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고교시절ㆍ신흥고 - 입학하자마자 기인같은 교감선생님의 이야기가 파다하다.
평생동안 결혼식, 장로장립식, 결혼주례 때 딱 세 번만 넥타이를 매셨다는, 그래서 항상 잠바에 고무신을 신으시고.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시며, 미션스쿨이기에 교목님을 모시고 성경을 공부하는 시간이나, 채플시간에 공개적으로 영어단어를 외우라고 하시는 독특한 분이시다.
친구들간에 참교육자라커니 입시에 몰빵하는 성적지상주의자라느니 설왕설래한다.
정옥동 역사 선생님의 대화식 교육방법이 독특하시다.
출중하신 역사의식과 교편을 모교에서 잡으시는 후배사랑이 지극한 분이시다.
시내에서 다가교를 건너면 신흥학교와 기전학교로 가는 길이 갈린다.
아름드리 전나무 길을 따라 걸으면 기전학교로 통하는 길다란 계단이 나있다.
예전에는 사용했던 길이란다.
그 계단에는 기전여고 학생들이 점심 후 휴식을 취하며 재잘거리는 모습을 수십여 명씩 볼 수 있다.
그 시각이 이웃한 신흥고는 점심 후 5교시 교련시간인데 반 향도인 나는 여간 신나는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평소엔 향도의 통제에 잘 따르지 않던
학급생들이 그 시각 기전여고 학생들이 지켜보고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통제에 잘 따르는 것이다.
고교 군사훈련(교련)의 대대장으로 발탁되어 활동했는데, 최병심, 한진호 교련 선생님들께서 각별히 사랑해 주셨다.
그런데 그 거대한 축대가 두 번이나 굉음을 내고 무너졌다.
우리가 보기에도 얇은 일자형 콘크리트 축대가 무슨 힘이 있을까 염려됐었다.
해외의 원형의 거대한 댐이나, 하다못해 콘크리트 지지벽이라도 설치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두번 무너지고 세 번째에 겨우 지지벽을 세 개 세웠다.
자연스럽게 단짝친구들이 생겼다.
호성, 재승, 인철, 경국, 춘기, 병환, 병준, 병량, 용승, 대숙 등,
아지트는 예수병원 뒤로 미나리꽝이 연이어 있는 한쪽으로 촌락이 있는데, 용승이와 동생의 자췻방이다.
우린 그 방에서 라면을 끓여 나눠먹고, 밤 늦게까지 다가공원을 싸돌아 다니며 우정을 키웠다.
용승이는 평행봉의 달인이어서 멋진 흉근과 우람한 이두박근을 가지고 있는 몸짱이었다.
한번은 호성이네 집으로 놀러 갔는데 봉동읍네에서 산 막걸리를 뚝방에서 한잔씩 걸치고 갔었는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며 모범적으로 사시던 친구 부모님께 큰 충격이 되셨나보다.
한차례 작은 소동이 일었다.
중인리에서 배과수원 농사를 하는 춘기집에 몇차례 놀러갔다.
어머님께서 반갑게 대해 주셨는데 특히 털이 많은 내게 "털보"라고 별명지어 주셨다.
1학년 기말시험을 앞둔 일요일 오후 오랜 투병으로 핼쓱해진 아버지께 등교를 위해 전주로 학교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드렸다.
59세이신 큰병도 아닌 담낭계통의 염증이 당시의 의술로는 어려운 병이어서 작은 형의 헌신적인 효도로 병약해진 육신을 간신히 추스리고 계신 터였다.
"용석아! 나! 죽음이 무서워! 나! 안죽을 수 없을까?"
아버지의 두 큰눈에선 그렁그렁 눈물이 떨어졌다.
그러시며 손목에 찬 금장시계를 풀어 주신다.
내가 탐내어 여러번 주시라고 했는데도 어머니의 생일선물이라고 주시지 않던 시계인데!
"용석아! 어서가서 시험치뤄! 넌 큰 인물이 될테니!"
전주로 오는 버스에서 큰 충격에 빠졌다.
홀로 고아로 자라나 성실과 근면 하나로 자수성가하셨기에 그토록 자존심이 강하셨던 분이 도대채 죽음이 뭐기에 저토록 눈물을 보이신단 말인가?
시험이 끝난 토요일 오후 형 사무실에 전화하니
"어! 동생은 아버지 돌아가신 것 몰랐어?"
형 동료 분의 응답에 내 가슴은 무너졌다!
아버지의 눈물을 본 순간이 영원한 이별의 순간이 되었고, 하루 후에 "용석이에게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으셨고, 그날이 삼우제가 끝난 날이었다.
