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2002년 한·일월드컵을 끝으로 14년간 달아온 태극마크를 반납한 '황새' 황선홍(34·가시와 레이솔)의 축구 인생을 수기 형식으로 10회에 걸쳐 재조명한다.
월드컵에 4회 연속 출전한 황선홍은 폴란드와의 조별리그 1차전에서 선취골을 뽑으며 아시아 사상 첫 4강 신화의 든든한 초석을 다진 주인공이다. A매치 102경기에서 50골. 황선홍의 드라마 같은 인생의 굴곡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 간판 스트라이커의 성공과 좌절을 만날 수 있다. 지친 날개를 접을 준비를 시작한 황선홍의 첫 이야기는 그의 축구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2002년 월드컵이다.<편집자주>
6월22일 광주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맞은 승부차기.
코칭스태프가 승부차기의 순번을 알려줬다. 1번. 순간 나의 마지막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고 선배로서 치러야 할 '형벌'이나 다름없었다. 슛하는 찰나, 골키퍼가 뜨는데 아차 싶었다. 오른쪽 코스를 선택, 공이 잘 맞으면 골대 상단에 꽂히지만 잘못 맞으면 그 정도 높이에서 막히곤 한다. 전날 페널티킥 훈련 도중 '골키퍼가 막으면 어쩔 수 없다. 무조건 그 쪽으로 때리겠다'는 방향 설정을 해놓았다. 볼이 골키퍼 옆구리를 맞고 골인되는 것을 보면서 몸이 얼어붙는 줄 알았다.
이번 월드컵은 나를 세번 울렸다. 첫승을 올린 폴란드전과 16강, 8강에 올랐을 때였다. 14년간 태극마크를 달면서 선수들이 승리했을 때 그처럼 눈물이 나도록 감격스러워한 적이 있을까.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도 첫승하던 순간이었다. 후배들도 16강이 확정됐을 때보다 첫승한 날 더 기뻐했다. 경기 전 라커룸에서는 베스트 11명과 감독, 코치만 파이팅을 외치고 후보선수들이 뒤에서 등을 두드려주는 게 관례다. 그런데 폴란드전은 닥터에서부터 장비담당, 주무까지 라커룸에서 어깨동무를 했다. 예전의 파이팅과는 아주 많이 다른 뭔가가 느껴졌다. '우리는 하나'라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폴란드와의 1차전 전반 26분. 수비수와 2대2 상황. (이)을용이가 킥이 좋으니까 됐다 싶어 순간적으로 뛰어들어갔고 '구석이 어딘가' 생각했다. 을용이의 센터링은 뒤쪽에서 올라오는 경우여서 때리기 힘들었다. 왼발을 대기만 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이 좋았다. "한두번 찬스가 오면 놓치지 않겠다"던 경기 전날의 인터뷰만 생각했다. 골을 넣고 벤치로 달려갔는데 선수나 코칭스태프나 눈물이 안 떨어질 뿐이지 모두 눈가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물러설 곳이 없다는 사실은 나를 채찍질하는 힘이 됐다. 솔직히 부담스러웠지만 더 이상 비난받을 기회도 없는 거니까 후회없이 해 보자고 다짐했다. 대표팀 버스를 타고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운동하는 것, 후배들과 식사를 하면서도 문득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면 애착이 생겼다. 매경기 '18번 유니폼을 다시 입을 수 있을까'라는 알 수 없는 기대와 서운함…. 이탈리아를 꺾었을 때 '한경기를 더 뛸 수 있게 됐구나'라는 안도감이 들어 핌 코치와 포옹하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마지막이어서 하늘이 도와준 듯하다.
