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4. 5. 26(주일) - 삼위일체주일, 성령강림절 후 첫째 주일 - (2024년 21주)
제목; “성령으로 인도받는 하나님의 자녀”
성경; 롬 8:12-17 (p.249) (시 29:1-2, 213<348>, 310<410>, 4
<예배의 부름> (시 29:1-2)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삼위일체주일을 맞이하며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 평강이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삼위일체주일”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일체, 하나가 되신다는 주일입니다. 지난 주일 “성령강림절”에 성령님께서 임하시므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함께 역사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 속에, 항상 건강하고 평안하며 풍성한 은혜의 삶을 살아가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길 기원합니다.
특별히 독일 개신교회에서는 성령강림절과 삼위일체주일을 에큐메니칼(ecumenical) 주일로 지키면서 교회 일치와 선교에 초점을 맞추어 특별 프로그램을 갖습니다. 우리도 이런 개신교 전통을 따라 성령강림주일과 삼위일체주일을 보내면서 우리 사이의 모든 벽과 담을 허물고 에큐메니칼, 일치와 화해, 선교에 앞장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웃과의 연대와 양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와 질문을 하면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유람선이 태평양을 지나가다 풍랑을 만나 좌초됐습니다. 그래서 구조 헬기가 와서 사다리를 내리니.. 여자 1명에 남자 10명이 사다리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헬기는 딱 10명까지만 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장이 부탁을 했습니다. “제발 한 명만 놓으세요, 한 명만... 안 그러면 우리 다 죽습니다. 줄을 놓으실 분 손 들어 보세요.”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겠습니다.“11명 중 과연 누가 양보하고, 누가 살아남았을까요?”
이때 한 명뿐인 여자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평생을 남편을 위해 희생하고~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살았는데 이번 한 번 더 희생 못할게 뭐가 있겠습니까.. 제가 놓겠습니다.”그 말에... ‘남자들이 박수 치다가 다 떨어졌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글의 제목이 “지혜로운 여인과 지혜로운 남자”였는데, 과연 누가 지혜로운 사람일까요? 오늘이 삼위일체주일로 에큐메니칼(ecumenical) 주일로 지키며, 교회 일치와 선교에 초점을 맞춘다고 했는데, 우리 모두 서로 내가 먼저 양보하고, 모든 벽과 담을 허물고 일치와 화해를 이루며, 천국을 이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II.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롬 8:12-17)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님으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 성도’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삼위일체주일 겸 성령강림절 후 첫째 주일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모든 신자에게 양자의 영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 영의 은택을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분이 정립된 것입니다. 그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상호 내주하며 교통하는 긴밀한 협력 관계에서 일하시되, 우리의 정체성을 상기시켜 주며 우리의 삶의 도리를 깨우쳐주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임한 성령의 현존을 우리가 의식한다면 더는 육신에 빚진 자로 살 수 없습니다. 육신의 동물적 욕망에 매여 영원한 소망이 없는 자처럼 살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성령님께 이끌려 산다면 부활의 영광만 탐하듯이 달콤한 환상에 도취해 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에게도 십자가의 길을 지시하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님이 부활의 영광에 다다르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 십자가의 고난이 필수 코스임을 우리로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죄의 법을 이기는 성령의 법을 가르쳐주는 8장에서 오늘 본문 12-17절은, 그리스도의 영(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육신의 세력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게 된 성도는(9-11), 빚진 자로서 육신대로 살면 안되고 성령으로 몸의 악행을 죽여야 살 수 있으며(12-13),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의 자격과 특권을 말씀하신 후(14-16),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어 영광과 고난을 함께 받고 천국을 상속받게 됨(17)을 가르쳐 줍니다.
