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파 제자 명경일행이 명황실의 요청으로 북원과의 전쟁에 투입되어서 벌어지는 전쟁의 참혹한 모습과 살육...그리고 끈끈한 전우애를 사실감 있게 표현한 작품으로 요즘 신세대 무협의 선봉장인 한백림의 첫번째 작품이다.
전쟁터로부터 무당산에 돌와왔을때 살기 짙은 명경일행을 제지하는 무당산 제자들과 팽팽한 신경전..
그리고 전쟁에 참여한 대가로 황실의 막대한 재정 지원을 받고 세속에 찌든 모습이 나타나는 무당파에 대해 명경일행은 이질감을 느끼고 때마침 천하제일인이며 무신으로 추앙받던 스승 허공노사는 행방불명이 되는데.......
현재 무협계에서 진행중인 최대의 프로젝트 중 하나인 한백림 작가님의 한백무림서 11부작1, 그 첫번째 작품. 제목 그대로 무당파가 중심이며, 훗날 제천회의 일익이 되는 명경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 2003년 첫권 발매 이후 2004년 전 8권으로 완결.
개인적으로 현존 무협 작가들 중 가장 좋아하는 한백림 작가님의 처녀작이라는 점에서 더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 더욱이 그 내용의 짜임새, 치밀함, 주인공이 겪게 되는 온갖 고난에서 오는 처절함과 긴박감 등은 후속작으로 쓰인 화산질풍검, 천잠비룡포는 댈게 아니라는 생각도 가끔 들 정도. 본격 팀킬이랄까.
내용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작가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을 안하고 넘어갈수가 없는데, 작가 한백림은 전업 작가가 아닌 본업은 현직 의사!이다. 본격 투잡을 뛰는 능덕? 이 부분만으로도 대단하지만 이 작가가 더 대단한 점은 지금껏 존재한 적이 없던 동시대 다수의 절대자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방대한 설정의 소설을 기획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무협은 어떤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쓰든 결국 그 이야기는 해당 소설 안에서 끝나버리는, 즉 말하자면 일회성의 이야기였다. 아무리 소설 속 주인공이 매력적이라고 해도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더이상 그 주인공은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것이 한백무림서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대다수 무협소설들의 공통점이었다. 하지만 한백림 작가는 이 천편일률적인 공식을 과감하게 깨뜨려버린다. 동시대에 존재했던 11명의 각기다른 절대자들의 이야기들을 그림으로써 한 편이 끝나더라도 다른 절대자의 이야기에서 여전히 그 주인공은 존재하며 살아있다. 이러한 파격적인 설정으로 정체되어 있던 무협계에 일대 광풍을 몰고 온 작가, 그가 바로 한백림인 것이다.
그럼 다시 본 소설의 내용으로 돌아와서, 이 무당마검은 상술했듯 무당파의 제자이자 훗날 제천회의 일익이 되는 명경에 관한 이야기이다. 색목인 혼혈이라는 외모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마검 흑요(黑妖)의 주인이자 북풍단의 단주이며, 무당파 최고수이자 무신이라 추앙받는 허공노사의 제자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전체적인 틀은 명경과 그의 사제들이 황실의 칙령으로 몽고 토벌군에 차출되어 대초원에서 치열한 전투를 하는 것이 초중반까지의 구성이며, 후반에는 무림으로 복귀하여 새로운 적들과 대치하며 한편으로는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사랑도 쟁취하는 전개라고 할수 있다.
이 소설만의 장점이라면, 신선, 무격, 주술, 예언 등 단순히 무공만이 아닌 이러한 이질적인 소재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작품에 커다란 입체감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몽고토벌전에서 그려지는 치열하면서도 생생한 전투의 묘사는 의사가 본업이라지만 작가의 작가로서의 역량도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특이점으로는, 무뚝뚝하고 감정표현에 서툰 주인공 명경의 특성상, 그리고 이야기의 전개상 명경에게 시선이 집중된다기보다는 주변인물들을 골고루 조명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런만큼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각자 그 개성이 뚜렷한 편이며, 명경과 대치하는 적들 조차도 단순한 악인이 아닌, 무척이나 입체적인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다. 게다가 한백무림서라는 방대한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기에 여기서는 한번 스쳐가는 존재가 다음 작품에서는 중요 인물, 혹은 주인공으로 등장할수도 있는 일이라, 소설 속 수많은 인물들과 그들의 설정들을 숙지해놓는 일도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소설 무당마검은 단순히 한백무림서라는 큰 틀을 벗어나서 소설자체만을 놓고 평가해도 어디 하나 흠잡을데 없는 작품이다. 단순한 설정놀음이 아닌, 여타 무협들과도 차별되는 확실한 무당마검만의 색깔과 장점을 선보이며 이 소설을 걸작이라 부르는데 이견이 없게 만든다. 또한 작가 한백림의 이름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매개체이자, 한백무림서의 첫장을 장식한 작품으로서도 그 존재의의는 크다고 할 것이다. 앞으로 이와 비슷한 급의 각기 다르면서도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10종의 소설들을, 현재의 연재속도를 고려하면, 그야말로 평생에 걸쳐서 볼수 있다는 것은 무협 팬으로서 무척이나 축복받은 일이 아닐수 없다. 한백무림서가 완결되는 날, 명실상부 이 작품들은 내 평생의 대작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러한 대작을 집필중인 한백림 작가에게 이 자리를 빌어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무협소설에서 부대 간 전투를 자세히 묘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절대적인 강함을 추구하는 무협소설의 특성상
주인공은 혼자 수백명의 적들을 상대하거나 아니면
절대고수와의 일 대 일 대결을 벌인다.
왜냐...전쟁은 아무래도 수천 수만이 맞붙는 거라
전략전술, 부대 전체의 사기 같은 요소들이 절대강자 1인의 능력을
강조하는 데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당마검>3권은 오롯이 전투묘사에 바쳐진다.
(<묵향>1부 2권이 전쟁을 다루고 있긴 하나
그 디테일과 분량에 있어 <무당마검>3권보다 많지는 않다.)
후허평원전투에서 패주하는 명경일행을 쫓는 원나라 군사의 추격전까지
쉴틈없이 밀어 붙인다.
또한 무협소설에서 곁다리 소재나 혹은 악인들이 주로 쓰는 술법이
전면에 등장한다.
늑대나 독수리 형상의 정령을 불러내거나
강신술을 펼치고 심지어는 무구를 통해 원격통신까지 한다.
그렇다..한백림은 처음부터 무협과 판타지 장르의 완벽한 혼합을 꿈꾼 것이다.
<묵향>이 무협의 세계관과 판타지의 세계관을 이분화 시켜 놓고
주인공을 왔다갔다 하게 했다면
<무당마검>은 판타지스런 설정을 감쪽같이 동양의 그것으로 옮겨 놓고 있다.
마법사를 무격으로 바꾼 셈이다.
후속편 <천잠비룡포>에서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제천대성,용 같은 동양고전들의 전설들을 주요 모티브로 등장시킨다.
작가의 야심이 책 페이지 사이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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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
명경: 후허 평원 전투에서 바룬과 단신으로 맞붙어 승리를 거두고
바룬의 창, 신창 현왕을 뺏어온다.
강신병이 된 이시르와도 싸운다.
그 뿐인가. 도망치는 와중에 군신 챠이와도 대결을 벌이는 데
죽음직전에 허공진인과 과거에 연이 있던 챠이의 자비로 목숨을 구한다.
공손지가 무당오협을 배신자로 몰아 수천의 궁병을 이끌어 죽이려고 할때
갑작스런 염력을 발휘해 놀라운 장관을 연출한다.
곽준: 무공에 있어서는 명경이 최고다.
하지만 전쟁에 참가한 무당파 5인 중 실질적인 리더는 곽준이라 하겠다.
백부장에 올라 병사들의 호감을 사고
후허전투에서는 술법을 부리는 원나라 무격들을 단리림과 함께 공격하고
심지어는 용맹한 외눈의 바룬을 일대일로 겨뤄 죽음을 안겨 주기까지 한다.
물론 오르혼의 강신술 덕택이긴 하지만..
정이 넘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다.
석조경: 명경을 제외하고는 곽준 다음이 석조경이다.
멀리 떨어진 유흠 부대를 후허 평원으로 데려오는 임무를 띄고 떠나간
석조경은 챠이 부대의 보급기지 에렌토우를 기습함으로서 북로유군을
전멸의 위기에서 구해낸다.
악도군: 무공은 세나 특색없는 캐릭터라 무공이 가장 약한 단리림보다 존재감이
미약했었다. 하지만 이번 권에서는 이시르와 단신으로 맞서다
턱부터 귀까지 창에 잘리고 귀 반쪽이 날아가
외양상으로는 가장 강력한 개성을 지니게 되었다.
단리림: 그가 없었으면 무당오협은 살아있지 못했다.
무격을 전쟁에 이용한 원나라 군대를 상대로 수많은 부적과 술수로 맞섰다.
무력은 약하지만 무리만은 누구못지 않은 단리림은
이시르와 단독으로 맞서기 까지 한다.
물론 오래 못가 죽을 뻔 하지만 원나라 무격 오르혼의 도움으로 사지를 벗어난다.
조홍 : 전투를 치르면서 조홍은 완벽하게 문관에서 무관으로 탈바꿈하다.
앞서 전투를 치르는 무당오협이 위험해 처할 때면
교묘하게 병사를 이끌며 위기에서 구해낸다.
공손지 장군에게 대들만큼 대담해졌으며 본능적으로 공손지 장군의 책략을
알아차리고 탈영을 주도한다.
그가 아니었으면 무당오협은 다 손도 못써보고 공손지에게 죽었으리라
왕오산: 악도군을 따르는 병사. 순박하고 사심 없이 기개를 발하는 정병의 모습으로
악도군에게 호연지기를 불러 일으킨다. 오죽하면 악도군은 왕오산 때문에
이대로 병사들과 영원히 있었으면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관우처럼 언월도를 다루는 마성의 인간
대룡,비호,고혁: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명경의 뒤를 따른다.
그만큼 강해져
오르혼: 초원의 아들.
권력,국가의 이름은 오르혼에게는 아무 필요없는 것이다.
오로지 초원과 푸른 하늘의 뜻만 의미있을 뿐.
그런 오르혼에게는 무격을 전투에 이용하려는 바토르나 그에 동조한
무격의 우두머리 바이나차는 용서하지 못할 인물들이다.
원나라의 무격부대의 일원으로 있던 중 무당오협에게 하늘의 뜻이
있음을 알고 곽준,단리림을 사지(死地)에서 구해낸다.
그리고 무당오협과 생사를 함께 할 동지가 된다.
소황선 : 북로 유군의 삼대 장수 중 하나.
용장이며 호쾌한 성격을 지녔으되 바로 그 성격 때문에 죽음에 이른다.
후허 평원 전투에서 조홍 등과 아군이 퇴각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스스로 사지에 뛰어든다. 이때 직접 소황선을 죽인 바룬은 비록 적장이지만
뛰어난 사나이였던 소황선에 큰 감동을 받는다.
"다음 생에는 초원에서 태어나길"
공손지: 북로 유군의 삼대 장수 중 하나.
상대편인 원나라 군이 아무리 무당오협을 괴롭혀도 적국의 병사라 이해라도 되지만
공손지는 아군이면서 끊임없이 우리의 주인공들을 사지로 떠민다.
교활하면서도 냉정하고 신경질적인 악인
챠이 : 군신. 원라라 군대의 막강한 실세
단지 유희로 북로유군 진지를 단독으로 휘젓고 돌아다닌다.
단신으로 챠이를 막으러 나온 명경을 보고 명경이 허공노사의 제자임을 알아차린다.
과거 허공진인과는 어떤 인연이 있을까?
바룬: 후허 전투에서 수많은 명나라 군사와 소황선 장군을 죽인 무력의 장수
신병이기인 창을 명경에게 빼앗긴 후 이를 되찾기 위해 도망중인 명경일행을
끝까지 뒤쫓다 곽준에게 죽음을 맞는다.
이시르 : 직접 강신병이 되어 엄청난 무위를 선보인다. 단리림을 거의 죽게 만들고
악도군에게는 평생 남을 흉터를 만들어 준다.
멀리 떨어진 무격과도 서로 연락을 할 수 있다.
바토르: 챠이의 군사. 술법을 부릴 줄 아는 무격을 군대에 끌어들이고
명나라 북로 유군을 완전히 섬멸하기 위해 후허 평원으로 유인하는 등
한 수 위의 전략으로 명군을 위험에 빠트린다.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모든 불길함의 시작이다.
바이나차: 무격들의 우두머리. 원래 무격은 초원의 정신을 수호하는 자들이나
바토르의 뜻대로 그 힘을 사람을 죽이는 데 쓰게 된다.
무당마검 (武當魔劍) 1권
제1장
<명경(明鏡).
무당파(武當派). 허공진인(虛空眞人) 사사(師事).
색목인(色目人) 혼혈(混血). 부(父) 파악 불가. 모(母) 절강(浙江) 하가(廈家) 추측, 확인 불가.
초절정고수(超絶貞高手). 기이(奇理)한 이능력(異能力) 소유(所有).
북풍단주(北風團主), 무당마검(武當魔劍), 흑요검주(黑妖劍主).
제천회(制天會) 일익(一翼).
마검(魔劍) 흑암(黑暗) 주(主).
영물(靈物) 내력마(內力馬) 흑풍(黑風) 주(主).
한백(韓白) 무림서(武林書) 인물편(人物篇), 제(第) 이장(二章) 무당파(武當派) 명경(明鏡) 중(中).>
무당산의 산세는 수려함을 자랑한다.
완만한 듯 끊임없이 이어지는 능선과 조용하게 약동하는 초목들을 보노라면 감탄이 절로 나올 수 밖에 없다.
때는 초봄, 봄이란 어떤 산이든 수만 가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기다.
산이란 해가 뜨는 동안 겨우내 감춰 놓았던 생명력을 솟아 올리다가도 해질녘에는 다시금 겨울이 오는 것처럼 움츠러들기 마련이였다.
세상에 명산이 많다지만 무당산은 특별했다.
무당산을 사람에 비유하지면 은자(隱者)와 같다.
겨울이 다 갔다고는 해도 결코 성급하게 꽃과 새 잎을 피우지 않았다.
해가 하늘 높이 올라서야 비로소 몇 가지 색깔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번져가는 듯 출중한 미모였다.
또한 해가 진다고 급히 그 색들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지는 해의 노을에 천천히 동조할 뿐이다.
진중하고 과묵하다. 그래서 더욱 은은한 아름다움이 있다.
굽이 굽이 휘도는 물줄기는 청량하고 맑기 이를 데 없다. 밤이 되어 어둠에 휩싸여도 음습한 기운이 침범하지 못한다.
깨끗한 공기가 산천에 가득하다. 여러 종류의 초목이 조화를 이루어 치우침이 없었다.
대대로 도가의 성지라 여겨지는 이유이다.
무당산이 도가의 중지가 된 것은 까마득한 옛날부터였다.
도가의 중지를 이야기 하자고 한다면 무당산과 더불어 화산을 빼놓을 수 없다.
웅장한 산세를 자랑하는, 서악(西嶽) 화산.
산은 그 안에 있는 도사들의 성격도 자신을 닮게 만들었다.
무당산의 도사들은 조용하고 치우침 없는 도리를 추구하면서 민중과도 가까운 거리를 유지한 반면, 화산의 도사들은 험준한 산세만큼 강직하고 절도가 있어 극기와 수련을 강조했다.
무림의 한 축을 이루는 화산파의 이름이 내걸린 것도 무당파보다 먼저 일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한참이나.
무당산에 도관이 있어온 지 오래, 수많은 장생술과 선도 비기들이 연마되고 이어져 오고 있었지만 그것을 내공과 무술로 발전시켜 무당파라는 현판을 달게 된 것은 납탑도인, 장삼풍의 대에 이르러서다.
무당산에 자리잡은 무당파. 방파로서의 역사는 오래지 않다.
그러나 무림에서 말하는 소위 구대 명문 정파의 하나이며 그 중에서도 항상 수위에 거론된다.
그것은 아마도 무당산 그 자체 때문일 것이다. 수려하면서도 친근하다. 숨막히게 아름다우면서도 누구나 가까이 할 수 있다. 또한 누구나 가까이 할 수 있음에도 천박하지 않다.
장삼풍은 무당산을 닮았다. 누구보다 강한 무공을 가지고도 민초들과 부대끼며 살았다. 스스로 납탑도인이라 칭하면서 민중들 사이를 떠돌고 협을 행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민중들이 그에게 가지는 존경과 선망은 그야말로 지대하여 살아있는 신선이라 불리었다.
후인들은 그의 뜻을 이었다.
그가 깨달음을 얻은 곳, 무당산의 기품을 이어받았다.
무당파의 도사들은 결코 함부로 자신을 내 새우지 않았다. 강한 힘을 가지고도 분란이 있으면 먼저 사과했다.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있어 할 수 없이 출수를 할 때 보여주는 무공은 내로라하는 무인들도 혀를 내둘렀다.
사람들은 무당파를 구대 문파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무공보다 무서운 것은 전통, 그리고 민초들의 전폭적인 지지였다.
비록 방파로서 역사는 오래지 않지만 무당산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까마득할 정도로 오래 된 도관들이 많다. 그 수 많은 도관들에서 몇 백년 동안이나 갈고 닦여진 선도 비기들은 무당파에 이어졌다.
무당산에는 스스로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강호에 이름을 날린 도인, 협사들이 많았다.
무당산이 위치한 호북성에서 무당파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일 수 밖에 없다.
호북성의 민초들에게 무당파는 관가보다도 의지할 수 있는 곳이고, 무당파의 도사들은 신선이나 다름없었으며, 무당파의 장문인은 황제보다도 높은 사람이었다. 장삼풍 사후 몇 십년이 넘어감에도 아직 살아있다 믿는 사람이 대부분인 다음에야 말할 것도 없었다.
* * *
무당산 무당파로 올라가는 길, 한 무리의 관인들이 산길을 타고 있었다.
그 무리의 중간 쯤에는 맑은 얼굴이 돋보이는 젊은 남자가 있다.
눈썹이 가늘지만 눈매가 살아있고, 코와 입의 윤곽이 뚜렷하여 제법 남자답게 생긴 얼굴이다.
젊은 남자의 이름은 조홍, 헌데 조홍은 준수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답답함이 가득했다.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산세를 둘러보았다.
절경이라 칭하기 부족함 없는 무당산의 모습이 눈 앞에 펼쳐졌다.
그지 없이 뛰어난 경치건만 답답함은 조금도 가시질 않았다.
조홍은 하북성 보정 출신이다.
출신은 보정이나 뿌리부터 북경 사람이나 다름 없었다.
어릴 적부터 문필에 두각을 나타내어 일찍이 관직에 진출, 스물 넷의 나이에 종 사품 국자감 제주 까지 거침없는 출세 가도를 걸어왔다.
그의 빠른 출세에는 조부(祖父)인 조인창의 영향이 컸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의 중추에 있었던 조인창는 세태의 파악에 능하고 과감한 처세에 있어 이름이 높았다. 이십년이 훌쩍 넘는 과거, 당시 심상치 않은 정국의 흐름을 느낀 조인창은 조홍의 부친을 관리로 키우지 않고 모든 벼슬을 뒤로한 채 북경을 벗어나 하북의 보정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한창 때에 축적해 놓은 재산으로 보정에 단단한 뿌리를 박았다.
조홍의 아버지는 관리가 되지 않았지만 굉장한 상재를 타고 났다. 그의 수완에 조홍 일가는 수 대를 버틸 누만금의 재산을 쌓았다.
그러다가 세상이 뒤집히는 일이 터졌다.
영락제. 당금의 천자(天子)인 연왕 주체가 황위를 찬탈한 것이다.
연왕의 근거지는 본디 북경이다.
기회를 보던 연왕은 결국, 군사를 일으켜 당시의 황제가 거하던 남경으로 진격, 이 년만에 함락시키고 제위에 올랐다.
피바람은 북경에도 불어왔다.
연왕이 제아무리 북경을 지배했던 실권자였다지만, 수 많은 관리들이 남경에 있던 황제를 정통이라 하여 연왕의 거병과 집권을 반대했다.
영락제는 철혈의 황제라 불린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의 목이 떨어졌다. 삼족이 멸문당한 가문이 허다했고, 연왕을 반대한 사람과의 조그만 친분도 처형또는 유배의 구실이 되었다.
북경 전체에 불어 닥친 피바람. 조홍 일가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 깨끗이 피해냈다.
관직과는 완전히 손을 끊은 조인창의 혜안 덕분이었다.
한 차례의 폭풍 후, 연왕은 새로운 인재 등용을 단행했다.
수 많은 목이 떨어져 나갔으니 새롭게 국정을 꾸려갈 문인이 절실했다.
조인창은 영락제의 번성을 예감했다.
제위를 빼앗아 스스로 황제가 된 야심은 차치하고서라도, 인재를 공평하게 등용할 줄 알고, 뛰어난 재인을 아낄 줄 아는 이가 당금의 황제, 영락제였던 것이다.
조인창은 손자인 조홍의 자질을 눈여겨 보았다. 뛰어나다 생각되자 주저 없이 관직에 투신 시켰다.
출세는 보장되어 있었다.
비록 오랜 시간 정국과 멀어져 있었다지만 아직 조부의 영향력은 작지 않았고, 재산 또한 넉넉했다. 조홍 본인의 재능이 받쳐주는 바, 관직은 무혈 입성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내려온 소칙은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종 사품 조홍, 그가 호북성 무당산까지 오게 만든 소칙, 단 한 꾸러미의 종이가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가슴이 답답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도 조정은 바쁘게 돌아 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 관리들이 대거 등용된 북경은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다. 아직은 정국이 안정되지 않은 시기, 말 한 마디에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살얼음 판이지만 조홍은 배경이 튼튼할 뿐 아니라 조부로부터 불려 받은 듯 생존 감각이 뛰어났다. 조홍은 일년 안에 정 삼품 관직을 얻어낼 자신이 있었다.
'헌데 호북성 무당파에 가서 소칙을 전하라니……'
하루 아침과 저녁이 다르게 급박한 변화를 보이는 현재의 정국에서 한 달은 족히 걸리는 외유가 의미하는 바는 컸다.
그것이 비록 황제가 직접 내리는 소칙을 전하는 일이라고는 해도, 이 만큼의 공백은 너무도 컸다.
수많은 경쟁 상대들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각자 스스로 문필의 훌륭함을 뽐내고 있을 터, 이렇게 외유가 길어지는만큼 삼품 관직은 멀어질 것이었다.
하다 못해, 별것 아닌 일이었으면 끊임없이 앞만 보고 출세에 매달려 온, 그의 삶에 좋은 휴식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맡은 일이 하찮은 일이 아니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무당산에 가까워 올수록 느껴지는 무당파의 힘.
이만큼이나 민중을 끌어안고 있으리라고는 예측도 하지 못했다.
일개 무림방파의 지명도가 관아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답답함이 가중 될 수 밖에 없다.
'이 정도인가……!'
호북성은 북경의 턱 밑이다. 턱 밑까지는 아니라도 상당히 가깝다. 들리는 만큼 무당파의 무력이 강하다면 모반이라도 꾀했을 때,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소칙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무당파에 주는 상당한 혜택을 담고 있을 것이다.
무당파를 끌어 안으면 호북성 전체를 끌어 안는 것이 된다. 치안 역시 부담이 줄어 들리라. 북쪽에는 원의 잔당, 남쪽에는 왜구가 판을 치는 이 마당에 한 성의 병력이라도 아껴야 했다.
문제는 지금 무당파에 소칙을 전하는 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에 있었다.
그의 감각이 끊임없이 경종을 울리고 있다.
몇 년 동안 웃는 낯으로 새치 혀를 칼 삼아 싸워온 정치 감각이 발하는 경고다.
'이제 시작이다.'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그는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벗어날 수 없는 바람이 그의 주위를 감도는 것을.
조홍은 일행을 둘러 보았다.
이십 여 명.
관가에서 나왔음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복장들이다.
위병들의 얼굴들은 굳어져 있었다.
신변 경호를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니 모두 무술을 익혔다.
강호 출신. 사람을 죽여본 이도 있다.
거만함과 자신감이 몸에 배어있는 자들이라 다루기에 손이 많이 갔다.
그런 그들이 하나같이 움츠러들어있었다.
문득 어제의 대화를 떠올렸다.
"무당파의 도사들이 그리도 강하더냐?"
"예, 소인들이야 한 주먹감도 안됩죠."
"강 위사도?"
"물론입죠. 무당의 도사 한명이면 대장님 같은 사람 열명도 상대할 것이구먼요."
"허!"
"저, 조대인…… 그런데 말입죠……"
"……?"
"대장님께는 제가 그런 말 했다고……"
"걱정 말게. 이 사람을 어찌 보고 그러나."
강습. 역시 하북성 출신이다.
청량현 출신으로 조그만 방회들을 전전하다가 몇 사람을 때려 죽여 관가에 잡혀들었다. 북경까지 호송되었는데 우연히 건효장군의 눈에 띄어 관병으로 발탁,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불 같은 성정을 지녔으나 은원이 뚜렷하고 의리가 있어 관병이 된 후로는 사고한번 저지르지 않은 남자였다.
보통은 이십 명에서 오십 명까지도 조직되는 위병대의 대장 직책을 줄곧 맡아 왔는데, 위병들 사이에서의 신망도 두터운 편이었다. 체구는 과히 크지 않으나 골격이 짜임새가 있어 무술 실력도 뛰어났다.
조홍이 보기에도 일반 위병과는 격이 달라 보였다. 눈빛이 달랐다. 사람을 죽였다는 과거를 몰랐더라도 가까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무당파 도사와는 상대도 안 된단다.
무당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눈에 띄는 도가(道家)의 목상들이 점점 불길하게 보였다. 적어도 조홍의 눈에는 그랬다.
오르막길 끝에 다다르자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제법 넓은 평지.
밭이 있었다. 화전(火田)이었다.
일하는 사람도 있다.
'아!'
도복(道服)이다. 도사들이 밭을 갈고 있었다.
조홍은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도사와 중은 일 안하고 먹고 사는 직업이라 생각했다.
'설마하니 무당파이려고.'
이름 있는 도관이라면 대규모의 전답을 소유하기 마련이다. 또한 소유하고 있는 전답에는 소작을 준다. 착취에 가까운 횡포를 부리는 도관도 많다.
조홍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계속 일행을 이끌고 길을 따라갔다. 밭과 산길 사이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십여 명의 도사들. 일을 멈추고 그들을 돌아본 것도 잠시, 곧바로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찬바람이 그들의 주위를 한번 휘돌고 지나갔다. 아직 옷깃을 여밀 초봄, 게다가 산 중턱이다.
순간적으로 조홍이 도사들을 돌아 보았다.
도복은 얇았다. 팔을 걷어 붙인 이도 있다.
일을 하고 있다고는 해도 터무니 없이 부실한 옷차림이다. 추워하는 기색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하나 같이 젊다는 것도 눈에 띈다.
그리고 눈을 부릅뜬다.
"목검……!"
겨울이나 다름없는 시기다. 땅바닥 역시 얼어붙어 있음에 다름 아니다.
나무로 된 막대기에 곡괭이로 찍듯 흙이 뒤집어 지고 있었다.
위병들 사이에도 소요가 일어났다.
놀랄 수 밖에 없다.
무당, 대 무당파의 영역에 들어선 것이다.
놀람을 뒤로한 채 조홍은 길을 재촉했다.
강호인이란 이해할 수 없는 족속들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조부의 말이 생각났다.
'엄동설한은 아니더라도…… 이 쌀쌀한 날씨에 목검으로 밭을 가는 도사들이라……'
무술 수련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도사들이 밭을 가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충격적인 일, 무당파 정도의 명성이면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도 재산을 축적하는데 어려움이 없으리라.
이름이 있는 곳에 돈도 모이는 법, 조홍은 돈의 속성을 잘 알고 있다.
밭을 가는 도사들.
언뜻 보기에도 하루 이틀 해온 모습이 아니다. 그들이 지나감에도 눈길 한번으로 다시 일에 몰두하는 것은 농사꾼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자급 자족이다.
직감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당파의 장문이 보고 싶다.
'능력이 있음에도 뽐내지 않고 힘이 있음에도 재산을 탐내지 않는 위인이 틀림 없으리라……'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조정에서도 훌륭한 인물들을 보아왔다. 청렴하다고 자부하는 고고한 인품, 석학들도 적지 않게 만났다. 권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모른다. 권력의 맛을 못 보았기에 청렴한 것인지 청렴해서 권력을 추구하지 않는 것인지.
무당파의 장문인은 그런 사람들과도 다른 것 같다.
무당파는 안휘성 전체를 아우른다. 당장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나라라도 세울 수 있을 정도로 민초들의 신망이 두텁다. 그 정도 지지를 기반으로 사업을 시작하면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다. 또한 세간의 퍼진 정도의 무(武)라면 무인들을 사병화 하여 모으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욕심을 가지지 않는다.
거인이다. 거인이라 불리만한 사람들, 조정에도 많은 수가 있다지만 격이 다를 것임에 틀림 없었다.
기대감과 약간의 두려움.
무당파의 현판을 보며 마치 황제를 처음 알현했을 때와 같은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길함도 가시질 않았다. 아마도…… 조정과는 다른 세계, 관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를 보호해줄 것이라고는 통하지도 않을 위병들의 창 밖에 없다.
아니, 더 있다. 그를 지금의 위치까지 있게 해 준, 머리, 그리고 세치 혀가 있다.
"후우."
조홍은 한숨을 내 쉬었다. 인생을 건 시험이라 생각되었다. 단지 소칙을 전하는 것이라지만 그 전하는 상대가 한 성의 패자다. 생각할수록 가볍지 않은 일이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다시 한번 현판을 올려보았다.
'검박하다……!'
쓸데 없는 장식은 보이질 않았다. 현판의 글씨는 더할 나위 없는 명필이었지만 현판 자체가 그저 나무 판자 하나를 대어 놓은 식이라, 황궁의 고급품들을 생활처럼 보아 온 조홍에겐 조악하게 보일 정도였다.
편액이 걸린 산문 역시 기둥 두개가 전부다.
기둥 옆으로는 둘러쳐 있어야 할 담장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또 자연과 잘 어우러졌다. 소나무들이 담장을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쯤 되자 온갖 것이 다 범상치 않아 보였다.
조홍은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버린 후 산문을 지나 계단을 올랐다. 이 얼마 안되는 계단을 다 오르면 무당파의 전경이 보이리라.
올라선 조홍은 다시 한번 놀랐다.
예측은 했지만 너무나 소박하다. 이래서야 시골 도관들 몇 개를 합쳐놓은 규모밖에 되지 않는다. 굉장히 넓은 분지기는 하지만 돌도 제대로 깔리지 않은 바닥에 눈 앞에 보이는 전각은 허물어 질 듯 나무에 기대서 있는 형세다.
묘했다.
눈 앞에 들어오는 전경 모두가 어딘지 옛날 이야기 속에 들어 온 듯 현실감이 없다.
마당을 쓸던 꼬맹이 두 명이 동작을 멈추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장문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입을 열었다. 맑은 목소리다. 한쪽 방향을 공손히 가리키고는 다시 마당을 쓸기 시작했다.
더욱 기분이 묘해졌다. 홀린 듯 아이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위병들도 분위기에 전염된 듯, 숨소리도 조용하다.
"엇!"
한 위병이 외마디 소리를 내며 위를 가리켰다.
나무 위, 어찌 올라갔을까 하는 높이에 한 청년 도사가 누워 있다. 조금만 뒤척여도 떨어질 듯한 가지임에도 여유로운 모습이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청년 도사와 눈이 마주쳤다.
"어쩐 일로 오셨소?"
나른한 목소리다. 천년 만년 그 자리에 있었던 듯, 기묘한 작태라 진짜 사람 같지가 않았다.
"조…… 정에서 나온 관리외다. 중요한 일로 찾아왔으니 장문인을 뵙고 싶습니다."
어렵사리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마친 조홍. 청년 도사는 '그러냐……'는 듯, 시큰둥한 기색이다.
"어서 내려오지 못할까."
어디 선가 들려온 낮은 목소리. 갑작스레 조홍은 현실로 돌아온 느낌을 받았다.
청년 도사는 낯빛을 굳히며 땅으로 뛰어내렸다.
깃털처럼 가볍다. 감탄도 잠시,
"빈도는 탁무(拓武)라 하외다. 장문인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이쪽으로 오시지요."
새로 나타난 사람은 장대한 체구의 중년 도사다. 척 보기에도 도인이라 하기보다는 무인에 가까운 모습이다. 따라오라는 말은 다분히 명령조, 절강지방의 억양이 섞여 있다.
방금 까지도 방만한 자세였던 청년도사가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 것으로도 탁무라는 도인의 불 같은 성정이 짐작된다.
"탁무 진인이셨군요. 본관은 조정에서 나온 사람으로 조홍이라는 이름자를 씁니다."
"진인은 무슨…… 탁무자라 불러 주시지요. 그럼."
탁무자는 바로 몸을 돌려 앞장섰다. 잡다하게 말을 끌만한 상대가 아니다. 조홍은 걸음을 빨리 하여 탁무자를 쫓았다.
무당파의 내부는 생각보다도 훨씬 열악해 보였다. 으리으리한 전각이야 사치라 하더라도 다 허물어져 갈 것 같은 건물에, 지붕만 대어 논 오두막도 있다. 곳곳에 자라는 나무들은 굳이 베어내지 않아 듬성 듬성 나무들이 무성하다.
무위자연.
어찌 보면 한 없이 초라한 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은연중에 건물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들이 지나가는데도 상관치 않은 채 바위 위에 누워 있는 도사가 있는가 하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소동(少童)들도 있었다. 몇 안 되는 도사들을 지나쳤는데 한같이 눈과 얼굴이 해 맑았다. 앞서가는 탁무자도 무인의 분위기만 걷어 낸다면 깨끗한 학자 같은 느낌이었다.
장문인이 거한다는 상청궁은 금방이었다. 건물이랄 것도 없는 몇 개의 도관을 지나 연무장으로 보이는 공터 저쪽에 상청궁의 편액이 걸려 있다.
이름만 궁(宮)이지 단지 커다란 전각에 지나지 않는다. 붉은 기와에 약간의 도가적 장식이 달린 것이 구색을 갖춘 느낌이랄까.
밖에다 위병들을 대기 시킨 조홍은 탁무자의 안내에 따라 상청궁 안으로 들어섰다.
상청궁의 내부가 의외로 햇빛이 잘 들어 밝은 느낌이어서 그런지 막상 무당파의 중심부인 이곳에 들어오자 들끓었던 마음이 가라 앉고 불길함도 옅어졌다.
하지만……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옆에서 걷고 있는 탁무자만 해도 조정의 어떤 대신 못지않다. 범상한 인물이 아니다. 하물며 장문인임에야……
"어서 오게나."
목소리가 들려오고 탁무자가 물러났다.
조홍은 눈 앞의 인물을 바라보았다.
보통 체구. 초로의 도사다.
생각보다 충격적이지 않은 인상이다. 육척장신에 삼두 육비의 괴물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서도 너무나 평범하고 소탈한 인상이라 실망이 앞섰다.
의자 뒤로는 납탑도인의 초상이 걸려 있다. 그림 역시 유명한 화공이 그린 것이 아닌 듯 구도가 산만하고 인물이 과장되다. 그 앞에 앉아 있으니 아무래도 강호의 일대 패자라는 무당 장문인의 명성이 바래지는 느낌이었다.
"쯧쯔…… 타고난 총명이야 나무랄 데 없지만, 눈을 가리고 있는 게 희뿌연 미혹 뿐이구먼……"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섬찟함. 비록 마음속에선 실망을 했을지라도 밖으로는 공손하기 그지없는 모습일 터……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자기 관리도 단숨에 꿰뚫는 안목.
"돌고 돌아 태극이라…… 출세도 영명도 그저 사는데 충실하면 그만. 직업에 얽매여 눈에 보이는 것이 물질 뿐이려니……"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
한마디 한마디가 머리 속을 헤집는다.
머나 먼 선계에서 들려오는 것도 같고 옆에 앉혀 놓고 말씀하시던 조부의 목소리와도 같다.
"불구부정(不溝不淨). 애초에 무극이라, 아무것도 없어 깨끗해질 것도 더러워질 것도 없다. 마음, 삶, 도(道). 모두가 그와 같은 것이니, 주치(연왕,당금의 황제)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나 연이 닿지 않아 자네를 통할 수 밖에."
조홍의 눈빛은 끊임없이 떨리고 있다. 마음에 격동이 일어나는 증거다. 처음부터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당의 장문인은 황제와 독대를 해도 가르침을 내릴만한 품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소칙의 내용은 알고 있네만 형식을 갖추려면 자네가 읽어야 하겠지. 마음을 다스리고 내일 오게나."
축객령이었다.
조홍은 홀린 듯 상청궁을 걸어 나왔다.
잔뜩 몸을 굳히고 서 있는 위병들. 조홍은 아직도 흐릿한 눈빛으로 옆을 돌아 보았다.
"쉴 곳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어느새 다가온 날카로운 눈매의 소년 도사가 일행을 안내 했다.
지객당이라는 조그만 전각.
침상에 앉은 조홍은 혼미한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잠이 들고 말았다. 위병들은 어리둥절 한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저 조홍이 다시 일어나길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어쩌자고 그런 장난을 다 치셨나."
"아, 보셨습니까."
무당 장문인, 현양진인이 깎듯이 예를 차릴 사람은 몇 없었다. 부서질 듯한 백발에 구름처럼 허허로운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 있는 허상진인이 그 중 하나다.
전대의 장문인이자 현양진인의 사부.
타고난 도기(道器), 허상진인.
어릴 때부터 천하의 모든 이치를 깨달은 듯, 그릇이 정대하고 생각의 깊이가 측량할 수 없이 깊어 신동으로 이름이 자자했다. 장삼풍의 눈에 띄어 일찍이 도가에 귀의하였고 모든 제자들 중에 가장 올바른 도맥(道脈)을 이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문무에 두루 능할 인재. 관리로 두기 아까웠습니다."
"그렇다고 사람 마음을 함부로 읽고 진면목을 보였으니…… 무공도 익히지 않은 아이가 얼마나 감당하기 힘들었을고."
장문인의 신분이라 평대를 하고는 있다. 하지만 나무라는 말투는 잘못을 저지른 제자를 혼내는 사부의 그것이었다.
"……"
말을 잇지 못하는 현양진인이다.
"그나저나 이번 일, 장문인은 결단이 서셨는지."
크게 나무랄 뜻은 없었던 듯 허상진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 같아서는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지만 억지로 안겨주는 것을 뿌리칠 수도 없는 일이지요."
기다렸던 질문인 듯, 현양진인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많은 것이 변할 것이야. 세간의 평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냐만은……"
"그저…… 진무각 제자들이 걱정입니다. 벌써부터 살검(殺劍)을 쥐게 되었으니……"
현양진인의 얼굴이 급속도로 침중해졌다. 허상진인 역시 그 맑은 눈빛에 우려의 기색이 비쳤으나 현양진인만큼 걱정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괜찮겠지. 모두 성품이 곧은 아이들이니."
허상진인의 말에도 현양진인의 얼굴은 굳은 얼굴은 풀어지지 않는다.
"괜찮을까요.아니,괜찮아야겠지요. 주치는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그의 시대는 짧지 않을 것이지요…… 하지만 성품이 과격하여 눈밖에 난 것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이렇게 관의 인정을 받지 않으면 무당파는 현판을 내려야 할 지도 모를 겁니다. 하지만 그깟 현판, 무당파는 무당산에 있으면 그만인 것. 아이들을 사지로 내몰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부쩍 고민이 됩니다."
"허허. 아까 장문인도 말하지 않았나, 돌고 돌아 태극이거늘. 주어진 길에 충실하면 되는 것. 전쟁터에서 죽음을 보면 아이들도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고."
허상진인은 몸을 돌려 상청궁을 빠져 나갔다. 하지만 목소리는 계속 들려온다.