몸이 안 좋은 건 아쉬웠다. 폴란드전 직후 왼쪽 엉덩이 아래쪽 근육이 문제였다. 순간 스피드를 내려고 하면 찢어질 듯 아팠다. 2∼3일 쉬었는데 '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감독에게 "아프지 않다"고 말했다. 경기 당일은 진통제 주사를 맞아 괜찮았는데 훈련은 통증을 참고 뛰느라 실전보다 힘들었다. 히딩크 감독은 훈련을 설렁설렁하면 절대 출전시키지 않는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전에서 한번씩 결정적 찬스를 놓쳤는데 졌다면 가차없이 내게 화살이 돌아왔을 것이다.
지난 6일 일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첫째는 '이제는 쉴 수 있구나'였고, 둘째는 '한국에서 더 이상 축구를 못할 수도 있겠구나'였다. 지난 2일 국민대축제에 참석한 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여러분 사랑합니다"라고 인사하는데 어찌나 떨리든지. 그렇게 많은 팬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한국에서 은퇴한다고 했는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안 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플레잉코치를 하면서 느슨하게 선수생활을 하고 싶지 않다. 축구 욕심이 많아 그렇다. 나이를 먹어도 대표팀에서 부르지 않으면 선수 생명은 끝이라고 생각한다. 선수 생활을 하는 한 대표팀에 있어야 한다고 믿어왔다. 가시와 레이솔과의 계약이 만료되는 10월 말을 전후로 인생을 바꿀 결단이 기다리고 있다.
[황선홍 수기] <2> 히딩크 감독
히딩크 감독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6월 컨페더레이션스컵 때였다. 첫인상은 '외국인 감독이구나' 정도였다.
2000년 말 어깨수술을 받은 뒤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감독에게 뭔가를 보여줘 월드컵에 나가야 한다는 절박감이 앞섰다. 감독은 내가 컨페드컵에서 2경기 연속 골을 넣는 것을 보고 믿음을 줬다.
하지만 지난 1월 북중미골드컵 때는 히딩크 감독에게 적잖이 실망했다. 개인적으로 사생활 문제(감독의 여자친구가 선수단 숙소에 묵음)가 컸다.
팀 성적이 나쁜데 그런 모습을 보니 좀 그랬다. '월드컵 성적이 좋지 않으면 나 몰라라 하고 돌아갈 수도 있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선수들 능력이 안된다. 미안했다"라는 말을 남긴 채…. 기혼인 선수도 많은데,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실전을 앞두고 체력훈련인 파워프로그램을 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보다 약한 팀과 경기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자신감이 떨어질 수 있었다. 월드컵이 5∼6개월밖에 남지 않아 선수들도 불안해했다.
감독에 대한 반신반의는 점차 '옳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팀 컨디션은 스코틀랜드전(5월16일)까지 좋지 않다가 잉글랜드(5월21일) 프랑스전(5월26일)을 치르며 살아났다.
모든 게 감독의 계산된 스케줄이었다면 아마 신이 짜려고 했어도 그렇게 타이밍을 맞추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골드컵 후유증이 잉글랜드전까지 이어졌다면 월드컵은 장담할 수 없었다.
히딩크 감독과 운동하면서 긴장감에서 해방된 적이 없다. 젊은 후배들과 포지션 경쟁을 하는 게 낯설었다. 감독은 누구든지 중간에 실수하면 그냥 빼버린다. 지난 5월 서귀포에서 가진 왕복달리기 테스트에서 138회를 기록했는데, 그것은 내 체력이 아니다. 정신력이었다. 감독의 방침에 불만은 없었다.
사람들은 우리의 '체력이 좋아졌다'고 하는데, 그보다는 '포지션의 전문성을 지킨 덕에 90분 내내 뛸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게임이 풀리지 않으면 (홍)명보가 치고 올라가거나 (김)남일이가 오버래핑했는데 히딩크 감독은 그것을 못하게 했다. '왜 백패스를 주문할까. 한국 축구는 이게 아닌데…' 하고 의아해했지만 묵묵히 따랐고, 스코틀랜드전부터 팀이 확 달라져 깜짝 놀랐다.