난 황소같이 꺼이꺼이 울며, 아버지 안계신 세상을 어찌 살것인가 심히 걱정이 됐다!
그로부터 난 극심한 정서불안증에 시달렸다.
암기과목은 어느 정도 따라갔는데 논리과목은 도무지 감당이 안됐다.
수학 담당이신 김래선 선생님께서 특별히 관심을 주시는데, 한시간 내내 내 눈에 시선을 고정하고 강의하시는데, 난 눈은 선생님께 고정하고 생각은 창공을 훨훨 날았다.
종종 유곽에 드나들던 친구가 부친의 노름빚으로 팔려온 한 윤락녀가 나를 만나 도움을 청한다고 해서 사실이라면 한학기 등록금으로 빼내 줄 생각으로 빵집에서 만났다.
얼굴엔 덕지덕지 역겹게 화장을 떡칠하고 나온 우리 또래의 그녀는, 어린 내가 보기에 그 생활을 은근히 즐기는 듯한 느낌이 들기에 빵만 사주고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졸업을 앞둔 어느날 우리 단짝들을 정읍의 깡심이네 집에 놀러갔다.
당시 독감으로 목이 부어 말을 할 수 없었던 나는 깡심이 아버지께서 담아놓으신 인삼주를 몇잔 씩 훔쳐 마신 후 곯아떨어졌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독감이 말끔히 달아나 있었다!
5.대학시절ㆍESF - 고교생활을 마감할 대입준비 무렵 극심한 정서불안증에 시달렸다.
예비고사를 치뤘는데, 수학을 백지로 내서 원하는 대학 성적에는 훨씬 미달했고.
전에 중고교 입시에 낙방해서 부모님을 실망시킨 트라우마가 있어 최대한 하향지원을 했다.
복안은 원하는 행시(行試)준비를 학업을 계속하면서 하기로 했다.
어차피 법대생이나 나나 똑같은 출발선상에 서있는 것이니......
우선 민법책을 사서 훓어나갔다.
행시가 마음에 든건 수학과 과학 과목이 없기 때문이다.
영문학을 전공하는 기돈과 교복을 같이 맞춰입고 입학식에 참석했다.
고교 교복에 카라만 달린 인민복 스타일의 촌스런 웃옷만 입었는데, 곧 입지 않게 되었다.
시내를 다닐 때는 최대한 골목길을 택했다.
혹 아는 사람을 만나 어느 대학에 진학했냐는 물음을 피하기 위해서다.
자연스럽게 새 학우들을 만났고, 어울려 음주와 끽연도 시작했다.
간호대학의 좋은 친구들을 만나 "옛샘화"라는 친목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회화 써클의 선후배들과 덕진의 버드나무 집(당시 안주좋기로 소문난 막걸리 집)에서 거나하게 취해 걷는데 땅이 움직여 걸음이 걸어지지 않았다.
당구장에서 여선배라고 하는 분이 아는 체를 하는데, 도대체 누군지 알아볼 수 없다.
"죄송하지만 제가 너무 취해서 알아뵐 수 없으니 나중에 인사드리겠다"고 사과드렸다.
아! 취하면 몸이 말을 듣지 않지만 정신은 멀쩡하구나!
선배들이 덕진역에서 군산행 기동열차에 태워줬는데 곧 잠이 들었다.
자다가 눈을 떠보니 창밖에 "대야"라는 팻말이 보인다.
서둘러 내려 보니 눈이 내려 쌓이고 있다.
역에서 우리 집까지는 논밭을 가로지르는 신작로로 3.5키로.
날은 어둡고 눈이 내려 쌓이고, 술취한 몸뚱아리로 집까지 찾아갈 수 있을지?
언뜻 안개낀 내 인생과 같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정신이 들어 번쩍 눈을 뜨니 "아뿔사! 우리집 대문 앞에 서있는 것이 아닌가!"
누구에겐가는 모르나 너무 감사했다!
선배 추천으로 ESF(기독대학인회)에 들었는데, 크리스챤들이 주초문제에 매이지 않기에 행시 패스에 도움을 주지 않을까 해서이다!
몇번 참석하다가 겨울방학을 맞아 방콕하고 있었다.
눈이 소담히 내린 어느날 , 사립문 앞에 낯선 손님이 서서 찾기에 나가보니 재철 선배가 아니신가?
이 누추한 시골 구석까지 성경공부를 일대일로 하자고 찾아오신 것이다!
너무 고맙고 황송해서 약속하고 창세기 공부를 ESF회관에서 시작했다.
성경공부 첫날 창세기 1장을 재철 선배와 공부했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신 말씀이 마음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고도 심히 좋았더란 말인가?"
"나같이 열등감으로 절어 있는 사람도 하나님의 기쁘신 존재란 말인가?"
