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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화구욕도』와
이인로를 통해 본 고려와 금나라의 서화 교류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62)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필자는 4월 15일자로 기고한 제59회의 글 「고려회화의 다양성 연구의 단초를 우선 고려불화에서 찾아야」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고려와 금은 국경을 맞대고 있었고, 『파한집』의 편자 이인로(李仁老, 1152~1220)는 1182년에 금나라로 가는 하정사행(賀正使行)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였다가 1183년에 귀국한 바 있는데, 당시 이인로는 금에서 중국 회화에 많은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이에 관하여는 후일 다른 글에서 논하고자 한다)”라고 한 것이다. 이번 기고는 고려의 이인로와 금나라 미술의 교류 관련성을 탐색한 관점을 쓴다.
1986년이다. 당시 답십리 고미술상가 6동 1층에 있는 한 골동상점 D사를 들렀다. 나는 그 골동상점과는 오래 거래를 하였다. 상점에는 액장(額裝)의 낡은 화조도(花鳥圖) 1점이 있는데, 그림은 한 눈으로 보아도 전형적인 중국 남송(南宋) 시기의 화풍이 보였다. 당시나 지금이나 나는 고화를 보면 그 작품의 수준과 어느 정도 오래된 그림인가를 직감한다. 당시에 나는 이 화조도를 Y 사장이 달라는 대로 주고 매입하였는데, 이제 이 화조도와의 인연을 여기에 사실 그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1. 중국 화조도를 탐색하다
『행화구욕도』, 12C 금나라 작가 작품으로 추정, 견본채색, 37cm×40.5cm. [사진 제공 – 이양재]
왼쪽 상단부 꽃 부분, 살구꽃을 그렸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구관조 부분, 상당한 공필화 필력을 보여 준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중국의 화조도 고화를 매입하고 25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흐른 2011년에 나는 이 작품에 관한 탐색에 들어갔다. 우선 그려진 새가 무슨 새인지를 알아내야 한다. 중국의 화조화를 탐색하는 동안 현전하는 송대의 화조화 가운데는 구욕도(鸜鵒圖)를 그린 것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고, 기존에 알려진 그 송대의 구욕도와 대비해 보니 구욕(鸜鵒, 九官鳥)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송대의 구욕도는 구관조가 앵화(櫻花, 벚꽃)에 앉아있는 『앵화구욕도(櫻花鸜鵒圖)』는 있는데, 1986년에 내가 매입한 화조도의 꽃은 앵화가 아니라 행화(杏花, 살구꽃)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화조도에 작품명을 붙이자면 『행화구욕도(杏花鸜鵒圖)』라 하여야 하는데, 흥미로운 점은 행화에 앉은 구관조를 그린 중국 고화(古畫)는 이 작품 외에는 달리 조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살구나무는 추운 겨울을 잘 견디는 식물로서 대륙성 기후가 나타나는 곳이 원산지이다. 복숭아보다 더 추위를 잘 견디며 영하 30도까지도 견딜 수 있어 중국 남방보다는 북방에서 많이 애호되었다. 서리에도 잘 견디기 때문에 꽃이 이르게 피는 편이다. 따라서 필자가 판단하기에 행화를 구관조와 함께 그리는 것은 따뜻한 남방의 남송(南宋)보다는 북방 금(金)나라의 화풍이다.
이 『행화구욕도』는 견본채색(絹本彩色)으로 세로가 37cm 가로가 40.5cm이다. 표구된 상하좌우의 비단도 금사가 들어간 중국의 옛 비단이다. 즉 장황(裝潢)도 그림이 그려진 시대와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2. 『행화구욕도』를 검증하다
나는 1990년대 초부터인가 중국과 일본을 매년 10여 차례 드나들었다. 베이징을 갈 때면 거의 매번 북경 유리창의 중국서점을 들렀다. 중국 북경에서 나는 ‘중국가덕국제박매유한공사(中国嘉德国际拍卖有限公司, 이하 가덕옥션)’와 ‘북경한해박매유한공사(北京瀚海拍卖有限公司)’, ‘북경보리국제박매유한공사(北京保利国际拍卖有限公司, 이하 폴리옥션)’ 등 여러 경매회사와 각기 그 창립 초기부터 거래하고 있다. 때로는 매입하기도 하고, 때로는 출품하기도 한다.