마지막 경기인 터키와의 3-4위전 전날인 지난달 28일 밤, 히딩크 감독은 부상 중인 나를 불러 "원하면 10분이라도 뛰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의료진은 "(선수는) 진통제 주사를 놔달라고 하는데 세번째 맞는 주사여서 선수생명에 지장을 줄 수 있다"고 걱정했다. 뛰고 싶었다. 그러나 나 때문에 리저브멤버 한명을 희생하는 게 싫어 결국 "뛰지 않겠다"고 말했다. 감독은 "고맙다"고 했다. 터키전이 끝난 뒤 내 팔을 붙잡고 팬들에게 인사시키던 장면이 눈에 밟힌다.
감독은 자신을 다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다. 숨은 보따리를 갖고 있는 듯한 신비감이 느껴진다. 감독은 한국축구를 분명 한계단 이상 끌어올려 놓았다. 대표팀의 전술과 지원 시스템, 선수들의 대우. '대표팀답다'라는 자부심을 느끼며 훈련하고 경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도 열심히 공부해서 기회가 되면 대표팀을 맡고 싶다.
[황선홍 수기] <3> 졸병시절
황선홍 대학 2년 선배 고정운
1990년 건국대 4학년 때의 황선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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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 수기] <1> 마지막 월드컵
[황선홍 수기] <2> 히딩크 감독
본지 황선홍 수기 '인기 폭발'
당시 건국대 축구부 숙소는 4학년과 3학년 1명씩, 1학년 2명 등 한방을 4명이 사용했다. 내가 1학년 때 들어간 곳이 3학년 정운이형이 있던 방이었다.
정운이형은 무섭게 생겼고 엄한 성격이어서 악명이 높았다. 훈련도 제일 열심히 해 후배들이 꼬투리를 잡을 만한 점이 없었다. 내가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해도 지하에 있는 웨이트트레이닝장으로 억지로 끌고 가 운동을 시켰다.
줄넘기를 하거나 튜브를 묶어놓고 정운이형이 잡고 있으면 내가 점프훈련을 하는 식이었다. 운동을 해도 정운이형은 힘이 있으니까 잘되는데 나무젓가락처럼 마른 나는 몇배 힘들었고 또 쉽게 지쳤다.
말년 고참의 개인비서로 보면 된다. 정운이형이 오후 훈련 직전에 잠을 자고 있으면 유니폼과 스타킹, 압박붕대를 반듯하게 정리해 머리맡에 놓아뒀다. 당시에는 경기 때만 테이핑을 하고 훈련 때는 압박붕대를 이용했다.
말단들은 형들이 자는 동안 운동장에 나가 땅을 고르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쉴 틈이 없었다. 선배들이 빨래를 내놓으면 여름이나 겨울이나 손빨래를 했다. 2층 침대를 사용했는데 정운이형이 1층에 자고 있으면 2층의 나는 한번 누운 자세를 바꾸지 못했다.
동기들도 우리 방에는 잘 놀러 오지 않았다. 먼저 문을 살짝 열고 목만 내밀어 정운이형이 있는지 확인했는데 그때 걸리면 끝장이었다. 정운이형은 "당당히 들어와서 보지 않고 고양이처럼 목만 빼서 본다"며 바로 기합을 줬다.
태어나서 '빠따'를 가장 많이 맞은 것도 대학교 1학년 때였다. 후배들이 뭔가를 잘못 해서 전체가 정운이형한테 맞았다. 4학년들은 1·2학년을 터치하지 않기 때문에 3학년인 정운이형이 몽둥이를 들었다.
"오늘 단체기합을 받을 테니 옷을 껴입을 수 있는 만큼 껴입으라"고 했다. 트레이닝복을 두세개씩 껴입으면서 '죽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체로 맞고 다시 개인별로 때렸는데 정운이형은 내 차례 때 "왜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느냐"고 한마디 했다. 50대 정도 맞았다.