자전거로 귀가하며 난 "죽어도 좋아!"를 연발하며 하늘을 날았다!
그런데 큰 고민이 하나 생겼다.
성경을 공부할수록 그속에 어마어마한 진리가 내포돼 있어 어쩌면 내 생애를 드려야할 것같은 생각이 든다!
"이건 아니지? 난 출세라는걸 해서 부모님 실망시킨걸 만회해야 하고, 비켜라 인생아 내가 간다고 떵떵거려야 해!"
학기말 사경회를 마지막으로 마음의 보따리를 쌌다.
행시 패스 이후로 다시 믿을 계산으로!
임종학 목자님의 설교시간.
본문은 요한복음의 오병이어 사건이다.
예수께서 2만여 명을 오병이어로 먹이신 후, 제자들과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셔서 제자들과 교제하시는데, 그 먼길을 돌아서 청중들이 들이닥친다.
이에 "내가 준 떡은 몇시간이면 배고프지만, 내게는 영원히 배부른 떡이 있는데 곧 나 자신을 먹는(믿는) 것이다!"고 하신다.
저분만 따르면 식병사(食病死)가 해결되기에 강제로 잡아 임금삼으려던 청중들은 실망하여 떠나갔다.
성경에는 없지만, 예수께서 (눈물이 그렁그렁 하셔서) "너희도 가려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그때 난 가슴을 두 손으로 꽝꽝 치는 천둥같은 음성을 들었다!
"용석아! 너도 갈래? 너도 갈래?"
난 그 자리에서 꼬꾸라졌다!
출세를 위해 의리를 버리고 보따리를 쌌음이 심히 양심의 가책이 되었다!
너무 부끄러워 눈물 콧물을 쏟으며 회개했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내 일생을 헌신하겠으며, 중국선교에 투신하겠다고 약속드렸다!
77년 당시 중국은 "죽의 장막"으로 불리며 "문화대혁명"이 진행되는 시기였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내 인생의 주제로 삼았다!
마태복음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을 읽는데 투자했는데, 그렇게 마음이 평화로울 수 없었고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았다!
시편 19;10.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시편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마음의 보따리를 풀자마자 행시를 버렸고, 졸업 후 신학공부할 것을 아신 어머니는 용돈을 끊으셨다.
그때부터 용돈없는 대학생활로 혹독한 훈련을 시키셨다.
미팅 한번, 커피 한잔 마실 수 없었고, 다가동에서 전북대까지 걸어 다녔다.
한번은 등교에 늦어 시내버스를 두 번 타서 240원 쓴 달도 있었다.
막내동생은 성격이 꼼꼼하고 절약정신이 강해서 항상 꽤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는데, 용돈을 빌면 두말없이 내주곤 했다.
크게 될 녀석은 떡잎부터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참 째째하다고 생각될 때도 많았다.
내일 정오에 만 원이 필요해서 기도드리면 십분 전쯤 해서 구천원쯤 주셨다.
나같으면 기도하는 즉시 이삼만 원 던져줄텐데!
그러면 얼마나 할렐루야 하고 믿음이 쑥쑥 자라면서 폼나게 쓸까?
그때 만나 평생 신실한 믿음의 선배와 동료가 환식, 조, 재철, 재환, 의식, 봉주, 상진, 원대 형제들이다.
귀녀 목자님의 섬기는 성품과 손길이 너무 아름다워 "향기로운 여인"이라고 수첩에 적었다.
남동생 둘을 전도했더니 죽산 나사렛 성결교회에 잘다녔다.
어머니께서 주일에 교회에 못가게 하실 량으로 토요일 저녁에 "내일 두엄 다 내라!"는 임무를 주시면, 주일 새벽에 힘좋은 둘이서 다 끝내놓고 예배에 참석한 기특한 동생들이다!
작은 형님이 장가들어 여지껏 봐온 중 최고의 미녀를 색시로 모셔오셨다.
"그래서 노총각으로 여지껏 기다리다가 그 멀디먼 부산까지 가서 모셔오셨구나!"
고3때부터 내 밥을 해주셨는데 마음씨가 곧고 정직하시며, 사랑이 많으시다!
전도했더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신다.
한번은 "도련님은 누가보면 위선자같아요!" 하셔서 다시 물으니 작년과 금년의 내가 180도 변했단다! 좋은 쪽으로!
"햐! 사람보는 눈은 높으셔서!"
4학년 때 선교부장을 맡아 각종 수련회와 전국대회를 기획했고, 내 돈의 거의 전부를 세계선교비로 헌상했다.
6.대학시절 하 - 버스정류장에서 고향동네 공장 직공 여동생과 일행을 만났다.