나는 일본에 있는 중국의 미술품과 고서를 매입하기 위해서 일본을 드나들었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과 일본에 있는 중국 고서와 고서화를 사들여 중국 경매에 출품하여 팔았다. 특히 일본과 미국에서 사들인 돈황사경은 나에게 큰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40대 이후 60대 초반까지 약 20년간 중국의 문물(文物) 시장은 안견논쟁(1994년) 이후 어려움에 부닥쳐있던 나를 먹여 살린 것이다. 나는 항시 어려운 시절 나를 먹여 살린 베이징의 이들 몇몇 메이저 경매사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2006년경으로 기억한다. 나는 1986년에 매입한 화조도를 베이징의 메이저 경매에 출품하기 위하여 북경으로 가져갔다. 메이저 경매사의 선두를 달리는 가덕옥션이나 폴리옥션의 고서화부에 출품을 의뢰하니, 모두 중국 남송 시기의 화조화라고 단정하면서도 보존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출품가를 형편없이 낮추려고만 한다. 결국은 가덕옥션과 폴리옥션에 출품하는 것은 포기하였다.
다시 10여 년 후인 2016년경에 베이징에서 중견급 경매사로 평가받는 ‘북경태화가성박매유한공사(北京泰和嘉成拍賣有限公司, 이하 태화옥션)’로 가져갔다. 태화옥션에서는 내가 요구하는대로 인민폐 60만 위안에 접수하였으나 가격이 만만치 않았는지 유찰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하여 이 화조도는 내가 판단한 대로 중국 남송 시기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입증이 되었고, 중국에는 이런 정도의 남송 시기의 화조도는 상당수 현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결국 나는 『행화구욕도』를 다시 국내로 가지고 들어왔다.
3. 『행화구욕도』의 전존 이력을 찾아 나서다
중국의 사치류나 서방달 선생을 위시한 문물학자들은 중국의 송원시대(宋元時代)의 서화가 고려로 대거 유입되었다고 말한다.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의 딸로 태어난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1259~1297)는 1274년(원종15) 5월에 원나라에 있던 고려의 세자(후의 충렬왕)와 혼인하였는데, 이 세자가 즉위하면서 함께 고려로 들어가게 되었다. 중국의 회화사학계는 당시 제국대장공주는 원나라 황실에서 소장 중인 막대한 서화를 고려로 가져갔다고 주장한다.
제국대장공주는 매우 탐욕스러웠고 이재(理財)에 밝았던 왕비로 『고려사』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1992년에 중국의 문물학자 서방달 선생과 양신 선생 등은 제국대장공주가 가져간 고서화가 지금도 남아 있는가를 내게 물은 바 있다. 나는 없다고 답하였다. 다만 조선초기에는 있었을 것이라 답하였다.
고려 충렬왕의 왕비인 제국대장공주는 1297년에 고려에서 사망한다. 그로부터 148년이 지난 1445년에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의 권유로 안평대군이 소장한 고서화를 중심으로 「화기(畵記)」를 남기는데 당시 안평대군의 수집품은 안견이 그린 작품 이외에는 거의 모두 중국 송원명(宋元明)의 서화였다. 그 수집품 중에는 제국대장공주가 고려로 입국하면서 들어온 송원대의 서화가 일부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기에 조선 초기에는 제국대장공주가 고려로 가져온 그림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현재 국내에 현전하는 중국 송원대의 고서화는 거의 확인되는 것이 없다. 필자의 생각에는 그 대부분이 안견의 『몽유도원도』처럼 임진왜란시 일본으로 약탈되거나 중국 명나라 장수의 차지가 되었던 듯싶다. 그러나 1986년에 출현한 『행화구욕도』는 분명 국내에 전래하였던 흔치 않은 작품이다. 어딘가에 그 기록이 있을 수 있다는 관점에서 필자는 2006년부터 『행화구욕도』에 관한 고문헌을 탐색하였다.
요즘에는 네이버나 다음에서 『행화구욕도』를 치면 수십 건의 검색이 나오지만, 2006년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이인로(李仁老, 1152~1220)를 조사하는 가운데 그가 지은 한시 『행화구욕도』가 『동문선』 권지20에 나오는 것을 어렵게 확인하였다.
