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그리스도인 되기 - 7. 하나님을 아는 지식 :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기
[요한 1서 4장 7-8절]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선포하기 "하나님은 선하시다!"
"좋은 그리스도인 되기" 말씀을 준비하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많다고 했는데, 점점 더 신실하게 고백되는 것은, "우리를 향해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많이 알면 알수록 좋은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말이 무엇인지 이제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율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끊임없이 만들어가려고 했던 모습 가운데 얼마나 많은 율법이 있었는지, 은혜 가운데 산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고백하면서 시작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것" = "좋은 그리스도인 되는 것"
가끔 미국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 흑인 교회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앞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God is good!"
그러면 전체 회중이 이렇게 화답합니다.
"All the time!"
아마도 미국 땅에 노예로 살면서, 오랫동안 차별을 당하면서도 그들로 하여금 신앙의 끈을 놓지 않게 하고 견딜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 바로 그러한 신앙의 고백이 아니었을까요? 지금 자신들이 고통을 당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신 분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왜 예배시간이 되면 이렇게 선포하고 화답을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백하는 것은 그때그때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고 선포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선포하는 것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정이 느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고백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백하므로 믿음과 확신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험에서 믿음이 오는 것이라면, 우리 인생에서 믿음이 없는 순간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태생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의심과 걱정거리로 뭉쳐 있는 인간들인데 말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찾아오는 믿음이 있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하고 살아갈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벌써 수년이 지나갔지만, 미국에서 여러 간증과 화제를 낳았던 책이 릭 워렌 목사의 [목적이 이끄는 삶]이었습니다. 그중 한 가지 사건을 소개합니다.
애슐리 스미스라는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저 신앙을 가진 26세의 미망이었던 그녀에게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전날 미국 법정에서 총기를 난사하고 판사와 여성 보안관 등 4명을 살해한 범인에게 인질로 잡힌 것입니다. 그녀가 그 범인에게 잡혀서 고통을 당해야 할 어떤 이유도 없었습니다. 단지 새벽 2시쯤 상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주차장에서 인질로 잡혔고, 인질범 브라이언 니콜스는 그녀를 테이프로 결박하고 화장실 욕조에 처박기도 하며 위협을 했습니다.
그때 애슐리는 목적이 이끄는 삶으로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고, 그 위험한 순간에 범인을 설득해 책을 읽어주었습니다. 니콜스가 오늘 자신을 인질로 잡은 것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라며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애슐리 스미스는 겁에 질린 인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을 아는 사람, 그래서 긍휼의 눈으로 범인을 바라보는 천사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단지 이 일을 특별한 하나의 사건으로, 아니 기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선하심, 우리를 향한 변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호세아 6장 6절에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뭐라 말씀하나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가 사랑을 받고, 우리가 사랑을 해야 하는 모든 이유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의 신앙은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잘못 아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하나님께 잘 보여 하나님을 만족하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 우리가 용납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또 하나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꾸 하나님을 "대상화"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 숭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형상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형상이 아니라, 늘 "존재"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임은미 선교사님의 책 [최고의 날, 최고의 그리스도인]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수영을 배울 때, 아직은 미숙하던 때 수영장에 찾아온 멋진 남자를 보게 되었답니다. 자세히 보니 남편이었고, 아직 배우지도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숨도 쉬지 않고 끝까지 수영을 했답니다. 그리고 나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지금 나를 지켜보는 남편에게 잘 보이려고 수영하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에게 잘 보이려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답니다. 언제나 자신을 보고 계시는데, 하나님을 의식하는 순간에만 잘 보이려는 자신의 모습을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엇입니까? 한 번도 사랑의 눈길을 떼지 않고 우리를 바라보시는 그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기념비를 세워라!"