정운이형은 나를 좋아했던 것 같다. 방에 들어와서는 멍든 엉덩이를 마사지해 줬다. 정운이형의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했고, '충성'했다. 방에 옷장 같은 사물함이 있는데 나중에는 내게 열쇠를 맡겼다.
대학 때 정운이형과 2년 정도 한방을 썼는데, 대학선발이나 국가대표팀 B팀 같은 데 나란히 뽑히면 피하고 싶었지만 거의 룸메이트로 지냈다. 항상 '빛과 그림자'였다. 결혼하면서 정운이형이 편해졌고 요즘도 자주 연락한다.
어릴 때는 나도 참 웃겼다. 정해원 선배(전 전남 코치)나 최순호 선배(포항 감독)를 좋아해 사인을 받으러 다녔다. 용문중 1학년 때 동대문운동장에서 박스컵(대통령배국제대회)을 봤는데, 정선배한테 사인을 받은 적이 있다. 대학교 2학년 때 태극마크를 달면서 선배들을 대표팀에서 만났다. TV에서 봐온 '내 영웅'들과 같은 팀에서 뛰다니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영광스러웠다.
선배들이 어려워 말 한마디 못하던 나는 운동장에서 다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선배들의 플레이만 봐도 "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 예전에는 선수단 버스에 '국가대표팀 버스'라고 써 붙였는데 사람들이 창 밖에서 쳐다보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고,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픈 줄을 몰랐다. (경기에 출전하지 않고) 버스만 타고 운동장까지 30∼40분 다녀도 뿌듯했다.
직접 '빠따'를 때려본 것은 용문고 3학년 때였다. 3대를 때렸는데 엄청나게 후회했고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 대학교 때도 대표팀에 있다가 후배들을 만나면 그냥 좋다는 감정이 먼저 든다. 이번 월드컵 합숙에서도 농담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종종 "선배로서 위엄을 지켜야 하지 않느냐"는 얘기를 들으면 이렇게 합리화하곤 했다.
'세상은 즐겁게 살아야 모든 일이 잘된다'고.
[황선홍 수기] <4> 부상과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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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위)이 98년 6월4일 잠실에서 열린 중국 평가전
에서 상대 GK 장진의 거친 수비에 걸려 넘어지고 있다.
[사진=축구가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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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 수기] <1> 마지막 월드컵
[황선홍 수기] <2> 히딩크 감독
[황선홍 수기] <3> 졸병 시절
오른쪽 무릎에 2개, 왼쪽 어깨에 한개. 세차례의 무릎수술과 한차례 어깨수술을 한 흔적이다. 오른쪽 어깨는 지난 4월 쇄골을 잡아주는 어깨인대가 끊어져 흉할 정도로 쇄골이 튀어나와 있다.
92년 8월 독일 2부리그인 부퍼탈에서 오른쪽 무릎의 십자인대가 끊어졌다. 바이에르 레버쿠젠의 아마팀에 있다가 부퍼탈로 옮기면서 4경기에서 3골 2도움을 기록한 나는 두려울 게 없었다. 그러다 다섯번째 경기에서 무릎을 다쳤다. 옆에서 들어온 태클에 걸려 넘어졌는데, 무릎과 허벅지 사이의 뼈가 바깥쪽으로 확 나갔다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수술 직후 의사가 "6개월 정도 축구를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마취가 풀렸을 때는 심하게 말해 '무릎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독일에 간 나는 부상이 아니더라도 타향살이가 힘들었다.
밥을 직접 해 먹어야 했는데 그때의 기억 때문에 요즘도 부엌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부상 때문에 괴로웠지만 1부리그에 대한 꿈이 커 축구를 그만둘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닥터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로 재활에 전념했고 6개월 만에 그라운드에 다시 섰다.