성령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1. 성령님을 따르는 성도의 삶(12-13)
1) 빚진 자로서 육신 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12)
“그러므로”(아라 운, Ἂρα οῧν), 지금까지 베푼 가르침(1-11),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으며 성령을 따라 산다는 가르침의 결론으로, 성도들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권면과 훈계를 주고자 하는 접속사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J. Calvin)은 “이는 지금 말한 바의 결론이다 : 만일 우리가 육체를 버렸으면 거기에 따라가서는 안될 것이요, 만일 성령이 우리 안에서 지배하셔야 한다면 그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것은 모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성도는 “빚진 자”입니다. “빚진 자”(오페일레타이, ὀφειλέται)는 ‘빚지다’(오페일로, ὀφείλω)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채무자’란 뜻이며, ‘의무를 이행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자들의 도덕적 의무감을 가리키는 것으로, 성도는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사는 가운데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성도는 삼위일체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의 전 과정을 걸쳐 사랑의 빚진 자이므로,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합니다(골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구원 받은 성도는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면 안됩니다’.공동번역은 “그러나 육체에 빚을 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살 의무는 없습니다.”로 번역하여, 개역개정과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도는 육신이 연약하여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에게는 갚아야 할 빚이 없는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육신을 따라, 즉 죄에게 종노릇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대하여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사람이 깨끗하게 목욕하고서 다시 흙탕물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그 어리석음을 책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13)
개역개정성경에서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헬라어 원문에서는 본절 역시 이유나 설명을나타내는 접속사 ‘가르’(γάρ, 왜냐하면, …때문에)가 포함되어 있어서 본절과 앞절 사이에 긴밀한 연계 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은 앞절의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와 연결되는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합니다. 바울은 앞절에서 로마 교회 성도들은 육신에게 빚진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육신에게 굴복해서 육신의 욕구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본절에서 육신대로 살아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앞절에서는 “우리가”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바울이 자신을 포함해서 로마 교회 성도들 모두가 육신에 빚진 자가 아님을 강조한 반면에, 본절에서는 “너희가”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구별을 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단순히 로마 교회 성도들 중 일부가 육신의 욕구대로 산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강한 경고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입니다. 그가 강력한 권고를 하는 이유는 바로 육신대로 산다면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멜레테 아포드네스케인)에서 ‘멜레테’(μέλλετε)는 ‘곧 …하려고 하다’, ‘반드시 …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멜로’(μέλλω)의 2인칭 복수 현재 능동태 직설법입니다. 이 낱말은 가까운 미래나 필연성을 나타내며, 영어 성경은 ‘너희는 반드시 죽는다’(ASV, NASB, you must die), 또는 ‘너희는 죽을 것이다’(NRSV, NKJV, NIV, you will die)로 번역합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신적(神的)인 법령이나 명령이 따라오는 것을 강조하여 반드시 죽도록 결정되어 있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우리의 신체적인 몸의 죽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11-12절에서 바울은 영 가운데 있는 자들도 신체적인 죽음을 경험할 것이라 고말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는 신학적이고 종말론적인 죽음,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소원해져서 영원한 형벌에 이르는 죽음을 가리킵니다.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결과는 죽음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영”(프뉴마)은 10절의 경우와 같이 ‘사람의 영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몸의 행실”은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 본성을 따라 행하는 모든 악한 행실을 가리키며, 이것은 5절에서 “육신의 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본절은 성도가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자신 가운데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더불어 죄에 대항하여, 그리고 자신의 죄성(罪性)에 대항하여 싸우면 최후의 승리를 거두고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을 온전히 이루게 된다는 말입니다(빌 2:12).
2.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 :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14,16).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4)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16)
오늘 본문 14-16절의 말씀을 정리하자면 다음 세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①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는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 ②너희는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게 된다. ③성령이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
그렇습니다. 죄인인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므로 가능합니다. 여기서 “인도함을 받는”(아곤타이, ἄγονται)은 ‘인도하다’, ‘데리고 오다’, ‘이끌다’는 동사 ‘아고’(ἄγω)의 현재 수동태로 ‘…에 의해 지배를 받는’, ‘…에 의하여 감독을 받는다’, ‘항상 이끌림을 받는다’는 뜻으로, 성령이 믿는 자들에게 순종하도록 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합니다. 이는 강제로 함이 아니고, 성령께서 내적으로 마음을 변화시켜 감화로 인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낱말(아고)은 소경 또는 어린 아이의 길을 인도하는 것에서 온 낱말입니다. 실로 거듭난 신자는 갓난 아이처럼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입니다.
또한 죄인인 성도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해 줍니다(16). 이와 관련하여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M. Luther)는 “누구든지 인간을 영적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영적 지혜를 깨닫게 하는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을 수 없으며 또한 믿어지지도 않는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즉 성령님께서 우리로 믿게 하시는 역사가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부성(父性)을 이해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에 대하여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일이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인인 우리들은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의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요 1:12).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증언을 통해 확증됩니다. 매일 말씀 묵상하고 기도하므로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자신 있게 살아가는 성도님들 다 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3.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의 특권과 받을 복 :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증언 가운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리가 주어지고 복을 받게 됩니다.
1) 다시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함(15a) :
15절의 헬라어 원문에는 ‘가르’(γάρ), 곧 ‘왜냐하면 …때문에’란 접속사로 시작되어, 14절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입증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의 특권과 받을 복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합니다.’“종”(둘로스, δουλός)은 옛 사람의 표상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기 이전의 사람들은 죄의 종으로서 두려움 가운데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종노릇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란 죄의 종노릇하는 자들이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할 수 없음을 깨달아 마음 속으로 두려워하는 것(딤후 1:7)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죽음과 천재(天災) 등을 두려워하여 일평생 근심 속에 지내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영접한 이들은 생명과 성령의 권세로 말미암아 그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1-2).