"장문인은 무당파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소임이니…… 무당의 이름이 천년 만년 이어지는 것은 터무니 없는 과욕, 도맥(道脈)을 흐트려뜨리지만 않는다면 살림살이야 풍족하든 빈곤하든 무슨 의미가 있을고…… 아니, 불구부정이라 하였으니 도맥이든 뭐든 다 필요없지. 그저 천도(天道)에 따르면 그만인 게야."
조홍이 미망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린 것은 다음날 아침이 다 되어서다.
위병들은 자신들을 인솔해 온 관리가 인사 불성이 되자 안절부절 못한 듯, 무장도 벗지 않은 채 꾸벅 꾸벅 졸고 있었다.
조홍이 어제의 일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어린 소동 하나가 달려와 한마디를 전했다.
"저, 뵙자고 하는 분이 계신데요."
'아침부터 장문인을 만나야 하는 건가.'
아직 어제의 일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기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실신한 것과 다름없는 추태를 보이지 않았는가.
그러나 청한 만남을 뿌리칠 수는 없다.
망설이면서도 조홍은 아이를 따랐다.
'상청궁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길이 달랐다. 만나자는 사람 역시 장문인이 아닐 수 있었다.
아이 또한 그랬다. 만나자는 분이 있다고. 장문인을 부르는 투가 아니라 외부인을 지칭하는 투다.
판단력이 흐려졌다는 증거다.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고 몇 마디 훈계를 들은 것 뿐이었다. 그럼에도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사술(邪術)일었을까……'
몇몇 못된 종교에는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는 술법도 있다고 했다. 무당파의 장문이 그런 짓을 했으랴만은, 확실한 것은 애초에 조홍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조그만 소로를 따라 이른 곳은 제법 규모가 있는 전각이었다. 먹을 갈고 있는 듯 냄새가 물씬 풍겼는데, 책 또한 많이 있는 듯 익숙한 종이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이쪽이요."
쪼르르 달려 돌아간 아이.
자연스렵게 열린 문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자 두 사람이 보였다.
한 사람은 낯이 익었다.
'휘영(輝英) 선생……!'
검은 수염을 늘어뜨린 대쪽 같은 인상. 그 지식과 기품이 가히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는…… 당대에 손 꼽히는 문인이다.
조홍과도 안면이 있다. 십여 년 전 조홍이 문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 북경에서 몇 번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있었던 사람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신선이 타고 다니는 학(鶴)을 구경하러 간다'며 사라지고 소식이 두절된 기인이기도 했다.
'무당파에 계셨다니……'
"왔구먼."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사람을 보았다. 그렇다고 먼저 예를 차리는 것도 잊은 것은 문제였다.
"별래 무강하셨는지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별고 없을 수 밖에. 워낙에 산 기운이 맑아서 말이지. 어서 들어와 앉게나."
조홍이 들어오자 이미 앉아있던 청년 도사가 일어났다.
"그럼……"
"아니 어딜 가려고 그러나…… 자네도 다시 앉게."
"아닙니다. 오랜만에 만나신 듯 한데 제가 비켜 드려야지요."
말투가 부드럽고 음성이 또렷하다. 다시 권유하지 못할 의지를 내비치면서도 예를 잃지 않았다.
조홍은 옆에 일어선 청년을 돌아보았다.
이마가 반듯하고 작은 눈에 눈동자가 깨끗했다. 약간 하얀 얼굴에 입매가 단호하여 학자의 분위기를 풍겼다.
조홍과 눈이 마주치자 상대는 고개를 한번 숙여 인사를 한 후,
"모쪼록 몸 건강히 잘 계십시오."
"무운(武運)을 비네."
휘영 선생과 인사를 나누더니 조홍이 아는 채 할 시간도 주지 않고 돌아 나갔다.
"……"
"제가 이야기에 방해를 드렸군요."
"아닐세, 어서 이리로 앉게나."
조홍이 의자에 앉자 휘영 선생이 손수 차를 내왔다. 조홍은 그저 황송할 뿐이었다.
"도사들이 사는 곳인지라 많은 것을 직접 해야 하지. 그것도 수양에 꽤나 도움이 되더군."
휘영 선생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차를 권했다.
"그래, 장문인을 만나 뵈었다고?"
"예에……"
"많이 놀랐겠구먼."
"예."
"어떻던가?"
"……"
조홍은 말문이 막혔다. 사람의 마음을 뿌리부터 헤집은 그 목소리, 평범한 노인 뒤에 숨은 알 수 없는 기운. 표현하자면 끝도 없지만 막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겠지. 그런 것은."
휘영선생의 말에 조홍은 돌연 머리가 맑아짐을 느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있는, 측량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른 세상에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몇 배, 아니 그 이상의 정신세계를 구축한 사람.
그런 도인(道人)이 발한 '말', 언어가 그만한 힘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그럼…… 방금 나간 청년은 어떻던가?"
"언뜻 보아서…… 잘 모르겠지만…… 학식이 뛰어나 보였습니다."
"잘 보았네. 내 이때까지 저만한 문재(文才)는 손 꼽을만 하지."
사심 없는 칭찬.
조홍은 진실로 놀랐다. 휘영선생이 어떤 사람인가. 저 만큼 젊은 나이에 이정도 칭찬이면 최고의 인재를 일컽는 것이나 다름 없다.
"또한 무(武)에 대한 재능도 대단하다 하더군. 무(武)의 전당인 무당파에서 하는 말이니 틀림 없겠지."
"……!"
"저만한 인재가 한 둘이 아니다네. 이 산에는."
휘영 선생의 목소리가 나직해졌다. 감탄인지, 또는 걱정인지,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는 어조였다.
"보보(步步)마다 인재. 인재. 도사복을 입은 사람이면 어린 아이 하나까지도 그릇이 다르더군."
허탈함도 느껴졌다. 재능있는 사람, 휘영 선생의 마음에 찰 만한 사람들, 외부에선 한 명을 만나기도 힘들었을 재인들이 이 산에는 많다는 것이다.
"이제 궁금증도 하나 풀리겠지. 자네 역시 총명한 인재니까."
궁금했던 점. 어찌하여 휘영 선생이 이곳에 있는가. 조홍이 처음 가졌던 의문이었다. 선생의 말마 따나 이곳의 사람들이 다 그러하다면 그 답이 된다.
"예……"
"무림은 참 신기한 곳이지. 관가는 앞마당만을 보고 있을 뿐이야……"
"……"
"내 오랜만에 관리를 보니 잡설이 많았네 그려. 나이가 들었나 보이. 노파심만 많아졌는지."
"아닙니다. 금과옥조, 새겨 듣고 있습니다."
"허, 관리가 되더니 쓸데없는 것만 늘었구먼. 본론으로 들어가세나. 자네, 소칙의 내용은 알고 있나?"
"아닙니다. 짐작만 할 뿐."
"쯧쯔…… 꽉 막혔구먼. 펼쳐 볼 수도 있지 않았겠나. 관직이 사람을 버려놓았어. 잘 듣도록 하게. 자네하고도 무관한 일이 아니니까. 소칙은 무당파에 대한 막대한 보조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고 있지. 하지만 무작정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네. 당금의 폐하가 어찌 그런 분이시던가. 무당파에 요구하는 것이 있다네."
휘영 선생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요."
조홍의 질문, 휘영 선생이 찻잔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내려 놓듯이 입을 연다.
"무당파 젊은 제자들의 목숨. 무당의 미래. 바로 그것이네."
<나, 영락제는 평소 도교의 가르침을 중시해왔다. 무당산에 자리 잡은 도관이 민중의 생활과 안정에 기여한 바가 많다고 인정되어 소정의 전답과 토지를 하사하며 호북성 무당산에 있는 무당파를 공식적인 도관이자 방파로 책한다. 장문인이 정한 무당파의 재인을 도록사로 봉하도록 하며 임기가 다할 경우 다시 무당파에서 정해진다.>
소칙을 읽어 나가는 조홍은 이건 정말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고 느꼈다.
도록사란 국정 전반에 걸쳐 도가와 관련된 모든 행사와 정책 결정에 관여하는 관리다. 그러한 관리를 무당파에서 세습한다는 것은 무당파의 정치적 입지 또한 확대되는 일이다.
"또한 하사 될 토지에 있어서는 면세특권이 주어지며 도관의 소유일 뿐 사적인 재산으로 쓰일 수 없다."
여기까지 읽은 조홍은 장문인인 현양진인의 얼굴을 한 번 살폈다.
변화는 없다. 담담한 기색이다.
"이에 무당파에서는 무예가 뛰어나 정한 열명의 인재를 정 3품관리인 조홍의 책임하에 맡기도록 하며…… 조홍은 북로 토벌군 대장군 휘하 유군의 장수로 책봉한다."
'이…… 무슨……!'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조홍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재빨리 다음을 읽어 내려갔다.
<또한 무당 제자 중 다섯은 안휘성 성주 휘하로 인솔하여 남왜의 토벌대에 합류토록 하며 다섯은 북로 토벌군 대장군 휘하 유군의 장수의 책임하에 북경으로 인도된 후, 직책을 받아 북로 토벌군 대장군 휘하 유군의 장수 휘하에서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장성을 넘…… 는다.>
소칙은 여기까지였다. 더 이상의 어떤 설명도 없다.
현양진인을 보았다. 여전히 변함없는 신색이다.
'아, 이것이 어찌 된 일인가.'
조홍은 문관이다. 창 한번 제대로 잡아 본 적이 없다. 소칙에 명기된 것은 틀림없이 '장수(將首)'라는 두 글자.
무당파의 제자를 군인으로 종군시키라는 명도 당혹스럽지만, 자신을 장수로 봉하다니……
모함일까…… 누군가의 비위를 거슬렸는가. 말도 안 되는 직책을 받았다면 십중팔구 귀양살이…… 무엇이 눈 밖에 났길래.
"그것이 다인가?"
장문인이 물어왔다.
"그렇…… 습니다."
"그럼 제자들에게 이르겠네. 출발은 내일로 하세나."
흔들림 없는 음성. 휘영선생으로부터도 언질을 받았지만 확실하게 드러났다. 무당파는 이미 소칙의 내용을 알고 있다. 그것이 어찌 가능한가. 관하고 이미 끈이 닿아 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자신이 장수가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장문인과 눈을 마주쳤다.
"궁금한 것이 많겠구먼."
역시 감출 수 없다. 차라리 당당하게 묻는 것이 났다.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렇다네. 황궁에 자넬 눈 여겨 본 사람이 있지. 제자 중에 준과 조경이라는 아이들이 있네. 그 아이들이 도움이 될 것일세."
장문인은 입을 다물었다. 밑도 끝도 없는 말. 말을 그친 장문인은 더 이상의 단서를 주진 않으리라.
"그럼."
조홍은 정중히 관례를 취하고 몸을 돌렸다.
'휘영선생을 찾아봐야겠다."
조홍은 걸음을 빨리했다.
"찾아올 줄 알았네."
휘영 선생의 첫 마디였다.
"황궁과 무림은 상당히 깊게 연관되어 있지. 황궁의 인재들 중에는 강호인들이 적지 않게 있어서 국정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야. 보았듯이."
"하지만 어째서 제가 장수로……?"
"……?"
휘영 선생도 몰랐던 듯, 제법 놀란 기색이다.
"북로 토벌군의 장수로 책봉 되었습니다."
"허! 그렇군…… 문일지십의 문재가 무관으로 발탁되는 것이로군. 나라에 힘이 되겠어."
대수롭지 않은 투다. 조홍에겐 천지가 개벽하는 변화인 것을.
"북쪽에는 오랑케가 들끓고. 남쪽에는 왜적들이 창궐하니…… 속수무책, 나라의 기틀을 잡아가기도 시급한 고로…… 자네만한 젊은 사람들이 필요한 때인가 보네. 나라가 부르는데 응해야지. 고통 받는 민초들을 생각한다면."
"하지만……"
"무엇이 걱정인가. 내 알기로는 진무각 제자들이 함께하거늘. 많은 아이들을 가르쳐 보았지만 진무각 제자들 만큼 백가에 대한 이해가 빠르고 깨달음이 깊은 인재들은 천하에 없었다네. 특히 조경(朝璟), 준(俊), 도군(道君), 정(淨)은 병법과 진법에 대한 조예가 대단하지. 자네 정도의 인재가 묻고 가르침을 받아도 창피하지 않을 정도일세."
'이 조홍을 높게 봐주시고 계셨는가……'
"대장부로 태어나서 일군을 호령하고 치국평천하에 매진하는 것. 기회가 주어지면 응당 행함에 주저함이 없어야지. 자네는 더욱이 관리 아니던가."
조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산에 오면서 느꼈던 불길함이 이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왕 관에서 정해진 것이라면 거부할 수 없다. 소임을 다하고 전공을 올리면 되는 것이다.
출세라는 것.
일신에 거머쥐게 될 권력과 재물을 탐했던 것은 아니지 않았던가.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재능을 꽃피우고, 스스로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었을 뿐.
'돌고돌아 태극이니 맡은 일에 충실하면 그만.'
장문인의 말은 뼈에 새겨둘 가르침. 듣지 않았더라면 이번 일을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터.
북경으로 돌아가 항소를 올렸을 지도 모르는 일.
새로운 시작은 무당. 수려한 산에서였다.
도가에서 서로를 부를 때는 주로 도호(道號)를 쓴다.
도호는 도명(道名), 도사들에게 쓰이는 이름이다. 속세에서 나와 도사가 되면 이름을 새로이 받게 되는데 도사들은 이 이름을 더욱 진실한 이름으로 생각하고 그 뒤에 자, 또는 진인을 붙여 사용하게 된다.
무당파는 본디 격식을 그다지 차리지 않는다.
도교 본연의 가르침을 무위(無爲)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름 역시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 본다.
단지 나이가 들고 많은 것을 깨우쳤다고 볼 때, 속세로 돌아갈 일이 없을 때, 장문인이 도호를 내려주기는 한다. 그러나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강호에서는 쓰지 않아도 무방하다.
따라서 젊은 나이의 무당 제자들은 속세의 명칭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 이미 부모한테 받은 이름이면 그대로 쓰게 하는 것이다.
그 말은 무당의 제자들은 언제라도 환속할 수 있다는 것과 상통한다.
무당파는 제자들을 속박하려 들지 않는다.
단 심성이 곧지 않거나 올바르지 않은 행동을 한다면 엄중하게 징계한다. 무당의 무공으로 악행을 행하고 다닌다면 세상 밖으로까지 쫓아서라도 바로잡는 것이 무당의 문규다.
하지만 무당의 제자들 중 아직까지 그러한 일을 벌인 이는 없다.
배우는 심법과 무공이 정신 수양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통의 학문을 배운다. 휘영 선생과 같은 석학들이 언제나 무당 내에 머무르고 있지 않던가.
따라서 속세로 환속하더라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생활을 한다. 평생 배운 것이 천도에 어긋나지 않는 삶인 것이다.
이름도 모르는 고아들은 다르다. 자연히 도호를 이름으로 갖게 된다.
명경(明璟) 또한 그러하다.
나이도 정확히 모른다. 특히 겉으로 보아서는 나이를 추측하기 힘들다.
특이한 외모를 가졌기 때문이다.
명경은 혼혈이다.
처음 보는 이도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색목인의 피가 섞여 있다.
중원인의 얼굴색이지만 눈이 깊고 바다 같은 청록 빛 눈동자를 가졌다.
머리카락 또한 갈색이다. 키가 크고 건장하여 일반적인 중원인과는 골격부터 다르다.
무당파가 아니었다면 제자로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원의 지배 하에서 한인들은 색목인 보다 낮은 계급으로 칭해지며 많은 수모를 겪었으니 감정이 좋을 리가 없다.
소림이라면 모를까.
출신도 불분명한 혼혈아를 직전 제자로 키워 낼만한 방파는 중원 천지에 얼마 되지 않는다.
명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극도해를 수련하면 정신이 맑아지고 온 몸이 가벼워진다. 손을 뻗자 저쪽에 걸린 도포가 날아왔다. 하늘을 날아 탁자를 넘은 도포. 가볍게 받아 입은 명경은 다시 탁자 위에 놓인 검을 쳐다보았다.
검이 움직였다. 명경 쪽으로 질질 끌리듯이 다가오다가 탁자에서 떨어져 내렸다.
부드럽게, 그리고 재빨리 움직여 검을 받아냈다.
'역시 안 되는 군.'
염력(念力)이다.
어릴 적부터 명경은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감정이 격해질 때. 주변의 사물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 최근 들어 평상시에도 정신을 집중하면 가벼운 물건들을 손대지 않고도 움직이는 것이 가능해졌다.
명경은 진무각 제자다.
무당에서 진무각 제자는 무당파의 무공과 비술들을 이어갈 인재로 구성된다.
진무각 제자가 아닌 다른 제자들은 도(道)학을 이어나간다. 그들은 나이가 들면서 민초들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 그들도 물론 무공을 배운다. 그 깊이 역시 젊은 적에는 진무각 제자들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진무각 제자들과는 차이가 벌어졌다. 진무각 제자들은 강호를 전전하고 죽음을 겪어보기 때문이다.
진무각 출신들은 대부분 강호에서 알아주는 고수가 된다.
출중한 인재들. 명사의 지도. 최고의 무공. 부족한 것은 실전 경험인데 이미 일가를 이루고 시작하니 그 또한 무난하게 헤쳐나가기 마련이다. 무공 뿐이 아니다. 정통의 비전 술법들은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잡귀나 원귀들을 물리치는데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진무각 제자는 한 곳에서 가르침 받지 않는다. 각이라고는 했지만 진무각이란 전각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직전 제자로 삼고 다른 도학제자나 속가 제자와 구분하기 위해 붙인 명칭이 '진무각 제자'일 뿐이었다.
각자 사부가 다르고 배우는 무공이 다르며 배우는 장소도 달랐다. 개인의 특성에 따라 배우는 것도 특화되기 때문이었다. 특이한 것은 장점을 극대화하는 것보다는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애쓴다는 점이다. 한 곳에 치우치는 것은 천리에 어긋난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소림의 나한전과 구분되는 점이었다.
명경의 사부는 허공 진인이다.
허공 진인. 허상 진인의 사제로 장문인인 현양진인에게는 사숙이 된다.
장삼풍에게 직접 사사 받은 무공의 천재.
허상진인이 도맥을 이었다면 허공진인은 무맥을 이었다고 전해진다. 현 무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이며 공공연히 천하 제일 고수라 일컬어지는 바, 강호에서는 극도의 공경을 담아 허공 노사라고도 불렸다.
명경의 사부가 허공노사이기 때문에 배분으로 따지면 현양진인, 무당의 장문인과 같은 항렬이 된다. 다른 진무각 제자들에겐 사숙 뻘이란 이야기다.
하지만 무당파의 특성상 그러한 것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명경이 혼혈아인 것도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한 식구이니 머리나 눈 색깔은 개의치 않았다. 아니, 한 식구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무당파 제자들은 그렇게 배웠다.
명경의 나이는 현 진무각 제자들 중 가장 많았다. 다른 제자들은 명경이 이미 무당파에 들어온 후에 태어났다. 그렇다고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명경이 무당산에서 자라기 시작한 것은 두 세살 정도의 어린 애 였을 때 부터이니. 때문에 다른 제자들은 공식적인 호칭은 사숙이지만 대충 사형과 같은 격으로 대했다. 편하게 대해 준다는 것이다.
나이도 나이지만 명경의 무공 역시 제자들 중 가장 뛰어났다.
가히 발군이다.
신체조건이 훌륭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무공에 대한 감각이 매우 탁월했다. 한번 본 것은 왠만해서는 잊어 버리지 않고 동작에 대한 신체 적용력이 대단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범상치 않게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자세한 출생 내력은 허공 노사도 몰르지만.
무당산에 처음 왔을 때 부터 이미 상단전이 엄청나게 발달되어 있었다. 보통 사람보다 뇌의 활용력이 훨씬 뛰어나다는 뜻이다.
염력의 근원도 그것이었다.
대체 누가 부모인지는 몰라도, 또한 어떤 술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명경의 상단전은 억지로 열려 있었다. 만일 이 상태를 제대로 발전시켜 줄 명사가 없었다면 십중팔구 미치거나 정상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무당파에 이른 것은 다행, 천만 다행이었다.
인간의 몸에는 세 개의 단전이 있다.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
모두가 중요하다.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하단전을 먼저 단련한다.
신체 각 부의 강인함과 힘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하단전에 기를 모은 것이 세간에서 말하는 내공이다. 대주천을 이루면 무병장수할 뿐 아니라, 무공을 펼침에 있어 상상을 초월한 힘을 낸다.
중단전은 감정의 기복을 조절하고 내장을 보호한다.
중단전을 단련하면 뼈마디가 유연해지고 내부의 각 부분에 유연성과 자기 수복력이 증대된다. 항상 평상심을 유지할수 있어 당황하거나 깜짝 놀라는 일이 줄어든다. 무인에게 중단전의 단련은 하단전 만큼 중요할 수 밖에 없다. 서슬 퍼런 검날이 날아오는데 놀라 눈을 감아버리기라도 한다면 남는 것은 죽음 뿐이다.
마지막으로 상단전.
하단전에 기(氣)가 쌓이고 중단전에 정(精)이 머문다면 하단전은 신(神)을 위한 장소다. 혼(魂)과 백(魄)을 다스린다. 발달하면 예지능력이 생기거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고 손에 닿지 않은 사물을 조종할 수도 있다.
무당파에서도 상단전의 단련은 가장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부분이다. 조금만 잘못해도 미치거나 죽음에 이른다. 뇌와 관련되기 떄문이다.
인간의 신체는 항상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완벽해 지려는 성질 또한 가지고 있다.
하단전만 단련해도 중단전과 상단이 함께 발달한다. 문제는 그 발달 정도가 제멋대로라는 것이다. 무공을 잘못 수련하면 심성이 악독해지고 심지어는 미쳐버리는 경우가 있다. 상, 중, 하단전의 균형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을 때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명경이 허공 진인과 같은 무공의 강자에게 사사받게 된 이유가 그것이다.
상단전이 비정상적으로 발달 되어 있기 때문에 염력과 같은 이능(異能)을 보이면서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다. 감정의 영향을 받는 것은 중단전이 발달하지 못했기 떄문이다. 또한 하단전이 발달되지 못한 상태에서 그러한 능력을 사용한다가는 신체가 버텨내질 못한다. 성장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육신이 망가져 불구가 될 수 있었다.
허공 진인은 무공의 천재.
하단전과 중단전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 또한, 상단전의 활용에 있어서도 신(神)이 정과 기를 완전히 통제하는 경지에 올라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정.기.신이 일치한 무공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다. 허공진인 같은 무인이라면 명경에게 있는 부조화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허공진인은 명경을 수련시킴에 있어 두 가지를 선택했다.
태극도해. 무극진기.
태극도해는 상단전을 수련하는 비기다.
무당의 진전들 중에서도 특별한 것이었다.
함부로 가르치지 않으니, 진무각 제자들 중 명경과 단리림 단 두 명만 익히고 있었다.
단리림은 술법을 배우는 제자였다. 술법은 무공과는 꽤나 다른 영역에 있다. 하단전을 주로 사용하는 것이 무공이라면 술법에는 주로 상단정과 중단전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상단전이 활성화 되어야만 신체 외부의 기운을 활용하고 때로는 새로이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신(神)의 영역이었다.
함부로 태극도해를 익히고 술법을 배우다간 폐인이 된다. 때문에 일반 제자들은 중단전과 하단전에 완성도를 보여야만 태극도해를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무공이 완성단계에 있는 이들은 굳이 태극도해를 배울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기공과 심법을 수련하면서 필요한 만큼 서서히 상단전도 갖추어 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무당파 비전의 묘미였다.
다만, 단리림같은 술사들은 예외다. 무공 이외의 영역에서도 진전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에 선택된 인재였다. 단리림으로 말 할 것 같으면 상단전을 먼저 단련하여도 무리가 없는 체질을 타고 났다. 이런 체질은 접신이 용이하여 무당파나 모산파의 정통 비술을 익히지 않는다면, 또는 소림사나 아미파에 들어가 법력을 닦지 않으면 십중 팔구는 귀신이 들려 악행을 저지르거나 시름시름 앓다가 요절한다.
단리림은 어릴 때 부터 귀신을 보고 앞날을 맞추곤 하는 아이였다. 이를 걱정한 부모들은 겨우 말을 하기 시작한 어린 아이를 무당파에 맡겼다. 걱정보다는 두려움이 컸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단리림과 같이 술사로 키워진 사람들은 잡신을 다스리고 영(靈)과 관련된 일들을 했다.
무당파에서는 술사를 많이 키우지 않아 태극도해를 근간으로 명맥만을 이어가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그 비전 술법들의 위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남천 화술과 북음 풍도술은 강호 어떤 술법도 따라올 수 없는 최고의 비전들이라 할 만 했다. 다만 타고 나지 않으면 배울 수 없고, 술법을 시전하는 데에 있어서도 위험요소가 많기에 여러 제자를 두지 않는 것이었다. 무당의 도사들, 몸을 상하면서까지 억지로라도 술법을 배우는 것은 모산파 제자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보았다.
한편, 무극진기는 허공진인 스스로 창안한 기공이었다. 무당 특유의 부드러운 무공에 노도와 같은 강함을 신공으로 하단전과 중단전을 아우르는 묘용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무당파 제자들은 태청심법이나 소청심법으로 중단전을 단련하고 태극 기공으로는 하단전을 단련하는데 무극진기는 이들을 하나로 묶어 정과 기의 합일에 중점을 둔 기공이었다.
명경이 무극진기를 배우게 된 이유는 하나였다.
상단전 떄문이다. 억지로 발달시킨 것인 만큼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었을 터, 혼과 백에 직접적으로 조작을 가했으니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는 허공진인도 알 수 없었다. 태극도해가 바로잡아주길 바라는 수 밖에 없는 것다. 태극도해는 장삼풍 진인이 직접 깨닫고 만든 비전을 허상진인이 보완한 천하에 다시 없는 기예, 천도에 그르침이 없는 도념을 근간으로 하니 명경에게 행해진 술수가 어떤 것이었던지 간에 제자리를 찾게 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감각이 뛰어나고 깨우침이 빠른 것도 상단전이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는지 미지수라고는 해도 태극도해가 상단전을 더욱더 키워주고 있는 데다가 무신이라 불리는 허공진인에게 사사 받고 있으니 진무각 제자들 중 가장 강한 것은 당연했다.
명경은 검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의 숙소는 조그맣고 허름하지만 깔끔하게 다듬어진 초가였다. 앞에는 널찍한 공터가 있고 주변에 나무가 둘러 서 있어 연무장이 따로 필요 없었다.
검을 뽑았다. 날카로운 기운.
명경은 푸르게 빛나는 검날을 좋아했다.
곧고 맑아서 시린 느낌이 드는 검.
무당파는 대대로 송문고검(松紋古劍)을 사용했는데, 약간 뭉툭한 모습이면서도 길고 사납게 날이 서 있어 '느림'을 기본으로 하는 무당파의 무공을 효과적으로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잠시 검날을 바라보던 명경은 천천히 검을 들어올려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완만하게 현기를 담고 시작한 검은 점점 더 느려지더니 실낱같은 검기를 올올이 풀어내기 시작했다.
태극혜검(太極慧劍)이다.
본디 태극혜검은 느린 검공, 느리고 느리기 한이 없어 실전에서는 도무지 써먹을 수 있어보이지 않는 검술이었다. 그러나 느린 동작 속에 사량발천근의 묘리가 숨어있어 절정에 오르면 무적의 칭호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무공이다.
한 순간 명경의 검은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태극혜검의 본래 구결에 상반되는 시전이었다.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면면이 이어지던 검세가 돌연 풍랑을 만난 바다처럼 요동쳤다.
실낱같던 검기는 난폭하게 넘실거렸다.
투로와 검형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기세가 강맹하다. 공수의 조율이 완벽하고 실전적이였다. 태극혜검의 본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면서도 조화를 갖추었다.
태극혜검의 십초식 모두를 펼치기를 다섯 번. 매번 약간씩 다르면서도 빠름과 날카로움에 치중하기는 매한가지다.
마지막으로 검날을 떨치자 한마디 탁한 음성이 들려왔다.
"살기가 짙다."
사부.
허공진인.
아직 검은 머리카락이 조금은 남아있는, 그러나 대부분이 백발인 노도인.
공터의 한 켠에 서 있다.
"투로 자체는 별로 나무랄 데가 없는데 말이야."
허공진인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대뜸 명경의 검을 빼앗아 들었다.
휘적휘적 몇 번 휘둘렀다.
"여기선 이렇게가 더 났겠지?"
명경의 눈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망설이던 부분이다.
명경은 이미 원래 무공이 가진 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검을 빗어가는 단계에 있다. 허공진인이 바로 잡아준 부분은 한참동안 명경을 고민케 만들었던 부분이었다.
잠시동안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던 명경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반격의 여지가 있습니다."
"쯧쯧쯧. 온통 상대를 벨 생각 뿐이구나. 그리하면 죽이지 않고도 제압할 수 있어."
명경은 입을 다물었다. 항상 지적받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명경의 검술은 살기가 짙었다.
자기만의 검술을 만드는 경지. 그러나…… 그 결과는 항상 피를 보려고 하는 살검이었다.
'왜 그럴까……'
검을 연구하다 보면 저절로 상대를 살상하는 방법부터 떠올랐다.
어찌하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가.
태극혜검의 어느 구석에 그런 살기가 숨어있었는지…… 태극혜검은 태극혜검인데, 명경의 검에는 극히 실전적인 검기가 담겨있다.
"수양이 덜 된 탓이야. 이 상태로 전쟁터에 나간다니. 살인귀가 되지 않으면 다행일 텐데…… 쯧쯔."
무표정한 얼굴에 담긴 한 없는 걱정. 진한 정(情)이었다.
허공진인에게서는 일세를 풍미한 무적의 고수이기 이전에 제자를 염려하는 사부의 모습이 우러나왔다.
당신이 깨달은 것의 반의 반도 배워내지 못하고 살검만을 연성하는 제자가 보기 싫을 만도 하건만.
매일같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한 마디씩 충고를 잊지 않는 사부의 마음이 한 없이 고마우면서도 과분하게 느껴졌다.
"살인을 좋아해서는 안 돼. 전쟁터이니만큼 사람 목숨이 가볍게 느껴질 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을 잊어선 안되겠지."
명경은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도 그런 점이 두려웠다.
살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게 되는 것.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는 법이거늘.
사부의 말씀이 계셨으니 검을 들면 최소한 한번은 더 생각하게 되리라.
"염력은 어떻더냐. 이제 어느 정도는 조절이 가능하겠지?"
"예."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라."
"예."
간단히 끝맺는 대답들…… 명경은 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서툴렀다.
말 수가 적고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 자연스럽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는 외모를 지닌데다가 이상한 능력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나이가 들어서도 쉽게 사람들과 어울리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허공진인은 아버지나 다름이 없었다. 한번 허공진인이 '이리이리 하여라'라고 하면 반드시 그 말에 순종하고 진심으로 따랐다.
고치기 힘들었던 것은 오직 무공 하나다.
한번 배운 무공은 사부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오의를 깨우쳐 나갔으나, 진수를 습득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는 항상 문제를 일으켰다.
'작은 힘으로 큰 힘을 이기고, 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한다'라는 진결을 가장 잘 이해하면서도 막상 다듬어 나가면 전혀 다른 무공이 튀어나왔다.
"해줄 말이 있다."
허공진인은 아직 젊은이처럼 깨끗한 얼굴에 어두운 표정을 떠올렸다.
"어쩌면 네 무공이 그렇게 거칠어 지는 것은 내 잘못인지도 모른다."
"……?"
"무극진결."
"……"
"무극진결은 내가 숱한 비무를 하면서 얻은 심득이다. 실전적인 만큼 나도 모르는 새, 강한 살기를 담았을 수도 있어. 그러니 태극도해의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말고, 앞으로는 축기보다는 심결의 조화에 힘쓰도록 해라."
"예."
"그리고, 하나 더."
"……"
"만일…… 전쟁터에서 '챠이'라고 불리는 장수가 적진에 있다면 절대로 부딪히지 마라."
"……?"
명경은 놀랐다.
허공진인은 무공의 천재라 불린만큼, 도사답지 않게 상당히 호전적이다. 그런 그가 제자에게 싸워보지도 않고 피하라는 말을 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부딪치지 말라 하심은…… 그 자가 그리도 강합니까?"
"강호에서라면 모르되 전쟁터라면 무적, 가히 군신(軍神)이라 할만하지."
"……"
언젠가는 뛰어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하던 사부의 벽.
사부의 말투로 보아 챠이라는 장수는 실로 대단한 자일 터.
"그만 두어라."
"……"
허공진인은 명경의 표정만 보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허공진인에게도 명경은 아들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내 그래서 말해주지 않으려 했다. 네 성격에 전쟁터에서 그 자를 보면 틀림없이 맞서서 뛰쳐나가려고 할 것이니……"
명경은 고개를 숙였다. 사부의 질책.
"네가 도인이고 무인이며, 또 무엇보다 내 제자라면 네 자신의 위치를 잘 알아야 지. 싸움으로 얻는 것을 무공의 발전에 두면 안 돼. 사람을 배우는 것이라면 모르되…… 단순히 네 무공을 시험해 보고 싶다거나 호승심에 휩쓸려 나서는 거라면, 결과는 오직 하나, 죽음 뿐이다."
이렇게 까지 이야기 하다니.
기분이 묘하다.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 어떤 자이길래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영 못마땅한 얼굴이구먼. 이길 자신이 있으면 검을 뽑아라. 마음대로 해. 하지만 재차 삼차 생각해라. 내가 해줄 말은 그게 다이니……"
그 제자에 그 사부라, 허공진인 역시 정을 표현하는데 서툴렀다. 그저 투박하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마음을 따뜻하게 적실 뿐이다.
꽤나 오랫동안 사부로부터, 이런 저런 걱정과 염려, 그리고 당부의 말을 들은 명경은 이윽고 길을 떠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해 봤자 얼마 되지 않는다.
검소하게 자란 그에게 많은 짐이 필요할리 없었다. 크지 않은 봇짐과 한 자루 검, 그것이 전부였으니 홀가분하게 처소를 나왔다.
문을 닫으며 문득 생각했다.
'이곳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무당산은 그의 고향이었다.
모든 것을 이곳에서 배우고 자라왔다.
이제 이곳을 떠나 전쟁터로 간다니, 무심한 성격이 무색할 만큼, 감회가 남달랐다.
뒤를 돌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사부, 허공 진인이다.
항상 그곳에 서 계시면서 자신을 이끌어 준 분.
무엇이 그리 걱정 되시는지.
명경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다시 한번, 그리고 또 다시 한번……
계속되는 절은 아홉 번.
구배지례다.
절을 마친 명경은 고개를 굳게 한번 숙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입으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진심은 전해졌으리라.
사부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아직 눈이 덮여 있는 봉우리가 보였다. 봉우리의 능선을 따라 수려하게 뻗어 있는 계곡들, 숲들……
익숙한 산이다. 무당산, 명경은 두 눈 가득히 무당산을 담아 놓았다.
* * *
첫 대면은 당혹감.
명경이 조홍을 처음 만났을 때.
명경은 조홍의 눈에서 당혹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유는 역시 외모. 이런 곳에서 색목인을 보는 것은 예상 밖이었을 것이다.
먼저 포권을 취한 것은 명경이다.
그러자 조홍도 마주 포권을 했보였다.
관리라고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마음의 수습이 빠르고 법도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절이 뛰어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쪽은 명경, 역시 조 공자와 함께 할 진무각 제자 중 하나이네."
탁무 진인이 명경을 소개했다,
"조홍이라 합니다."
조홍은 스스로 자신을 소개하고는 고개를 한 번 숙였다.
이에 명경은 포권을 풀고 한 쪽을 바라 보았다.
이미 와 있는 제자들.
이십 명이 넘는 젊은 제자들 중 준비를 하고 사람은 여섯.
'아직 셋이 오지 않았군.'
열명의 진무각 제자들.
와 있는 이들은 각각 장일도, 양충과 금정, 금진 형제, 악도군, 그리고 가장 나이가 어린 이소 다.
명경과 눈이 마주치자 장일도가 씩 웃음을 지었다.
남자다운 얼굴에 시원한 미소였다.
장일도는 명경을 제외하면 진무각 제자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양충, 금정, 금진, 이소와 함께 현양 진인으로부터 사사받으며, 대사형으로 불리는 바, 악도군, 곽준, 단리림도 대사형으로 부르는 것은 물론이고, 도학 제자들도 대사형으로 받들 만큼 인품과 능력이 뛰어났다.
"준비는 그게 답니까."
명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일도는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명경 사숙에겐 전쟁도 큰 감흥이 일지 않는 모양입니다. 도군이는 좋겠어요."
이번에 전쟁터로 나가는 제자들은 다섯 명씩 다른 곳으로 파견 되도록 계획이 잡혀 있다. 그것이 소칙이기도 했고.
장일도를 위시한 현양 진인의 제자 다섯은 남쪽의 왜구와 싸우러 가고 명경과 곽준, 석조경, 곽준, 단리림은 북쪽의 원 잔당들과 싸우개 되는 것이었다. 명경의 무예가 실로 달인의 경지에 올라 있음을 잘 아는 장일도는 명경 정도의 고수를 동반하는 악도군 등이 괘나 부럽게 생각되는 모양이었다.
"손발을 쭉 맞춰온 사형제들만 하겠습니까."
방만한 태도로 걸어온 곽준.
건성으로 조홍에게 포권을 하더니 곧바로 대화에 뛰어드는 그였다.
"그래도, 진무각 최고의 고수가 우리 쪽에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지요."
다시 입을 열며 슬쩍 명경의 눈치를 본다.
"이쪽으로 말하자면, 네 녀석과 함께가 아니라 더 다행이다."
곰같이 커다란 체구, 양충은 장일도 보다 한 살 아래.
"무슨 말씀을 그리 섭섭하게 하십니까."
"도군, 조경이랑 사숙을 잘 보필해라. 곽준 저 녀석은 소리만 요란해 가지고 영 미덥지가 못해서."
양충에게 이름이 불린 악도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진 턱, 완고해 보이는 입매의 악도군은 탁무 진인의 제자, 권각술에 조예가 깊었다.
태연한 듯 도학 제자들과 담소를 나누면서 인사들을 주고 받는다지만, 진무각 제자들의 얼굴엔 약간의 긴장이 감돌았다.
무당산을 떠나보지 못한 젊은 제자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전쟁터가 기다리고 있다.
삼풍 진인의 시대가 원 말엽. 그 명성과 무력에 군부와의 접촉도 많았고, 원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 데 한 팔을 보태기도 했었던 무당파였으니 전쟁이란 단어가 무당파 역사에 있어 아주 생소한 단어는 아니다. 그러나 그 이후는 달랐다. 강호의 일에만 개입을 해 왔던 터라 전쟁터란 무당파와 상관 없는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전쟁터로 제자들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라니……
아무리 강호에 도검이 난무하고 피와 죽음이 어지럽게 교차된다지만 전쟁터의 흉험함이 그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을 것이 자명한 바, 긴장을 하지 않는다면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리라.
"조경이와 림아가 오는 군."
총명해 보이는 석조경, 그 뒤로 해사한 얼굴의 단리림이 걸어오고 있었다.
석조경이 문사와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면, 단리림은 자기 인형 같은 하얀 피부에 까만 눈동자가 인상적인 청년이다.
조홍과 인사를 나누고 이미 모인 제자들 곁으로 모이자 현양 진인이 입을 열었다.
"모두 모였는가."
열명의 제자들.
하나같이 여정을 꾸린 그들 뒤로 무당산 다른 봉우리의 정경이 멀리 보이고 있다.
"제례."
현양진인의 한 마디에 도학 제자들의 수좌인 지명이 나와 향을 피웠다.
무당파는 원무신을 모시는 도관.
원무신을 향한 제사가 간소하게 이루어지고 제자들의 무사 귀환을 비는 축도가 이어졌다.
길지 않은 의식이 끝난 후, 이윽고 많은 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명경을 비롯한 일행은 무당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2장
<조홍은 흥미로운 인물이다.