부상에서 완쾌된 뒤 두번째 경기 만에 같은 무릎의 연골이 파열돼 2차 수술을 받았다. 거동을 못하던 나는 연골수술을 하기 직전에 만난 지금의 아내(정지원씨·당시 어학연수 중)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내는 서울에 있던 장모에게 꼬리곰탕 만드는 법을 물어보기도 했다. 장모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괘씸해했다고 한다.
독일에서의 2년은 가장 힘들었다. '독일을 향해 소변도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93년 국내로 돌아와 포항에 입단했고 크리스마스에 결혼했다. 사람들은 "하늘이 독일에 운동하러 보낸 게 아니라 짝을 만나게 하려고 보낸 것 같다"고 말했다. 95년 K리그에서 8경기연속 득점을 한 나는 96년 올림픽팀과 대표팀, 소속팀에서 60여경기를 뛰며 무릎을 혹사한 탓에 97년 5월 또 십자인대가 끊어져 수술을 받기 위해 다시 독일로 향했다.
10여개월 만인 98년 3월 성남과의 아디다스 개막전에서 복귀전을 치렀다. 당시 대표팀의 차범근 감독을 비롯해 모든 관심이 내게 쏠렸는데, 2골을 넣어 우여곡절 끝에 살아났다. 4월1일 한·일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린 나는 '이제 월드컵에서 펄펄 날면 소원을 이루겠지…'하고 기대했다. 아프지 않다면 잘할 자신이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안 될까. 월드컵 직전인 6월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GK와 부딪쳐 또 무릎을 다쳤다. 절망적이었다. 월드컵을 벤치에서 지켜봐야 했다.
아버지 건강이 좋지 않아 벌어놓은 돈도 없는 데다 프로축구 최고 연봉인 1억2,000만원을 받기 시작한 시점에 입은 부상. 에이전트사인 이반스포츠 이영중 대표가 일본행을 제의했다. 그것은 한 줄기 희망이었다. 98년8월 세레소 오사카로 옮긴 뒤 99시즌 득점왕에 올랐다. 가시와 레이솔에서 뛴 2000년 말에는 습관성 어깨탈구를 치료하기 위해 수술대에 올랐다.
히딩크 감독 아래서도 부상은 잦았지만 끈질기게 버텼다. 98년 월드컵에서 잘했다면 벌써 대표팀을 은퇴했을지 모른다. 한국 나이로 서른다섯의 공격수가 월드컵에서 뛴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대단한 일이다. 이번 월드컵 직전 은퇴를 선언한 것은 마지막 투혼을 펼치겠다는 '의지'였다.
폴란드와의 1차전에서 선취골을 넣고 첫승을 올린 지난달 4일. (고)정운이형과 (서)정원이 등 주위에서 전화가 왔는데 "죽으라는 법은 없네. 끝까지 망가지지 않고. 아주 잘됐고 고맙다"는 말을 나눴다. 16강이면 원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4강까지 올랐다.
사람들은 내가 운이 나쁘다고 하는데 부상이 많아서 그랬지 나는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다. 황새클럽 등 주위에서 걱정을 해 줘 좋은 결과가 나왔다. 마지막에 이렇게 잘할 수 있는 사람을 불운한 스트라이커라고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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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 수기] <5> 잊지못할 기억
94년 미국월드컵. 너무 힘들었다. 볼리비아전 당시 문전에서 2∼3차례 허공으로 공을 차올린 뒤 나는 그야말로 '죽일 놈'이 됐다.
모든 화살이 나에게로 돌아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일부 축구팬과 언론들은 끊임없이 나를 몰아세웠다.
나를 좋아하는 팬들과 '안티 황선홍'파로 갈리어 PC통신을 통해 서로 글을 띄우며 티격태격 싸우는 것을 보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지금도 팬클럽 홈페이지를 이따금씩 들여다볼 뿐 인터넷과는 별로 친해지지 못하고 있다. 글을 직접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똥볼'만 찬다는 숱한 비난…. 지금와서 얘기지만 그때 문전에서의 나의 판단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슛에서의 실수이지 결코 '판단 미스'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골키퍼가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수비수 2명이 골라인에 서 있었기 때문에 순간 위쪽으로 차야 골을 넣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허리 이하로 차면 수비수에게 걸릴 수 있었다.