2)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름(15b) :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은 성도는 “양자의 영”을 받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여기서 “양자”(휘오데시아스, υἱοθεσίας)라는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오직 바울만 사용하는 용어로 70인역(LXX)에서도 단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독특한 용어를 사용해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믿는 자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옛 가족 관계의 완전한 단절은 물론 새로운 가족, 즉 하나님과 가족을 이루어서 새로운 가족의 일원으로서 모든 권리와 특권과 책임을 부여받게 되었음을 가르쳐 줍니다. 따라서 여기서 바울의 “양자”라는 용어의 사용은 적절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원래는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인간은 그저 피조물일 뿐이었으며, 범죄함으로 마귀의 자녀였던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받았으므로”(엘라베테,ἐλάβετε)는 부정과거형으로 ‘한번 받으므로 영원히 받았다’는 뜻으로, 그때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합일된 때였습니다(요 1:12). 따라서 성도는 “양자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게 된 존재입니다.
이렇게 이제 새롭게 부여된 “양자의 영”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습니다. 여기서 “아빠”(αββᾶ)는 히브리어 “아빠”(אבה)를 그대로 음역한 것으로, 그 해석은 이어서 나오는 “아버지”(호 파테르, ὁ πατήρ)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빠 아버지”, 곧 히브리어 ‘아빠(압바)’(אבה)와 헬라어 ‘아버지’(파테르, πατήρ)를 두 번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의 특권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한편 ‘아빠(압바)’는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를 때 사용하는 낱말로써, 당시 노예들은 상전들에게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부르짖다’(크라조, κράζω)는 본래 감정이 격앙되어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에 못이겨 큰 소리로 하나님을 자신의 ‘아빠(아버지)’로 부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실로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의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된 성도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죄와 사망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된 존재입니다. 특별히 바울은 강조적 의미의 “다시”를 사용하여 한번 아들된 성도는 다시는 그 아들의 특권을 빼앗기지 않을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며, 생명의 삶을 살아가고, 생명을 나눠주는 성도님들 다 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3) 하나님의 상속자가 됨(17a) :
사도 바울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17a)라고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가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받은 “상속자”가 된 것을 3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상속자, 하나님의 상속자, 그리스도 상속자”라고 말합니다. 첫째, “상속자”(클레로노모이, κληρονόμοι)는 ‘재산에 대한 권한을 주다’라는 뜻으로, 유업이나 재산에 대한 권한을 물려받은 자를 가리키며, 당시 사회에서 아버지로부터 가정의 재산을 물려받는 특별한 지휘를 가진 자를 의미합니다. 둘째, 바울은 상속자에 대한 개념을 다시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상속자”(클레로노모이 멘 데우, κληρονόμοι μὲν θεοῦ)로, 이는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에 대해 상속을 받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은것에서부터 이어져 왔습니다(창 17:7).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순크레로노모이 데 크리스투, συνκληρονόμοι δὲ Χριστοῦ), 곧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유업을 얻게 되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가 상속받은 것을 그리스도인들도 함께 상속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후 1세기 경 로마에서는 양자 삼는 것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양자로 입양된 자는 아버지로부터 친아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애정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유산으로 물려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양자를 선택하였습니다.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양자나 친자나 그 법적 권리의 측면에서 하등의 차별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해한 양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자녀됨에 있어 영적으로 어떤 하자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상속자로서(마 21:38)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영광스런 기업을 차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장차 영광스러운 기업의 공동 상속자가 되어 생명을 살리고 천국을 나눠주는 성도님들 다 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4. 하나님의 자녀, 상속자가 된 성도의 의무 : 영광과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17).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
성령의 인도하심과 증언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어 생명과 천국의 유업을 받은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며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먼저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게 됩니다.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쉰돜사스도멘, συνδοξσασθῶμεν)는 직역하면 ‘우리가 함께 영광을 받게 되다’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수동태는 ‘신적 수동태’로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을 받게 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높이셔서 영광을 받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된 믿는 자들 또한 그렇게 영광을 받도록 하실 것입니다(빌 2:5-11).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은 성도는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하나님의 친아들인 예수님이 고난을 받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양아들인 우리 신앙인들도 이 세상 살면서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 고난의 마지막이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복음 전하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고 오해를 받고 억울함을 당하는 일도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처럼 살다보면 세상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손가락질 받을 일도 있을 것이고, 말씀에 순종하여 남에게 양보하고 희생하다 보면 더 큰 손해를 보고 더 큰 상처받는 일도 생기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각자의 환경 속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다양한 고난을 우리가 받게 되겠지만 이러한 고난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되는 의무요 책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고난을 잘 인내하고 극복하면 하나님께서는 더 큰 영광으로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로, 상속자가 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와 함께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18)는 사실을 기억하고, 오늘의 고난을 잘 견디고 승리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III.