북경의 수많은 젊은 귀족들 중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자로 특이한 경력이 돋보이는 자다. 무공을 확인한 바는 없으나 고수의 반열에 올라 있을 것으로 보여지며 무당마검 명경과 대단한 친분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북풍단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무당이기(武當二寄), 일권진산(一拳震山) 악도군(岳道君), 비천검(飛天劍) 석조경(錫照競)과 호형 호제하는 사이로 무당파와의 연관 역시 지속적일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특기할 것은 무당파를 사문으로 두지 않았다는 것으로 그 무공의 연원은 전혀 알려진 바 없다.
금의위, 동창의 행사에 은밀하게 관여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으며 괴제갈 유준과도 친분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강호에 특별히 개입하고 있는 일이 없다고 하나 미지수다. 반드시 만나보아야 할 인물이다.
한백무림서 초안, 한백의 일기 중.>
무당산을 내려가는 길.
주위의 제자들을 둘러본 명경은 사부로부터 들은 말을 떠올렸다.
'북로, 그리고 남왜.'
북로란 원의 잔당인 몽고병을 뜻한다.
몽고병과의 싸움은 기병 전투가 주가 될 것이었다.
남쪽에는 왜구다.
왜적과의 싸움은 보병전투가 주가 될 것이라는 것.
다섯씩 나눈 것도 나름대로 제자들의 특징을 살린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전략에 따라 집단적으로 전투를 수행하는 기병전과 달리 보병전은 난전이 되기가 쉬웠다.
따라서 한 사부 밑에서 오랫동안 수행하고 손발을 맞춰온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장일도, 양충, 금정, 금진, 이소. 그들이다.
하지만……
사부들도 다르고 가진 바 능력도 다른 명경 쪽 다섯 명.
명경은 검의 고수, 악도군은 권각술에 일가견이 있고, 곽준과 석조경은 병기와 권각을 자유롭게 쓰면서 병법에 조예들이 깊었다. 그리고 단리림은 무당파 비전 술법을 익혀왔다.
'어떤 싸움이 될 것인지……'
명경으로선 아직 짐작하기 힘들었다.
무당의 제자들은 걷고 있었다.
걷고 있다고는 해도 그 움직임이 가볍기 이를 데 없어 일부러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조홍 일행이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조홍 일행은 말을 탄 사람이 대부분임에도 그랬다.
한명 한명, 절제된 기도다.
그들을 보며 조홍은 마냥 감탄을 하는 모양이었다. 연신 돌아보는 그의 눈에 비쳐지는 빛이 그랬다. 그러나 명경에겐 제자들이 상당히 긴장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첫 강호행에 전쟁터로 나가는 것이니 무당산을 내려가는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자신도 다를 바가 없었지만.
계속되는 침묵에 지친 듯 누군가 입을 열었다.
"왜적들도 무예가 뛰어날까요?"
낭랑한 목소리, 이제 십육 세인 이소의 질문이다.
"강한 자는 강하겠지. 중원의 무예와는 많이 다르다는데……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군."
장일도의 대답에 모두 귀를 기울였으나 슬쩍 웃으며 말끝을 흐리는 장일도다.
"누구 뭐 들은 이야기 좀 해 볼 사람 없나……?"
"사부님께서는…… 왜인들의 검술은 어딘지 부조화스러우면서도 신랄한 면이 상대하기 힘들었다고 그러시더군요."
입을 연 악도군은 탁무진인의 의발전인, 탁무진인은 강호를 주유할 때, 변경 쪽을 돌며 특이한 무공들과 겨뤄본 적이 많았다.
"신랄한 면이 상대하기 힘들다…… 그건 점창이나 공동, 해남파도 그렇다고 들었는데……"
양충의 말이다. 양충은 덩치가 곰처럼 크지만 섬세한 데가 있는 남자였다.
"일타 일격, 허초가 거의 없고, 반드시 피를 보려고 한답니다."
"그렇다면 동작이 크고 허점이 많겠군요."
입을 연 금정. 날카로운 눈매가 친형인 금진과 닮았다. 여기서 이소 다음으로 가장 어린 청년으로 얼굴이 무척이나 잘 생겼다.
"허점이 많지만 일격 필살의 자세로 나온다면 기세가 상당하겠지."
금진의 말에 모두가 수긍했다. 무당파에서 중시하는 것은 강(剛)보다는 유(柔). 겪어보지 못한 싸움이 될 것이라는 것은 틀림 없었다.
"몽고 기병의 무예는 어떻다고 하시냐?"
곽준의 질문. 진양 진인의 제자인 곽준은 원래 악도군과 친하여 서로에게 스스럼이 없었다. 진양 진인과 탁무 진인이 그렇듯이.
"그건 나보다 석 사제가 잘 알겠지."
석조경의 사부는 조양진인으로 북쪽에서 명성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사부님께선 몽고병의 무예는 말에 올랐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큰 차이가 있다고 그러셨습니다."
석조경의 목소리는 역시 부드러우면서도 맥이 있는 것이 학자의 그것과 같았다.
남권 북퇴. 전통적으로 무당파의 무공은 남쪽에서 그 이름이 높았는데, 조양진인은 이에 북쪽의 무공을 견식하고자 오랬동안 북부지방을 돌며 협행과 비무를 했던 사람이다.
그렇게나 무골인 사부. 그러나 제자인 석조경은 냉철한 지략가적인 성향이 강했다. 조화, 사부와 제자의 조화 역시 무당의 가르침이기 때문이었다.
"땅에 내려섰을 때에는 특이한 체술을 구사한답니다. 허나, 투로가 정리되지 않고 잡다하여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무공으로 보면 별것이 없다는 이야기인가 봐요. 하지만 말에 오르면 인마일체(人馬一體), 움직임이 자유롭고 공격범위가 넓어 까다롭다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한 기(騎) 한 기 따로 떨어져 있고 무예가 장수급이 아니라면 어려운 상대는 아니라고 합니다만 군대를 이루어 몰려온다면 상승의 무공도 무용지물이 될 공산이 크다고도 하셨습니다."
"공략법은 어떤 거죠?"
유리알 같은 목소리, 단리림이 물었다.
"일단 맞닥뜨리면 난전을 유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더라. 완전히 대형을 갖추고 돌진해 온다면 이길 수가 없다고 하셨다."
이 시점에 이르자 말 위의 조홍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칙명에 의하면 병사들을 지휘해야 하는 것도 자신이 될 터, 하나라도 더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후퇴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갑작스럽게 끼어 든 조홍에 모두가 조홍을 바라보았다. 조홍은 잠시 당황한 듯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궁금해서 그런데……"
"후퇴하지 않고도 이기려면 적어도 상대 진영의 장수보다 세배는 뛰어난 역량의 장수가 있어야 할 것이랍니다. 일단 선봉에서 지휘하는 장수가 적의 기세를 꺾어 준다면 대승의 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으나 쉬이 감이 오지 않는 듯, 조홍은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갸웃거리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와중에 제자들은 열띤 대화를 계속했는데 나중에는 전혀 상관없는 화산파의 무예라던가 소림의 무예라던가 하는 데 까지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에 마치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듣는 듯 조홍의 위사들만 귀가 즐거울 뿐이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며 명경은 북쪽을 생각했다.
사부로부터 들은 초원의 풍경.
초원에서 말을 달리고 누군가를 죽이게 될 것이다.
무인으로 검을 잡았으면 반드시 거쳐야 할 일.
상상하는 것으로만도 무거운 목숨의 짐. 제자들은 그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그렇게도 열띤 대화를 나누는 것이리라.
'오랜 여행이 되겠지.'
장일도 일행과는 성도에서 헤어졌다.
"무운을 빕니다. 명경사숙."
이미 기다리고 있던 관리가 곧바로 장일도 일행을 인계 받고는 제법 큰 마차를 타고 사라져 버렸다.
'일 처리가 유래없이 빠르다. 대체 누가 개입하고 있는 것이지……?'
조홍의 생각과는 아랑곳 없이 북경으로 가기 위한 마차가 미리 관가에서 준비 되어 명경 일행을 재촉했다.
조홍은 급히 서가에 다녀왔다.
한 무더기 책을 사 오더니 마차에 틀어 박혔다.
마차가 준비되어 있음에도 석조경은 일행 모두 말을 타고 가고 싶다 이야기했다. 기마에도 익숙해져야 할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기마술을 익히는 데는 모두 거의 시간을 소비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랫동안 말을 타 본 사람들처럼 익숙하게 말을 몰았다.
"정말로 처음 타 보는 겁니까?"
위병들의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그들의 습득은 빨랐다.
여정은 편했다.
명경이 색목인의 외모를 지녔다는 것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행들 대부분의 복장이 관복이기 떄문이다.
관가에서 주도하는 여정이니, 객잔에 들어갈 때도, 무슨 일을 할 때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위병들은 곽준 등이 명경을 윗사람으로 받드는 데다가 체구가 크고, 푸른 눈이 사람을 압도하는 데가 있어 그들도 명경을 모두 나이 많은 존장 처럼 어려워 했다.
'무공도 강할거야.'
위병들은 비록 제대로 배운 무인은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이 집단에서 가장 강한 이가 명경임을 알았다. 힘이 뒷받침 된다면 외모는 상관이 없다. 그렇다고 명경이 거들먹 거리는 것도 아니었으니, 은연 중에 따르는 이들이 생겨났다.
왠만해선 말 한마디 안 하는 것 또한 신비로워 보였는지 몰랐다.
결국, 무공이 가장 강한 이는 명경.
대화를 주도하고 가장 말이 많아 사교적인 것이 곽준이었고, 자잘한 일을 결정하고 일행을 이끄는 이는 석조경이다. 단리림은 가장 어렸으나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고, 악도군은 명경만큼이나 말이 없었다.
"읽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곽준은 어디에나 끼어들었다.
조홍이 마차 안에서 독서에만 빠져 있자 나선 것이다.
"아…… 그것이……"
슬쩍 고개를 들이밀고 조홍이 읽고 있는 책을 쳐다본 곽준.
"병법서, 당송이십사전도해로군."
"……!"
한 면만을 언뜻 본 것임에도 단번에 책 제목을 맞추었다.
"상당히 잘 된 책입니다."
"읽어 본 적이 있나 보시네."
"이것 저것 관심이 많은 편이라서 그렇지요. 그나 저나 무관이시라면 이제 이런 책을 읽지는 않을 텐데."
곽준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에 반해 조홍은 얼굴을 굳혔다. 당황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조 공자는 문관이십니다."
어느새 뒤에서 말을 몰아온 석조경이 끼어 들었다.
"함께 출정한다고 들었는데?"
곽준의 말은 제법 날카로웠다.
"그러니까 배우시려는 거 아닙니까. 그런 분께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실례입니다."
"허! 사형한테 말버릇 하고는."
"조 공자님, 언짢으셨으면 죄송합니다. 사형도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겁니다."
석조경의 사과가 있기는 하나 조홍의 얼굴은 과히 좋지 않았다.
"……"
"혹시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곽 사형께 여쭤 보십시오. 말은 저리 해도 병법에 조예가 깊답니다."
그러나 이런 계기로 인하여 정작 조홍이 도움을 청하게 된 것은 석조경이었다. 조홍은 이런 저런 병법서를 읽는데 열심 이었고 잘 이해가 안 되는 구절이나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석조경을 청하여 물어보았다.
"이건……"
"아, 그 계책은 상대 진영의 허실을 잘 파악해야만 가능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거기서 그 장수가 취한 것은 하책 입니다. 만일 보급로가 차단되었다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는 책략이었죠."
비슷한 연배에 접촉이 잦으니 어느 새 석조경과 조홍은 제법 스스럼 없는 사이가 되어 시도 때도 없이 병법에 관해 논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이런 계책이 더 났지 않겠나?"
"하하, 이해가 빠르군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기습을 당할 우려도 있습니다."
"아, 그렇게 되는 군. 그럼 이 수는 어떤가?"
객잔에서 쉴 때면 아예 붓과 종이 등을 펼쳐 놓고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논했다.
"상대의 맥점은 여기. 이곳을 공격하면 일거에 제압할 수 있겠지."
기회를 보아 온 듯, 어느 날 부터인가 곽준도 병법의 논의에 끼어들었다.
석조경은 냉철한 판단력이 돋보이고, 곽준은 직관력이 뛰어났다.
"여기서 이렇게 돌파해 나간다면?"
조홍이 한 줄기 선을 쭉 그어 나갔다.
"음……"
과감한 수, 이 시점에서 그런 강공을 취하려면 대단한 무예의 장수가 필요하다.
"좀 위험한데, 그건. 선봉장이 어지간 하지 않으면……"
"자네들이 있지 않나."
조홍은 신뢰에 담긴 눈으로 곽준과 석조경을 쳐다보았다.
젊은 사람들 중, 이렇게나 뛰어난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던 조홍은 이 둘만 옆에 있어도 전쟁터든 어디든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이만한 인물들이 셋이나 더 있는 바에야.
"우릴 과대평가 하시는군."
"그거야 곧 드러나겠지."
곽준의 말에 조홍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 * *
조홍의 말은 전쟁터를 이야기한 것이었지만 공교롭게도 그들의 무공이 드러날 기회는 일찍 찾아왔다.
열흘이 넘게 이어지던 여행 길에 다다른 곳이 산동성 끝 자락의 덕주. 제법 큰 도시였다.
아무래도 북경이 가까워 왔음에서인지 활기차면서도 거리가 깨끗하여 절도 있는 분위기다.
관가의 영향력도 강해지는지 조홍처럼 북경에서 일을 하는 같은 관리가 나타나자 영접이니 뭐니 한바탕 호들갑을 떨었다.
수도는 남경이라지만 영락제가 거하는 곳은 일년의 반 이상이 북경이다. 북경이야말로 영락제가 연왕으로 불리던 시절 그의 근거지……
게다가 북벌의 거점이 되는 곳이었으니, 북경에 관직에 종사한다면 지방 말단 관리가 쩔쩔맬만도 했다.
다 물리치고는 번화가에 있는 객잔으로 자리를 잡았다.
"참으로 노골적이군."
왠만해선 그냥 넘어가려고 했던 조홍도 시키지도 않은 호화로운 음식이 줄줄이 나오자 역정을 내고 말았다.
"누가 이런 음식을 시켰지?"
"저…… 혀…… 현령님께서……"
눈칫밥 하나로 먹고 살아온 점소이는 조홍의 어조가 심상치 않자 심히 불안해 했다.
"어차피 입맛에도 맞지 않을 것들을."
무당파 제자들이 먹기에는 너무나 기름지다. 그나마 먹는 것을 가리지 않는 곽준도 젓가락을 들었다가 곧바로 놓고 말았다.
이에 조홍은 위병들을 불렀다.
"실컷 먹고 마시게, 이곳 현령께서 대접해 주시는 거라네."
젊은 만큼 고지식 하지만도 않은 조홍이다. 불순한 의도로 베푸는 호의라면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다. 보답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우리는 자리를 옮기도록 합시다. 여기 있으면 귀찮은 일이 계속 있을 것 같으니."
"조…… 조대인 호위는……!"
위병 중 하나가 말을 하다가 미처 다 끝내지 못하고 눈치를 살폈다. 조홍과 함께 일어선 다섯 명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객잔의 이름은 풍류 객잔. 어디에나 있음직한 현판을 걸고 있었다.
이층으로 올라왔다. 지는 해의 노을이 곱게 비쳐 들어왔다.
"사숙이라 불리시던데."
조홍은 명경에게 넌지시 말을 건냈다.
"그저 호칭일 뿐이오."
명경은 짧게 대답하고 입을 닫았다. 그의 정신은 다른 데 가 있었다.
'하나…… 아니 둘. 무인이다.'
명경은 객잔 저 쪽에 앉아 이상하게 생긴 악기를 만지고 있는 남자를 쳐다 보았다.
길쭉한 몸체에 여섯 줄, 금(琴)을 약간 변형시킨 듯 하다. 남자의 손가락이 조금씩 줄을 튕기고 있었다.
묘하게 머리카락이 짧다. 파계라도 당한 승려일까. 수염이 지저분하게 나 있어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또 한 사람, 꽤나 긴 장발을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 있다. 독특한 분위기다. 조그만 체구, 깔끔한 옷차림이지만 일반인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경계감과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무인, 그것도 상당한 고수들이었다.
금을 가지고 있는 남자는 창가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무엇을 보았는지 잠시 밖을 쳐다보더니 연주를 시작했다.
딩! 딩.딩.딩. 음률이 시원하고 힘차다. 비장한 기운도 감돌았다.
빠른 손놀림.
강약법이 독특하고 들끓는 기운이 드러난다. 예사로운 솜씨가 아니었다.
무당파에서 음률은 가르치지 않는다. 왠만한 시, 서, 화는 배우지만 악기를 다룰 정도로 예(藝)를 중시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보통 솜씨가 아니라는 것 쯤은 그들도 알 수 있었다.
객잔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금을 뜯는 그 자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결코 연주를 제지하지 않는다. 외모가 독특하고 이런 놀라운 재주가 있다면 십중팔구는 무림이기 때문이다. 무인이란 거리에서 거들먹거리는 파락호랑은 달라서 일반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어찌할 수 없는 인종들이었다.
딩딩딩딩……
음률이 고조되고 손놀림이 빨라졌다. 정석적인 탄법은 아니었다. 소리가 높고 음정의 변화가 기묘하여 생소한 느낌이다. 그러나 박자가 안정되고 감정이 풍부하여 사람을 도취시켰다.
연주하는 본인도 스스로 도취된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누군가가 그 얼굴을 보고 신음처럼 한 마디 뱉는다.
"칠절신금(七絶神琴)……!"
칠절신금이라면 꽤나 유명한 자다. 호남성 상문현 출신으로 장강 이남에서 명성이 높았는데 어쩐 일인지 얼마 전부터 호남과는 수 천리가 떨어진 산동성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성정이 특이하나 악하지 않고, 지닌 바 뛰어난 금(琴) 실력과 독특한 무공으로 신진 고수 대접을 받았다.
반 각(일 각이 약 15분)정도의 연주, 한 곡이 끝나자 사람들의 갈채가 쏟아졌다.
어느 새 수 많은 사람들이 객잔에 들어와 있었다.
한 순간 다른 한 곳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사람들 사이로 걸어 오는 한 명의 여인.
헐렁하게 입은 옷 사이로 은은히 몸매가 드러났다.
어깨에서 흘러 내릴듯한 비단 옷이 풍만하나 천박하지 않아 보이는 가슴에 걸려 어딘지 모르게 색감이 드러나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대단한 실력이시군요, 소녀 진심으로 감탄했어요."
"끄응……"
미모에 놀란 듯, 칠절신금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칠절신금이라 불리신다지요."
"아,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실로 아름다우시군요."
"고맙네요."
그렇게 직접적인 찬사를 듣고도 별로 수줍어 하지 않는다. 예사 여인이 아니었다.
"엇, 태산신녀……!"
누군가의 한 마디.
태산신녀라 하면 역시 산동성에선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인물이다. 음률에 대한 조예가 산동성에서는 최고라 알려졌을 정도로 뛰어난 예인(藝人)이며 지닌 바 무공이 실로 대단하여, 적어도 무명(武名)만큼은 칠절신금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칠절신금의 명성이 한 성(省)을 벗어나지 못하는 정도라면, 태산신녀의 명셩은 전 중원에 널리 알려졌을 정도였다.
"연주한 곡명이 무엇이죠?"
객잔풍운이라하여 수 많은 사건과 싸움이 일어나는 곳이 객잔이다. 이 정도 명성있는 인물들이 모이자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럼에도 태산신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하다.
"인형주인(人形主人)이라 하오."
"재미있는 이름이군요. 중원의 노래가 아니지요?"
"그렇소."
태산신녀는 칠절신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하얀 이를 배시시 내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왜 이런 일들을 벌이시는지 설명해 주실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꽤나 연기를 잘 하시는 군요. 일단 그 쪽 분도 대단한 무인이고……"
태산신녀가 한 쪽에 있는 장발 청년을 가리켰다.
"이쪽 여섯 분. 이만한 고수들을 모아 놓고 무슨 일을 꾸미시는 것이지요?"
태산신녀의 손가락이 명경 일행을 향했다.
그녀의 얼굴엔 이제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태산신녀의 명성은 그 미모와 기예 뿐 아니라 그녀의 의협심에서 비롯된 부분이 컸다. 그녀의 목소리엔 불손한 짓을 꾸민다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배어 있다.
"그 쪽 분들은 우리와 관계없소. 편지에 쓴 대로 우리는 당신과 음(音)에 대해 논하고 싶을 뿐이오."
이제보니 태산신녀의 출현은 칠절신금의 초대에 의한 것인 듯 했다.
"우리?"
"그러지 말고 시작이나 하지."
억센 사천 억양이었다. 창가에 기대어 있던 장발의 사내가 칠절신금에게 다가왔다. 본디부터 칠절신금과 일행이었던 것 같았다.
"오해를 푸시오 태산신녀. 다른 곳을 들려드리지. 이 곡의 이름은 일야격동, 화택이 작곡한 곡이라오."
칠절신금이 다시 금을 타기 시작했다.
조금 전보다 훨씬 힘이 느껴지는 연주다.
"오오오오오오……!"
그의 연주에 장발의 사내가 음을 넣었다. 탁한 듯 고음역을 내는데 자유로왔다.
특이한 목소리. 꺾고 터뜨리는 창법이 독특했다. 게다가 칠절신금의 금은 홀로 연주할 때도 뛰어났지만 천하일성이 가세하여 조화롭게 음률이 풀어가자 믿을 수 없이 훌륭한 곡이 만들어졌다.
"천하일성(天下一聲)!"
이정도의 노래. 온 강호에 많지 않았다.
게다가 그 중에서도 칠절신금과 어울릴 만큼 성정이 특이하고, 무예가 뛰어난 고수라면 천하일성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말투. 약간 발음이 짧은 독특한 사천 지방 말투는 세간이 말하는 천하일성의 특징에 다름이 아니었다.
"대단한 실력이군."
조홍은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황궁에 있다 보면 황제를 위한 수 많은 재인(才人)을 보기 마련이다.
중원 전체에서 이름 난 악공들을 많이 보아왔지만, 이 두 사람들보다 딱히 뛰어난 악사들을 본 적이 없었다. 온 사방의 사람들이 그들의 연주를 듣고 몰려들고 있었다.
"사제, 어떤 녀석들 같냐?"
곽준이 단리림에게 물었다.
"악인들은 아닙니다. 그런데……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요."
단리림은 무당 비전, 풍도술의 전인이다. 또한 명경처럼 태극도해를 익혔고, 상단전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감각이 남달랐다.
아아아아……
목소리와 악기소리 모두 그 음률이 고조되고 있었다. 음률이 고조되면서 사람들의 마음 또한 들뜨는 듯, 여기 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내력을 사용하고 있군."
방심하고 있으면 쉽게 감정에 휩쓸려 버릴만한 음악이었다. 이 정도면 음공에 가깝다. 연주자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듣는 사람에게 얼마든지 해를 끼칠 수 있을 정도의 힘이었다. 몸이 약한 사람은 심맥이 위험할 정도로 강렬한 연주인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채 곡은 끝이 났다.
우뢰와 같은 박수.
"정말 대단하네요."
태산신녀도 진실로 감탄한 어조다. 이 정도 기예에 당적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녀의 얼굴은 다시 미소로 풀려 있었다.
"소녀도 한 곡, 연주해야 하겠군요."
어느 새, 객잔에는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태백신녀에 칠절신금, 천하일성이 나타났으니, 얼굴이라도 한 번 보려고 나타난 사람이 엄청났다.
태산신녀의 손에 마술처럼 한 자루의 옥소(玉簫-피리와 같은 악기)가 나타났다.
흐르는 물처럼 가볍게 울려 퍼지는 음률이 칠절신금과 천하일성의 곡으로 흥분한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왔습니다. 일이 생기겠는데요."
단리림이 한 말에 신경 쓰는 것은 무당의 네 제자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조홍마저 연주에 넋이 나가있는 상태였다.
"무엇이 왔다는 거지?"
"몰라요. 하지만 저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이……"
갑작스럽게 텅! 하고 창 밖에서 무엇인가 날아들었다.
"가자!"
한 사람을 옆구리에 낀 풍채 좋은 남자였다.
창 밖에서 날아오듯 들어 온 그의 외침에 칠절신금과 천하일성이 재빨리 움직였다.
창 밖으로 몸을 날린 그들은 이내 거리로 뛰쳐나와 운집해 있는 사람들을 단숨에 뛰어넘었다.
그 순간,
"잡아라!"
"비켜!"
"왠 사람이 이렇게! 어서 좀 비키란 말이다!"
골목을 돌아 나타난 한 무리의 관병.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어 뛰어드는 관병들 때문에 거리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연주를 멈춘 태산신녀도 순간 어이없는 얼굴이 되더니 창 밖으로 몸을 날렸다. 쫓아가려는 심산이다.
"우리도 갑시다!"
곽준이 명경의 옷을 끌며 뛰어나갔다. 얼떨결에 움직이게 된 명경은 이내 창 밖으로 몸을 띄우고 있었다.
* * *
"괜찮겠지."
"곽 사형 하나라면 모르지만 명경 사숙이 있는데 무슨 걱정입니까."
곽준이 뛰쳐나가는데 끌려간 것은 명경 하나였다. 나머지는 그다지 얽히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모두 객잔 안에 남아 있었다. 조홍은 창 밖으로 사람이 날아들어오고, 한창 음률을 연주하던 사람들과 명경, 곽준이 날듯이 사라진 것이 못내 신기한 듯,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단리림이 말했다. 그가 그렇다면 틀림 없었다. 오랬동안 주술을 배워 미래의 일을 잘 예측했다. 굳이 점괘를 풀어보지 않더라도 앞으로의 일들을 잘 알아내곤 했는데, 그것은 이미 육감의 경지를 벗어난 신기(神技)요, 예지력이었다.
조홍은 창밖을 내다보다가 한 명의 관병을 불렀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있겠나?"
조홍의 물음에 관병이 굽실 거리며 다가왔다.
"아, 저, 실은…… 아까 거물 하나가 탈옥 한 일이 있었습죠. 권가인데 이름은 모릅니다. 강호에선 대도신창(大盜神槍)이라고 불린다고…… 유명한 놈었다는데……"
"들어 본 적 있나?"
조홍이 석조경에게 물었으나 고개를 설래 설래 저었다.
"악사형은요?"
석조경이 돌아 본 사람은 악도군이었다. 악도군의 사부는 천하의 온갖 무공을 견식해본 탁무진인이었기 때문이다.
"사부님께…… 대도신창에 대하여 들은 적이 있다. 창을 잘 쓰지만 신창(神槍)이라 불릴 정도는 아니라고 하셨지, 다만 그 사부이자 아버지인 권노인은 가히 신창이란 칭호가 과하지 않다고도 하시더군."
"그래서…… 그 탈옥한 자가……?"
다시 조홍은 관병에게 말을 건냈다.
"그놈이 말입죠, 오늘 호송 도중에 포박이 묶인 채로 병사 몇 명을 때려 눕히고 도주를 시도했드랩죠. 원체 감시가 심하니 도망이야 꿈도 못 꿀 일인데……"
"웬 놈이 나타나 데리고 도망쳤다?"
"예! 그렇습니다요. 사람을 번쩍 들고 날듯이 도망쳤죠. 하지만 곧 잡힐 겁니다. 금의위 세 분이 쫓아가셨으니."
"금의위……!"
금의위라 하면 황실 경호대. 강호에 나서도 고수 대접을 받기에 손색이 없는 뛰어난 무인으로 구성되었다는 집단이다. 동창과 쌍벽을 이루는 강력한 황실 직속 부대이며, 최근 들어 그 위세가 더욱 커지고 있는 곳이었다.
"거기 무슨 일인가."
붉은 색과 하얀 색이 섞인 전포, 금실로 화려하게 수가 놓인 옷을 입은 무사가 다가왔다.
"이크, 금의위 위사님이십니다."
관병은 조홍을 보았을 때 보다 더욱 굽실거리며 비켜섰다.
"그 쪽 분들은 어쩐 일로?"
조홍이 비록 중앙 관복을 입었다고는 하나, 금의위 위사들에겐 대단치 않아 보이는 듯 싶다. 턱짓으로 그들을 가리키면서 은근히 거만한 자세를 취했다.
"정 삼품 관리 조홍이라 합니다. 소칙을 받아 북경으로 가던 참에."
"나머지 세 명. 신분은?"
"신분을 밝히는 것 보다…… 할 수 없이 이것을 꺼내야 겠군요."
의심의 눈초리였다. 조홍은 할 수 없이 품속에서 소칙이 적힌 두루마리를 꺼냈다.
황제가 직접 하사한 독특한 인장이 붙어 있었다.
"소칙을 뵙습니다."
금위위 위사가 낯빛이 변하며 오체투지(두발, 두 무릎, 한 손이 땅에 닿게 하는 예법.)의 예를 취했다.
"이 분들 모두 칙령에 따르고 있는 중이니 괘념치 마시지요…… 수고 하십시오."
조홍은 깊게 포권하며 물러섰다. 굳이 여기에 더 있을 이유가 없다.
금의위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었다. 황실 중추 집단이니 자칫 잘못하다간 출세고 뭐고 만사 어렵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대체 왜?"
명경은 곽준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따라가냐는 질문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의 정체가 드러나지 말라고만 그러셨지, 재미있는 일에 끼지 말라는 이야기는 안 해 주셨습니다."
대단한 속도로 앞서가는 칠절신금 일행, 그리고 그 뒤를 태산신녀가. 그리고 또 그 뒤로 명경과 곽준이 따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도심을 벗어난 그들은 이제 어둠이 슬슬 깔리기 시작한 산로(山路)에 접어들었다.
"여기서 끊자!"
제일 앞에서 달려나가던 풍채 좋은 남자가 소리쳤다.
말이 끝나자 마자 칠절신금 일행이 멈추어 태산신녀를 맞았다.
"결국 이런 수작이라니!"
태산신녀는 멈추어 서면서 분노를 터뜨렸다.
어느새 장소는 숲 사이의 공터.
탁 트여있어 명경과 곽준의 모습도 드러났으니, 칠절신금 일행과 명경, 곽준 사이에 태산신녀가 끼어 포위된 형국이 되었다.
"한 통속이었구나. 비열한!"
태산신녀는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사나운 시선으로 곽준과 명경을 훑어보고는 칠절신검을 향해 옥적을 겨누었다. 그 서슬에 흔들리는 가슴이 꽤나 육감적이었으나, 누구도 그런 것을 신경쓰지 못할 만큼 그녀의 기도가 뛰어나게 강했다.
"아 오해입니다, 이쪽은 구경꾼, 알아서 일들 보시지요."
곽준이 유연하게 말을 받았다. 태산신녀의 눈에 놀람이 스쳐지나갔다. 아니, 놀란 것은 또 있다. 칠절신금 일행이다.
관복을 입은 사람곁에 있었으니, 자연히 자신들을 잡으러 온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웁, 그럼 그 쪽은 우리에게 볼일이 없으시다?"
칠절신금이 반신 반의하면서 되물었다.
이에 확신 시켜주듯 고개를 끄덕이는 곽준.
"그럼…… 신녀…… 님…… 과의 일만 남은 것이로군."
칠절신금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이번 일은…… 휴우…… 정말로 사죄를 드릴 뿐이오."
"……?"
"실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소. 저기 저분은 제가 의형으로 모시고 있는 분이지요."
칠절신금은 여태까지 풍채 좋은 이의 옆구리에 끼어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남자가 옆구리에 매달린 자세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세간에서 대도신창이라 불리는 자였다. 하얀 얼굴에 다부진 채격, 눈매가 날카로웠다.
"내, 내, 내가 설명하지."
그러나…… 말투는 외모와 달리 어눌하여 알아 듣기 힘들었다.
"조용히 좀 있어보셔."
천하일성이 대도신창의 말을 막았다.
"형님은 누명을 쓰셨소. 그래서 이런 일을 벌이게 된 것이오. 신녀를 끌어들인 것은 사람을 모아서 도주를 쉽게 하려고 한 궁여지책이었소. 게다가 세상을 떨쳐 울린 태산신녀의 음률을 견식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고……"
"그래, 누명, 그 누명을 써서 말이야."
대도신창이 다시 어눌하게 거들었다.
"그래도 태산에서 여기까지 끌어들인 것은 과히 기분이 좋지 않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누명이라는 것은 어떻게 믿죠?"
태산신녀의 몸에서 발산되던 거센 기운이 부쩍 줄어들었다.
그떄였다.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곽준이 입을 연 것은.
"이봐들, 지금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곽준은 턱짓으로 자신의 뒤쪽을 가리켰다.
"추적자가 더 있거든, 고수들. 세 명이나."
태산신녀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명경과 곽준을 쳐다 보았다.
농담인가.
아무도 오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데.
아니다.
'하나, 둘, 그리고 하나 더.'
신경을 집중하고 내력을 끌어올리자 무서운 속도로 은밀하게 다가오는 세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이 순간에도 다가오고 있다.
'이 사람들의 정체는 대체 뭐지?'
귀티나는 외모의 곽준. 그리고 갈색머리 벽안의 명경. 이 정도 고수들의 움직임을 간단히 알아챘다면 예사로운 무인들이 아닐 것이다.
"이번에는 제가. 호 형님은 이거나 들어주세요."
칠절신금이 재빨리 다가가 대도신창을 대신 들쳐 업고 금을 건냈다. 그러고 보니, 호 형님이라 불린 사람 등에는 조그마한 북이 하나 매달려 있다.
"신녀,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다음 번엔 내 소고(小鼓)와도 한 번 어울려 봅시다."
천하일성, 칠절신금……
태산신녀는 고(鼓-북)을 다루는데 능숙한 또 다른 기인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건곤고(乾坤鼓) 호재(胡齋).'
"어쩔까요. 도와줄까요. 잡힐텐데."
"……"
"진실된 사람들로 보이던데. 누명도 진짜 같고."
"누명…… 진심으로 믿고 있기는 하더군."
"그럼, 누명이 아닐 수도……?"
"악인들은 아니야."
명경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곽준은 명경을 믿었다.
태극도해…… 단리림을 믿는 것처럼.
명경도 단리림처럼 사람을 읽는데 뛰어나다. 말을 안 할 뿐. 단리림이 느끼는 만큼의 예지와 육감, 명경에게도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 곽준의 뒤로 세 사람이 나타났다.
붉은 옷에 금색 장식. 금의위였다.
"방수(放手:조력자)들인가?"
태산신녀, 명경, 곽준이 범상치 않은 기도를 가지고 있으니 날카로운 어조다.
당장이라도 허리에 찬 검을 빼 들 듯한 기세였다.
"그저 일 돌아가는 것이 궁금했던 강호인일 뿐이오."
"그 말을 믿으라는 것인가?"
"이러고 있을 시기에 한참은 더 도망 갔겠소."
곽준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다. 너무나 부드러워 오히려 화를 돋구었다.
"이놈들이!"
한 명이 기어코 역정을 내자,
"저 자의 말이 맞네, 어서 쫓기나 하세. 저들은 방수가 아니야, 보면 모르나."
하고는 두 사람의 금의위가 재빨리 뛰쳐 나갔다.
금의위라 하면 발탁되기까지, 그 무공 뿐 아니라 안목과 통찰력이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그들은 대번에 명경과 곽준, 태백신녀가 대도신창 일행이 아님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시비를 거는 것은 단순히 짜증이 났을 뿐일 터……
"무림의 족속들이란. 호기심 가지기 전에 목이나 잘 간수해 둬."
역정을 냈던 한 위사는 쫓을 생각이 없기라도 한 듯, 남아서 곽준과 명경을 노려보았다.
"입이 참으로 거치십니다."
뚜렷한 적의를 보이는 곽준이었다. 무림인을 경멸하는 어조가 마음에 안 든 것이었다.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겠군. 내 굳이 가지 않아도 대도신창은 죽은 목숨. 네놈들이나 심문해 봐야겠구나."
금의위 위사의 몸에서 살의가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안하무인. 권력에 어지간히 취해있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태도다.
마음에 안 든다고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무당파의 가르침에 합당하지 않는 것이었으나 이 정도 되면 곽준도 어쩔 수 없었다.
남은 것은 실전, 산타 뿐이었다.
'무당의 무공을 드러내서도 안 되고, 그냥 넘어갈 수도 없게 생겼으니 어쩐다. 기본공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도 아니고. 가만히 있을 것을, 내 입이 문제로군.'
전쟁터에 가기 전까지 절대로 무당의 제자임을 드러내지 말라던 당부. 진무각 제자 모두에게 떨어진 장문인의 명이다.
"방금까지의 건방진 태도는 어디 갔지? 대도신창과는 무슨관계냐. 아니, 아니지…… 사제? 그래 사제가 좋겠군. 너는 대도신창의 사제로 금의위의 일을 방해하다 죽은 것이다. 어때?"
곽준의 눈에 분노가 스쳤다. 악독한 마음씨.
말로만 듣던 악인이다.
어찌 사람으로 구제 못할 인간이 있을지, 산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비로소 피부로 와 닿았다.
곽준은 진기를 끌어 올리고 투로를 밟아낼 준비를 했다.
"그만."
막아선 손. 명경의 손이다.
명경이 한 발 나섰다.
"호오. 이번엔 웬 놈인가. 퍼런 눈깔을 함부로 놀리는 색목인 놈이었군."
'상대할 가치도 없는 자로군……'
명경이 한 발작 더 다가섰다.
금위위 위사는 검을 쳐 내려다가 움찔 했다.
빈틈이 없다. 어디에도.
다시 한 발작. 이내 성큼 성큼 다가왔다.
'헉! 매…… 맥을 끊을 데가 있을 텐데. 이런…… 제길!'
한번 기세에서 눌리기 시작하니 금위위 위사는 공격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거리 안으로 들어오는데도 검을 쳐내지 못하니 뒤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금의위지 않은가. 이대로 물러나다가는 큰 소리 친 면목이 없다.
검을 쳐 냈다.
쭈욱 뻗어나간 검.
툭, 하고 뭔가 검면을 때리는 듯 하더니 검자루가 손아귀를 벗어났다.
'내딛는 발에 태허, 나가는 몸에 태극. 무극보(無極步)로구나……!'
곽준은 감탄했다. 허공 진인이 창안한 보법. 곽준도 허공 진인이 펼치는 것을 볼 기회가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보법이라 생각했는데 한 걸음, 한 걸음에 상대의 전의를 꺾는 강렬한 힘이 우러 나온다.
실제로 보니 믿을 수 없는 위력이었다.
금위위라는 직책은 차치하고, 그 무례한 태도 역시 넘겨 두더라도, 분명 무인은 무인이었다. 그도 고수 소리를 들을 만한 무인이다. 진신 무공을 쓰지 않고서는 곽준으로서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였다.
곽준은 다시 한번 방금의 일전을 떠올렸다.
금의위의 자세…… 검을 뽑아 들었을 때만 해도 심력과 투로가 정리된 기수식이었는데, 명경이 한 발을 내딛자, 단숨에 투로가 무너졌다. 그리고 한 걸음마다 심력에 타격을 받고는, 궁보추장 일격에 검을 놓쳤다. 궁보추장(弓步推掌-왼발로 중심을 옮기고 오른발을 내딛으며 손바닥으로 올려친다.),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초식…… 누구나 안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쉽게 막을 수 있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러나 명경의 궁보추장은 누구나 아는 궁보추장이 아니었다.
속도와 내력, 완벽했다. 무극보는 상대의 심력을 갉아먹을 뿐 아니라, 시전하는 사람의 초식을 강력하게 가꾸어 준다. 마음에 타격을 받아 용력이 흩어진 검 쯤, 가볍게 쳐낼 수 있었을 것이다.
곽준은 다시한번 진심으로 감탄했다.
명경으로서도 외부에서의 실전 비무는 처음일 것이다. 게다가 상대가 금의위 무사, 꽤나 껄끄러운 상대다. 무당산에서와 같이 사정을 봐주는 비무가 아니었다. 진짜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싸움인 것이다. 그러나 명경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상대방을 굴복시켰다.
'무골이다. 진무각에 천품을 타고나지 않은 이가 없다고는 해도, 이처럼 무(武)를 타고난 이는 없을 것이다.'