주위의 비난이 컸지만 그래도 위안이 됐던 것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었다. '나는 아직 젊다'라는 생각이 오기처럼 치밀어 올랐고, 또다시 기회는 온다고 굳게 믿었다. 적어도 한두번은….
그래서 98년프랑스월드컵에서의 절망감은 더욱 컸다. 부상으로 벤치만 지키고 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4년간 이를 갈았는데….
모든 게 끝났다는 좌절감뿐이었다. "황선홍이 겁이 많아서 큰 대회를 피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들었을 때는 주먹으로 벽이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는 대회가 끝난 뒤 잠적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내 축구인생은 여기까지구나' 하는 극단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흘 정도 집에서 불도 켜지 않은 채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후 나흘쯤은 시골에 내려가 있었는데, 충남 예산의 아버지 산소를 찾아가 묘비를 끌어안고 한나절 내내 펑펑 울기도 했다.
축구를 했기 때문에 이런 절망감에 빠져야 하는구나…. 야속함과 좌절감이 계속 교차됐다. 스스로를 이길 방법이 없었다. 누가 공을 하늘로 차고 싶어 차고, 부상을 당하고 싶어 당하겠는가….
98년 월드컵 이후 내 가슴 속에 2002년 월드컵은 존재하지 않았다. 명예회복이라는 말은 그저 남들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얘기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유니폼을 벗고 싶은 생각뿐이었으니까.
당시 긴 암흑의 터널에 빠져 있을 때 황새 팬클럽 회원들과 집사람에게 평생 갚지 못할 빚을 졌다. 이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큰 위안이 됐다.
다른 팬모임에 비해 유별난 황새 팬클럽.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내 인생의 든든한 동반자 같은 존재다. 힘들 때는 이들의 얼굴을 밤새 차례차례 떠올려 보기도 했다.
짧고도 긴 방황이 끝난 뒤 일본에 진출했다. 이때부터 내 축구인생은 다시 시작됐다. 99년 득점왕에 오르면서 '불운'을 떨칠 기회는 또 온다는 희망이 조금씩 보였다. 부상에 민감하게 신경을 쓴 것도 '한번 더 다치면 정말 끝'이라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홈페이지에 밤새 글을 띄워 위로를 해줬던 황새 팬클럽 회원들은 일본에까지 와서 응원을 했다. 이들을 볼 때마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꾹꾹 누른 채 몇번이고 가슴속으로 다짐했다.
'꼭 빚을 갚겠습니다. 꼭 빚을 갚겠습니다.'
[황선홍 수기] <6>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그동안 주위 사람들에게도 잘 얘기를 안했지만…. 사실 어머니를 한번 뵌 적이 있다.
오래 전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건국대 시절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연락을 받고 대전의 한 커피숍에 갔다. 10년 넘게 헤어져 있던 어머니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나는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혹시 못 알아볼 만큼 변한 것은 아닐까.
그날 이후 나는 후회를 많이 했다. 차라지 만나지 말 걸….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집을 나가신 어머니.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어렸을 때의 그 '엄마'는 아니었다. 우리 가족만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는 나의 어린 생각은 산산조각이 났다.
이미 어머니는 재혼을 했고, 내 상상과는 달리 행복한 삶을 살고 계신 것 같았다. 야속했다. 어정쩡하게 인사말을 나누고 돌아선 뒤 한동안 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결국 나는 더 이상 어머니를 찾지 않기로 결심했다. 혹시 나로 인해 어머니에게 소중한 새 가정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된다는 제법 어른스러운 생각도 했다. 이제는 더 이상 원망도 미움도 없다. 행복하게 잘 사시기만을 기도할 뿐이다.
