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기 놀이를 할까나
남자 소변기 앞, 눈길이 머무는 곳만큼 가독성이 좋은 곳은 없을 것이다. 이곳에 붙여 놓은 좋은 경구는 소변보는 남자의 뇌리에 깊숙이 박힌다. 내가 소변기 앞에서 읽은 경구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구는 “양손에 쌀 한줌 쥐고 있으면 쌀가마니를 못 든다”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일상에서 종종 쓴다. 뒤에 보니 비슷한 표현들-“미련한 놈이 범 잡는다” “가을일은 미련한 놈이 잘한다”-도 있지만, 쌀 한줌과 쌀가마니를 대비시킨 표현이 훨씬 강렬하고 맛깔스럽다.
여의도(국회 주변 정치권에) 와서 보니 왕년에 운동 열심히 하던 서울대 출신 또래들이 의외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체로 이들은 시험 보는 재주 등이 탁월하여 변호사나, 회계사, 변리사, 잘 나가는 교수, 학원 강사, 금융 관련 사업 등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의원이 아닌 사람에게 여의도(정치권)는 여간해서 먹거리를 찾기 힘든 북풍한설 몰아치는 시베리아 벌판이다. 정치적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최열, 박원순이 보여 준 시대가 요구하는 시민운동을 크게 일구든지, 아니면 김대중, 노무현 같은 매력 있는 유력 정치인을 붙잡아 장기간의 미련스럽고 우직한 투자를 해야 하는데 재주 좋은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태생적으로 미련. 우직과는 거리가 멀고, 눈이 높은 만큼 매력 있는 정치인이 눈에 잘 띠지 않기 때문 일 것이다.
**황폐한 한국 정치 생태계를 속속들이 알게 되니, 솔직히 재주 있는 사람이라면 여의도에 오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의도에서 4년을 버텨낸 것은 두세 번 정도의 운과 좋은 인연, 그리고 아내의 격려와 약간의 재주와 소명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사상 이념적으로 거시기한 친구들(실례!)은 민노당 등을 통해 끈질긴 도전을 시도해 왔지만 대부분은 그런 식의 도전에 대해서는 가능성을 떠나서 의미 자체를 별로 부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주류가 될 수 있는 위력 있는 제3의 정치 세력을 만들기에는 이념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조직적으로도 역부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눈은 있어서, 사석에서 현실 정치권의 아둔함에 대해서 성토를 늘어놓겠지만 50이 가까운 이들에게 정치적 기회가 올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향후 한국의 진보(범야권) 정치판은, 개인적 역량이 어떻든 최근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선거에 도전하여 기회를 잡은 아둔하고(?) 미련한(?) 30~40대들이 끌어 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다. 물론 재주가 빼어난 사람들이 현실을 인정하여 자신의 역할을 설정하고, 끈기를 발휘한다면 뒤늦게나마 정치적 기회가 올 수 있겠지만.......
복기해 보면 현실 정치(행정)에서 오래 구르지 않고, 기업 등에서 일가를 이룬 ‘난 사람’들이 누릴 수도 있었던 많은 정치적 기회가 날아가 버린 것은, 기업인 출신 이명박과 문국현의 실패의 후과와 관련이 깊어 보인다.
6.2 지방선거 승리라는 쌀 한줌
그런데 관점을 달리하면 6.2 지방선거를 통해서 정치적 기회를 잡은 진보개혁 세력 전체가 양 손에 쌀 한줌씩 쥔 사람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쌀가마니를 들어 올릴 기회를 놓쳐버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번 인수위 활동을 하면서 보니, 광역이든 기초든 혁신 지자체 인수위에는 시정, 도정 운영 경험이나 인수위 경험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은 어떻게 하는지, 참여정부는 어떻게 했는지를 묻고 연구하면서 인수위 활동을 하는 사람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참여정부 출신 행정 관료를 찾아서 그 경험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눈에 띠지 않았다. 당연히 관료들이 올린 현안과 자신의 공약으로 인해 급부상한 현안(추경 반영, 대대적인 예산, 사업, 인력 구조조정)을 망라하여 우선순위를 매기고, 전문가를 찾고, 다양한 TF를 만들어 가는 곳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하나 같이 정신없이 바쁜 것 같았다. 이는 좋은 말로는 지자체에 몰입 한 것이고, 나쁜 말로 하면 매몰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6.2 지방선거 승리로 인해 양손이 비어있던 ‘건달’ 역량 대부분이 혁신 지자체라는 블랙홀로 빨려가 버리는 상황이 아닌가 한다. 물론 생계를 해결하면서 행정 경험도 쌓고, 주민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하지만 멀리 보고 넓게 보는 시야조차도 혁신 지자체 수준으로 축소되면 글쎄다. 양 손에 쥔 쌀 한줌 때문에, 쌀가마니를 들어 올리려는 당찬 포부를 망각해 버릴 것 같아서다.
반드시 들어 올려야 할 쌀가마니
혁신 지자체의 성공 외에도 우리가 번쩍 들어 올려야할 쌀가마니가 있다. 그 중 하나가 개헌이다. 다른 하나는 진보개혁 세력의 업그레이드다. 정신적 성숙과 이념 정책적, 조직적 진화이다. 정신적 성숙을 얘기하는 것은 좌파 특유의 ‘선지자’연하는 정서; 즉 대중이 좌파가 부르짖는 해방의 길을 잘 몰라서 자신들을 지지 하지 않는다는 철없는 생각의 지양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주제 파악 좀 하자는 것이다.