곽준은 명경에게 탄복하면서도 호승심에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호승심은 금의위 위사를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 명경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곽준 또한 무골, 무의 재능면에서 누구 못지 않은 남자이기 때문이었다.
"……"
한편 명경은 망연자실 검이 날아간 손을 보고 있는 금의위를 보면서 묘한 감정에 놀랐다.
순간적으로 살의를 느낀 것이다.
'이 무슨……!'
명경은 한 발 물러섰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나갈 것 같았다.
이것은 단순히 비무를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 시비가 걸린 것도 그가 아닌 곽준이었다.
듣기 싫은 말을 했다지만 그것 쯤이야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것. 그런데 무공을 사용하고 손을 섞자 한 순간 살수로 펼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것이다.
"돌아가자."
곽준에게 말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이 기묘한 살인의 유혹에 넘어가 버릴 것 같았다.
"그들은 어쩌지요."
"그녀가 갔다."
그러고 보니 태산신녀가 없었다. 태산신녀라면 어쩐지 칠절신금 일행에 도움을 주었으면 주었지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았다.
두 명의 금위위.
하나 하나가 틀림 없는 고수라고는 해도 태산신녀까지 가세하면 칠절신금 일행 중 싸울 수 있는 이가 넷. 도주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칠절신금과 그 일행은 잡히지 않았다.
태산신녀도 수배자 명단에 올랐으며, 그 여파는 명경과 조홍 일행에게도 미쳤다.
"그저 호기심이었다니까."
곽준의 변명은 일행의 불편함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금의위가 찾아왔다.
조홍의 곁을 맴돌며 사사건건 개입해 왔다.
"조사를 좀 받으셔야겠는데."
부드러운 말 속에 담긴 적의(敵意).
소칙을 지녔으니 함부로 못한다고는 하나, 기회를 봐서 압송이라도 할 기세다.
며칠을 시달렸다.
금의위측에서도 답답했을 것이다. 대도신창의 종적이 묘연한데 상황을 조사하면 할수록 명경과 곽준은 이번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신분을 파악할 수 없는데 칙명에 따라 황궁으로 가는 중이라 함부로 수색을 할 수도 없었고, 그냥 넘어가자니 체면이 말이 아닌지라 없는 죄목이라도 만들어서 엮어넣어야 하겠다고 결론을 내릴 때 쯤이었다.
명경 일행 쪽에서도 무당파임을 밝혀 결백을 증명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갑작스럽게 금위위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썰물이 빠져나가 듯, '운 좋은 놈들'이란 눈빛을 남기고는 더 이상 명경 일행을 귀찮게 하지 않았다.
'역시 위에 누군가가 있어. 금의위까지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누군가가.'
조홍은 문득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금의위, 황실 직속. 금의위의 행사까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것도 무당파와 끈이 닿아 있는 무림인. 대체 어느 정도의 사람일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북경에 도착, 귀환 보고를 마치자 홀가분한 심정이 되었다.
이제 다음 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일은 나오지 않아도 되네. 출정은 한 달 후이니, 그 동안 준비를 하게. 병법을 익히는 것도 좋을 것이고."
칙명의 변경은 없었다.
조홍은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자택에 돌아왔다.
"무사들은 자네 집에서 묵게 하도록 하게. 괜한 분란 일으키지 못하도록 단속 잘 하고."
정 이 품 관리, 홍 대인은 뼈 속까지 관부인. 강호의 무인들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하물며, 단속한다고 가능할 만한 사람들이 결코 아닌 것을 알 리가 없다.
강호인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풍수나 점에 대해서는 집착을 보이는 것이 홍 대인이다.
'단리림을 보면 놀라겠지.'
조홍은 단리림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단리림의 나이 이제 열 여덟.
어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늙은이 보다 더 했다.
"땅 기운이 워낙에나 잡스러워 골치가 아프군요."
"원래 터 자체가 아주 좋은 곳이기는 한데,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아 조화를 깨뜨리고 있어요, 길흉화복의 변화가 막측하여 딱히 명당이라 말할 곳이 없는데요."
홍대인이 들었다면 길길이 날뛸 말이다. 그가 명당자리에 집터를 잡으려고 쏟아 부은 돈이 얼마던가. 훌륭한 감여가(풍수지리 전문가)를 찾기 위해 쓴 돈은 또 얼마이고.
담이 약한 사람이 들으면 기절할 말도 서슴지 않았다.
"원령귀가 앉았군요. 처마에. 내일은 큰 일을 치르겠는데요, 저 집."
귀신이 보인다는 말이 아닌가. 더욱 당황스럽던 일은 명경이 고개를 끄덕이던 것이다.
"사숙도 보이죠?"
"아니, 하지만 나쁜 기운이 집 전체에 깔린 것은 알겠다."
명경의 말이었다.
"축귀 의식을 치뤄줘야 할 텐데. 너무 시간이 늦었군요. 게다가 집 주인이 저지른 죄도 있고."
다음날, 조홍은 한 집에서 삼족이 처형된 소식을 들었다.
횡령과 협잡, 살인까지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 죄목이다.
증거를 들이댐과 동시에 즉참.
금위위와 쌍벽을 이루는 황실 직속 무사 집단인 동창의 처사다.
'설마하니.'
단리림과 명경이 이야기한 그 집이었다.
* * *
조홍의 저택은 매우 컸다.
"이 정도 부, 한 두 세대에 쌓은 금력이 아니겠는데요."
석조경의 첫마디였다.
산에서만 살아 세상 물정에 어둡다고는 해도 이정도로 큰 규모, 고위 관리들이 모여 사는 현화로(賢華路)에 터를 잡았다면 그 재력이 엄청나다는 것쯤,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원래 조부께서 거하시던 곳이지. 나에겐 너무 넓어."
집이 넓다 보니 빈 방이나 공터가 많아 무술을 수련하기에도 좋았다.
특히나 곽준은 전과 달리 무공에 더욱 매달렸다. 명경에게서 자극을 받았던 모양이다. 여행으로 좌공과 심법 밖에 연마하지 못한 다른 제자들도 모처럼 초식을 수련할 기회를 얻었다. 덕분에 조홍은 무당 무공의 진수들을 접할 기회가 생겼다.
"호신으로 쓸만한 몇 가지 재주나 가르쳐 드릴까요."
"정말로 그래 주겠는가?"
석조경에 이끌려 조홍은 처음으로 무공이란 세계를 접했다.
"먼저 기마자세에서 시작하는 거죠. 모든 무공은."
처음 며칠은 매우 힘들어 한 조홍이나 금새 적응해 나갔다.
하지만 기본공 중에서도 기본공을 가르치지만 워낙에 몸이 굳어 있고 내력이 없으니 아무리 쉬운 권각법을 가르쳐도 그다지 진척이 없었다.
"악 사형,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석조경은 악도군의 도움을 청했다.
태극권, 태극산수.
권법에 있어서 진무각 제자 중 가장 뛰어난 이가 악도군이다. 순수하게 권각만을 가지고 논한다면 명경도 승부를 장담하기 힘들었다. 그런 악도군이 조홍의 기본공 연마를 도왔다.
그렇게 보름 여, 평생 흘린 땀 보다 많은 땀을 흘려본다고 생각한 조홍.
황실에서 부름이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뵈시겠다고 하시네."
"폐, 폐하께서……!"
조홍은 일이 감당 못할 데 까지 커져 가고 있다고 느꼈다.
장수로 종군하게 되는 것만도 믿기 힘든 일인데, 이제는 무공까지 배우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황제의 부름 까지 받다니……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신분.
대명 제국. 당금의 황제.
조카로부터 황제 위를 빼앗고 만인지상의 위치에 오른 철혈황제 영락제였다.
"조홍이라고 했지."
위엄이 넘쳐나는 목소리.
"예, 폐하."
조홍은 의외로 담담한 자신에게 스스로 놀랐다.
'무당 장문인……'
무당 장문인이라는 태산을 겪었기 떄문인지.
"소칙을 보고 놀랐겠군."
"황공하옵니다. 폐하."
고개를 조아리는 조홍.
"자네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들었네. 재능이 뛰어난 관리라 하더군. 조인창이 자네 조부였지, 아마."
"예."
"무(武)에 대한 재능이 어떤지. 기대하겠네. 그리고…… 혹, 무당파 장문인이 내게 전하는 말이 없었는가……"
조홍은 무당 장문인이 말했던 '돌고 돌아 태극'이란 말을 떠올렸으나 그것으로 그만, 어찌 감히 그런 말을 아뢸 것인가.
"아무런 말도 없었습니다 폐하."
"그랬나…… 짐은 그들이 보고싶네."
그들이라 하면…… 무당의 제자들이다.
"……"
"이런 사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무(武)를 보고 싶네. 무당파의 명성은 강호에서 대단하다지."
"……"
"무술대회가 있네. 매년 열리는 조그만 대회지. 황궁 군사의 교관을 뽑는 자리인데, 그들도 출전하도록 말하게. 금위위 부영반의 요청이기도 하고."
"망극하옵니다."
조홍은 정신이 번쩍 났다.
금의위의 개입.
귀찮게 하던 금의위, 갑작스럽게 주변에서 물러가 의아하게 생각했다. 헌데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무술대회에는 길 보다 흉이 많을 듯 싶었다.
"그럼 그들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겠네. 자네에겐 무운이 따르길 바라겠고."
"황송하옵니다 폐하."
* * *
"무술대회?"
"알아보니 열흘 후. 얼마 남지 않았더군."
"하지만, 우리는 제대로 무공을 펼칠 수 없는 상황인데."
석조경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 말한 그 것 때문인가. 사문에서 사람들에게 함부로 무공을 보이지 말라던."
고개를 끄덕이는 석조경.
"굳이 무공을 감춰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나?"
"이유라면 있지요. 직접 오셨으니 아시다시피, 무당파는 황궁의 인정을 받으면서 대단한 지원을 약속 받았어요. 하지만 그 조건은 우리였지요. 그것이 문제입니다. 강호에 소문이라도 난다면 그다지 좋은 모습은 아니니까."
"그게 왜 좋은 모습이 아니지?"
"예로부터 강호와 관부는 별개였죠. 관부의 힘으로는 강호를 통제하기 어려워요. 하지만 강호가 관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고 무법 천지인 것이 아닌 것 처럼 강호에는 강호의 법도가 있어 그것을 지키면서 살려고 합니다. 칠절신금을 보았듯이 그들만의 세계에서 의리나 약속 등을 위해 사는 것이죠."
"헌데 관부와의 거래나 유착은 강호의 법도와 맞지 않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요. 강호와 관부는 별개라지만 일단은 사람 사는데 관부의 영향을 피할 수는 없으니까요. 단 사문이 무당이기에 문제가 되는 겁니다."
"무당이라……"
"무당은 도가(道家)…… 분명 강호에서 으뜸가는 명문이죠. 관부에서 재물을 받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주목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거절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지요. 상대가 황궁이니."
"과정이야 어떻든 제자들을 볼모로 재물을 얻었다는 오해를 사기 쉽겠구만."
조홍이 뒷말을 이었다. 이제야 알겠다는 표정이다.
"그렇습니다. 개다가…… 직접 보셨고, 짐작하다시피 무당파에 그 정도 전답과 재물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독이 되지요. 강호인들의 시선이란 그런 것이기에."
"허면……"
"황실에서의 제안 자체가 무당파에 대한 견제 입니다. 저희가 전쟁터에서 죽어 버리면 더욱 좋겠지요. 일단 강호에 강력한 문파 하나가 힘을 잃개 되는 것이니."
"그것을 알면서도 자네들은 왜?"
"관부에서 요구 했으니까 들어주는 것 뿐입니다. 무당에 힘이 있고 없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전답과 재물이 필요 없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민초들에게는 그것이 아니겠지요."
"민초들?"
"예. 민초들입니다. 민초들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 살아가지요. 도가의 가르침은 그런 그들에게 힘을 줍니다. 도인들이 산에서 도를 닦고 민초들을 도와주는 데서 신선을 찾고 활력을 얻지요. 사실 그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세상의 이치이자 도(道)인 것을…… 그저 산에 있는 저희들에게 기대기도 하고, 어려운 일들을 호소하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무당파가 검박하게 있는 것은 그들에게 또 하나의 희망이 됩니다. 힘이 있으면서도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면서 말입니다. 허나 이제 그것도 아니게 되어 버렸죠."
석조경은 긴 말을 뱉어내고는 잠시 숨을 골랐다. 이런 긴 대화는 익숙치 않았던 까닭이다.
"저희가 무공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그래서 입니다. 무당파가 황실과 결탁하고 재물을 받아냈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그만큼 민초들의 실망은 커 지겠지요."
조홍은 말을 잇지 못했다.
'민초들……'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다. 무당파의 저력은 그런 것에서 나온다는 것도 깨달았다. 무공, 최고라 칭해지는 무공도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그런 마음가짐이니 그만한 무력도 나오는 것일 게다.
"그나 저나 문제군요. 무공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데 비무라니."
석조경은 난감해 했다.
"할 수 있어."
곽준이 들어오면서 말했다. 대화를 다 들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곽준의 무공 수준이라면 방 밖에서라고 안의 대화를 못 들을리가 없었다.
"명경 사숙은 가능했다. 무당의 무공을 드러내지 않고도 고수를 제압했지. 사실 무극보를 펼치긴 했지만 무극보를 아는 이는 강호에 없잖아."
석조경은 곽준을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그것은 명경 사숙이니까 가능했던 겁니다."
"우리도 가능해. 어느 정도 까지의 무인이라면. 그리고, 목표가 우승도 아니잖아."
맞는 말이다.
우승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본신 실력을 다 드러내지 않으면 어떤가. 또 패배하면 어떤가. 하지만 어찌 보면 그게 또 그렇게 간단한 문제만은 아닌 듯 싶었다. 금의위가 얽혀있기 때문이다.
"금의위 측에서 벼르고 있는 모양이던데."
조홍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금의위 부영반이 자네들의 출전을 요청했다고 하더군. 아무래도 무술 대회에는 금의위 위사들도 출전할 모양이야."
"금의위라…… 골치 아프게 되었군."
"다 곽사형 때문 아닙니까. 사형이 저지른 일 가지고 골치라뇨."
"무슨 지난 일을 가지고. 뭐 정 우리가 마음에 안 든다면 져 주면 되지. 죽이려고야 달려들겠어?"
"속도 편하십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곽준은 누구에게도 져 줄 마음이 없었다.
명경을 보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힘으로 펼친다면면 저잣거리의 초식도 상승 공법을 상대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가능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명경은 그것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어디까지나 기본이 탄탄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곽준도 기본공을 파고 들었다.
마보충권(기마자세에서의 정권 지르기)이나 등퇴충권(왼쪽 발과 오른쪽 주먹으로 정면을 내지르는 것)과 같은 기본 초식들을 다시 한번 되 짚었다.
'시간을 끌면 안 돼. 시간이 가면 신법을 써야 하고, 신법을 쓰면 자연히 무당인 것이 드러난다. 검술 역시 안돼. 태극검을 모르는 이는 없으니……'
"전사(轉絲)밖에 없을 것 같은데."
악도군을 끌어들였다. 권각에 있어서는 그다.
곽준은 권법과 검법에 두루 능했지만 권법, 그것도 기본공에 초점을 맞추었으니 이왕이면 달인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났다.
"전사라……"
전사라면 회전이다. 마보충권은 단순한 충권이나 회전을 가미한다면 분명 힘이 배가 되리라. 문제는 무당의 무공이 드러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 있다. 사량발천근을 근간으로 하는 무당의 무공에서 전사는 어느 초식에나 묻어 있으니 자칫하면 무당의 독특함이 배어 나오게 된다.
"헛!"
"더 하체를 탄탄하게 잡아야 합니다."
공교롭게도 석조경이 조홍에게 가르치는 것이 기본공이었다. 한창 마보충권을 연마하는 조홍을 보며 곽준은 석조경도 끌어들였다.
"이런 것은 어떻겠나."
"너무 속보이는 초식 아닙니까."
"어쩔 수 없어. 조잡하게 보일수록 좋아. 그래야 전사를 들키지 않지."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기(氣)가 허해요. 왼쪽 어깨 밑에."
단리림은 상단전이 트인 만큼 맥을 잡아내는 데 능했다.
"여기에 내력을 더해야 하겠군요."
석조경이 해결책을 제시하고,
"더 동작을 크게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악도군은 무당의 부드러움을 감추기 위해 힘 있게 보이는 움직임을 고안했다.
"허점을 찾아내는 것이 문제인데……"
네 명의 제자가 기본공을 다듬었다. 결국 곽준은 마지막으로 명경을 찾았다.
"뭐냐 그건."
명경은 곽준이 펼친 무공을 보고 한 마디 던졌다.
이제 다섯 초식.
기본공 중에도 기본공을 조합한 하나의 무공이었다. 닷새 만에 네 명이 머리를 쥐어 짜 만든 권법은 생각보다 짜임새가 있었다.
"무술 대회 이야기는 들으셨죠."
"그런데?"
"무당의 무공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니…… 궁여지책으로 대충 만들어 봤습니다."
"다시 한번 해봐."
곽준은 다시 똑같은 초식들을 펼쳤다.
명경은 주의 깊게 살펴 보고는 직접 시전해 보았다. 워낙에나 기본적인 초식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시연 자체는 쉬웠는데, 분명 급조된 것 치고는 쓸모가 있어 보였다.
"괜찮군."
그걸로 끝이다.
명경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곽준은 난감해 졌다.
"그러니까…… 음……"
명경의 무공을 보고 시작한 짓이었으니 막상 도와달라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아니, 곽준은 본디 이 말 없는 사숙을 어려워 했다.
명경이 손을 내 뻗었다. 곽준의 표정을 보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챈 것이다.
"여기서 과(戈)로 바꾸고 착(捉)과 반(反)."
충권에서 변화하여 목을 노리는 수다. 그러면 십중팔구 상대는 뒤로 물러서거나 손으로 방어를 해 올 터였다.
"여기서는 그대로 궁보반당권, 인(引)으로 끌어들이고 척(拓)으로 끊는다."
착, 반, 인, 척. 모두 무당 무공의 정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배열이라면 누구도 무당의 무공임을 짐작하기 힘들 것이다.
"궁보추장은 좋아. 전사를 가미했군. 이어지는 등퇴반당권에는 추(推)를 추가해."
"자 잠깐……"
궁보반당권에 인과 척으로 맥을 끊고 전사를 더한 궁보추장, 상대의 균형을 완전히 빼앗게 된다. 혀를 내두를 조합이다. 하지만 등퇴반당권…… 추(推)자 진결을 넣은 등퇴반당권이라면……
즉사다.
조금만 강하게 쳐 내도.
"고수라면 막아낸다. 과히 좋은 수는 아니군."
아니다. 어지간한 고수라도 막기 힘들다. 명경의 몇 마디에 단순했던 초식이 난공불락의 무예가 되었다. 게다가 목숨을 빼앗기 위한 살수가 섞여 있다. 앞의 무공을 일반인들에게 사용하면 맞고 골병드는 것으로 끝나겠지만 명경이 일러준 무공이라면 일반인은 죽는다. 마보충권에 과, 착 반이면 목이 꺾이고 어깨가 으스러진다.
"밀어내고 번신단퇴. 여기엔 벽(擘)자 진결을…… 착지할 땐."
명경은 멈칫 했다. 곽준의 눈에서 묘한 빛을 읽었기 때문이다.
문득,
'살기가 그렇게 짙어서야…… 쯧쯔.'
사부님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그 다음엔 번운복…… 아니, 번운추장이 좋겠군."
처음 뇌리를 스친 것은 번운복우수다. 중완혈을 노리면 한 쪽 팔을 불구로 만들 수 있다.
손속이 과하다. 곽준의 눈에 비친 빛은 우려와 두려움이다. 번운추장이면 승부를 부드럽게 마무리지을 수 있다. 큰 상처 없이.
곽준의 눈에서 우려가 사라졌다. 분명 살기를 띄고 과한 부분이 있지만, 세상 무공 중 그렇지 않은 것이 있던가. 그 시점에서 번운추장이라면 상대의 체면을 그렇게 깍지 않고도 굴복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반 쯤은 재미로 시작한 무공 만들기에 다섯 명이 모두 달라 붙었다. 모두 일곱 초식으로 되어 있는 권법이 나왔는데, 절정의 고수는 상대할 수 없어도, 어느 정도의 위력은 나올 것이라는 데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다.
여드레 만에 만든 무공 치고는 실로 대단한 성과였다. 허나 실전에서도 어느 정도 쓰임이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어떤 무공을 상대해야 하는 지도 모르는 상태가 아니었던가. 때문에 명경은 모두에게 무극보의 구결을 알려 주었다.
무극진결을 수련하지 않았으므로 제자들은 쉽게 보법을 연성해 내지 못했다. 단리림정도만 깨우치는 것이 빨라 구색을 갖추었으나 나머지는 하루 이틀에 배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결국 보법이 문제로군. 어떤 무인들을 상대해야 하는지만 알아도……"
곽준이 한 한마디는 조홍이 해결해 왔다.
"무술대회의 규모가 그다지 크진 않더군. 일년에 한번 열리는 무술 대회인데, 황실 무사들의 훈련교관을 뽑는 것이 목적이라서……"
"황실의 훈련교관 자리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대회까지 열리고."
악도군이 물었다.
"황실 입장에서는 중요하지. 실력도 문제지만 출신 내력도 중요하니까. 아무래도 강호의 무인들이라면 위험한 인물이 많아서…… 폐하의 신변 문제가 걸리게 되는 것이지."
"음…… 그렇다면…… 상당한 실력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곽준의 말에 석조경이 눈을 반짝였다.
"그럴 수 있군요. 아마도 신진 문파나 젊은 무인들이 이름을 날리기에는 좋은 자리가 되겠어요. 황실 무사의 훈련 교관이면 아무래도 상당한 권력과 재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석조경이 말을 끝내자 기다렸다는 듯, 조홍이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그래서…… 출전자 명단을 입수해 왔지."
기밀은 아닐 것이나 영역이 다른 곳의 일인 만큼 아주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
"수고 하셨군."
악도군의 말에 조홍은 피식 웃으며 두루마리를 풀어냈다.
조홍이 펴낸 종이에는 상당한 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대진표는 구할 수 가 없어서…… 일단은 아는 이름이 있는지 한 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다섯 명 모두 견식이 짧았다. 그나마 탁무자의 제자인 악도군이 조금 나은 정도랄까.
"원공권 원태라…… 원공권이면 꽤나 이름있는 무공인데, 원태란 이름은 처음 보는 걸…… 유아검(柔牙劍) 장춘진인이라면 강소성에서 이름있는 무인이고…… 나머지는 잘 모르겠군……"
"태평검 형주. 들어본 이름인 것 같은데?"
"그런가……?"
"모용한…… 이게 설마 그 모용 씨는 아니겠죠?"
"모용? 절강 모용세가? 절강성에서 여기까지?"
절강성에서 북경까지는 실로 멀다. 게다가 황실 무술 교관 자리가 아쉬울만한 가문이 결코 아니다. 육대 세가의 하나였으니 말이다.
육대 세가라면 강호에서 가장 융성한 여섯 개의 가문을 가리킨다.
천하 제일 가문이라는 하남의 구양가를 필두로 절강 모용세가, 강서의 남궁가. 호남의 황보가, 그리고 사천의 당가. 비록 세력이 예전만 못하다고는 하나 하북의 팽가까지.
육대 세가의 힘은 구대 문파에 필적한다.
각 가문의 재력이 한 성을 좌지우지 할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하다. 그것만으로 한 지역의 패주로 군림하기에 충분했다.
재력 뿐이 아니다. 거기에 무력도 갖추었다. 비록 구대 문파의 진산 비기에는 못 미친다 하여도 그들의 가전 무공은 절정고수를 배출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모용 세가라도 큰 상관은 없지. 이번 기회에 견식을 넓힐 기회도 될 것이고."
모용세가의 무공이라면 분명 독특한 데가 있다. 청죽수와 일엽락, 비려십오검은 강호일절로 꼽힌다.
무당 제자들은 흥미와 기대에 빠져들었다.
처음 보는 무공들.
며칠 동안 무공에 몰두해 있으면서 새로운 것을 찾다 보니 조그만 일에도 영감을 얻는 터, 무당파의 것이 아닌 다른 무공들을 견식 한다는 것 자체가 기다려 지는 것이다.
* * *
무공의 이름은 진무칠권이라 부르기로 했다. 진무각 제자들이 만들었으니 거기에 초식의 수만 덧붙인 격이다.
공문이 하나 내려왔다. 모두 출전 하길 바란다는 내용이다. 때문에 별로 출전할 마음이 없었던 명경도 대회장에 들어서게 되었다.
대진표는 이미 짜여 있었다. 승자가 다른 비무와의 승자와 싸우게 되는 방식이었다.
비무는 오일에 걸쳐 진행되도록 계획이 잡혀 있었는데 우승자와는 관계없이 필요한 인물을 심사하여 뽑는다는 방침이었으므로 굳이 계속 이길 필요는 없었다. 뽑히고자 한다면 일단은 많이 이기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대회장의 규모는 예상했던 것 보다 작았다.
어전 무술 대회.
허나 황제의 자리는 까마득히 멀리 있는데다가 철통 같은 경비가 에워 싸 있어 과연 황제가 비무를 볼 수는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운 구조였다.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데요."
단리림이 명경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명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감이 별로 좋지 않았다. 단리림까지 말한다면 틀림 없다. 이것은 곱게 마무리 될 대회가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다.
비무대 가운데로 관복을 입은 한명의 남자가 나왔다.
남자가 목소리를 높여 몇 가지 규칙이 발표했다. 전통적으로 해 온 방식인 듯 싶었다.
첫째. 철제 병장기를 사용하는 것은 금지다.
무기는 나무로 만든 목검이나 봉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강호에는 무기의 날카로움을 염두에 둔 수법이 많다. 목검과 목봉이라면 본신 실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때문에 생긴 규칙 두번째. 승패에 관계 없이 교관을 뽑는다는 말도 했다.
심사하는 사람이 승패를 가르면 더 이상 손을 써서는 안 된다는 규칙도 나왔다. 손을 과하게 써서 생기는 큰 부상을 방지하자는 의미이니, 참으로 안전 위주의 비무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생겨나는 이 불안감은 대체 무엇인가.
명경이 대기하는 곳은 다른 여러 무인들도 함께하고 있는 대기실이었다.
을 조 대기실. 공교롭게도 모두가 다른 조에 속해 있었다.
대기실에는 십 여명의 무인이 있다.
개중에 몇 개의 시선이 신경을 자극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한다는 것은 대기실에 들어서면서부터 알았다. 일단 외모가 특이했으니.
헌데 문제는 분명한 적의를 보이는 시선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금의위……'
일반 무사처럼 꾸미고 있지만 범상치 않은 기도가 느껴지는 세 명의 무인이 있었다.
금의위일 것이다. 불안감의 정체는 이것이었는가.
아니다.
이 정도 무인들로는 그에게 불안감을 줄 수 없었다.
명경은 시선들을 무시하며 비무대 쪽을 주시했다.
대기실은 한 쪽 벽이 거의 트여있는 구조다. 커다란 창이 뚫려있어 밖으로 비무들을 관전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명경은 다소 실망했다.
비무의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권각에 미약한 내력를 실어내는 무인. 상대는 무기가 없다고 본신 실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하는 무인이었으니 그다지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를 끈 것은 심사석의 남자다.
"그만! 오량 승리."
상당한 내력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웃으면서 내려가는 무인과 상심하여 사라지는 무인.
'잘 보는군.'
미세한 차이를 읽어낸 심사석의 남자. 틀림없이 고수일 것이다. 승패를 가르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으니, 자신의 판단을 완전히 믿는다는 증거였고, 그런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본신 실력이 뒷받침 되어야 했다.
관중들은 많지 않았다. 출전자들의 동문 사형제들이 와 있거나 조금은 독특한 취미를 가진 귀족 자제들이 구경을 와 있을 뿐이다.
헌데 한 쪽 전망 좋은 자리.
저절로 시선을 끄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 사람들. 모두가 수려한 외모를 지녔다. 북경의 귀족들도 하나같이 준수한 외모를 지녔지만 그들과는 꽤나 다른 분위기다. 또 하나 다른 점은 모두가 청색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
모용세가.
절강 모용세가의 인물들이었다.
절강성에서는 황제가 무색한 권력을 누리고 있는 가문.
"이런 조잡한 대회에 나갈 필요가 있을지요?"
준수한 얼굴의 장년인이 물었다.
"그저 경험이 아니겠느냐."
마른 얼굴에 눈이 깊다.
깊은 눈에 느껴지는 강렬한 위엄.
모용도.
엄청난 거물이다.
관부의 힘이 막강한 북경인지라 이렇게 삼십이 안 되는 수행원들과 있는 것 뿐. 강남 지역이라면 한번이라도 그를 보고자 하는 무리, 환심을 사고자 하는 무리가 구름처럼 몰려들었을 터이다.
지닌 바 무공이 화경에 접어들어 강호에 적수를 찾기 힘든 인물이기도 하다.
야심 또한 범상치 않아 절강성 금화부 일대만을 세력으로 잡았던 모용세가를 온 절강성을 아우르는 패자의 자리로 끌어올린 거인이 그였다.
"황제란 참으로 지엄한 위치로군."
모용도의 시선은 비무대에 있지 않았다. 이정도 비무를 보고자 이곳에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황제와 그곳을 둘러싼 호위병들.
강호의 손 꼽히는 무력을 소유한 모용세가의 호위벽을 눈 아래로 볼만한 경비였다.
'저만한 인물들이 황궁에 붙어있다니……'
멀리서도 느낄 수 있는 기도.
그것도 하나 둘이 아니었다.
모용도 자신에 견주어도 손색 없는 강자들이 다섯이나 황제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가주인 모용도의 시선이 황제의 자리 쪽에 가 있자 처음 말을 걸었던 장년인, 모용수도 그 쪽을 바라보았다.
"정보가 잘못 된 것이겠지요. 저만한 경비라면."
암살은 말도 안 된다, 란 말을 삼켜버리는 모용수.
새삼스러운 일이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는 경험은. 암살이란 말을 잘못 꺼냈다가는 구족이 멸함을 당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암살.
관부와의 긴요한 거래를 위해 북경에 올라온 모용 세가의 정보통에 묘한 것이 걸려들었다. 황제의 암살을 획책하는 무리가 있다라는 정보.
게다가 아들인 모용한을 경험 삼아 출전시킨 어전 무술대회가 암살의 무대가 될 것이라니. 그런 것이 아니라면 모용도와 같은 거물이 이런 소규모 비무 대회에 나타날 이유가 없다.
암살은 불가능. 직접 본 결과다.
어떤 인물이 있어 저만한 고수의 벽을 뚫고 황제에 닿을 수 있을 것인가.
오랜 과거 사패의 한자리를 차지했던 전설의 살수, 소연신이라면 가능할까.
모용도가 이곳에 몸소 온 것은 암살 관련 정보의 진위를 가리기 위한 이유가 컸다.
만일 그 전모를 알고 모용 세가에서 암살을 저지한다면 이번에 걸린 관부와의 거래를 성사시키는데 굉장한 이득을 볼 수 있으리라. 하지만 누구도 암살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비무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한 시합에 일 각(십오 분)도 걸리지 않도록 심사석에서 끊어 버렸다. 순식간에 실력차를 파악해 내는 심사석의 고수가 어떤 인물일지 정말로 궁금해질 때 쯤이다.
"원공권 원태. 비연검 상무걸. 나와 주십시오."
원공권.
악도군이 언급했던 무공이다.
명경은 원태라 불린 젊은이를 유심히 보았다.
잘 만든 몸이었다.
체격이 짜임새 있고 권법가 답게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다.
인상도 좋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강한 눈빛은 안법으로 명법(明法)을 익힌 증거일 것이다.
탁!탁!
몸을 푸는 걸음걸이가 경쾌했다. 상당히 빠른 무공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편, 상대인 상무걸.
상무걸이라는 이는 목검을 한 자루 들고 나왔다. 기수식이 안정되어 있어 이전 비무의 출전자들과는 수준이 달라 보였다.
'어떻게 공격해 들어갈 것인가.'
명경은 몰랐으나 원공권의 명성은 대단하다. 본디 원공권의 고수는 강원도인(姜元道人) 이었는데 제자를 기르고 있다는 소문이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상무걸도 그 명성을 익히 들어온 듯, 잰 걸음으로 신중하게 검을 움직였다.
한 순간 땅을 박차는가 싶더니 원태의 몸이 상무걸의 지척에 이르렀다.
'구루수(鉤鏤手)!'
구루수란 손목을 굽히고 갈고리처럼 손가락을 오므린 권의 형태를 일컫는다.
거리를 좁힌 태연은 강하게 구루수를 쳐 냈다.
상무걸은 침착하게 목검을 틀어 구루수를 막아냈다. 정교한 변화가 깃들어 있는 검이었다.
'다시 구루.'
구루수의 장점이라면 손목의 변화에 따라 상대의 공격을 받아내기 용이하다는 점.
받는 수법이 다양했다.
손을 접어내며 목검의 궤도를 흘려 놓았다.
상무걸도 만만치 않다. 순식간에 삼검을 쳐 냈다. 명호처럼 제비가 물을 스치듯 시원한 솜씨였다.
타타탓!
팔목과 손이 돌아가며 검을 튕겨냈다.
'구루, 구루…… 철저히 구루수만으로 응수하는 군.'
원공권의 진수는 빠르기와 회전력에 있다. 손목과 팔굽에 전사, 강렬한 회전력이 깃들어 있어 쳐내는 구루수에 목검이 제 갈 길을 찾지 못했다.
한 순간, 원태의 손에서 흰 빛 같은 것이 머물렀다.
텅!
검이 날아갔다.
'내력을 손에 집중했다…… 고수!'
격전 중에 저 정도 내력의 수급이 자유롭다면 보통 고수가 아니다. 처음부터 상무걸은 그의 상대가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검을 놓쳤음에도 상무걸은 전혀 시합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수도로 검초를 펼쳐내는데 목검을 쓸때보다 오히려 배는 날카로운 기세였다. 기실, 검을 놓치는 순간 이미 승부는 났다고 봐야한다. 허나 상무걸의 기세가 상당하여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심사석에서도 그와 같은 심정인 듯, 승패를 가르는 호명이 아직 없었다.
원태는 구루수를 오므리고 약지와 소지를 약간 앞으로 말아 쥐었다. 변형된 형태의 벽권이다.
'무기를 상대할 때는 구루…… 권각을 상대할 때는 벽권인가.'
상무걸은 날렵하게 짓쳐들었다. 허나 원태는 전보다 다소 느려진 보법으로 착실하게 일권을 쳐 냈다. 피해내는 상무걸, 원을 그리며 접근한 원태가 팔꿈치를 뻗고는 찰나의 시간에 오권을 쳐 냈다.
'빠르다!'
세 번 까지 피해낸 상무걸은 일권을 무릎에 격중당하고는 움직임이 현저하게 느려졌다.
빠악!
나머지 일권을 허용한 상무걸은 결국 그 신형을 허물어 뜨렸다.
"승자, 원공권 원태!"
원공권 원태 이후 그만 그만한 비무 두 차례, 그 후 드디어 무당 측에서도 첫 출전자가 나왔다.
"진무이권 악도군. 그리고 상대는 독명수 좌인."
'진무 이권?'
명경은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그러나 이내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출전자들은 뭐가되었든 별호가 있어야 되는 모양, 대충 되는대로 조홍이 만들어 넣은 모양이었다.
악도군은 다리를 벌리고 편한 자세를 취했다. 진무칠권의 장점이라면 기수식이 따로 없고 언제든 초식을 쳐 낼 수 있다는 점. 어디까지나 단순한 초식으로 이루어진 때문이다.
이에 상대는 수법(手法)이 장기인 모양인데, 악도군의 자세에 의아해 하면서 거리를 좁혔왔다.
슬슬 탐색을 하던 독명수는 이윽고 별 것 없다고 느꼈는지, 크게 손을 내쳐 왔다.
맞서는 악도군이 펼친 것은 저잣거리에서도 볼 수 있는 마보충권!
하지만 단순히 뻗어낸 일권에는 무당의 정종 내력이 담겨있다.
펑!
독명수의 일 수가 튕겨져 나가며, 몸 전체가 휘청였다. 이에 한 발 내딛는 수는 어설프게나마 무극보다. 과로 전환하여 착자 진결을 펼치자 급하게 쳐낸 독명수의 경력이 빨려들듯 악도군의 손짓에 흩어지고 만다.
거기서 반(反).
텅!
독명수의 몸이 하늘로 뜨더니 결국 땅바닥을 쳤다.
"악도군 승리!"
실로 깨끗한 수법. 날카로운 몸 동작과 몰아치는 권격에선 무당파의 무공을 읽어낼 수 없었다.
"상당하군……"
자신의 아들인 모용한이 나올 때가 되어 슬슬 비무장을 살펴 보려던 모용도는 큰 흥미를 보였다.
시기 적절한 수.
악도군이란 젊은이는 분명 상승의 권법을 오래동란 수련했다.
"악씨라…… 산동 악가에 저런 젊은이가 있었나?"
"글쎄요…… 게다가 악가에는 저런 무공이 없을 텐데요."
"저것만 보고는 알 수 없지."
비록 그 세가 예전만 못하다고는 해도 산동 악가라면 알아주는 무가다. 악씨이기 때문에 대뜸 산동 악가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악도군은 산동 악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수 천리 떨어진 안휘성 구석의 농가 토박이다. 탁무 진인의 눈에 띄지 않았으면 지금도 농사나 짓고 있었을 것이다.
"정체가 불분명하다…… 그런데 고수군요. 한번 뒤를 알아볼까요."
"그러는 것이 좋겠지."
엉뚱한 오해를 받게 되었다.
"일엽락 모용한. 도룡권 윤철."
모용한은 이제 십오 세를 넘겼을까 싶은 소년이었다. 눈빛이 맑고 정대하여 한눈에 보기에도 전도가 유망한 소년 고수로 보인다.
반면 상대는 크고 작은 싸움에서 잔뼈가 굵은 듯, 자잘한 흉터가 얼굴에 가득한 삼십대 장한이었다. 상대가 어린 것이 불만인 듯, 표정이 흉악하게 일그러져 있다.
모용한은 상대의 표정이나 모습에 전혀 기가 죽지 않은 듯 하다. 몸을 꼿꼿이 한 채 한 손을 어깨 높이 까지 들어 올리고 천천히 접근했다.
불만에 찬 얼굴이 한 번 꿈틀거리는 듯 하더니 윤철의 주먹이 벼락같은 기세로 뻗어 나왔다. 모용한의 몸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사나운 일격을 가볍게 피해냈다.
다시 일 권.
모용한의 발이 완만하게 원을 그리며 땅을 밟는다.
계속되는 윤철의 권격을 짜고 피하듯 쉽게 쉽게 피해 나갔다.
'좋은 보법. 훌륭한 체술.'
일엽락은 모용세가에서 자랑하는 신법이다. 별호를 일엽락으로 하고 나왔으면 그만큼 신법에 자신이 있다는 말이 된다. 기실, 명경은 이 소년이 펼치는 신법이 강호에 이름이 자자한 일엽락이었는지도 몰랐지만.
'상대가 안 되는 군.'
예상한 대로 몇 수 주고 받자 어느 새 윤철의 몸은 땅바닥에 쓰러져 있다.
"모용한 승리!"
또 다시 그만 그만한 비무.
'뭔가 이상한데……'
양쪽이 둘 다 그다지 눈에 띄는 솜씨를 보이지 않아 건성으로 보고 있던 명경은 갑자기 한 가지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다시 비무대를 쳐다 보는 명경…… 지금 저기서 싸우고 있는 이는 이 대기실에 들어올 때 자신에게 적의를 보였던 남자였던 것이다.
처음 저 남자를 보았을 때 느낀 것은 제법 뛰어난 무인이라는 인상이다. 헌데 비무대 위에서의 모습은 그다지 볼만 한 것이 없다.
'실력을 감추고 있군.'