결코 자랑스럽지 않은 가족사. '그같은 일이 우리 가족 누구에게도 다시는 있어서 안된다'는 다짐이 이같은 고백을 가능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불우한 환경이 오히려 나에게는 더 높은 곳을 향한 도전의 문을 활짝 열어줬다. 남들처럼 단란한 가정에서 자랐다면 오늘의 내가 있기 힘들었을 것이다.
일찍부터 혼자 지내게 된 아버지는 매일 축구공을 옆구리에 낀 채 무표정한 얼굴로 대문을 나서는 나를 붙잡고는 "훌륭한 선수가 돼 신문에 나오면 어머니가 꼭 너를 찾을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왠지 나보다 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축구였다.
어느새 어머니의 얼굴이 희미해지면서 나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몇배 더 크게 느껴졌다. 운동선수라는 단 한가지 이유 때문에 아버지는 나를 아주 특별하게 대해줬다. 운수업을 하시면서도 경기 때면 빠짐없이 운동장에 나와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하셨다. 용문중학교 3학년 때 교통사고로 목발에 몸을 의지하고 운동장에서 박수를 치시던 모습은 지금도 선명하다.
나는 초등학교 내내 여동생하고 늘 둘이 밥을 챙겨먹었다. 집에 들어가야 남들처럼 반겨주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더욱 축구에만 매달렸고 해거름까지 온몸에 흙투성이가 되도록 신나게 공을 찬 뒤 집에 와 쓰러져서 자곤했다. 형편이 안 좋아 초등학교 때만 6∼7차례 이사를 갔다. 경기도와 서울·충남을 오가면서. 예산에서 서울로 올라와서는 아버지의 벌이가 넉넉지 않아 전학을 가지 못한 채 6개월 정도 쉬기도 했다.
구리시 양정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 숭곡초등학교 축구부 선생님이 소문을 듣고 나를 스카우트하러 온 게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결국 전학을 가 구리에서 서울로 매일 한시간 이상 걸려 통학을 했지만 소속감이라는 것을 처음 느껴봤다. 공부도 잘하지 못하고 가정 환경도 좋지 못한 아주 평범한 아이에게 숭곡초등학교 축구부 유니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보물이었다.
집을 나오면 늘 외롭고 소외감을 느끼던 내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되찾아 운동에 더욱 몰두할 수 있었다. 동료들과 함께 땀흘려 뛰면서 집에서 느끼지 못했던 공동체 의식이 생겼다.
그토록 나를 애지중지 키우셨던 아버님은 프로축구 포항시절인 96년 운명을 달리하셨다. 동생을 제쳐두고 늘 밥상을 앞에 두고는 맛있는 것을 내 밥위에 한점씩 더 얹어주셨던 아버지. 운동이라면 빚을 내서라도 뒷바라지를 해주셨던 그런 아버지. 나는 태어나서 가장 많은 눈물을 쏟았다. 늘 부상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만 하시다 돌아가셨다는 생각에 더 목이 메었다.
이번 월드컵이 끝난 뒤 나는 고향을 찾았다. 산소에 가 아버님께 훈장을 바치고 동네에 들어가니까 잔치가 한창이었다. 동네 어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시는 작은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바로 이 자리에 아버지가 계셨어야 되는데….
[황선홍 수기] <7> 영원한 내사랑
폴란드전 2-0 승리. 월드컵 첫승. 결승골을 터트린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내는 경기가 끝나기 무섭게 대표팀이 묵고 있던 숙소로 달려왔다. 나를 보자마자 목을 끌어안고 흐느꼈다. "태어나서 이렇게 기쁜 날은 처음이에요…." 말을 잇지 못하는 아내….
나는 "다시 태어나도 지금 부인과 결혼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렇다"고 주저없이 대답한다. 절망과 좌절에 빠져 있을 때 늘 곁에서 희망의 노래를 불러줬던 그다.