오늘이 가정의 달 5월 마지막 주일인데, 2년 전(2022년 2월 26일) 소천한 故 이어령 교수님께서 쓰신 책 속에 우리의 부모님인 ‘엄마와 어머니, 아버지’에 관해 언급한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 故 이어령 교수님 사진 보며)
父(아버지)와 母(어머니)인데도 자식과의 交感은 이렇게 차이가
어느 00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죄수들에게 물었답니다. “세상에서 누가 가장 보고 싶냐?”고 물었더니, 두 개의 대답이 가장 많았답니다. “엄마”와 “어머니”라는 답이...
왜 누구는 ‘엄마’라고 했고, 왜 누구는 ‘어머니’라고 했을까요? 둘 다 똑같은 대상인데.
그래서 또 물었답니다. “엄마와 어머니의 차이가 무엇인가?”
그랬더니, 나중에 한 죄수가 이렇게 편지를 보내왔답니다. “엄마는 내가 엄마보다 작았을 때 부르고, 어머니는 내가 어머니보다 컸을 때 부릅니다!”
즉, 엄마라고 부를 때는 자신이 철이 덜 들었을 때였고, 철이 들어서는 어머니라고 부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첫 면회 때 어머니가 오시자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를 부여안고 “엄마~!”하고 불렀다고 합니다.
세상 어디에도 엄마와 어머니의 정의를 명확하게 한 곳은 없겠지만,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불가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 따르면, ‘엄마는 우리를 낳을 때 3말8되의 응혈(凝血)을 흘리시고, 낳아서는 8섬 4말의 혈유(血乳)를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엄마는 주민등록증 외에 또 하나의 증을 가지고 계십니다. ‘골다공증(骨多空症)!’
그런데 아버지는 손님!! ‘힘없는 아버지’에 대한 슬픈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유학 간 아들이 어머니와는 매일 전화로 소식을 주고받는데, 아버지와는 늘 무심하게 지냈답니다. 어느 날, 아들이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열심히 일해서 내가 이렇게 유학까지 왔는데, 아버지께 제대로 감사해 본 적이 없다. 어머니만 부모 같았지, ‘아버지는 늘 손님처럼 여겼다’”라고 말입니다.
아들은 크게 후회하면서 ‘오늘은 아버지께 위로와 감사의 말씀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집에 전화했습니다.
마침 아버지가 받았는데, 받자마자 “엄마 바꿔줄게!”하시더랍니다. 밤낮 교환수 노릇만 했으니 자연스럽게 나온 대응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아들이 “아니요. 오늘은 아버지하고 이야기하려고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왜, 돈 떨어졌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돈 주는 사람’에 불과했던 겁니다.
아들은 다시 “아버지께 큰 은혜를 받고 살면서도 너무 불효한 것 같아서 오늘은 아버지와 이런 저런 말씀을 나누고 싶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너, 술 마셨니?” 하더랍니다.
참으로 공감이 가는 글이지요? 너무나 부족하고, 전부 다 미완성의 존재인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미완성인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개인과 부부, 자녀, 가정이 몸부림 치면서 완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인생은 미완성”이란 노래를 들으면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 가수 이진관, “인생은 미완성”)
“인생은 미완성” 가수 이진관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 그래도 우리는 곱게 써가야 해
사랑은 미완성 부르다 멎는 노래 /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불러야 해
사람아 사람아 우린 모두 타향인 걸 / 외로운 가슴끼리 사슴처럼 기대고 살자
인생은 미완성 그리다 마는 그림 /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그려야 해
친구야 친구야 우린 모두 나그넨걸 / 그리운 가슴끼리 모닥불을 지피고 살자
인생은 미완성 새기다 마는 조각 / 그래도 우리는 곱게 새겨야 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가정의 달 5월 마지막 주일이고, 삼위일체주일이며, 성령강림절 후 첫째 주일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은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게 하심으로 구원과 영생을 주셨으며, 지난 주에 살펴본 대로 승천하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달라고 간구하시므로 보혜사 성령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시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죄인을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자녀, 상속자로 세워주셔서 감히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해주시고 천국과 영생을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가 된 우리에게 이런 특권과 함께 고난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조금 전에 들은 이진관 가수의 “인생은 미완성” 가사와 같이, ‘우리는 나그네로 타향살이 하는 미완성의 존재이지만, 그래도 함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가슴 따뜻한 모닥불을 지피고 함께 살아가며’ 완성을 향해 달려갑시다. 아멘! 샬롬!!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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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26일(주일) 주일 2부예배 facebook 실시간 송출한 동영상 url 주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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