일부러 비등하게 보이려는 수작이다. 제아무리 상대가 약하다고는 하지만 상대의 실력에 맞추어 저 정도 연출을 하려면 상대보다 실력이 월등히 높아야만 한다.
심사대에서도 이를 알아챈 듯, 금새 그 자의 승리를 선언해 버렸다.
'무슨 짓을 벌이는 것이지……'
명경은 그 다음 비무부터 비무대를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세 번의 비무. 여섯 명. 실력이 실제로 떨어지는 이도 있지만 대부분이 일부러 약하게 보이려고 하는 느낌이었다.
무언가 꾸미고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비룡신협 정문성. 진무오권 단리림. 비무대 위로."
단리림도 비무대에 오를 차례가 되었다.
관중들 한 곳에서 약간의 환호성. 무당 제자들은 아니다. 비룡신횹의 사형제들이 응원이라도 온 것 같았다.
경박하게 별 일을 다 벌인는 시선도 있었다. 그러나 귀족들의 오만한 눈과는 무관하게 비룡신협이라면 상당히 이름있는 무인이었다. 비룡이라는 이름이 붙었듯, 신법이 하늘을 나는 듯 하고 권각에 두루 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인 정문성, 반면 단리림은 이제 십 팔 세. 북음풍도술의 술법을 익힌지라 피부가 자기인형 같이 맑아 더 어려보인다.
그러나 모용한의 전례가 있으므로 정문성은 상당히 조심하는 눈치였다. 아니, 이 어려보이는 청년이 범상치 않음을 절로 느끼는지도 몰랐다.
단리림은 악도군처럼 먼저 나서지 않았다. 선공을 과감히 해 나갈 정도로 권법을 수련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아무도 모르게 손에다 풍도술의 기운을 모았다.
정문성은 천천히 다가가며 단리림을 관찰했다. 손을 보니 깨끗하기 그지없다. 굳은 살이 배기지 않은 손. 권법이 특기인 상대는 아닌 것 같았다. 얼굴도 그저 허옇기만 해 도무지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어린애의 치기로 한 번 나온 듯한 모습이다.
다시 손. 미미하게 떨고 있다.
술법으로 기운을 모았기 때문인지 모르는 정문성은 단리림이 긴장해서 손까지 떠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괜한 걱정이었군. 애송이한테.'
정문성은 곧바로 뛰어 들었다. 뛰어들며 이권을 벼락같이 뻗는다.
단리림은 가만히 있다가 마보로 자세를 바꾸고 일 권을 쳐 냈다.
'마보충권?'
"훗."
정문성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 올랐다.
허나 그것도 잠시,
'엇!'
갑자기 몸이 앞으로 쏠리며 급히 쳐 올린 발도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졌다.
그 발에 단리림의 손이 닿고, 반자 진결의 반탄력이 정문성의 몸을 휩쓸었다.
하지만 명불허전. 명성이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듯, 정문성의 몸이 공중에서 휘어지며 자세를 똑바로 했다. 비룡이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신법이었다.
어느 새 한 발 다가온 단리림. 궁보반당권의 초식을 펴 낸다.
'궁보반당, 이건 또 무슨 수작.'
내력을 실으면서 권을 내칠려던 정문성은 순간적으로 발에 느껴지는 싸늘한 통증에 놀라 급히 뒤로 몸을 뺏다. 방금 단리림의 손에 닿은 곳이었다.
"음……"
진무칠권의 허점이다. 저렇게 상대가 몸을 뒤로 뽑아 올리면 따라잡아 공격할 방법이 없었다. 근접전의 초식으로만 구성했기 때문이다.
물론 무당파의 신법으로 따라가면 되지만 신법만큼 문파의 특성이 잘 살아나는 무공이 없다. 제운종을 펼쳤다가는 이 곳에 모인 모두가 단리림이 무당파 출신임을 알아챌 것이다.
명경 자신이라면 무극보를 펼칠텐데.
헌데……
턱, 하고 단리림이 일보를 밟았다.
정문성은 단리림 쪽으로 뛰어들려다가 움찔하고는 물러섰다.
다시 한 발.
단리림이 나선 한 발 만큼 정문성도 뒤로 물러섰다.
상대방의 전의를 꺾어버리는 무극보다.
'제법……'
이직 미숙하기 짝이 없지만 허공진인의 진수가 담긴 무공이다. 천하 제일을 논하는 고수가 창안한 무공이니, 여타 무공들과는 격이 달랐다.
'저거다. 저것에 서문창이 당했군.'
정체를 감추고 출전한 금위위들 사이에서 긴장감이 돌았다.
'생각보다 강해보이지 않는데?'
'문제는 저놈이다.'
명경은 자신에게 모아지는 시선을 느꼈다.
'하나 둘이 아니군.'
최소 다섯.
감각을 최대로 열자 몇 줄기의 강한 적의가 느껴졌다. 굳이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지 않았다. 그럴만한 상대들도 아니다. 한꺼번에 덤벼든다면 모를까.
정문성은 뒤로 물러서다가 더 이상 갈 곳이 없자 발악적으로 뛰쳐나왔다.
"핫!"
한줄기 기합성.
흉맹하게 뻗어나오는 일장.
단리림은 착실히 마보충권으로 맞았다.
'또!'
회심의 일격을 노리고 달려들었던 정문성은 또 다시 몸이 앞쪽으로 쏠리는 것을 느끼고 급히 발에 힘을 주었다.
'다음은 궁보반당권!'
정문성은 상체를 숙이고는, 뒤로 뺀 우수에 진기를 모았다. 궁보를 취하는 순간을 노리면 반드시 일격을 격중시킬 수 있다.
허나.
진무칠권은 그렇게나 단순하게 만든 무공은 아니었다.
펑!
게다가 상단전이 열려 초식의 흐름을 꿰뚫고 있는 단리림인 바에야.
파괴력은 모자라지만 유효적절하게 들어간 등퇴충권.
정문성은 비무대 밖으로 튕겨 나갔다.
악도군과 단리림처럼 석조경과 곽준도 상대를 제압하는데 별로 시간을 소모하지 않았다.
진무칠권.
분명 단순한 무공이나, 모두가 내력이 탄탄하게 다져져 있고 상승의 기법들을 가미했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강한 무공이 되었다.
게다가 기본으로 사용하는 보법에 무극보의 움직임이 숨어 있어 상대가 맥을 못 추었다.
곽준이 세 초식 만에 상대로 나온 천력권 유벽을 물리치자 관중들 사이에선 일순 소요가 일었다. 악도군에서 곽준까지 모두 같은 무공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별호도 비슷하다.
진무이권부터 진무오권까지.
별호가 비슷한 인물들은 또 있었다.
"무명도 장이, 섬전각 문일. 비무대로!"
승부는 무명도 장이의 압도적인 승리. 섬전각은 별호처럼 빠른 발놀림을 보였으나 그 날카로움도 한 두 초식 뿐. 당이의 목도에 세번 격중되고 한 팔과 한 쪽 다리가 부러져 속행 불가, 내력에서도 초식에서도 무명도가 월등히 앞서 있었다.
"무명도 승리! 다음 비무자 무명장 아화. 개산도 구등. 비무대로!"
무명도, 무명장, 무명수.
이름도 장이, 아화. 저자거리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이름들에 별호가 무명.
손속이 잔인하다는 공통점도 있다.
명경은 그들의 정체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손속은 과하지만 정통 무공, 특히 절도가 있는 특징을 가진다.
금의위.
한번 씩 명경을 향해 적의를 내뿜는 것도 같다.
명경은 무시하고 비무대를 주시했다.
가끔씩 느껴지는 적대적인 시선은 분명 무시해도 될 정도였고 비무대 위에는 비록 상승의 무공들은 아니지만 처음 보는 무공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니, 상승의 무공들도 간간히 보인다. 원공권 원태가 그랬고, 금위위로 짐작되는 무명검의 한 수도 분명 상승의 수법이다.
배울 것이 있는 곳이었다. 이 비무대는.
장춘진인의 무공도 훌륭했다.
유아검 장춘진인은 이번 비무에 출전한 자들 중에서는 가장 강호에 이름이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우장산이라는 조그만 산에 위치한 작은 도관에서 자랐는데 인연이 닿아 이름 모를 산중의 고인에게 사사 받고 유아십이검이라는 독특한 검술을 얻었다.
작은 키에 동안.
무인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나 타고난 움직임이 빠르고 신법 또한 강호에 유래가 알려진 바 없는 독특한 보법을 구사하여 일절로 불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상대와의 거리를 좁히고는 줄줄이 엮어내는 검술.
상대는 변변찮은 반격 한번 못 해보고 비무대에 쓰러지고 말았다.
'저런 수도 있었군.'
길게 잡은 검자루로 올려 치고는 손목에서 회전하여 뻗어 나오는 연환검.
신기한 발상이다. 적어도 명경은 생각조차 못 해본 수법이었다.
머리 속에 하나 하나 각인시켰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은 신경을 써서 보아 두었다. 비장의 수법으로 쓸만한 절초들은 명경이 가지고 있는 무당 비전으로도 충분하기는 하다. 그러나, 순간 순간 사용하는 소소한 수법들.
배워 두면 반드시 도움이 되리라.
"무명검 이사. 진무일권 명경, 비무대로 올라오시오."
일순 관중이 술렁였다.
무명으로 같은 별호를 가진 집단과 진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집단.
게다가 진무일권이라는 이는 별호대로 수장의 위치에 있을 터, 게다가 비무대로 올라온 명경의 갈색머리는 관중의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색목인? 대체 사문이 어디지?"
"정통 무술 같던데."
"무명검도 만만치 않을 걸. 무명도를 봤잖아."
"대체 뭐 하는 놈들이냐."
무명검.
금위위 위사. 이사라는 이름을 쓰고 나왔으나 본명은 도일명. 낮은 목소리로 그가 물어왔다.
'무당파라는 것을 모른다?'
"……"
"흥! 대답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구린 것이 있으니 그렇겠지."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목검이 날아 들었다.
'일보 반.'
명경은 옆으로 한 걸음하고 반을 더 움직였다.
군더더기 없는 깨끗한 움직임이다.
직선으로 찔러 들어온 목검이 일순 변화하며 측면을 베어온다.
슛!
소리에 담긴 예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목검이지만 사람의 육신정도는 쉽게 갈라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경력이 담겨 있었다.
명경의 몸이 앞으로 쏠리며, 앞의 일검처럼 깨끗이 피해냈다.
하지만 목검은 집요하게 따라 붙었다.
'권법을 펼칠 틈을 안 주겠다는 것이로군.'
다시 일 보.
명경은 근소한 차이로 비껴냈다. 가까이 붙어 있어야 권을 쳐낼 기회가 생긴다. 이미 검법의 초식을 풀어내기 시작한 상대. 거리를 더 두면 권법을 쳐내는 것도, 무극보를 펼칠 시간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빠르게 움직이던 목검이 순간적으로 세 개로 늘어났다.
'환검(幻劍)!'
텅,텅,텅
명경은 순식간에 진무칠권의 삼 초식을 엄청난 속도로 뿜어냈다.
경황 중에 쳐낸 것이라 반과 척의 구결은 제대로 엮어내지 못했으나 목검을 튕겨내는 데는 성공할 수 있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상대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다시 목검을 휘둘러 왔다.
"검의 흐름을 읽고 있습니다. 저 친구 원래는 검사군요. 한이 네가 보기에는 어떠냐."
모용수는 가주이자 형인 모용도에게 말하다가 옆에 앉은 모용한에게 물었다.
비무를 끝내고 가족의 자리로 돌아온 모용한, 모용수에게는 조카가 된다.
"상당하네요."
모용한의 대답에 모용도의 눈썹이 꿈틀했다.
첫 비무에 승리하고 상기된 아들의 얼굴.
'아직 멀었다.'
명경이 비록 실력을 감추고 있다지만 아들은 명경의 진가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고수다. 근소한 차로 피해내는 방위는 검으로 상대를 공격하기 가장 완벽한 위치. 검이 들려 있었더라면 순식간에 끝났을 비무……'
"조 노대."
"예!"
"저들의 사문을 조사해 주게."
"예."
모용도의 명령에 조 노대라 불린 초로의 무인이 움직였다.
모용세가의 정보를 담당하는 인물, 그 능력은 말할 필요도 없었으니, 금새 필요한 것을 찾아올 것이었다.
'쉽지 않군.'
명경은 권을 쳐 내면서 난감함을 느꼈다.
진무칠권만 가지고는 상대하기가 어렵다.
텅!
명경은 강하게 일보를 밟았다. 내력을 배가한 것이다.
명경의 손이 구루수로 바뀌면서 조그만 원을 그렸다.
"원공권!"
관중들 사이에서도 일대 소요가 일었다.
무명검도 일순 목검을 거두면서 다음 초식에 대비했다.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아까 보지 않았던가.
허나,
텅!
한 발 더.
명경의 발이 앞으로 움직였다.
이어지는 것은 원공권이 아니다.
무극보.
명경이 제 아무리 무공에 대한 자질이 있다고는 해도 한번 본 것 뿐인 무공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태연은 몇 번이나 구루수를 보여 주었고, 그것을 조금 흉내내자 모두가 속았다.
마치 원공권의 권법이 들어갈 것 처럼.
무극보를 시전하기 위한 편법이었을 뿐인데.
텅!
일단 무극보가 시전되자 무명검의 기세는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이 압박감!'
무명검은 비로소 동료가 당한 이유를 깨달았다.
무명검이 발악적으로 뛰어들었다.
기(氣)는 충만하지만 정(精)과 신(神)이 흐트러진 일검……
무극보로 전진함과 동시에 진무칠권의 삼초와 사초를 연이어 쳐 냈다.
"저희도 속았지 뭡니까."
곽준이 밝게 웃었다.
"거기서 원공권이라…… 기막힌 수 였어요."
명경을 비롯하여 조홍까지 육 인이 무도장에서 빠져 나온 것은 저녁이 다 되어서 였다.
"그나저나 모용세가가 맞는 것 같던데요."
북경의 야경을 보자는 조홍의 권유에 따라 높게 지어진 객잔을 찾아가던 중, 단리림이 입을 열었다.
"그렇더군. 봤냐, 그 사람?"
곽준이 호들갑을 떤다.
"푸른 옷. 그 기상. 모용가의 가주라면 천수사 모용도."
악도군…… 목소리는 담담하나 얼굴은 굳어있다.
"여기까지 웬일 일까."
석조경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알 수 없는 일이지. 그저 어전 무술대회를 구경하러 온 것도 아닐테고."
"아들…… 때문일까요, 아들 맞겠죠?"
"아무래도. 정통의 무술을 혹독하게 수련한 듯 하던데."
해답이 나오지 않는 대화다.
무엇보다도…… 모용세가가 여기에 왜 와 있든, 나흘 후면 명경 일행은 북경에 없었다.
조홍이 일행을 인도한 객잔은 북경에서 손꼽히는 고급 객잔이었다. 민초들은 입장조차 꿈꿔보기 힘든 곳으로 소위 고관 대작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주 고객이다. 그 밖에는 돈이 남아도는 거부들이나 출입을 할까.
"으리으리하구만."
"티 좀 안내면 안됩니까. 사형."
아닌 게 아니라 객잔은 들어서면서부터 모든 것이 그들이 거쳐온 객잔과는 달랐다.
조용한 분위기에 궁장을 한 여인들이 기예를 선보이고 있었고, 어느 누구도 시끄럽게 추태를 보이거나 과하게 술을 마시지 않는다.
조홍도 어쩌다 귀족들과의 자리가 있을 떄나 오는 곳이었는데, 이제 며칠 지나지 않아 전쟁터로 간다니, 하지 않던 사치를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육류가 많지 않은 것으로 최고의 음식들을 내오게."
"예. 조대인…… 더 필요한 것은 없으십니까."
점소이들의 모습도 말끔하여 밖에서 본다면 객잔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괜찮네."
점소이는 공손히 물러갔다.
"자주 오시나 보죠."
석조경이 물었다.
"거의 오지 않는 곳이네만. 오늘은 특별히 기분을 좀 내보기로 했네."
"헌데……"
"아, 점소이가 나를 알아본 것 말인가. 이 객잔에서는 어느 정도의 관직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꿰고 있지."
"겉 모습 만큼이나 대단하네."
곽준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주인이 강호인이라는 소문도 있더군……"
"누군지 몰라도 보통 사람은 아니겠구만……"
잠시의 담소.
문득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여인들을 바라본 조홍이 입을 열었다.
"그들은 어찌 되었을지……"
"칠절신금 이야기로군요. 문제 없겠지요."
"강호, 강호인…… 참 묘한 세계인 것 같단 말이야……"
"우리랑 얽혔으니, 조공자도 강호인이지."
"흠. 그렇게 되는 건가."
음식이 나오고 다들 젓가락을 들었을 때.
객잔의 윗 층에서 식사를 하러 내려온 한 무리가 있었다.
푸른 옷.
모용세가다.
"정말 신기한 무공이 많더라니까."
"그래."
"누나도 구경 왔어야 했어."
모용한이 밝게 이야기하는 상대는 모용세가의 천금, 방년 십칠 세, 모용청이다. 아직은 여인이라기에 어린 나이, 눈이 크고 티 없이 맑은 피부를 지녔다. 화장도 하지 않고 장신구로 꾸미질 않아 나이보다 더 어려 보인다. 모용한이 누나라고 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그나마 모용한은 무공으로 다져진 건장한 체격을 지녔으니.
모용한과 모용청에 이어 모용수가 내려와 자리를 잡고 무인 세 명이 뒤에 시립했다. 가주인 모용도는 보이지 않았다.
식사를 하던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절강성의 억양에 신기해 했으나 곧 눈길을 거두었다. 모용수의 뒤에 시립한 무인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앉으세요."
"청아."
모용청이 무인들에게 손짓했으나 모용수의 엄한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모용청이야 심성이 착하니 그렇게 서 있는 무인들이 안쓰러워서 그런 것이나, 모용수의 생각은 달랐다.
"여기는 북경이지만 항상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 적어도 절강성 보다는 훨씬 위험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이야기하면서 주위를 둘러본 모용수는 일순 눈을 빛냈다.
명경과 조홍 일행을 발견한 것이다.
'재미있는 사람들이로군. 이런 곳에도 올 수 있단 말이지.'
"엇."
모용한도 그들을 발견했다.
"누나, 저기 저 사람들."
"……?"
"오늘 비무장에서 본 사람들이야."
"정말?"
"그다지 대단해 보이지 않는 무공을 쓰는데, 묘하게 강하더라고."
"그래……"
비무장에서는 진중한 듯 조용히 있었으나, 실제로는 나이만큼 어린 속내를 드러냈다. 반면 모용청은 적당히 모용한의 장단을 맞춰주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나이보다 마음이 깊어 보인다.
'고수……!'
모용청은 굳이 모용한이 떠들지 않더라도, 명경 일행이 고수인 것을 눈치 챘다.
무공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는 모용한보다 훨씬 깊은 그녀다. 다만 무공에 대한 욕심이 없을 뿐, 그 때문에 그녀가 어느 정도까지 무공을 이해하는지는 아버지인 모용도도 잘 알지 못했다.
모용청은 모용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척 하면서 명경 일행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녀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었다.
단리림의 그것과 같은 뛰어난 육감을 가지고 있다. 어렸을 적의 인연으로 중단전과 상단전을 열어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상대를 알아봐야 겠다고 마음을 먹자 한 가닥의 진기가 머리를 휘돌며 심안(心眼)을 개방했다.
심안으로 그들을 보면서 모용청은 심한 충격을 받았다.
조홍을 제외하고 다섯 모두가 무서운 고수다. 특히 갈색 머리의 남자는 믿을 수 없이 강했다.
모두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보인다고는 하지만……
그 차이는 많게 봐 줘야 십년.
십년 안에 저 중 누구도 따라잡을 자신이 없을 정도, 무골이라는 모용한 역시 십년 후 이 젊은이들보다 강해질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다.
'대체 어떤 자들이지.'
모용청은 순간 흠칫 놀랐다.
'아!'
갈색머리의 남자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지.'
명경은 모용청을 바라보며 자신이 느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방금 느낀 시선은.
무인끼리 겨룰 때나 살펴보는 탐색의 눈.
분명 저 조그만 소녀였다.
눈이 마주치자 드러난 당황한 표정.
"역시 모용세가군요. 저만한 나이에 심안(心眼)이라니."
단리림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상단전이 열려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심안이라……"
"불가의 비전이죠."
명경은 어쩔 줄 모르는 모용청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굳이 관심을 보일만한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뒤에 있는 중년인이라면 모를까.
"상당한 고수들인데……"
곽준이 모용세가 쪽을 보면서 말했다.
이제 그 쪽에서도 명경 측을 보고 있었는데, 서로가 의식은 하지만 굳이 관계가 얽힐만한 상대가 아니므로 다들 금방 시선을 거두었다.
"왜 그러는 것이지?"
오직 무공을 모르는 조홍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
"저기 저쪽 사람들 때문입니다."
석조경이 대답했다.
"보통 사람들이 아닌 것은 알겠는데."
"언젠가 말한 적 있지요. 모용 세가라고."
"아, 육대 세가 중 하나를 이야기 하는 것이로군."
"저들이 절강성의 패자인 모용 세가의 인물들입니다."
"그걸 어찌 알지?"
"저기 있는 소년이 아까 무술 대회에 나왔었죠. 나이에 비해 대단한 성취더군요. 그만한 인재를 키워낼 만한 곳이 많지 않을 뿐더러, 이 객잔에 있다는 것, 범상치 않은 무인들. 특히 저들의 푸른 색 옷. 모용 세가밖에 없죠."
석조경은 말을 고르는데 어지간히 신경을 썼다. 저만한 무인들이라면 이 거리의 대화 정도야 듣지 못할 리 없기 때문이다.
특히나 서로를 의식하고 있는 바에야.
이쪽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터이다.
"흠…… 육대 세가에는 또 어디가 있다고 하였지?"
"구양, 남궁, 모용, 황보, 당문, 팽가 이렇게 여섯 세가 입니다. 그만큼은 못 되어도 무가로는 명성이 높은 가문들이 많이 있는데, 저도 식견이 일천하여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석조경은 그 정도 선에서 말을 끊었다. 더 이상 구구 절절 이야기하다간 얼마나 주목을 받을지 알 수 없었다.
"저기 저 친구는 강호인이 아니군."
모용수가 고갯짓으로 조홍을 가리키며 옆에 앉은 무인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이제 신경을 끄기로 했다는 듯, 음식에만 시선을 준다. 굳이 그가 나서지 않아도 내일이면 조 노대가 이끄는 현안각의 인재들이 정체를 알아 오리라.
문득 모용청을 보았다.
저쪽 무리에서 가장 강할 갈색머리의 젊은이도 모용청을 주시했었다.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시선이었다. 마치, 모용청의 진가를 알아보기라도 한 듯.
모용청.
조카딸인 모용청을 볼 때마다 모용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릴 적부터 재질이 뛰어났다. 헌데 무공을 얼마나 배웠는지 아는 이가 없다.
속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두운 것도 아니다.
가끔 보면 지혜에 찬 눈빛이 드러났다.
'아들이었다면.'
모용수는 모용도의 동생으로 모용세가의 이인자 자리에 있으면서 욕심이 전혀 없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역량을 잘 알았고, 야심을 품기에는 천성이 부드러워, 모용세가의 발전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모용수, 그는 모용청이 아들이었다면 이란 생각을 하곤 했다. 모용청이 모용세가의 뒤를 잇는다면 세가의 미래가 더 밝아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여자로 태어났기에 볼 때마다 걱정이 앞섰다. 자신의 형인 모용도의 야심을 알기 때문이다. 모용청은 십중팔구 자유로운 삶을 살지 못하리라. 모용청만한 재질에 미모라면 십년 안에 강호의 여협으로 이름을 날리게 될 것인데……
'형님이 그리 놔둘리가 없지.'
틀림없이 모용청은 정략 결혼의 대상이 될 것이고, 무공도 어느 이상 가르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모용수는 모용청의 옆에 있는 모용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년이 청년으로 자라나는 과정, 모용한에게는 아직 어린애의 치기가 많이 남아있었다.
그것도 이제 곧 사라지리라.
앞으로 적어도 오년.
절강성으로 돌아감과 동시에 모용한은 혹독한 수련을 받게 되리라. 이번의 북경행에 모용한과 모용청을 대동한 것은 모용수의 주장에 의한 것이었고, 그것은 조카들이 마지막으로 자유로운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식사를 마쳤으면 올라가세. 야경이 일품이거든."
조홍의 말에 모두가 일어섰다.
점소이에게 말하자 바로 안내하는 이가 붙어 계단을 올랐다.
"오, 이거 장관인데……!"
가장 먼저 탄성을 터뜨린 이는 역시 곽준이다.
이제 밤이 되어버린 북경. 저 멀리 보이는 황금 빛, 자금성.
곳곳에 밝혀진 불, 커다란 전각들. 밤하늘에 가득한 별.
산속의 적막함만을 벗삼아 살아온 명경일행에겐 진실로 다른 세계였다. 이곳은.
오층에 올라 마련된 탁자에 모여 앉은 그들에게 몇 가지 과일과 차가 준비되었다.
도시의 야경에 취하여 각자의 생각에 빠져있다가 몇 가지 대화를 하고, 다시 조용히 한참을 앉아 있었을 떄였다.
'살의(殺意)!'
명경의 감각에 이상한 것이 잡혔다.
명경 일행이 위로 올라간 후 모용수는 모용청, 모용한과 함께 명경 일행의 정체에 대하여 한참동안 이야기를 했다. 본디 신경을 끄려고 마음먹은 모용수였으나, 모용한이 계속하여 호기심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은 관리. 나머지 다섯은 무인인데……"
"관리요?"
"이곳에 올 정도의 신분. 무공을 모른다면 상인, 아니면 귀족인데, 그다지 거들먹 거리지 않으니 젊은 관리가 아니겠느냐."
"아!"
"눈에서 정기가 느껴지는 것을 보면 정통의 무공을 제대로 배운 젊은이들……"
"하지만 초식들은 별 것 없었지 않았습니까."
"그게 좀 이해할 수 없어.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인 것 같기는 한데, 명문의 제자라면 왜 굳이 정체를 감추는지."
"대체 어느 곳의 제자일까요."
"다른 세가의 제자이거나 구파 일방의 제자겠지."
"하지만 육대 세가에는 저런 사람들이 없는데."
"우리가 모두를 알 수는 없지 않느냐. 아니면, 육대 세가에 밀린 다른 세가의 제자든지."
"속세의 인물들은…… 아닌 것 같던데……"
듣고 있기만 하던 모용청이 끼어들었다.
"속세의 인물들이 아니다?"
"아니, 그저, 그렇게 느껴졌어요."
모용수는 말을 하고 눈길을 피하는 모용청을 바라보았다.
모용청은 허언을 하는 아이가 아니다. 그녀가 그렇다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구파 일방이로구나. 더 문제로군. 구파 일방의 제자들은 저 정도 나이가 되기 까지는 산속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일단 이름을 날리기 전에는 누가 어디의 제자인지 알 수가 없지 않더냐."
"정말 알 수 없는 문제군요, 숙부님."
"자네들, 혹시 어느 지방의 억양인지 알 수 없던가?"
모용수는 뒤에 있는 무인들에게 물었다. 허나 돌아오는 것은 설레설레 젖는 고개 뿐. 비록 호북의 억양이 깃들어 있기는 할 테지만 워낙에 무당파가 여러 곳 출신이 모인 방파이니만큼 특별한 억양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여러 곳의 억양이 섞였다고 할까요."
"구파 일방이 다 그런 게지…… 해남파를 제외하고는……"
"……"
그렇게 답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를 끝내고 곧 그들도 위 층의 숙소로 올라갔다.
사층 한 층을 통째로 모용세가가 빌려놓은 상태였다.
모용청의 방은 그 중에서도 가장 중앙 쪽, 안전한 곳에 위치했다.
방에 들어와서도 잠을 이루지 못한 모용청은 창가로 몸을 옮겼다.
창가에서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던 모용청은 하나의 그림자가 지붕을 뛰어넘어 날아드는 것을 발견했다.
'뭐지?'
그림자는 담장에 뛰어올라 주위를 살피더니, 객잔을 지키는 무사들이 지나가자 소리없이 담장을 넘었다.
본디 신중한 성격의 모용청, 그러나 방금 아래 층에서 본 명경 일행 때문에 한참 호기심에 차 있던 모용청은 충동에 몸을 맡기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대로 창문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일엽락의 신법을 발휘한 모용청.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착지했다.
막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그림자를 따라 모용청은 살금살금 뒤를 쫓았다.
커다란 정원이 나타났다.
연못이 있고, 특이한 모양의 바위와 나무들이 즐비하여, 어떤 귀족의 정원 못지 않은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정원이었다. 정원 한쪽에는 아직까지 담소를 나누고 있는 귀족들이 보였으나, 그림자는 나무들 사이로 아무 기척도 내지 않고 전진해 나갔다.
모용청도 나무 그림자에 몸을 숨기며 어렵게 그 그림자를 따라가 결국, 정원의 나무들 사이에 있는 조그만 공터에 이르렀다.
'이런……'
모용청은 어둡고 무서운 느낌에 더 이상 쫓아가지 못했다.
모용청은 몰랐다. 곱게 자란 소녀이니까.
살의.
모용청은 모용세가를 방문한 아미파의 여승으로부터 한 가지 심법을 얻었다. 인연이라면서 은밀히 건내 준 구결은 모용청에게 상단전을 열고 중단전을 키우는 기회를 주었다.
가문에서는 누구도 모르는 사실.
덕분에 모용청은 사람의 허실을 잘 파악했고, 신비한 감각을 얻었다. 어느 정도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 나이에 비해 많은 것을 알아버렸고, 조숙한 소녀가 되어 버렸다.
사람의 마음이란 겉보기와는 달리 깨끗하지 만은 않은 것이었으니.
허나, 그녀로서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겪어 보지 않은 것은 알 수가 없는 것, 아직까지 누군가를 죽이려는 어두운 마음을 품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덜컥 겁이 났다. 사람이 품는 살기(殺氣)……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까맣고 은밀하여 저절로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무턱대고 따라온 자신의 행동이 경솔했다는 것도 깨달았다.
뒤로 돌려던 모용청은 의사와는 관계 없이 한 발작 더 나아갔다.
그곳에는 그림자가 서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말이나 되는 소린가."
"가(可) 아니면 부(否), 하나만 결정해라."
"물론 부(否)다. 다른 대답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나?"
"그럼 죽어라."
그림자의 검은 너무 빨랐다. 그리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검을 날릴 줄 몰랐던 듯, 상대의 대응은 민활하지 못했다.
또한 그것이…… 삶과 죽음을 갈랐다.
"큭!"
모용청은 어둠에 뿌려지는 액체들을 목격했다.
달빛을 받아 검게 빛나는 액체가 목에서부터 뿜어져 나왔다.
피.
"헉!"
모용청은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 경호성을 뱉고 말았다.
"……!"
그림자는 돌아서며 땅을 박찼다.
검은색 야행복에 복면. 모용청이 볼 수 있는 것은 차갑게 빛나는 두 눈 뿐.
슉!
모용청까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복면인은 검을 휘둘렀다.
피슛!
살이 갈라지는 소리, 피가 튀었다.
제3장
<절강(浙江) 모용세가.
절강성의 패자.
천수사(天秀士) 모용도(慕容道), 가주(家主).
모용십수(募容十秀), 절강성(浙江省) 최강의 무인집단.
후계. 일엽락(一葉落) 모용한(募容漢). 발군의 후기지수.
……(중략)……
모용가의 여식 모용청(募容靑).
부(父), 모용가주 모용도. 모(母), 절강(浙江) 이가(李家) 이숙정(李叔精).
아미파(娥眉派) 혜선신니(慧善神尼) 사사(師事). 낭인왕(狼人王) 패왕(覇王) 사중비(査仲飛)의 사자기(獅子氣) 사사(師事).
초절정(超絶頂) 고수(高手). 절강일미(浙江一美). 절강일요(浙江一妖). 북풍마후(北風魔后).
영물(靈物) 내력마(內力馬) 비설(飛雪) 주(主).
영물(靈物) 내력묘(內力猫) 소설(小雪) 주(主).
……(중략)……
한백무림서 초안, 절강 모용세가 중.>
"상처에서 피가 많이 납니다."
단리림이 부욱하고 겉옷을 찢었다.
명경의 왼쪽 어깨를 단단하게 동여맨 단리림은 기절한 모용청과 저쪽에 널부러진 시체를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 보았다.
명경과 거의 동시에 단리림도 어디선가 뻗어나온 살의를 느꼈다.
무인이 검을 들었을 때 느껴지는 살기보다는 미약하다.
그러나 워낙에 가까운 곳이니 태극도해를 수련한 그들에게는 강렬한 파동으로 느껴졌다.
그대로 오 층에서 몸을 날린 명경, 느껴지는 살의를 일직선으로 쫓아갔을 때, 이미 살인은 벌어진 후 였고, 설상가상으로 모용청에게까지 검이 날아들고 있었다.
무당의 비전 신법, 제운종.
명경은 비로소 모든 진신 무공을 개방하고 모용청을 막아섰다. 허나 검도 없는 마당에 지척에 이른 검날을 받아내기에는 역부족. 급한 대로 모용청을 밀어내고 몸으로 받아냈다. 어깨에 데는 듯한 통증이 엄습했다. 고통을 참으며, 수도로 태극혜검의 일초를 뿌려냈다. 실전적으로 다듬어 그 속도가 경이로운 상승의 검술이었다.
"컥!"
일격에 '우직!' 하고 갈빗대를 부숴 놓았다.
곧바로 따라온 단리림, 복면인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담장을 넘었다. 담장 위로 따라 붙었으나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고, 지금은 명경의 상세가 먼저 였다.
피가 뿜어 나오다시피 했으니.
모용청은 본능적으로 일선신기를 운용했다. 본디 도가의 무공이었던 일선신기는 아미파에 들어가 불법의 힘을 빌어 더욱 정심해진 심법이다. 일선신기의 진기가 몸과 머리를 휘돌자 충격을 받았던 정신이 맑아지고 두근거리던 가슴이 가라앉았다.
"저,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녀는 모용가의 여식으로 이름은 청이라고 합니다."
"명경이오."
"단리림입니다."
명경과 단리림은 짧게 대답했다.
명경이 다친 원인이 모용청 때문 아닌가.
경솔하게 개입한 철없는 소녀가 탐탁치 않게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소란 때문인지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사람들 사이에는 곽준과 악도군이 있었고, 모용세가의 푸른 옷을 입은 무인들도 보였다.
명경은 말 없이 죽어있는 시체로 다가갔다.
피가 흥건하게 배어나오는 시체.
명경이 몸을 숙여 시체의 고개를 돌렸다.
"……?"
명경은 놀랐다.
시체의 얼굴. 오늘 낮에 비무대에서 보았던 무명검이 아닌가.
문제는 컸다.
객잔 주변에 온통 관병들이 깔렸다. 조홍의 집 주변에도 관병들이 들이 닥쳐, 조사와 보호를 핑계로 명경 일행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다음날 알려진 사실은 일이 생각보다 간단치 않음을 알게 했다.
간밤에 살인 사건이 세 건이나 더 일어난 것이다.
게다가 그 희생자들이 또 한번 명경 일행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대체 바라는 게 뭐야!"
짜증스럽게 외친 이는 검은 옷에 한 마리 나비가 수 놓아진 비단 옷을 입고 있었다.
동창의 세 개 부대 중, 흑호대 대장 백무(白霧).
가진 바 무공이 실로 절정에 올라 있는 인물.
"희생자들의 공통점은 어제 어전 무술대회에서 무당파 인물들과 싸웠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문초해 보심이……"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그들이 미쳤다고 이들을 죽이겠냐? 독명수 좌인. 비룡신협? 비룡은 또 뭐야. 겉 멋만 잔뜩 든 녀석들, 죽여 보았자 무슨 이득을 본다고!"
"하지만…… 금위위들은 범인으로 그들을 지목하고 나섰는데."
"금위위들도 그래. 대체 뭐야. 그놈들은 머리가 있는 거야? 말이 되는 상대를 골라야지. 무당파가 그런 일을 벌이겠냐?"
"저…… 대장님, 금위위 측에서는 그들이 무당파인 것을 모르는 것 같던데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본 바로는 금위위 정보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금위위 정보에 문제가 있어?"
"예, 아무래도…… 윗선에서 금위위에 정보를 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정보 은폐?"
"게다가 이번 희생자들 중, 무명검이라는 자가 사실은 금위위 위사인 도일명이라고…… 또한, 며칠 전 금위위들과 무당파 사이에 사소한 충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동창은 금위위처럼 강호의 고수들로 구성된 황실 직속 기관이다. 동창은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금위위와는 달리 암살과 같은 은밀한 일이나, 정보에 관련된 일에 주로 힘을 썼는데, 그 정보력이 강호 어떤 집단에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정 조장은 무당파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이건가?"
"혐의를 둘 수 있겠지요. 그리고 모용세가 역시. 도룡권 윤철이 죽었으니 일단 조사 대상에서 빼 놓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정 조장 말도 맞지. 하지만 내 생각은 이래. 무당파와 모용세가는 이 사건의 범인이 아니야. 말이 안 되거든."
"……"
"게다가 금의위 위사가 죽었어. 모용가의 꼬마 아가씨의 말에 따르면 일검에 죽였다더군. 범인은 고수야. 무당파의 인물에게도 상처를 입혔지. 분명 상처를 입었어. 무당파의 인물이랑 범인과 손속을 교환했다고도 했고. 근데 금의위는 무당파의 인물들을 의심해. 그리고 무당파라는 것도 몰라. 뭔가 이상해도 단단히 이상하지 않나?"
"그럼……"
"누군가 수작을 벌이고 있는 거지. 금의위는 멋모르고 말려든 것이고. 아마 금위위 내부에선 무당파의 인물들이 범인인 것처럼 정황이 흘러가고 있을 거야. 그걸 알아내. 그리고 혹 누군가 그렇게 몰고 가는 놈이 있을 수도 있어. 파악해 놔."
"예! 허면…… 금위위에 무당파의 이름을 흘릴까요?"
"아니, 흘리지 마. 계속 어떻게 나오는 지 보자구. 어차피, 무당파 사람들은 곧 북경을 떠. 군대에 소속되지. 이런 일을 벌일 이유가 조금도 없어. 금의위에서는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았지. 흉수는 그만큼 수작을 벌일 때 더 대담해 질거야. 무당파는 꼬투리를 잡을 것을 만들지 않을 거고. 흉수는 하나라도 더 무당파에 불리한 것을 제시하겠지. 꼬리가 길면 잡혀. 우리는 그 꼬리를 잡아내면 돼."
"저는……"
"자네는 모용세가를 주시해. 모용세가로 흘러들어가는 정보, 나오는 정보 하나도 놓치지 마. 아마 모용세가에서도 뭔가 행동에 들어갈 거야. 금위위가 귀찮게 하고 있으니까. 모용세가가 흉수일 수도 있지. 모용도는 야심이 큰 인물이니."
"예."
"정 조장, 오늘 어전 무술대회에서 무당파 친구들이랑 싸우는 무인들을 파악해 놔.
모용가의 상대도. 그들에게 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어."
"예."
"아무래도 이번 일을 벌인 놈들은 우리가 아직 모르는 집단인 것 같아. 확실한 것은 이번 살인들이 뭔가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거다. 그걸 알아야 해. 놈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 * *
"결국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문제군요."
"하필이면 우리를 표적으로 삼았지?"
"어딘지 그때랑 비슷하지 않아요?"
석조경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칠절신금, 객잔."
"음…… 그렇군."
"우리와 싸웠던 자들이 죽었어요. 온 관병들의 이목이 집중 되었죠. 금의위도 그렇고. 게다가 죽은 또 하나의 인물은 모용한과 겨룬 자더군요. 무명검이 죽은 것도 모용세가가 묵고 있는 객잔이었구요."
"세상의 이목이 이쪽과 모용세가 쪽에 집중되었다…… 는 거군."
"또 하나, 이상한 것은 금의위가 우리의 정체를 모른다는 겁니다."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 하던가."