저는 목회를 하면서 교인들의 가정을 방문하면 꼭 읽어주고 싶은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7장 12절의 말씀입니다.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많은 사람이 역사의 한 사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승리의 순간을 자축하고 지나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돌을 하나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였다는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도록 말입니다. 누군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잊을까 봐, 후손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소망을 잃지 않도록 말입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기념비'가 아니라 그 기념비가 세워지기까지의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5월에 이성미 집사님이 간증을 할 때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지금 집사님의 아들이 신학을 하고, 착한 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 가운데 영적 싸움이 있었고, 그 순간에도 자신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인들을 보면서 늘 그런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축복의 열매를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참 많은 실망을 하겠다고 말입니다.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의 열매와 축복을 누리기까지 믿음의 사람들이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온 족적들인데 말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열심히 목회를 하면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하던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는데, 어려운 과정을 지나면서 수년에 걸쳐 공부를 마친 것이죠.
미국에 가서 학위를 받고 돌아오면서 자신에게 선물을 사줬답니다. 꽤 비싼 자전거를 사면서 "너 참 잘했다. 수고했다." 그렇게 칭찬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자전거가 그 목사님에게 기념비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학위를 마치게 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선하심을 바라보게 했을 것입니다.
긍정의 사람 조엘 오스틴은 [나를 응원하라!]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돌아보면 인생이 즐거워진다. 우리 삶은 하나님이 인도하실 뿐 우연은 애당초 없다.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즉시로 하나님의 손길에 감사하고, 수시로 그 일을 기억하라. 자녀를 태어나게 하신 날, 좋은 일자리를 주신 과정, 특별한 사람을 보내 주신 날, 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르게 하신 순간순간들. 돌이켜 보면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일일이 꼽아 보면 끝이 없을 정도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백하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나를 아는 지식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아시나요? 제가 언젠가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의 아들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에노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고서야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통하는 것이죠.
제가 좋아하는 찬양입니다.
"주의 사랑을, 주의 선하심을, 주의 은혜를 생각해 보라,
하늘보다 더 높은 아버지의 사랑 크고 놀랍네."
아주 좋은 예화가 있습니다.
레잇 앤더슨의 「Yes보다 더 좋은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기도는 언제나 믿음을 요구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며, 하나님의 들으심에 대한 믿음이며,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며,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이다.
다음은 루스 그레이엄의 이야기다.
우리 아들은 키가 작아서 차에 타면 운전대 너머 창밖은 볼 수 없었습니다.
“엄마, 빨리 달려요!”
빨리 달리기를 재촉하는 아들은 너무 어려서, 제한 속도가 60킬로미터라는 표지판을 볼 수도, 읽을 수도 없었던 거죠. 제가 브레이크를 밟자, 아들이 물었습니다.
“엄마, 왜 서요?”
그래서 제가 설명해 주었습니다.
“방금 앞에서 스쿨버스가 멈췄단다.”
저는 이 일을 통해 한 가지 분명한 사실, 아이고 모습이 제가 기도하는 모습과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영적으로 너무 어려서 표지판을 읽을 수 없고, 너무 작아서 앞을 내다볼 수도 없는데, 하나님이 일을 처리하시는 방식에 수없이 참견해 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어린아이 같은 믿음으로 다급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반드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루스 그레이엄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라고 요구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아시며,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 자신이 크기와 지식과 죄악 면에서 유한한 인간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착각합니다. 무엇이 사랑일까요? 결코, 우리의 만족을 채워주는 게 사랑이 아님을 압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방식이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만족하지 못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족하지 못한다 해도 여전히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2011년 4월 9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입니다. 제목 [친절이 애완견을 죽인다. 돼지 개의 다이어트]입니다. 고화질의 사진과 함께 실린 내용입니다.
'돼지 개' 캐시(Cassie)는 오늘도 바닥에 철퍼덕 엎어져 있다. 양떼를 모는 양치기 개로 유명한 보더콜리 종이지만, 캐시는 양을 몰기보다는 생선튀김을 먹는 것을 더 즐긴다.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건강하지 못한 식습관으로 같은 종류 견종들보다 세배 정도 살이 찐 58kg의 암컷 보더콜리가 '다이어트 전쟁'에 돌입한다고 보도했다.