4. 이규보의 『행화구욕도』 시를 찾다
이인로는 『파한집(破閑集)』의 편저자이다. 『파한집』은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시화집(詩話集)이다. 이인로는 『은대집(銀臺集)』과 『파한집』을 짓고 『쌍명재집』을 편찬했다고 하는데, 『파한집』만이 현전하고 있다. 이인로의 문집은 없어졌지만, 『동문선』에는 그가 지은 한시 90여 편이 실려 있다.
나는 『동문선』 권지20, 장6 뒷면과 장7 앞면에 나오는 이인로의 「행화구욕도」 칠언시(七言詩)는 1986년에 매입한 『행화구욕도』를 대상으로 한 그림일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이인로의 칠언시 「행화구욕도」는 견본채색의 그림 『행화구욕도』와 상통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전하는 남송 시기의 『행화구욕도』 전래본은 우리나라에서 발견한 이 작품 한 점뿐이다.
「杏花鸜鵒圖) / 행화구욕도」
欲雨未雨春陰垂 / 비가 올듯올듯 봄구름이 드리웠는데
杏花一枝復兩枝 / 살구꽃은 한 가지요 또 두 가지 피었구나
問誰領得春消息 / 묻노니 그 누가 봄 소식을 차지했는가
唯有鸜之與鵒之 / 오직 저 구지와 또 욕지가 있을 뿐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흔히 새는 암수의 명칭을 달리 말한다. 예를 들어 장끼와 까투리는 같은 꿩이지만, 장끼는 수컷을 말하며, 까투리는 암컷을 말한다. 구욕(鸜鵒)에서도 구(鸜)는 찌르레기 수컷을. 욕(鵒)은 찌르레기 암컷을 말하는 것 같다.)
『동문선』 권지20 첫 면과 칠언시 「행화구욕도」 부분. 1478년 초판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이 시문을 확보한 수년 후, 아마도 2017년일 것이다. 지방의 어느 경매에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편찬한 『동문선』 권지19~22, 4권1책이 경매물로 나왔다. 보주(補鑄)한 글자가 좀 섞이기는 하였지만, 분명 1434년에 주조하여 사용한 갑인자 인출본이다. 그렇다면 1478년에 나온 초판본이 틀림없다. 이 책의 권지20에 『행화구욕도』가 나와 있음을 아는 필자는 최고가로 입찰하여 낙찰받았다. 원전을 확보한 것이다.
그리고 1년 후 나는 소장품 고서를 뒤적이던 중에 갑인자본 『동문선』 초판본 한 책을 발견하였다. 아차! 그 책에도 권지20이 들어 있다. 이미 오래전에 『동문선』 초판본 한 책을 매입하여 나의 서고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 책의 권수(권번호)를 모르고 있다가 한 책을 더 매입한 것이다. 기억과 메모를 더듬어 보니 1986년 『행화구욕도』를 사던 시점에 그 골동상점 D에서 매입한 것이다. 이럴수가‥‥‥!
나는 그 골동상점 D의 Y사장에게서 『재조본 유가사지론(再雕本 瑜伽師地論)』 수십책을 일괄 입수한 수 그 중 권64,1책을 골라서 1986년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신청하여 1988년 12월 28일자로 보물 지정을 받은 바 있다. 또한 같은 일자로 보물 제971호로 지정된 『묘법연화경 권5~7』 3권1책(참조: 연재기사)에서 떨어져 나온 간기 부분 두 장도 그 골동상점에서 매입한 것이다. 그렇게 80년대 중반에 그와는 거래가 많았다.
갑인자본 『동문선』 권지20 부분권을 복수(複數)로 소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지 몇 년 후 국립한국문학관의 자료구입공고가 나왔다. 이번부터는 고전문학자료도 구매한다고 한다. 나는 결국에는 복본으로 소장하고 있는 『동문선』 한 책을 납품하였다. 내게는 동일본이 두 책 소장되어 있었지만, 『동문선』 초판본은 낯 책이라도 매우 희귀본이다. 모두 모은다고 해도 한 질의 절반도 채우지 못할 것이다.