"어쨌든…… 관병과 금위위가 이쪽에 정신을 쏟고 있으니…… 다른 일을 벌이기에 좋겠죠."
"좌시할 수는 없는 일인데……"
"그렇죠. 독명수나…… 비룡신협이나…… 우리 떄문에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 같으니……"
"림아 뭐 느껴지는 것은 없으냐?"
곽준이 단리림에게 물었다.
"어제도 느꼈는데…… 이것은 이대로 끝나지 않아요. 아마…… 내일도……"
"흠. 그럼 이렇게 하자. 오늘 비무 상대. 비무가 끝나면 쫓아가자. 암중에 보호하는 거야."
"그러다가 살인을 막지 못하면 오히려……"
"그래, 누명 쓰기 딱이지. 괜찮겠죠? 사숙."
곽준이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명경.
명경 개인적으로도 자신에게 검상을 입힌 자를 찾고 싶었으니.
"저는 반댑니다. 이 방법. 예감이 좋지 않아요."
단리림이 나섰다.
"내 예감도 별로 좋지 않아. 하지만 뭔가 해야지."
곽준이 말을 받았다.
단리림이 가진 것이 훈련된 육감이라면 곽준에게도 천부적인 직관이 있다. 그들 둘이 느낌이 좋지 않다고 한다. 그럼에도 뭔가 해야 한다는 것은 모두의 심정이다.
"확실히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냐. 하지만 우리에겐 강호에 대한 식견도, 경험도, 그리고 정보를 얻어다 줄 조직도 없지. 그렇다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직접 부딪혀 보는 수 밖에 없다는 거야."
"하지만 내가 듣기엔 자네들 계획 좀 문제가 있군,"
갑자기 조홍이 끼어들었다.
"흉수가 또 자네들하고 싸운 무인들을 노릴까?"
석조경이 조홍의 말에 눈을 빛냈다.
"저라면 합니다."
"하룻밤 새에 사람을 넷이나 죽이면서 꾸미려는 일. 뭔지는 모르지만 이왕이면 주의가 다른 곳에 더욱 집중되는 것이 좋겠지. 칠절신금이 태산신녀까지 끌어들인 것 처럼."
"아마도 오늘 밤이 고비일 겁니다. 오늘 밤, 살인이 더 일어나고, 그 다음엔 다른 술수를 본격적으로 꾸미겠지요. 그 전에 우리는 습격하는 자 하나라도 잡아 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흉수들의 움직임이 한 발 더 빨랐다.
"진무 이권 악도군. 상대는 금사도 한화."
악도군이 비무대 위로 올라왔으나 상대가 나타나지 않았다.
"금사도 한화! 없습니까?"
악도군의 눈빛이 싸늘해 졌다.
'설마하니……'
"셋을 셀 동안 나타나지 않으면 실격처리 됩니다. 하나……"
"진무 삼권 곽준! 비무대 위로. 적각일수 영소. 비무대 위로 올라와 주십시오."
곽준의 눈이 관중들을 훑었다.
술렁이는 관중.
어제의 소문을 들은 게다. 곽준을 쳐다보는 시선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악도군에 이어 자신에게도 상대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적각일수 영소! 비무장 안에 없습니까? 셋을 셀 동안 나오지 않으면 실격패 입니다."
"뭣이라?"
"무당파의 상대가 세 명 째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급하게 달려온 수하의 보고에 백무는 눈을 치켜 떴다.
"한 방 먹었군! 나타나지 않은 자들은?"
"금사도 한화, 적각일수 영소, 그리고 단철삼도 남화입니다."
"이름이 뭐가 중요해? 그들은 어디에 있냐고!"
"그, 그것이…… 찾아 보아도……"
"황천에 있겠구만. 무당파는 다섯이지?"
"예."
"나머지 둘의 상대는?"
"아까 명령 받은 직후부터 소재를 파악하려고 했는데……"
"불러와."
"예?"
"다섯 명, 찾으러 간 대원들. 다들 불러 모으라고! 다섯 명의 시체는 내일 아침이면 자연히 발견될 거다."
"……"
"보통 놈이 아니군. 아니, 놈들인가……? 이 나를……"
백무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서성거렸다.
"모용가의 자식 이름이 뭐라고?"
"모용한입니다."
"그런 애송이 이름이나 기억해야 한다니. 모용한의 상대는?"
"소재 파악이 안 됩니다……"
"다섯이 아니라 여섯이군. 하룻밤 사이에 열명을 죽였다…… 대담해. 마음에 들었어."
"……"
백무는 한참을 서성였다.
"열쇠는 그놈이 쥐고 있다."
"……?"
"도일명. 금의위. 놈이 죽은 이유.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야 해. 누가 그 자리에 있었지?"
"모용가의 여식과…… 무당파의 명경이라는 자 입니다."
"오늘 접근한다. 모용가의 여식과 무당파의 움직임을 파악해 놔."
뜻밖의 사람이 찾아왔다.
"하…… 할아버님!"
조홍의 조부인 조인창이 나타난 것이다.
"네 아비는 중요한 일 때문에 못 왔다. 군부로 발령이 났다고?"
"예."
"본가에는 알리지도 않고.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저…… 저는……"
"사방 천지에 관병들이던데."
"그것이…… 사소한 문제가……"
조홍은 조부인 조인창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칠순이 넘은 늙은 나이 임에도 눈에는 정기가 가득하고 허리가 꼿꼿하다. 뿜어 나오는 위엄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설명이나 해 보아라."
한참 동안 계속된 조홍의 이야기가 끝나자, 조인창은 무당 제자들을 불러오라 말했다.
"그래서…… 여기 이 사람들이 무당의 제자들이라고."
조인창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명경 일행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서운 인재들이로세. 결국 강호인들이 문제라니까."
"……"
"당금 황제 폐하께서도 그래. 북경에 강호인들이 들락 거리기 시작할 때부터 이상했지. 결국 하늘이 바뀌었고."
"그 말씀은……"
"폐하께선 강호인들의 힘을 업고 황위에 오르신 거지. 주원장도 그랬고. 이번 일도 강호인들이 일으키는 일이야."
"……!"
조인창의 말에 석조경, 곽준, 조홍이 서로의 얼굴을 돌아 보았다.
"그럼 흉수들의 목적은……"
"강호인들이 북경에서 일을 벌인다. 그것도 오만 데를 들쑤셔 놓고. 눈에 보이진 않지만 동창도 움직이고 있을 터. 하나 밖에 없지."
"황실…… 전복……"
"함부로 입밖에 내면 구족이 멸문 당한다. 지금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눌러 앉아 있는 것이 좋아. 어차피 거사는 실패한다."
"예?"
"쯪쯔. 어떤 인물들이 폐하의 곁에 있는지 모르는 군. 내 평생에 다시 볼 수 없는 천품들이 폐하의 곁에 있다. 당금의 자금성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어."
넓게 보면 그렇다.
조인창이 명쾌하게 답을 내린 것처럼, 사람들이 죽고 행방 불명 된 이유가 황실 전복을 꾀한 무리의 짓이라면 굳이 명경 일행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대명제국 황제의 자리라는 것이 그리 쉽게 뒤집어 질 것이 아닐 뿐더러, 어전 무술 대회에서 보았듯이 황제 주위에는 무서운 고수들이 포진해 있는 것이다.
조인창의 말은 즉, 조용히 지내다가 북경을 떠나면 어떻겠냐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협'의 문제였다.
누군가 음모를 꾸몄고, 자신들의 비무 상대라는 이유로 죽음을 당했다. 한 둘이야 공교로운 우연이라 쳐도, 오늘은 다섯 명의 상대 모두 행방불명이지 않은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손을 놓고 있을 수 만은 없는 일이다.
"젊은이의 혈기로 나설 일이 아닐세."
"혈기가 아닙니다. '협'이지요."
조인창의 나무람에 곽준이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답했다. 연륜과 경험을 넘어선 의지다. 조인창은 그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수 밖에 없었다.
소득 없는 탁상공론만을 계속하고 있을 때, 또 다른 한 사람이 찾아왔다.
푸른 옷을 입은 무인
상당한 예물을 들고 있었다.
"모용가의 선물입니다. 부디 받아 주십시오."
"이 무슨……"
"가주꼐서의 전언도 있었습니다. 오늘 저녁, 제일객잔에서 얼굴을 뵙기를 바라십니다."
조홍은 그 무인을 돌려 보냈다. 예물들은 극구 권하는 것인지라 어쩔 수 없이 받았다.
"모용가의 여식을 구해준 것에 대한 답례라니…… 뻔뻔하기 짝이 없군."
이야기를 전해 들은 곽준은 얼굴을 굳혔다.
강호는 은원이 분명한 세계다.
은혜든 원한이든 배로 갚으려고 한다.
모용 세가 같이 큰 세력의 경우에는 은혜와 원한을 처리하는 데 더 복잡한 것이 작용한다. 소소한 원한을 일일이 다 챙기다 보면 강호의 평판이 나빠지며, 또한 은혜 역시 헤프게 갚다가는 모용 세가의 후광을 얻어보려는 족속들이 한 없이 꾀이게 된다.
명경이 모용청을 구한 것은 분명 생명의 빚. 명경이 대단히 커다란 대가를 원한다고 해도 모용세가에서는 할 말이 없었다. 때문에 그만큼 신중해 질 수 밖에 없다. 모용 세가가 보장하는 대가라고 한다면 그것을 노리고 연극을 꾸민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루가 지난 지금에 와서야 예물이니, 초청이니 운운하는 것은, 그 동안 어제 일의 허실을 가려보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곽준은 어젯밤 모용세가와의 일을 떠올렸다.
"이봐 이쪽은 크게 다쳤다고."
곽준이 눈을 치켜 뜨며 한 말.
"그거야 당신들 사정이지."
모용 세가의 무인이 대뜸 그렇게 답해 왔다.
발끈하는 곽준의 어깨를 잡은 것은 명경이었다.
"그만하자."
"하지만……"
곽준의 어깨에 올려진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에 곽준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명경을 보았다.
명경의 눈빛은 단호하다. 더 이상 곽준이 다른 말을 할 여지가 없었다.
"에잇!"
곽준이 화를 참을 수 없는 듯, 울분을 토했다.
당사자가 문제를 일으키길 바라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사문의 선배, 더 이상 명경의 뜻을 거스를 수야 없었다.
그러나 모용세가의 태도에 화가 난 것은 곽준 하나 뿐이 아니다.
"이봐 당신."
악도군이 모용 세가의 무인을 불렀다.
"알아둬.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그 책임을 모용가에 묻겠다."
"이놈이 어느 안전이라고!"
악도군은 말 없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차가워지며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때.
"이 친구. 말을 조심하게."
나타난 것은 모용수였다. 여유로운 표정. 모용수는 은은히 자신의 기세를 드러내며 걸어왔다.
"무턱대고 사람을 믿을 수 없는 것이 강호이니, 소협이 이해해 주시게."
"하지만 숙부! 저 분은……!"
"넌 들어가 있거라. 청아를 안으로 데려 가게."
모용청이 끌러가듯 객잔으로 들어가고, 모용수와 모용가의 무인들만이 남았다.
"젊은이. 책임을 모용세가에 묻겠다고 했나? 내 자네들을 상당히 좋게 보았는데, 아직 강호를 잘 모르는 것 같군. 경망되이 행동하지 않았으면 싶네. 이건 강호의 선배로서의 충고야."
모용수는 강렬한 기세를 뿜어냈다.
한 쪽에는 시체. 아직도 피가 배어 나오는 명경과 그 일행. 다른 쪽에는 위압감을 주는 십 여명의 무인들. 장내에는 순식간에 격렬한 전운이 감돌았다.
"그만 가자."
침묵을 깬 것은 명경이다.
그대로 뒤를 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냉정한 석조경도 출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명경의 얼굴엔 그만 돌아가자는 의지가 가득했다.
석조경이 몸을 돌리고, 단리림, 곽준도 뒤를 따랐다.
눈썹을 치켜올린 악도군. 평소에는 과묵하나, 사부의 호전적인 성격을 물려받은 탓일까. 모용수의 강한 기도에도 꿈쩍하지 않고 눈빛을 받아내던 그도, 결국은 명경의 뒤를 따랐다.
처음으로 살인과 시체를 목격했기 때문일지 좀처럼 열기를 씻을 수 없었다. 점차 머리가 차갑게 가라앉자 모용세가의 처사를 이해할 수 있었다. 허나 머리로는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일이 있은 후 모용세가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거절할까."
"별로 가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흠, 그래 가야 하겠지."
"지금 벌어지는 일, 모용가도 얽히지않았다면 그런 초대, 깨끗이 무시해 버리는 것인데 말이야."
"아마 그 쪽에서도…… 어제 일만 가지고 우리를 보자는 것은 아닐 겁니다."
"오늘 모용가의 소년도 상대가 안 나왔지?"
"예, 결국에는 둘 다 휘말려 버린 것이죠."
"왜 이런 무술대회에 출전해 가지고……"
곽준이 역정을 냈다. 한참이나 불만을 토로하며 이야기를 계속 하던 무당 제자들…… 일단은 모용가의 초청에 응하기로 했다.
일련의 사건들을 좌시하지 않기로 한 이상, 행동을 취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으니, 모용가와 관계를 만들어 놓는 것도 좋을 듯 싶었다. 게다가, 어제 모용세가와의 있었던 불쾌한 일도 어떤 식으로든 그냥 넘겨버리기엔 그들이 너무 젊었다.
"올까."
"아마도요."
모용도. 자칫하면 딸이 목숨을 잃었을 지 몰랐던 것, 고작 하루가 지났건만 태연하기 그지 없는 신색이었다. 그런 문제야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는 듯, 그는 도리어 무당 제자들에게 흥미를 보일 뿐이다.
"그리도 대단하던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더군요."
"놀라운 일이군. 분뢰일섬 모용수에 이름도 없는 젊은이가 맞선다라……"
모용수.
형인 모용도의 그늘에 눌려 이인자 자리에 안주한 사람. 그러나 절강성에서 그의 무력은 알아주는 바다. 아니, 절강성에서 뿐 아니라, 신수사 모용도에 이은 분뢰일섬 모용수라면 중원 어디를 가도 대접 받는 고수였다.
"내력과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나 기백만큼은 그만한 젊은이들이 드물 겁니다."
모용수는 악도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섯 명 모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모양새야 모용세가의 힘에 눌려 물러나는 형세였지만, 어쩐지 실제로 부딪혔다면 목숨을 걸어야 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체는 밝혀내지 못했는가?
"강호 쪽으로는 시간이 걸리는 지라. 굳이 알려고 한다면 개방에 의뢰를 하면 될 터이지만 사안이 그 정도는 안 되는 것으로 보여서…… 때문에 조 노대가 관부 쪽으로 뚫어보려고 했답니다."
"흠…… 헌데?"
"일제히 함구하더랍니다. 최근에 조홍이라는 젊은 관리가 그들을 데리고 온 모양인데, 그 이상은 영 알아내기가 힘들다 합니다. 우리가 손 대기 힘든 선에서 정보가 막혀있는 모양이라고……"
"그렇다면…… 구파 중, 관부와 연계가 확실한 곳이 어디지?"
"소림…… 공동…… 정도가 아닐까요."
"공동은 아니야. 예기가 없어. 그렇다고 소림도 아니고. 구파가 아닐 수도 있겠군."
"예."
"절강성…… 벗어나기만 해도 이렇게 모르는 일이 생기는 것을……"
이곳이 절강성이라면……
모용도는 강호가 넓고 중원이 넓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절강성 내의 소식이야 한 손에 쥐고 있다. 어느 시골 마을에 누가 이사 왔다는 것 까지도 하루면 알 수 있을 정도로 속속들이 알 수 있는 것이 절강성의 모용세가다. 하물며 명경 일행과 같은 젊은 고수들, 독특한 무공이라면 모용세가의 이목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러나 이곳은 북경.
절강성이라면 아무리 배짱 좋은 살수라도 감히 모용세가의 천금에게 검을 휘두르지 못한다.
이곳에선 거리낌 없이 살수를 뻗어왔고, 누군가의 수작에 모용가의 후손, 모용한의 비무상대가 죽었다. 그야말로 절강성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참으로 치열하게 절강성의 패주를 차지했다고 여겼는데, 그것이 결국 중원의 일각이었을 뿐인가. 모용도는 강렬한 야심이 끓어오름을 느꼈다.
"형님 이번 일. 결국은…… 그 정보와 관계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래. 틀림 없겠지. 조 노대에게 황실의 움직임을 주시하라고 일러라. 그리고 그 젊은이들에 대한 조사는 그만해 둬. 내 직접 만나 보겠다."
'이 모용세가를 끌어들인다 이거지…… 감히. 북경이라고.'
모용도의 눈빛은 젊은 사람의 그것처럼 활활 타 올랐다.
"모용세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관부를 들쑤시고 있답니다. 게다가…… 심상치 않은 것을 발견해서."
"이건……!"
백무는 수하가 들고 온 조그만 장신구를 살펴 보았다. 청색 실로 만든 가운데에 '동(東)'이라는 한 글자가 수 놓아져 있다. 문사들이나 지닐만한 장식품이다.
"동인회가 다시 북경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
"어디서 발견했나."
"비룡신협의 시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입니다."
동인회.
백무은 손가락 하나 정도 되는 장신구를 다시 한번 들어 보았다.
"만들어 진지 오래되지 않은 것이로군. 출처를 파악해. 함정일 가능성이 크니 다른 일에도 차질이 없게 하고."
"예."
'동인회라……'
동인회라면 북경에 꽤나 오랫동안 자리를 잡고 있던 한 방회의 이름이다. 회주는 유준이라는 자였는데, 일반에 알려져 있는 모습은 망가진 삶을 사는 낙방 문인이나, 두뇌와 계략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효웅이었다.
동인회는 그 구성이 특이했다.
갖가지 문학과 예술, 특히 시화에 능한 인재들을 많이 아우르고 있었는데, 문제는 북경 내의 갖가지 이권에 개입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으는 데다가 막강한 고수들을 보유하고 있어 가히 북경의 밤을 지배한다는 점이었다.
유준이라는 사람 자체는 그다지 야심이 없는 인물이었으나, 방회를 너무도 크게 키워버린 것이 그의 실수였다. 정책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북경의 이권을 잠식했으니, 동인회는 회주의 의도와는 별개로 더욱더 팽창해 나갔다. 자체적으로 양성한 무인이 기반을 받쳐가면서 방해가 된다면 살인도 서슴지 않게 되었다.
영락제의 등극.
초반에는 별 문제가 없는 듯 했으나 이내 동인회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북경에 불어 닥친 피바람의 삼분지 일이 동인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동창과 금의위가 처음으로 맞닥뜨린 강적이 동인회……
문인들이 주축이 되었으니 수뇌부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무인들도 동창과 금의위의 연계에 속절없이 쓰러져 갔다. 허나 반 쯤은 손을 놓고 있던 유준이 동인회의 인재들을 규합하고 대항하기 시작하자 사태는 급변했다. 금의위와 동창의 미묘한 자존심 대결을 이용, 정보를 혼란시키고 적재 적소에 작용하는 맥을 끊는 용병술…… 황실의 막대한 자금과 군사력이 없었다면 동인회를 몰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인해전술에 가깝게 몰아 붙이는 황실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회주인 유준은 조금의 여유도 잃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도리어 동창의 은밀함, 금위위의 집요함을 유유히 뿌리치며 대단한 미녀로 알려진 윤 부인까지 대동하고 사라졌다. 무공을 전혀 모른다고 알려진 부인과 함께하면서도 그만한 추격에 잡히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자 동창, 금위위에는 수치였다.
그런 동인회의 자취가 이 시점에 발견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또한 그 전 동인회의 역량을 생각해 볼 때, 동인회가 일을 꾸몄다면. 어제 오늘 벌어진 일도 그다지 대단한 일은 아닐 터였다.
'동인회를 몰아낸 것이 이제 겨우 오년이다. 그 사이, 다시 북경에 들어올 만큼 힘을 키울 수 있었을지.'
비록 회주인 유준이 달아났다지만 동인회 자체는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오년은 짧은 시간이다. 아니, 어쩌면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
괴제갈(怪諸葛) 유준. 제갈무후에 필적한다는 그 지력.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밝혀진 바 조차 없으니.
'동인회가 출현했다. 목적은 무엇일까. 과연 동인회는 맞는가. 이목을 돌리기 위한 함정이라면.'
백무의 머리 속에 온갖 의문이 맴돌았다. 만일 동인회가 돌아온 것이라면. 유준이 다시 북경에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이렇게 쉽게 동인회가 종적을 드러낼 것인가. 문제는 일부러 종적을 드러내는 것도 유준이 즐겨 쓰던 계책이었다는 점이다. 허실을 가늠할 수 없는 책략들.
'차라리. 무당파와 모용세가가 범인이라면 좋겠군. 쯧쯔.'
백무는 혀를 찼다.
"결국은 직접 보는 수 밖에. 무당파. 모용세가 둘 다."
'책략. 책략. 책략. 그래도 상대를 잘못 건드렸어. 무당파. 그리고 모용세가라니.'
동인회가 획책한 일이든. 동인회의 흔적을 내보이며 혼란을 주려는 다른 놈들이건…… 백무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동창의 힘만해도 만만치 않은데, 무당파나 모용세가나 현 무림의 정점에 올라있는 집단이지 않던가.
명경을 비롯한 오인, 제일 객잔으로 출발했다.
조홍은 집에 남았다. 조부인 조인창이 있기 때문이다.
"……"
명경은 수많은 시선을 느꼈다.
탐색의 시선이다. 한 걸음 한 걸음에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너무 많다……'
관병과 금의위만의 감시라 하기엔 너무도 많은 숫자였다. 저녁 시간, 한참 이목이 집중되어 있을 때 다섯 모두가 유유히 움직이니 다들 신경이 곤두설만 하지만 단순히 그러기엔 지나치게 너무 움직임이 많다.
관병과 금의위 외에도 동창이 움직인다. 또한, 뭔가 일을 꾸미는 흉수들도 움직이고 있을 것이고. 게다가 모용 세가의 손발도 적은 수 나마 사태를 주시하고 있으니 숫자가 많을 수 밖에 없기는 했다.
명경은 주변을 둘러 보았다. 물론 눈에 띌 리가 없다. 무당파에서 은신술을 배운 것도 아니니 그렇게 은밀한 움직임은 익숙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명경은 다른 제자들을 돌아 보았다. 다들 뭔가를 느끼는 지 얼굴이 편치 않았다. 엔간해선 항상 떠들고 있는 곽준까지도 조용했다.
일반인들의 시선도 편치 않다. 양쪽에서 슬그머니 관병들이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눈썰미가 조금만 예리한 사람이면 쉽게 알아챌 수 있으리라. 또한 무당 제자들도 일단 긴장하기 시작하자 다섯 명 모두 무인의 기세가 풀려 나왔고, 범상치 않은 기상에 지나가던 사람들도 한 번씩 고개를 돌려 쳐다 보았다.
"참으로 부담스럽군."
결국 곽준이 한 마디 푸념을 내 놓는다.
그러는 사이, 제일 객잔에 도착했다. 명경은 몇몇 시선들이 사라짐을 느꼈다. 보고를 하러 가는 것일 터.
'강호의 일이란 이렇게 돌아가는 것……'
수도인 북경에 도착하면 칠절신금이 벌인 일과 같은 강호의 일은 겪지 못할 줄 알았더니, 이곳에는 그보다 더 치열한 뭔가가 있다. 민초들은 알지 못하고 알더라도 말려들기 싫어하는 일들……
"자네들인가."
명경일행으로서는 놀랍게도 모용세가인 가주가 그들을 맞았다. 흐트러짐 없는 모습. 은은히 미소를 보였지만 눈빛만은 더할 나위 없이 날카롭다.
모용수가 기세를 내뿜는 것도 강해 보였지만, 모용도는 그 존재만으로도 주변을 위압할 수 있는 자였다.
'과연……'
명경과 나머지 넷은 모용도의 손짓에 자리에 앉았다. 주변에 몇몇 무인들이 시립해 있다. 하나 같이 고수였다. 세간에서 말하는 모용십수가 아닌가 싶었다.
모용도의 옆에는 모용청이 앉아 있다. 어제는 손님으로 자리가 꽤 차 있었는데, 넓은 객잔에 손님이 하나도 없으니 모용세가가 손을 쓴 모양이다. 귀족들만을 상대하는 객잔임에도 이렇게 전체를 빌릴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모용세가의 힘이 대단하다는 반증이었다.
"본인이 누군지는 알겠지."
하늘을 찌르는 자부심, 허나 거부감이 들지 않음은 지닌바 위엄 때문일 것이다.
"딸을 구해준 은인의 이름을 듣고 싶군."
모용청의 눈빛이 흔들렸다. 은인을 대하는 태도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명경은 자신을 직시하는 모용도의 시선을 태연히 맞받았다.
'사부님의 아래, 그것도 한참.'
"명경."
명경은 포권하며 한마디 이름을 말했다. 도리어 놀란 것은 곽준을 비롯한 사인이다. 육대 세가의 가주쯤 되는 사람이 이름을 물어왔다면 적어도 출신 내력과 사문을 밝히고, 최대한의 공경을 표하는 것이 강호의 법도다.
모용도의 눈에도 일순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감히……'
모용도는 명경의 청록빛 눈동자를 바라 보았다.
강한 기세를 담았음은 물론이다. 허나 명경의 눈은 고요하다. 어떠한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무인이군. 꺾이지 않는 무인!'
모용도는 명경의 본질을 읽어냈다. 이만한 자라면 어떤 허식도 예의가 아니요, 신분과 외양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느낄 터.
허나, 모용도로서도 몰랐던 것이 있으니, 그것은 명경이 허공진인의 직전 제자라는 점이다. 허공진인은 당금 무당 장문인의 사숙. 배분으로 따진다면 명경의 신분은 무당 장문인과 큰 차이가 없다. 결코 모용도의 아래가 아니었다.
"흠. 젊은이다운 패기! 허나 강호를 살아가는 데 있어 패기만을 내세우는 것은 아니 될 일이지."
모용도를 바라본 명경. 모용도는 분명 강자.
현 시점의 명경으로서는 필패. 허나 너무도 강한 사부 밑에서 자란 명경에게 모용도의 위엄은 그리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문득 모용도의 옆에서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용청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겁에 질린 듯 하면서도 눈동자 가득 호기심을 담고 있었다.
"패기…… 무인을 말해주는 것은 한 자루 검 뿐이오."
"허헛. 이야기를 나눌만한 상대로세."
"……"
"무엇을 원하나?"
명경은 모용도의 얼굴을 보았다. 마른듯한 얼굴. 깨끗하게 기른 수염은 문사를 연상시킨다.
"이 모용도. 딸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대가를 치뤄야지."
냉정하게 들리는 목소리. 명경은 모용청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 울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협, 협에는 대가가 없는 법."
눈먼 검이 여인에게 날아드니, 그것을 막는 것은 협에 기인한 행동. 무슨 대가가 필요하리요.
모용도는 문득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협이라……!'
그저 협에 따른 것이니 아무런 보상이 필요 없다? 상대는 모용세가다. 원하기만 하면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살만한 거금을 선뜻 내줄 수 있는 곳이었다.
협을 논한다?
모용도는 명경을 살폈다. 행여 거짓이 있을까.
다른 네 명의 얼굴도 보았다.
헌데 명경의 한 마디는 모두가 당연하다는 표정이다.
강호에 협객을 자처하는 인물들이 많다지만 이렇게꺼지 '협'이라는 한 글자를 믿는 이들이 있다니.
모용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당금 강호는 '협'을 믿고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치열하다. 비정강호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닌 만큼.
"진실로 그리 생각하는가?"
모용도는 되 물으며 절강 무림을 떠올렸다. 모용세가가 절강성을 휘어 잡으면서 있었던 많은 싸움. 의외로 피를 뿌리는 싸움은 많지 않았다. 금력. 그리고 약간의 힘만 보여주면 알아서 모용세가의 비호 아래로 몸을 던졌다.
협.
목숨을 거는 무인인 드물었다. 모용세가가 정대한 수를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협에 어긋난다 하여 시비를 거는 무인은 찾기 힘들었다. 강호는 힘이 지배하는 세계. 협이란 까마득한 옛날부터 내려오는 환상일 뿐이라 생각했다.
"……"
명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를 못 느꼈다. 눈 앞의 상대는 분명 뛰어난 고수지만 순수하지 않다.
일로매진.
오직 검에 뜻을 둔 명경에게 모용도는 더 이상 대단한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우문이었군. 구파의 어디지?"
모용도가 날카롭게 질문해 왔다.
협.
이 시대에 협을 운운한다면 구파일방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도 이삼년 강호를 굴러 먹으면 더 이상 협이란 말을 입에 올리지 않으리라.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오.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할 뿐."
명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제자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말을 명경이 다 해주었으니 아쉬울 것 없다는 밝은 얼굴들이다.
"이대로 가려는가?"
"답례라면 사람을 배운 것으로 받았으니."
명경은 정중히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허허. 사람을 배운다라."
모용도는 공허하게 웃었다. 모용청이 옆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문으로 막 나가는 명경 일행을 쫓아갔다.
모용도는 잡지 않았다. 앞의 명경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 말은 하는 아이였으니.
"들어가거라."
함부로 행동해서 죄송하다 말하는 딸에게 올라가라 이야기 한 모용도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천장에는 하나 가득, 화려한 무늬가 수 놓아져 있다.
"무당파……!"
역시 구파일방은 무섭다.
협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내세우는 정기(正氣).
모용도는 오래 전, 허공진인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허공노사님. 그 높은 위명, 직접 뵙게 되다니."
"이름이 뭐에 중요한가, 어찌 사는가가 중요하지."
"자넨 야심이 많은 인물이군. 그것도 좋지. 사람을 배우기에는."
기억에 남는 말들이다.
허공진인의 제자라면 그 오연한 자세,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보기 힘든 인재다.
하지만.
모용도는 무당파의 규모를 잘 알고 있다. 한 손으로 열 손을 당해낼 수는 없는 일. 거리가 있으니 부딪칠 일도 없을 테지만 적어도 무당파와 싸움이 붙는다면 모용세가가 크게 밀리지는 않는다.
무공의 끝을 알 수 없는 허공진인이라 해도 나이가 들었다. 게다가 도인이다보니 세상의 일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 허상 진인도 마찬가지이다. 민초들의 신망이 하늘에 이르더라도 그것을 쓰지 않는다.
비록 젊은 인재들이 놀랍다지만 그것도 한 때. 산으로 들어가면 몇 년씩 나오지 않을 도사들이었다. 모용도는 감탄을 묻어 두기로 했다.
'다시 볼 일은 드물겠지.'
다른 육대세가의 자제들이라면 신경이 곤두설 일이지만 '협' 하나에 매달리는 단순한 도사, 그것도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무당파의 도사임에야.
모용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위로 올라가려 했다. 허나, 모용도가 객잔의 식당을 통째로 빌린 자리, 한 명의 손님을 더 맞게 되었다.
"모용세가의 가주를 뵙습니다."
검은 옷. 가슴에는 범의 무늬가 수 놓여져 있다. 눈에 띄는 기상을 지닌 이 삼십 대로 보이는 무인이 들어서자 곳곳에 서 있던 무인들이 경계 태세를 취했다.
"동창의 인물이 예까지 웬일인가."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그저 요 며칠 일어나는 일 때문에 말이지요. 그건 그렇고, 제일객잔이면 알아주는 곳인데, 여길 이렇게 빌리다니 대체 무슨 일을 하면 그 정도 금력을 쌓을 수 있는 것입니까?"
백무는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다가왔다.
"자리도 권해주시지 않는 겁니까?"
"아무데나 앉게나. 어디든 비어 있으니."
"대접이 박하시군요. 만나본 젊은이들은 어떘습니까."
백무는 빙글빙글 웃었다. 허나 자리엔 앉지 않았다. 용건이 짧으니.
"쓸데없는 것을 묻는군. 동창까지 나서다니. 이번 일이 크긴 큰가 보네."
"크지요. 게다가 오래된 망령까지 나타나서."
"망령?"
모용도의 눈이 반짝였다.
"그저 그런 것이 있습니다. 관병들이 귀찮게 하더라도 너무 괘념치 말고 협조나 해주십시오. 워낙에 푸른 옷의 무인들이 강렬해서 말입니다."
백무는 자기 할 이야기는 다 했다는 듯. 돌아서서 나가려고 했다.
"자네."
나직한 모용도의 목소리. 백무는 걸음을 멈추었다.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야. 제 아무리 여기가 절강성이 아니라지만."
모용세가가 구파일방을 건드리려면 건드리면 엄청난 손해를 각오해야 한다. 허나 동창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제아무리 황실의 직속이라지만 총력을 기울인다면 동창의 이름 정도는 강호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것이 모용세가의 힘이었다.
"잘 알아두기로 하지요."
백무는 태연히 답하며 걸어나갔다.
"모용세가는 아니야. 가주인 모용도는 뭔가를 알고 있어. 그러나 약간의 실마리를 잡은 것에 지나지 않은 듯 해. 이제 나는 무당파를 견식하러 가겠다."
백무는 성큼성큼 걸으며 어느 새 옆에 따라붙은 수하에게 말했다. 어두운 골목들.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거리를 빠르게 가로질러 나갔다.
'모용세가의 가주라더니, 명불허전이군.'
동창의 부대장으로 있으면서 황제 곁에 있는 고수들을 만나 보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태연한 척 연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나 모용도의 마지막 한마디는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 정도로 위압감이 있었다.
"더 하명하실 것은……?"
수하가 뒤를 따르며 말했다.
"정조장에게 전해. 모용세가 쪽 인원을 반으로 줄이고, 동인회의 꼬리를 잡는 쪽에 증원 하라고."
"옛."
* * *
"하고 싶은 말, 다 해 주시긴 했는데…… 정작, 물어볼 걸 못 물어 보았네요."
"……"
웃으면서 하는 곽준의 말에 명경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화술이 미숙해서인지…… 석조경이나 곽준이었다면 할말 다 하면서도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었으리라.
"어쩌겠습니까. 그나저나 내일 비무 상대가 걱정이군요. 또 나타나지 않으면……"
"그 정도까지 치밀할까."
"아무래도. 또 그런 수작을 부린다면 오늘 밤이겠죠. 적어도 아까 비무장에서 나타나지 않은 사람은 우리들 상대 뿐이었으니……"
"쳇, 오늘도 진무칠권을 써 먹어 봤어야 했는데."
"의외로 쓸만 하죠."
모처럼 모두의 얼굴이 밝아졌다.
"……"
"대체 노리는 것이 뭘까."
"단순한 것은 아닐 겁니다."
"설마하니…… 비무 대회 우승을 노리고 그러지는 않겠죠."
단리림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석조경이 '아!' 하고 탄성을 냈다.
"비무 대회 우승! 그걸 생각 못했네!"
"……? 그게 뭐 별거라고……"
"그건 아니죠. 우리 입장에서야 대단치 않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그렇게 죽여가면서까지 우승할만한 가치가 있나?"
"그건 모르죠. 하지만 분명 우승을 염두에 두었을 겁니다. 최종 목적이 뭐든지 간에."
"음…… 그러고 보니…… 흉수들이 해친 건 우리 상대. 그리고 모용세가의 상대지……"
"어쩌면 우리 정체를 알고 시작한 일일수도 있어요.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겁니다."
"확실히 이대로라면 우리 중에서 우승자가 나오는 것은 무리겠지. 그러나 그들도 잘 모르는 것이 있군. 어차피 우린 이틀 후에 전부 기권하잖아. 북방으로 가기 위해."
"그렇기는 하군요. 하지만 기권하지 않아도 이대로 계속 된다면 살인 사건의 조사를 위해서라도 우리가 우승을 차지하는 것은 어려워요. 관병들한테 조사를 받으러 잡혀갈 수도 있고요. 그건 저 모용가의 소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문제의 본질은 대체 왜 이 무술 대회를 골랐냐는 거군. 정치적인 의미가 큰 것도 아닌 그저 그런 무술 대회일 뿐일텐데…… 하지만 조 공자의 조부께선 황실 전복이 목적일 것이라 하셨다. 그런 큰 일을 일으킬만한 것일까. 이 무술대회는."
"암살."
갑자기 명경이 한 마디 했다.
모두 명경을 쳐다 보았다. 갑자기 시선이 집중되자 불편해 보였으나, 명경은 천천히 마저 입을 열었다.
"이 상처를 입힌 자. 상당한 고수. 근거리라면 황제도 무사하지 않겠지."
"근거리……"
"수상을 황제가 직접 한다고 들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명경이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두들 어리둥절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분명히……"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고수들의 벽, 그들 앞에서 살기를 감추고 암살이 가능할까……"
"마음만 먹는다면 못 할 것도 없겠지."
명경이 그렇게 말하며 눈을 반짝였다.
문득 곽준을 비롯한 사형제들은 섬찟함을 느꼈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명경 자신이 그러한 암살을 시도한다면 가능해 뵈기도 했기 떄문이다.
"그렇다고 하면 꽤나 윤곽이 잡히는 군. 흉수는 황제를 암살하고 싶어하는데, 워낙에 방어가 두텁다. 접근조차 불가능하다. 그 중 드물게 있는 기회. 어떻게든 우승을 해야 하는데 출전자들은 보니 쉽지 않겠다…… 살인 사건을 벌여 주의를 끌면서도, 방해가 되는 참가자들을 궁지로 몬다. 금위위나 관병들은 혼란에 빠지고 무술대회 자체도 허술해진다. 허술해진다? 오히려 경계가 강화되지 않을까? 어찌 되었든 그 사이에 우승을 차지하고 암살까지 간다. 그럴 듯 한데……"
"사형 말이 더 허술합니다."
석조경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대강 아귀가 맞거든요. 이 삼일 사이에 어느 정도 판명이 나겠죠. 과연 그런 것인가."
"그럼 누가 그 암살자인가가 관건이군…… 살인을 저지른 것도 한 편일 거고."
* * *
명경은 조홍의 집에 돌아와 방에 들어왔다. 명상을 하며 심법을 연마하려 했지만 집중이 되지 않아 다시 밖으로 나왔다.
"후읍."
한 모금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밤의 공기는 음(陰)이다. 음기가 몸을 타고 돌자 정신이 맑아지고 긴장이 풀렸다.
모용도를 떠올렸다.
자신보다 강한 고수.
무당산 밖에서 분명한 실력차이를 느낄 수 있는 고수를 본 것은 처음이라 느낌이 묘했다. 하지만 절강성의 패자이며 강호에서 손꼽히는 초절정고수를 보았음에도 넘지 못할 벽이라는 생각은 들지는 않았다.
'그릇이 다르다.'
사부님인 허공 진인과 모용도는 그야말로 그릇이 달랐다.
사부님의 그림자가 너무도 크다. 허공진인은 무신(武神)이다. 조화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과연 내 그릇은 어느 정도인가.'
사부님을 따라가기엔 너무도 멀지만 모용도보다 타고난 그릇이 작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텅!
진각. 진무 칠권을 펼쳐 보았다. 일초부터 칠초까지 한 순간에.
간단한 초식인만큼 순식간에 다 펼쳐 볼 수 있다.
손을 들었다.
손 안에 검이 쥐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태극혜검의 일초를 뻗어내었다. 전보다 훨씬 날카로워진 느낌이 들었다. 비록 수준이 높지는 않은 비무들이었으나, 이틀 동안 여러 가지 무공을 견식하다 보니 초식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느낌이었다.
특히 원공권과 유아검에서는 많은 것을 배웠다. 완성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끝까지 연마한다면 두 가지 모두 일절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무공들이다. 아까의 대화를 떠올렸다.
'어쩌면 둘 중 하나가 암살자일 수도 있겠군.'
잡념이 들자 검로가 흐트러졌다.
갑작스럽게 모용도의 옆에 있던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큰 눈이 인상적인 얼굴. 아직 균형이 잡혀있지 않은 느낌. 감사하다고 수줍게 말하고 돌아선 소녀다. 어딘지 외로워 보였던 모습이도 했다.
'……'
명경은 자신의 생각에 놀라 고개를 저었다.