7살 난 캐시는 지금껏 정상적인 개 사료를 먹어본 적이 없다. 대신 초콜릿, 사탕, 베이컨 등 사람이 먹는 달고 기름진 음식을 즐겨왔다. 캐시의 여성 주인은 캐시에게 '피시 앤 칩스 (생선과 감자튀김으로 이뤄진 영국 음식)'를 종종 대접한 것은 물론, 일요일에는 오븐 고기구이 정찬을 대접했다.
영국 케닐워스 동물 치료센터 직원 세 명은 걷는 것도 힘에 겨워 낑낑대는 이 '돼지 개'를 겨우 차에 옮겨 싣고 치료센터로 돌아왔다. 동물 치료센터에서는 표범만큼 무게가 나가는 캐시를 다이어트 시키는 데 적어도 1년 이상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치료센터 새드라 윌슨 매니저는 "애완견 주인들은 종종 자신의 개를 너무 사랑해서 자신이 먹는 것과 똑같은 사람 음식을 준다!"며 "불행하게도 이 같은 친절이 애완견을 죽일 수 있다!"고 말했다.
캐시가 지금과 같이 비만 상태로 방치될 경우 사람과 유사하게 심장병, 당뇨병, 관절염 등을 앓을 수 있다. 이에 이 치료센터에서는 캐시를 위해 개 사료로 구성된 다이어트 식단과 함께 정기적 산책 등과 같은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시행하기로 했다.
우선 직원들은 캐시를 데리고 3분간 산책하러 나가기부터 실행에 옮기고 있다. 캐시는 현재 산책 시간이 3분 이상을 넘어가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뚱뚱하다.
수의사 크리스 로렌스는 "캐시가 저 칼로리 개 사료를 먹는 등 현재의 식습관을 완전히 개선해야 살을 뺄 수 있을 것"이라며 "살을 빼고 나서도 캐시의 주인은 지속적으로 캐시의 식탐을 억누르고 건강한 체중을 유지토록 도와야 한다."고 했다.
우리의 주인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의 선하심이 우리의 삶에서 의미하는 실제적인 일들은 무엇인가?
신실하신 관계에 근거한 사명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관계가 있습니다. 오늘 분문은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 그분의 선하심이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인간은 신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진심만을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우리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관계가 형성된다면 어떨까요? 이 부분에서 여러분은 얼마나 자신이 있습니까? 사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보다는 그저 우리의 마음을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자신에 대하여 실망하게 할 때도 많습니다. 우리의 믿음으로는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느낄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께 손가락질할 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불공평해요!"
하지만, 그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삿대질을 보신 분이 아니시라 우리의 "갈망"을 보고 계셨죠. 때로는 무례한 시비에도 개의치 않고 우리를 깊이 만나주셨던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백하지 않으시나요?
진정한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의 원망과 투정을 모두 받아주시기는 하시지만, 결코 진리를 양보하시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저 묵묵히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길입니다.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치열한 믿음의 경주에서 끊임없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면서 종종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본래의 말씀보다는 부수적인 것들에 집중할 때가 많다는 것이지요.
흔히 빌립보서를 보면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에 주목하지, 사도 바울이 모든 것에 자족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후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간과합니다. 그에게서 능력의 하나님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선하심"을 고백하고 난 후에야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본다면, 말라기 3장 10절에서 십일조의 축복을 강조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십일조의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역시 간과한다는 사실입니다.
말라기 3장 15-17절을 보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시험하여 십일조의 축복을 누리라!"라는 것은 단순히 돈에 대한, 물질에 대한 축복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행위, 즉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의미합니다.
그 선하심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살아가고 고백하는데 당혹하게 하는 질문을 접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는데 왜 그렇게 어려운 일을 당하는 거야?"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것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의 정한 시간에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 합니다. 의인과 악인, 하나님을 잘 섬긴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구별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한 가지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이어집니다. 그 관계의 끈이 "사랑"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일, 실직의 아픔, 질병의 고통, 자녀의 방황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심 가운데 아름답게 만들어져가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양말의 겉과 속을 어떻게 구분하시나요? 옷의 겉과 속이 어떻게 다른가요? 속은 거칠고, 매듭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흔적이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매듭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완성됐을 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백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완벽함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 오셔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던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요? 두 번의 물음에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님이 원하셨던 대답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예,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여러 가지 해석들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세 번째 물음에서 주님이 만족하셨던 것, 그리고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맡기실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가 가졌던 믿음 때문이 아니라 "그의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에서 많은 실패 아니, 자신에 대한 실망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을 향한 마음, 그것만으로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쓰시기에 충분하다고 인정하신 것 같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goodness"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관계성"에 대한 것입니다.