어렸을 때 단란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해서인지 나이가 들수록 가정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점점 강해지는 것 같다.
지금도 운동을 나갈 때면 딸 현진이(9)와 아들 재훈이(5)가 보는 앞에서 일부러 아내의 볼에 뽀뽀를 해준다. 의도적이기는 하지만 아빠 엄마가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나는 초등학교 때 부모님이 우리에게 잘해주는 것보다 두분이 서로 다정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는 게 소원이었다.
헤어져 서로 큰 고통을 겪었던 부모님처럼 돼서는 안된다는 다짐은 아이들 얼굴을 볼 때마다 더욱 단단해진다.
아내와는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다. 하지만 축구 얘기, 특히 나도 모르게 몸 어디가 안 좋다고 하면 아내는 너무 민감하게 반응해 며칠 동안 고민을 한다. 그런 까닭에 가급적 밖의 일이 아닌 가장 쉽게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는 아이들 문제를 놓고 얘기를 나눌 때가 많다. 공부는 잘하고 있는지, 앞으로 무엇을 시키면 좋을지 등.
둘째 재훈이는 운동에 소질이 있어 축구를 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아내는 여전히 결사반대다. 도시락을 싸갖고 다니면서라도 말리겠다며 벌써부터 엄포다. 여러 차례 수술대에 누웠던 나를 봐서 그런지….
사실 아내와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던 것도 수술 때문이었다. 올해로 결혼 9년째. 두살 아래인 아내를 만난 것은 93년 초였다. 당시 나는 독일 2부리그의 부퍼탈에 있었다.
어느날 아는 후배들이 본대학에서 축제가 있다며 같이 놀러 가자고 했다. 축제에 가서 한국 학생들과 어울렸는데 한눈에 들어오는 어여쁜 아가씨가 있었다. 첫눈에 반했다. 후배에게 맛있는 것은 뭐든지 사줄 테니 '소개팅'을 해달라고 보채 첫 만남이 이뤄졌다.
축구가 몇명이 하는 운동인지도 모르고, 제법 알려졌다고 생각했는데 '황선홍'이라는 이름도 모르고 있던, 그저 공부만 할 줄 아는 순수한 여학생. 그녀는 나를 딱 한번 만난 뒤 그야말로 피할 수 없는 고행길에 들어섰다. 나는 곧바로 무릎수술을 했고 전화를 걸어 거동을 하기 힘드니까 도와줄 수 없겠느냐고 또 한번의 프러포즈를 했다.
이때부터 공부만하던 여학생은 하루도 빠짐없이 내 병상을 지켰다. 어학연수 일정이 모두 끝났지만 나 때문에 귀국을 6개월 늦추기도 했다.
93년 6월 2년간의 독일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 비행기를 탔다. 옆좌석에는 아내가 있었지만 공항에서 기자들에게 들킬까봐 제 각각 행동을 했다. 내가 먼저 나가 인터뷰를 해 기자들을 감쪽같이 따돌리기도 했다.
포항에 복귀한 뒤 합숙 때문에 서로 만나는 횟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합숙이 없는 독일에서는 둘만의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었는데 너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 결혼을 하자고 했고, 그해 크리스마스에 우리는 부부가 됐다.
결혼한 뒤 와이프에게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어땠느냐고 묻자 "인상이 선하고 악의가 없는 것 같아 편했다"고 했다. 아내도 혹시 첫 눈에 반한 것은 아닐까….
아내는 9년간 참 힘든 시간을 보냈다. 좋아하는 여행 한번 제대로 못 가고 늘 조바심 속에 살았다.
98년 프랑스월드컵 때 부상 소식에 밤새 울어 눈이 퉁퉁 부어올랐던 아내. '불운의 스트라이커'를 만나 지금껏 남편의 날개를 펴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안고 살았던 아내. 그러면서도 별 내색없이 건강하게 가족을 잘 지켜준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