조직적 진화의 최상의 형태는 범야권의 단일 정당화 일 것이다. 그러려면 소수파가 올바른 노선을 가지고 장기간 열심히 노력하면 다수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쉽지 않을 것이다. 최상의 형태가 나오지 않으면 6.2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범야권 연대의 2012년 판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 역시 쉽지 않을 것이다. 2012년의 연합정치는 1인 8표에다가 나눠가질 수 있는 빈자리가 많았던 2010년의 연합정치 보다 훨씬 성사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끈질긴 목적의식적 노력과 넓은 시야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한다.
이념 정책적 진화는 2007~8년 참여정부와 범진보에 공히 환멸을 느껴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게 힘을 몰아준 스윙보트(swing voter)의 다수-수도권, 40대, 취약 계층, 기업가, 전문가의 상당수-의 지지를, 반사 이익이 아닌 우리의 독자적인 흡인력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진보개혁이 사분오열 되어도 이길 수 있을 만큼 스윙보트(swing voter)를 많이 끌어 올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진보대연합이나, 복지동맹이나, 민주대연합을 한다고 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의 실정이 안겨준 반사이익이 점점 커지면서 진보의 이념정책적 진화라는 (2008년까지는 시퍼렇게 살아있던) 문제의식은 퇴색하고 2012년에는 결코 쉽지 않을 범야권 연대라는 문제의식만 덩그러니 남은 것처럼 보인다. 분명한 것은 2012년에 싸워야 할 상대는 이명박이 아니라, 보수의 전통적인 특장점과 함께 진보의 대표 상품인 복지와 평화를 많이 잠식해 들어 온 사람(박근혜?)일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범 진보는 보수의 합리적 핵심을 흡수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지지율 3~5%짜리를 10~15%짜리(복지를 대표상품으로 내세우는 블록)로 만드는 전략 혹은 범진보 내에서 헤게모니를 쥐려는 전략은 백출하지만 합쳐서 지지율 35%짜리를 51%로 만들 전략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개헌이라는 거대한 쌀가마니는 그 중요성에 비해 진보와 보수 공히 너무 관심이 적어 보인다. 한나라당 일각과 보수 언론에서는 ‘국면 호도용’으로 의심될만한 얍삽한 개헌안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지식사회에서는 모든 문제를 제왕적(?) 대통령에게 덮어씌우고, 직선으로 뽑은 대통령을 상징적 지위에 머물게 하고, (거대 이익집단의 포섭 공작을 이겨낼 능력이 있는지 의심되는) 의원들이 실세 총리를 뽑는 또 하나의 얍삽한 개헌안을 들이밀고 있다. 시민사회 차원의 대대적인 개헌 운동이 있어도 될까 말까한 것이 개헌인데, 개헌안 자체가 대중의 현실 감각 및 욕망과 맞지 않으니 힘이 붙을래야 붙을 수가 없다. 어찌 보면 개헌을 할 수 있는 여론주도층의 지적 역량이 아직은 한참 못 미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경제와 민생이 어려운데 웬 놈의 개헌!’ ‘개헌은 보수 정권 하에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수준 이하의 사고가 횡행하기 때문이다.
주장하기가 아니라 질문하기
가만히 생각하니 주체적으로 사는 인생은 인생사와 세상사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것 같다. 왜 사나? 이렇게 살면 되나? 이 일을 왜하나? 우선순위가 적정한가?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하고 있나? 이번 주는 무엇을 하고, 다음 주는 무엇을 할까? 등.
큰 조직의 톱니바퀴에 들어가지 않은 인생이어서인지, 비어 있는 곳을 많이 보아서인지 요즈음은 유달리 묵직한 질문이 많이 솟아오른다. 확신컨대 시의적절하고 번지수가 맞는 좋은 질문을 잘 한다면 그 인생과 그 조직은 반쯤은 성공하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나와 사회디자인연구소와 우리가 관계하는 조직과 사업에 대해 얼마나 좋은 질문을 하고 있는지는 솔직히 자신할 수가 없다. 직감적으로 꼭 물어야 할 것을 묻지 않고 사는 것 같으니까.
내 눈 안에 있는 나무토막을 못 봐도, 남의 눈에 있는 티는 본다고, 나 자신에 대해서는 좋은 질문을 못해도, 한국 사회와 범 진보 진영에 대해서는 좋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쌀 한줌과 쌀가마니를 소재로 앞에서 늘어놓은 얘기도 내가 가진 질문의 한 자락이다.
한국 사회의 주요 담론(논리)이나 힘깨나 쓰는 존재들에 대한 묵직한 질문하기 운동=놀이를 해 볼까 한다. 그들의 논리나 담론의 허점, 맹점을 질문 형식으로 지적하여 고민의 심화를 유도하고, 더 나아가 귀한 답변을 끌어내기 위해서다. (그 동안 많이 해 온) 주장하기가 아니라 날카로운 질문하기다. 주장하기가 아니라 질문하기를 즐겨하고 싶은 것은 내가 답을 모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널리 지식과 지혜를 구하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내 질문은 (주로 속으로만 하겠지만) 내 인생과 사회디자인연구소와 혁신 지자체와 민주당과 2012년 총선, 대선 매니페스토와 관련된 질문일 것이다. q2012.net 도메인도 일단 잡아는 놓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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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줌쌀을 쥐고 벌벌떠는 나의 모습이 보이면 어떻게 되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