산에서 내려와 많은 것을 보니, 그 만큼 의념이 흐트러지고 부동심이 깨졌다. 아무런 잡념 없이 무공만을 익히던 때를 떠올렸다.
순간!
"누구냐!"
명경이 뒤를 돌며 위를 향해 외쳤다.
"이런 이런…… 들켜 버렸군."
지붕 위, 수석(지붕 위에 만든 동물장식.)의 그림자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검은 옷. 백무였다.
"뭐, 나쁜 뜻이 있어 찾아온 것은 아니니까……"
훌쩍 지붕에서 뛰어내린 백무. 높이가 상당한데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날카로운 안목. 무당파는 과연 다르군."
"……"
명경의 얼굴엔 동요가 없다. 무당파임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 놀랍기는 하지만 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자. 상당한 고수다. 일단 고수를 눈 앞에 두자 흐트러졌던 마음도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무당파를 언급하고 나섰음에도 명경이 놀라지 않자 내심 당황한 백무, 이내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별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얼굴이 아니시네…… 뭐, 이쪽의 소개부터 드려야겠지."
"……"
"본인은 동창에서 나왔고…… 동창, 알고 있으시겠지?"
"이름은 들어보았다."
백무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이름은 들어보았다?
'별로 신경 쓸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인가? 이거 재미있군.'
"그런가…… 물어볼 것이 좀 있네만……"
"……"
"참 말이 없으시군. 어제, 제일객잔. 살인자의 검술이 어떤 것인지 아시는가?"
"……"
명경이 그게 무슨 검술인지 어찌 알겠는가.
혀공진인의 가르침…… 자신이 가르쳐 주는 것만 익히면 천하에 상대 못할 무공이 없다는 식이다. 다른 잡다한 무공들은 거의 가르쳐 준 바가 없었다.
"흠…… 그냥 한 번 흉내라도 내 주실 수 있겠나……?"
"혹시 당신네들이 저지른 짓인가? 이번 일?"
"그럴 리가 있겠나? 우린 그들을 잡으려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뿐이네."
"……"
명경은 상대의 말을 믿기 힘들었다. 백무에게 당신들이 한 짓이냐고 물은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의심받고 있는 거군. 이 동창이 말이야."
"……"
"검은 여기에 있네."
백무는 검을 던져 주었다. 적의가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명경은 검을 뽑았다.
"좋은 검."
명경은 검날을 보고 한 마디 칭찬하곤 한 순간에 앞으로 검을 찔러냈다.
"이것으로 무명검을 죽였고."
그리고 짧게 도약하며 검을 쳐냈다.
"이것이 여기에 상처를 입혔지."
명경은 자신의 어깨를 가리켰다.
"그, 그것이…… 그대로인가?"
"비슷할 거다. 인상이 강했으니까."
백무는 크게 충격을 받은 얼굴이다.
"그 신법도…… 놈이 그렇게 움직인 것이 맞나?"
명경은 뒤로 물러나면서 한번 위로 뛰어올랐다.
"내가 왜 당신을 의심하는지 알겠지?"
"음……!"
명경이 보여준 몸놀림은 백무가 방금 지붕에서 뛰어 내릴 때의 움직임과 묘하게 닮았다.
"그런가…… 이 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약하군. 이번 사건엔 자네들 무당파 뿐 아니라 금위위, 모용세가, 동인회라는 방파, 그리고 우리들 동창까지 얽혀 든 경우…… 참으로 난마처럼 얽힌 상태다. 그러니……"
명경은 손을 들어 백무의 말을 끊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들과 상의하시지."
백무는 명경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어느 새 곽준과 석조경이 건물 벽에 기대어 쳐다보고 있었다.
'기척이 없었는데……!'
명경 때문에 당황했다지만 이들은 더욱 그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의 이목을 속이고 나타나 있을 정도라면 이들은 그의 생각을 훨씬 웃도는 고수라는 뜻이다.
"흠. 그럼……"
곽준과 석조경은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백무의 이야기를 들었다. 백무는 먼저 금위위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것과 동인회의 내력을 간략히 이야기 하고, 일단은 동인회 측에 혐의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동인회라…… 이 사람 말대로라면 틀림 없이 이만한 일을 벌일 만도 하군요."
석조경은 동인회라는 집단에 강한 흥미를 보였다. 아니, 그보다 귀계에 달인이라는 유준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그 밖에는 어떤 단서도 못 잡았소?"
곽준이 물었다.
"그렇긴 했는데…… 오늘, 한 가지가 더 생겨난 지라……"
"……?"
"후우…… 무명검을 습격한 이의 신법과 검술이…… 우리…… 동창의 그것과 유사해서……"
"……!"
백무는 한숨을 내 쉬었다. 이렇게 사건이 얽히고 막히는 것은 그야말로 오래 전, 동인회와의 싸움 이후 처음이다.
백무는 담을 넘어 황실로 돌아 오면서 괜한 짓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만의 하나 무당파가 이 일의 주모자라도 된다면……
'그럴리야 없겠지. 문제는……'
문제는 명경이 재현한 검술과 신법이 동창의 창위가 배우는 무공이란 것에 있었다. 그 몸놀림, 틀림없는 포접행(抱蝶行)이다. 거기다 검격은 똑같지는 않지만 창천십오검의 수법이다. 어느 정도 틀린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동창의 무공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황궁에 도달하자 수하가 따라붙었다.
"문제가 생겼다."
백무는 말을 하려다 그만 두었다. 수하조차 함부로 믿어선 안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문득, 이것조차도 계략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 흉내야 누구든 낼 수 있겠지.'
명경이 쉽게 재현해 낸 것처럼 본 적이 있는 자라면 웬만한 수준까지는 비슷하게 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창의 무공은 상당히 특색이 있으니까.
이런 상황이라면 도대체 피아를 구분할 수 없다. 금의위보다는 통제가 잘 되어 있는 동창이라지만 딴 마음을 품은 창위가 나오지 말란 법이 있을까. 게다가 죽은 사람들은 암살에 당했다. 암살은 동창의 특기지 않던가.
결국 두 가지다.
무명검을 죽인 것이 진짜 동창의 창위던가, 그렇지 않던가.
동창의 창위면 문제다. 당장 수하에게도 알리기 곤란하다. 일단 동창도 얽혀 들었다면 하나 둘이 아니겠지. 백무는 순식간에 생각을 정리하고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무당파와 접촉하지 못했다. 뭔가 단서를 얻을 수 있을 줄로 알았는데."
"예, 그렇습니까. 그럼 다음 지시는……"
"일단 대기하고 있어."
문득 스쳐가는 생각.
'이상하다. 내가 암살자라면 내가 쓰는 무공을 본 인간들을 살려두려고 할까. 단서를 잡으려고 할 터인데? 그리고 금의위는 무슨 생각이지? 암살자의 무공, 그런 것도 파악해 두지 않았나?'
그러나 백무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금의위는 이미 암살자가 쓰는 무공이 무엇이었는지 명경에게 이미 다그쳐 물었던 것을.
그러나 명경은 경황 중이라 모르겠다고 말하고 넘어가 버렸었다. 결국 명경은 백무에게만 자신이 본 걸 가르쳐 준 것이다. 그것은 명경이 백무를 믿을 만 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백무는 떠오른 생각에 뒤를 돌아 보았다.
저기 멀리 어딘가에 조홍의 저택이 있다. 증거 인멸을 위해 명경을 습격하는 것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 그리고 그의 능력이라면.'
백무는 다시 가던 길을 재촉했다. 무당파 제자들이라면 어떤 습격이라도 문제가 없을 터였다.
'내가 암살자라면 명경을 암살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눈에 띄였으니 단서를 없애야 한겠지…… 하지만……'
백무는 더 파고 들었다.
'내가 동창의 창위이면서 암살자라고 가정하자. 금의위인 도일명을 암살하려 했는데 누군가가 그 장면을 보았다면…… 반드시 목격자를 제거하려고 할 것이다. 동창 무공엔 누구나 알아볼만한 독특한 면이 있으니 쉽게 정체가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경은 아직 습격을 받지 않았다. 모용세가도 마찬가지다.'
모용청은 몰라도 명경정도 무인이라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방금처럼 암살자의 무예를 흉내내 보여줄 수 있다. 정체가 탄로나기 쉽상인 것이다.
'내가 동창의 흉내를 낸 다른 곳의 암살자라면…… 명경을 암살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암살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동창의 창위가 범인일 수 있다는 정보가 흘러 나오니까. 지금 명경에게서처럼.'
명경을 암살하지 않는다는 것은 동창의 창위가 아니라는 말과도 같다.
'하지만, 동창의 창위인데도 실력이 모자라서 습격을 못한 것일 수도 있지……'
오히려 이쪽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머리를 좀 쓰는 사람이라면. 동인회 회주 쯤, 된다면 과연 그렇게 간단하게는 안 하겠지.'
어느 새, 집무실에 돌아 온 백무. 다시금 사색에 빠져들었다.
'이대로 무당 제자들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넘어간다면 동창일 가능성이 별로 없다. 알려져도 그만이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지만 그것을 노리고 동창의 배신자가 일부로 무당파를 습격하지 않고 있다면? 아이고, 이거야 이러면 저렇고 저러면 이렇고 끝이 없구나……!'
유준.
동인회의 유준.
'놈이 관련 된 일일수도 있다는 것이 이렇게 까지나 부담을 준다니.'
유준이라면 어느 쪽이든 계략으로 쓸 수 있다.
동창이면서 무당파를 습격하지 않는 것.
동창이 아니면서 무당파를 습격하는 것.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동창의 창위가 범인이라 가정할 때, 무당파에 암살 시도를 해야 옳다. 동창의 창위가 아니고 혼돈을 주기 휘한 것이라면 무당파 인물을 암살해서는 안 된다.'
역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결국 문제인 것이다.
쾅!
백무는 책상을 내리쳤다.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곽준을 비롯한 무당파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흉수는 무술 대회의 시상식을 노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능성이 충분하다. 동인회든 다른 정적이든, 이렇게 까지 관부가 말려든다는 것은 궁극적인 목표가 황제임에 틀림 없다.
'무당파, 명경이라고 했던가.'
암살 시도가 있다면 오늘.
'암살 시도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일부러 실패한다면 틀림없이 흉수는 동창을 흉내내고 있는 것!'
결국은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오늘 밤이 지나기를.
백무가 돌아간 후, 명경은 진무칠권을 더 펼쳐 보았다.
'이대로는 부족해……'
진무칠권은 일종의 강권이다.
물러섬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몰아칠 때, 그 위력이 제대로 나온다.
문제는 명경이 연마한 무당의 무공이 '강'을 위주로 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동창의 검술을 떠올렸다.
빠름과 강함, 그리고 은밀함을 갖춘 무공이다.
진무 칠권에 접목할 곳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본 것이 너무 적다. 단 두 수. 두 번의 검격을 보았을 뿐이니 응용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권법 보다는 검술에 더 조예가 깊었다.
그때.
"급조한 무공치고는 잘 만들었어."
저음의 목소리.
명경은 이번처럼 놀란 일이 없었다.
'어느 새……'
명경의 뒷 쪽. 거리는 기껏해야 삼 장.
이만큼 가까이 접근할 때 까지 몰랐다는 것은 진실로 무서운 일이다.
"……!"
"놀랐나?"
명경은 달빛에 비치는 상대를 노려 보았다.
'강하다! 터무니 없이 강한 고수……!'
하얀 옷에 금색으로 수 놓아진 무늬들. 윗머리를 길게 길러 넘긴 그 남자는 달빛을 받으며 팔짱을 끼고 있었다.
신비롭기 그지없는 분위기였다.
한 쪽 귀에 진홍빛 귀걸이를 했다.
귀걸이는 남자들이 거의 하지 않는 장신구…… 눈에 띌 수 밖에 없었다.
이십대 후반이나 되었을까. 짙은 눈썹과 권태로운 듯한 눈빛이 인상적이다.
문제는 외모가 아니었다.
느껴지는 힘! 믿을 수 없이 강렬했다.
'어쩌면……'
명경이 알고 있는 가장 강한 고수는 허공진인이다. 무당파 내에서 들은 말로도 허공진인에게 대적할 이는 강호에 다섯을 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눈 앞에 있는 이 남자는 허공진인, 사부보다도 강할 것 같다.
젊어 보임에도.
"허공이 잘 키웠군."
명경은 눈을 치떴다.
사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 화가 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발끈함과 동시에 경각심도 든다. 일대 거인인 허공진인의 이름을 거침없이 부른다는 것은 그만한 자신감이 있어서일 터.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말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강한 기도다. 게다가 자신을 잘 안다는 말투지 않은가.
"당신은……?"
"기억하지 못한다라…… 흑암(黑暗)은 어찌 되었지?"
"흑…… 암?"
"아직인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백무와는 다르다. 나오는 대로 말을 뱉을 만한 상대가 아니다. 저절로 존대어가 나왔다.
"이런. 허공이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나?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건가?"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는 상대, 명경은 답답했으나 경거망동 할 수 없었다.
"다른 것은 아니고, 줄 것이 있어서 왔다."
"……?"
상대가 팔짱을 풀었다. 한 쪽 손에 두 권의 책이 들려있다. 처음부터 들고 온 것 같았다.
"받아라."
책 두 권이 날아왔다. 천천히.
명경은 섬찟함을 느꼈다. 책이 날아오는 모습.
염력.
전설에 나오는 격공섭물. 내공으로 손 안 대고 물건을 옮긴다는 것. 상단전을 연 사람이라면 훈련에 따라 염력을 사용할 수 있다.
책이 명경의 가슴 어림에서 멈추었다.
공중에 뜬 책.
눈 앞의 남자는 이 한 수로 자신의 능력을 보였다.
책을 받아 들었다.
연경심법. 그리고 혼원봉이라고 써 있는 비급.
깨끗한 비급이다. 고서로 보이지는 않았다.
명경이 의아한 눈빛으로 상대를 보았다.
이것들을 주는 이유가 무엇인지.
"내 이름은 진천이다."
진천이라 이름을 밝힌 상대는 한 손을 들어 서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무슨 짓인가 바라보던 명경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우직!
나뭇가지 하나가 부러지고 천천히 날아와 진천의 손에 잡혔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다.
진천이라고 이름을 밝힌 사내와 나무와의 거리는 오 장이 넘었다.
그저 가르키는 것만으로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손으로 끌어온다.
대단한 염력이다.
상단전을 자유 자재로 사용한다는 증거였다.
"한 번만 보여주마. 잘 보고 기억해라."
진천은 나뭇가지를 손으로 한 번 훑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 울퉁불퉁했던 나뭇가지가 제법 곧은 형태의 목봉(木棒)이 되었다.
슛!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목봉이 움직였다.
봉끝은 하늘을 가리키다 어느 새 땅을 향했다.
펼쳐지는 몸짓이 융통무애하여 모자람도 넘침도 없다.
유연함 속에 강맹한 기운이 녹아있어 봉과 사람, 그리고 하늘 아래 딛고 있는 땅이 혼원일체를 이루고 있었다.
한 초 한 초 더해지면서 더욱 그 기세는 거세지고 파도와 같던 경력은 해일이 되어 몰아쳤다. 내력을 실어내지 않고 펼침에도 주변을 압도했다.
명경은 완벽한 무공을 보았다.
사부인 허공진인이 펼치는 것과 같은, 아니 그 이상의 완전 무결한 무공.
한참 동안 꿈속에 빠진 듯, 끝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정도의 무도(武道).
마지막 일초가 끝났음에도 명경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이것이 혼원봉(混源棒)이다."
진천이 입을 열었다.
명경은 진천의 시선이 자기만을 향해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를 보니 명경과 진천의 대화를 듣고 나온 모양인 듯, 곽준을 비롯한 네 명이 서 있었는데, 모두가 방금 본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연경심법은 내공 구결이다. 자네들이야 굳이 필요 없겠지만 요긴하게 쓸 데가 있을 것이고……"
진천이 돌아섰다. 슬쩍 발을 밟는다 싶더니 어느 새 지붕 위에 올라섰다. 귀신도 혀를 내두를 신법이다.
"잠깐! 이유 없이 이런 것들을 받을 수는 없소."
명경이 말했다.
"물건을 맡아 준 보답이라 해 두지. 때가 되면 알게 될 터……"
윤곽이 가는 얼굴.
붉은 색 귀걸이가 요요롭게 빛났다. 명경은 문득 이 남자의 나이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운을."
진천의 몸이 일순 희미해 지는 듯 하더니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그야말로 귀신에 홀린 느낌.
한 바탕 꿈이라도 꾼 듯, 하지만 명경의 손에 들린 책은 진짜였다.
* * *
"이거…… 대단한 절학들인데요."
책을 훑어본 모두들은 혀를 내 둘렀다. 상승의 절학들이다. 게다가 그 진실한 모습, 아까 분명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이만한 것들을 왜 준 것일까. 평생동안 연마해야 깨달을 만한 절기를."
이들 중 누구도 봉법을 익힌 이가 없다.
원래 무당파에서는 봉법을 수련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절정 수준의 상승 무공, 자세하게 설명된 비급, 그리고 그 진수를 눈으로 체험했다면 굳이 배운 병기가 아니라도 자신이 가진 무공을 한단계 상승시킬 수 있다.
굴러들어 온 복에 다름 아니다. 특히 무인의 입장에서는.
왜 이런 호의를 보였을까에는 해답이 없다.
진천.
완성의 경지에 이른 무공. 하지만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명경이 보기에 진천은 허공진인의 아래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존재 자체를 이해할 수 없는 남자였다.
"대체 정체가 뭐지?"
곽준의 짜증난 음성에는 대답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동창…… 인가?"
그나마 이 시점에서 우호적인 곳은 동창 하나다. 허나, 백무가 진천과 같은 인물을 보낼만할 역량은 되지않는다. 보여준 봉술 하나만으로도 한 지역을 재패할 문파를 세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황궁 권력의 핵심이라지만 그만한 인물이 동창에 있을까.
"무작정 밖에 나가 돌아다녀 볼 수도 없고."
석조경의 눈이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백가지 병법이 머리 속에 있어도 풀어낼 방법을 모르니 답답할 수 밖에.
강호에 대한 경험이 너무도 적기 때문이다.
커다란 문제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것이 주위에서 움직이고 있는데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나마 무당파라는 것을 밝힐 수만 있다면, 개방이나 다른 곳에 도움이라도 청해 볼 터인데, 문제는 개방과 같은 문파에 접촉하는 방법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이상하다.'
명경은 답답해 하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어째서 무당파가 제자들을 강호에 대해 이렇게 무지한 채로 나오게 만들었는지, 의문이 든 것이다. 고도의 무공과 학문을 배웠지만, 정작 필요한 소소한 묘책들을 가르침 받지 못했다.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무당산의 어른들은 모두 강호를 오랫동안 누비던 사람들이니.
무당파임을 밝히지 말라는 것. 이런 상황에서는 최악의 금제다. 두 손 두 발이 다 묶인 채 비무대 위로 던져진 것과 같다.
"이래서야, 무슨 말을 해도 탁상공론이니…… 그만 잠이나 자자."
결국 참지 못한 곽준이 지리한 대화를 끝냈다. 대화라고 해 보았자, 주로 석조경과 곽준의 이야기 뿐. 결국 모두가 흩어져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악도군이 들어가기 직전 한마디 물었다.
"모르는 사람입니까?"
명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숙을 아는 눈치던데."
"그게 마음에 걸린다. 어찌 나를 알까."
"문제군요. 오리무중이니."
악도군의 표정에 불쾌감이 덮였다. 악도군의 성격은 직선적이고, 시원시원하다. 어중간 하게 끈끈한 것을 매우 싫어한다. 이렇게 얽히고 설켜 답답함만 늘어가니, 그의 성격에 어지간히 기분이 나쁠 것이다.
자러 들어가는 순간까지 표정이 안 좋아 보였다.
명경은 어찌해야 할지 하늘을 올려 보았다. 무당산에 있을 때, 답답한 것은 오직 무공에 관한 것, 사부님께 물어보면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을 주셨다.
이곳은 무당산이 아니다. 모용도에게 이곳이 절강성이 아닌 것처럼, 명경에게도 이곳은 낯설고 알 수 없는 곳이었다.
제4장
<백무(白霧).
동창(東倉) 흑호대(黑虎隊) 대장(隊長).
절정고수(絶頂高手). 대(對) 동인회전(東人會戰) 혁혁한 전공.
북풍단주(北風團主)와 친분. 황실 내 북풍단 암중지원 추측.
정보수집. 대(對) 황실(皇室) 반란세력(反亂世力) 탐색(探索), 무력진압(武力鎭壓).
대무림정책(對武林政策) 핵심인물(核心人物).
……(중략)……
심화량(深華凉)
동창(東倉) 흑화대(黑花隊) 대장(隊長).
무공불확실. 지략가. 대(對) 동인회전(東人會戰) 혁혁한 전공.
북풍단주와 친분.
흑호대(黑虎隊), 흑살대(黑殺隊) 암중지원(暗中支援). 대무림정책(對武林政策) 핵심인물.
……(중략)……
반나한(盤羅漢)
십보단혼객(十步斷魂客). 동창(東倉) 흑살대(黑殺隊) 대장.
초절정고수(超絶頂高手). 황실(皇室) 삼대(三大) 고수(高手) 일인(一人).
천룡회(天龍會) 우호법(右護法) 오극헌(吳極軒)에 백룡권(白龍拳) 사사(師事).
대(對) 황실 반란세력 무력진압, 위험분자 암살(暗殺) 핵심인물.
한백무림서 인물편, 제십칠장 동창편.>
백무가 무공의 달인으로 동창에서 실질적인 행동에 가담한다면, 심화량은 정보를 수집하고 해석하는 데에 핵심인 인물이다.
"겨우 되었군……"
심화량은 수하에게 몇 장의 자료를 넘겼다. 하룻밤을 꼬박 새워 뽑아낸 자료였다.
자료에는 몇몇 강호의 인물들 외에도 북경 외곽에 위치한 다섯 개의 장원, 그리고 두개의 객잔에 대한 정보가 들어있었다.
정보.
동창의 힘은 구 할이 정보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실의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고관 대작들부터 일개 상인들까지 뿌리 깊게 내려있는 정보력이 있다. 그 말은 즉, 북경 내에서는 놓치는 사건들이 거의 없다는 뜻이었다.
별 일 없이 흘러가는 듯한 수많은 정보들 사이에서 필요한 것을 골라내고 활용하는 것이 동창 흑화대의 임무다. 바로 그 흑화대의 대장을 맡고 있는 이가 심화량이었다.
심화량이 일어섰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서들이 진열된 거대한 장서각이 흑화대의 일터이자 숙소……
그 한 가운데의 탁자에는 거대한 중원 전도와 세세한 북경의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심화량이 지도로 다가서자 세 명의 수하가 그의 곁에 섰다.
"이 일대……"
심화량이 북경의 북동쪽 한 구역을 가리켰다.
"조그만 방파가 이권을 잡고 있던 곳이다."
"이룡회. 알려진 인원은 열한 명, 고수라 불릴만한 이는 없습니다."
한 수하가 대답했다.
"두 달 전, 그들 중 두 명이 사라졌다."
조그만한 방파에서 두 명이 사라지든 세 명이 사라지든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아무렇게나 굴러먹고 사는 이들이니, 어디서 무슨 짓을 하여 없어져도 대단한 사건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심화량은 이유 없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알려진 바로는 어떤 싸움도 없었고, 변한 것도 없다. 예전과 똑같은 이문을 취하고 있고, 무슨 일을 벌일 기미도 없다. 그런데…… 그 지역의 장원 한 채와 객잔 두 개의 소유주가 바뀌었다."
"비슷하군요."
"그래. 동인회와 비슷하지."
심화량의 곁에 선 세 명의 수하들. 동인회와의 싸움 뿐 아니라, 수 많은 사건들을 겪고, 엄청난 분량의 정보를 관리해 온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한 명의 수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동인회…… 유준이라면 한 번 밝혀진 수를 쓰지는 않을 텐데요."
"맞다. 동인회와 비슷하지만 동인회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어."
"그럼 나머지 네 개의 장원이 문제군요."
"잘못 짚은 것일 수도 있지. 하지만 조사는 모두 해 봐야 해."
"먼저 흑호대 대장께 보고 드리겠습니다."
흑호대 대장이라면 백무, 동창의 일은 이렇 듯 심화량이 추려낸 정보를 통해 백무가 실제적인 행동을 하는 구조였다.
"그리고…… 자네는 이 인물들을 추적해.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두."
심화량은 한 장의 명부를 건냈다. 그것을 받아 든 수하는 적힌 이름들을 읽어 보고는 얼굴을 굳혔다.
"이 사람들은……!"
"그래. 근래 일 년 사이에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고수들이다. 적어도 세 네 명은 북경에 들어와 있을 거야."
"멸절신장…… 기천일검…… 설마 이런 거물들이……"
"그 둘이 가장 가능성이 높아. 유준이 재기를 계획했다면, 그만한 준비 없이는 나서지 않을 거다."
"예, 그럼."
그 수하는 장서각 한 쪽에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흑화대 대원들 사이로 들어갔다. 일단 정보들을 검토해야 하는 사안이다. 검토가 끝나고 대략의 목표들의 소재가 밝혀지면, 이 역시 흑호대에 기별이 가리라.
"상대는……"
심화량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동인회 하나가 아니야. 어쩌면 동인회는 처음부터 관계가 없는 지도 모르지. 동인회 말고 하나가 더 있어."
심화량이 손을 들어 지도의 한 곳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 마지막 수하는 얼굴을 굳혔다.
"그곳은……!"
"조사해."
단호히 말하는 심화량 역시 침중한 얼굴이었다.
* * *
한편, 밤이 깊었음에도 활발하게 동창이 움직이고 있던 그 시각, 한 객잔에 묵고 있던 원공권 원태에게도 방문객이 있었다.
'내일이면 진무권을 견식하게 되는 것이렷다……'
그의 상대로 예정된 것은 다름아닌 명경이었다.
원태는 알았다. 제 실력을 드러내지 않는 명경. 실로 어려운 상대가 되리라.
"후우……"
원태는 숨을 뿜어내며 기혈을 안정시켰다.
늦은 시간까지 운기와 가벼운 연공으로 몸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였다.
"누구냐!"
살기를 감지한 그가 먼저 벌떡 일어나 방문을 노려 보았다.
일 순간, 하나의 얇은 공간이 방문에서 나타났다. 이어 날카로운 기운이 뻗어온다.
방문 채로 베어내며 검공이 짓쳐든 것이다.
대비하고 있던 그가 옆으로 피해냈을 때, 숨 돌릴 틈도 없이 두 번째 공격이 따라 들어왔다.
'빠르다! 고수……!'
탁자와 의자가 함께 두 동강이 났다. 아래로 숙인 원태의 눈에 잘려져 쓰러지는 의자가 잡혔다.
펑!
의자를 상대방에게 차 냈다. 진기를 실어 찬 것이니 찼을 때의 소리처럼 그 안에 담긴 힘도 예사롭지 않았다.
슛!
의자를 검으로 받아내는 것이 보이면서 비로소 원태는 상대가 상당한 체격의 복면인임을 확인했다.
검을 휘두르는 모습.
고수다.
자객 따위로 보기에는 너무나 뛰어난 경지였다.
문답무용, 이런 상대에겐 말이 필요하지 않다.
원태는 한손엔 구루수, 한 손으로는 벽권을 말아쥐며 강한 진각과 함께 날아들었다.
너무 거리를 좁힌 것일까, 놀라운 빠르기의 검격이 쏟아져 나왔다.
"큭!"
피익!
왼쪽 눈가가 얇게 찢어졌다.
종이 한 장 차이. 조금만 깊이 들어왔다면 검에 실린 경력에 머리 반 쪽이 날아갔으리라. 그러나 그런 위험 쯤은 강호에서 칼밥을 먹는 모든 무인들이 겪어 보는 것, 원태는 물러서지 않고 구루수를 쳐 냈다.
쩡!
원공권의 일격이 어느새 회수된 검에 막혔다. 손과 쇠가 부딪혔음에도 금속성의 울림이 터져 나왔다.
퍽!
원태의 발이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그 끝에 상대의 옆구리가 걸렸다.
'이런!'
발 끝에 느껴지는 힘이 둔중하지 않다. 맞는 순간 흘려보낸 것이다. 보통 고수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순식간에 검날이 몰아쳐 왔다.
재빨리 몸을 뒤로 빼며 벽에 붙어 섰다. 벽에 딱 붙어 서면 찌르기의 공격만 주의하면 된다는 심산이었다. 좁은 공간을 잘 활용해야 했다. 허나……
윙!
횡으로 휘둘러 오는 검에는 망설임이 없다. 급하게 몸을 띄워 발 밑으로 검날이 스쳐 지나갔다. 검날이 벽에 박힐 것으로 생각한 원태다. 그대로 발을 쳐내려 할 때, 놀랍게도 습격자의 검날은 벽을 그대로 갈라내며 걸릴 것 없이 뻗어온다.
'말도 안돼!'
강하게 손을 뻗어 천장에 박아 넣었다.
휘릭!
손을 축으로 공중에서 몸을 튼 원태가 거꾸로 천장에 붙으면서 아슬아슬하게 검날을 피해냈다. 지체할 틈이 없다.
펑!
원태의 다른 손이 천장을 강하게 올려쳤다. 나뭇조각과 먼지, 기와조각이 이어서 쏟아지는 가운데, 어떻게 했는지 원태의 몸이 위로 빨려 들어갔다. 상대가 이 정도 검사라면 좁은 공간에서 싸우는 것이 오히려 위험하다는 판단이었다.
달 빛 아래, 그리고 객잔의 지붕 위에 두 사람이 마주 섰다.
부서지는 소리 때문인지 밑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지붕의 위까지는 시선이 닿지 않는다. 때문에 소란이 크지는 않았다.
"누군지 모르겠으나…… 묻는다고 답하지도 않겠지."
원태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며 전의를 다졌다.
일생 일대의 강적이었다.
파앗!
기와 조각이 날며 그 사이로 원태의 몸이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아래 층에서와는 다른 움직임. 원태는 실력을 다 드러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력을 다 드러내지 않은 것은 원태 뿐이 아니다. 검을 휘두르며 맞받는 기세가 상상을 초월했다.
두 사람의 발이 어지럽고 화려하게 움직였다.
순간 순간……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검날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대단한 실력!"
원태는 호쾌하게 소리 지르며 손에 진기를 모았다.
한 수, 두 수, 순식간에 몇 십 합이 지나갔다.
지붕 위에는 때 아닌 검풍이 불고, 파라락 거리는 원태의 넓은 소매자락이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 순간.
'승부!'
원태의 손에 빛무리가 모였다.
동시에 상대의 검격도 그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퓻!
하늘로 피가 튀었다.
원태의 가슴이다.
뻥! 하고 압축된 공기가 폭발하는 순간, 복면인의 상대 또한 저 멀리 날아갔다.
회심의 일격.
일장의 충격 때문인 듯, 갈기갈기 찢어진 상의. 복면도 그 서슬에 벗겨 졌는지, 한 손으로는 얼굴을 가리고 있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한 팔이 봉해진 것에 다름이 아니다. 순식간에 뒤를 돌더니, 지붕 밑으로 몸을 날렸다.
쫓으려던 원태는 불에 데인 듯 지독하게 느껴지는 통증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상처가 가볍지 않다.
가슴을 내려다 보자,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피가 보였다. 약간의 현기증을 느끼며 점혈로 지혈을 한 후, 주위를 보니, 어느 새 제법 많은 이들이 지붕 위를 올려 보고 있다.
이래서야 추적은 무리다.
그러나 원태는 보았다. 상대의 특징을.
한 손으로 가린 얼굴. 머리카락의 길이는 그리 길지 않다. 길이가 문제가 아니었다.
색깔.
상대는 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상승무예를 연성한 만큼, 비록 깊은 밤일지라도 저만한 달이 떠 있으니, 원태의 시력은 대낮의 그것과 같았다.
복면인의 머리카락은 틀림없는 갈색이었다.
속수무책으로 하룻밤을 보낸 명경 일행은 결국 다시 비무장으로 향했다.
사건의 중심에 비무장이 있고, 아직은 출전할 의사가 있는 만큼, 결국 갈 곳은 그곳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간단치 않았다.
비무장이 저 멀리 보일 때 쯤.
"그만…… 두죠."
단리림이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냐?"
곽준에 물음에,
"비무장에는 안 가는 것이 좋겠는데요."
대답하는 단리림.
"……?"
단리림의 감각에 무엇이라도 걸렸는지 좋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곽준과 석조경은 명경을 돌아 보았다.
명경의 눈빛도 굳어져 있다.
"이미 늦었다."
짧은 한마디.
어느 새 그들의 주변에는 이십 여명의 남자들이 둘러 서 있었다.
하나 같이 절제된 움직임에 범상치 않은 기도.
무인들이다.
그 사이에서 한 남자가 나섰다.
"문제가 더 커졌더군."
백무였다.
"어젯밤 원공권 원태가 습격을 당했다. 게다가 그 범인으로 자네를 지목하고 나섰어."
백무의 손이 명경을 가리켰다.
"의심하고 싶지는 않네만 같이 좀 가줘야 하겠다."
"그럴 수야 없지."
곽준이 나섰다.
동시에 주위를 둘러싼 무인들의 기세가 흉흉해졌다.
금방이라도 일전을 벌일듯한 기세.
명경을 비롯한 일행의 신색은 태연했다. 거리낄 것이 없으니 당당한 것이다.
오히려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것은 지나가는 행인들, 북경의 사람들인 만큼 동창을 못 알아볼 리 없다. 그리고 동창이 관계된 일들 중 곱게 끝나는 행사를 본 일 또한 없었다.
자연스럽게 주변으로 사람들이 퍼져나가고 생긴 공터.
명경이 손을 들어 곽준을 제지했다.
"그만, 따라가면 될 일이다."
"하지만……!"
곽준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끌고 간다는 것이 못 마땅했다. 그뿐 아니라, 어젯밤 함께 동인회와 같은 일을 의논했던 백무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이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곽사형."
석조경이 곽준을 불렀다.
"일단 곽 사형은 비무장으로 가십시오. 비무장이 돌아가는 모양을 보는 것도 중요하니, 한 사람정도는 거기에 붙어 있어야 할 듯 싶습니다."
"아니, 자네들 모두가 가 줘야 겠는데."
백무가 석조경의 말을 끊었다.
석조경과 곽준의 시선이 백무의 눈에 틀어박혔다.
"설마!"
"조 공자!"
"조공자의 자택에도 이미 우리 사람들이 가 있지."
"이, 무슨!"
곽준이 발끈하여 소리쳤다.
소리없이 검을 뽑아드는 동창의 무인들.
구경거리라고 웅성거리던 행인들도 정작 검광이 번뜩이자 조용해졌다. 구경하려고 목을 뺴는 사람도 있었고, 길을 재촉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그만."
이번에 손을 들어 제지한 것은 백무다.
백무는 아무 말 없이 곽준을 바라보았다.
곽준은 순간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상대의 저의를 파악했다. 그리고는 석조경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석조경.
"비무고 뭐고 끝이군. 모처럼의 좋은 경험이었는데."
곽준이 순순히 따라갈 의지를 보이자 오히려 동창의 무인들이 당황한 모습이다.
'혹독한 훈련을 거친 우리 무인들에게 일갈로 검을 뽑게 만드는 기파, 게다가 순식간에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이미 모든 상황을 깨우친 모양, 구파의 인재란 실로 무섭구나.'
백무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무인들에게 손짓했다. 그의 손짓에 검들을 집어 넣는 무인들.
동창의 인도에 따라 무당의 제자들은 황궁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동창이 선수를 친 모양입니다."
"백가…… 그 친구 수완이 좋단 말이야. 예전에도 골치였지."
"이제 그 쪽이 드러나는 것도 금방일 텐데요."
"음…… 귀찮게 되었어. 다시 강호에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아닙니다. 회주가 없으면 어찌……"
"도대체 자네는 왜 나를 따르나?"
"예?"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많고…… 그저 방구석에서 뒹구는 것이 딱인 사람이야 나는."
"주군!"
"주군이라니. 자네는 잘못 모신 거라고. 자네 정도면 어디든 가서 좋은 자리 하나 꿰찰 수 있는 사람인데…… 하필이면 탈 많고 의욕도 없는 날 골랐나. 이 사람아."
"주군, 이 이상 하시면 회 전체의 사기가 떨어집니다. 한창 재건의 의지로 불타고 있는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맘에 안 들면 그냥 떠나라고 해. 게다가 듣는 사람도 얼마 없잖아."
"주군……!"
"그나 저나…… 그는 왜 그 늙은이를 그냥 두는 거지?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
"……"
세상 만사를 귀찮아 하지만 그만큼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주군이다.
벌써 십년이 넘게 유준을 모시고 있던 엽천이지만 그 동안 유준이 불가해하다고 말하는 인물은 기억이 드물다.
"그들의 정체는 아직도 알 수 없나?"
유준이 말하는 그들이란 무당 제자들을 가리킨다.
"예……"
"동창은 이미 알고 있는 눈치던데. 예사 놈들은 아닌 거 같아. 금의위쪽에서는 아직 전혀 모른다 이거지?"
"예."
"그거로군. 그가 손을 쓴 거야. 그가 손을 쓸 정도면 구파의 제자들인가? 구파면 잘못 건드린 건데. 이제 그 쪽 일에는 엔간하면 관여하지 말도록 일러 놔. 모용세가 하나만으로도 쉽지 않으니까."
"……"
"슬슬 모용세가에서도 움직이기 시작할 거다. 모용도는 만만한 인물이 아니야. 자존심도 강하지. 북경이라 경동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지금까지 일들만으로도 구실은 충분해. 음…… 이렇게 된 것 제대로 한번 휘저어 줘야지."
엽천은 등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유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엽천이다.
그러나 강호 육대 세가의 하나인 모용 세가를 적으로 돌리게 될 수도 있음에도 개의치 않는 유준의 배포엔 지금처럼 섬찟함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나저나…… 계속 그 친구들이 마음에 걸려. 구파면 정말 골치 아픈데…… 구파면 어디지? 결국 직접 만나봐야 되나? 귀찮은데. 정보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답답한 일이로군."
"주군! 지금은 함부로 나돌아 다닐 때가 아닙니다."
"천변옹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어제도 봤잖아. 천변옹이 얼마나 사람 얼굴을 잘 꾸미는지. 그 머리카락 하며……"
"하지만."
"어떤 친구들인지 좀 확인해야겠어. 누구라 그랬지? 조 누구?"
"조홍입니다."
"조홍이라…… 들어본 적이 있는데…… 조홍…… 조홍…… 조인창!"
"……?"
"조인창…… 아니지, 아니야. 조인창은 관계 없어. 조홍…… 조홍이 이번에 외유를 했다고 했지?"
"예."
"구파…… 구파가 맞군. 간과했어. 이런 실책이…… 모든 게 정보가 늦은 탓이야."
"……"
항상 그렇다.
특별한 정보조직이 없더라도 유준은 이런 식으로 앉아서 천리를 본다. 이럴 때는 조용히 있어주는 것이 주군을 돕는 일이었다.
"조홍이 홀로 그 친구들을 데려오지는 않았을 것…… 조홍을 호위한 위병들을 찾아보았지만 모두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상태였다…… 음…… 이것도 그가 손을 쓴 것이 틀림없어. 단순한 강호의 친구들을 데려온 것이라면 그렇게 철저하게 보안이 이루어질 리 없지."
"……"
"구파와 육대 세가는 달라. 육대 세가는 실익과 자존심으로 움직이지만 구파는 협(俠)이 모든 것에 우선하니까. 백가 놈이면 그것을 이용하려 할 터. 그 친구들에 대한 방비를 따로 해야겠어."
"이쪽에도 고수들은 있지 않습니까."
"심화량을 얕보면 안돼. 백무와 심화량은 뛰어난 인재야. 이미 어느 정도는 윤곽을 잡고 있을 것, 무력이란 패는 끝까지 아껴 놓아야 돼. 아니, 무력 싸움이 벌어지면 이긴다는 보장이 없어. 이쪽이랑 부딪힌다는 것은 이미 모든 준비를 갖춰 놓았다는 뜻이나 다름 없으니까. 백무와 심화량…… 그 정도는 성장해 있을 거다. 게다가 동창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반나한이 있어."