5. 이인로와 중국 송·금대 미술
이인로는 칠언시가 실려 있는 『동문선』 권지20, 장1 뒷면부터 장3 앞면까지 「송적팔경도(宋迪八景圖)」를 주제로 한 7언시가 실려 있다. 이 「송적팔경도」는 11세기 북송의 화가 송적(宋迪)이 그린 『소상팔경도』를 보고 지은 시이다. 그리고 이인로의 서(書)에 관한 칠언시 「제초서족자(題草書簇子)」도 『동문선』 권지20, 장1 앞면에 수록되어 있다. 즉 이인로는 당대의 문인으로서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밝은 인물이었다. 이인로는 송적의 『소상팔경도』를 어디서 보았을까?
이인로는 “25세 때에 태학에 들어가 육경(六經)을 두루 학습했는데, 1180년(명종10) 29세 때에는 진사과에 장원급제하여 명성이 사림(士林)에 떨쳤다. 31세 때인 1182년 금나라 하정사행(賀正使行)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였고, 이듬해 귀국하여 계양군(桂陽郡) 서기로 임명되었다”라고 한다. 즉 이인로는 1182년 당시 고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던 금나라(1115~1234)에 정사(正使)를 수행하여 다녀왔다.
당시 금나라의 황제는 제5대 황제 세종(世宗, 재위 1161~1189)이고, 금나라의 수도는 1153년부터 1214년까지는 중도대흥부(中都大興府)였다. 중도대흥부는 지금의 북경이다. 즉 이인로는 송적의 『소상팔경도』를 북경에서 보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아울러 작자 미상의 『행화구욕도(杏花鸜鵒圖)』 역시 북경에서 보았거나 취득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현전하고 있는 『행화구욕도(杏花鸜鵒圖)』의 고려 유입자는 이인로나 당시의 사행원 일행일 수 있다. 그들은 금나라에서 이 작품을 구입하거나 수여(授與)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 『행화구욕도』는 남송 시기의 화풍으로 그려진 작품이지만, 이인로의 칠언시에 언급된 그 작품이라면 이 『행화구욕도』는 금나라 화공이 1182년과 1183년 사이에 그린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이때는 금(金, 1115~1234)이 건국되었는지 67~8년이 되던 시점인데, 금나라는 1125년 요나라를 합병하고 1153년 동북의 회령(지금의 하얼빈)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여 중앙수도라는 뜻의 중도(中都)라고 개칭했다.
6. 맺음말
- 1986년에 골동상점 D에 출현하여 수집된 남송 시기의 화풍의 화조도는 국내 전래품이다. 이 화조도에 그려진 새는 구관조이고 꽃은 살구꽃인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은 『행화구욕도』이다. 살구꽃은 중국 남방보다는 북방에서 많이 번식되었다. 즉 살구꽃은 중국 북방의 꽃이다. 따라서 국내 현전본 『행화구욕도』는 남송의 화가가 그린 작품이라기 보다는 금나라의 작가가 그린 작품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 이규보는 1182년에 고려의 사신으로 금나라 수도 북경에 갔다가 1183년에 귀국하였다. 이규보가 지은 송적의 『소상팔경도』와 작자 미상의 『행화구욕도』를 주제로 한 칠언시는 『동문선』 권지20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칠언시 「행화구욕도」는 국내 현전본 그림 『행화구욕도』와 상통한다.
- 고려와 금나라는 국경을 마주하는 나라이면서도 무력 충돌이 전혀 없었다. 두 나라는 활발한 문화의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필자는 이규보가 송적의 그림을 보고 지은 칠언시 「송적팔경도」, 칠언시 「행화구욕도」와 작자미상의 『행화구욕도』, 서(書)에 관한 칠언시 「제초서족자(題草書簇子)」를 고려와 금나라가 교류한 증거로 제시한다.
중국과 대만에 있는 송원대의 그림들은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그러나 필자가 1986년에 발견하여 매입한 작자미상의 『행화구욕도』는 보존 상태가 불량하여 상품으로서의 가치는 떨어진다. 그러나 중요한 문화재이다. 이 작품을 요구하는 국공립박물관이 있다면 무상 기증하고자 한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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