당시 통학생은 절반 운임을 받았기에 요금을 아껴주기 위해 통학생권을 달라고 시켰더니 매표원이 즉각 알아보고 일반표를 줘서 그녀들을 무안케 했다.
아마 신분을 속이는 일이 종종 있었나 보다.
그 일이 두고두고 내 양심을 괴롭혔다!
어머니께서 입학선물로
사슴닮은 양복을 해주셨는데. 나와 마음이 잘 통할 것같은 여고생에게 보여주고 싶어 불러냈다.
그런데 그녀가 별로 감동을 보이지 않아 실망스러웠다.
그런 그녀가 졸업식날 마지막 교복입은 모습을 내게 마지막으로 보여주고 싶다고 해서 동산촌 고속도로 다리밑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에 가지 못한다는 연락을 받고도 세 시간을 서서 기다렸다.
그녀의 교복입은 마지막 모습을 그려보는 설레임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 시간이 지루하지 않고 행복했다!
통학열차 안이 시끄럽다.
어떤 이십대 초반의 처녀가 중년의 아저씨와 성경토론을 벌이는데, 성경을 깊이있게 알진 못해도 말빨이 세서 결코 지지 않는다.
토론이 끝난 후 미수라는 그녀에게 매주 한시간씩 성경공부를 제안하니 쾌히 승락해서 몇달동안 지속했다.
그녀 엄마의 생신잔치에 초대받아 인후동 근처의 그녀 집에 가서 병약하신 모친과 오빠와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식사를 대접받았다.
이리역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역에서 500M 쯤 떨어져 사시는 누님 집 앞에 1M 길이의 철도 레일이 토막나서 날아왔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고 거리는 가게의 쇼원도우가 깨져서 도로 위를 덮었다.
소문에 역 주변의 창인동 사창가의 여인들의 허벅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단다.
고2때 쯤 중학동기생 승락이가 배차장에서 한 여학생을 잠깐 소개해 줬다.
그녀의 첫인상이 소박했지만 너그러울 것 같았다.
그녀를 그녀를 이년 쯤 후에 버스 안에서 다시 미옥ㆍ행녀 친구와 다시 만나 이름을 주고 받았다.
알고보니 목회자 따님이어서 한창 성경공부에 열심인 때라 자연스레 교제하게 되었다.
딸촌으로 유명한 대장촌에서 어린이 집을 경영하는 그녀는 목회자의 가정이어서 형편이 어렵지만 씩씩하고 가정에 대한 자부심과 희생정신이 강하고 포용력이 있어 교제로 발전했다.
어린이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 모시고 살던 팔순의 할머니께서 서적 외판원으로 아시고 냉대하셨다.
나중에 손녀딸의 남친인줄 아시고 얼마나 미안해 하시며 잘해 주시는지!
한번은 가을 무우를 저장해야한다고 해서 시골 아버지께서 하시는 방법대로 땅을 파고 무우를 거꾸로 넣고 짚을 덮고 흙을 깔았는데 봄에 파보니 몽땅 썩어서 체면을 구겼다.
또 한번은 할머니 보신용 개를 잡아야 한다셔서 좀 떨어진 농수로 콘크리트 수문에 개목을 매달았는데 죽었는가 싶어 내려놓으면 다시 살아나곤 해서 경을 쳤다.
우리의 데이트는 주로 덕진공원과 소양시냇가를 걸었다.
데이트 중 그녀의 부유한 맏언니에게 들켰는데, 허우대는 멀쩡하고 실속은 없게 생긴 내가 마음에 차지 않았는지 자꾸 동생에게 선을 보라고 종용하셨단다.
"저러저런! 상남자를 알아 보는 눈이 저렇게 어두우셔서야 원!"
항상 가난했던 나는 500원 짜리 자장면을 한그릇 시켜 둘이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한번은 동생들과 자고있는 한밤중에 길가로 향한 창문이 스르르 열리고 복면을 쓴 남자가 창으로 들어오려 하더란다.
마침 동생이 늦게까지 공부하느라 불이 켜져 있고.
그녀는 "너! 누군지 알어! 안 가!" 하고 호통을 쳤더니 내빼더란다.
"그녀와 결혼하면 강도 걱정은 없겠다!" ㅋ
내가 신학을 간다면 자기가 광주리 장사를 해서라도 꼭 뒷받침할 결심이래서 감격했다!
"햐! 마음 미녀는 꼭 사람 보는 눈이 있어요! ㅎ
될 사람은 마음 미녀에게만 보이다니까요!"
대학을 졸업하면 곧 입대해야 하지만 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하며 꿈에 부풀었다!
"나보다 대학 잘다닌 사람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