"십보단혼객……!"
"일부러 우리의 흔적을 남기긴 했다만, 더 이상은 안돼. 이번 일이 끝나는 대로 북경을 떠나야 할지도 몰라."
"예?"
"백무의 행동이 빠르다. 적어도 내가 예상한 것 보다는 한 발 더…… 성장했다는 증거지…… 심화량도 같은 수준 성장했다고 봐야 돼…… 게다가 반나한라고 놀았겠나. 역시 그만큼 강해졌겠지. 아직 동창과는 부딪치면 안된다는 것이다. 동창 내부에 있는 그놈들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안 되지."
"그놈들이라 함은……"
"그래. 오 년전 우리 동인회도 말아 먹은 놈들이다. 내가 돌아 온 것도 그들 때문이야. 황궁 깊이 틀어박힌 '그'와 도 이야기가 끝났어."
"어느 새……!"
'그'를 만났다는 이야기는 황궁 내, 또는…… 적어도 황궁 근처까지는 직접 움직였었다는 말이 된다. 직접 곁에서 모시고 있음에도 이 귀제갈의 신출귀몰함에는 매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변수가 너무 많아. 이쪽은 정보력이 없으니 그 변수를 처리할 능력 또한 없지. 잠시 조용히 있어야겠어."
* * *
"그래, 범인을 잡아오셨나?"
동창 소유의 한 건물에서 명경일행을 맞은 것은 심화량이었다.
"범인의 모습을 한 사람이지, 범인은 아니야."
심화량은 백무와 마찬가지로 젊었다.
백무가 동창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다는 것은 어제 밤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동창을 움직이는 핵심이라는 것은 이곳에 들어서서야 깨달았다.
'대단하군……'
그들이 젊은 나이에도 이런 권력의 중추에 있다는 것은 명경 일행에게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보아하니…… 조공자의 신변에는 문제가 없을 듯 싶고…… 누구에게서 우리를 감추는 것이오? 동인회? 금의위?"
곽준이 대뜸 심화량에게 물었다. 이에 꽤나 놀란 듯, 심화량은 백무를 돌아보았다.
"무당파다."
백무의 대답은 짧았다.
"무당파라…… 예의를 갖추지 못한 점 사과하오."
심화량이 시원하게 웃으며 포권을 했다.
마주 포권을 올린 곽준, 허나 나오는 말은 거칠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지 않으시는 군. 그런 사람은 뱃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으니 사부님께서 조심하라고 하셨소."
심화량이 잠시 곽준을 응시했다.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다.
곽준은 담담히 받아넘겼다. 서서히 심화량의 눈빛이 감탄으로 물들어 갈 때였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석조경의 목소리였다. 석조경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데려왔으니 부탁할 일이 있을 터. 말하시오."
움찔한 것은 백무였다.
친분이 있다지만 끌려오다시피 한 장소다.
게다가 모습을 보이지 않고 명경 일행을 에워싼 무인들이 가득했다. 그런 분위기라면 어떤 강호인이라도 긴장을 할 터, 역시 무당파 제자들은 여간 녹록한 인재들이 아니었다.
"이 동창이 자네들에게 부탁이라…… 훌륭한 심계…… 무당산에서는 그런 것도 가르치오?"
"서 있으려니 답답하군요. 동창에서는 의자도 안 쓰나 봅니다. 긴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르는데, 차도 한잔 있으면 좋겠소만."
석조경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 그 눈빛만큼 나오는 목소리도 차가웠다.
'허어……'
비록 황실을 비호하는 집단으로 정도를 걷는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동창은 암살과 정보를 담당하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계책을 담당하는 심화량…… 석조경이 이례적으로 사납게 나오는 것은 심화량의 기도가 정대하지만은 않기 때문일 것이었다.
"이곳은 객잔이 아니오. 소협. 실례되는 질문이나, 어떤 이름자를 쓰시오?"
심화량의 목소리 역시 가라 앉아 있다.
"동창에서 파악하지 못한 이름이라면 상당히 의미가 있을 이름이겠군요. 석조경이라 하오."
소협으로 은근히 깎아내리는 심화량의 말에도 동요하지 않고 깎듯이 포권을 올리는 석조경. 그러한 예절에는 심화량도 마주 포권을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명문 대파의 저력……!'
"인사가 늦었소. 심화량이란 이름을 쓰고 있소."
"이만, 부탁하고자 하는 것을 듣고 싶소. 금의위의 누구를 상대해 주길 바라시오?"
석조경의 질문에 심화량의 눈이 흔들렸다. 마음의 동요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또 있지."
곽준이 입을 열었다.
"하나 더, 동창에."
심화량의 눈이 커졌다.
이번에 나타난 눈빛의 의미는 동요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경악에 가까운 뚜렷한 놀람이었다.
석조경과 곽준에 경탄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마련해 놓고 명경일행을 시험해 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곧 어떤 객잔에도 못지 않을 훌륭한 음식과 차가 마련되었다.
"어젯 밤…… 이 친구가 맡고 있는 흑호대 대원 다섯이 죽었소."
백무를 가리키며 밑도 끝도 없이 시작된 말.
"처음부터 아닐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보이지 않던 것이 목표로 잡자마자 하룻밤 새 조각이 맞춰져 버린 것이오."
"금의위군."
"그렇소. 우리 대원들이 죽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오늘 아침 우리가 조금만 늦었어도 자네들이 있는 곳은 금위위의 고문실이었을 거요."
"설마 고문실이었을라고."
곽준은 명경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이 사숙이 있는 한 그런 낭패는 겪지 않는다.
"자네들의 힘을 과신하는 군. 금의위는 강하오."
"어찌 되었던, 하던 말이나 계속하시오."
"실로 건방진 태도! 일이 이 지경이니만큼 그냥 넘어가지만 어제 밝혀낸 일들만 아니었어도 이 자리가 그렇게 만만치는 않았을 터."
심화량은 평소답지 않게 냉정함을 잃고 있었다.
그것을 스스로도 느꼈는지 심화량은 차를 한번 입에 대며 마음을 고르는 듯 했다.
"금의위는 동창보다 그 규모면에서 방대하오. 그 안에는 여러 개의 파벌도, 그리고 여러 개의 조직도 있지. 이번 일에 얽힌 것은 금의위 전체는 아니오. 어딘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 여러 개 파벌, 또는 조직 중 하나일 거요. 그리고 우리가 단서를 잡은 이상, 적어도 나와 이 친구는 이미 그들의 표적이 되었다는 것이오."
심화량은 슬쩍 손으로 백무를 가리켰다.
"……"
"사실 어제 밤 알아낸 것이 사실이 아니기만을 바라지만…… 이미 결정적인 증거들이 갖춰저 버리고 말았지……"
심화량은 한 번 더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동창에는 세개의 부대가 있소. 이 친구가 맡고 있는 흑호대. 본인이 맡고 있는 흑화대…… 그리고 흑살대."
"그럼……"
"그렇소. 흑살대. 흑살대 대장 반나한…… 그 분이 문제요. 그 분은…… 동창 최고의 고수시지. 사실…… 당신들이 상대하기엔 벅찬 분이오."
이에 눈을 빛낸 것은 명경이다.
동창 최고의 강자.
분명 명경의 흥미를 끌만한 일이었다.
"금의위에서도 확실히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둘 있소. 헌데…… 그 둘 다 만만치 않은 고수요. 게다가 그들이 다가 아닐 것이오."
심화량이 말을 멈추고 다시 한번 찻잔을 들이켰다. 이 와중에도 차 맛을 음미하는 듯, 편안한 표정이 떠오른다.
"음…… 동창의 입장이 묘하게 되었다는 것이군…… 금의위에 칼을 들이대자니 모양새가 안 좋고, 그런 것이야 감수한다고 쳐도 같은 동창의 최고수가 뒤에서 칼을 들이댈지 모르니…… 어렵게 되었소."
곽준의 말,
"움직이지 말라는 압력이군요."
석조경이 받았다.
"그렇다고 할 수 있소."
"그렇다면…… 그 반나한이라는 고수가 이번 일에 가담한 이유는 무엇이오. 그것만 어찌 할 수 있으면……"
"이유…… 그 분은…… 그런 것이 무의미한 분이오."
"무의미하다?"
"그분은…… 사실…… 동창도 그분에겐 의미 없을 것이오. 또한 이번 일도."
"……?"
"그 분은 옳고 그름의 기준이 자네들과는 다르오."
"우리?"
"오늘 오후 그 분의 거처로 찾아갈 것이오. 자네들도 같이 가야겠지. 뭐, 말하자면 '부탁'이오."
"우리가 당신들을 도와야 하는 이유는?"
"당연하지 않소."
"당연하다?"
"협(俠). 폐하의 암살을 막는 일. 이보다 더한 협의 도리가 어디에 있겠소."
한 순간 한 순간 속속들이 정보는 쌓여갔다.
"오늘 새벽 일어난 일입니다. 흑호대 한 명 사망, 한명 중상으로 다음이 보고된 바입니다."
명경 일행을 앞에 둔 채로 심화량은 벌써 몇 번째 저런 전서를 받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오늘 내일 새로 윤곽이 확실히 잡히겠군."
"그렇다면…… 오랜시간 공들여 세운 계획은 아닌가 하는데……"
곽준이 입을 열었다.
"그렇소. 찌르기 시작하자마자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가 일을 서두르고 있다는 뜻, 기본적으로 허술하다는 이야기지."
"그나 저나 금의위는 조용하군요."
석조경이 입을 열었다.
"금의위는 명령체계가 단순하지 않소. 아무래도 기동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지. 게다가 금의위 전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 금의위 내부에 당신들을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사람이 있는 듯 싶소."
"금의위에?"
"자네들은 북경에 당도하기 전 금의위와 부딪힌 일이 있잖소. 그때 부딪힌 위사들이 아마 흉수들과 연관된 자들이었을 것이오. 어차피 일을 벌이기 시작한다면 누군가가 범인으로 잡혀 주어야 하오. 마침 비무대회에 참가하게 되었으니 표적이 된 거겠지."
"그거야 짐작했던 바이지만…… 금의위 내부에 우리를 돕는 자가 있다는 것은……"
무당파 제자들의 눈에 의혹이 서렸다.
"사실 자네들의 정체는 흉수들에게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오. 헌데 평범한 무인들이라 하기에는 묘하게 실력이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자 자네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자네들에 대한 정보는 금위위에 퍼지지 않았소."
"그것은?"
"폐하께서는 당신들이 무당파에서 온 것을 알고 계시오. 보통 폐하께서 알고 계시는 정보는 우리 동창과 금의위를 거쳐 가는 것이 많소. 그런데 자네들의 경우에는 동창이나 금의위에서 올라간 정보가 아니었소. 또한 우리나 금의위, 아래 쪽으로 내려오지도 않았소. 우리가 정보를 주로 다루니 금의위보다 소식이 빠를 수 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금위위와 큰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오. 금의위도 나름대로의 정보력을 갖추고 있으니 말이오. 헌데 금의위에는 묘하게 자네들에 대한 정보가 없더군. 무엇보다 무당파라는 배경을 알았더라면 이렇게 끌어들일 생각은 못했겠을 것이고."
"누군가가 사전에 차단했다는 것이오?"
"그렇게 밖에 볼 수 없소. 기실, 금의위는 드러내 놓고 활동하는 곳이니 보안이나 여러 측면에서 대원들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는 못하오. 그러나……"
"그러나?"
"자네들이 무당파 출신이라는 것은…… 그렇게까지 비밀로 할 안건이 아닌데…… 아직까지도 금의위가 자네들의 정보를 모르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 윗선에서의 개입이 있다고 봐도 무방하오."
조용히 듣고만 있던 명경은 문득, 어젯 밤 환상적인 무위를 보여주었던 신비로운 남자, 진천를 떠올렸다.
"또한…… 우리 측에서도 좀 손을 썼소……"
심화량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
"우리가 처음 당신들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조 공자의 위병들에게서였소. 은근히 입단속을 한 모양이다만 병사들이란 술 한잔 들어가면 비밀이 없는 사람들이오. 정보원 하나가 무당파라는 이름을 듣고 그날 부로 주시하게 되었소. 아무래도 구대 문파에 관한 정보는 중요한 정보일 수 밖에 없고, 비무대회, 그리고 객잔의 사건이 있자마자 위병들을 모두 처리했지."
"처리?"
죽였단 말인가.
"아, 무슨 상상을 하는지는 알겠소만 우리도 그렇게 도리가 없는 집단은 아니오. 다만 그 병사들은 모두 북경에 없소."
"……?"
"호남성에 가게 되는 한 관리의 경호를 맡겨 버렸소."
"……"
"그건 백무의 판단이었소. 나는 금의위에 알리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흉수들이 모르는 하나의 패를 가지게 된 것이라 보고 있소."
"하지만 흑살대가 연관되었다면…… 그들이 아직도 우리를 모르겠소?"
"흑살대와 흑호대, 흑화대는 다르게 움직이오. 진실로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거의 교류가 없소. 당신들에 대한 정보도 마찬가지…… 어쩌면, 그런 것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이오?"
"일단은…… 기다리시오."
"기다리라?"
"늦어도 오후, 빠르면 곧 금의위에서 이곳으로 사람이 올 것이오. 지금 이 순간에도 흑호대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으니, 새로운 정보도 들어올 것이고."
* * *
기다리는 시간은 길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는지, 또는 명상을 하는지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있던 명경 일행.
"금의위입니다."
심화량의 수하가 찾아왔다.
"생각보다 빠르군."
심화량이 명경 일행을 돌아 보았다.
"이쪽은 우리가 해결한다고 이야기 해."
"하지만…… 금위위에 희생자가 있었던 만큼, 이번 사건은 자기들 몫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웃기는 소리!"
발끈한 것은 백무다.
여섯 명.
백무의 수하도 여섯이나 죽었다.
"누가 왔지?"
심화량이 물었다. 백무와 달리 냉정한 어조다.
"마대인께서……"
"마 대인? 그도 연관이 있나?"
되 묻는 백무. 의아함이 섞인 어조다.
금의위 지부대인 중 하나인 마영경. 성격이 진중하고 출신이 분명한 사람이라 고려 대상에서 제외했던 자였다. 게다가 백무하고도 오랜 친분이 있는 바, 의심이 갈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설마하니 흉수 측에서 직접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겠지. 일단 찾아 온 것은 잘 넘겨. 표정을 보니 아주 강경하게 나오는 것은 아닌 모양이군. 혹시 모르니 마 대인에 대한 조사를 추가해. 시간 낭비일 것 같기는 하다만."
"예."
심화량의 수하가 물러나자 곽준이 물었다.
"그 쪽으로 가서 무당파임을 밝히는 것도 방법이 되지 않겠소?"
"금의위로? 안 될 말이오. 그 쪽에서도 일단 당신들이 무당파임을 밝히면 당황이야 하겠소만…… 결국 크게 신경쓰지는 않을 것이오. 오히려 이름 있는 문파이니 더욱 크게 뒤집어 씌우려 할 수도 있소. 게다가 당신들은 지금까지 신분을 감추어 왔지 않소. 당당한 명문 정파에 걸맞지 않게도."
"그거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고…… 하지만 이렇게 가만히 그 쪽 돌아가는 상황만 보고 있는 것도 썩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오."
"수배되지 않고 있는 것만도 다행으로 아시오. 여차하면 이쪽에서도 당신들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것이 활동에 편할 수 있으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군. 우리가 범인인 척 한다라……"
석조경을 돌아보며 곽준은 미소를 지었다.
"안됩니다. 그래서는."
"왜?"
"그것은 이미 동창의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흉수들에게 죽었겠지요. 흉수들도 동창이 자신들의 목을 조이고 감지한 겁니다. 이제와서 동창이 우리를 핍박한다면, 이쪽에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것으로 밖에 안 비칠 겁니다."
"그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이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것은 영 기분이 나쁘단 말이야."
"그거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곽 사형, 저희는 이틀 후면 북경을 떠나야 되어요. 게다가 무엇보다 조 공자의 입장이 어려워집니다."
"쳇, 그렇기야 하지. 그러고 보니 조공자는 어디 있소?"
곽준이 물었다.
"안전한 곳으로 모셔 두었소. 나와 백무가 있는 곳은 아무래도 더 이상 안전한 장소가 못 되니까."
심화량의 어조는 가라앉아 있다.
"이제 곧 흑살대가 귀환할 시간이오. 우리로서는 흑살대 쪽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제대로 움직일 수 없소."
"하지만 꼭 이렇게 조용히 움직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오? 금의위와 동창은 서로에게 협력하면서도 견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모든 것을 감수하고 그냥 흉수를 지목하면서 부딪히면 안 되는가?"
"아까도 말했듯이 흑살대에서 저지하고 나온다면 저희로서는 속수무책이오, 게다가 일을 크게 벌리는 것은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문제가 많소."
"동인회가 걸리는 것이군."
"그렇소."
심화량이 대답하면서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양방이 다소 비틀린 어조로 대화를 해 왔다.
허나 서로의 뜻을 빠르게 이해하는 대화를 한다는 것. 우수한 두뇌들이 얼굴을 맞댈 때, 그 안에는 분명 대화의 즐거움이 있는 법이다.
심화량의 미소는 마치 이제 당신들을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여하튼 이쪽의 계획에 따라줄 생각이라면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것이 좋을 것이오. 흑살대의 거처는 위험천만한 곳이 될 테니까."
* * *
움찔.
단리림의 얼굴이 굳어졌다.
보이지 않는 것에 민감한 것. 태극도해의 묘용이다.
"위험하겠는데요."
"……"
명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을 옭아매는 기운.
한 걸음 한 걸음이 살기로 가득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장원. 짙은 갈색의 기왓장은 검은 색에 가까웠다.
"흑호대 대장 백무가 반 대장님을 뵙고 싶다고 전하라."
백무의 말에 짧게 고개를 숙인 젊은 무인 하나가 안쪽으로 들어갔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다른 모두 역시 표정이 굳어있다.
비록 일신에 가진 무공이 정심하다고는 하나 이렇게 노골적인 살기가 몰아쳐 옴에야.
"들어오시랍니다."
장원 안에는 그 안에서 뛰어다녀도 될만한 커다란 방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올라가는 계단. 이십여명의 무인들이 두 줄, 정자세로 서있다.
곽준의 입술이 조금 움직인다 싶을 때, 명경의 귓전으로 조그만 소리가 들려 왔다.
-사숙, 올라가서 반나한이란 사람이 보이면 시선을 좀 끌어 주세요.
전음입밀.
정심한 내력이 필요하다. 다만 곽준의 능력으로는 보낼 수 있는 거리가 길지 않고 길게 말을 할 수도 없을 뿐.
명경은 왜라고 묻지 않았다.
항상 천방지축 말이 많지만 곽준의 총명함이야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제는 끌려다니는 것이 질린 듯 무엇인가 나서 보려는 것일 터다.
명경은 걸어가면서 일행을 양쪽으로 늘어 서있는 무인들을 훑어보았다.
정제된 기운. 수련이 잘 되어 있는 무인들이었다.
이만한 살기를 표출시키려면, 적어도 사람 몇은 실제로 죽여본 자들이리라.
"올라가면 되는가."
가장 굳어있는 것은 백무.
안쪽으로 안내한 무인이 손으로 계단을 가리키면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공경하는 자세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계단을 올라오자 문이 열려있는 방이 보이고, 그 안쪽으로 얿게 열린 창밖을 바라보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제법 큰 키. 희끗한 머리카락으로 보기에 나이가 적지 않다.
서서히 몸을 돌리는 중년인.
화악!
백무는 문득 반나한 보다도 자신의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기세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허물을 벗듯 내면에 감추어진 진정한 힘을 표출한 명경은 마치 그 자신이 무당파 무예의 화신으로 변한 양 강렬한 기운을 내뿜었다.
천천히 몸을 돌린 반나한. 한쪽 얼굴에 긴 검상. 세상 풍파를 다 겪어낸 듯한 얼굴에는 진실한 놀라움이 깃들었다.
명경이 한 발 내딛자 반나한의 한쪽 눈이 미세하게 치떠졌다.
다시 한발.
백무는 비로소 자신이 이 명경이란 사람을 잘못 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명경의 무위는 막연한 예측을 훨씬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쩌억!
다시 한발 내딛는 명경의 발 밑. 나무로 된 바닥에 금이 갔다.
"그만."
반나한이 입을 열었다.
우뚝 선 명경의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내 강호를 떠나 황궁에 들어온지 십오년."
담담하게 그러나 힘있게 울려나오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백무.
문득 앞을 보니 어느 새 다른 네명도 나서서 반나한의 전방을 봉쇄하고 있다. 그 위치는 넷 모두 언제라도 출수가 가능한 절묘한 자리였다.
"강호는 변했군."
말을 맺자 반나한의 눈빛이 변했다.
무당의 제자들이 움찔했다. 강력한 힘, 미동도 안한 것은 명경뿐이았다.
"이 나를 제압하겠다는 것인가?"
반나한의 입이 다시 열렸다. 더 깊게 울려나온 목소리. 백무에게 묻는 말 같았다.
허나…… 백무는 대답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이 장원에 몰아쳤던 살기(殺氣)는 백무를 당황케 하기에 충분했고, 부딪침 없이 잘 넘어갈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미 상황은 그의 손을 떠나버린 것이다.
"자네가 말해보게."
명경의 청록빛 눈은 바다처럼 깊었다.
"결과는 어찌될 것 같나."
반나한의 눈에는 어딘지 즐거움이 깃들어 있다.
잠시의 침묵.
명경이 입을 열었다.
"이쪽은 둘."
반나한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 이 팔 하나."
명경이 왼손을 들어올렸다.
반나한의 눈이 조금 커진다 싶더니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두 애송이와 팔 하나? 그럼 이쪽이 줄 것은?"
이어지는 대답.
백무의 놀라움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당신의 목숨."
당연한 듯 대답하는 명경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약속을 하나 하자."
"……"
"십년 안에 다시 오라."
"……"
반나한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명경은 잠시 그를, 그의 눈빛을 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반나한은 몸을 다시 돌렸다. 명경 앞에서 등을 보인 반나한은 그대로 석상이라도 된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만남은 끝났다
그리고 얻은 것은 컸다. 이것으로 동창 흑살대의 개입은 저지한 것이 틀림 없었다.
그러나……
명경이 이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또 얼마나 많은 땀이 그의 등을 적셨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백무는 흑화대 거처에 도착할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입을 열지 못한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까.
그것은 백무가 정신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충격.
백무는 세간에서 명문 정파라고 불리는 곳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비로소 꺠달았다.
반나한……
반나한은 전설에 다름 아닌 존재다.
치열했던 동인회와의 싸움.
백무와 심화량이 어쩔 수 없었던 강력한 고수들을 파죽지세로 격파하며 승리를 일궈 낸 자,
그 신출귀몰하다는 동인회 회주조차도 '무책, 단지 퇴각 뿐'이라고 말한 강대한 무력,
가진바 무공으로만 보면 황궁의 어떤 지위도 얻을 수 있을 듯 하지만 오직 그의 머릿속에는 무(武) 한 글자 뿐인 사람……
손을 쓰기 시작하면 그 무엇도 개의치 않는다. 타협이 필요한 상대이든, 중요한 증인이든 가리지 않고 싸운다. 싸움이 일어나면 지는 일이 없다.
첩보기관 동창 일개 부대 대장에 머물러 있지만 가진 바 무공에는 동창, 금위위 누구라도 경외감을 가지고 있는 현실이다.
헌데……
젊디 젊은 무당파의 제자.
반나한이 표출한 패력(覇力)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릇.
비록 다른 네명의 제자들이 뒤를 받쳐주고 있었다지만 그만큼 젊은 나이의 다섯 명이 반나한과 대등하거나 그를 상회할만한 기세를 만들어 냈다는 것은 백무에게 대단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반나한이 사람을 만날 때, 그 판단기준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무력' 하나다.
흡족한 무력을 본 것인지, 또는 언젠가 먼 훗날의 재 대면을 기대한 것인지.
백무는 반나한의 눈에서 긍정적인 답을 얻었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마음을 가득 채운 놀람과 충격을 걷어내기 위해 애쎴다.
"어떻게 되었나?"
심화량은 멀쩡히 돌아온 명경 일행을 곁눈질 하면서 백무의 말을 재촉했다.
"반 대인, 그분은 이번 일에서 손을 떼실 거다."
백무의 말에 심화량은 눈을 크게 뜨더니 금새 평정을 되찾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럼 이제 금의위만 남은 것인가."
심화량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흑살대가 손을 뗀다……
백무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더 이상 흑살대에 신경쓸 필요가 없다. 판단력에 있어서 백무만한 자는 없었으니까.
"실제로 싸울 생각이었나요?"
곽준이 물었다.
"물론."
명경의 대답은 짧다.
"합공까지 불사했다는 것을 알면 사부님이 뭐라고 하실지."
석조경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사숙이 죽는 걸 보고 있을 만은 없지 않나."
곽준은 씩 웃었다.
어이가 없었는지 명경도 희미하게 미소 비슷한 것을 입가에 만들었다.
"그나저나 그 반나한이라는 무인…… 실로 대단하더군요."
악도군의 목소리엔 반나한에 대한 순수한 감탄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 모용세가의 가주보다도 강해 보이더군. 맞지요? 사숙."
곽준의 어투는 명경에 대한 장난기가 섞여 있다. 그러나 그만큼의 신뢰감 또한 썪여 있었다.
"그럴 것이다."
"대체 강호에는 얼마나 많은 실력자들이 있는 것인지."
"사실……"
장난기가 옮겨가기라도 했는지. 석조경이 모처럼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엄밀히 말해서 강호는 아니지요. 이곳은."
"강호는 아니지만 그 치열함은 능히 비견될만 하오."
백무의 목소리다. 그는 명경 일행의 대화가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결과가 좋긴 했으나…… 무모한 짓이었소. 앞으로는…… 그런 일을 벌이려면 상의라도 하고 하시오."
"하지만……"
곽준이 나서는 것을 석조경이 말렸다.
"잘 알겠습니다. 허나, 이런 일을 벌일만한 만남 또는 사건, 더 이상은 사양입니다."
"그것은…… 이쪽에서도 마찬가지오."
* * *
바쁘게 돌아가는 상황들을 구경하며, 또는 상의하며 하룻밤이 지났다.
"이제 돌아가도 좋을 듯 싶소."
백무가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면서 말했다.
하룻밤 사이.
백무는 수족처럼 아끼는 수하 넷을 더 잃었다.
대신 목숨으로 벌어 온 정보는 굉장한 가치가 있었다.
억지 웃음이나마 지을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정보들이었으니까.
"대체 여 대인이 뭐가 부족하여 이런 짓을 꾸몄는지는 알 수가 없군."
심화량 역시 헝클어진 머리를 긁으면서 또 한장의 보고서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여 대인. 여량. 강호인 출신으로 금의위 초창기때 부터의 실력자였다.
"나이가 들면 어떤 망상도 이상하지 않아."
백무는 수하를 끔찍히 아끼는 듯 싶다.
간밤에 들려온 비보(悲報)들에 신경질적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들쑤신 것 때문에 아마 더 이상 금의위에서는 자네들을 걸고 넘어질 여력이 없을 것이네."
"조 공자는?"
"곧 자택에 도착할 것이오."
어제 이후 명경에 대한 백무의 태도는 상당히 변해 있었다. 조심스러워졌다고 할까.
"멀리 배웅하지는 않겠소."
심화량의 인사와 함꼐 한 무인이 그들을 바깥으로 안내했다.
"오늘은 더 고생들 하시겠군."
"그렇거요."
어젯밤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서류를 처리하고 지시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전장을 방불케 한 밤이었다.
이곳 저곳에 떨어지는 지령……
직접 보지 않아도 북경 구석구석 동창의 무인들이 분투하는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오늘……
오늘은 더하다.
어젯밤 사이 얻어진 정보에 직접 따라 행동에 들어가야 된다.
은밀하고 신속하게. 무력 충돌 역시 각오해야 하리라.
"그나저나…… 무술 대회는 어이없게……"
"어차피 경험삼아 출전한 것인데 상관없겠지."
당장 이틀 후면 북쪽으로 출발한다.
게다가 더 이상 일에 말려들지 말고 동창에 맡겨두어도 될 만큼 상황은 변해 있었다.
"금의위에서 이대로 우리를 내버려 둘까?"
악도군의 질문에 곽준은 고개를 모로 치켜들며 대답했다.
"아마 동창은 오늘 직접 금위위를 찾아갈 것이니…… 그들 말대로 여력이 없겠지."
"림아, 모처럼 조용하게 있을 수 있겠구나."
석조경이 단리림을 툭 쳤다.
표정이 밝지 못한 단리림이다.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고 석조경은 가볍게 넘겨 버렸다.
금의위에 여력이 없을 것이란 백무의 판단, 모처럼 조용히 있을 수 있겠다는 석조경의 말.
둘 모두 틀렸다.
금의위에는는 여력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일행은 조용히 쉴 수 없었다.
조홍의 자택에 도착하여 늦어진 출정 준비를 서두르고 있을 때. 단리림의 어두운 표정 역시 그 원인이 분명히 드러나고 말았다.
황궁에서 나왔다는 말에 문을 열었던 하인.
애꿎은 하인이 튕겨져 나와 땅바닥에 뒹구는 순간, 이미 살기를 감지한 일행은 모두 장원의 마당으로 뛰어나오고 있었다.
"조공자를 안으로!"
곽준이 외치며 나섰다. 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신속하게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백의 적포의 무인들, 그 복장은 이제는 지겹기 까지 한 금의위의 복장이었다.
"내가 가보겠다."
뒤를 돈 악도군이 조홍과 그의 조부가 있는 전각으로 구름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명경은 악도군이 달려가는 방향을 일견하고, 계속해서 들어오는 금의위 무인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악도군은 강인한 무인이다. 저 쪽은 걱정 없을 것이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대낮이다.
양광이 사방을 비추는 가운데 뚜렷이 보이는 상대의 표정들.
그 표정들엔 명백한 적의와 살기가 깃들어 있다.
이런 경우 대화는 필요없다. 알고 있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석조경은 물을 수 밖에 없었다.
"이 무슨 짓이냐."
대답이 있는 것은 오히려 뜻밖이다. 그러나 대답 역시 대화로 풀어 나갈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뚜벅뚜벅 걸어서 들어오는 장포의 중년인.
"금의위, 대역죄를 물으러 왔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열에 있던 십여명의 무인이 뛰쳐 나왔다.
흉흉하게 검을 휘두르며 달려온 무인들.
움직임이 정련되어 있다.
품고 있는 것은 맹렬한 살기였다.
검을 챙겨 나온 것은 석조경 하나 뿐,
치잉!
석조경이 검을 뽑아들며 상대의 검을 비껴냈다.
원을 그리며 움직인 검에는 태극검의 강력한 흡력이 실려 있었다.
순식간에 검 한 자루가 주인의 손을 떠났다.
석조경은 여유롭게 손목을 움직여 검끝으로 마혈을 찍었다.
털썩!
금의위 무인 하나가 순식간에 쓰러진 것이다.
수장으로 보이는 중년인은 크게 놀랐다.
부드러우면서도 빠른 검형, 게다가 저렇게 정교한 검기 점혈의 한 수. 틀림없는 무당파의 수법이었다.
"지원을 요청하라."
중년인의 눈짓에 한 명의 금의위 위사가 밖으로 달려나갔다.
"너희는 가택을 수색하도록!"
중년인의 말에 십여명의 위사가 움직였다. 그들은 명경 일행과 부딪치지 않도록, 전권을 크게 휘돌라 악도군이 달려간 방향으로 뛰어갔다.
파앙!
연이어 들려오는 파공음.
처음에 달려든 십여명의 무인은 이미 무당파 제자 넷과 어울려 격렬하게 손속을 주고 받고 있었다.
텅!
한 무인이 땅에 쓰러졌다.
곽준의 태극산수에 당한것이다.
처음에는 진무칠권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진무칠권으로 가능한 싸움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죽일 듯 짓쳐들어오는 상대들. 게다가 이렇게 검을 휘두르는 실전은 익숙치 않았다.
'으흡!'
위협을 느끼자 평생 몸에 익숙해져 있었던 무공들이 저절로 펼쳐졌다.
무당 진산의 비기들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텅!
또 한명.
'이럴수가!'
산전 수전을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금의위의 무인이 이제 청년 소리를 들을 만한 애송이에게 쓰러지고 있었다.
중년인은 얼굴을 굳히며 그 자신이 직접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펑!
곽준은 마주친 손에 고통을 느끼며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정심한 내공이다.
중년인은 다시한번 놀랐다.
십성의 공력을 담은 화영장.
새파란 젊은이가 막아 낸 것 만으로도 대단한데, 큰 타격을 입은 것 같지도 않았다.
서른이 넘는 무인들을 데리고 올때만 해도 이만한 인원이 필요할까 싶었는데, 이제는 모자르게 생각되었다. 아니, 애초부터 숫자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년인이 손을 들어 수신호를 보냈다.
탁탁탁!
중년인의 신호에 이십 여 명의 무인들이 몰려든다. 목표는 곽준 한 명이었다.
이십여명에게 애워싸여 당화한 곽준을 보고 쓸쩍 웃음을 지은 중년인.
중년인은 갑자기 옆으로 움직여 단리림을 향해 일장을 쳐 냈다.
다시 한번 더 수신호.
석조경은 상대하고 있는 무인 두명의 검세가 견고해지는 것을 느꼈다. 방어에 치중하는 것이다.
금새 그들의 의도를 깨달았다.
공력이 딸리는 단리림은 중년인의 공세를 막기에도 급급하다. 스무명의 무인들에 둘러싸인 곽준은 금새 두 무인을 제압했지만, 그 대가로 한 줄기 검상을 입었다.
그리고 석조경이 상대하는 이 두 무인. 방어에 치중하는 이 두 무인은 곽준을 도와주지 못하도록 진로를 막는 것이 목적이었다. 석조경은 마음이 급해졌다.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챙!
태극검의 묘미는 검을 부딪히지 않고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사량발천근의 무리(武理)에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태극검에 실린 경력이 '사량'이라 말할정도로 작은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무당의 정심한 공력은 얼마든지 부딪혀도 깨지지 않는 강검(强劍)을 구사하기에 충분했다.
검을 부딪힌 무인이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입가에 흘러내리는 핏물. 내상을 입힌 것이다.
그럼에도 검을 휘두르며 석조경의 진로를 막았다. 난감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들은 죽음을 각오한 듯 하다. 눈에 번뜩이는 빛이 검에 반사되는 태양빛처럼 이글거렸다.
그때였다.
명경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찔러들어온 검을 옆으로 흘려내며 뻗은 손에 무인의 어깨가 잡혀서 따라왔다. 이어지는 손.
퍽!하고 뒷머리를 가격당하자 줄 끊어진 인형이라도 된 양 가볍게 허물어졌다.
당황한 다른 무인이 검을 곧추세우는 순간. 명경이 손을 뻗자 그 손안으로 쓰러진 무인의 검이 딸려 올라왔다.
"헉!"
놀라서 헛바람을 들이키는 무인은 눈 앞에 뭔가가 번쩍인다고 느낀 순간 마혈을 점혈당해 뒤로 넘어갔다.
명경의 신형이 푸른 구름이 되어 포위당한 곽준을 향했다.
바람에 휘말려 올라가는 낙엽처럼, 명경이 휘두른 검에 두 무인의 검이 하늘로 솟구쳤다.
검과 몸이 하나되어 원을 그리는 한쪽 끝에 그의 발끝에 한 무인의 어께가 걸렸다.
뻐억!
주저앉은 무인을 돌아보지 않았다.
당황한 무인들이 검을 명경에게 겨누었다.
명경은 기다리지 않았다. 무당파답지 않은 공격적인 검이 세개의 검 사이를 파고 들었다.
한바퀴 휘돌리며 치켜올린 검에 자석이라도 붙은 듯 세개의 검이 딸려 올라왔다.
쩡!
얽혀있던 한자루의 검이 부러지며 그 검의 주인이 튕겨나가 곽준을 공격하던 무인의 몸에 부딪혀 나뒹굴었다.
검을 아래로 내리자,
쩡! 하고 또 한자루의 검이 부러졌다.
그리고 날듯이 몸을 띄워올린 명경의 발이 남은 무인의 뒷목을 가격했다.
안쪽에서도 호응이 왔다.
다섯명의 무인이 순식간에 쓰러지고 그 서슬에 합격의 사슬이 헐거워지자 곽준이 두명을 쓰러뜨리며 포위를 뚫고 명경의 곁으로 뛰쳐나왔다.
세줄기 검상. 하나는 가볍지 않았다. 제법 깊게 베인 듯, 옷을 물들이는 피의 양이 많았다.
명경이 한번 검을 휘둘렀다.
사납고 세게 휘둘러진 검날에 엄격하게 훈련을 받은 무인 십여명이 한걸음 물러섰다.
기세의 격이 달랐다.
더 이상 무당의 무공을 감추지 않기로 한 듯, 그의 몸에서는 무극진결의 강대한 기운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그 사이 혈도를 짚어 지혈을 한 곽준이 앞으로 나섰다.
끈질기게 붙들던 두 무인을 뿌리친 석조경 역시 곽준의 곁에 섰다.
그러자 명경이 다시 신형을 날렸다.
단순한 움직임에도 움찔하는 무인들. 그러나 명경이 몸을 날린 곳은 다른 방향이다.
단리림은 끊임없이 태극 둔형보를 펼치며 자신의 모든 무공을 뽑아내고 있었다.
부족한 경험을 태극도해의 모용으로 근근히 메워냈다.
미세한 기의 흐름을 읽고 경력을 풀어내는 영민한 소년의 요령에 중년인은 내력과 경험이 앞서면서도 단리림을 제압하지 못했다.
명경은 멈추어 서면서 중년인에게 검을 겨누웠다.
단순히 겨누었을 뿐.
중년인은 화살이 날아오기라도 한 듯 급히 한쪽으로 피하면서 명경을 쳐다보았다.
한 걸음.
명경이 한 발작 앞으로 나서자 중년인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젊은 나이인데다 색목인이기에 가볍게 보았는데 이런 놀라운 고수였을 줄이야.'
중년인은 단리림을 핍박하고 있는 와중에도 장내의 상황을 잘 살피고 있었다.
놀라운 신위.
명문정파
간혹 이런 괴물들이 나온다고 이야기를 들어왔다.
직접 눈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태반의 수하들이 땅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무당파의 제운종과 태극권은 너무도 유명하다.
이들이 무당의 제자임은 쉽게 알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땅바닥에 누운 수하들에게 살수를 쓰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었다.
십여 명의 무인들이 단 두 젊은이를 상대로 공격을 감히 시도하지 못한 채 갑갑하게 대치하고 있다.
상황은 안 좋았다. 절망적이었다.
철수를 명령해야 하는가.
그때.
갑자기 명경의 얼굴이 굳었다.
마찬가지로 단리림의 얼굴이 변하며 한쪽을 가리켰다.
태극도해를 익힌 무당의 두 제자. 동시에 같은 것을 느낀 것이다.
"사숙! 악 사형이!"
명경이 단리림에게 검을 던져 주었다.
"버텨라."
명경이 몸을 날리면서 손을 뻗었다.
철컹!
땅에 떨어져 있던 한자루의 검이 움찔 하더니 그를 따라 날아 올라 그의 손에 이르렀다.
햇살이 반사되는 기와 위로 넘어 달려 나간다.
중년인은 명경이 없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쳐라!"
외치면서 그 자신은 내력을 있는대로 끌어올려 단리림에게 짓쳐 들었다.
하지만 중년인이 변화에 놀란 한 순간 단리림은 주문을 외워 검에 힘을 흘려 넣은 상태다.
북음 풍도 대제의 힘을 빌려쓰는 풍도술.
그의 손에 들린 평범한 검은 일순 보검이 되어 삼엄한 기운을 뿜었다.
가볍게 휘두른 서슬에 중년인은 급히 뒤로 물러섰다.
털썩!
저쪽에서 한 무인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중년인은 마음이 급해졌다.
[2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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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읽고 갑니디...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