운령에 높이 146.9cm, 너비 44.2cm, 두께 약 30.3cm인 순수비를 세운 날이다. 이 두 비는 내용이 거의 같다고 한다. 특히 이 비는 진흥왕 때 신라 동북쪽 국경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비열홀주(比列忽州, 지금의 안변)를 훨씬 넘어 함흥지역까지 이르렀음을 증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조선의 대학자 추사 김정희는 7월 무더위 속을 뚫고 북한산에 올라 그곳에 있던 진흥왕순수비를 탁본했다. 그 뒤 그는 침식을 잊은 채 비문을 판독한 다음 그 비가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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