참 좋은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용되기를 원하는 "사명감"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일 많이 듣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당신의 사명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이고, 우리 또한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기 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사명이라는 말이 우리를 참 무겁게 할 때가 많습니다. 사명이 기쁨이 되느냐 부담이 되느냐의 갈림길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아느냐의 "관계성"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기 위해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에 근거하지 않은 그 어떤 사명도 부담입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사랑에 근거한 사명은 기쁨입니다.
정철 선생님께서 아이들을 영어로 성경을 가르칩니다. "Who made World?"라는 프로그램인데요, 처음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God created us to love and to be loved!" "사랑"이란 단순한 행위의 동사가 아니라 그 행위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누림"입니다. 만일 사랑이 끝까지 동사로만 이해된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사랑은 행위가 목적이 아니라 그 행위로 말미암아 오는 누림입니다. 그럴 때 사명이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사명자로 살아가면서 가지는 또 하나의 부담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서 있는 것이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축복이 왠지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것 또한 잘못된 관계 정립에서 비롯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꼭 가난한 삶을 의미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가벼운 삶"을 살 필요는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30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올바른 관계성에서 이해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자"의 마땅한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우세요? 그렇다면, 진정한 사랑의 관계 속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입양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는 자식이라고 인정하는데 그 자식이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입니다.
"오해"가 무엇입니까?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 어머니가 개를 한 마리 키웁니다. 이름이 "흰둥이"입니다. 왜 이름이 그런지는 상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 개에게도 상처가 있습니다. 태어난 지 3년이 되었는데 한번 주인의 사정으로 버림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때로는 눈치를 보기도 합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받지 못하고, 또 버림받을까 봐 경계하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이놈이 대소변을 잘 가리지 못하면 벌을 받습니다. 가장 무서운 벌이 문밖에 세워놓는 것입니다. 벌벌 떨면서 밖에 서 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요. 버림받은 상처가 있다는 것을.
자녀들에게 벌을 줄 때, 친자식에게 "나가!"라는 말과 버림받은 상처가 있는 자식에게 하는 말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는 왜 혼날 때 옷을 벗겨서 밖에 세워놨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혼내는 부모도 그 자식이 진짜 나갈까 봐 두려워해서 그랬는지? 어쨌거나 밖에 세워놓고 혼을 낸다고, 집을 나가는 자식이 자식이겠습니까?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그렇게 혼났던 기억이 상처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고, 그것이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딱 하나입니다. 부모와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때는 상처였지만, 지금 사랑으로 느껴집니다.
우리가 철이 없어 모르던 때, 매를 들면서 "너를 사랑해서 때리는 거야!"라고 말씀하셨던 부모님의 기억.
저는 어렸을 때 혼나고 나면 꼭 위로해 주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희 형이 언젠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합니다. 6살 때, 아버지가 회초리를 들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 때리는데 얼마나 아픈지 막 도망갔답니다. 그런데 그 어린 아들을 쫓아오면서 때리던 아버지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잔인한 아버지의 모습, 가련한 아들의 모습입니까?
그런데 우리 식구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장남을 향한 아버지의 특별한 기대와 사랑이었다는 것을.
저는 그렇게 맞아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착해서가 아니라 어린 시절 형처럼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죠, 저의 삶에서 형처럼 모두 간섭하지 않으셨던 것이죠.
우리가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 관계성이 고백됩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백합니다.
다른 누가 보는 나의 모습이 아니라 내가 경험하고, 내가 느끼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백할 뿐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아니, 사랑하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압니다. 그래서 좋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에서 떠오르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나타납니다. 그 사랑이 누군가를 향해 나타날 때,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순간, 그런 사랑을 받고, 그런 사랑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좋은 그리스도인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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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